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3:54

20060609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2강  이름 :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2강 (이근호목사, 2006년 6월 9일, 서울의존교회)

구약의 언약을 가지고 율법이라고 하는데, 율법이란 것은 일단 사람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행함으로 그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과 관계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내가 살아있다.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자’는 식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전제로 해서, 그 살아 있는 인간이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투입된 것이 율법이라면, 오늘 본문, 신약시대의 갈라디아서는 사람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으로 간주했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영생을 얻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구약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 ‘말씀을 지켜서 영생을 얻어 볼까’, 하고 시도하는 것에 반해서, 신약성경에는 죽은 자가(죽은 자는 살아나지도 못할뿐더러, 죽은 자는 말씀도 못 지키는데), ‘어떻게 죽은자가 천국을 가느냐?’ 이 말입니다. 죽은자가!

말씀도 제대로 못지키고, 말씀을 지키기는 커녕 말씀을 싫어하고, 말씀을 배척하고,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런 인간이 졸지에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천국의 복락을 누리냐는 말이죠. 살아 있어서 뭘 했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그것은 구약시대이고, 신약시대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을 산 사람으로 보지 않고, 죽은자로 간주해 버리는데. 그러기 위해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인간이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기껏 한것이 무엇인가’를 쫙 2000년 동안 나열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열심히 시도하고, 씨름하고, 성전이면 성전, 율법이면 율법, 십일조면 십일조, 안식일이면 안식일, 전쟁이면 전쟁, 이웃사랑이면 이웃사랑,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애를 써서, 구원에 이르러 보고자 열심히 하는 그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채로 보여줬을 때, 그 결과는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목사님! 살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못지켰으니까, 결국 언약은 깨어지고 언약이 깨어져서 그럼 인간은 그냥 죽게 되었네요”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석해야지요. “목사님! 살아 있는 인간이 열심히 말씀을 지켜 보려고 했는데도 결국은 안되네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완성인줄로 믿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율법을 지켜야 율법이 완성되는줄 알고 있는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이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율법을 못지킨다는 것이 폭로되는 그 자체를 언약의 완성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주 오묘한 계약입니다. 아주 오묘한 계략이죠. 아주 오묘한 작전입니다.

어떤 애가 자꾸 자기 키가 크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철봉을 높게높게 잡는 거예요. 자꾸 닿으려고 해도, 해보니까 안잡히거든요. 안잡힘으로 말미암아 ‘나는 키가 큰 아이야’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키가 큰 것이 아니고, 키가 작다’는 그 선언이 드디어 분명한 진리로서 드러나는 선으로 철봉이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이해가 되시죠? 구약성경은 인간의 수준을 높이는 거예요. 자꾸 철봉을 높이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아~. 되었다. 아~. 되었다.’ 그래서 사울이라는 왕은 이랬습니다. ‘제사만 드리는데 전쟁에서 승리하는구나. 제사만 잘 드리면 되겠다.’ 또 오해하고 착각하는 거예요. 또 오해하고 착각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말하기를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언약궤만 있으면 적들은 물러갈 것이다.’ 또 오해를 하는 거예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쥐고 흔들다가 거기서 죽었잖아요. 전쟁에서 패해가지고. 사울이라는 왕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제사를 드리면 승리한다’고 하다가 사무엘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습니까?

순종이 뭐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다음번에 주님께서 어떤 높은 법을 주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지금 자기가 열심히 연습하니까 달성되는 그것을, 마치 자기의 의로움인양 그렇게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턱걸이 시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는 부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아! 내가 부족해서 언약이 안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요. 천만의 말씀. 바로 그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본색을 드러내는 그것이 바로 훌륭한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완성이 갈라디아서에 어떻게 투입되는가를 한번 봅시다. 여기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이런식으로 죽 나가서 여기 말라기가 있고, 여기에 갈라디아서가 있잖아요.

이 구약전체를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것이 언약이라고 했지요. 언약은 어떤식으로 완성된다고 했어요? 이 언약을 인간들이 지켜 보려고 시도하다가 반드시 뭘 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실패를 할때 비로서 언약이 깨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아 이게 참 어려운데 좀 쉽게 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저는 야자수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영화를 보니까 야자수열매를 먹을 때는 반드시 야자수열매의 껍질을 깨뜨려야 그 안의 야자수를 먹을 수가 있답니다. 맞습니까?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진짜 언약인 새언약은, 바깥에 있는 언약이 깨어질 때 그 정체를 노출합니다. 그 본질을 드러내죠.

‘다 이루었다’로 완성된 진짜 언약이 어느 품에 들어 있느냐 하면, 옛날 언약이라는 껍질 안에 들어 있어요. 옛날 언약은 인간들이 죄를 범해야만 깨어집니다. 이게 깨어질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알맹이인 새언약이 나오는데, 그 새언약의 특징이 뭐냐? 그 새언약의 특징이 뭔지 알아요? 살아 있는채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죽은자가 영생을 얻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옛날 언약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까? 새언약에서 효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새언약에서. 상식적으로 내가 구원받으려면 ‘살아 있는 나를 구원해 달라’ 이렇게 되는데, 그것은 옛언약 사고방식이고, 새언약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날마다 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 영생이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날 죽이는 그 세력이, 친히 영생이라는 힘으로 나를 지금 죽이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영생이라는 힘에 의해서 날마다 죽임을 당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영생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이고! 어려워라!!!”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방금 제가 드린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있지요? 4장 10절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1)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어느 언약시대? 새언약시대. 이게 새언약시대입니다. 옛날 언약은 어떻게 한다? 내가 팔팔하게 살아 있고, 살아 있는 내가 뭘 지켜서? ‘말씀을 지켜서 그래서 내가 영생을 따낸다’는 이것이 옛날식이라면 새언약시대는 뭐라고요? 날마다 누가 죽여요? 영생이라는 그분이 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는 영생관계에 놓이는 겁니다.

나를 죽이는 분과 나 사이에 영생이라는 공통영역 속에 포함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약, 옛언약이 갈라디아서에 바로 넘겨져 오면 안돼요. 옛날언약이 갈라디아서로 바로 넘겨져 오는 해석을 하나 이야기 할게요. 옛날 언약을 갈라디아서에 바로 넘겨오면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옵니다.

‘옛날 구약의 사람들은 말씀을 지키는데,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하여 말씀을 지킬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렸다.’ 그리고는 갈라디아서의 이 중간을 싹 빼버린 채, ‘갈라디아서를 보니까 성령이 오더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니까 성령님이 현재 펄펄 살아 있는 나에게 다가오면 나는 성령의 주인이 되고 성령은 나에게 소유물’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소유물이 되면서, 성령은 내가 부리는 대로 부림을 당하는데, 그러면 ‘나는 그동안 옛날 구약사람들이 죄 때문에 못 지킨 그 십계명의 말씀을 이제 내가 마음대로 성령을 조절해서, 기도 많이 하면 충만해지고, 기도를 좀 덜하면 소멸되고, 이런 식으로 조절해서 이 성령의 능력의 힘으로 지키게 되면 이것이 구약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되고,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의가 되고 영광이 된다.’ 

이렇게 해석하려면 나는 여전히 안 죽어야 되고, 미진하나마 여전히 펄펄 살아 있어야 돼요. 주님이 나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훈계하고 잔소리를 할 필요는 있지만, 날 죽일 필요는 없다고요. 왜? 내가 행위의 주체자 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이말이죠. 중간에 뭐가 빠져버리면. 빠지면 이렇게 해석돼요.

제가 쓴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글에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일단 자기 것을 만들어서 나만이 사용할수 있는 능력같은 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그 사람은 영원한 결핍에 목마를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이 되죠.

내가 ‘다 이루심’에 사로잡히면, 내가 결핍, 모자람을 모르지만, 내가 만일 누군가를 소유하는 식이 되면, 내가 소유한 것과 그 사이에(이것을 철학적으로 하면 말이 매우 어려운데 쉽게 하면), 뭔가 보이지 않는 갭 때문에 갈등과 갈증이 생기는 거예요. 지금 옆에 수박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수박을 가지려고 한다면, 내가 기대한 수박맛과의 차이 때문에 “아이! 이게 무슨 맛이 이래!” 하면서 결핍을 느끼죠.

뭔가 모자람을 느끼는데, 수박이 말하기를 “수박의 맛을 한번 볼래? 이 맛이야!” 이렇게 된다고요. 수박의 맛이 나를 장악해 버릴 때는, 나는 ‘다 이루심’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지 않아요. 뭐든지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나는 계속해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 있는 대로 내가 펄펄 살아 있는 채로, 구약을 이루는 이것이 인간의 육신적인 모습이고, 성령께서는 인간이 이렇게 살아 있는채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지키려는 나를 죽이는 쪽으로 하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는 죄를 능가하신 사랑의 입장에서 성경말씀이 사랑으로 살아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자. 바로가는 그런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그러면 중간에 무슨 다리를 하나 걸쳐야 하겠죠. 그게 뭐냐?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바로 가지 않고, 4복음서를 거쳐서 갈라디아서로 갑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이방인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라는 말은 뭔가 그동안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벽이 허물어 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또 오해하시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벽이 허물어졌다고 하니까, 옛날에는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는데, 이제는 그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확산되었다고 이해하기 쉬워요. 그게 아닙니다. 그것하고 꼭 반대로 생각하시면 맞아요.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십자가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허물어졌다는 뜻이거든요.

(에베소서 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한번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에게는 약간 어렵지만 잘 적어 놓았다가 커서 읽어 보세요. 벽이 있어요. 만리장성 같은 벽이 있어요. 벽 이쪽은 유대인이고, 반대쪽은 이방인들이에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기 때문에 질문해 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언약이 있지요? 언약안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볼때 뭐로 봅니까?

아까 수로보니게 여인을 이야기할 때 했는데, 뭐로 본다고요? 개로 보지요. 그리고 예례미아 같은 경우는 이 율법 밖에 있는 자에게 뭐가 임한다? 저주가 임한다고 합니다. 언약 안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볼때 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언약 밖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며, 얼마나 큰 저주가 임하는지를 말해주는 겁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대인, 자신들도 압니다. ‘자신들은 단지 언약이라는 것 때문에 일방적으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고, 저들이 개가 된 것은 우리보다 더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개에 불과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예언을 했지요. 언약이라는 것이 투입되면서 이렇게 갈라졌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언약이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없다면 유대인쪽도 뭐가 됩니까? 개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놓인 언약의 벽을 허물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양쪽 다 개같은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담안’이라고 합니다. ‘아담안.’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전부다 ‘아담안’에 있다고 합니다(롬 5:1). 그리고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 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두게 하려 하심이라.”(롬 3:19) 고 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벽이 허물어짐으로써 양쪽 다 똑같은 언약밖이라는 입장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같은 인간인데도 유대인과 이방인 둘로 나누는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그것을 ‘아담안’이라고 해서 하나로 모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옛날 아담에 속했느냐, 새로운 아담에 속했느냐’의 기로에 설때에 등장한 것이 뭐냐?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이게 제일 어려운데요. 오늘 강의에서), 옛날 언약은 그냥 문자로 왔지만, 새로운 언약은 어떤 인물,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해서 만들어 졌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서로 원수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아담안에서, 새로운 언약에 의해서 건져낸 사람 같으면, 둘 사이에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서로 화평을 이루는 겁니다.

더 이상 차별 없이 화평을 이루는 그런 사이가 되는 겁니다. 화평을 이루면서 새언약을 모르는 자들은 뭐가 돼요? 개가 되고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걸로 두 노선이 가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두언약(갈라디아서에서 나중에 나옵니다만)이라고 합니다. 이 두 언약의 차이가 ‘약속이냐, 율법이냐’의 차이이기 때문에, ‘약속이냐, 율법이냐’ 하는 이것은 둘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약속에 속한 노선과 율법에 속한 노선이 두언약이 서로 다른 노선으로, 하나는 지옥으로 하나는 천국으로 나뉘어지게 되거든요. 그렇게 될 때 약속이든 율법이든 이것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서로 다른 언약 안에 있으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서로 악수하고, 친하게 지내고, 아무 거리낌 없이 잠도 같이 자고, 밥도 같이 먹는 겁니다.

같이 밭을 매다가 주께서 재림하시면 한사람은 천국으로 불려가 버리고, 또 한사람은 그대로 지옥가고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잠을 자다가 한사람은 ‘슈웅’, 하고 주님한테 가고, 한사람은 지옥 간다는 말이죠. 이것은 똑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똑같은 생각을 해도, 약속에 속한 사람과 율법에 속한 사람의 두 노선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어떤 율법을 줘서 살아 있는 내가 ‘누가누가 잘하나?’, 서로 살아 있는 육체끼리 경쟁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고, 죽은 자들 중에서 어떤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어떤 자에게는 임하지 않는 그 차이에 의해서 한 사람은 휴거되고, 한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이게 새언약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사람에게서 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1 옛언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자기 행함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것이 옛언약의 공식이라면, 새언약은 모든 인간을 죽여 놓고,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그 말씀이 납득이 되고, 이해되고, 믿어져서 ‘나의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공로구나’하고 알아지게 하는 것이 새언약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를 하기 전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야 이것이 가능하거든요. 그러면 이 원리가 맞다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무슨 일이 있어야 합니까?

두 가지가 있어야 되죠. 첫 번째는, 제가 아까 이야기 했지요? 사람이 턱걸이 할수 있는 율법의 높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껏 높이는 거예요. 한껏. ‘나는 지겼다. 나는 완벽했다’하는 이런 인간들이 턱걸이 하는 율법, 인간들이 살아서 지킬 수 있는 율법의 커트라인을 한껏 높여 버려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산상설교입니다.

산상설교의 내용대로 아무리 턱걸이해도 턱도 대이지도 않도록 한껏 높여 버려요. 심지어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집게 하나씩 들고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다 빼버려야 합니다. “오른 팔이 범죄 하거든 잘라 버려라.” 전기톱 가지고 다니면서 범죄 하거든 팔을 다 잘라 버려야 합니다. 아예 난도질을 해요. 난도질을.

한껏 높여 버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마라.” 이것은 사람 환장할 지경입니다. 왜? 축구장에 가지 말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아! 대한민국’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넓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한껏 높여 버리는 거예요. 이게 첫 번째입니다.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의 높이를 높임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내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할 몫이지, 절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니라는것.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산상설교를 높임으로 말미암아 무엇도 같이 높아지는가 하면, 심판의 기준도 높아져요. 심판의 기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갈것이 아니고” 어떻게 한다? “방금 이야기한 내 아버지의 말씀대로 다 지켜야 된다” 이말이죠. “만약에 산상설교의 내용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아주 예상밖으로 크다” 이말이죠.

(마태복음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마리아하고 형제들하고 죽 있는데 “여기 모친하고 동생들이 왔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내 아버지의 뜻대로” 그 다음에 뭔줄 압니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 내모친이 되고, 동생이고 내 가족이다”고 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율법을 못 지키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율법을 못 지키는 그 대가인 심판도 함께 높아져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건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아무도 안 따라왔습니다. 12제자들 다 도망치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때 단독으로 하셨습니다. 단독으로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아무도 십자가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요.

주님이 우리대신 십자가를 졌지만, 어느 누구도 주님 대신 십자가를 진 인간은 아무도 없었어요. 결국 심판의 기준도 높여버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한 사람이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자가 되었어요”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 베드로라는 사람이 스스로 얼추 따라가 보려고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주님가시는 그 길에 합류하기 위해서 제가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 네가 죽어봤자 그 죽는 자리하고, 예수님 자기가 죽는 자리하고 안 만나져요. 만나지지를 않습니다. 베드로가 착각한 거예요. 죽고 나면 한자리에서 만나지는줄 알았어요. 안 만나져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처소를 예비해야 만나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처소를 누가 예비합니까? 베드로가 합니까? 베드로가 순교해서 합니까? 아니에요. 베드로는 할 도리 다 했어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처소 예비하는 것도 베드로가 개입할 사항도 아니고,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도 베드로가 거기에 의견을 개진할 입장도 못됩니다. 끝나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안으로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죽어도 못 따라오는 그 세계로 갔아요. 사람이 죽어서 갈수 있는 곳 같으면 죽지요. 죽어도 못들어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이 가는 세계하고 우리세계하고 애초부터 “베드로야 고기 그만잡고 나를 따르라”고 부를때부터 그것은 달랐다는 겁니다. 노는 동네가 달랐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이 세상에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개밖에 없다는 겁니다. 새언약의 기준으로 봤을 때, 산상설교 지키는 자도 없고, 아무리 다 잘 지켰다고 해도 그중에 하나를 어기면 그 사람은 모래위에 지어진 집처럼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인간도 주님의 모친도 형제도 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심판의 기준이 이렇게 한껏 높아졌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주님이 계신 곳에 갈수가 없습니다.

완벽하게 모든 입을 막고 전부다 심판아래 두게 하신 그 작전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해요. 제가 아까 이야기 한 것 있지요? “그러면 목사님! 율법 깨졌네요?”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이 개입해서 율법을 못 지킴이 폭로되는 그것이 뭐라고요? 율법을 완성한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을 완성한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완성인줄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고 자기가 안해야 완성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물가에서 바가지를 동원해서 홍해물을 퍼내는 것이 하나님을 도와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바닷가에 서서 홍해 갈라지도록 바라보기만 하는 그것이 도와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에서는 철저하게 우리가 사람에게서 나와서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다 거부하고 배척해 버립니다. 

■2 어떤 인간도 갈라디아서가 해석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뿐만 아니고 다른 책도 다 마찬가지인데, 성령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도 인간의 해석으로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그것으로 갈라디아서는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로는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을 폭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해석하지 못하지만 갈라디아서 자체가 우리를 해석하는데 충분하게 성공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갈라디아서를 여러분에게 해석하면서, 갈라디아서가 우리를 해석하도록 그런 쪽으로 해석을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가 우리를 해석하도록.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해석 못한다는 것을 문맥 문맥마다 아마 드러내게 될 거예요. 철저하게 우리를 배척하니까. 갈라디아서 1장 4절을 봅시다. 4절, 5절.

(갈라디아서 1:4,5)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여기서 제가 문제를 던질께요. 여기에서 인간에 해당되는 용어가 뭡니까? 방금 읽은 4절에서 인간에게 해당되는 용어, 단어는? 쉽잖아요. “우리”죠 “우리.” 그 ‘우리’에 해당되는 그 뒤에 붙어 있는 본질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죄”지요. “죄.”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이 뭡니까? ‘죄인으로서의 인간’이죠.

‘인간이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인간.’ 이것을 분명히 하겠다고 갈리디아서가 지금 노리고 있어요. 갈라디아서가 우리한테 요청하기를 ‘이제부터 네가 왜 죄인일수밖에 없는지를 폭로하겠다’는 식으로 덤빕니다. 제가 아까도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한번 이야기 할께요.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현재 내가 고생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죄보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에 무슨 행정착오가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이렇게 착한데 고생을 너무 심하게 했으니 앞으로 고생을 줄여주마’하는 그런 기대감 때문에 교회 나온다고 했지요.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가운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죄보다도 더 크게 내가 현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고달프고 고생스럽잖아요. ‘나는 이런 고생할 만큼 죄를 안 졌는데 너무 고생이 심하다’ 이 말이죠. ‘이것은 뭔가 주님께서 나의 가치를 낮추어 봤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내 죄에 비해서 내 고생이 너무 심하다’고 하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그 본인의 죄는, 그냥 본인이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본인이 생각하는 그 죄를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보니까 어디에 관심이 가느냐 하면, 갈라디아서의 뒷부분에 있는 것이 있잖아요. 명령법.

‘그래. 나는 이것을 지켜서 이 지긋지긋한 고생에서 벗어나야 해.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이 더운 여름철에.’ 자꾸 자기가 고생하는 것과 죄를 비례시켜 가지고, 자기가 고생을 덜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지켜서 영광을 돌리면 무슨 보상이 있겠지. 보상이 있고 말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이것이 인간 쪽에서 죄를 알려고 다가서는 의미에서 죄라면,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런 식으로 죄를 알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에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죄의 개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거예요. 이 말씀, 율법대로 항상 안 살면 저주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대로 항상 지키지 않으면.

그러니까 우리가 갈라디아서에 접근하는 방법은, 이것은 마치 구약 때에 옛언약의 구조 속에서, 옛언약의 사람들이 율법에 다가서는 것과 동일한 다가섬이, 현재 벽이 허물어졌으니까 우리 이방인에게 그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옛날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오해한 그 오해가 지금 이방인된 우리한테서도 당연히 나오지요?

왜? 벽이 허물어져서 그때의 유대인들의 잘못이 그대로 우리 잘못으로 그냥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와 십자가를 안거치고 나왔기 때문에 마치 내가 내 죄를 알고 다가서면 된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산상설교를 보세요. 어느 인간이 산상설교를 지킵니까?

산상설교는 안 지키고 사도바울의 명령법은 지켜요? 입맛대로 골라요. 입맛대로. 어떻게 그런 반칙을 법합니까? “축구할 때 손으로 만지지 말고 발로 차세요.” 이렇게 할 때, “나는 발로 차는 것이 시원치 않기에 손으로 만질랍니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법을 정해서 손으로 공을 들고 “슛! 골인!” 이러고 있다고요. 자기 맘대로 법을 정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손으로 만지지 말고 발로 치세요.’ 이렇게 법을 정했어요. 그러면 손으로 공을 쥐면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파울이라고 하죠. (사도파울이네요. 사도파울. 이 개그). 산상설교를 못지키면서 화평?, 형제우애? 그것을 5초 지켰다고 성령 받았대요. 기가차서. 자기 맘대로 골라요. 자기 맘대로. 성경은 한목소리를 냅니다. 두더지게임에서 보면 두더지가 구멍 하나에 두더지 한 마리지만, 성경의 두더지는 어떤 두더지인지 뭘 때려도 주님이 막 나옵니다.

마태복음 때려도 주님이 나오고, 디모데전서 때려도 주님이 터져 나오고요. “네가 날 왜 때리는데?” 요한계시록을 두들겨도 주님이 나오고요. 우리가 골라 잡을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어딜 봐도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튀어 나옵니다. 따라서 ■3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지키는 입장에서 갈라디아서를 접근하면 안 되고,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의 죄가 뭐냐?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죽였다”는 이 사실뿐이에요. 십자가입니다.

결국 십자가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구원시켜주세요”라고 할수 있는 모든 권리와 근거는 이미 소멸되었다는 겁니다. 이미 소멸된 거예요. 소멸된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제가 갈라디아서 4장의 예를 들면서 인간에게는 노선이 몇 개가 있다고 했습니까? 두 개의 노선이 있죠. 두 개의 노선을 뭐라고 했습니까? 두 언약이죠.

자 노선을 두 철도라고 해봅시다. 한쪽 노선은 어디에 근거해서 산다? 율법이죠. 그런데 한쪽 노선은 어디에 근거해서 삽니까? 약속이죠. 자. 여기서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율법에 근거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보면 율법이 그 사람위에 작용하죠.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약속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 사람을 하나의 그릇으로 사용해서 약속이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는 식으로 약속이 그 사람을 다루죠.

마치 율법이 그 사람을 다루는 것처럼.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람이 온갖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항상 어디 아래 있다? 저주아래 있다. 그 저주아래 있는 증거가 바로 죽음이잖아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다가설 때에는 항상 약속이냐? 율법이냐? 이것은 어떤 쪽이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일방적으로 ‘너는 약속 노선’, ‘일방적으로 너는 율법 노선’, 그러한 우리의 진짜 정체가 발현 되는 식으로 우리 인생을 자기 맘대로 몰고 다니는 거예요.

마치 호나우딩요가 공 몰고 다니듯이. 주님께서는 마음대로 우리를 몰고 다니는 거예요. 그렇게 몰고 다녀도 괜찮은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같으면 우리가 선택을 할수 있어요. “주님! 말씀 잘 지킬께요. 주님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하겠는데 이미 구약을 거쳐서 우리는 모두 죽은 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잘 지킬께요. 앞으로 잘할께요.” 그렇게 할수 있는 권한이 이미 우리에게는 박탈된 상태입니다.

영생 주면 고마운 줄 알고, 안줘도 당연하고 그런 거예요. 방금 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쉽게 되는데, 지금 이방인들은 개 아닙니까? 개. 이방인들은 잡아먹든, 그냥 기르듯 주인 맘대로거든요. 언약밖에 있으면 개입니다. 그런데 구약, 언약 안에 있다고 착각했던 유대인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언약의 주인공이 도리어 원수가 되었지요.

그래서 언약 안에 있다고 그들이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착각이고 사실은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새언약 입장에서 언약밖에 있는 사람이죠. 언약밖에 있는 이 모든 사람에게 새언약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실체가, 그 새언약 봉투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그것은 몰라요. ■4 그 새언약 봉투를 열어 보니까 노선이 두 노선이라. 한 노선은 약속에 의해서 영생 줄 사람의 노선, 그런 봉투가 있고 또 한쪽 노선은 뭐냐?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노선이 있더라는 말이죠.

그것을 그대로 이 개 같은 인간들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게 되면, 자기가 받은 봉투 펴 보고, 째는 거예요. 째면 “약속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거예요. 봉투를 펴 보고 “율법이다!”  그것은 죽은 거예요. 이게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에요. 사람에게서 난 것 같으면 우리는 회의합니다. 결재서류 올립니다. “주여! 아무개 빼시고요. 아무개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 사람 빼시고요. 이사람 넣어주세요.” 자기들이 압력 넣고 난리라 지금.

이게 갈라디아서에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의 해석은 율법 받은 사람은 해석을 안 하죠. 더러워서. 기분 나빠서 안하고 누구만 해석하느냐 하면, 약속노선에 들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이 공짜로 받은 은혜인것이 너무나 좋아서 그 은혜의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알기 위해서 마음껏 갈라디아서를 펼치면서 “기분 좋다!”고 하고 있다고요.

“주께서 마지막때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할렐루야!” 기분 좋은 거예요. 예? ‘이게 왠 떡이냐’는 말이죠.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내가 사람에게서 난 것 같으면 받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난 것이니까 받게 된 거죠.” 이런 식으로 기분 좋은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나니 이제는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기 주도권을 발휘하는 겁니다. “너는 율법으로 살면 죽을 인간인데.” “아멘! 맞습니다.” 왜? 산상설교를 못 지키니까. 산상설교를 못 지킨다는 것이 뻔히 보이니까. 산상설교도 못 지키는 것이 어떻게 바울의 명령법을 지키겠습니까? 못 지키지요.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나온 대로 “네게 성령이 임하면 이미 너는 십자가 안에서 생명의 사람이 되었다.” “할렐루야!” 이게 된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이걸 보고 있던 율법의 노선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구나. 완전히 맛이 갔구만! 갔어. 아니 아무리 성경도 좋지만 사람을 그렇게 무시해도 돼?” 그러면 우리는 말하지요.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그런것은 구약의 선지자한테 물어봐라”고 하지요. 구약의 선지자인 에스겔이라는 분은 해괴망칙한 짓을 다 했습니다.
왜 그런 해괴 망칙한 짓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시켰느냐 하면, 사람이 사탄에 속한 깊은 것을 사람의 눈으로 알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자기 영을 줘서 사탄의 깊은 의미와, 사탄의 깊은 핵심 본분을 파헤치기 위해서, 인간들이 예상치도 못한 일들을 저질러 버려요. 에스겔로 하여금 저지르게 합니다.
390일간 모로 눕는다든지, 자기 아내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는다든지, 인분을 태워서 떡을 굽는다는 아주 해괴한 일이라든지, 그런 에스겔의 해괴망칙한 짓들은 뭐냐 하면, 아무리 에스겔이 해괴망칙한 짓들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보다, 그것보다 더 해괴망칙한 짓이 또 없어요.

제자들 다 떠나보내고 홀로 가면서 “다 이루었다.” 무엇을 이루었는데? 얼마나 거절당하고 섭섭했으면 다 이루었다고 미리 이야기 하겠습니까? “다 이루었다.” 뭘 이루었는데? 혼자 잘났어요. 그런데 혼자 잘났다고 여겼던 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사도바울에게 찾아 왔어요. 사도바울이 바울되기 전에 최고의 바리새인이었잖아요.

그 바래새인이, 복음의 원수중의 원수인 그 바리새인이 복음을 알게 된것이면, 이 세상에 사도바울처럼 복음을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최고에요. 최고. 왜? 철저하게 비복음적으로 살았거든요. 비복음이 뭐냐 하는 것, 비복음이 어떤 세계인 것을 아는 그런 사도바울에게 찾아 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어느 사도에게도 꿇리지 않고,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임하리라.”는 마치 심판주 같은 단호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바라기는 이 사도바울 같은 당당함, 이 당당함만 있다면 우리가 인생 살면서 ‘실패했다’ 혹은 ‘인생낙오자다’라는 그런 자학적인 발언은 안 나올 거예요. ‘내 인생 실패했다’든지 혹은 ‘내 인생 망쳤다’든지 하는 그런 자조적인 발언은 안나올거라 이 말이죠. 우리 입에서 왜 자꾸 자기 자조적인 발언이 나오느냐 하면, 내가 받은 그 복음의 우수성, 복음의 절대성을 우리가 잘라먹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무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그 복음을 (경상도 말로 새피하게 본다고 하죠) 우습게 보기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우습게 보기 때문에 다른 것에서 더 마음 둘 곳을 찾다 보니까, 그게 자기 마음에 흡족하게 안 떨어지니까 그만 ‘아이고! 인생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다 때려치고 약이나 먹고 죽자. 어디 자살 사이트 없나?’ 이러는 거예요.

사도바울 같으면 자살해도 백번 자살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복음의 절대성을 어느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망가지는 것조차 복음의 절대성을 훼손할 수 없었어요. 그 정도로 자기가 하는 고생보다 복음의 월등함을 고백했습니다. 뺨맞고, 매 맞고, 굶고, 고생 직사하게 하고, 남들에게 이단소리 듣고, 사도가 아니라는 소리 들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전하는 이 십자가복음의 가치를 잘라먹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나오듯이 사도바울보고 “네가 복음에 미쳤구나” 하는 그런 소리를 듣지요.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마귀도 말합니다. 마귀가 “예수도 안다”고 합니다. 마귀가 “예수도 알고”, 여기서는 별로 안 놀랬어요. 그런데 그 뒷부분에서 놀래 버렸어요. 마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야~! 같은 인간인데 마귀가 바울을 안대요.

■5 얼마나 복음적으로 살았으면 마귀가 바울을 알겠어요. ‘그러한 새로운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이 갈라디아서가 해석이 안 되고, 그 해석이 안 된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하는 것이 이 갈라디아서가 우리보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자 그러면 이 1장 4절을 본격적으로 해석을 해 드려야 하겠죠.

■6 갈라디아서 1장 4절, 5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몸을 드리신 것이 우리에게 영광을 주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제시한 방법을 사용합니까? 아니면 주님 자신이 홀로 행했던 방식으로만 홀로 영광을 받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행한 방법으로 영광을 받지요. 그 방법이 뭐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리신’ 그 범주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러한 공식이 성립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주여! 주여! 예수님께 영광! 할렐루야!” 마음대로 다 할수 있어요. 그런데 물어 봅니다. “예수님은 왜 영광 받아야 됩니까?” “내가 예수를 믿어 줬거든요.” 자기가 예수를 믿어준 그것은 영광이 안돼요. “내가 전도를 했거든요. 내가 헌금을 했거든요.” 이것은 주님께 영광이 아니라 자기영광이죠.

주님께 영광돌리는 방법은 자기를 뭘로 취급해야 하느냐면, “자기는 악한 세대에 속하며, 죄인에 속하며, 이 죄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내가 요청하지도 않은 자기 몸을 자기 죄를 위해서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나 말고 주님이 영광 받아야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할때 영광이에요.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했으리라 생각하고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광이 언제 훼손될까요? 누가 아시는 분이 답변해 보세요. 두 가지 조건이 있지요. 첫번쨰,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느낄 때. 아시겠습니까? 두 번째, 주님이 주신 것이 주님의 자기 몸을 드린 것 말고, 나에게 돈을 주셨다든지, 건강을 주셨다든지 이렇게 할 때.

주님의 몸을 주셨다는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를 취직하게 해줬다. 나를 결혼하게 해줬다. 오래 살게 해줬다. 건강하게 해줬다. 내 교회를 부흥시켜줬다’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 그때 뭐가 됩니까? 주님께 영광은 가리워진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뭐라고요?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느낄 때. 언제입니까? 기도응답 받을 때 아닙니까? 내일이 뭐든지 내 뜻대로 잘될때. 그리고 내 가치성이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인기가 올라갈 때.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남들로부터 높아질때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절대로 안 느껴지죠. 그런데 성도는 느낍니다. 그 예가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을때, 그때 뭘 느꼈습니까? 자기가 비로소 죄인인 것을 느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 하지요? 쉽게 말해서 웃기지요? 학생들이 공부 일등할 때 “오늘 일등은 의존교회 아무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게 나올까요? “이번에 과장 승진자는 의존교회 아무개집사!” “주여! 저 죄인입니다.” 이게 나올까요?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부장자리 부탁합니다. 내가 지은 죄에 비해서 아직도 과장은 모자랍니다. 내가 지은 죄로 볼때 나는 이렇게 과장으로 고생하면 안 됩니다. 부장쯤 되어야 적당합니다.”

그 때 주님의 영광은 훼손되는 겁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렸다”는 이 이야기는 그냥 알고만 지나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앞으로 인간이, 자기 백성들이 어떤 육적 요소가 나온다는 것을 다 예감 하시고, 이것과 이것을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만약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단순히 듣고 흘릴 문제가 아닙니다. 저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은, 이미 저주의 기준이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수능 문제지가 완전히 인쇄에 들어갔어요. 다른 문제가 없어요. 천국이냐? 지옥이냐? 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내 쪽에서 뭘 드린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자기 몸을 드린 것, 그것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는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놓쳐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지옥가기로 준비된 사람이에요.

왜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더욱더 치밀하게 나오는데, 이 복음 외에 다른복음은 저주를 받는 이유가, 다른 복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나오죠.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호와 종교와 바알종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바알종교는 인간의 공통점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여호와 종교는 인간의 차이점을 이야기해요. 차이성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욕망의 차이성입니다. 이세벨이 바알종교를 국가정책으로 펼칠 때 자신만만했던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공통점을 찾아가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바알종교를 다 흡수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예례미아나, 에스겔에 보면 다 나옵니다. 뭐냐 하면 껍데기는 누구냐? 껍데기는 여호와에요. 알맹이는 뭐냐? 바알종교입니다. 그래서 예례미아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떻게 여호와께서 이땅을 약속대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너희 남편이 바알이냐? 너희 신랑이 어떻게 바알이냐”라고 합니다.

“피투성이 같은 것을 건져놓았더니만 완전히 바알 종교에 빠져가지고!”(겔 16장) 이 말이거든요.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참! 구약백성들은 매를 맞아도 싸다. 어떻게 선지자가 그렇게 닦달을 내고 일러줘도 왜 그것을 못 떼어놓느냐?’ 하지만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마귀가 우리의 공통점과 우리의 유혹거리를 찾아다니면서, 밑을 연결, 연결 시켜주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거기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지치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사람에게서 나온  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을 시킵니다. ‘사람 쪽에서 다가가서 해석하는 이것은 접근금지다.’ 이것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예 우리를 죄인취급해서 자기 몸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무엇으로 판정되느냐 하면,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느냐? 아니면 자기에게 돌리느냐?’ 하는 그 문제로 돌립니다. 여기서 좀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그럼 목사님!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리면 어떻습니까?”

이런 문제가 있지요. 삼위일체 신학이 발달되면서 영광이 삼위 중에서 어떤 한분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요. 이게 논리적으로 안 맞는 이유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체가 예수님이 아니고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잘 돌리기 위해서는 누구를 관리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나라는 인간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예수님은 나를 죄인으로 몰아넣고 영광 받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온전히 돌릴수 있는 이유가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완성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만이 주체로 돌아가기 때문에 영광이 돼요.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님이 영광받기를 하나님도 영광받기’로 이렇게 일치시키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와요.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들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영광을 받은 것. 베드로 후서 4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게”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리면 나를 죽은자로 간주할 분이 없어요. 왜? 나는 예수 믿고 나서 괜찮고 건전한 거듭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가 나를 지도해 주지 않는다고요. 내 희망은 빼앗기지 않지요? ‘괜찮은 내가 하나님께 괜찮게 영광 돌리고, 그걸로 구약의 모든 것이 완성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 영광 돌리는 순간에 나는 졸지에 뭐가 되고? 죄인되고,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누구 공로다? 예수님의 공로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이 훼손될 때가 언제라고요? 첫째는 내가 죄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 두 번째는, 예수님이 주신 그 몸 말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 말고, 돈, 건강, 취직 같은 것을 줘서 감사하다는 소리가 나올 때, 그것이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게 되고 그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알종교이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기뻐하는 요소들이 거기에 다 파고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중세시대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가능성’에 대해서 기대를 걸었습니다. ‘가능성’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 가면 불신자가 거듭났다고 여겨지는 그 선 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불신자라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잘 접근하면, 그들이 그 지식을 확보하는 순간부터 점차 신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접촉점을 찾는데 온갖 고대의 헬라 철학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인간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녹은 슬었지만 녹을 닦아 내면 빛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중세신학이 근본적으로 큰 오류를 범한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이 빠지고 그 대신 예수님의 신성,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의 신성이 십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다가, 예수님의 신성이 나온 뒤에는 하나님이 둘이 되다가,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는 성령까지 포함되어서 이제는 경배해야 될 하나님이 세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세분이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괜찮아진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 방식을 성부, 성자, 성령에게도 공히 동일하게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라는 표지로 확정지었다는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거듭났다는 표징으로 확정지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거든요.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와 예수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거기에 부각이 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예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자기 품위유지의 발휘에 들어가야 하고, 인간이 성도라 할지라도 삼위일체 지식을 확보해야 하고, 그 지식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아직까지 덜 신자 된 상태가 되어서 거듭난 그 선까지 끌어당기지 못한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제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 보면 분명히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에게서 배운 것 하고, 주님에게서 직접 배운 것 하고 차이가 난다는 말입니다. 차이가 나요.

그런데 중세신학의 입장에서는 차이가 안 난다고 본거에요. ‘예수님께서 똑똑한 사람에게 가르치면, 그 사람이 그것을 인간적인 단어로 바꾸어서 덜 똑똑한 사람에게 가르치면 그 사람은 성도로서 거듭날 수 있다.’ 이렇게 절차를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라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예수님에게서 난 것 따로 있고, 사람에게서 난 것 따로 있다’고 분명히 갈랐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난 것은 무엇이고, 예수님에게서 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서 난것은 ‘행함’입니다. ‘행함.’ 예수님에게서 난 것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가 자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능력이라고 본겁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도 행함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 안 되고.

십자가가 자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자 마지막에 중요하니까 잘 들으세요!) 그 십자가 의 안에서 우리는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 관계를 가지고 그 유명한 두자로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구약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그런 인간들의 행동을 다 의식하고, 그것을 다 아시는 상태에서 그런 식은 새언약에서는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새언약에서는 안 통한다! 산상설교도 못 지키는 주제에 뭘 지킨다는 말입니까?

제가 아까 안산에서 강의를 했지만, 사람이 무엇을 지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단절과 반복성이 형성됩니다. ‘아침 9시에 예수 믿는다. 10시에 부부싸움 하고 난 뒤에 안 믿는다. 11시에 다시 은혜 받고 믿었다. 1시에 안 믿는다.’ 인간이 어떤 선을 지키게 되면, 이 선과 선 사이에 단절과 반복, 단절과 반복이 연속됩니다.

이것을 몰라서 신학자들은 뭐라고 했느냐? ‘단회성인가? 반복성인가?’ 이러고 있어요. 이것은 뭐냐? 그 바탕에 어떤 직선적인 시간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님! 성령 받았다가 소멸될 수 있습니까? 소멸 되었다가 다시 충만할 수 있습니까? 오후 3부터 4시까지 충만하고 5시부터는 세상일보고 장사하다 보니까(이거 많이 안 남습니다. 거저 줍니다. 이런 식으로 장사하다 보면 하게 되는) 거짓말을 마구 하게 되어서 소멸될 수 있습니까?”
‘이게 이렇게 될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시간적인 선이란 것은 ‘어디 안’에 들어 있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성령은 우리를 ‘안’으로 품는 분이지, 이런 식으로 재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예 품어 버려요.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어디서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성령께서 예수님께 영광 돌리도록,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어제까지는 잘 믿었는데 오늘은 영 믿음이 없다’ 한다면 그러면 믿음 없을 때 주님이 재림 해버리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좋을 때 주님이 재림하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은 현재 내 컨디션에 따라서 달린 거예요.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 단독자로 남는 거예요. 주님은 나한테 안 섞이고, 나는 주님한테 안 섞이고 이것은 따로 따로 노는 겁니다.

주와 내가 하나라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믿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것을 내가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끊임없이 산자가 살아 있는 활동을 하지, 죽은 자가 죽은 자의 활동을 못하거든요. 다만 죽은 자는 계속 죽어 있는 그런 대상이 될 뿐이죠.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죄는 들추어지고,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의 그 값어치가 등장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님께 영광 돌리고. 그런 식으로 주님께서 작업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목사님!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그렇게 됩니까?” 몇 시부터 몇시까지 그리 되느냐 하는 것은 그 기준점이 지난 것을 기준점으로 잡게 되니까 그런데, 지금 이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기준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마다 은혜주시는 그것이 기준이 되는 거예요.

짜빠게티, 먹으면 “짜빠게티, 맛있다”고 하고, 컵라면을 먹을 때는 “컵라면 맛있다”고 해야 되지, 컵라면 먹으면서 “짜빠게티, 맛있었는데. 에이! 컵라면 맛이 없다.” 이것은 기준이 뭡니까? 짜빠게티, 먹은것과 컵라면을 비교하는 거잖아요.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것이지 뭐는 안 맛있고 뭐는 맛있고. 다 맛있어요. 다.

사람이 괴로운 것은 기준점이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그런 기준점을 십자가로 희석시키면서, 하여튼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요소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생각보다 주님에게 사로잡힌 새로운 인간인 것을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역사인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계의 역사와 창조와 마지막 멸망에 대해서 우리가 뭘 알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찾아 왔다는 것이고, 사도바울이 변하여서 우리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그것이고,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령께서 주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가 비로소 복음의 사람이 되었사오니 이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그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깊고 넓고 위대한지를 살아가면서 더욱더 절실하게 느낄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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