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지옥 체험

아빠와 함께 2023. 4. 30. 21:32

지옥 체험 

2023년 4월 30일                      본문: 예레미야 7: 29-34

(7:29) 예루살렘아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자산 위에서 호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버리셨음이니라
(7: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내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7: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7: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함을 인함이니라
(7:33)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7: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약속의 땅이란 약속이 계속 살아 유지되는 땅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속’을 빼고 자기가 여기 있고 땅이 여기에 있다면 ‘삶’이라는 것이 성사된다고 믿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땅은 파멸과 저주와 죽음 장소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즉 인간은 ‘죽기 위해’ 땅에서 태어났고 땅에 작용하는 저주의 위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흙으로 돌아가 땅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땅에 ‘약속’이라는 것을 남겼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여기에 ‘산 자’ 곧 ‘생명’이 죽음의 땅에서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 살아남은 약속과 관련있습니다. 약속+땅이 곧 ‘약속의 땅’입니다. 이 땅에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 및, 율법으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율법이 계속 살아있으면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고 넘치는 땅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이 ‘황폐해진다’고 합니다.

이는 율법이 주어졌기에 땅의 황폐함도 율법 구현의 한 방식인 겁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해 율법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율법의 참 취지는 이런 백성들의 요구에 호응해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너희들의 죄를 더욱 깊숙이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기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에서 뜻모를 희생제물이 지속적으로 제단에서 불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신에게 얻을 것을 얻어내는 하나의 형식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사사나 선지자를 통해서 추가적으로 율법의 취지를 늘어나갔습니다. 이는 형식을 피하고 진정으로 율법의 정신에 주목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그냥 ‘땅’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이 튼튼하게 보전되고 풍요하기를 고대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순진하게(?) 율법을 붙들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는 이스라엘보다 더 강하고 잘 사는 나라들이 포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이방민족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땅과 그 위해 거주해서 살고자하는 인간 무리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압박감을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그것으로 좋고 사랑이 넘치는 신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를 보면서 열등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변 신들을 마구마구 흉내내게 됩니다. 그 땅에서 그저 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약속의 말씀)을 살리는 겁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그들 세대를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 세대 교체를 알리시는 겁니다. 즉 이 새대 지나고 다른 세대, 곧 오는 세대가 있다는 겁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즉 율법(=약속)을 하나님께서 계속 주입시키시는 이유는, 오는 세대에서는 일체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묻지 않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 세대에서 인간상은 ‘자기 것’을 자신이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율법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나 재산이나 가족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소유권’을 주장한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의사를 접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소유권을 내세울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 곧 천국을 가름하는 기준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유권 문제를 들고 나오신 겁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 24-25)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것을 가지고서, 도리어 자기 것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히 보장받게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본심은 다음의 구절에 잘 나와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이 구절에서 ‘있다’는 필히 주인의 소유권이 되는 경로를 밟아야 확정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은 주인님의 소유입니다’라는 취지가 유지되는 조건하에 더 받게 되는 겁니다.

반면에 자기 소유권을 계속 고집하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도로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이란 철저하게 ‘나는 내 것’이다는 것을 저주하는 세대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바알이나 아세라 신을 섬긴 것은 율법이 없는 신들이기에 직접 인간의 정성과 열성과 행함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점이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에서 밝혀집니다. 이 대결은 목숨을 걸고 하는 대결입니다. 이는 게임판에서 마지막 카드을 제일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야 선지자는 12개의 돌로 쌓은 제단에 자신의 육신을 얹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즉 자신의 마지막 카드는 자기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도 여럿이 가면 괜찮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란 보편성 속에서 뽑아냅니다.

엘리야는 인간 생각의 한계 너머로 갑니다. 그것은 불이 붙어야 하는 제단에 도리어 불과 상극인 물을 12바케츠를 붓습니다. 더욱더 불붙은 가능성은 멀어진 겁니다. 이는 엘리야가 자신이 살 가능성도 같이 너머 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마지막 카드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 사건은 곧 모든 인간들의 행함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지옥, 곧 이 세대란 이처럼 인간들의 자기 행함으로 자기를 살리려는 시도를 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지옥이란 인간의 자기들 행함으로 신으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하는 곳, 곧 이 세상입니다.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사는 존재가 아님을 반복적으로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9강-예레미야 7장 29~34절(지옥체험)2304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29~34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예루살렘아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자산 위에서 호곡할찌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바 이 세대를 끊어버리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함을 인함이니라,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그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에 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잊었지만 오늘날 우리도 잊습니다. 땅은 땅이되 약속의 땅이 따로 설정됨으로써 약속받지 않는 땅과 차별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이 계속 유지되면 약속의 땅이고 약속이 꺼져버리면 약속의 땅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약속은 뭐냐. 하나님 번영의 소산물, 하나님 축복의 소산물이 약속이 있을 경우에는 제공됩니다.

그렇지 않고 꿀과 젖이 사라지는, 목축도 양도 안 되고, 포도도 생산되지 않는 약속이 없어지면 저주받는 땅이 되는데 그 땅이 황폐한 땅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약속이 계속 유지되는지, 약속이 유지되지 않는지를 뭔가 판정을 내리고 뭔가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겠죠. 어떤 경우에 약속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지, 또는 어떤 경우에 약속이 물 건너갔는지, 약속은 없고 이제는 황폐한 것만 남아있겠구나 하는 판정을 그 땅에 남아있는 이스라엘이 그때그때 마다 내려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주 친절하시게도 황폐한다는 그런 결과를 내놓습니다. 오늘 본문이 아주 어려운데, 34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황무한 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황무한 땅이 언제 황무하게 되느냐. 29절이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앞에 부분 생략하고 뒷부분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바”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어려워요. “이 세대를 끊어버리셨음이니라” 이 세대.

시간이라는 것은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말이 어려워요.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어떻게 살고자 할 때, 시간 의식이 같이 동반해서 발생합니다. 지나간 것을 과거라 하고, 지금 있는 것을 현재라 하고, 앞으로 이어질 것을 미래라고 이렇게 시간 의식을 갖는 거, 그것은 그 중앙에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죽은 자들은 시간과 무관합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시간에 신경 쓰지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뭐냐 하면, 마음의 고통입니다.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입니다. 아프기에 청춘이라는 말을 하는데 살아있기에 고통스러운 거예요. 이 말은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투자했는데 어떤 사기꾼에게 걸렸어요. 무슨 앱을 하나 잘못 만져서 거기에 투자하라고 하니까, 하라는 대로 하니까, 그 사기꾼이 투자한 사람에게 어떤 짐을 지웠느냐 하면 생전 손에 만져보지도 못한 돈인데, 자기 돈은 돈대로 다 떼이고, 일 년에 이자만 1억씩 꼬박꼬박 갚아야 하는 사기에 걸려든 거예요.

돈은 구경도 못했는데 이자만 1억씩 나갑니다. 평생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 이자 갚아야 하는데, 그 이자가 제2 금융권과 사기꾼이 거래해서 자기도 동업자로 휘말려서 이자를 그렇게 갚아줘야 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살면 살수록 열심히 일해서 제2 금융권에 이자를 1억씩 갚는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살아있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의미를 제공하면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겁니다. 황폐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거, 율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진지하고 실질적이고 생경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너희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적으로 보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횡재(橫財)한 것으로 여겼지요.

유월절에 들어올 때 바다 갈라지고, 유월절에 양 잡아서 우리 장자 살아나고, 적들이 왔을 때 뭐 변변찮은 무기 없어도 적들이 패배하고, 하늘에서 우박 떨어져서 이기고, 해까지 멈춰가면서 기어이 땅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 편을 들어주는지 알았어요. 하나님이 나의 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한 것은 가나안 땅에 토착민들 추방시키고 그다음 차례는 네 차례야.

하나님의 주신 약속과 인간이라는 그 존재와 얼마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너희들을 통해서 샘플로 혹독하게 다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바로 이 세대에서 끊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음 세대는? 오는 세대에서는 일체 네 행위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세대가 오는 거예요. 책임을 묻는 세대가 지나가야, 책임을 묻지 않는 세대가 오는 거예요. 책임을 묻던 시대에서 나는 도대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고 손을 놔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악바리처럼 내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은 이것은 오는 세대에 부합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오는 세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2장에 너무 잘 나와 있어요. 네가 나를 핍박하는 것은 용서가 되는데 성령을 무시하는 것은 오는 세대뿐만 아니고 영원히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되어있어요. 31~32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이 하는 일을 네가 부정하면 쉽게 말해서 ‘내가 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따로 하신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세대뿐만이 아니고 오는 세대에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받으라는 이 말은 너는 안된다는 뜻이에요. 안 되는데 자꾸 너 자신에게 기대 걸고 너 자신을 믿고 그러지 말라는 말이에요. 이스라엘 한 번 봐. 안 되잖아. 너도 안 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했던 인간들도 안되는 데 개같은 이방인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안 되는데 왜 자꾸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걸로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마귀가 자꾸 작동해서 인간이 다른 것은 다 놔도 본인 만큼은 놓지를 못해요. 그래서 옛날에 얼마 전에 죽은 전두환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잖아요. ‘본인은~~~’ 맨날 ‘본인은~’이라고 해요. ‘나는 이렇게 해서 정당했었어’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걸 놔버리라는 거죠. 그걸. ‘본인은 이렇게 해서 최선을 다한 거야’ 그걸 놔버리라고요. 최선을 다한 그걸.

아이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걸 놔버리라고요. 감기 걸려서 아이 둘 키운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걸 놔버리라고요. 드라마 잘 안 보는데 후딱 보니까 이런 대사가 나와요. 장나라가 나오는데 드라마인데 거기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요. ‘남편만 가져가. 가족은 건드리지 마’ 드라마 ‘패밀리’에서 나오는데 저는 거의 안 봐서 무슨 이야기인지 잘은 몰라요. 거기 대사가 ‘남편만 가져가. 가족은 건드리지 마’라고 하는 거죠. 소유권이잖아요. 인간이 자기 소유권을 발휘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소유권을 발휘할 권리가 없습니다. 내 것이라는 것이 없어요. 신약시대에서 오는 세대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봐야 해요.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 24절에 주님께서 오는 세대와 이 세대의 인간을 갈라낼 때 기준이 있어요. 너는 오는 세대 천국 백성이고 너는 멸망해야 할 이 세대 사람이라고 갈라내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마태복음 25장 3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라는 게 있는데요. 한 사람은 달란트 10개를 받고, 한 사람은 달란트 5개 받고, 한 사람은 달란트 1개 받았어요. 세 사람인데 분류는 두 종류로 됩니다. 그럴 때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충성했다고 칭찬을 받아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공장이 주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권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24~25절에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나는 주인님을 잘 압니다. 나 자신을 주인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주인님이 주신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지키려는 방식으로 주인 것을 지켰습니다”라고 나와요.

내 것은 없고 다 주인님 것이라고 표현하라고 달란트를 줬는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나에게 주인이 해코지하지 않도록 주인 주신 것 가지고 잘 관리해서 도로 돌려드리면 주인도 주인 것 챙기고 나도 내 것을 따로 챙기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거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라는 식이 된 거예요. 그럴 때 주인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시면서 바깥 어두운데 추방시켜 버렸어요.

마태복음 25장 29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나와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이거는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죠. 그다음에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무슨 말이냐 하면 달란트를 하나님이 주신 것은 소유권이 너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소유권이 살아있는 채로 그 사람에게 공유하듯이 제공된다는 겁니다. 천국이.

무릇 있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는 말은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고 도로 돌려줄 때, 주님의 것으로 있는 것에 네가 참여하는 식으로 같이 합세하는 식으로 가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거죠. 그런데 뒤에는 있는 것을 빼앗긴다고 나와요. ‘내 것이 있네. 내 것이 있네’라고 하는 것은 이 세대는 모르지만 오는 세대에서는 빼앗기는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빼앗겨버려요.

그렇다면 신약에서 천국과 지옥의 원칙을 보셨으니까 구약에서는 그 원칙이 어떤 식으로 미리 앞당겨서 구약에 나와 있는지를 봐야 하겠죠. 이건 뭐 볼 것도 없이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나오는데 엘리야 선지자의 결정판은 그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입니다.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대결구조가 오늘 예레미야 7장에서는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 되어있어요. 욕이 아닙니다. 힌 ‘놈’이라고 다 욕이 아니에요. 힌놈은 사람 이름인데 여부스 족속의 족장 이름이 힌놈이에요. 그 골짜기가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그 근교에 골짜기가 약간 붙어있어요. 거기에 사당을 지었는데 그게 도벳사당이에요. 그 도벳사당에서 뭘 했느냐 하면 사람을 불에 태워서 신에게 제사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상하죠. 약속을 받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십계명 초반부터 나오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뭐가 심심해서, 무슨 호기심이 많아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그 우상을 그렇게 섬기고 바쳤느냐. 오늘날 우리 제3자 입장에서는 의구심이 들고 그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될 행동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건 우리가 납득을 해야 해요.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으시는,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몰아넣으시는 분이 누구냐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면 복을 준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지키고 약속대로 믿고 율법을 지켰어요. 지키는데 세상에 추가적인 율법이 계속 주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죠. ‘더더더더~’라고 계속 주는 거예요. 수학 100점 맞으면 휴대폰 바꿔준다고 해서 열심히 했는데 ‘영어 점수가 왜 이 꼬라지야?’라고 나오니까 다음에는 영어도 100점 맞았는데 ‘그럼 과학은?’이라고 이렇게 계속 사전에 약속에는 없는 이야기가 나와요.

율법이 한도 끝도 없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아직도 너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냐. 너에게 끄집어낼 죄는 아직도 많아. 죄가 계속 나오면 나올수록 너의 대체 방법은 우리가 드리는 어린양, 또는 소의 제물, 제사에 나오는 제물과의 연관성을 더욱더 돈독하게 가져가야 하죠. 이스라엘 사람이 율법을 보면서 오해한 것은 내 소유와 내 생명을 지키는 율법이라고 애초부터 곡해한 거예요.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분이지, 내 생명이나 내 소유나 내 가정을 지키는 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율법도 여호수아가 있을 때, 또는 선지자가 나타날 때, 잠시 잠깐 사사들이 뭔가 기적을 베풀 때,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잠시 잠깐뿐이고, 그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MZ세대로 넘어가면 개성들이 있어서 ‘아버지 인생과 내 인생이 다릅니다’라고 그냥 자기 인생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들이 뭘 하느냐 하면 어린양의 희생과 자기 속에 담겨있는 자기도 밝혀내지 못한 죄와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자기 내부가 파헤쳐지는 거잖아요. 이게 자존감 상해서 못하고 뭐 하느냐 하면 ‘왜 이웃 나라는 잘사는데 우리는 못 사느냐?’라고 생각하면 보니까 이웃 나라는 그 나라 하나님의 방식이 우리 여호와 방식과 다르거든요. 이웃 나라에는 율법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어요.

그런데 율법 있는 쪽이 율법 없는 쪽보다 더 잘 살아요. 그만큼 소유권이 늘어나고 소유권인 늘어난 만큼 앞으로 더 잘 살 가능성도 같이 늘어나는 겁니다. 소위 희망이 보이는 거예요. 세상 사는 보람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하스 왕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죠. 가보니까 너무 잘 사는 거예요.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가니까 미국이 너무 잘 사는 거예요. 한국은 핵폭탄이 없는데 미국은 핵폭탄이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나라 사람들의 그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 땅을 차지하면서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잘 사는 식으로 했다면, 그 나라 신이 주는 법칙에 합당했기 때문에 잘 먹고 잘사는 거죠. 그러면 아하스 왕 같은 경우는 아예 신을 수입해버려요. 수입하는데 수입된 신의 방법이 뭐냐 하면 정성을 다하는 겁니다. 이게 엘리야가 직면했던 바알과 아세라 850 대 1, 누구는 고등학교 때 17대 1로 붙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건 850 대 1입니다.

850 대 1. 도대체 뭘 내놓았는가. 각자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거예요.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와 대화하면서 대화를 잘 들어보세요. 대화를 구사하는 언어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내가 마지막에 내놓을 카드를 숨기면서 그걸 감추는 용도로 말들을 언어들을 내놓아요. 저는 카드 칠 줄을 모르지만 카드 치는 장면들을 보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요. 어쩔 수 없이 뽑아야 할 마지막 카드가 있답니다.

007 영화에도 나오고, 타짜라는 영화에도 나오잖아요. 그 마지막 카드를 숨기기 위해서 앞에 카드를 뽑아서 내놓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돼. ‘7, 4, 3, ...’ 왜 자꾸 이런 것만 나오나 몰라. 이런 식으로 엄살떨면서 하지만 마지막에 뭘 숨기느냐 하면 에이스를 숨기는 거예요. 내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 방식에서 다른 것들을 내놓는 거죠. ‘내가 젊었을 때 수십억 날렸지’라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나라는 인간은 수십억을 극복할 만한, 그만한 자질이 있는 인간으로 아직 이 나이까지 살고 있다. 수십억과 비교 안 될 정도로 대단한 나의 자부심이 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마지막 카드, 그 마지막 카드를 주께서는 기어이 뽑아내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방법은 뭐냐. 이스라엘을 상대방 나라보다 못 살게 만들어요. 엘리야에서 마지막 카드는 이겁니다. 북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아합왕에게 하는 거예요.

‘너희들, 이 약속에 땅에서 살고 싶지? 좋다. 그렇다면 살고 싶은 생명, 그 생명을 걸고 마지막 카드 한번 해보자. 이기는 쪽이 죽이기로’라고 한 거예요. 이기는 쪽이 죽이기. 그렇게 보면 이건 불공평한 게임이에요. 왜? 엘리야는 죽어봐야 생명 하나이지만 저쪽은 850명 목숨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기에 참석한 이유가 있어요. 그건 바로 이런 겁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다 같이 가면 괜찮다’라는 원리입니다.

파란불에 건너야 하는데 빨간불이라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갈 때는 괜찮다는 원리예요. 왜냐 하면 진리는 다수의 보편성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사회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겠다는 뜻에 순응한 거예요. 사람이 인생 경험, 경험하잖아요. 연세 많을 것 같으면 참 숱한 경험 했겠습니다. 그만큼 지혜가 출중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체험, 다양한 인생체험, 그 많은 체험이란 이름 안에 숨겨놓은 것은 뭐냐 하면 내 생명이에요. 내 생명은 귀하다는 그것 하나, 내 자존감과 의는 귀하다는 그것 하나 지키기 위해서 숱한 체험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예요. 아예 엘리야는 말합니다. 탁 까놓고 우리 생명 대 생명 걸자. 내가 먼저 걸게. 생명 거는 것이 뭐냐. 내가 평생 살아온 중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걸어버린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제단에 고기 얹어 놓고 하늘에서 불 떨어지는 거. 이런 거 누구나 두세 번씩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니죠!~ 그런 게 아니죠. 전혀 해보지 않은 거예요. 마치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같이. 전혀 못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꺼낸 카드가 뭐냐.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한 거. 죽었는데 살아나는 거예요. 그 카드를 가지고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지옥과 천국을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신학을 공부해서 믿는다고요? 이런 사기꾼들. 신학 해서 그게 믿어집니까? 신학의 행함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학 하는 나를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역사죠. 엘리야가 얼마나 끝판까지 가느냐 하면 열두 개의 돌을 가지고 하는데 약속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하나님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러니까 ‘나는 나다’라는 뜻은 일체 인간들의 행함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사람의 행함이 끼어들지 않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나는 나’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구성되기 위해서 돌 열둘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 얹어 놓고 하죠. 그전에 850명이 열심히 저들 다수가 빨간불에서 건넜어요. 그런데 이게 되질 않아요. 안 되는 거예요.

엘리야는 거기서 놀라운 오기로 보이는 행위를 하는데 ‘여기에 물 열두 통을 부어라’라고 한 거예요. 물과 불이 상극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예요. 온도가 한 45도 올라가야 불꽃이 튀냐 마냐 할텐데 아예 물을 가져다가, 그것도 열두 통을 부어요. 4통씩 3번 붓습니다. 물을 얼마나 부었는지 물이 제단에는 물론이고 아래 골에 차고 넘쳐요. 푹 젖었어요.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갈 데까지 가보자.

인간의 약간에 기대조차도 남지 않는 그 너머에까지 가보자. 물과 불은 상극이죠. 거기에다 드디어 기도했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그 제단의 소는 소가 아니었어요. 엘리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처럼 이 땅에 산 제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나는 죽고 주님의 십자가만 피어나게 하옵소서”라는 이것이 사도의 가는 길이였습니다. 불이 일어나는데 물까지 다 태웠어요. 그 현장이 뭐냐.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지옥의 현장이었습니다. 43~45절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옥이 어떤 곳이냐 하면 48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7장에서 살육의 골짜기, 게헨나, 지옥입니다. 지옥은 인간이 만들었어요. 인간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그걸 인정해버립니다. 계속해서 자기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을 호출 하면서 신에게 뭔가를 계속 퍼붓는 그 자체가 지옥이고, 이 지옥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인간의 행함들이 가득 모여있는 곳.

복음 아는 사람은,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똑같은 발언을 여러분들이 이 교회 안에서, 이 세상을 향하여 외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받지 못해 남은 것은 인간의 행함밖에 없으니 천국 따내겠다고 열중하는 그 모습이 바로 지옥의 모습인 것을 이제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명한 유리막  (0) 2023.05.14
뼈들  (2) 2023.05.07
끝 모습  (1) 2023.04.23
하늘 여신  (1) 2023.04.16
실로라는 공간  (0) 2023.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