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6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0

갈라디아서 제 6강 (이근호목사, 2006년 9월 8일(2), 서울의존교회)

‘율법의 행위로 십자가를 믿을 수 없다.’ 그러면 대체 ‘율법의 행위’가 뭡니까? 율법의 행위가 뭡니까? 아까 맷돌 이야기를 했는데 좀 심하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죄를 만들어 내고, 저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일 거예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뭐라고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찬양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라는 것이 뭘 만들어 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고요? 죄를 만들어 내고, 저주를 만들어 내는데 사람보다 더 적당한 것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 이야기를 하면서 신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죄를 만들고 저주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 어떤 면에서 그렇게 신나는 겁니까? 이미 구원된 사람은 그렇게 신나는 거예요. 구원된 사람만. 지금 가만히 표정들을 보니 저혼자 좋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는 죄를 만드는 전문가고, 나는 저주를 만들어 내는 도사입니다”라고 그것을 기분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가 언제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놀라운 혜택입니다. ‘나에게는 의가 없고 죄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맘 편하게 하는지 몰라요. 참 맘 편하게 해요. 아까 인간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뭐라고요? 이것을 어린이들은 나이 더 먹고 한 50년 지나면 알겁니다. 잘 적어놓고 50년 뒤에 다시 보세요.

“아! 목사님께서 그때 하신 말씀을 나이 한 60되니까 이제야 알겠구나.” 사람이 한 60, 70먹으면 사는게 거추장스러워요. ‘주여! 오늘밤에 자는 잠에 나도 모르게 그냥 낙원으로 데려가 주옵소서.’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만한 연세되신 분이 없는 것 같아서 제가 맘놓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젊은 분들이 이걸 모르는 거예요. 모르니까 “국가와 민족의 큰 종이 되게 하옵소서!” 이러지요.

‘인간아! 네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서 죄를 만들어내고 저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래서 너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다.’ 그 사명이 뭐냐? ‘이 땅에 죄와 저주를 남기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국민교육헌장 새로 만들어야 돼요.

이게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신자든 불신자든 가리지 않고,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도 ‘죄 만들어내기’, ‘저주 만들어내기’에서 빠지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갈라디아서에 나오죠. ‘아’씨집안 사람인데 넉자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저주받은 이스마엘의 아버지가 누구 게요? 세상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잖아요.

사람들의 머리가 이삭의 아버지만 아브라함인줄 알고 있어요. 사람들의 인식이 이상해요. 이것보고 게슈탈트 심리학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 그것만 윤곽이 보이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처리되면서 안 보이는 착시현상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저주받은 이스마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목사님! 목사님은 균형 맞추어서 성경을 가르쳐야지 아무리 옳은 가르침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는데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스마엘 뿐입니까? 이삭의 아버지도 아브라함입니다. 죄송합니다.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아니네요. 이삭은 아버지 없는 채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삭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이삭의 어머니가 사라라고요?

죄송합니다. 이삭은 어머니가 없네요. 이유가 뭐냐? 이미 태가 죽은 다음에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누구입니까? 이스마엘 밖에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 일한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복을 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을 볼까요? 다 안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다 안다고 해도 저는 안믿습니다. 로마서 4장 4절부터 8절까지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로마서 4:4-8)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다시 한번. 뭐라고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아! 참, 좋다. 좋아. 정말! 지금 우리는 저주를 생산하고 죄를 짓는 전문가입니다.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을 통해서 나옵니다. 인간을 통해서 저주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다른데서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나와요. 물론 마귀가 역사하지만. 따라서 당연히 경건치 않고, 당연히 의로운 구석이 없습니다. 일을 해봤자 하나님께 영광이 안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티코라는 조그마한 차에 위로부터 컨테이너가 덮치듯이 덮쳐요. “너, 저주지? 죄인이지?” “예!” 그런데 ‘의롭지 않은 것을 의롭다’ 하는 분을 믿으면 그게 의로 여겨지는 거예요.

자기는 경건치 않은데도 불구하고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는 것을 네가 믿나?”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어이! 거기 빨깡! 너 착하니? 의롭니? 경건하니?”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착하지도 않은데 의롭다고 하시는 이를 네가 믿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믿습니까? 믿어요?

세리와 창기, 그리고 강도가 구원받은 것을 여러분은 아시지요? 이것이 유일하게 오직 아브라함 노선에만 해당되는 아주 유별나고 특이한 비밀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수 없고,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감추어진 창세전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그 다음에 6절을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뭐가 있나니? 뭐가 있다고요? “복이 있고.” 이것이 ‘복이 있나니’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짓고, 저주를 유발하는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을 때, 이것이 왠 복인지 그 복이 와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뻔뻔스럽게도 천국노선에 실려서 덜렁 천국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노선은 열심히 헌금하고 시간 바치고 땀 바쳐서 목사도 섬기고 다 해놓았지만 가보니까 뭐가 나옵니까? “여기부터 지옥입니다.” 지옥에 가 있어요. 노선이 아브라함 노선이 아니었어요.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그 무리가 아니고, ‘일한만큼 의롭다 함’을 받는 그 무리에요. 일한 것도 없이 의인되어서 천당 가는 무리는 401번노선(천국노선)이고, 일해야 구원되는 무리는 101-1번(지옥노선).

버스 자체가 지옥가요. 그래서 지옥 가는 버스는 바글바글 해요. 교육관 짓고, 예배당을 수백억 들여서 다시 지어요. 너무 많아서 다 수용을 못해서. 그런데 401번은 얼마나 기분 좋은지 헐렁해요. 예배당에 몇 사람 없어요. 사람들이 이상해요. 버스 탈 때는 헐렁하고 넓은 것을 그리도 좋아하면서 교회 버스는 왜 교인 없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는지 몰라요.

“찾는 이가 적으니라.” 찾는 이가 적게 되어 있어요. 이런 복을 아무나 받으면 복이 아니지요. 홈런 아무나 다 치게 되면 그것은 홈런왕이 아니지요. 복 받는 홈런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의존교회에서 이런 소리를 하니까 여러분이 가만있지 다른 교회 가보세요. 사람들이 벌써 고개 숙이고 기분나빠하고, 누가 저 사람을 초빙했나 하면서 뒤에서 쑥덕거리고 난리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죠. 그게 바로 죄라고요. 당신들의 십자가는 육체로 움켜잡은 십자가에 불과하다고요. 성령? 말만 성령이지. 당신들 살아 있잖아. 봐! 잘난체 하잖아. 봐라! 이게 어떻게 사도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감히 읽을 자격이 되나?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죄를 만들어 내며 나는 저주를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아! 너무 좋아”라고 기분 좋게 신나게 이야기 할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뭔지를 아는 구원받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기쁜 소식입니다. 제가 부산 강의를 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유명한 코미디언 이상해씨의 아내가 누구지요? 김영림씨죠. 이분이 뭐하는 분이냐 하면, 창(唱)을 하는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이 부른 유명한 판소리곡이 있습니다. ‘회심곡’입니다. 기독교용어로 하면 회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아이디어를 목사님들에게 제시했습니다. 그 회심곡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살아생전 부모에게 불효한 놈, 죽어서 지옥 가서 골짜기골짜기 마다 벌 받는 그 동네를 미리 구경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부모에게 효도를 안해서 지옥가서 저렇게 고생하는데 살아생전에 부모에게 효도해서 장차 염라대왕 만나거든 좋은데 가서 복받고 살게 해 달라고 해야겠다’고 해서 전도용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저는 그걸 찬송가로 넣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왠 엉뚱? “♬~일심으로.”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제가 왜 그걸 찬송가로 넣어야 한다고 엉뚱하게 들리는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하면, 성령님이 와서 나를 예수 믿게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우리는 회심곡처럼 공포와 두려움과 벌벌 떠는 불안으로 보낼 것인데 이제는 맘 놓고 그 노래를 경청하고 들을 수 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찬양이 되고 영광이 되는지. 이것은 저 혼자의 주장이고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저 혼자 그렇게 주장해 봅니다.

불신자들이 마음이 나약해서 이렇게 엎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곡의 내용은 불교의 내용인데요. 불교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내용인데 불교에 빠지지 않더라도 불신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죠. ‘그래! 양심상 죽어서 좋은데 가기 위해서라도 착한 일 해야지’라는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죄와 저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상식이고 보편적인 심성입니다.

그리고 의존교회 여러분과 어린이들과 저까지도 성령만 안 받았더라면 지금 그대로 회심곡 처럼 101-1번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정상이라니까요. 오히려 비정상은 뭐냐 하면 401번을 갈아 탔다는 그것이 비정상이지. 제가 지금 복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람이라는게 ‘내가 이만큼 착한 일 했으니까 이렇게 내어 놓습니다’가 되어야지, ‘아무것도 한것도 없이 뻔뻔 스럽게 죄만 지어넣고 천국을 가? 어디 그런 하나님이 있나?’ 상식적으로 그렇게 비난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지키라고 준것이 아니고, 못지킬뿐더러 입을 틀어 막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율법이 자아낼수 있는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빚어 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행위대로 그렇게 살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3장의 내용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봅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어디 아래 있는 자라? “저주 아래 있는자라.” 살아 있는 게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을 불편하게 보지 말고, 이제는 어떻게 봅시다?

편안하게 “그래요. 하나님 맘 놓고 저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저는 감사합니다.” 왜? 맞거든요. 우리는 율법을 항상, 한두개 말고 모든 율법, 가끔이 아니고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누구든 그 사람은 저주아래 있습니다. 이걸 다른말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22절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뭐 아래 가두었으니?

“죄 아래 가두었으니.” 여기서 좀 신학적인 이야기를 할게요. 어떤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할례율법을 말하지 도덕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뭘 모르냐 하면, 앞에서는 율법이라고 되어 있고, 22절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경이라고 되어 있지요.

성경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구약의 성경만 말하지만, 이 성경이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확대가 되면서 신약성경의 사도바울의 명령법, 서술법, 이 모두가 우리를 뭐 아래 가둔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만들어 내고, 저주를 만들어 내게 하는 그러한 도구가 됩니다. 제가 전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활동하게 되면 죽음의 역사가 우리 속에 넘치고,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지요?

그 죽음의 역사가 넘치게 하는 매개체가 뭐냐? 모든 성경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것, 항상 지킵니까? 이것, 늘 생각합니까? 제가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출교 시키겠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 모이기로 작정 했습니다”라고 다짐에 다짐을 해도, 감사헌금 한 3억 들어오면 “더럽다!” 하고 버릴 교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역시 돈을 사랑하지 않았더니만 이렇게 축복해 주시는군요’라고 나옵니다. 교회의 예를 들었지만 가정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가계부를 쓰고 있는 주부의 입장에서는 가계부 사이사이에 돈 만원짜리가 꽂히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가계부를 쓰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 그랬는데 갑자기 목돈이 생겨서 3천만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받지,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런 가정주부 없습니다. ‘넘어져도 좋다. 이 좋은 돈 만져나 보자. 넘어져도 좋으니까 돈 3천만원 손에 쥐어나 보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돈 없을 때 돈 싫어한다고 이야기하지, 막상 돈 있으면 돈 싫어할 사람 이 세상에 한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401번에서는 돈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돈을 마다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여! 저 돈 무지 좋아합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401번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401번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고, 101-1번보다 돈을 더 좋아해요. 막상막하로 좋아하는데 다만 노선이 저쪽은 101-1번이고(지옥노선) 이쪽은 401번(천국노선)으로서 노선이 달라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등산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태운 버스가 가는 방향이 확정되어 버렸어요. 내가 운전사가 아닙니다. “기사님! 방향 바꿉시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데로 안갑니다. 이미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말을 안들어요. 정말 좋은 이야기에요. 그게. 예수님이 제말을 안들어요. 우리는 빌바를 알지 못해요.

매일 우리는 우리 인생의 키를 내가 쥐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기도를 간절히 하죠. “주여! 이 뜻대로 해 주시옵소서.” 로마서 8장 24절에서 “너는 기도할 바를 모른다. 백날 기도해 봐라. 내가 네 기도를 들어 주나. 안 듣지.” 주의 뜻대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성도는 뭘 아느냐 하면, 이미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을 알아요.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또 그런 사람들이 나와요. 특히 목사들이 그래요. 목사님이 그렇게 강의를 해서 방종을 유발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방종과 주의 뜻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방종이 아닌 것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뭘 해도죄인이다’ 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이것은 방종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나는 뭘 해도 죄인이다. 그러니까 나는 뭘 해도 괜찮다.’ 다시 죽어야 될 자기 이름을 들여다 볼 때 이것을 방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방종을 방지할 수 있는 비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기껏 하는 것이 그냥 101-1번(지옥노선) 타세요. 이럴 수밖에 없어요.

“여기는 401번이거든요. 잘못 타셨습니다.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곳이지, 나는 이제부터 뭐든지 해도 된다’는 자기 자신의 펄펄 살아 있는 그것을 증거하시면 노선을 잘못 타신 겁니다. 내리시면 됩니다.” 이렇게 보낼 수밖에 없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참된 성령이 주는 자유안에 있든지, 방종이든지 공통점이 있다면 ‘뭘 해도 죄’라는 것은 공통점입니다.

설교해도, 강의해도 죄입니다. 맷돌이니까요. 뭘 해도 죄인데 차이점이 뭐냐?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하면 이것은 성도이고, ‘그러니까 난 이제 뭘 해도 좋고 뭘 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의 챙길 것을 챙기는 것은 그 순간 성령의 열매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의 증인이 아닙니다. 성령이 사망의 자기죽음 속에서 역사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다루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다루는 식으로 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401번 안에서는 곤란해요. 육체와 성령의 차이점을 다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 다 할것은 아니지만 차츰 차츰 더 해봅시다. 3장 11절에 보면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는 것이냐 하면 아브라함을 염두에 두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거든요? 이 대목이 참 어렵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어려울 겁니다. 그림으로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아직까지는 미지의 인물입니다. 점선으로 그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는 ‘나는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말이죠.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여호와이레’인데,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믿었어요. 우리는 이미 나타난 예수님을 믿고 있고. 아브라함이든 우리든 무엇을 만든다고 했습니까? 죄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저주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그것이 실제로 우리 생활을 통해서 마구 튀어 나옵니다. ‘저주 아래’ 있으니까 그것이 표출되는 거예요. 말로만 ‘저주 아래’있는 것이 아니고 행동할 때마다 저주가 마구 퍼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왜 자기 육체의 행함이 아니고, 왜 믿음으로 의로우냐? 이것은 뻥하고 뚫렸어요. 이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상하다. 아브라함, 그 양반 희한한 사람이네.’ 사람이 양심이 있고 신앙이 있으면, 그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면 되는거지. 왜 자꾸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하냐고요. “그러면 당신의 행동은?” “제 행동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합니다.” 겸손한 것도 아니고, 양보하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는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이 의가 되는데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 말대로 라면 믿음주시는 분이 장차 나타난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는 분이 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동 하는것, 말씀 순종하는 것 그것은 뭐가 됩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430년 이후에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아브라함이 겨냥했던, ‘아브라함에게 의를 주게 되어 있는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죄인이며 저주를 받을 인간이 믿음으로만 의가 되느냐?’ 라는 문제를 아셔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 나 예수 믿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정도만 알면 안 되고 ‘예수님이 어떻게 일을 하셨기에 아무리 죄가 많더라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는 근거와 바탕이 마련되었는가?’ 그것까지 아셔야 성령에 의해서 믿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그때부터 하는 일이 뭡니까? 사람들이 이근호 목사는 ‘예수 믿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가르친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믿기만 해도 의롭게 되느냐?’ 그것을 평생을 두고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를 두터워지도록 하는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거예요. 그 일에 대한 힌트가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참 어렵게 되어 있으니까 다른 곳을 한군데 찾아서 보고 갈라디아서를 계속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 22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고린도후서 1:21,22)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보증으로” 무엇을?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성령이 오시는 것을 뭐로 봅니까? 두 글자! 뭐로? ‘보증.’ 초등부 어린이들은 이것을 이해 못합니다. 왜냐? 아파트를 안사보고 매매계약을 안 해봐서 이것을 몰라요. 여러분! 보증으로 주셨다는 말은 미래가 우리를 잡아 당기는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 이런 복을 받는다.’ 과거를 근거해서 현재로 나아가는 쪽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속에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오신 성령님께서는 미래를 근거로 해서 너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구원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미래를 다 압니까? 모릅니까? 다 모르지요.

보증금이라는 것은 아직도 모든 대금을 지불 안한 상태지요. 하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대금이 다 지불되어서 내 이름으로 등기가 이전되잖아요. 그게 보증금이잖아요. 보증이라는 것은 지금 예수 믿는 순간 하늘나라의 모든 것을 다 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 조금씩 더 알아가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알아가세’라는 것은 ‘과거를 근거로 해서 이만큼 알았으니까 앞으로 내일 조금씩 더 알고’ 라는 식으로 됩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성화론’이라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미래에 되어 질 것을 조금 더 조금 더 열어주는 거예요. (야! 어렵다. 참). 그림을 덮어놓고 한 모퉁이씩 열어주는 거예요. 이 말은 새삼스럽게 우리가 점점 더 완전해져 가는 것이 아니지요? 이미 우리는 완전한 관계 속에 들어 있지요? 완전한 관계인데 뭐만 모른다? 윤곽만 알지 전체를 다 모르지요.

그래서 우리는 덜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에 미흡합니까? 구원에 모자랍니까? 여러분! 스티커 떼는 놀이 압니까? 그림에다가 스티커를 붙여놓고 살짝 떼면서 “무슨 그림이게? 코끼리일까? 사자일까? 아하. 코끼리네.” 다 떼니까 나오지요. 그러면 그 안에 덮여져 있는 코끼리가 반쯤 그려져 있는 겁니까? 1/3쯤 그려져 있는 거예요? 아니지요.

이미 다 그려져 있는데 뭘 몰라요? 전체 그림이 안보이지요. 성령께서 보증으로 스티커를 떼니까 현재 내 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의 그 넓음과 깊음이 계속 나타납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나를 구원했구나. 이걸 바보같이 모르고.’ 그래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자기 생명의 면류관을 누구에게 반납합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쓰셔야 할 면류관이니 반납합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반납하는 거예요.

이게 어느 정도의 위력인데 예를 들면 잘 알 수 있어요. 큰 댐 공사를 합니다. 그 높이가 한 300미터 정도 되는 큰 댐입니다. 유명한 토목공사 전문가가 있어요. 그 사람이 그 공사를 따 냈는데 3조원이라는 돈이 들어가는 공사를 따내서 시작했습니다. 자기 일생일대에 이만큼 큰 돈 벌 기회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지 못했어요. 너무 좋아합니다.

수년 동안 합숙을 하면 이 댐 공사를 벌립니다. 완성되어 갑니다. 기분 좋습니다. ‘드디어 내가 이 댐을 완성하다니.’ 그런데 그 사람이 댐 공사를 신경 쓰다 보니까 발톱을 제대로 못 깍았어요. 자, 그러면 그 사람이 큰 댐 공사를 하면서 수심이 가득해서,

“여보! 내가 걱정이 늘어진다.”
“왜? 당신이 큰 댐 공사를 맡아서 하니 얼마나 기쁜데!”
“내가 발톱을 못깍았다. 이럴수가 있느냐?”
“그거? 내가 깍아줄게. 당신은 그깟 하찮은 발톱깍는 거 가지고. 그거 아무것도 아닌일 가지고.”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걱정이 늘어져요. 왜 당신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렇게 걱정하느냐고 물으니까, “포도껍데기가 음식쓰레기로 남을 텐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걱정하는 겁니다. 그거요? 다 먹고 난 뒤에 가져다가 버리면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공사가 댐 공사인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업이나 가정의 모든 문제는 댐공사 하느라고 발톱 못 깍은 것처럼 하찮은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큰 댐! 죄에 갇혀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기 십자가 생명의 엄청난 일, 산이 옮겨지는 것보다 더 큰 일,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지 우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을, 홍해가 갈라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을 베풀어서 우리를 이 지옥에서(101-1번)에서 천국(401번)으로 건져내는데 우리는 뭘 걱정하느냐 하면 발톱 못 깍았다고, 자기 품위 유지 안 된다고 그것 때문에 걱정이 늘어집니다.

“나, 오늘 교회 안 갈래.”
“왜?”
“가정에 문제 생겼어. 나, 하나님한테 삐졌어. 나 교회 안 갈래.”
“그럼 주님을 믿는가?”
“믿지. 십자가 지시고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으로 믿지. 그래도 나 삐졌어.”

이것은 주님주신 그 성령의 엄청난 프로젝트는 생각 못하고, 자기 발톱 길었다는 그것 하나,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계시의 영을 주사 그 부활의 능력의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지, 얼마나 크신 프로젝트가 임했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마 의존교회, 김 목사님도 교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시지요? “주여! 발톱의 때만도 못한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지금 주님께서 마귀가 열이 달라 들어도 안 빼앗기고 주께서 간구하고 기도하사 큰 손으로 여러분을 거뜬히 건져내는 그 위대한 작업을 해내는 손길을 눈이 떠서 좀 보게 해 주옵소서.” 그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보게 하옵소서”뒤에 붙는 것이 있어요. “보게 하사 헌금 좀 많이 내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렇게 죄를 생산해 냅니다. 이상하게 복음을 안다고 해놓고 뒤에 붙는 것이 “아시죠? 주님! 이렇게 좋은 기도를 하는데, 헌금도 약간, 어쩌고.” 하다가 “아이고! 내가 그 말 괜히 붙였다.” 이런 식이죠. 뒤에 가서 추슬러 봐야 소용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런 기도를 안 듣고, 성령께서 마음대로 합니다. 이 교회도 성령께서 마음대로 댐공사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누구의 간증 듣지 마시고 성경에서 직접 발견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보증으로서. 자, 이제 갈라디아서로 가봅시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미래에서 이미 확정되었기에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열어주는 거예요. 얼마나 주님의 프로젝트가 위대하고 놀라운지를.
‘온천하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 위에 덮여 있는 덮개를 벗겨내면서, 그 안에 있는 넓이가 어떠함을 더 많이 알도록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설명할 것이 참 많습니다. 갈라디아서 같은 경우에 문장이 짧은데도 함축이 되어 있어서 이것을 다 풀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의견들이 구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든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만들어 내고 죄를 만들어 내죠.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저주로부터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건져 내시는 분이거든요. 제가 안산강의를 할 때는 그것이 참 원활하게 되었는데요. 여기 혹시 두루마리 화장지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101-1번이나 401번이나 관계없이 시커멓죠? 우리는 말씀대로 못살아요. 항상 온갖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라고 하고 자 이것이 예수 안에 들어갑니다.

자, 이렇게 들어가면 바깥에서 보면 우리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예수 안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만 되어집니다. “어이! 나와봐!” 다 나오면 저주받으니까 그것은 안되니까 살짝 나오듯이 보여주는 거예요. “조금만 보여줄게.” 조금만 보여주니까 뭐냐? 시커멓게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한 거예요.

사람들이 지금 뭘 원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 안에’ 놓여져 있으면, 이 시커먼 것이 점차, 점차 줄어들지 알고 있어요.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식으로 구원하면 우리하고 예수님하고 합작해서 구원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죄가 안 줄어들면 우리는 탈락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은혜가 미흡해요. “좀, 믿어도! 좀, 착해도!”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친히 담당한 것이 아니고, 협조를 구하는 거예요. “어이! 너, 예수 믿지? 좀, 잘 살아줘.” 이것은 부탁하는 것이지 친히 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13절에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뭘 받으사? 저주를 받았거든요. ‘우리 안’에서는 저주가 계속 나오는데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사” 우리가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아브라함이 믿은 것입니다. ‘장차 오실 분이 그냥 하나님이다.’ 이것을 믿은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에, 내가 믿기만 해도 아무 일한 것도 없이 내가 의인이 되는 거냐? 그러면 예수님께서 친히 저주를 담당했고 그 효과 때문에 예수 안에 있으면 내가 의인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던 겁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이 필요 없네요. 이제 구원받아 놓았으니까 성경이 필요 없잖아요?”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려면 계속해서 ‘왜 이 땅에서 살면서 저주 받아야 마땅한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주장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부자가 천당 가기 힘들다. 탐내지 말라.” 모든 말씀이 우리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것을 보여주는데, 성령께서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그대로 각 처소에 있는 우리에게 이것을 그냥 적용시킵니다. 지금 한꺼번에 다 이야기를 하니까 여러분이 폭발할 지경일거예요. 성령이야기는 하지 않고 예수님이 뭘 하셨는지 그것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의인되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구약에서 언약이란 쪼개는 분과 갈라지는 분이 있어야 돼요. 죄와 은혜가 있음으로 여기서 사랑, 자비가 나와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일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자비, 긍휼, 불쌍히 여겨주심이란, 죄인이 성립되어야 은혜의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따라서 죄인이 없으면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아요. 긍휼을 베풀고 은혜를 입을 때 진짜 하나님과 구원받은 백성이 한조가 되어서, ‘아하! 저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구나’, 하고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구원받을 때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노아가 잘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거든요. 노아가 방주 안에서 물도 없는데 막 헤엄을 쳐서 살아남았습니까?

방주가 있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고 난 뒤에 ‘다 주의 덕입니다’ 하는 감사의 뜻으로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예배를 드렸잖아요. 그처럼 지금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이에요. 불쌍히 여기셨으면 우리는 뭐가 되어야 해요? 계속 죄인 되어야 됩니다.

죄인 될 때 주의 은혜가 더욱 넘쳐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언약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언약을 이루는 것이 새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가 온것은 나를 친히 대속물로 줘서 친히 저주를 담당한다”고 하니까 자기 백성의 저주를 집어 넣어서 예수님도 의롭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도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이 사실을 가지고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도록 하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나밖에 몰라요. 죽을때까지 나밖에 몰라요. 구원도 내 구원이고요. 아까 말한대로 101-1번이나 401번이나 인간은 마찬가지 인간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가 너를 대신해서 저주를 담당하사 네가 의인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알게 하는 그 일이 401번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6장 8절에 있는대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리라”가 이루어지거든요. 성령께서는 이것을 그대로 들고 우리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적용을 시키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죄라고 느낄 때, 낙심을 하고 절망을 합니다. ‘예수 믿는 내가 이런 죄를 지었구나!!’ 사실은 그것만 죄가 아니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다 죄인데 그런 것은 다 잊어 버려요. ‘예수 믿는 인간이 죄를 지었구나. 그래 나 같은 인간이 무슨 천국을 다 가겠다고. 일찌감치 포기하자.’ 이렇게 됩니다.

그때, 불현듯 “십자가가 너희에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여!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주님 앞에 죄송합니다’하고 깨닫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401번! 그렇지 않고 101번에서는 ‘부족합니다. 못났습니다’ 혼자서 자기부인, 도 닦고, 성화하는 그것을 연출하느라고 바빠요. 이것은 불교지요.

절망가운데서 구원할 십자가의 은혜의 깨달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겁니다. ‘그래.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지으면 안 돼.’ 뭔가는 교회를 다니고 난 뒤에 짐은 짐대로 무겁고 행동은 어설프고, 위선자가 되어 가고 속으로 돈 밝히는 척 하면서 안 밝히는 척 하고, 속으로는 교회 부흥되어서 차고 넘치고, 예배당 짓기를 바라면서 안 그런척 하고요.

이것이 은혜가 오지 않으면, 사람이 위선과 위선을 더하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김천에 있는 철도공사 초청강사가 되어서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에 예수 안 믿는 제일 높은 어른인 지사장이 참석했어요. 지사장이 참석하니까 그 지역의 철도공사 간부직원들이 예수 안 믿는데도 다 참석한거예요. 그 신우회 예배시간에 예수 믿는 사람보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이 참석했어요.

그 예배 주제가 뭐냐? ‘철도 무사고 기원 예배’입니다. “목사님! 할수 있습니까?” “복음 전하는데 못할게 뭐 있습니까?” 그 지사장이 설교 처음부터 웃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끝나고 금일봉까지 내고 갔어요. 제가 무슨 설교를 했기에 그렇게 되었느냐? 설교본문이 전도서 3장의 “날때가 있으면 죽을때까 있고” 그 대목이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돛단배가 물 흐르듯이 돛단배가 강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강물 움직임 따라서 같이 흐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서 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소위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주의 뜻에 맡긴다고 해 놓고는 더욱더 이기주의가 되어 가더라. 이게 무슨 빛이고 소금입니까?” 그러니까 지사장이 입이 죽 벌어져가지고.

특히 좋았던 것이 마지막에 뭐냐? “예수 믿는 여러분! 처음 여러분이 이 직장에 들어 올 때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좋은 직장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했지요? 왜 나갈 때는 감사를 안 합니까?” 여기에 지사장이 기분 좋았어요. “왜 나갈 때 데모하고 그럽니까? 들어올 때 하나님의 뜻으로 들어왔으면 나갈 때도 주의 뜻으로 나가니 감사합니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파업하지 말고 구조조정 당했다고 하지 말고 주의 뜻인 줄 알고 곱게 나가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지사장은 혼자서 너무나 좋아하고 그 옆에 나이 많은 간부들 기 팍 죽어가지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식사를 하는데 지사장이 “목사님 잠깐 봅시다. 목사님 오늘 말씀 너무 좋았어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제 말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절망 천만 만번 당해도 당연한데 왠 축복인지 일한 것도 없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복이 또 있습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의 복입니다.

목사님! 그런 설교를 하시니까 교회에 방종인들만 키웠습니다. 저는 그런 성도 같으면 진작 101-1번을 타라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사이비 신자입니다. “맞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주시는 은혜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감사함으로 헌금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같으면 이게 바로 401번이죠. 방종할 사람 같으면 이러나저러나 벌써 방종 했지요.

제가 지금 좋은 소리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든 말든 우리 앞에 실제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거든요. 믿음으로 의롭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의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그 생산한 의를 믿음으로 의로움으로 받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되죠.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이 굉장히 어려워요. 이것이 박사학위 논문까지 나온 구절입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박사학위를 했던 그 사람이 놀랍게도 무릎을 치면서 느낀 그것을 제가 아주 칭찬해 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복, 복, 하면서 물질적인 복을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보니까 복은 뭐냐? 성령 받은 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듣고 보니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목사님은 괜히 놀라고 그럽니까?’ 하는 분위기인데, 이게 옛날 사람 같으면 진짜 복을 못 받으면 이런 것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물질적인 복이, 복이 아니라, 성령 받은 것이 복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뭘 주시는가? 성령님을 복으로 주신다는 말이죠. 이게 어려워요. “목사님! 이 물 드세요.” “감사합니다.” 이 물은 물건이기 때문에 소유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물건입니까? 어르신네 아닙니까? 어르신네죠?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이제부터 네 맘대로 못살게 되었다는 그것이 바로 복’이며, 이것을 순간순간 깨닫게 하는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모든 절망가운데서 모든 낙담가운데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고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것은 10억주고 100억주고도 못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한것도 아무것도 없이 나는 죄인인데 대신 친히 담당 하심으로써 그걸 믿음으로 내가 천국 백성이 되었구나.’

이것은 우리가 땅 밑에서 광부를 하든,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든 직업과 관계없이, 백수가 되든 관계없이 주께서 침투해서 들어온 성령의 복입니다. 이 성령의 복을 받다 보니까 우리는 ‘주여! 저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구원된 것은,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볍게 이야기 할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괜히 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 보내서 십자가 지게 하신 것도, 심심풀이로 하신 일이 아니라, 이런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인간도 모든 말씀을 다 지킬 수 없고, 도리어 반대로 나간다는 것을 너무 잘 아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용서하심을,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크게 느끼게 하시니 이것이 참 복이라 어떤 일을 하든지 낙심하지 말고 주께 감사할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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