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14-(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4강 이름 :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4강 (이근호목사, 2006년 7월 14일(2), 서울의존교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없습니다. 없는데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우리 힘으로는 저주를 피할 수 없는데, 저주를 이미 피한 사람은, 그러니까 ■1 이미 구원받은 성도는, ‘다른 복음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맞는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라고 동의를 한다는 겁니다.
저주받는 다른 복음을 우리가 중단시킨다든지, 우리에게서 다른 복음이 아예 안 나오게 한다든지, 저주를 안 받기 위해서 노력한다든지 하는 것으로는 저주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어요. 그런 능력이 있으면 우리가 메시아지요. 그런 능력이 없는데 뭐는 되느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영역에 속한 사람은 다른 복음이 저주를 유발한다는 것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그 영역(영역이라는 말이 중요하죠), 같은 공간에 함께 있기 때문에 가능해요. 사도바울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어요. 생각이 같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무조건 ‘오케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오케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여기 8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여기에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에서 “우리”라는 말을 쓴 것은 사도바울 본인을 포함시키는 거예요.
사도바울 본인을 포함시킨다는 말은 사도바울 여기 있고 우리는 여기 있는데, 사도바울이 “야! 너 나 하는 것을 믿어” 이것이 아니라, “야! 너와 우리는 지금 한 공간에 있잖아”라는 뜻입니다. “같은 생각이 통하는 한 장소 한 영역에 있잖아”라는 뜻입니다. ‘우리’입니다. ‘우리니까 생각이 같아야지’라는 뜻입니다.
그 생각이 같은 것이 뭐냐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도바울님! 사도님이 전한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렇게 동의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서 다른 복음이 나오고 안 나오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 점이 옳다고 믿어지는 그것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다 알기 쉽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이 예수 믿고 나서 나쁜 짓을 안 하는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 하든 안하든 간에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가 동의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마귀는 자꾸 뭘 쑤시느냐 하면 우리를 단독적으로 보는 거예요. “너 나쁜짓 했지? 너 나쁜짓 했지? 그러니까 너는 저주 받는 거야.”
마귀는 우리를 혼자 세워놓고 “너 나쁜 짓 했지? 착한 일보다 나쁜 짓을 한 것이 더 많지?” 이런 식으로 자꾸 추궁을 하니까, “그래! 나는 나쁜 짓을 했어.” “그러니까 너는 안되는 거야.” 자꾸 마귀는 그렇게 하는데, 사도바울은 ‘우리’라고 해서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이것을 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영역을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에서는 내가 옳고, 네가 옳고 내가 완벽하고 네가 완벽하고 그런 것이 없어지고,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든 어떤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가 뭐냐? 오직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신 그 원리뿐이다 거기에 동의하나?’ 라고 묻는 겁니다. ‘거기에 동의합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른 복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의존교회 당회장인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저, 오늘부터 사도바울인 제가 의존교회 당회장님 이십니다. 제가 여러분께 당부합니다. 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의존교인들이 “와! 사도님! 어떻게 저와 생각이 그렇게 똑같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복음 전하지 마세요. 그런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그런 복음을 가짜로 보겠습니다”라고 생각이 통할 때 그때 그렇게 생각이 한가지로 통하는 한 덩치가 구원받은 사람이라 이말 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저, 이제 사도바울인 제가 당회장입니다. 저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목사님! 사람을 안 기쁘게 해서 교회당을 언제 짓습니까? 교인수를 언제 백명 모으고, 2백명을 모읍니까? 사람을 기쁘게 해야 좋은 목회자가 되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좋은 목회자가 됩니까? 당신 같은 그런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용납을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사도가 전하는 것과는 다른 복음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사도가 전하는 바른 복음을 믿지 않는 저주받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지금 사도의 뜻이에요. 사도의 뜻은 뭐냐? 불러 세워놓고 “너 나쁜 짓 했지? 혹은 너 완벽하지?”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사도가 이야기 하는 것에 동의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동의하면 함께 주님편이고, 동의 안하면 그것은 주님 편이 아닌 저주받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받는다’고 했는데, 그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에 자기도 뭔가 스스로 착각할 수가 있지 않느냐?’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사도바울 당신의 말에 내가 동의를 하고 싶지만, 사도바울 당신의 말이 당신의 말로 끝나는지, 아니면 진짜 주님의 뜻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라고 나올 때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사도가 받은 것과 공통적인 분모, 공통적인 연관성이 없지요. 그게 바로 다른 복음에 젖어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사도가 그렇게 말할 때, 어떤 똑똑한 체 하는 사람이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지!”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 “저는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을 드리신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종결된 것으로 믿습니다”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어이! 이목사! 왜 당신은 그런 소리를 하는데?”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동의를 하는 겁니다.” “ 러면 당신이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를 하는거야? 아니면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도라고 하니까 그래서 동의하는거야?”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이근호 당신이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은 당신의 뜻과 사도의 뜻이 같기 때문에 당신이 동의를 하는 것이지 사도의 뜻이 옳기 때문에 당신이 동의하고 굴복하는 것은 아니잖아?” 이렇게 나온다면 어떻게 할래요? 제가 이렇게 강의를 어렵게 몰아가는 이유는, 소위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추릴 대로 추려보자는 거예요.
‘내가 사도바울의 말을 믿는 것은 지금 내 뜻에 사도바울의 말이 맞아줬기에 맞는 것이지 내 뜻을 꺽어 버리고 사도의 뜻에 복종해서 믿는 것은 아니다’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반박할 것이냐 이말입니다. ‘내가 김목사님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김목사님이 좋아서 좋아하는 것이지 김목사님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말 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고? 하여튼)
부부 사이에 남편이 좋다는 것은 내가 좋아서 남편이 좋은 것이지 남편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보고 “저, 아가씨! 나와 결혼합시다.” “왜 당신과 결혼해야 합니까?” “내가 좋다면 좋은 거야. 결혼해!” “예! 결혼합시다.” 결혼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렇게 결혼했습니까?
“네가 좋든 안좋든 내가 좋으면 결혼 하는거야” 이렇게 해서 결혼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사도바울이 좋아서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를 했다면, 결국은 나라는 인간을 기쁘게 한 것 밖에 더 되냐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에 위배된다 이말입니다.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예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2장은 그냥 막 뛰어넘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그게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보다 먼저 사도된 선배사도가 있는데 그게 베드로입니다. “사도바울 네가 진짜 예수님으로부터 된 사도라면 그 베드로가 인정했는가? 인정했어?”
“선배사도,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사도 베드로가 ‘사도바울은 참된 사도야!’라고 이렇게 인정해 주었느냐? 추천서라도 있느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없다!” “베드로가 진짜 성도이다. 그런데 진짜 성도인 베드로가 사도바울 보고 사도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당신이 사도지, 진짜 사도요 진짜 성도인 베드로의 이야기도 안 들어보고 네 마음대로 사도라고 하면 안되잖아?”
이렇게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웅성웅성 거리면서 반대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도바울 자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느냐?’ 이런식으로 따지고 든다는 그 이야기가 2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베드로사도 말이야? 그 베드로 내가 면박 줬거든! 수제자라도 나한테 한방 당했거든! 나는 선배건 후배건 간에 그런 것을 따져서 사도된 사람이 아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 나와요.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이야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도바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를 사도되게 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한 집단에 포함된 구원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특정인을 추종해서 특정인을 따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동일한 공통적인 요소를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결과로 우리는 여기 한데 모였다’고 보는 것이 갈라디아서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베드로에게 주어진 계시나 내가 받은 계시나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베드로에게 우르르 몰려가고 혹은 바울에게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사도의 말에 동의하게 하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십자가를 진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세례를 준 것도 아니고, 오직 구원받는 것은 사도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능력이 여러분을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그렇지! 그렇지! 내가 믿는 것은 예수님이지’ 라고 믿는다면 성도요, ‘내가 예수를 믿는데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뭔가 많이 수상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직접 성령을 줬는데, 마치 누구 편에 성령을 받은 것처럼 이렇게 오해하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이 베드로 선배한테 넘겨받고 인수인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아! 치킨 집 넘겨줄 테니까 권리금 한 2백만원 받고 장사한번 해볼래?” 이런 식으로 치킨집 넘기듯이 넘겨준것이 아니에요.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배운것도 아니요’ 이말이 사도바울에게만 적용될 사항이 아니고, 저나 여러분에게 다 공히 적용되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을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배제하는데 무엇까지 배제하느냐 하면 구원받은 우리의 행함도 배제시켜 버립니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아까 전 시간에(제 3강) 이야기 했어요. ‘복음은 이 세상에 복음이 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면서 복음은 이 땅에서 일하신다.’ 계속 복음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시면서 일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복음에게만 의존하면 끝난다는 말이죠. 지금 갈라디아서 2장을 제가 이야기 한 겁니다. 그런데 이 강의가 신학개론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2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다 따지면서 갈수가 없습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으로 2장은 붕 하고 점프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 뭘 해야 하느냐 하면 1장을 더 해야 합니다.
1장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종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하나의 기준이 뭐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인정받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인정받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요),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그런 쪽으로 사도를 한다면 그것은 사도로서의 제모습, 본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끌려 나오죠. 그런데 그 여인을 용서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라는 말이 나오죠. 그렇다면 용서받은 여인에게 더 이상 간음죄가 저촉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그 여인은 남에게 두 번 다시 돌 맞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필요 없습니다.
간음죄도 마찬가지고 십계명 전부 다를 동원시켜도 그 여인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서가 그 여인에게 있기 때문에. 만약에 그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은, 그 여자에게 남아 있는 예수님의 용서를 모독하고 때리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잖아요. 왜 맞아 죽습니까? 예수님을 믿었다고 맞아 죽는다고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을 때리는 것은 예수님을 때리는 것과 연속성이라고 볼 수 있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느냐 하면, 지금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것 못지않게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는 것도 포함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이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내가 나쁜 사람, 나쁜 남자, 나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기 위해서, 반대로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왜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율법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의 정죄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면 율법이라는 것이 뭐냐라는 것을 몰라요. 사람으로부터 기쁨을 구한다는 말은 인정을 받고자 한다는 말인데, 사람으로부터 왜 인정을 받으려고 하냐면 사람으로부터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람에게 나쁜 소리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쁜 소리 안 듣는 사람은 사람에게 나쁜 소리를 듣더라도 그것은 상관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 나쁜 놈이야’ 할 때 그 나쁨이 뭐냐 하면, ‘율법으로부터의 정죄’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안에 가두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정죄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듯이, 자유하게 했듯이(갈라디아서에서도 ‘자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달랑 들어서 이쪽동네에서 저쪽동네로 옮겨버립니다.
자, 이 동네는 어떤 동네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을 가지고 패는 거예요. “너는 저주받았어. 십계명도 못 지켰어. 너는 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어. 거짓말도 했잖아. 너는 마음속으로 간음했지?” 모든 율법이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당사자를 율법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을 때, 더 이상 율법이 따라와서 공격을 못한다는 말이죠. 공격할 수가 없어요. 담을 넘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하는 말씀이 “내가 다시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입니다.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벗어났거늘 하물며 주위 사람들이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무슨 소리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 사도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게 기쁜 소식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복음이 아니고 뭡니까? 세상에 어느 인간이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합니까? 공자? 맹자? 석가모니? 노무현대통령? 누구입니까? 누가 기쁜 소식을 전해요?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신 것은 우리가 그냥 감동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몸을 드린 거예요.
주님께서 몸 드려 놓고 또 저주하고 이런 법이 없어요.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흘리고 또 거기에 율법을 주고 그런 법이 없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상상해서 지어낸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욕을 안얻어 먹는데 하물며 같이 썩어가는 인간들에게 인기를 얻고, 정죄 안 받기 위해서 아부하려고 알랑알랑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더 심한 말을 합니다. 성도는 어느 정도의 신분이냐 하면, 천사도 재판할수 있는 판사님의 위치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6:1-3)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천사도 심판할수 있어요. 왜?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까요. 십자가 복음 가지고 천사도 심판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제대로 모르고 형제들간에 서로 고소하면서 싸우느냐? 이 답답한 인간들아!’ 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그러면 사도님!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데 노예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에게서 벗어나야 합니까?
사회적인 문제를 거론했어요. 사도가 말하기를 “이미 예수 이름으로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데, 노예라는 신분이면 어떻고, 노예에서 풀려나면 어떻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말입니다. 예수 믿었으면 그로 인해서 내 취직자리가 있어야 합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오늘 오후 4시에 안산에서 이런 내용의 강의를 했어요. 간단하니까 잠깐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데카르트’(1596-1650)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지단선수와 같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입니다. 데카르트 이전과 데카르트 이후가 달라요. 데카르트 이전의 시대의 사고방식이란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다 하나님의 은혜니까 감사하라’는 겁니다. ‘농부는 농부로서 팔자려니 하고 있고, 어부는 어부로서 팔자려니 하고 있으면 다 은혜니까 농부가 농부팔자 벗어나서 귀족이 되겠다고 까불지 말라’는 겁니다. 귀족은 귀족대로 하나님의 배치이니까 주의 뜻이다 하고 그냥 있으라는 거죠.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부터는 달라집니다. 데카르는 사람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영적인 영혼과 육적인 물질로 나누었습니다. 물질은 사람의 신체를 말합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고, 육체에 관해서는 본인이 일해야 복이 된다는 거예요. 놀면 복이 안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데카르트의 말이 어떻습니까? 딱 우리의 상식에 맞지요?
영혼구원 받는 것은 주의 은혜로 되고, 평소에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는다는 겁니다. 데카르트 이후부터는 무엇을 중요시하느냐 하면, 사람이 노동을 하는데 그 노동의 질, 노동의 가치(누가 누가 잘하나? 누가 단시간내에 더 많이 생산하고 누가 더 솜씨 있게 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 인간의 가격이 결정되고 말아요. 인간의 가격.
처음에 시장이란 물고기팔고, 옷가지팔고, 이런 저런 물건을 서로 교환하는 장소가 시장인데, 이제는 인간 자체가 상품이 돼요. ‘나 이거 할 줄 아는데요’ 하고 자기를 상품으로 내어 놓는 거예요. 상품으로 내어 놓으니까 분명히 사람은 다 똑같은 가치로 봐 왔는데 실제로 시장에 내다 팔때는 ‘당신은 한달에 5십만원짜리, 당신은 한달에 1백만원짜리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한달에 5십만원짜리 인간은 둘이 되어야 1백만원짜리 한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는 뭡니까? 인간의 가치는 하나의 물건이 되지요. 물건이 되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나의 가치를 높이는 거예요. 그걸 자아 증강이라 합니다. ‘자아증강.’ 자아를 증대시키고 강화시키는 거예요. 부모 형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노동시장에 나가서 얼마나 가치 있는가?’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가늠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데카르트 이후’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러한 노동시장에서의 나의 가치, 개인적인 가치를 철폐해서 어디로 돌리냐 하면, ‘너의 조건을 보고 가족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우리는 모두 한 형제’라는 것, ‘같은 피로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같은 식구’속에 포함시켜 버려요.
식구속에 포함시키면 ‘너, 나’가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있어요. ‘우리’가. ‘우리’만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모두 다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쳐다보기 때문에, 복음이 동일하게 똑같이 작용하고 역사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농부로 일하고, 어떤 사람은 어부로 일하고 동일하게 일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농사짓는 사람이 일하는 그 농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농부라도 어부라도 심지어 거지 나사로라도 그들을 영생의 나라에 보내게 하신 주님의 자기 피, 그 십자가 보혈의 피,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주님의 용서를 천하보다 더 귀한 것으로 서로 서로가 간주했을 때 그것을 두 글자로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교회는 ‘너, 나’가 없고 ‘우리’만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주의 뜻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땅의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믿음이 좋으니까 취직을 시켜 달라고 하면 안 시켜줍니다. ‘영어회화 할 줄 아느냐?,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느냐? 컴퓨터 활용하는 능력은?, 부기실력은?, 학교성적은?’ 이런 것을 묻는다고요.
이런 것을 따져서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니까 교회에 올 때 사람들이 ‘신이시여! 저 밖에 있는 노동시장에서 저의 가치를 높여 주옵소서. 제가 철야기도를 할테니까 저의 가치를 높여 주옵소서’라는 바램으로 옵니다. 주님께서 하는 말이 “내가 이미 너의 가치를 높였는데?” “뭔데요?” “네 안에 다시는 율법으로 정죄 받지 않는 주님의 용서하심이 네 안에 살아 있잖아.”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 말은 맞는데요. 사람들이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때 불쑥 사도바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지금 이 대목입니다. 이 대목을 하기 위해서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이 대목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게 나중에 3장과 4장으로 넘어가면, 온 지구를 지옥으로 만드는 역사가 인간 하나 하나 속에 다 담겨 있어요. 둘 셋이 모일 때 담겨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씩 떼어 놓아도 마귀가 인간을 지배했던 그 원리원칙이 그 안에 그대로 담겨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으로부터 사람에게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아서 구원되려고 하는 심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떤 경우라도 나쁜 사람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다’는 타락된 아담의 원초적인 본능이 그대로 나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립니까? 왜 일찍 내 남편을 죽게 만들고, 자식은 자살하게 만들고요.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텔레비전 프로그램중에 ‘인간시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시대’를 보면서 ‘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진열장을 보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용서’라는 뜻을 몰라서 여전히 용서받을만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몸부림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내 모습이 저런 모습으로 상상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상은 ‘남에게 어떻게 하면 더 인정받을까?’와 관련된 상상인데 그것을 눈만 뜨면 시작합니다. 저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학교 갈 때에 인사합니다. “아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안 믿습니다. 왜 안 믿느냐?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해도 신발 고르는데 5분 걸립니다. 신발 고르는 시간이 흐른 5분 뒤에 “아빠! 학교에 갔다 올게요.” 그때는 믿습니다.
신발을 왜 고르냐 하면, ‘이게 어울리느냐?’하는 것을 따지는 겁니다. 왜냐?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남들의 눈을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좋은 의미로. 매치가 되어야 하니까. 신발 몇 개 되지도 않는데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 딸은 옷입고 난 뒤에 꼭 저에게 물어요. “아빠! 옷 괜찮나?” 0.1초 돌아보고서 “괜찮다!” “좀 자세히 봐라~.” 다시 0.1초 보고 “괜찮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난 그때의 상황이 죄인중의 괴수로서 만났어요. ‘죄인중의 괴수’로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에게서 들린 것은 뭐냐? “너는 이제부터 나의 종”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종 되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자기의 가치를 따로 꾸밀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중에 괴수’가 무슨 말인데요? 자기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성화라는 것이 있을수가 없어요. 성화라는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지 자기의 우수함을 증거하는게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가끔은 제가 데카르트가 말한것 같은 철학적인 용어들을 이야기 할 참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오늘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어릴 때부터 철저히 노동시장에서 개인적인 가치를 높여서 많은 돈을 받는 사람으로 제조하기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사니까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주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여! 나의 가치를 높이게 하옵소서!” “됐다. 그만 됐네. 이 사람아!” 거지 나사로가 죽을때도 거지였고 죽을 때도 아팠어요. 그래도 천당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구원받는데 아프다는 것과 거지라는 것이 전혀 지장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다는 그 사실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데카르트의 후예로서 기쁜 소식을 따로 챙겨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런 때에 한해서 기뻐하겠다고 스스로 다짐과 다짐을 해 놓았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2장 1절에서 15절까지를 넘어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야고보하고 게바하고 식사를 하는 자리인데 베드로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의 출신성분을 따진 겁니다.
요즘말로 하면 이런식입니다. “어어? 저거 일본인이잖아? 저게 어디서 우리와 같은 선민의 식탁에 참석할수 있어? 할례도 받지 못한 더러운 인간하고 어떻게 식사를 하느냐?” 그러니까 그들이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그 현장에서 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사도님!”
“왜 후배야!”
“그게 복음입니까?”
“미안하다.”
면박을 준겁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할례냐? 무할례냐?’ 그런 식으로 갈라냈습니까? ‘남자든 여자든, 자유자든 종이든’ 언제 그런 것을 가렸습니까? 그냥 드리시는 분인데요. 언제 우리의 조건을 보고 드렸습니까? 그냥 다 드리는 분인데. 이 악한세대에서 자기 몸을 드린 분인데 언제 그런 식으로 했습니까? 그게 복음입니까?” 이렇게 면박을 준겁니다.
베드로가 순간순간 그런 것이 나오더라도 베드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된 것을 알아요. ‘복음이 아니다’ 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구분할 줄 압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완전을 물을 입장도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수가 없기를 바라는 것 같으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 되고자 하는 것도 욕심이에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참 복음인가’를, ‘어떤 것이 나로 하여금 정죄함에서 벗어나게 했는가’를 순간순간 잊으면 안돼요. 그것을 잊으면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약해져서 스스로 절망과 낙심에 빠지게 돼요. 사람이 뭔가 나쁜 짓을 하게 되면 다음에 벌 받을 것을 대기하고 있어요. 그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약에 나쁜 짓을 해서 벌받을 것 같으면 매일 매일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작에 죽어야 했어요. 이런 비타 500을 먹으면서도 감사치 않으니 진작 죽어야 하죠. 자기 딴에는 감사를 했다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영 시원치 않습니다. 비타 500하나 제대로 못먹어서 죽어야 합니다. 망대 무너져서 18명이 깔려 죽었을 때, ‘누구죄로 인하여 죽었느냐?’(눅 13:1-5)고 할때 그들이 더 죄가 커서 죽은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망대가 무너져서 죽든, 교통사고로 빗길에 미끄러져서 죽든 관계없이 회개치 아니하면 다 죽는다는 겁니다. 진주에서 어떤 여학생이 흙탕물에 빠져 죽었어요. 그 애는 무슨 죄를 남보다 더 지어서 그렇게 죽었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죽는다는 겁니다. 다만 그들은 시범조로 분류된 것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5절부터 봅시다. 14절 끝부분에 보면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아~! 중요한 말씀이죠? 유대인들은 뭐가 있어요? 뭐가 있다? 율법이 있고요. 이방인들은 뭐가 없어요? 율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누구처럼 살 필요 없다? 율법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율법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처럼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16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게 참 어려운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의 주장에 동의를 한다면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어려운 것이 되어요.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롭다는 것이 사람에게 해당이 될까요? 안될까요?’ 그것부터 묻는 거예요.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한테는 의로운 것이 없어요. 의로움은 우리 밖에 있어요. 의로움은 가져와야 되지 내 안에는 의로움이 없어요. 내가 의롭게 되려면 의가 내 바깥에 따로 배치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배치되어야 할 뿐만이 아니고, 나에게는 아예 의가 없어야 돼요. 저 사람은 많이 있고, 나는 조금은 있고 그래서는 안돼요. 나에게는 아예 없고, 나 밖에서 배치된 의는 아예 전부 다 있고. 그래야 돼요. 사람이 의롭게 되려고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거예요. 의롭게 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거예요. 없는데 뭘 만들어요? 없는데.
어떤 여자가 수술해서 남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아줌마가 되어서 애기를 낳았어요. 그 애가 남자가 된 엄마를 보고서 엄마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빠라고 불러야 합니까? 법원의 판정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비록 남자는 남자로되, 그 남자를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 남자를 보고 엄마라고 불러야 합니다.
여자는 염색체가 xx이고 남자는 xy이기 때문에 xx를 xy로 고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수술가지고 안됩니다. 애가 임신되면 xx나 xy로 고정되는데 어떻게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내서 수술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약에 여자라면 남자라는 것이 없어요. 아예 없어요. 그런데 천국에는 남자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넣어줘요. 왜? 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남자가 될 수 없는 여자 주제에, 어떻게 남자만 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 비유를 어린이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천국에는 남자만 산다고 가정을 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가정해 보면 이 땅에는 여자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천국에 갈 남자가 나올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할 인간이 없다’는 말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심지어 거룩한 율법을 동원해도 인간은 천국에 갈수 있는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없을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하면 돼요. 그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것이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만남의 결과였습니다. “주여! 저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쁜 사람 맞습니다.” 이러면 돼요.
“나는 나쁜 남자, 나쁜 여자 맞습니다. 맞고요.” 이것이 노무현대통령이 초기에 했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는 나쁜 사람 맞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왜 그 유명한 데카르트 같은 분들이나, 똑똑한 분들에게서는 안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사람은 나올수가 없어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 나쁜 사람 맞습니다.’ 왜 그 이야기가 저는 쉽게 되는데요. 왜 그렇게 안되는지 몰라? 따라서 해보자고 할수도 없고, 이것은 따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나의 어떤 행동도 의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인하고 그 다음에 믿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믿는다는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지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분명히 우리가 알기에는 예수님만 십자가에 달려 올라갔고, 그 옆에 두 사람의 강도가 있었지만 강도는 자기십자가를 진 것뿐이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이 함께 달렸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도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이게 앞뒤가 안맞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서 달린 십자가에요. 둘이 한꺼번에 올라가면 그 십자가나무가 부러집니다. 안돼요. 분명히 예수님 혼자서 달렸는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그 십자가의 의미가 그 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 십자가가 또 죽이고 또 죽이는 그러한 역할을 되풀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에도 없는데 ‘십자가의 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이것이 역사를 초월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침이냐, 점심때냐, 저녁때냐, 그런 것 상관없이, 목욕탕에 있든 화장실에 있든 관계없이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말이죠.
십자가가 그때 끝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이 지금도 여전해서 계속해서 지금도 퍼지고 있고, 확산되고 있으면서 자기 백성을 건져가는 거예요. 이 십자가로만. 십자가로만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저는 죄인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것을 유발시키는 쪽으로 십자가의 영이 활동하는 거예요.
‘제가 지혜도 있고 지식도 있지만 그런 것은 제가 구원받는 지혜와 지식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성경을 달달 외우지만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저는 나쁜 사람이니까요. 나는 의가 없으니까요. 어떤 신학공부를 하고, 어떤 성경공부를 해도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의 의만이 저를 율법의 정죄로부터 옮겨놓아서 자유케 합니다.
자유라는 말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우리의 어머니는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자식이고. 지금 우리가 갈라디아서 1장, 2장의 강의를 듣고 계신데, 여러분은 이 강의가 여러분의 다른 날 직장생활보다 더 중요한 겁니까? 학생들은 다른 날에 하는 학생들의 수업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 더 중요한 거예요. 정말 더 중요한데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직장의 일보다 덜 중요하고, 학교의 일보다 덜 중요시 여기는가? 그것은 그쪽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그쪽이 날 살린다고 보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세계가 우리보다 넓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 있는 것이 마치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세계에서 잘되는 것이 마치 구원되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기 때문인데 예수님의 세계는 더 넓어요.
그 넓은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 월급을 얼마 받는 인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의’, ‘그 의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인 겁니다. 이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린 사람에게만 제공됩니다.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은 직장이라든지, 학교 학생, 주부, 목사, 백수가 되었든지 관계없이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서 살아 계시는데 어떤 식으로 살아 계시는가? 날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다른복음, 우리의 잘남, 우리의 상상력을 무시하는 일을 하시면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살아 계시되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끓어오르는 욕망, 욕정, 상상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우치시려고 살아 있는 거예요.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여기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산다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내가 죽었다”고 하니까, “죽었으면 네가 지금 목에서 숨을 쉬는 것은 무엇이냐?” 이렇게 자꾸 따지거든요.
그때 하는 말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네가 살았다고 하는 그 ‘살았다’는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말을 했어요. 이게 참 어려운 말인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아직 육체가 남아 있는 것은 내뜻이 아닙니다.” 그 뜻입니다.
‘현재 내가 지금 시력이 얼마고, 키가 얼마이며, 몸무게가 얼마냐?’ 하는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라는 믿음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지금 주님을 고백하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 살아 있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17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야~! 이 구절구절이 사람 환장하고 미치게 만들어요. ‘예수님을 믿었는데, 십자가를 믿었는데 나중에 도착해 보니까 지옥이더라. 그러면 그 십자가의 보혈이 완전히 거짓말을 한것밖에 더 되느냐’ 이말 입니다. 이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에 누가 하나 시범조로 나와야 합니다. 누가 나올래요?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작은 예수님! 내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를 5년쯤 믿다가 안믿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를 믿게 한다면, 예수님께서 잘못되지 않는한 나도 잘못될 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좀 예수님을 앞장 세워 달라’ 이말 입니다. 사람이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자꾸 믿는 자기를 앞장세우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실패를 안 하는 이유가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났잖아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더 이상 나 믿지 말고 예수 믿으면 된다’는 말이거든요. 만약에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면 예수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인데, 예수님이 잘못되어 버리면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확실할 것 같으면 이제부터는 내가 나 자신의 주특기를 내세울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소용 없어지면 예수님 자체가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모자라서 율법을 세우면, 예수님께서 나를 원수로 취급해서, 내가 다른 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나를 원수로 만들 것이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구태여 예수님한테 원수 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완성했다면 예수님 편들면 되지, “예수님 그게 아니고요. 십자가로만 안 되고요 따로 법이 있어야 됩니다”라고 나서면 예수님이 날 가만두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예수님한테 밉상 받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형님! 잘하셨습니다.” 이러면 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을 옹호하기 위해서 예수님 하신 일의 완벽성을 증거 하면 그만이지 거기에다가 내가 추가적으로 보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면 오케이다!’ 예수님을 증거 하면 성도이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면 그것은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냐?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부활이 안 되었다면? 안되었다면 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죠. 예수님이 부활이 안되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죠. 부활될 수 있는 메시아를 또 기다려야죠. 문선명이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이근호를 기다리든지 누구든 기다려야죠. 제가 한번 죽었다가 부활해 볼까요?
이미 끝났어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끝났으면 그분만 믿으면 되는 거예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걱정한다는 것은,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남에게 나쁜 인상을 안남기기 위해서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보다도 자신의 잘남을 더 가치 있게 보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마귀가 와서 우리보고
“야! 너 좀 모자라지? 부족하지?”
“그래 부족해.”
“부족한게 왜 복음전해?”
여러분! ‘부족한 것이 왜 복음전하냐?’ 하는 말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족하기 때문에 복음을 못 전하고, 뭔가 문제가 있기에 복음을 못 전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율법 안에 놓인 사람이에요. 진짜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으면 도리어 우리가 죄인 되었다고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찬스가 되는 겁니다. “그래! 부족하기에 오히려 나는 감사한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3장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이 갈라디아가 어디냐 하면 현재의 터어키입니다. 현재 터어키의 남쪽 지방이 갈라디아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게 또 말이 안되네? 여러분들이 시력이 얼마나 좋으면 오늘같이 청명한 날씨에도 시경이 몇 키로나 됩니까? 남산에 올라가면 약 15km쯤? 좀 날씨가 흐리다 싶으면 4km 정도밖에 안돼요. 그것도 눈이 좋은 사람일 경우에 그렇죠. 그런데 갈라디아에서 예루살렘까지 몇km입니까? 십자가가 보이겠습니까? 보인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게, 이미 십자가 철거한지가 언제인데 십자가를 볼 수가 있습니까?
대체 사도바울이 시력을 자랑하라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는 여전하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주님께서 십자가만으로 일하시는 것이 안보이냐?’ 이말 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만으로 일하시는 것인데 그게 안보이냐?’ 이말 입니다. 만약에 십자가만으로 일하시는 것이 안보인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율법의 행위를 내세우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도다 이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 못박혔다.”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은 2장 20절에 의하면 누가 못박혔다? 누가?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서 못박힘을 당했다’ 이말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이제 내가 나를 자랑할 것이 없다’ 이말입니다.
사람은 결국 죽잖아요.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뭐가 있으리라? 심판이 있으리라. 이것은 사람이 의논해서 정한 것이 아닙니다. UN총회에서 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야할 제 코스입니다. 그 코스를 반환할 사람은 없어요. 그 코스를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그 정죄함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복음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난 겁니다.
“이 악한세대에서 자기 몸을 드렸다. 이 복음외에 다른 것을 믿는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찌어다.” 아멘? 아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제로 죽으시고, 실제로 못 박히고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도마를 믿게 하신 주님, 그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믿어집니다. 그로 인하여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선행과 착함에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과 용서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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