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3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3:57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라는 책이거든요. 지난시간에 1장 4절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상당히 궁금해요. 그 궁금하게 여기는 ■1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는 이야기해 줬습니다. The Lord Jesus Christ  gave himself for our sins, that he might deliver us from this present evil world,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and our Father:

그러니까 이 갈라디아서 1장 4절을 보시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모르겠다든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나는 들은 바 없다’든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가르쳐 준적이 없다든지, 그렇게 발뺌하면 안돼요.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참 모호하다’든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하나님의뜻에 대해서 모호하니까 기도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법대에 가서 판검사를 할까요? 의대에 가서 의사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그것은 기도 내용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정한 거예요. ‘내가 법대를 갈까요? 의대를 갈까요?’ 그렇게 자기 맘대로 일방적으로 정한 거예요.

그 둘 중의 하나를 하나님보고 골라잡으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말이 안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스스로 죽기 위해서, ‘한강에서 뛰어 내려서 죽는 방법, 1, 연탄가스 피워놓고 죽는 방법, 2, 독약을 마시는 방법, 3, ‘달리는 차에 뛰어 들어가는 방법, 4, 주여!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네 가지 중에서 어느 것으로 할까요?’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두 번째, 연탄가스로 해라’고 하겠습니까? 안하지요? 우리가 주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서 나온 것입니다. 죄라는 곳에서 나와서 우리가 말하게 된 엉터리 같은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인데, 죄지은 입장에서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법대 갈까요? 의대를 갈까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정해 놓았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자기 맘대로 ‘법대냐, 의대냐’, 정하듯이 정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는 법대를 가도록 기도를 했는데, 과연 법대에 합격을 했으니까 ‘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하고 우깁니다. 그러나 똑같은 교회, 의존교회에 고3 학생이 두 명이 있는데, 그 두 학생이 같은 대학의 법대를 지원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기도했는데 한 사람은 법대를 들어가고, 한 사람은 법대 못 들어가고 떨어졌어요. 그러면 둘 다 합격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봤는데, 한 사람은 되고, 한 사람은 안 되었으니까, 둘 중에서 누가 주의 뜻대로 된 사람입니까? 둘 다 주의 뜻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 다 죄에서 나온 것을 선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화투를 치면서 ‘장을 내어 놓을까요, 피를 내어놓을까요?’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거든요? 화투칠 때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여! 이번만큼은 따먹어야 되겠습니다. 이번판도 잃으면, 잃은 것이 벌써 5만원이 됩니다. 주여! 한번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 하면서 주의 뜻이라고 하고, 또 상대방은 ‘내가 이걸 따야, 제가 신혼살림에 김치 냉장고를 보탤 텐데, 제가 따게 하옵소서. 믿습니다.’

둘 다 화투를 치고 있다면, 둘 다 주의 뜻을 이룬 겁니까? 둘 다 아니지요? 그러면 축구시합을 한국하고 프랑스하고 하는데, ‘하나님! 주의 뜻대로 우리가 1:0으로 이기게 하옵소서’하니까 옆에 있는 붉은 악마가 화가 나서 ‘1:0이 뭐냐? 3:0은 해야지. 주여! 3:0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는데, 1:1로 비겼지요.

그러면 주의 뜻은 뭡니까? 둘 다 주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한테 다 쏠려 가는 거예요. 수고스럽지만 안경 쓴 어린이가 잠깐만 나와 볼래요? 복음을 위해서 희생을 좀 해주세요. 간단한 겁니다. 힘든 것은 시키지 않으니까. 임시로 예수님입니다. 임시로.

제가 기도하기를 ‘우리가 스위스한테 이겨서 16강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기도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다가 “너 비켜!” 해서 비키니까 주의 뜻이 누구한테 옵니까? 몽땅 다 주의 뜻이 예수님에게만 쏠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어디서 와야 됩니까? 예수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볼때 비로소 주의 뜻을 보게 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장마 비 오듯이 인간에게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한테는 아예 오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을 우리가 생각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을 기도할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성경말씀인데, 그 성경말씀 어느 구절도 우리가 지킬 수가 없어요.

이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경말씀을 한번 지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전부다, ‘전부 다를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그 인간을 저주 하겠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그 대신 죄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뜻을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오게 하지 않고, 우리 예수님한테 일괄해서 다 몰아넣어 버립니다.

예수님한테 하나님의 뜻을 다 몰아넣는 그것이 주의 뜻이에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주의 뜻을 이제 알았으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주의 뜻이 뭔지 모르겠다. 주의 뜻이 희미하다. 주의 뜻이 모호하다.’ 앞으로 그런 이야기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하나가 다 주의 뜻이니까, 달리 주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주의 뜻이 다 몰렸는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1장 4절에 보니까, “자신의 몸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드렸다.” 이게 아주 기분 좋은 말입니다. 왜 기분이 좋으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 이리와. 돈 내놔.”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너! 봉사해!”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너! 이리와. 얼굴이 왜 그리 시커멓게 생겼어? 선크림을 발라야겠어. 시커멓게 생겨서 천국에 못가.”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려요. 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상대의 가치를 묻지 않고, 아예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 않고, 그 사람의 허점을 따지지 않고, 시비를 걸지 않고, 드리는 쪽의 기쁨으로 그냥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 죄를 위해서 드렸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드리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자든지, 여자든지,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종이든지 자유자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 주신 것을 받을 수가 있어요.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한국인이든지, 중국인이지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가리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조건을 보지 않고 자기 몸을 그냥 드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에요.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뜻이 뭐라고요? 우리가 하는 것은 다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은 일체 받지를 아니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우리가 법대가든, 의대가든, 재수하든, 그런 것을 일체 보지를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은 전부다 예수님께 몰려 있는데,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데 어떻게 펼치는가? 여자나 남자나 그런 조건을 보지 않고, 자기 몸을 내어 놓았다는 거예요. 진짜로 자기몸을 드렸을까요? 진짜로?

도마라는 의심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 그 창자국과 못 자국이 예수님의 부활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아! 예수님께서 날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창에 찔리고, 못에 박히면서 피 흘려서 날 살리려고 하셨구나.’ “주는 그리스도시오 주는 하나님 이십니다”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게만 몰려 있고, 하나님의 뜻이 몰려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땅땅땅!’ 결정을 내렸어요. ‘더 이상 없음.’ 이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유혹하더냐?”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 말고 다른 식으로 구원받는다고 거짓말 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죠. 십자가외에는 어떤 것도 여러분들을 구원한 적도 없고, 반대로 말해서 십자가만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구원 안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되게 되어 있어요. 이유가 뭐냐? 우리의 것을 아예 안받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을 아예 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조건, 우리의 정성, 우리의 열심을 일체 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큰 회초리 들고, “숙제해! 숙제 잘하면 천국이고, 숙제 못하면 지옥이야.” 만약에 회초리를 들고 이렇게 설친다면 그것은 사람의 조건을 보고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숙제를 받아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 제 몸 갑니다. 지금.” 하고 ‘자기 몸을 가져다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것이고, 그 몸 안에서 우리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여러분! 이거 이해되십니까? 여러분이 이게 이해가 되시면, 정말 그 다음에(참~! 어린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린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 이럴 때는 어린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말라는 뜻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해요. 이런 때는), 어려운 말을 하나 하겠습니다.

과연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그다음 말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까지의 것은 이해가 되지요?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해가 되지요? 그 다음에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글로 쓰겠습니다. ‘말씀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신다.’ 이게 어려워요. 이게 어렵다고요. 이 말씀에다 괄호를 해서 ‘말씀(복음)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신다.’ 이 뜻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우리들은 자기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말씀을 가지고 위로 받기 위해서 말씀을 찾아오게 되지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 여기 있고, 말씀 저기 있고, 내가 어려울 때 말씀을 가지고 위로를 받으련다.’ 그것은 왜 잘못이냐 하면, 내가 다가가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말씀이 만들어 나가다 보니까 나 같은 인간이 생긴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말씀이 저기 있어서 쪼르르 말씀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없었는데 나보다 말씀이 먼저 있어서, 없는 나를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들고, 여러분도 만들어 낸 겁니다. 말씀이 알아서 말씀을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하나둘씩 만들어 낸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다 이말 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겠어요? 상당히 어렵지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어려운 것을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자, 여기 도화지가 있는데 여기 나무가 어디 있습니까? 나무. 나무가 없는데, 만약에 목사님이 여기에 나무를 하나 그려 넣으면 나무가 여기 있지요. 원래 나무가 없는 거예요. 없는데 나무를 그려 넣으니까 나무가 생겼습니다.

자, 이 나무보고 묻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네가 말씀을 믿느냐?”라고 물으면 나무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겠지요? (아~! 어렵다! 어렵다!) 내가 여기 있고, 성경 말씀 여기 있는데 “나는 이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이게 아니고, “내가 아예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는 나무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이제는 말씀에 의해서 나무가 만들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 말씀이라는 것이 상당히 모호하니까, 구체적으로 더 분명하게 말하기를, ‘복음을 위하여 복음대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복음대로.’ 복음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여기서는 반드시 지옥 갈 사람도 만들어야 되고, 천국 갈 사람도 만들어서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두는 식으로 이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만들어 지는 거예요.

거기에 ‘지단’도 있어요. ‘지단’이 헤딩으로 상대방 선수의 가슴을 왜 박아 치는가? 그것은 복음을 위해서 박아야 하는 거예요. ‘지단’을 아십니까? 축구선수 지단. 왜 석유 값이 75달라로 올라야 하는가? 복음을 위해서. ‘나는 복음에서 어떤 위치입니까?’를 물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묻지를 않아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자, 나를 어떻게 하면 천국에 보내지?’ ‘옳지 복음을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거예요. ‘자, 나무가 여기 있는데, 이 나무가 말하기를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옳지 말씀을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나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거예요.
다시 합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어디로 쏠렸다? 예수님에게 쏠렸다. 하나님의 뜻이 다 예수님에게 쏠렸으면, 그 다음부터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뭇잎새 하나하나 까지도 전부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복음의 뜻을 위해서 바람에 흔들려야 하는 겁니다. 밤중에 소리 없이 활짝 핀 그 달빛도. ‘그 달빛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오늘도 그렇게 비추이나 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이 복음을 위해서 다 있어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심지어 나중에 있는 천국과 지옥까지라도 복음이 기준이 되어서 천국과 지옥이 쫙 갈라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있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했어요? 안했어요? 사도바울이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사도바울 입 다물어! 사도바울!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마!” 그래서 사도바울이 입을 다물었습니까? 사도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무엇을 위하여? 복음이 복음답게 되게 하기 위해서 저주를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복음이 복음답게 되기 위해서.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복음이 복음답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주를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어떤 청년이 계신데, 그 청년의 어머니께서 순복음교단의 전도사님입니다.

그 청년이 제가 지은 책을 읽어보시라고 드렸어요. 그 책이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입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책을 받고 난 뒤에, 아예 읽지를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제목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하나님이 지옥의 하나님이 있냐? 천국의 하나님이지. 이런 제목은 처음본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옥이 없습니까? 있지요? 지옥은 누가 가야 됩니까? 저주 받은 사람들이 가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저주받을 짓을 한 이유가 뭡니까? 오직 무엇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까? 다른 복음을 믿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제가 약이 올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지금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저주받는 이유는, 사도바울이 전한 이 갈라디아서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지옥을 가야 되는 겁니다. 그들이 지옥을 가줘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복음대로 탄생하고 복음대로 사라진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이 일부러 ‘내가 전한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은 저주받는다’고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합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가 마구 솟아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뭐라고 하면서 죄를 짓느냐 하면 그게 죄가 아니래요. 자꾸 죄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그것은 죄가 아니래요.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분명히 죄인데,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냐 죄가 아니냐를 보기 위해서, 십자가복음을 가져다 대니까, 그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거예요. “거봐! 네가 저주받을 사람 맞잖아.” 십자가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지요. 전에는 내가 지옥 가는지 천국 가는지 분간을 못했는데 사도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니까, “아~, 나는 그거 싫어. 나는 안 믿어.” “거봐! 그러니까 너는 지옥을 가는 거야”라고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잠시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어떤 죄를 짓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게요. 이걸 말씀드려야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가 이야기가 되거든요. 지금까지 한 것을 천천히 다시 정리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오지 않고 누구한테 간다고 했어요? 예수님한테 간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 하면, 우리는 죄악 된 세대이기에 죄가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한테 다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쏠리는 하나님의 뜻이 뭐냐? 보니까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하여 드렸어요. 자기 몸을 드린다는 말은, 우리한테 뭘 받아서 구원해준다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준 것을 그냥 가지고 있어라’ 그 말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아이든 예수님이 주신 것을 그냥 갖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방금 내가 이야기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목사님 저주 받는 복음이 어떤 복음입니까? 어떤 복음이 다른 복음입니까? 어떤 복음을 믿을 때 나를 지옥 보내는 그런 복음입니까?”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돼요? 아니면 몰라도 됩니까? 어떤 복음이 나를 지옥 보내는 복음이냐? 그래서 여러분은 ‘천국의 하나님’만 알면 안 되고, ‘지옥의 하나님’도 반드시 알아야 돼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한 그 순복음교단의 여전도사님은 ‘지옥의 하나님’ 그런 것은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안되지요?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지를 알아야, 천국은 그 맞은편에 있으니까 천국 갈 사람이 구분될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죄냐?’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죄에서 나온 복음이 다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2 죄에서 나온 복음이 다른 복음이고 이 복음이 이어져서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지옥에 놓여진다는 말 입니다. 여기서부터 제가 좀 어려운 용어를 쓰겠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쓰고 제가 풀이를 해 드릴게요. 인간은 어떤 죄를 짓느냐 하면, 죄에서 나오는 것은 환상, 또는 상상입니다.

사람은 아침에 눈만 떴다 하면 상상을 하고, 꿈을 그려요. 사람이 자꾸 뭔가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지를 않아요. 이것은 누구나 상관없이 뭐든지 상상합니다. 아침에 버스를 타려고 가게 되면 어떤 상상을 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버스 정류장에 가기만 하면, 내가 탈 버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착 오기를 상상하죠.

실제로 그렇게 됩니까? 안됩니까? 그렇게 안되지요? 어떤 때는 차를 놓치게 되면 10분도 걸리고 20분도 걸릴 때가 있잖아요. 그렇게 안될때, ‘아하 내 상상은 이 세상의 현실과 상관 없는 것이구나’ 그래서 내 상상에서 나온 것을 전부 다 ‘허구’라고 합니다. ‘허구.’ 허상이다. 빈껍데기다. 빈껍데기만 자꾸 상상을 하는 겁니다.

어떤 아가씨가 말하기를 “나 예쁘지?”라고 하는 거예요. “난 참하지. 나는 참 예쁜 여자지 .” 그런데 그게 상상이고 허구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아가씨가 나중에 결혼한 뒤에 나이가 83세가 될 때, 과연 그게 예쁠까요? 물론 83세된 할머니한테 86세된 할아버지가 예쁘다고 하지만 83세된 된 할머니가 여러분 앞에 가면 “할머니 너무 늙었어. 주름살 좀 봐”라고 하지 예쁘다고 할 어린이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애들은 솔직하니까. 사람들은 잠시 예쁜 듯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게 되면 자신의 본색을 다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내는 인간의 본색이란 엽기적이고, 귀신같고, 해골 같은 그런 무서운 몰골입니다. 그러면 지금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는 이것이 진짜 현실입니다.

어린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어린아이가 있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시체가 될 정도로 늙어가고 죽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처음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점점 본색을 드러내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시점, A라는 시점, B라는 시점을 딱 끄집어내서, ‘이것이 나다. 이것이 참다운 나다’라고 끄집어내어 봤자, 그것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목사님! 저는 항상 웃음이 넘치거든요”라고 웃는 순간, 사정없이 귀때기를 때리면 “왜 때려!” 하고 화를 낸다는 말이죠. 한순간 웃더라도 그 다음에 하나님의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닥칠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될지 상상도 못하죠. 우리는 늘 우리의 것을 상상하면서 사는데,하나님편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 항상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우리는 날마다 허구만 상상하는, 꿈만 꾸고 껍데기밖에 없는, 나중에는 이 껍데기마저 바삭 바삭 다 부서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채로(새우튀김이나 닭튀김 할때 바삭바삭 다 부서지잖아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메일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제가 평생 동안 힘든 일을 해서 제 몸이 아픈데,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몸이 아픈 나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그런 심한 말을 합니까? 저는 항상 기뻐하려고 애를 쓰는데 몸이 안 좋아서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런 편지를 제가 받았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답장할래요?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라는 기계를 죽음을 향하여 망가지도록 하고 계신다는 그 자체를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답변이 어려워요. 여기 지금 종이가 있습니다. 이 종이가 하는 말이, “목사님! 제(종이)가 이렇게 지금 꾸겨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반듯한 종이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꾸깃 꾸깃 꾸깃!(종이를 마구 구겨버리는 소리). 없지!”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이 종이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라’ 이 말이죠. 지금 우리의 아픈 몸도 언젠가는 다 고장 나서 없어집니다. 그렇게 없애시는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가지고 기뻐하자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웃느냐를 가지고 기뻐하지 말고, 나라는 자체보다 나라는 자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퍼붓고 있다는 이점이 좋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자라는 나에게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속 일을 나에게 퍼붓고 계신데, 그 퍼붓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이 망가진 몸 가운데 있는 나를 위해서 지금도 죽음으로 죽음으로, 기계가 망가지고 완전히 부서지도록 없애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그    것을 보고 기뻐하라는 말이죠.

“주님! 오늘도 기뻐합니다.”
“왜?”
“오늘도 이 몸이 부서지고 죽어가니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내 소원대로 되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되고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 때문에 기뻐야 된다는 말이죠. 내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되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기가 원한 것을 기뻐하게 되면, 그 원하는 것이 잠시 잠간만 있을 뿐이지, 내일이 되면 그 원하는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내일이 되면 또 슬퍼할래요? “주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놓고 내일이 되어서 달라지면 “주님 이게 뭡니까? ‘병주고 약주기’에요?” 이런 식으로 또 주님께 따질 겁니까? 지난주 제가 설교하면서 요나이야기를 했거든요. 요나가 자살하려고 할 때 무엇을 몰랐는가 하면, 박넝쿨의 그늘이 그만큼 좋은지를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요나가 자살하려고 할 때, 요나를 도와주는 것이 그 옆에 장난스럽게 박넝쿨을 하루 만에 키워서 슬쩍 밀어 넣습니다. 자살하면서도 시원해지니까 뭔가 기분이 좋아졌어요. 기분이 좋아지는 판인데 갑자기 그 시원하던 박넝쿨을 벌레 먹게 해서 하루 만에 말라 죽게 하니까 갑자기 또 화가 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장난질을 칩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아주 지극히 작은 것에서조차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 있는지 네가 알고나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런 보잘것 없는 박넝쿨에도 엄청나게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랑과 은혜가 듬뿍 담겨 있다는 것을 죽기 전에 네가 알아보라”는 겁니다. 죽기 전에.

그 박넝쿨하고 너하고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죠. 너는 자꾸 “나! 나!” 이렇게 하고 있지만, 박넝쿨도 쓰임 받듯이 너, 요나도 그냥 쓰임 받는것 뿐이기에 독자적인 나의 가치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뜻대로 안되면 또 자살할 놈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뜻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맨 날 상상하는데, 상상하는 것이 누구 위주냐 하면 예수님 위주가 아니고, 전부 다 자기 잘되기 위한 자기위주의 상상을 합니다. 사람들의 죄의 모습을 글자로 쓰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 용서가 안된다.” 이것은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모든 문제가 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운다면 나는 그자가 누가 되었든지 나는 용서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사람들이 평소에 모든 노력과 노동과 행동을 하는 그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나를 나쁜 사람에서 건져 내기 위해서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지독한 ‘자기의’입니다. ‘자기의.’

‘자기의로움’, 지독한 ‘자기정당성’이죠. 로마서를 공부하고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나는 갈라디아서를 오늘 의존교회에서 공부했다. 또는 로마서를 공부했다’는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나쁜 사람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나를 좋게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위주의 상상을 또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갈라디아서 강의를 듣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열강을 듣습니다. 나, 그만큼 착했지요?’라고 상상을 하는데,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 다시 이야기 합니다. ■3 복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고, 복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모여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 되기 위해서 자기를 가꾸는 일에 봉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몸을 드림을 모독하는 다른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다른 복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제가 아까 순복음 교단을 이야기 했지만 순복음뿐만이 아니고 순두부도 마찬가지이죠?

순복음이든, 순두부든, 순곱창이든. ‘내가 여기 있다’는 이 말은 나에게서 다른 복음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이 계속해서 튀어 나오는 거예요. 다른 복음이란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확 빼버리는 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확, 뿌리채 뽑아버리고 직접 하나님과 맞상대 하겠다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그래서 ■4 다른복음을 한 설교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눈감고 성경 아무 본문이나 펼치겠습니다. 딱 펼치니까 빌레몬서가 나오죠. 1장에 떡 보니까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몬 1:22).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들아 사도바울이 방문할 때 잠자리 좀 마련해줘” 이말 이거든요.”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어떤 것이 비복음이고 다른 복음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목사님 갈 때 제발 잠자리좀 준비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믿습니까?”

이렇게 하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복음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가는데 처소를 예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뭘 할 때, 자기 공로와 자기 의로움이 추가가 되어야 할 텐데, 처소를 예비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처소를 예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오늘 서울에서 오셨는데 제가 처소 하나 예비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하다니 참 부끄러워요. 어떻게 제가 죄인인데도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자기를 낮추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어떻게 상상하냐 하면, 그 행동에 의해서 반드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쪽으로 상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상상으로 인하여 또 다른 복음이 우리 속에서 생산되고, 양산되고 있는 겁니다. 진짜 복음은 “아무개야!” “예!” “너는 어떤 목사님의 처소를 예비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라”하는 주님의 지시와 명령(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만 되기 때문에)에 따라서, 오직 주께서 지시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때, 그때 모든 공로는 누가 가져가시는가 하면 내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홀라당 다 가져가 버립니다.

어떻게 행동을 해도 모든 공로와 영광은, 예수님이 다 가져갈 때, 그렇게 되는 그런 마음이 생길때, 그 마음이 바로 바른 복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 모든 공로를 다 가져가려면,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죄인으로 남아야 돼요. 죄인으로 남아야 되고, 예수님만이 의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바른 복음으로 남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다른 복음이란 항상 눈만 뜨면 나 위주로 상상한다는 것이 다른 복음이 아주 활발하게 생산되고 양산되는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백성 같으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공로를 자기백성에게는 담지요. 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상상하고 예상한대로 일이 안되고 꼬이기 시작합니다. 꼬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런 예수님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지요.

그 미워하는 그 순간과 더불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렸다는 것을 마주하게 하실 때, 비로소 나는 죄인이며, 오직 모든 구원은 주님의 공로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짧은 순간(어떤 분은 0.2초라고 하는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난 2.5초 정도는 봐줬는데. 주일에는 2.5초, 보통날은 1.5초. 하여간 0.1초든 뭐든간에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으니까 시간과는 관계없고), 뭔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 ‘이것은 다른 복음이야’라는 것을, 그때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느끼는게.

느껴진다고요. ‘아~! 내가 또 상상을 해서 나를 기준으로, 나 위주로 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구나.’ 자기애가 시험을 쳤다. 성적표를 받아왔다. ‘지난번 시험에서는 반에서 중간쯤 했는데 이번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아마 좋은 성적 나왔을 거야. 잘하면 1등이나 2등도 할 수 있을거야’라고 잔뜩 상상하고 기대를 했어요.

그렇게 기대를 했는데 막상 성적표를 받아서 보니까, 일이등은커녕, 끝에서 일이등을 해버렸어요. 그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원망스러워요. ‘주님도 자식 낳아 보세요. 이것이 기뻐지는가? 예수님은 경험을 안 해봐서 모르시죠. 애를 낳아서 경험을 해 보세요. 이것이 기뻐지는가?’ 이러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누구든지 어떤 경우라도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 나는 용서가 없다. 나는 못참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참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항상 십자가와 무엇과 견주냐 하면, 십자가와 자신의 의와 항상 이렇게 견주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색, 자기는 나쁜 사람 안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색, ‘내가 나쁜 사람입니다’라고는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약간이나마 전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고 싶어 하는 그 심정. ‘내가 나쁜 놈입니다’라고 자인했다는 그것이 얼마나 뿌듯하게, ‘약간이나마 그래도 선한 사람 되었지 않느냐’ 하고 자부를 느낄 정도로 인간들은 자기 절대성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면서 성도를 다룬다는 것이, 예수님 편에서 보통 고역이 아니에요. 성질 더러운 인간들하고 상대하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애가 다 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성령의 탄식’이라고 합니다. 탄식이 뭐냐? 무릎을 치는 거예요. “어이구! 어이구! 어이구!” 이 탄식이 아모스에 보면 뭐라고 나오냐 하면, “어이구! 화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탄식하는 거예요. “어이구 인간아! 인간아! 그렇게 네가 잘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환난중에 기뻐하노니, 환난당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 내가 약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통이 아니죠? 내게 환난이 주어질 때, 환난을 통해서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가 다 했다는 것을 알아서, 예수님이 하신 것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님이 하신 것 때문에 내가 맘 편하고, 기쁘고. 그게 더 기쁘다는 거예요. 내가 뭘 했다는 기쁨보다도.

내가 하는 것은 매일 상상해서 하는 그것이기 때문이죠. 내 애가 만약 10등이라면, “잘했는데 다음에 5등해.” 10등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5등이라는 것을 상상하고, 5등 안되면 7등했다고 또 화를 내고, 매일 매일 자기 위주로 상상하고 또 상상하다가 볼일 다보고. 여기에 무슨 행복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조바심과 안절부절, 신경통, 류머티스, 편두통, 변비,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안 아픈데 없이 오만 군데 다 아프고.

세상이 그렇게 안절부절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매일같이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같이 상상해요. 그게 바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다른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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