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3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54

갈라디아서 제 23강 (이 근호목사, 2007년 7월 13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5:7부터 보겠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이라는 산 위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나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자기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말씀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돌판, 이것이 십계명인데, 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냥 가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대로 이 땅에 펼치시는 거예요.

집에 혹시 할아버지가 계십니까? 그 할아버지가 그냥 돌부처처럼 가만히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든가요? 아니면 이것 시키고 저것 시키고 자꾸 시키시는 할아버지든가요? 자꾸 시키지요. 물 가져와, 밥 가져와, 자꾸 이렇게 시킵니다. 하나님도 그냥 계신 것이 아니고 자꾸 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 시키고 명령을 하는데 그것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이야기 하고 그 말씀을 이 땅에 성취를 하시는데, 말씀대로 못사는 사람한테는 저주하시고(지옥 보내심) 말씀에 의해서 용서받은 사람은 천국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말씀이 있고, 말씀이 실천되면 저주가 되고 용서가 되고 이렇게 두 쪽으로 나뉘는데, 그러면 저주와 용서는 거꾸로 어디에 포함되겠습니까? 이 말씀 안에 포함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저주도 들어 있고 용서도 들어 있습니다. 이 용서하심을 축복이라,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저주도 들어 있고 축복도 들어 있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고, 반대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말씀 안에 이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 안 지키는 사람한테는 저주하고, 지키는 사람에게는 축복하는 이것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잘 알았는지를 제가 묻겠습니다.

질문 1)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기만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무엇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무엇이 나옵니까? 답)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씀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서 무엇과 무엇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고, 또 그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은 반드시 두 부류로 나눠 집니다.

한쪽은 저주받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한쪽은 용서받은 사람이 있겠지요. 용서받은 그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천국가고 용서를 받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저주가 임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용서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용서 받았지요? 용서 받기 싫어요?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하면 “싫어요. 용서 안 받을래요”하고 도망치렵니까? 아니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 됩니까?

어린이 여러분들이 부모님이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하면 “고맙습니다”하고 받아들여야지, “나, 용서 안 받을거야. 도망쳐 버릴거야”라고 하면 부모님에게 매를 많이 맞겠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일단 다 용서받은 사람들이라고 치고, 용서받은 사람은 어째서 저 사람은 저주를 받고, 어째서 나는 용서를 받았는지, 이 말씀 속에 어디에서 용서가 나오는지가 궁금할까요, 궁금하지 않을까요? 궁금하겠지요?

예를 들면 이게 만약 귀한 병인데 여러분이 실수를 해서 이걸 깨버렸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오셔서, “이 병 누가 깼어?” “제가 깼어요.” “그래,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러면 ‘이상하다. 이것을 깼으면 어머니께서 나를 나무래야 되는데?’ 그것을 나무라지 않고 용서를 해주시니 밤에 어머니에게 가서 “어머니, 이야기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 오너라. 무슨 이야기를 할거냐?” “분명히 제가 낮에 귀한 병을 깼는데 왜 나무라지 않고 저를 용서해주는 겁니까? 그것이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여쭈어보려고 왔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열 명을 고쳐줬는데 그중에 아홉 명은 신난다고 하면서 다 제 갈 길로 갔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도로 돌아왔습니다.(눅 17:11-19) “아저씨는 왜 돌아왔습니까?”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저주(문둥병)받아 마땅한 사람인 것을 알겠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저를 용서해 주십니까?” 이렇게 도로 다시 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굉장히 많아요. 목사님이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두 번 다시 교회 안 나와요. 왜 교회 안 나옵니까? “용서 받았는데요. 뭐. 용서 받았는데 교회를 또 왜 나옵니까?” 이래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용서를 받았으면, 말씀에 의해서 ‘어떻게 어떻게 나같은 인간이 죄에서 용서를 받습니까’, 그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또다시 깊이 알고,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진짜로 용서받은 사람 티가 나는 것인데, 용서 받았다고 해놓고는 얼굴도 안보이고, 바쁘다고만 하고, 두 번 다시 교회를 안 나오니, 대체 당신이 용서받은 것이 맞느냐고 묻고 싶다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살짝 이용하려 드는 것이지 그게 용서받은 것이 맞습니까? 만약에 어린이 여러분들이 낮에 귀한 병을 깼다고 할 때, 어머니가 용서해줬다고 하거든요. 그 때 ‘야, 어머니가 이 귀한 병을 깨도 용서를 해 주시는구나. 이제부터는 내가 그릇을 깨뜨려야지. 그릇 깨뜨려도 용서해주는구나. 이번에는 뭘 깨볼까? 냄비를 깨 볼까? 이것도 용서받고.’ 이렇게 한다면 그 애는 정말 용서 받은 애가 맞아요, 안 맞아요? 아주 나쁜 아이지요?

그런데 이런 귀한 병을 깨뜨려도 용서를 해줄 때, “어머니, 왜 저 같은 인간을 용서해주십니까? 그 사연이 참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서 용서받지 못할 내가 이렇게 용서를 받습니까”라고 물어야 이게 용서받은 어린이답다는 말입니다. 어린이들은 잘 찾아와서 묻는데 어른들이 주로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주 무척 섭섭해 하십니다.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님께 되돌아오는 사람이 없어요. 왜 없는가? 바쁘대요. 참 바쁘답니다. 그 사람들이 바쁜 일은 뭐냐 하면, 용서하고 상관없는 일에 바빠요. 용서가 안 되는 일에 죽자하고 바쁘고, 용서에 관한 것은 뒷전이고. 거 참! 마치 몸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그러면 병원에 가야 될 텐데 죽을병에 걸려놓고 병원에 가는 것은 뒷전이고 죽을병에 걸린 자기 몸을 가지고 즐기는 데는 앞장서고, 참 그것을 보면 세상이 참 더럽다는 것, 참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전했건만 용서를 전하는 사람이 천대받는, 무시당하는 그러한 서러움을 복음 아는 목사님들은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어린이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그냥 가만 계시지 않고 말씀을 주시는데, 말씀이 둘로 나눠지면 저주받는 것과 용서받는 것으로 나눠지는데, 어떻게 말씀 안에 저주도 들어 있고 용서도 들어 있는지, 내가 용서받은 것이 말씀안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용서를 받았는지, 여기에 대해서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제대로 성경말씀을 못 지키는 우리에게 용서가 주어졌는가, 그 내막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살펴봐야 됩니다. 우선 용서를 받을 때, 용서받은 사람들 가운데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용서 받을만한 이유가 나에게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용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용서받을만한 이유가 나에게 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인하여 나는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어린이가 낮에 이걸(비타 500) 탁, 깼어요. 저녁에 어머니가 용서해줬어요. 그러니까 어린이가 이것을 잘못 생각해서 ‘아, 내가 이번에 학기말 시험을 너무 너무 잘 쳤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생각하기를, 내가 너무 똑똑하니까 이까짓 거 깨도 용서해준다고 한 것이구나. 역시 나는 용서받을만한 대단한 사람이야. 용서 받을만하지’라고 자기한테 용서 받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어때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사람 되고 싶습니까?

두 번째 반응은, 용서받을만한 이유가 나에게 없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 거저 용서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없는데 나에게 용서가 주어졌다’고 용서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다. 내가 용서받을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훌륭한 일을 한 적도 없는데 내가 용서를 받다니….’ 이렇게 용서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옛날에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맞습니다’라는 표시를 사람의 몸에 새긴 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마치 명찰 붙이듯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 당시에 할례받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는 것은 나에게’ 뭐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까? ‘할례라는 그 흔적, 할례의 표시가 있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할례의 표시라는 것은, 할례는 율법이거든요, 하나의법(율법)에 포함되는데, ‘하나님의 법대로 지킨 것이 나에게 하나라도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은 못 지켜도 율법의 하나인 할례라는 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 법 지킨 것 때문에 나는 용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어린이가 낮에 비타 500을 깼는데, 저녁에 어머니가 용서해줬어요. 그러니까 그 애가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뭐가 잘나서 이렇게 그런 엄청난 죄를 지었는데도 용서를 받았을까? 한번 보자. 국어 빵점, 수학 빵점, 음악 빵점, 미술 빵점, 이해할 수가 없네. 체육 20점, 그렇다! 나에게는 체육, 축구를 잘해서 체육 20점짜리가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 나를 용서했구나’하면서 기어이 하나를 찾아냈어요.

‘내가 똑똑해. 체육 잘하는 것(잘하기는 뭘 잘합니까? 20점인데), 다른 것은 다 빵점인데 20점이면 어디인가, 그것을 보시고 역시 하나님은 내 주특기 하나를 살렸구나.’ 이렇게 그것 때문에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참 바보 같은 어린이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했다면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무이자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어요. 우리에게는 아무 이유를 찾지를 않습니다.

이유 없이 용서를 받아놓고는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어떤 면이 잘나서 용서를 받았는지’ 스스로 자기를 탐색하고 자기를 점검해서 자기 잘난 과거, 현재, 미래까지를 장부 들추듯이 다 들추어서, ‘내가 세살 때 무슨 짓을 했나, 일곱 살 때 뭘 했지’를 다 뒤적거리면서 그중에서 착한 일을 끄집어내서 ‘역시 이러니 하나님은 나를 용서할 만하지’라고 자꾸 자기 자랑을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잘 되었다고 치고 여기서부터는 약간씩 어렵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할례를 지켜서 그래서 용서받을만한 이유가 나에게 있다’라고 우기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지우지를 못했는가 하면, ‘나에게’라는 이것을 지우지를 못했어요. 용서받을 이유를 나에게서 찾습니까, 나의 바깥에서 찾습니까? 자기에서서, 나에게서 찾는 거예요. 나,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찾는 거예요.

“아저씨, 구원받았어요?”
“구원받았지요.”
“누가 잘해서 구원받았어요?”
“내가 잘해서(체육 20점, 역시 나는 체육 하나는 잘해) 구원받았어요.”

이렇게 자기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까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자기가 구원되는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았습니다. 찾았는데 끄집어 내 보니까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 지키기 경연대회’에서 일등한 사람입니다. ‘성경대로 살기 추진 위원장’, ‘성경 다 지키기 재개발 위원장’입니다. 이 땅에서 ‘의인중의 의인’이고 ‘완벽한 사람 중의 완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데 최고 1등 고수입니다(빌 3:4-6).

그 당시에 말씀을 전문적으로 열심히 지키는 단체가 바리새인들인데 그것을 예수님도 인정해 줬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천국에 못 간다’(마 5:20)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도 못가지만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천국에 못가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됩니다. 말씀을 못 지킵니다.

그 정도로 바리새인은 말씀 지키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수준이 좀 높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 중에서도 최고의 바리새인이 누구냐? 누구입니까? 이 갈라디아서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시는 누구? 사도바울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받고 구원받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말씀을 내가 지켜서 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용서 자리에 누가 있다는 말이죠?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최고의 고수, 말씀 지키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어요. 제일 훌륭한 ‘나’라고, 그렇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보니까, 지옥 갈 나는 당연히 아니고 천국도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된다고 여기던 그 ‘나’가 어디에 포함됩니까? ‘나는 죄인 중에서도 최고 고수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라고 여기는 내가 바로, 그런 잘못된 사고방식이 지옥 갈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는 겁니다.

지옥 갈 사람들은 한결같아요. 지옥 갈 사람들은 이 생각밖에 못해요. ‘말씀은 내가 지켜서 지킨 내가 구원 받는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바로 죄인중에 괴수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아! 네가 고생이 많다. 네가 나의 뜻을 대적하려고 그렇게도 애썼는데….”

그러면 이 자리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사도바울이 있으면 안되고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5:6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뭐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용서가 나오고 그 용서를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가 앞에 있는 여학생을 사랑한다면 그 여학생이,

“목사님이 뭔데 저를 사랑합니까?”
“아무 이유 없어. 그냥 내가 준 사랑을 받아라.”

그러면 끝난 거예요. 그냥 받고 ‘고맙습니다’하면 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이유를 찾지 않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아무런 이유를 찾지 않는 거예요. 그게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충분하냐 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번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에 욥기를 강해하는데, 욥기의 내용을 미리 맛보기로 알려드립니다. 그 주제는 ‘내기’입니다. 내기하는 거예요.

누구와 누구의 내기인가? 하나님과 악마와 내기를 합니다. 그 내기에 욥이건 뭐건 사람은 빠집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인데 사탄이 말합니다. “사람이 믿음이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겁니다.” 마귀가 확신 있게 이야기 합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인데 여러분도 거기에 동의하십니까? 믿음은 인간의 신념이고 그 신념에서 나온 것이 믿음이라고 보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내가 그 사람에게 준 선물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고 싶습니까? 그러면 앞으로 진짜 선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기 한번 나 보시렵니까? 가족 다 죽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날아가고, 그렇게 한번 해 보실래요?

사탄이 말합니다. “욥이 아무 보상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뭔가 받아 챙긴 것이(받아 챙긴다는 말은 어감이 좋은데 사탄식으로 하면 뭔가 받아 처먹은 것이 있다는 것) 있으니까 사랑하지 아무것도 없는데 사랑할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 회수해 가보세요, 그래도 사랑하는지. 마귀는 자신만만합니다. 어떤 인간도 그것을 이겨낼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귀는 예수님을 상대로까지 내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과 상대를 했다는 말은 오늘날 누구하고 상대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를 상대로 또 내기를 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좋다. 네 마음대로 해봐라. 목숨만 놔두고 맘대로 해봐라”해서 처음에는 욥의 자식이 다 죽고 재산도 다 날아가게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마귀로 하여금 힘껏 욥을 다뤄보라고 마귀에게 맡겨주니까 마귀가 욥을 엉망진창으로, 아주 처참하게 만들었어요.

믿음이라는 것이 내가 사랑받을 만 해서 사랑했다는 믿음이라면, 만약에 욥같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삐질 거예요. “내가 이런 이유가 있는데도 사랑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나오면 내가 사랑을 거두지요. 내가 미쳤다고 사랑합니까? 사랑해도 이런 수모를 당하는데 내가 뭐 하러 사랑 합니까”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진짜 사랑을 받아보면 처음부터 원래부터 사랑은 받을 자격도 없었고, 처음부터 사랑 안 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어려움을 줘도 ‘맞습니다. 상관 없습니다’하고 변함없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강의가 좀 어렵습니다.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이야기해야 되기 때문에 좀 어렵습니다. 먼저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계신 것이 아니고 반드시 무엇을 내어놓게 되어 있다? 말씀을 내어놓게 되어 있다. 그 말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옵니까? 한쪽은 저주, 한쪽은 축복이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쪽에 저주가 임하고 한쪽은 용서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최종결과입니다. 이런 말씀의 자리에 갈라디아서 5:6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자기가 지킨다고 나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뭘 내세웠습니까? 할례를 내세웠습니다. 할례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내가 말씀지켰다는 그 흔적을 내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 할례를 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날 버리면 안 되고, 만일에 말씀대로 지킨 나를 버린다면 그것은 참 섭섭한 일이다’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게 할례를 쥐고 할례 받았다고 그것이 용서받은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빵점이면서 체육 20점 맞았다고 뻐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최고의 사람이 누구였다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기에 최고로 천국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이 뭘 주장합니까? ‘말씀을 내가 지켰다’고 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나,나,나,나,나)가 나오지요.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이 ‘나’라는 인간이 어디에 속했다는 말입니까? 저주받을 죄인중에 속한 겁니다. 내가 용서받을 만한 짓을 해서 용서받았다는 그것이 저주받을 짓입니다.

성전에서 서서 둘이 기도하는데(눅 18:9-14) 한쪽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또 다른 한쪽은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바로 지옥 갈 놈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구원받을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말씀을 지키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6에 보니까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예수 안에서” 용서가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진짜 용서를 받은 사람은 ‘나, 용서 받았다’고 두 번 다시 교회 안 나오고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용서가 왔습니까’라고, 날 용서하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지 않고 더욱더 말씀을 깊이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님께 다시 돌아온 사람은 몇 명입니까?(눅 17:11-19) 아홉 명? 아니죠. 일곱 명? 아니죠. 몇 명입니까? 단 한명입니다. 단 한명이 돌아왔는데 왜 돌아왔습니까? “예수님 왜 저를 용서해주십니까?” 여러분들도 예수 믿고 난 뒤에 이런 물음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 보셨지요? “예수님, 왜 피까지 흘려가면서 저를 용서했습니까? 저는 용서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왜 저를 용서하시는 것입니까? 진정 이것이 현실입니까? 실제상황입니까? 그냥 성경에서 농담하는 식으로 던져 보는 말입니까? 이게 만약 실제라면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라고 이야기하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 반대로 이야기를 해야 사랑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나와줘야 그 사람이 진짜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인들 가운데 한명이라도 나타나면 그 교회가 진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목사 포함해서 두 명이니까요. 예수님이 “두 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마 18:20)고 했습니다.

그런 교인이 한명 있으면 그 교회는 아주 큰 교회입니다. 딱 두 명 이지만. 용서가 크다는 말입니다. 용서받은 그 사랑이 크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개개인의 특성이 묵살된다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잘 먹고 죽은 시체는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시체 색깔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체는 그냥 시체지요. 죽은 사람은 죽었다는 그 사실만 중요하지, 그 사람이 키가 몇 센티인지 그 사람이 잘났는지 그런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아무 뜻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는 ‘나는 이래서 용서 받을만하지. 이러니까 나를 용서 안하고는 못 배기지’ 라는 것이 모조리 다 묵살 당하고 거절당합니다. “저리 가! 내 앞에서 시합하고 경쟁하지 마라.” 여기서 잠깐 고린도전서 1장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아” 이렇게 불러 놓고,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너, 너, 너, 불렀어. 나와!” 이렇게 되거든요. 용서가 뭡니까? 사랑이죠. 예수님이 “너, 너, 너 사랑했어! 너는 빠져. 너는 사랑 안했어. 너는 사랑 안했으니까 빠지고 너는 사랑했으니까 나와!” 하고 불러줬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거든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게 한 자를 영화롭게 하기 때문에 불러주는데, 그렇게 불러 줄 때,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혹시 여기 I.Q 160 되는 분이 계십니까? 이런 소리 하면 참 건방진 소리고 실례가 됩니만 혹시 그런 분이 계십니까? 참 대단하십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요새 말로 하면 돈 되는 사람 누굽니까? 의존교회 돈 되는 사람 있습니까? 재벌 2세가 있어요? 자칭 좀 산다는 분 있습니까? 한달 수입 한 1억 되는 분 있습니까?

주님께서 참 공평하십니다. 1억도 못되는 주제에 천국을 가다니. 초등학교도 안 나오고 천국을 가고요. 출세 못해도 천국가고요. 이게 부르심의 효과입니다. 불러주는 낚싯대가 당기는데, 낚싯대가 중요하지 거기에 물리는 고기가 어떤 종류냐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새우가 걸리든 고래가 걸리든 갈치가 걸리든 통발그물에 잘 잡히는 오징어가 걸리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걸어 주셨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끝에 보면 이 사람들은 누구만 자랑합니까? 31절에 보면 자랑하는데 어디서 자랑합니까? “주 안에서.” 바로 이 말씀의 완성자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빼놓고 저 맞은편에는 인간이 있고, ‘나’를 인정해 달라고 외치고 고함치고 시위하고 있는, ‘나’를 인정해달라는 사람이 있고, 이쪽에는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이쪽이 예수 안에서의 구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무엇을 생각 안한다? ‘저는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니올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율법으로 구원 안받고 무엇으로 구원받는가?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지금부터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를 말씀드릴텐데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의 전체를 이야기하면, ‘이유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지 율법을 내가 지켜서 지킨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뭘 지웁니까? 용서받을만한 이유가 나에게 있다, 여기서 ‘나에게’를 지우는 것이 사랑의 특징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나는 사랑받을 이유가 없는데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란 가수가 있는데 그가 부른 노래중에 "Why me?"라는 노래가 있어요. 음성을 저음으로 착, 깔아서 부른 노래가 있어요.

그 가사 내용이 뭐냐하면, “왜 나를(마약이나 좋아하는 나를, 이 못된 나를) 구원했습니까?”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엉망으로 살았던 나를 왜 주님은 사랑했습니까?”라고 고백하는 노래가 "Why me?"라는 노래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공격이 뭐냐? 사랑이 와서 ‘나’를 공격합니다. 사랑이 오면 ‘나’는 지워지고 사랑이 떠나가면 ‘나’는 발생되고 부각되고 뿅, 하고 떠오르게 됩니다. ‘나’생각을 하면 사랑 떠난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 생각이 안 나면 사랑이 임한 줄 알아야 되죠. 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 때 아, 사랑이 임하게 만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이 임하게 되면 내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나’가 나쁜 것이 아니고 내 생각 자체가 나쁩니다.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내가 성공할까, 실패할까?’라고 내 생각에 몰두한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될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에 나에게 능력으로 임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사랑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사랑은 무엇을 없앤다고 했습니까? 사랑은 나를 없앱니다. 그러면 사랑을 받는 사람이 나를 없애면 남는 것이 뭘까요? 남이 남지요. 바로 남을 위해 사는 것, 이것이 사랑이 들이닥친 결과입니다. 남을 위해 살면 거기에 무엇이 빠져버립니까? ‘나를 위해 산다’가 빠져버리죠. 그러면 그것이 행복합니까. 행복하지 않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내생각 안하고 사는 것이 행복합니까, 행복 안합니까? 행복하죠. 글쎄 그러니까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니까요!! 어린이들은 참 이해하기 어렵겠는데요. 갓난애가 엄마 젖을 먹으려고 할 때, 엄마는 호되게 나무라죠. “너는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아라!” 이게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어린애들은 본능이 있기 때문에 본능대로 움직이고 아직까지 이성이 잘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전두엽이라는 대뇌피질에서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의 흔적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어린애들은 그것이 잘 발달이 안 된 상태라고 봅니다. 만약에 평생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교회도 안다니는 사람이, 돈만 챙기고 돈만 사랑하는 이런 사람을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당신은 남을 위해 살아!”라고 할 때 그 사람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지요. 그러니 그 사람은 완전히 무엇과 같습니까? 어린애와 같은 겁니다. 그동안 인생 헛살았습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긁어모으고 또 모아도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니까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밖에 없어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면 누가 그토록 자기를 괴롭히냐 하면 내가 나를 괴롭혀요. 예를 들면, 열 명된 교회의 목사님이 기도를 합니다. “주여, 교인 50명만 되면 제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50명이 되었어요. “주님, 100명만 되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100명이 되었어요. 그 다음에 “주님, 200명만 되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200명이 되었어요. “500명이 되어야 교회라고 할 건데요.” 그 다음은 “적어도 1000명은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은 “5000명 되어야 내가 이 바닥에서 유지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동네 말고 경기도, 서울전체바닥에서 행세하려면 20000명은 되어야 될것 아닙니까?”

누가 나를 괴롭힙니까? 이미 50명 되어버린, 100명 되어버린, 200명 되어버린 그 ‘나’가 나를 괴롭힙니다. 200명 되었다. ‘너, 뭐해? 500명 안 만들고 뭐해? 500명은 되어야지.’ 내가 나를 괴롭혀요. 이것은 부모가 애들 성적 안 오를 때 닦달 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은 당근 한쪽은 채찍을 들고 말하기를 “너 성적 올려야 돼!” 심지어 요즘 추세는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여름캠프는 부모가 안 보냅니다. 그 시간에 50만원, 70만원짜리 영어캠프가 실시되기 때문입니다.

방학이 끝나고 난 되에 부쩍 내 자식의 영어가 향상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그것 때문에 성경 가르치는 그 모임에 참석을 안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제가 의존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왜? 70만원짜리 영어캠프 보낼 부모들이 안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뭘 뜻합니까? 인간의 욕심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영어 하고 나면 다른 것 또 해야 됩니다. 백날 그렇게 수십 년 살아 봐야 어린애의 수준을 못 벗어나는 겁니다. 왜?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쉽게 생각해 봅시다. 제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여기 있는 비타 500에게 묻습니다.

“비타 500아! 너는 너를 위해 사는 것이 힘드나, 힘이 안 드나?”

그러니까 비타 500이 하는 말이,
“힘들어 죽겠어요.”
“그렇구나. 그러면 만일에 어떤 사람이 너를 대신 살아주면 어때?”
“좋지요. 행복하지요.”
“그래? 너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행복하지?”
“행복하고말고요.”
“그렇다면 내가 다시 질문한다. 남을 위해 한번 살아볼래?”
“싫어요!”
“왜?”
“나 살기도 바쁜데 남는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남까지 도와줍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아니 아까와 같은 질문을 했는데 같은 질문을 다르게 이해하는구나.”

지금 여러분도 이해가 안 되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그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지금 남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단 나를 위해서 살 필요가 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이것이 신난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목표로, 내가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그런 목표가 상실되었다는 자체가 홀가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은 누군데요? ‘자기 빼놓고 다 남입니다. 제가 무슨 죄지은 느낌이 듭니다. 너무 무거운 주제를 드려서 분위기 썰렁해지면서 제가 죄지은 느낌이 드는데요.

다시 이야기 할게요. 남을 위해 산다는 말에서 자꾸 이웃이 누구냐, 내 집에서 몇 집 건너까지 이웃이냐는 식으로 이웃을 따지고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웃이 누구인데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아, 이제 나를 위해 살 필요가 없구나’하고 기뻐해야 할 것을 가지고 근심을 가득, 어두운 그림자가 끼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날 위해서도 살아야 되고 거기서 남는 것으로 이웃까지 사랑해야 되고 삼중고를 겪는군요. 그러면 도대체 이웃이 누굽니까?”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를 들었습니다(눅 11:25-37). 어떤 사람이 강도만나서 길에 쓰러져 있을 때 첫 번째는 제사장이 와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자기 일에 바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레위인이 지나갔는데도 그냥 지나갔지요. 왜? 자기가 펄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일이 없어요. 얼마나 할일이 없으면 강도를 살려서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서 여관까지 모셔서, 여관비와 돌봐주는 값이 모자라면 나중에 자기가 다 값아 주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내가 여관 주인 같으면, “저, 아저씨! 아저씨는 할일이 없는 사람이오? 귀찮은 일에 평생을 바칠 겁니까? 가시던 길이나 그만 가세요. 그만 하면 되었으니까 갈길 가세요.” 이럴 수도 있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관심사가 자기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강도만난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지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산다는 말이죠.

그럴 때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강도 만났는데 자기 힘으로 일어설 것 같으면 누가 도울 필요도 없잖아요.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었다는 말은 바로 우리들이 강도만난 사람같이 그냥 죽게 된 거예요. 이제는 내 힘으로 일어날 기력도 없어요. 그때 이웃은 누구입니까? 자기 힘으로 용서받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는 설수 없는 그런 완전히 망가진 인간을 무조건 자기생각 안하고, 무조건 내 생각만 해서 자기 것을 전부 다 투자해서 나를 살리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잖아요.

그렇게 할 때 그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겁니다. 어려운데 좀 쉬고 계속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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