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5강 (이근호목사, 2006년 9월 8일(1), 서울의존교회)
녹취 오용익목사 2007-07-12 12:38:06
지난 강의가 7월에 있었으니까, 그 뒤로 두 달이 흘러갔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들은 내용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겁니다. 다 잊으셨을 것인데 그러나 성경은 복음이기 때문에 지난것, 80점을 맞든 몇점을 맞았든(참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설사 지난 것들이 0점, 0점, 0점 이렇게 지내 왔더라도, 오늘 이 순간 또 이 성경이 믿어지면 100점이 되는 거예요.
참,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지나간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라는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오늘 강의 중에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지나간 것은 제발 잊어줘. 과거에 어떻게 살아든.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죠?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벌써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후 수 십년이 흐른 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지난시간에 0점을 맞았든 행동을 어떻게 했든지 간에 여전히 구원은 십자가만으로 종결되는 거예요. 십자가만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림으로 설명 드립니다. 여기 해가 있습니다. 이 밑에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지구에서 태양을 향하여 5km를 나가 있든, ‘여기서 더 나가보자’ 해서 10km를 더 왔든, ‘더 나가볼까?’ 해서 15km를 이동해도 그 장소와 상관없이 해 아래서는 어디서도 동일한 태양 맞지요? 십자가의 효과는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과거에 어떻게 살든지 간에 또 미래에 어떻게 살든지 간에 똑같은 태양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네 눈앞에 있거늘, 십자가가 네 위에 있거늘 구원문제에 대해서, 영생문제에 대해서 왜 그리 네가 쓸데없이 고민을 하느냐’ 말이죠. ‘내가 몇km 왔다. 후퇴했다. 전진했다. 인간성이 나아졌다’ 그런 것들은 십자가 앞에서 전혀 유효하지를 않아요.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은 아니고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예수 믿고 난 뒤에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이렇게 지적해서 물으면 그 분이 대답하기를 “처음에는 함부로 죄를 짓다가 차츰 차츰 함부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라고 그렇게 답변을 했다 이 말이죠.
자, 우리 어린이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듭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 보셨지요? 바닷가에 가보면 해변에 쓰레기 많지요? 청소부가 그 쓰레기를 치웁니다. 쓰레기 중에는 큰 덩어리도 있고 작은 덩어리도 있어요.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우면서 하는 말이 “쓰레기를 치워야지. 큰 덩어리를 치워야지.” 큰 덩어리를 치우고 나니까 이제 남은 것은 뭐밖에 없어요? “이젠 작은 덩어리만 남았다. 이것만 치우면 바닷가는 깨끗한 바닷가가 된다”라고 여기고 청소를 했어요.
그래서 대충 ‘야 이 바닷가는 이제 누가 와서 봐도 괜찮을 만큼 깨끗하다’고 했는데, 조금 더 바닷가에서 바다 쪽으로 나가보니까 거기에 그전에 본 것보다 더 큰 덩치의 쓰레기 덩어리가 밀려서 자기 앞에 올 때에 과연 이것을 자기가 깨끗하게 청소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청소했다고 볼 수 없지요?
자기가 20살-30살까지 사는 동안 지은 죄를 큰 것은 큰 것대로 회개하고, 잔챙이들은 잔챙이대로 따로 모아서 주 앞에 회개했다 이 말이죠. 그래놓고는 하는 말이 자 이정도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니 앞으로 내 마음은 점차로 이제는 죄 안 짓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는데, 드디어 30살이 넘어가서 40대가 되어서, 전에 20대 때나 30대 때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죄를 지었을 때에 과연 그 사람이 죄를 다 청소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앞으로 자기가 살면서 어떤 죄를 지을지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느냐’ 이말 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야 주웠지만 그 사람이 70이 되고, 80이 될 때 무슨 죄를 지을지 누가 장담합니까? 자기 미래를 누가 알아요? 모르지요. ‘이런 잔챙이 같은 작은 죄도 해결했으니까 이제는 자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죄가 와도 죄를 안 지을 자신 있다. 그렇게 차츰, 점차로, 함부로, 죄를 안 짓는다고 여겼는데.’
여러분! 죄라는 것은 함부로 지어서 죄가 아니라(참, 초등학생들 앞에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는 게 죄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죄에요. 애들은 지금 무슨 말인지 잘 몰라요. 지금 어린이들이 적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죄라고.’ 한 50년 살아봐야 나중에 알지요. 사람이 아무 짓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죄인입니다. 죄인이에요.
꼭 구태여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산다는 게 남에게 부담주고 하나님께 원망 돌리고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수시로 불평이 나오고, ‘아이고 인간아! 내가 왜 살아서 이 고생을 하나!’ 아무 생각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 자체가 자기에게나 누구한테도 짐이 되는 죄인인 것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 맷돌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린이들! 맷돌 알아요? 콩갈 때 쓰는 것.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윗돌이 있고 똑같이 생긴 아랫돌이 있어서 콩이나 뭘 넣고 돌리면 그것이 부서져서 옆으로 나오는 거예요. 콩 넣고 갈면 콩가루 나오고, 녹두를 넣으면 녹두가루 나오고요. 이게 맷돌입니다.
맷돌하면 떠오르는 이야기 있잖아요. 바다가 짠 이유가 뭡니까? 지금도 바다 깊숙한 곳에 맷돌이 있는데 그 맷돌에서 소금이 막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바다가 짜다는 그런 동화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맷돌을 건지를 못해서 계속 소금이 나오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가만있어도 숨만 쉬어도 거기서 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잠을 자도 꿈속에서 죄를 짓도록 되어 있고, 밥을 먹어도 더 나은 반찬을 원하면서 투정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밥을 먹어도 죄가 나오고. 그냥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죄인데 거기에 구태여 더 죄를 지어서 죄인 되는 그런 것이 없어요. 가만있어도 죄가 되는 거예요. 동시에 가만있어도 그게 하나님의 은혜고.
그러니까 앞으로 저 수평선 너머에서 무슨 사건이 자기에게 다가올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만약에 부모가 딸에게 “얘! 딸아! 내가 너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를 버리지 않으마”라고 장담했는데, 5년 뒤에 큰 전쟁이 일어나서 “딸아! 미안하다. 나 혼자라도 살아야겠다”라고 하면서 도망칠 수 있잖아요. 맹세를 해도 막상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예를 들어 부도가 나서 사업이 망했다든지 하면 미안하다고 하면서 혼자 도망치는 일이 있을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절대로 장담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맹세해서 지키든 안지키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은 다른 길을 통해서 구원해줍니다. 그 길이 뭐냐? 십자가의 효력으로 구원하는 그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는 길이 두 가지 있지요? 율법으로는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의 입을 아예 테이프로 이렇게 칭칭 감아 버렸어요. 이게 율법이에요. 입을 막고, 그 위에 하나님의 뭐가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저주,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이 표현 좋습니다. 입을 틀어막고), 그 위에는 저주와 심판아래 두기 위해서 율법이 있어요.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그 입을 틀어막은 테이프를 떼어서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틀어막아 버리면 어떤 사람도 그것을 떼고 입 열어서 ‘나, 잘났습니다’ 할 사람은 없다 이 말이죠. 그 입을 틀어막아 버렸는데.
또 다른 법이 있어요. 입을 틀어막았으니까 이 사람은 말도 못하지요? “우우~!” 그냥 이러고 있지요? 이렇게 된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용서를 해 줌으로서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이 사람은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이 사람은 구원받게 됩니다. 세 번째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입이 틀어 막힌 채로 구원 받습니다.
만약에 입을 안틀어 막은 상태에서 구원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역시 나는 구원받을 자격자가 돼.’ 이렇게 나오거든요. 예수님의 피를 앞장세우기 위해서는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계속해서 입이 틀어 막혀 있어야 돼요. ‘나는 성경말씀 이거 한 두 세 가지는 지켰어.’ 이러면 안돼요. 그 입을 떼어놓으면 또 입가지고 나불나불 나대니까. 입을 틀어막은 채로 구원해요. 입을 틀어막은 채로.
이걸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저는 말 안 하렵니다. 저는 저 잘났다는 소리 못 하겠습니다. 저는 입이 틀어 막혔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는 입을 열 자격도 안 되고 다만 외부에서 주어진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 입이 틀어 막혔습니다.”
그러면 입이 틀어 막히기만 할까요? 아니면 죄송스럽고 미안한 감이 느껴질까요? 그냥 입만 틀어 막히면 그 입을 떼기 위해서 발악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게 무슨 뜻이냐? 이사야 53장 10절,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1033페이지.
(이사야 53:10,11)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 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1절에 보면 “그들의 죄악을 친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담당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친히 담당하리라” 나는 입이 틀어 막혀 있는데 나한테 가까이 온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너의 죄를 친히 내가 담당하리라” 했으니까 우리가 죄송한 마음이 듭니까? 아니면 내 주장을 하고 싶습니까? 죄송하고 미안하고 내 자랑을 하기 싫지요?
내가 감당 못하는 죄를 찾아오신 분이 대신 담당해서 처리했으니까 고맙고 감사하고 죄송하죠. 무슨 뜻인지 아시죠? 고맙고 감사하고 죄송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목사님들이나 집사님들과 여러 가지 공부를 할 때, “무엇이 성령의 역사입니까?” 라고 자꾸 질문해 오면, 저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그 말을 유도하면서도 항상 그 태도가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하는 그런 자세가 나타나는지, 고맙다는 것과 죄송스럽다는 마음이 얼굴에 떠오르는가를 저는 유심히 살핍니다.
제가 살필 수 있는 그런 권한도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제가 그 사람의 본색을 다 모르니까, 제가 또 무슨 심판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 사람이 저 신학지식을 논할 때, 같은 지식을 논하고 같은 고백을 해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죄송합니다’ 그런 마음이 나오는가를 살펴요.
비록 그 사람 말이 옳다 할지라도 그런 마음이 안 나오면, 그 사람은 지식으로만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으로만 그런 것을 논하면서 성질을 벌떡 내는 그런 사람도 있거든요? 예를 들면,
“목사님!”
“예!”
“나, 예수 믿거든요?”
“나도 예수 믿은 성도인데, 왜 저를 그렇게 무시합니까?”
예수 믿으면 성도 맞잖아요. 그런데 저는 뭘 본다고 했습니까? 그 태도를 본다니까요. 태도를 보면 뭐가 나와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 “왜 사람 무시합니까? 나도 내 안에 성령 있단 말입니다. 왜 저를 무시해요?” 저는 어떻게 느끼냐 하면, ‘좀 이렇게 엉뚱하다. 좀 유별나다’는 그런 걸 많이 느껴요.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는 성령의 역사는 그냥 문장을 외우는 정도가 아니라 그걸 고백하면서 “그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할 텐데, 뭐가 그리 성질나는 것이 있어가지고,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가지고, 뿌루퉁한 얼굴과 입술을 내밀면서 “저도 성경 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목사님은 저 집사님은 존경하고 저는 무시합니까?”
이것은 성령이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또 이런 게 있어요. 또 이런 게 있어요. “목사님! 우리집 애가 아픕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보시기에 제가 믿음생활도 잘하고 기도생활도 잘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애를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렇게 성질을 내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도 알고 뜻도 아는데.” 뜻도 아는데? 그러니까 그 다음에 나오란 말야.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이거 나오란 말야!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오는 소리가 “그런데 왜 우리 애가 아픕니까?” 아~!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그건 아니잖아! 그건! 그것은 지식이잖아요. 그것은 지금 입에서 테이프가 떨어진 상태에요. 테이프가. 성경말씀이 입을 틀어막아 버려야 하는데 안 틀어막았어요. 테이프가 떨어진 것 보니 아마 그 테이프가 불량테이프인데 중국산인 모양이죠.
성경 말씀으로 가져다 붙이기는 했는데 어설프게 붙여가지고 자기 의를 나타내는데 성경말씀이 도용되어 버리고, 테이프가 뚝 떨어져 버리니까 감사와 고마움, 죄송스러움 이런 마음보다도 그것이 자기를 우위에 설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재료로써 추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십자가를 다시 알아야 되겠구나. 십자가는 십자가 피의 사건이라든지, 묵시라든지 하는 개념의 나열로서 완료된 문제가 아니구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할 때 다른 쪽으로 설명이 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제가 많이 느끼죠.
그러면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힌트를 드렸으니까, 이것이 다른 쪽으로 어떻게 십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는가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까지 한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겠죠? 율법이 추가 되어서 테이프로 우리 입을 틀어막아 버렸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입을 틀어 막힌 채 받는 겁니다. 입을 나불나불 하는 것이 아니고요.
틀어 막힌 채, 친히 그리고 대신 죄를 담당하신 분이 그분의 십자가 효과로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우리를 건져 냄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왔을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나옵니까? 감사와 고마움과 주님앞에 늘상 죄송스러운 마음이 겸해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 나오지요? 그런데 3절과 4절을 보면 거기 성령이 나오지요?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고 그 뒤에 무엇이 나옵니까? 성령님이 나오신다는 말이죠. ‘성령님은 나는 모르겠고 십자가는 안다.’ 이래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고, 성령님에 의해서 아는 십자가와 육체로 아는 십자가가 다르기 때문에 십자가 이야기를 해 놓고 그 다음에 그 십자가안을 칼로 쫙 째듯이 열어 보는 거예요.
열어 보면 거기에 성령에 의해서 아는 십자가와 인간의 지식, 육체로 아는 십자가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육체로 아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 인가’를 지금부터 설명 드립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어떤 지식을 통해서 알았다든지, 이렇게 육체로 아는 십자가는 다른 십자가거든요.
제가 안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그 쉬운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사는 집이 대구의 북쪽에 위치한 팔공산 자락의 지묘동에 있어요. 이쪽으로 가면 유명한 절간 파계사가 나오고, 이쪽으로 가면 더 유명한 절간인 동화사가 나옵니다. 파계사로 가는 버스가 101-1번이고 동화사로 가는 버스는 401번입니다.
버스는 똑같아요. 번호만 달라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예로 드느냐 하면 똑같은 버스라도 번호가 다르면 가는 노선이 다르다는 겁니다. 노선이 다르면 자기 딴에는 동화사를 간다고 아무리 그래도 번호를 분간 못해서 파계사를 가게 됩니다. 편의상 파계사를 지옥이라고 합시다. 동화사를 천국으로 봅시다(절간을 천국이라 하니 좀 이상합니다만).
사람들은 버스를 제대로 타야 천국 가는데, 자기가 등산해서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천국도 그렇지만 지옥도 우리 힘으로 못가요. 지옥 가는 버스가 따로 있습니다. 지옥 가는 버스를 타야 지옥을 가고 천국 가는 버스를 타야 천국에 갑니다. 101-1번은 전부다 파계사(지옥)로 가기 때문에 모습이 지옥 가는 모습이고, 천국에 가는 버스 안에는 모두다 천국에서 살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쨌든 101-1번과 401번이 갈림길인 삼거리까지는 똑같이 옵니다. 똑같이 와가지고 우리 집 근처인 삼거리에서 쫙 갈라지거든요.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버스인데 어떤 버스는 101-1로 해서 지옥 가는 교회가 있고, 어떤 교회는 401번으로 해서 천국 가는 버스가 있어요.
어떤 경우라야 천국에 가는 버스냐 하면 성령으로만 십자가를 알 수 있는 그런 경우의 버스일 때만 천국으로 가고, 십자가, 십자가, 입에 발린 채 이야기를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고 육체로 아는 그런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 가는 버스를 탈수 없습니다. 타려고 하다가도 내려 버려요. 내려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지옥에 가는 버스를 타고 있으면서 천국에 가고 있다고 신이 나 있어요.
교회라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합니다. 목사님들이 교인수가 줄더라도 복음만을 전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손님 없다고 동화사로 갈 버스를 몰고 파계사로 간다면 그 운전사는 바보 같은 운전사 아닙니까? 동화사로 차를 몰고 가는 운전사 같으면 손님이 없더라도 휘파람을 불면서 동화사를 가야지 손님 없다고 손님 태우기 위해서 파계사를 가면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은 ‘지금 이 교회가 천국 가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되지, ‘손님은 몇 명이 탔느냐?’ 그런 것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노선이 어디냐가 중요하지, 이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뭘 지향하고, 어디를 지향하느냐가 중요하지 손님 없다고 방향을 바꿔 버리면 지옥 갈 사람이 천국버스에 탈 수가 있잖아요. 그것은 안되지요.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이 자꾸 ‘성령으로, 성령으로’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이야기 해놓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아는 십자가와 육체로 아는 십자가를 자꾸 구분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처음부터 성령이 아니고서는 육체로 아는 십자가외에는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육체로 아는 십자가를 몰라도 됩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육체로 아는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냐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지옥가는 십자가입니다. ‘지옥가는 십자가?’ 희한하죠? ‘지옥을 보내는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자, 십자가가 나에게 뭘 하는 것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를 한번 그려 보겠습니다. ‘십자가가 내 눈앞에 코앞에 있다. 그러면 저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기 때문에 내가 다가서서 저 십자가를 믿어야지.’ 이러면 이것이 육체로 믿는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있으니까 저거 내가 연구해서 내가 믿어야지.’ 이러면 이것은 육체로 믿는 십자가로서 이것은 파계사(지옥노선)로 가는 겁니다. 이것은 동화사(천국노선)로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는 십자가를 믿는 겁니다. ‘내가 다가서야지.’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내가 깨어집니까? 안깨어집니까? 내가 깨어지기는커녕 내가 팔팔하게 살아 있어야 돼요.
더 쉽게 해 봅시다. ‘자, 나는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다. 아! 내가 깨지는 것은 싫어. 내가 죽는 것은 싫어. 내가 사는 방법이 없을까? 어? 저기 십자가가 있구나. 이목사님 이야기대로라면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된다고 하니까 십자가를 믿어야지. 그런데 믿을 때 어떻게 믿는다? 잘 믿어야지. 잘 믿기 위해서는 내가 전보다 더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 더 휼륭한 사람 되어야 하고, 더 잘 믿는 사람, 더 열심을 내는 내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절대로 내가 부서진다든지, 깨어진다든지, 와해된다든지, 실수한다든지, 실패한다든지 그러면 안돼요. 내가 십자가를 믿는 일에 실수하면 안돼요. 나는 완벽해야 돼요. 내가 완벽하면 할수록 더욱더 십자가는 잘 믿어질 테니까요. ‘완벽해진 다음에 십자가를 완벽하게 수용하면 나는 완벽하게 십자가와 결합되어서 나는 구원 받는다.’ 이게 육체로 아는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펄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다음에 뭡니까?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십자가가 누굴 죽입니까? 십자가가 나를 죽이고, 내 등허리를 밟고, 나를 죽이는 그 현장에서 십자가만이 승리를 외칠 때, 그게 성령에 의해서 믿어지는 십자가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주님께서 나를 정복했음.’ 알프스 산을 넘은 유명한 프랑스의 장군이 누구입니까?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을 넘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예수님이 나폴레옹이라. 예수님이 나를 짓밟고, 내가 아무리 반항해도 나를 용서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거예요.
내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든, “그거 봐라! 내가 너의 죄를 친히 담당했잖아. 봐라. 너를 꺽어 버렸잖아. 너의 죄보다 나의 은혜가 더 크잖아. 봐! 승리했잖아. 봐라! 너는 내꺼야. 네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 미래에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보라니까! 내가 너를 용서했잖아. 봐! 나 예수 대단하지? 그지?”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사람이 육체로 십자가를 알게 되면 자기가 십자가를 잘 믿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계가 깨졌다든지, 남편이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짜증을 내면서 “나 십자가 안 믿는다. 이제. 십자가 잘믿어도 집에 우환이 생기는데 내가 십자가를 왜 믿어? 하나님! 미안합니다. 한 3년 뒤에 믿을 겁니다.”
이런 것은 뭐냐? 처음부터 내 쪽에서 다가가서 그 십자가를 내 쪽에서 소유하기 위해서, 내 손에 꽉 쥐고 십자가를 믿는 주체가 내가 되는 것. ‘내가 믿어 줬잖아.’ 이렇게 될 때는 십자가는 작아지고 누가 커집니까? 내가 믿었다는 거. ‘나’라는 자체가 펄펄하게 살아 있을 때 그게 바로 육체로 믿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쪼그라지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커지고. 이래가지고는 근거가 약간 희박하다고 느껴지고, 약간 모자라게 여겨지지요? 고린도후서 4장을 봅시다. 이것을 보면 어느 누가 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 12절. 이것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 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고린도후서 4:11-12)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이상하지요? 우리 예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나를 살리지요? 나는 죽음에서 벗어났다고 했는데 반대에요. 나를 살려내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날마다 죽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죽음의 큰 입이 남에게 덮치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덮칩니까?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뭐가 찾아온다고요? 죽음이 오는데 그런 나를 통해서 살기는 누가 살아요?
물론 나도 살았지만 내 옆 사람이 살고, 다른 사람이 살고, 내 가족이 살고요. 죽음의 힘은 나에게 작용하고 그로 인하여 생명의 힘은 다른 사람을 살게 하고.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요셉이라는 사람이 꿈을 꾼 사람이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 형님들이 묶은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 둘러서서 절하는 아주 요상한 꿈입니다.
그 꿈대로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요셉은 자신은 갈수록 힘이 들고, 자기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은 혜택을 입고. 자기는 힘이 드는데 힘든 만큼 남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 이사야 53장 1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친히 내가 담당하리라.”
(이사야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힘든 잔을 마시고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살고. 이것을 우리 보고 하라고 하면 절대로 안합니다. “어이! 이 목사! 죽음은 네 안에 역사하고,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살려 봐라.”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하기가 싫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이런 소리가 금방 나올 겁니다. “내가 나 좋아서 하는 일 같으면 힘들어도 하겠는데, 남 좋아라 하는 일 같으면 도저히 제가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습니다. 포기할겁니다.”
그래도 그게 포기가 안 되지요. 주께서 한번 구원한 사람은 그렇게 쓰시기 때문에 자기가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가 안 됩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힘은 나에게 역사하고,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살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약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다른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니까.
이것은 파계사 가는 사람들(지옥노선)보고 하라고 하면 흉내만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돼요. 안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죽게 합니다. 강제로 죽게 해서, 우리를 꽉 눌러서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도록 우리를 사용하는 겁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인간의 이름을 짓밟아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때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지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해요. 그런데 나에게 이름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죽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이름이 있어요. 이 컵이 있으니까 이름이 있지 컵이 깨져서 쓰레기통에 가면 컵이 없잖아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있는 ‘나’가 이름이 뭘까? 라고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름을 떼어 버렸다는 말은 ‘너는 살아도 네가 죽은 자야’라는 뜻이에요. 이름이 없다는 뜻은 죽은 자에요.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 이름을 없애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려우니까 쉽게 합시다.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둘 중의 하나가 답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으면 뭐는 아닙니까?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내 이름이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저기 있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있으니까 이름이 있잖아요. ‘개’가 있으니까 ‘개’라고 하고, ‘고양이’가 있으니까 ‘고양이’라고 하죠. 아무것도 없는데 ‘개’, ‘고양이’ 하면 이것은 이상한 사람이죠.
뭐가 있을 때 이름을 붙이잖아요. 내가 있을 때 내 이름이 있잖아요. 분명이 이렇게 내가 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신다고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이고 그 죽은 자리에 예수 이름으로 죽은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을 걸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걸고 구원받는다니까요.
여기 한목사님이 계신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한목사님을 통해서 구원받게 하신다면 제가 “예수님! 저요! 하나님! 저요!” 한다면 “너는 안 되고 한목사님만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한목사님에 의해서 내 이름이 죽을때 주님 안에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구원받는 겁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 이름은 죽고 주의 이름이 내 안에서 사는 식으로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싶다든지, 제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다같이 회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가결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지금 바깥에서 일이 그렇게 이루어져요.
주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는데 제가 이의를 달수가 없는 겁니다. 성령으로 아는 십자가는 뭐냐? 성령이 날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죽이는 힘이 작용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이 죽어 있어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지, 예수도 살고 나도 살아 버리면 둘다 펄펄 살아서 싸움하느라고 안돼요. 예수님은 살아나고, 그 예수님 살아 나는 것 때문에 나는 항상 죽어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살았다고 하고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지금 제가 이야기를 하나 안하나, 고함을 지르나 안 지르나 지금 일이 그렇게 실제로 벌어지고 있어요.
그게 401번입니다. 천국노선입니다. 그런데 파계사 가는 것(지옥노선), 101-1번은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뭐합니까? 예수 믿어야지!” 하면서 지옥 가는 그 노선 안에서는 그런 작당을 하고 난리입니다. “여러분! 돌대가리입니까? 머리 없습니까?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삽니다.” 끝이에요. 살기는 뭘 살아요? 늘 죽어야 되지.
그러니까 101번 지옥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했으니까 믿어 놓았다.’ “자, 목사님! 그 다음이 뭡니까?” “예수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축복을 폭포수처럼 내려 주십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예수는 믿어 놓았겠다, 이왕 살아 있는 거, 하나님께서 복을 보너스로 주신다고 하니까, 마구 구하는 겁니다.
건강 복,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화목 하는 복, 애들 공부 잘하는 성적 복, 가게 터가 좋아서 장사 잘되는 복,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던 병이 낫는 복, 이사갈 날, 결혼한 날자 챙겨주는 복. 이게 자기가 펄펄,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그 ‘나’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런 보너스를 받을 자격이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101-1번입니다. 그게 파계사(지옥노선)가는 거예요. 그 안에서는 내가 살아 있다니까요. 그냥 살아 있어요.
“한국교회가 뭐가 잘못되었는데요? 예수를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데요. 이목사! 당신만 십자가를 전하는가? 한국교회들 지붕꼭대기마다 십자가가 다 있고, 십자가 이야기를 다 하더라.” 십자가 이야기 다 하죠. 그래야 기독교가 되니까. 그런데 그 십자가는 무슨 십자가입니까? 육체로 내가 쟁취할 수 있는, 소유할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한번 소유한 십자가는 그 다음부터는 잊어 버려도 괜찮아요. 이미 구원에 들어섰으니까요.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와는 ‘바이바이’ 하고, 이제부터는 내가 착한 짓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약간 징계 받는 그런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뭘 한다고 했습니까? 해변가의 청소부가 뭐 합니까?
나에게 죄를 짓도록 했던 나쁜 습관들인 큰 것들을 먼저 건지고, 그 다음에 작은 것들을 건져내는 식으로 용서를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마음이 맑은 거울처럼 깨끗해지겠지요? 그러면 복이 마구 쏟아지겠지요? 수평선 파도 넘어서 스티로풀 떠내려 오는 것도 모르고. 앞으로 5년 뒤에, 10년 뒤에 무슨 죄가 찾아올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깨끗한 거울같이 성화된 것처럼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육체로 십자가를 알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 성령으로 아는 십자가는 십자가로 들어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드디어 죽음의 힘이 나에게 작용해서 자꾸만 ‘저 예수 믿잖아요. 복주세요’라는 식으로 살아 있는 내 이름을 날마다 죽입니다. ‘너는 내 증인이 되어야 해. 진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해’ 하고 내 이름을 꺽어 버리고, 죽는 순간 주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게 합니다.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나오는데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에,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요즘 말로 하면 “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합니다. 그게 누구의 이름입니까? 베드로의 이름입니까? 요한의 이름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지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니까 그 앉은뱅이가 걸었지요? 그때 그 장면을 본 사람이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누구나 똑같은 소리를 합니다. “저 사람이 낫게 된 것은 베드로나 요한의 경험과 신앙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누구나 그렇게 말하는데, 정작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절대로 제가 한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이름, 곧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믿음을 줘서 낫게 했고 우리는 다만 그의 목격자 증인일 뿐입니다”라고 했어요.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고 할 때 이것이 납득이 되겠습니까? 자기가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베드로가 하는 소리를 분명히 다 들었는데. 내가 알기는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걸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주님이 그 사람을 낫게 했다’까지 이렇게 건너 뛸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자기도 그 순간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이름이 죽을 때라야 가능하다는 말이죠.
“맞습니다. 저도 제 힘으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정복자가 되셔서 저를 정복해서 그래서 믿음이 왔습니다.” “동감합니다. 악수 먹읍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현실을 눈으로 봐도 성령 받은 사람들끼리는 통하게 되어 있고, 육체만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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