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3:48

20060609 서울강의 - 갈라디아서 제 1강 녹취  이름 :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1강 (이근호목사, 2006년 6월 9일, 서울의존교회)

제가 크로스빌리지에 올리는 것은, 제발 목사님들이 중세철학을 공부좀 하셔서, 종교개혁의 의의나 이런 것들을 차례차례 기초 닦듯이 공부를 하고,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이 시대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저는 크로스빌리지 자체를 하나의 신학교 커리큘럼같이 생각해 볼때, 사람들이 자기 아는 것, 쉬운 것만 보고 치우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난해한 것들도 있음을 알아서, 그런 것들을 공부를 해보면, 목사님들이 설교하실 때, 내가 하는 설교를 교인들이 자칫 오해하고 들으면 이런 식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설교를 해 주시면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봉사가 더 충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되고, 깊이 알아야 되고. 그 말은 뭐냐 하면, 목사님들이 공부를 계속 전개해 주시라는 말입니다. 공부를.

‘내가 이쯤 알았으니 뭐 이쯤해서 대충---.’ 이래가지고는 그것은 봉사의 자세가 아니겠죠? 자. 신학교의 커리큘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방금 이야기 한것은 중세철학과 신학을 빠뜨리지 말고 그런 것들을 다 공부를 해서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성경을 보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고, 그렇게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성경전문가로서의 마땅한 봉사자세라는 말입니다.

오늘 약속대로 갈라디아서를 하겠습니다. 신약성경 302쪽.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4절까지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1-4)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좆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갈라디아서의 시작은 현재, 사람 같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구약언약에 의하면 이방인들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개로 봤어요. 개. 하나님의 언약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본인이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본인의 희망사항이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람취급 하지 않죠.

그리고 옛 언약가운데서도 마찬가지인데 시편에 보면 야곱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을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벌레라고 했어요. 벌레. 벌레 종류에 어떤 종류가 있느냐 하면, 구더기라고 있어요. 구더기. 성경에 나와요. 사람을 보기를 벌레로 보고 구더기로 보는 거예요. 아마 요즘 아이들 같으면 여기에다가 몇 개 더 붙일 거예요. 개똥벌레, 딱정벌레, 바퀴벌레.

사람을 보고 “이 구더기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인간아.”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취급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사람 맞지요?”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으로 보기에 “영 아닌데 뭐. 너는 개야. 너는 아니야” 라고 일소에 붙여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성경 갈라디아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람 취급합니다. 이 갈라디아서, 사도행전, 마태복음등, 성경에 대해서 캄캄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흔히 요새 유행하는 말로,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이것은 저희들끼리 하는 소리고요.

진짜 하나님께서 성경을 왜 주셨느냐 하면, “이 성경대로 아는 사람 손들어봐라” 하는 식으로 성경을 준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이 성경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학식으로, 사람의 지혜로는 해석을 안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을 그렇게 기록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어떤 노력을 해도 절대 알 수 없게 하는 방식이 성경 안에 담겨 있어요. 완전히 약 올리는 거죠. 성경 줘놓고는

“이해되느냐?” 
“이해 안 되는데요.”  
“사람이 아니구먼.”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니야”라는 뜻이에요. 부모가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그 사람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자동적으로 그 나라 국민이 돼요.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천국의 국민이 되는가? 그것은 ‘아니올시다’입니다. “나는 남자인데 천국에 들어갈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나는 여자인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안돼요.

‘나는 어린이 이니까 천국에 그냥 넣어주겠지?’ 그것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셔서, 이 성경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이 성경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성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새롭게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성경을 풀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모르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인간의 힘으로 갈라디아서를 풀수 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란 아예 없습니다. 그러면 시장바닥에 저렇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뭐냐?

그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구더기요, 바퀴벌레요, 딱정벌레요, 하나의 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저를 구원 하소서” 할 때에, “나는 개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하기 싫어.” 이렇게 하니까, “맞습니다. 제가 개 입니다” 라고 인정했어요. 그 여자가 왜 자기 자신을 개라고 할까요? ‘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미스코리아 대회 하는데,

“미스 경북! 16번.”
“소감이 어떻습니까?”
“저요? 개거든요!”

이런 미스코리아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오셨습니까?” “송정미용실원장님이 나가보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고쳤습니까?” “별로 고친데 없습니다.” 자기를 더욱 아름다운 인간으로 돋보이게 하지, 자기를 개라고 인정하는 그런 여인은 없어요. 그런데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를 개라고 하는 것이 어떤 관점에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겁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하나님의 언약의 입장에서 볼 때만 가능합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언약.’ ‘언약’이란 말이 어려운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 맹세,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입장에서 볼때, 혈통상으로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개가 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이유는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가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사람뿐만이 아니고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유가 다 천국 보내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고 거룩한 분인가를 알려주는 도화지 역할, 바탕역할, 그릇역할을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지옥 가도록 만드시고, 어떤 사람은 천국가라고 만들어 주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 맘대로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달리기를 해서 빨리 달리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늦게 달리는 개미 같은 사람은 지옥 가는 그런 식이 아니라, ■1 이 성경말씀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지옥가고,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국 갑니다. ‘천국의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수학시험 치고, 영어시험 쳐서 판정 나는 것이 아니고, 성경책을 코앞에 들이댈 때 판정이 나요. 성경책을 들이댈 때.

어떤 사람은 성경책은 볼 생각을 안 하고, ‘자기가 꿈에 예수님을 본 것’, 이런 것을 가지고 들먹이고, ‘자기가 어떻게 했더니만 기적이 생겨가지고 갑자기 몸이 나았다’랄지 이런 것을 이야기 하는데, 실제로 마귀가 그런 기적을 많이 일으킵니다. 여러분! 기적을 백번 받고 난 뒤에 지옥 가는 것이 낫습니까? 하나도 기적 없이 그냥 천국 가는 것이 낫습니까? 어느 것이 나아요?

기적! 기적! 기적! ‘차사고 났는데 다른 사람 다 죽고 혼자 살았다는 기적. 땅을 샀는데 다른 사람이 산 것은 다 내렸는데 자기 것만 올랐다는 기적. 아파트를 샀는데 그게 값이 껑충 뛰어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그런 기적. 애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50등하다가 1등이 되었다는 기적, 취직하는 기적, 멋진 남자 만나는 기적, 멋진 여자 만나는 기적.’

기적, 기적, 기적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결국은 지옥에 갔다. 그러면 앞서 있는 기적들은 어떤 기적입니까? 지옥으로 꼬시고 또 인도하고, 강하게 지옥으로 몰아넣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그 기적들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진짜 기적을 원한다면, 2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 땅보다 하늘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그런 마음을 생기게 하실 때, 그때 오늘밤에 죽더라도 여러분만은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기적만이 기적이에요. 자기 살게 해달라고 아등바등, 애쓰는 그런 기적이 아니라, ‘지금 죽더라도 천국이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행운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천국에 가게 된 것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즐겁게 느껴질 때, 그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이죠. 제가 오후 4시에 안산에서 강의를 했는데, 앞에 강의가 있으면 여기서도 항상 되풀이를 하게 돼요.

두 개를 다 듣는 분은 지루하게 여기지 말고, 안들은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들이 교회를 오는 이유?’ 제가 목회를 몇 년 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정리로 중간결론을 내려 보면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약간 길기 때문에 제가 적어 보겠습니다.

1)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너무 고생한다.
2)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무슨 착오가 있기 때문이다.
3) 따라서 나의 본 실력을 보여줘서 고생을 줄이자.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이 첫 번째 줄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자기가 지금 너무나 고생 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 섬기는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내가 죄인인줄 내 스스로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내가 지금 지은 죄보다는 내가 지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생스럽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행정적으로 착오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네 실력이 이렇게 좋았구나. 하하 네가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구나. 고생을 좀 줄여 줄께” 하고 하늘나라 사무실에서 이제부터 고생을 좀 줄여 주게 되는 그러한 압력을 넣기 위한, 그런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온다는 것이, 제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죄를 지은 것은 맞아요. 인정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가 살아갈 앞일이 너무 암담하고, 지금 하는 내일이 너무나 안 되고 꼬이는 것을 볼 때, 내가 지은 죄보다는 내게 준 고생이 너무나 심하기에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이런 것이 여기에 들어 있지요.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정성을 다하여 털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은 죄만큼만 벌을 받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착한 일을 하면 그만큼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서 교회 와서 고개 숙이는 척 하면서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말씀대로 살면, 지금보다 고생이 줄어들고 캄캄하던 앞길도 훤하게 내다 보일것이 아니냐’ 라는 흥정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개입니다. 벌레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벌레 새끼가 벌레를 까놓은 거예요. 그냥. 개가 그냥 낳아놓은 강아지입니다. 이 긴 문장 속에 어느 대목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런 관심은 하나도 없어요. 초장부터 ‘나’고, 끝도 ‘나’예요. 자기밖에 몰라요. 세상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인 줄로 착각하면서 ‘나’밖에 몰라요.

너무 고생이 심하다는 거예요. 그런 분들에게 이 갈라디아서를 설명할 때 사도바울이 또 주님께서 뭐라고 나와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 ‘나’가 관심 두고 있는 그런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뜻이에요.

‘너’나 ‘나’나 정신없이 관심을 쏟고 있는 그런 관심사에 하나님께서 동조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최종적으로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어요.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다고요. 눈에 관심이 있으니까 눈을 쌍커플 수술하고, 코에 관심이 있으니까 코를 높이고, 자기 이빨에 관심이 있으니까 자기 이빨을 교정하지, 남의 이빨을 왜 교정하겠어요.

이빨, 키, 코, 눈, 이런 것들이 모여서 ‘나’라는 것을 형성하기 때문에 나에게 딸려 있는 나의 새끼 같은 지체들이죠.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라는 그 사람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고, 내가 포함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경에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하는 것은 ‘너’나 ‘나’나 스스로 관심 있다고 여기는 것 하고는, 주님한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데 관심을 두고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3 “네가 관심 두고 있지 않은 그 일에 하나님께서 관심 두는 이 책에 대해서 네가 이해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이 갈라디아서를 보면 “뭔데?”, 경상도 말로 하면 “뭐꼬? 이거.” “머시기야? 이거. 뭐야? 이거.”

아무 관심 없어요. 왜? 이미 관심사는 하나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나’에게 관심이 있어요. 만약에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이 책을 보는 자에게는 월 200만원씩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이렇게 나와 있다면,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읽어야해’ 하겠죠. 그 뒤에 2절에 보니까 “200만원을 받을 분은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열 번 외우시기 바랍니다.”

‘까짓거 주기도문 10번? 1000번도 외우겠다.’ 200만원 때문이죠.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한 번)’ ‘하늘에게 계신 우리 아버지여(두 번).’ 100번이라도 외웁니다. 100번이라도. 지금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목사님한테 ‘내가 뭘 하면 나에게 유익이 됩니까? 그 방법을 알려 주세요’라는 식으로 교회에 옵니다.

설교 들으면서 하나님 이야기는 다 치우고, ‘이렇게 하면 이런 복 받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 공식만 가지고 들이 대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나에게 희망을 달라’는 거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런 효과가 온다.’ 그것만 달라는 거예요. 여성분들이 화장품을 살 때, “이것을 바르면 별 효과는 없는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할 때 그 화장품을 누가 삽니까? 아무도 안삽니다. 사람들이 전혀 안사요.

화장품을 하나 구입해도 ‘나’를 위해서, ‘나’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확정된 ‘나’를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화장품을 사든, 교회를 가든, 뭘 해도 한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천국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는 뜻이에요. ‘하늘나라는 개나 소나 다 가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그 뜻을 아는 사람만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당에 가도 거기서 못 견딥니다. 왜냐하면 ■4 천국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본성상, 말씀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나 주님에게 관심이 없는 채, 이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 말씀에 관심이 없게 되어 있어요.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분들은 말씀에 관심이 전혀 없어요. 다른 분들은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나’에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지요. 그 중의 한사람이 바로 욥이라는 사람인데, 욥이라는 사람이 하도 마음이 괴롭고 육체가 괴로워서 하나님을 원망을 해댑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고생이 심할 것 같으면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말고, 어머니 태중에서 아예 죽었으면 그만이지, 왜 내가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하게 합니까?” 줄줄줄줄, 나오는 것이 원망입니다. 몸이 아프니까요. 몸이 아프니까 그런 잔소리가 나오지요. 이중에 연세 많은, 예를 들어 치매현상이라든지 노인병에 걸린 분들을 봉양하시는 분들 보면 ‘건강하실 때는 우리 어머니께서 저런 분이 아니었는데’ 할 정도로 건강할 때의 어머니와, 몸이 아팠을 때의 어머니의 태도가 완전히 180도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요.

진짜 완전히 구더기 같아요. 연세 많은 분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실례고 뭐고 간에 그게 실제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사람이 안 같아요. 특히 연세 많은 분들, 병자들 돌보다 보면, 특징이 뭐냐? 노인병원에 가보세요. 저도 한 두번 가본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갔어요. 목사이기 때문에 많이 가는데, 노인 병동에 가 있는 분들의 공통점? 노인들의 공통점?

간단합니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랬었었는데 몸이 아프니까, 이제 자기 몸에 희망이 없으니까 자기 본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겁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게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다음부터 ‘자기의’만 내세웁니다. ‘자기의’만.

누가요? 노인들이요. 그러면 노인들이 누굽니까? 어린애들이 세월이 지나면 노인이 되는 거예요. 노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everybody! 우리 모두가 점점 노인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전부 다. 어린애라도.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다들 노인이 되어 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가 갈라디아서를 강의할 때 ■5 “이 갈라디아서를 모르면 천국백성 아닙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줬습니다” 하는 말을 할 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이 성경대로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 성경말씀에 비추어볼 때 “바로 내가 그렇게 이기적이며 내가 바로 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하고 다르지 않는 제가 바로 개 맞습니다.”라고 이것을 그런 식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이 성경책을 이해한 천국의 백성이라고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성경의 모든 책이, 갈라디아서 뿐만이 아니고 모든 책이 다 그래요. 제가 며칠 전에 수요일에 - 이미 설교를 들어 보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나’라는 인간이 옛날에 죽었든지 지금 죽었든지 그게 무슨 차이가 납니까? 차이가 납니까? 아무 차이가 안나요. 내가 스무 살에 죽으나, 60에 죽으나, 90에 죽으나 아무 차이가 없어요.

지금 안 믿는 눈치들이신데. 여기 있는 차가 지금 여기에 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무슨 차이가 납니까? 아무 차이가 안나요. ‘나 열 살 되었다. 스무 살 되었다. 드디어 서른. 어른이 되었다. 드디어 장가간다.’ 주님께서는 ‘이게 무슨 벌레가 왔다 갔다 하는가?’ 합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안 태어나도 될 인간이었어요. 누가요? 제가요. 안 태어나도 나에게 손해가 없어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안 태어나도 나에게는 손해가 안돼요. 안 태어났으면 ‘내가 누굽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그런 존재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에게 손해가 아닌 거예요. 안 태어나도 손해가 아니듯이 태어나도 손해가 아닙니다. 맞죠? 말 되지요. 지금 

■6 안 태어나도 손해가 아니고, 태어나도 손해가 아니에요. 태어나다가 죽어도 손해가 아니고, 30년 살다가 죽어도 손해가 아니고, 60년 살다가 죽어도 나에게는 손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더 살려고 교회에 오냐 이말 입니다. 안살아도 되는데 왜 자꾸 ‘살려 달라’고 하느냐 말이죠.  

평소에 기도 안하다가 꼭 엄마 아빠 아프면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통성으로 기도한다고 하고요.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누가 안 나오다가 갑자기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요. ‘또 사고 쳤구나.’ 성경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만 관심 두죠. 그것을 경상도 말로 ‘천불’이라고 합니다. 속이 천불이 나서 교회 와가지고 그 다음에 천불이 풀리면 교회 안 나옵니다. 천불이 끝났거든요.

다시 이야기 할까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과중한 고생을 할 때, 하늘나라에서 행정착오를 일으켜서 본인의 실력을 너무 얕잡아 봤다고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거예요. 이렇게 착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사무 보는 분이 뭔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분이 민방위 출신인가? 사무를 잘못 봐서 그렇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그런 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 거룩한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을 본다고 말합니까? 무슨 Q.T를 한다고 들여다본다는 말입니까? 예? 사람에게서 난 게 아닌데요. 사람에게서 난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관심 두는 관심사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 없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오른손에는 장수(오래 사는 것)요 그 왼손에는 부귀영화라(잠 3:16)”고 했습니다.

심방 갈 때 써먹기 멋지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면 오래 사는 것과 부귀영화가 주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대심방중에 하는 말이, “당신들이 이렇게 지질이 궁상으로 못사는 것은, 평소에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말씀을 따라서 살지를 않으니까 벌 받아서 이렇게 못살잖아. 당장 오늘부터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오른손에 장수와 왼손에는 부귀영화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에 적혀 있는 약속이니까 약속대로 되는지 시험을 해 보라고!”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이 반발할 수 있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하고 봉투에 5만원 넣어서  차비 하라고 주잖아요. 그렇게 해서 그 성경말씀 잠언서에 있는 대로 ‘인간들이 원하는 축복이라는 축복은 다 준다. 부귀를 주고 장수를 준다. 말씀대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고,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온갖 시험을 다 해본 사람들이 누구에요?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 유대인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누구를 죽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라진 인물이에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한테 원수지간 되게 만들어요. 부귀와 장수가 좋아서 말씀 지킨다는 그 정신이 결국에는 하나님마저 자기 손으로 죽이는 그러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도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분명히 말씀대로 살면 부자 되고 오래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대로 살 때, 사람에게서 나오는 능력으로서는 그 말씀대로 살수가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개고 벌레인데, 개가 무슨 말씀을 지킵니까? 개가. 벌레인데, 구더기인데. 구더기는 밟으면 꿈틀 하는 것밖에 없어요. 다른 것은 없어요.

오늘날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정신과 양심과 믿음과 사랑의 이런 모든 것도, 인간이 살고자하는 본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단층촬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리적 실험 장치들을 통해서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물리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인간들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을 몸체를 통해서 반응을 나타낼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뭐냐? 산들바람 불고, 습도 적당하고, 온도가 적당할 때, 어느 인간도 기분 안 좋은 인간이 없다. 그런데 습도가 높아지고, 온도가 섭씨 40도로 올라갈 때, 같은 소리라도 나쁘게 내뱉게 되어 있다. 그것이 범죄의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은 컨디션 문제지 그 사람 자체가 특별히 더 악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과학적으로, 통계적으로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런 시대에요.

실제로 우리도 신앙생활 한답시고 해 보면, 기도요? 컨디션 좋을 때, 적당하게 배부를 때, 기도 발 먹습니다. 잘됩니다. 완전히 미끄러지듯이 합니다. 줄줄줄, 잘 나옵니다. 그런데 날씨 더울 때, 땀 줄줄 흘리면서 기도를 해 보라고 하면, 속에서 욕이 막 나옵니다. 그만 기도를 5분을 못 채웁니다. 5분을 못 채워 놓고는, 5분을 못 채웠다고 해서 ‘또 오늘 내 자식이 길에서 사고나 당하고 누구한테 얻어맞지나 않을지’ 그런 걱정이 늘어지죠.

그러니까 이런 상태에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차라리 하늘의 배를 따세요. 이것은 되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라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5분한다고 기를 불어 넣어도 기를 불어 넣는 것하고 관계없어요.

제가 35분동안 강의를 했는데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경말씀 못 지킵니다.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안 됩니다. 성경을 보고 그 안 됨을 아는 사람이 천국백성입니다. 그런데 지옥백성은 성경책을 보지도 않아요. 성경책은 보지도 않으면서 ‘나는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이렇게 믿는다고요.

자기 주제 파악이 안돼요. ‘나는 교회는 안다니지만 착하고요. 교회든 천국이든 내가 맘만 먹으면 갈수 있습니다.’ 맨날 이래요.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을 못 지킨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력으로 인간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구더기고 벌레고 개입니다. 이것은 자력으로 그렇게 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 다음에 뭐지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이게 말이 됩니까? 사람이. 제가 지금 하나의 예를 들면, 여기 물이 있는데 제가 “이 물을 마시면 죽은 사람도 삽니다. 이 물이 그런 물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맞습니다.” 하면 이 물 마시려고 줄 죽 섭니다.

사람이 허풍을 쳐도요. “열심히 하면 착한 사람 됩니다.” 그런 것은 이해가 돼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공부를 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월드컵 우승할 수 있습니다.” 허풍을 쳐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이승엽이 올해 18호 홈런 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되는데 아무리 허풍을 치고 사기를 쳐도, “이렇게 하면 죽은 자가 삽니다.”라는 허풍은 함부로 할 소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끝이에요. 죽으면 그만이지요. 이순신 장군이 살아났습니까? 오늘날 돌아다니는 이순신은 동명이인이지,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이 아니잖아요.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고 난 뒤에” 그 이순신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죽은 증조부가 살아납니까? 증조부가 살아난다면 미쳤다고 제사를 드립니까? 제사를 안 드리죠.

제사를 드리고 있으면 “야들이 뭐하노?” “누구신데요?” “증조부대이” “아이고 놀래라!”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미 죽어서 살아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그 허풍과 사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이것은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본인 스스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말 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수 없어요.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노동한 만큼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종교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 갈라디아서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 아니면 ‘도’입니다. ■7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이지 신앙인이 아닙니다. 백날 교회를 다녀봤자 자기만 절대화 되고, 자기만 우수한 사람 되고. 그것은 전혀 복음하고 관계없어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거침없이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이 한마디만 해도 사도바울은 사형을 당해도 쌉니다. 왜? 사기꾼인데요. 정말 사기꾼이죠.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 만일 사기가 아니고 진짜라면, 그러면 당신의 복음에 내가 목숨을 걸께요.”

이렇게 나와 줘야 비로소 사도바울 눈에는 눈에 확 띄면서, ‘여기 나처럼 미친놈 또 하나 있네. 나 같은 그리스도의 성도가 또 있네’ 라는 이야기에요. 결국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가라” 이 말이죠. “그런 사람은 가고, 정말 하나님이 인간도 아닌 인간을 인간 만들어 준 사람만 오세요.” 그런데 그렇게 당기는 그 기준은 뭐냐 하면, ■8 “죽었다가 살아난 그분에게 모든 것을 걸겠습니까?”라는 이야기에요.

얼마 전에 지난주 수요설교인가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죠.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예수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되었지요? 이제 내 맘대로 삽니다” 하고 가버리더라는 말이죠. “십자가 피 믿습니다. 당신 말대로 십자가피로 구원받는다니까 이제는 내 맘대로 살 겁니다.” 이러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사도바울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연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내가 어떻게 살까’의 그 ‘나’가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주도권이 주님에게 완전히 등기이전이 되어 가지고, 내 것은 없고 주님의 소유가 된 ‘나’이기에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뭐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내 맘대로 살겠습니다. 이제 물러가도 되지요?” 이런 질문조차가 나올 수 없는 사람이에요. ‘속이 시원하네. 주께서 나를 다 빼앗아 가니까 속이 시원하네. 진즉 죽어야 할 것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주님께서 쓰실 모양이다.’ 하고 모든 것을 등기이전해서 ‘다 가져가세요’ 하고 다 줘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네비나스’ 강의할 때에 든 적당한 예가 있지요. ■9 ‘네비나스’란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마치 세탁소에 걸려 있는 세탁된 외투와 같아서, 주인이 와서 “아저씨! 일주일 전에 맡긴 그 외투 있지요?” “예!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아예 여기 외투 있습니다” 하고 내어줄 때, 우리는 하나의 외투에요.

“여기 있습니다” 하면 그냥 주인이 와서 낚아채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외투가 팔을 벌리면서 “안돼! 안돼! 저리가! 내가 주인이야. 예수 당신은 주인 아냐. 내가 주인이야.” 하고 버티는 그런 외투 같으면 아예 그런 외투는 세탁소에 맡기지를 않았지요. 그것은 괴물이지 외투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지금부터 다음시간까지 해서, 갈라디아서에 구약의 언약이 어떤식으로 폭격을 가하고 있느냐? 거기다가 엎고 있느냐? 그것을 제가 설명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할 때 갈라디아서만 쏙 빼서 하면 안돼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야기해서, 그 가운데 갈라디아서가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가를, 전체를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게쉬탈트’라 합니다. ‘게쉬탈트심리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무엇이 진실이냐 하는 것은 배경이 무엇인지를 깔고 봐야 진실된 것이 보인다”하는 인간의 심리구조에 대한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가 뭐냐 할 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 있어서 갈라디아서가 어떤 위치를 점하느냐를 보는데, 사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때에는, 성경이라면 구약성경이 주가 되었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등 이런 성경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할때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핵심 언약이, 갈라디아서에 어떻게 해서 주어졌는가?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갈라디아서가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 보자는 겁니다. 갈라디아서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식이 세 명이 있는데 이름을 최 일호, 최 이호, 최 삼호 이렇게 지었다고 해 봅시다. 자, 그때 농담 삼아 아빠와 엄마가 “삼호야! 너 없이도 일호와 이호와 함께 충분히 행복하다”라고 한다면 그 말을 듣는 막내 삼호는 기분 나쁘잖아요. 막내인 삼호가 없이 형 둘이만 있어도 행복했더라면 그러면 막내 삼호는 추가밥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는 그 말이죠.

갈라디아서가 뭐냐 할 때는, 갈라디아서가 없다고 할 때, 뭐가 빠지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없다고 할 때 어느 쪽에서 약간의 취약점을 나타내는가? 어떤 흠집이 있느냐?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죠? ■10 구약의 언약은 언약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반드시 인간이 퍼질러 놓은 죄가 있어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홍해를 건넌 사람은 다 죽었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죽어야 돼요. ‘요단강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아직 인간이 드러내지 않은 그 죄를 드러냈을 때, 그 죄마저 극복이 되는 식으로 앞으로 더욱 더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라는 차원에서 그 다음 언약이 부여 됩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하면,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더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를 더해준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를 더해주는 거예요. 애가 “국이 짜다”고 하면 “얼마든지 더 짜라. 얼마든지 하면서 물을 부어 주는 거예요.” “짠대?” 또 물 부어 버리는 거예요. “지금도 짜?” “이제는 안 짜” 그래도 물 부어 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어때?” “이제는 물 뿐이야.” “그래. 물뿐이야.” 하나님의 용서뿐이야. 사랑뿐이야. 마지막에 사랑만 남기기 위해서, 사랑만 눈에 보이기 위해서, 자기 지은 죄가 안보이기 위해서, 인간이 지은 죄를 더욱 더 나타나게 하고, 나타낸 죄보다 더욱더 큰 사랑과 용서를 퍼부어서 결국은 사랑만 남게 하는 이 방법을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실시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해서 구원받는 방법이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의로워서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안다고 해놓고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인 율법과 행함을 가지고, 자기를 열심히 단련시키고, 절제하고, 낮추고, 자기를 때려서 구원하고자 하는, 즉 사람에게서 나는 방법으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이런 방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이 언약의 완성입장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쪽에서 갈라디아서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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