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7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1

갈라디아서 제 7강 (이근호목사, 2006년 10월 13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3장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거죠. 성령은 육체하고 다르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죠.

우리는 육체로부터 시작해서 육체로 모든 것을 마치는 식으로 평소에 살아왔는데,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를 안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달리 표현하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인데, 십자가를 안쳐다 본다는 것은 결국 성령으로 시작했다고 우기지만 육체로 끝난 결과가 그렇기에 십자가를 안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육체와 협조하느냐? 육체와 더불어서 어떤 토론을 하느냐? 성령이 육체에게 어떤 호소를 하느냐? 그것은 전혀 아니거든요. 만약에 십자가를 아는 것이 육체에 대해서 협조를 구하고 설득을 해서 안다면 이때 십자가는 육체와 관련이 있는 십자가죠. 십자가는 뭐만 고집하느냐 하면 계속 육체가 아닌 쪽으로 고집해요. 절대로 육체로 십자가를 알았다는 그런 소리가 안 나오도록, 할 수 있는 대로 계속해서 육체를 피해 가는 겁니다.

십자가는 ‘역시 나는 성령으로만 십자가를 알게 되었어’라는 쪽으로 계속해서 일관되게 쭉쭉 가고자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가 감이 잡히죠. 십자가가 인간의 육체하고 의논하거나 협조하거나 협력하지 않고 계속해서 육체와 다른 차원, 성령쪽으로만 국한함을 볼 때에 십자가안에는 육체를 거부하고 배타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겁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는 육체를 죽여 버리는 거죠. 그게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거죠.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만약에 네가 살았다고 여기거든 그것은 옛날에 네가 육체로 있을때 살았다고 여기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라는 말이죠.

우리가 지금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약 200조의 세포가 숨을 쉬고 있잖아요. 인간의 몸은 세포의 구성에 의해서 말도 하고 심장도 뛰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살았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을 살았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육체적 관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현재 심장이 뛰고 말을 한다고 해서, 또 머리가 돌아간다고 해서 그것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생각이고 본인생각이지 하나님은 그것을 살았다고 보지 않는다는 거죠.

사람이 자신을 볼 때 ‘나는 살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무리 살았다고 우겨도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들이대면서 오셔서, ‘너는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고 간주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취지를 우리가 동의하고 수용한다면 내가 살았다고 하는 이것도 우리가 폐기 처분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은 자 맞습니다. 난 살아 있는 자 안할게요. 죽은 자 할게요. 맞습니다’ 하고 살았다는 것을 폐기처분 하고, 그 다음에 율법적 관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에 우리가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을 배제하고, 율법 없는 채 ‘나는 살았어? 죽었어?’라고 생각하는 것 보니까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겁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나를 보니까 나는 엄연히 살아 있는 겁니다.

말을 하고, 행동도 하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판정을 내리기를, “너는 육체적 관점으로 보니까 산 것으로 보이나?” “보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전혀 하나님을 못 알아보는 거야.” “너는 지금 율법적 관점으로 보지 않고, 너의 관점으로 보니까 네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율법적 관점을 한번 당겨와 봐라.” 당겨와 보면 “너는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라 이 말이죠.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 라면 그 다음부터 율법을 제거하면 ‘헤헤이 나는 살았지’하고 다시 나올 수 있는데, 율법이 우리 앞에 딱 도달한 이상은 율법이 자진해서 철수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죽어 있는 거예요. 율법이 일종의 탱크라면 탱크가 몰려왔다고 칩시다. 대포달린 탱크가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너는 죽었어”라고 하는데 이게 우리쪽에서는 밀어낼수가 없는 겁니다. 워낙 무게가 나가니까요.

지금까지 한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십자가를 안보겠다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경우에는 그럴 수가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안 본다는 것은 성령님이 하신 일이 아니고, 육체가 나서게 되면 십자가는 안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아는 것은 육체로는 안 되고 모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알 때만이 십자가를 알게 되는 것인데, 성령은 우리 육체하고 협조, 협력해서 십자가를 알게 되지 않고, 반드시 우리 육체를 비켜가는 방향으로, 육체와 상관없는 독자적인 능력이 임해서 십자가를 알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성령님에게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알았더라면 그것은 육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열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엄연히 살아 있는 우리를 성령께서 왜 배제하는가? 우리가 살아 있기에 노력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고 시키는 대로 다 할 수도 있고, ‘쉐마!’(내가 듣겠나이다) 할것 같은데, 그것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우리 스스로 자기를 판정하기를 ‘나는 살았다’라고 규정하는 그 관점입니다.

‘니체’라는 철학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사람이 자기로부터 착각을 일으킬 때가 언제냐 하면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정 지을때다”라고 했어요. ‘저것은 선풍기이고, 이것은 비타 500이고, 나는 누구라고 규정지을 때부터 그 인간은 이미 진리와 관계없는 인간이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날마다, 날마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사람이 ‘스톱!’ 하면서 뭔가를 결정짓고 난 뒤에 반드시 붙는 것이 있는데 그게 이름입니다.

내가 뭔가를 이름 붙여서 규정짓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 사람은 거짓된 사고방식을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전부를 압니까? 우리가 100년을 삽니까? 200년을 삽니까? 100년을 산다 해도 세상 전부를 다 모르지요? 지금 우리가 서울에 있지만 강남의 송파의 어느 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잖아요.

세계전체를 다 아는 상태에서 ‘이것은 선풍기다 이것은 무엇이다 너는 누구다’라는 규정을 지어야 할텐데, 세상전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내가 보기에는 ‘너는 이렇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거짓과 오류의 출발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것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정죄해 왔다는 겁니다.

존재가 감히 다른 존재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자기가 스스로 규정한 자기 입장에 근거해서, 남에 대서 이렇다 저렇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전체를 뒤덮는 큰 변화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잘못되고 착오가 큰 사고방식이라고 니체는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뭔가를 의식할 때 언제 의식이 되느냐 하면, ‘내가 저것은 무엇이다’라고 규정할 때 의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서 흘러간 과거를 생각하면, 저기 모여 있는 집들이 무슨 동네고, 지금 무슨 계절인지 몰라요. 그런데 ‘어! 단풍 들었네! 가을이구나’라고 규정지을 때 비로소 나를 느끼는 겁니다. 더 쉬운 예로 그냥 내가 밥을 먹을때는 ‘배고프다. 먹자’ 이것밖에 다른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런데 밥을 먹고 있다가 어떤 사람이 가까이 왔을 때 ‘이것은 내 밥이야’라고 하는 순간 ‘나와 너’의 차이를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 밥그릇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애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엄마와 자기가 분화가 되지 않은 상태라서 엄마 팔이 자기 팔이고, 엄마 다리가 자기 다리에요.

그런데 좀 자라서 ‘엄마 것은 엄마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할 때부터 이미 엄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되지 못하고 엄마가 하는 소리는 나에게 잔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독자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때부터 ‘엄마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규정을 짓게 되죠. 규정짓는 다는 것은 사람이 독자적으로 되고 난 뒤에 나오는 규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처음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느꼈던 그것이 오히려 진리답지, 독자적으로 떨어져 나와서 ‘엄마는 이런 사람’이라고 하면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좀 컸다고 나에게 도리어 잔소리를 해? 지금 나를 평가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대로의 그런 엄마가 아니야’라고 나올 때는 ‘이상하다 어릴 때는 생각이 같았는데 왜 커서는 엄마가 나에게 화를 내지?’ 그때부터 엄마의 길과 나의 길이 서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차이가 나면 둘 중의 어떤 것이 진리입니까? 둘 다 진리가 아니죠. 왜냐하면 둘다 하나님이 아니니까 둘 다 진리가 아닌 거예요.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채 그냥 사는 거예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가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식했겠어요? 그냥 무리잖아요. 어린애가 태어날 때 ‘응애’ 하면서 “내 기저귀 내놔라”하는 이런 어린애는 없어요.

어린애가 태어나서 보니까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저귀를 비롯한 모든 것을 이미 다 준비해놓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고 천국에 가게 되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그 모든 준비과정과 여정은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서 다 결정된 사항에 의해서 다 닦아놓은 것임을 그때 알아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린아이 같아서 부분 부분밖에 몰라요. 조각조각 안다는 말이죠. 그러나 나중에 주님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되면 우리가 설쳐 대면서 ‘네가 뭘 했다느니, 내가 뭘 안했다’느니,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고 우기던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께서 일괄적으로 다 준비하신 은혜속에서 움직였던 겁니다.

사람이 철이 없으면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철이 좀 들면 ‘세상이 나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혜택을 입는 입장으로 나라는 것으로 열매가 맺힌 거구나. 어떤분이 일을 벌렸고 그 결과로 삐져나온 열매가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그 결과물로 피어난 꽃 한 송이가 나라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열매는 가지를 찾아가 봐야지요. 찾아가 보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하나님은 기르시는 농부시고 나는 그 포도나무에 맺힌 자그마한 포도송이에 불과한 거예요. 풍선을 훅, 하고 부니까 풍선이 커진 겁니다. 풍선이 자기 힘으로 커진 것이 아니에요. 누가 훅, 하고 바람을 불어 넣은 분이 있다는 말이죠. 그분의 것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성도된 겁니다.

그분의 거룩과 그분의 의로움과 그분의 믿음과 그분의 소망과 그분의 사랑의 은사라는 선물로 들어올 때 우리는 풍선처럼 부풀어서 주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것을 봐야 하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뭐냐 하면, ‘나!’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볼까요?’ 나를 전제로 하고, 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이 성경말씀에 접근하려고 하니까,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육체라고 합니다. ‘육체.’

육체는 이미 십자가에서 멸해야 할 대상, 잘라내야 할 대상이고, 목을 쳐야 할 대상입니다. 육체는 이미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 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율법을 들이대면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죽은 행동들만 불꽃놀이처럼 퍼뜨린 거예요.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가 아무리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찬송하고, 헌금해도 그것은 죽어야 할 인간이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를 그냥 발산한 거죠.

마그마 폭발하듯이 확 터뜨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관점에서 보면 안 되고, 율법적 관점에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율법적 관점에서 ‘잘하면 살겠다’ 쪽으로 나가지 마시고, 이미 율법적 관점에서 죽은 자로 판정된 정답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정답이 나와 있는 상태에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해 나가는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왜 성경말씀에 의해서 죽어야 될 죄인인가’ 를 확인해 나가는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는 자”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겠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제거하고 율법 없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나는 과연 선한 자일까? 나는 과연 악한 자일까?’ 그렇게 측정해 볼 때, 사도 바울은 흠이 없는 자입니다.

율법의 진정한 뜻 없이, ‘나는 나다’ 라는 시선에서 율법을 바라보면서 율법을 평가해 보니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입니다. 그런데 진정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사도 바울을 들여다 볼 때의 그 시선으로 보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 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날마다 죽는다” 는 거예요.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 여기서 내가 율법에 의해서 마땅히 죽은 자라면, 율법을 가지고 나를 죽인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여기서 성립이 안 됩니다. 성립될 수가 없어요. 만약에 어떤 분이 다가와서 율법에 의해서 죽은 나를 다른 어떤 의로움으로 나를 살려 낸다면, 그때는 ‘나부터 출발하는 나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나’ 가 되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의 소유라고 합니다. 값으로 주고 샀으니까 예수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입을 확 벌리셔서, 여기 있는 풍선에다가 바람을 집어넣습니다. 이게 풍선인데 이 풍선이 바로 나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은 나를 들어서 바람을 집어넣는데 뭘 집어넣는가 하면, 성령을 보내시는 겁니다.

성령을 보내시면 무엇이 따라 오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여기 담겨요. 예수님의 인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인물보고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하고 도마가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서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아라” 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대신 죽으심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도마가 하는 말이 “주는 나의 구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라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인물을 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 하신 일을 여기 풍선 안에 담아내요. 하게 되면 여기서 새로운 나가 생겨나는데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담아내는 ‘나’ 가 되죠.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는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내용은 뭐냐? 죽은 자도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생명을 얻어서 산 자가 되었다는 아주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새로운 나로 전환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하신 일이 담긴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율법은 죄가 있으면 무조건 그것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람을 불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이 안에 들어오면, 율법이 죽일 것이 없어요. 왜? 여기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의로움이 되거든요. 의로움이 되기에 율법이 이 사람을 죽었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산 자’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는데, 예수님 하신 일이 어떻게 의로움이 되느냐 하는 이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행동을 맘대로 하면 그것이 의로운 것이 됩니까? “나는 반찬을 안 먹어. 나는 밥만 먹을 거야.” “왜 그렇게 하는 건데?” “이것이 의롭거든!” 이렇게 우기면 여러분은 그것을 칭찬해 주시겠습니까? 칭찬 안 해주지요. 여러분들이 무슨 행동을 해도 의롭게 되지를 못해요.

성경에서 의롭다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할 때만 의로운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자기가 의롭다고 우겨도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 혼자 우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고 언약을 지킨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만 그 의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하신 일이 의로움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행동해서 율법을 지켜 놓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규정해 놓고서 ‘의롭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것은 잘못된 거죠. 예수님 하신 일을 가지고 의롭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만으로 율법에 대해서도 살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 성도를 “의의 종”이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의 종’이라는 것은 이제부터는 너는 죽었고, 의는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보여주는 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더불어 장사되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한 그 관계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것이 계속 유지될 때,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의의 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영생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살았다는 것’, ‘죽고 살았다’ 는 그 관계가 계속 남아 있을 때만 그것이 주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야! 이제는 내가 하겠다.’ 그것은 의가 안돼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가 빠져버리면 그것은 의가 안 되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십자가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 고 십자가가 빠져 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 가 아닌 겁니다. 십자가가 증거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육체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일방적으로 우리 속에 예수님의 뜻을 담습니다. 담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 ‘내 행함에서는 의가 나오지 않고 죄만 나온다’ 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죠. 풍선을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풍선이 여기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가 나오죠. 하나는 ‘나는 죄인이다’ 하는 것과, ‘예수님의 의가 참된 의다’ 하는 이것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이게 십자가니까요. 만약에 ‘나는 죄인이다’ 가 빠져버리면, 십자가의 의가 없어집니다.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까 십자가는 생각하지 말자’ 고 하면 십자가의 의는 없지요.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나는 율법에 의해서 죽을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 이 십자가입니다.

만약에 십자가를 걷어 치워버리면 ‘나는 죽을 죄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니까 이제는 생각하지 말자’ 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의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너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율법이 항상 죽였다’ 는 그것이 그 안에 증거로 담겨 있고, 그를 사랑으로 살리고 용서했다는 것이 함께 담겨 있을 때 그게 합쳐서 하나님의 거룩이 되고 의가 되고 십자가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죽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에 얼마나 필요한지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았다’ 라는 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어야 되고, 그 십자가가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되고 거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주를 받은 겁니까? 왜 죄 없으신 분이 저주를 받았습니까?’ 할 때 반드시 나오는 것이 뭐냐?  ‘같이 있는 인간들이 저주 받아야 할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위하여 함께 죽으셨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의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파트를 사줬는데, 아들이 이야기하기를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고 받더란 말이죠.

그런데 그 집에 가서 보니까, 아버지의 초상화가 없어요. “얘야! 내 초상화가 어디 있느냐?” “아버지! 이미 그 집을 나에게 줬잖아요. 이제는 그 초상화 말고 내 초상화를 걸거예요.” 그러면 그 아파트는 ‘내가 영생 얻었다’ 는 아파트지, 십자가를 말하는 아파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잠시 예수님을 이용했을 뿐이죠. 그게 바로 육체라는 말입니다.

나는 계속 죽어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내가 살아 버렸어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해 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육체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분이 예수님 밖에 없음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이 있는데, 우리는 잠시 그것을 이용해가지고 ‘헤헤! 예수님 덕분에 나는 살았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육체입니다.

그 사람에게 십자가는 단지 과거의 활동입니다.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까 잊어야 하고, 갖다 버리라’ 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지 십자가가 뭐가 중요하냐?’ 이러는 겁니다. 내 안에 십자가가 있어야 할 것인데 십자가를 뽑아 버린 거예요. 왜? 썩은 이빨이라고요. 자기 이빨은 건강한 이빨만 남겨 두기 위해서요.

말로만 ‘주님 덕분에’, ‘하나님의 영광’, 이렇게 하면서 증거 하는 것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가 살았다’ 든지 ‘영생 얻었다’ 는 것을 증거 하니까, 이것이 바로 육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이 바리새인들인데 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볼 때에, ‘나’ 라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규정된 ‘나’ 가 있기 때문에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 바리새인이라면 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바로 그것이 나에서 출발한 죄인중의 괴수였다’ 는 것을 안 거죠.

내가 나의 열매가 되면 안 됩니다. 나는 예수님의 열매가 되어야 할텐데, 내가 나를 살리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의 이용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이용물이 되고, 철저하게 예수님이 도구가 되는 겁니다. 심지어 나는 매일 같이 죽어야 되고요. 내 안에 그리스도는 살아나야 되고요(고후 4:10,11).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는 날마다 사망에 넘기우고,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너희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고린도 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성령 안에 있는 체험입니다. 그 체험 말고 다른 체험은 다 엉터리입니다. 날마다 사망은 내 안에 역사하고, 그로인하여 나는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고, 그렇게 넘기우면서 생명이 나오는데 그런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는 죽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그런 활동을 지금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맨 날 나를 죽이고 내 안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끄집어내고. 그 일을 성령께서 늘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끄집어내는데 그렇게 끄집어 낸 그것을 석자로 뭐라고 한다고요? 세자! 십자가! 십자가가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 ‘나는 구원받았다’ 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나와요. 그때 그 십자가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내 대신 저주 받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 나셔서 이제는 나를 살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 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이 말하기를 “왜 당신은 십자가만 고집하느냐” 라고 할 때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 외에는 달리 내용이 없습니다. 새 언약은 십자가로서만 이야기를 해야지, 새언약이 다른 것으로는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새언약만 이야기를 합니까?” “새언약이 전부요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병이어 같은 기적도 행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요청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했습니다. 여기 물이 있지요? 얏! 하면 포도주가 됩니다. 신기하지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였지요? 신기하죠. 그런데 그렇게 먹고 그렇게 봤던 사람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다 떠나고 말았잖아요. 예수님이 오천명을 먹이고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새언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내 피와 내 살을 마시는 그것이 종착점인데, 그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다 떠나고 말았어요. 분명히 예수님이 주신 떡으로 먹고 배불렀어요. 짬뽕 먹고 짜장면 먹고, 배불러서 좋아 하면서 고마워하면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삼자’ 고 칭찬을 늘어지게 했지만 정작 주고자 했던 예수님의 살과 피, 새 언약을 이야기 할 때는 “어렵도다. 이게 무슨 말이냐?” 고 하면서 “못 알아듣겠다” 고 했습니다.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지요.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여기 이미 있고, 나는 살았는데 이 살고 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는 누굴 믿으면 되지?’ 이런 식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는 판에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이야기 하니까, 결국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먹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한 겁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뜯어 먹습니까? 식인종입니까? 실제로 예수님의 살점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뜻은, 인간이 육체로 그것을 받아먹는다고 해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새언약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능력은 성령이 와야 우리에게 개입되는 겁니다. 성령이 와야만 됩니다. 성령이 와서 날마다 율법으로 우리를 죽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가 성령에 의해서 피어날 때 비로소 그것을 성도라 하는 겁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 하잖아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도대체 뭔가 한 것이 없어요. 한 것이 없는 이유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것이 없는 겁니다. 뭘 해도, 뭘 해도 안 돼. 크리스마스 때 트리 만들어도 안 되고, 요셉으로 나와서 연극을 멋지게 해도 안 되고, 새벽 송을 돌아도 안 되고요. 뭘 해도 안돼요. 설교 잘해도 안 되고, 기도 많이 해도 안 되고, 전도 많이 해도 안 되고, 헌금 많이 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안돼요.

왜? 살과 피를 먹고, 살과 피가 능력을 발휘 시키고, 그것이 부각되어서 십자가가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완전히 우리 육체를 도외시 하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자기 맘대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를 맘대로 다루시고 주무르는 결과로 나오는 것이 뭐냐?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받습니다’ 소리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뜻입니다.

만약에 제가 한 그 말이 옳다면, 그야말로 십자가, 언약의 완성, 새언약이 전부라면 그 이전에 깔려 있는 여러 가지의 명령들, 말씀들, 율법들(십계명, 특히 제사 지내라는 이야기,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하라는 이야기 등등), 그 많은 이야기는 뭐냐?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 였는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감추고 우리를 현혹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놀리고자 한 이야기인가? 새언약이 예수님 홀로, 다른 사람은 일체 할 수 없고, 예수님이 단독적으로 이루는 십자가라면 그 이전의 것들은 정말 다 쓸데없는 것들인가?
아벨의 죽음과, 아브라함, 이삭의 이야기는 다 무엇이며, 다윗은 무엇이고 예레미야 다니엘 욥 스가랴 등등 이들의 존재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들은 왜 앞서서 등장했다가 사라져야 했는가? ‘그들에게서는 아예 본받을 점도 없고, 우리는 그들을 아예 잊어도 되는 인물들인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구약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야기와 모든 명령들을 한꺼번에 이야기 하고 있는가? 그것을 ‘율법’ 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고 해서 몽학 선생, 어리석은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어리석다는 말이 아니고 어리석을 때 가르쳐야 했던 교육방식이라는 겁니다. 그 어리석음이 무엇이며, 그 어리석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왜 없습니까? 그게 ‘내 힘으로 구원받겠노라’는 것입니다. 그 어리석음을 훈도하기 위해서 “이것도 한번 해볼래? 이것도 한번 해볼래? 다니엘처럼 해볼래? 예레미야처럼 해보지 그래? 이사야처럼 엘리야처럼 해봐! 다윗처럼, 모세처럼.”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모든 위인들의 대표자가 누구냐?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실은 그 밑에 많은 자손들을 퍼뜨렸습니다. 아브라함 자손 중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전달하는 자손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 에게서는 도저히 나오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오는 자식 계열이 있어요.

그 자식 계열은 하나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둘로 갈라집니다. 율법에 의해서 낳아진 자식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낳아진 자식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둘로 갈라집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지요. 4장 22절부터 봅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 이 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축복해서 이스마엘을 퍼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죄가 일어나야 어떤 자가 죄에 물들지 않는 자인가가 윤곽이 드러나거든요.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고, 죄인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스마엘에서 나오는 자식을 계속 퍼뜨리는데 그 계집종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21절에 율법에 속하죠?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 났다”  이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자유하는 여자가 뭐냐 하면, 율법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여자에게서 난 자식입니다. 율법과 상관없다는 말은 육체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 어떤 인간,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는 인간, 그 육체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발생된 육체입니다.

그런 약속에 의해서 생겨난 육체인데 이것은 인간의 생식 능력에 의해서 번식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어머니가 어디에 있느냐?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고 해서 하늘에 있습니다. 27절에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육체로 되는 쪽은 잉태를 잘해요.

잉태를 잘하는데 그 잉태가 어디서 나온 잉태입니까? 율법이 쏘고, 율법이 퍼붓고 있는 저주 아래서 아무리 새끼 치고 새끼 쳐 봐야 그 율법의 저주에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나는 그런 것은 잉태를 아주 멋지게 잘하는 거예요. 오늘 보니까 잉태한 분들이 아주 많은데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많이 잉태를 했는데 그것이 육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율법의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낳아야 되느냐? 그것을 낳아야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는 십자가가 나오거든요.

어떤 분이 저 한테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하나님께서 지옥 갈 사람을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때 제가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저는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당신을 천국 보내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천국을 가야만 하고, 어떤 사람은 지옥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셑팅(짝을 이룸)이 되어서, 율법에 의해서 지옥 가고, 약속에 의해서 천국 간다는 그 양쪽을 다 만나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됩니다.  당신은 거기에 동원된 하나의 엑스트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점으로 보지 않고, ‘나는 구원받아서 신나는데 왜 당신은 지옥 가나? 아, 안됐다.’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그랬죠. “저, 선생님! 지옥에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지옥에 천국이 있습니다.” 지옥에는 극락도 있고, 천당도 있어요. 극락이니 천국을 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느냐 하면 지옥에 가고 있는 겁니다.

진짜 천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구원되었지, 내 뜻에 의해서 구원되지 않았다’ 는 그것을 증거 하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이지, ‘나는 천국 가고 싶었는데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고 하는 사람의 그 천국은 지옥에 가는 천국입니다. 지옥은 놀이 동산입니다. 천국 코너도 있고, 극락 코너도 있고 많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기능적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함 인데, 이스라엘은 자꾸 오해하기를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 으로 자꾸 오해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들이 편하고, 아무 일 없을 때는 여호와를 버리고, 좀 답답하다 싶으면 ‘여호와여 살려주소서’ 하니까 주께서 그들을 살려 주기는 살려주되 그들이 원하는 구원방식이 아니라, 그들을 쪼개가면서 구원해요.

그들이 예상치도 못한 남은 자, 그들이 기대하지도 않던 자만을 남기는 식으로 자꾸 쪼개는 겁니다. 빵 속에 건포도가 들어 있는데 빵은 자기 속에 건포도가 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나를 구원 하소서” 하거든요. “그래 구원해 줄게” 해 놓고는 빵을 쪼개 버려요. 빵은 뜨거운 불속에서 타면서 “아이고 뜨거워라! 왠 지옥 불이냐” 하는데 그 빵을 개 한테 먹여 버립니다. “아이고, 내가 개밥이 되다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뭐가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진짜 찾는 것은 네 안에 들어 있는 건포도인데 뭐.” 그게 남은 자입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롬 11:5)고 합니다. 은혜로 남은자 7천명. 은혜로 남은자가 있어요. 지금도 쪼개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교회로부터 시작한다는데 지금도 계속 쪼개요. 예수님이 계획이 있어서 나를 구원했지, 내가 구원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의지로써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이 의식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전제로 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찾든 하나님을 찾든 반드시 ‘나는 버리지 마세요. 저는 버리면 안돼요’ 라고 이것을 반드시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고, 육체로부터 시작한 겁니다. ‘나 살아야 됩니다. 저 사람은 죽든 말든 나는 살아야 되겠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진정한 성령에 의해서 깨어져야 ‘아, 내가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창세전에 선택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통로를 통해서 나를 건졌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성령 받고 나서야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이라도 성령 받으면 얼마나 천만 다행이겠습니까? 나중이라도 성령만 받는다면.

문제는 나중이라도 그것을 못 받는다면, 그 사람은 계속 천국을 외치면서 지옥에서 살게 되죠. 다시 이야기를 하면, 오병이어를 경험했든지 심지어 물위를 걸었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내 살과 내피” 그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나는 오병이어의 떡을 먹었다. 나는 이런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 맞아. 나는 이 병이 나았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받은 사람이 맞아’ 라고 하면서 증거 되는 것이 자꾸 자기 구원받은 것만 증거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증거 되지 않고 그것만 증거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과연 그 사람을 무엇 때문에 불러 낸 것일까? 자기 잘난 것 때문에 구원했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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