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으면서

간을 배밖으로 내세요

아빠와 함께 2023. 4. 22. 07:41

디모데후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이 짧은 이 두 개의 문장, 이 속에서 ‘생명의 약속’ 생명이라는 말이 여기서 튀어나왔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고, 인간의 살아 있을 동안만 생명이고, 목숨이 붙어 있을 때만 생명이고 그 뒤에는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모호하다, 라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상식인데 여기에 사도바울은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 속'에 있는 목숨은 생명이 아니고 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만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같은 말로 우리한테는 생명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을 언급하게 되는 이 사도바울은 지금 자기가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예수 안’에 있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스스로 자기를 펼쳐나가는데 그걸 약속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명 되시는 분이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나타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약속입니다. 언약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로마서 10장, 지난번에 했지요, 로마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듯이 구원을 얻는 것은 언어로,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되어 있어요. 온갖 기적을 맛보고, 하늘나라를 보고, 그게 구원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누군가 하늘의 내용인 약속이죠, 언약이죠, 언약을 듣고 그걸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영생을 얻는 방법이, 하늘나라에는 언어가 없지만 이 땅에서는 언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언어의 방식을 로마서 10장 8절에 보면 ‘믿음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체험한 것을 전부 다 잘라버리세요.

잘라내고 가려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냐 생명의 약속 그것만 주목해야되지 곁들이로 붙어 있는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횟집에 가서 쯔끼다시, 이런 것은 별로 좋지도 않은 것들인데 그런 것만 보다가 진짜 회가 나왔을 때는 회 맛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 저부터도 그래요, 회 맛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튀김이 맛있더라, 번데기 맛 좋더라, 주로 그런데 신경 쓰는데 이걸 제껴버리면 안에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은 이미 하나님 쪽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약속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주어진다. 교회 아닙니다! 교회 아니에요, 약속이에요! 기독교 아닙니다, 약속입니다! 말씀 백 독, 이백 독, 소용 없어요. 거기서 말씀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돼요. 뽑아낼 수 있어야 돼요. 언약을 뽑아내면 돼요.

모세 같은 경우에도 모세가 그냥 양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왔지요. 찾아왔을 때 그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으로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난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출 4:5) 약속을 통해서 나타났을 때 모세가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거부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갭이 있다는 것, 일종의 고랑이지요, 고랑, 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감당 못 한다고 한발 물러섰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한테 주는 일은 너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너 위주로. 아까 기도하실 때 기도를 잘하셨습니다만,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언약 위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언약 위주로 돌아가고 세상 위주로, 나 위주로 돌아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게.

왜 살아 있지요? 세상이 내 위주도 아닌데,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 내 중심으로 돌아가면 내가 뭐든지 하면 내 뜻대로 다 되어야지요. 이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은 분명히 내 중심이 아닌데 그러면 내가 왜 살아있어요? 내 중심이 아닌데 내가 왜 살아 있느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서 그 내막을 소개합니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생명은 안에 있어요. 누구 안에 있느냐? 예수님 안에 있어요. 그 바깥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 2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예요. ‘예수 안’에는 생명이에요. 목숨은 많지요. 목숨은 많지만 그것은 밧데리 다 떨어지면 끝나는 거고요. 생명이라 하는 것, 영생이라 하는 것은 ‘예수 안’에만 있어요.

‘예수 안’에만 있기 때문에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생명이 없는 겁니다. 간단해요. 교회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예수 안’까지 들어가야 돼요, ‘예수 안’까지. ‘예수 안’에 들어온다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위주로 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살아 있지?’ 그러니까 ‘살려주세요’가 아닙니다. ‘왜 살아 있지?’ 이렇게 되어야 돼요. 내가 왜 살아 있지?

이번 지진 났을 때 시리아의 가족 12명이 다 죽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자식들까지 다 죽었는데 다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알라신을 믿으니까 “신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했어요.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 알라신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도와요.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그러니 알라신이나 불교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빠져 있는 거예요.

오늘 1장 1절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도에게 바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뭔가 중간에 거치는데 뭐냐? “그리스도 예수 안” 이렇게 돼요. 아버지와 아들, 인간에서 어느 누구도 몰랐던 그 아버지와 아들, 그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한국전기연구원에서 최근에 개발한 게 있어요. 뭘 개발했느냐 하면, 머리카락의 1/20 크기의 작은 전기회로를 콘택트렌즈 안에 새기는 데 성공했어요. 그래서 실험을 하는데 콘택트렌즈에 내비게이션을 심는 겁니다. 안경 필요 없어요. 그냥 렌즈만 끼고 가게 되면 “앞으로 15km 남았습니다.” 혹은 “주유소가 몇 km 앞에 있습니다.” 이게 다 보이는 거예요.

이번에 네이처(Nature)지 표지에 그게 나왔어요. 콘택트렌즈에 3D(three-dimensional) 프린팅, 그러니까 전기회로를 3D 프린팅해서 그 안에 집어넣었어요. 렌즈 안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렌즈 안에. 앞으로는 콘택트렌즈 안에다 AI(인공지능)회로를 집어버려요. 인공지능 회로를 심어버리면 서로 만나는 사람끼리 안녕하세요, 할 때 그 사람의 과거 이력, 직업, 다 검색이 돼버리는 거예요.

맞선볼 때 필요하지요. 누구십니까, 물어볼 필요 없어요. “커피 한 잔 합시다.” 그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만큼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3D 프린팅 기술, 전기회로를 작은 렌즈에 심는 것, 이것은 2차원 표면에 3D, 3차원을 심는 거잖아요.

성경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2차원, 평면 역사로 만들었어요. 그들로 하여금 약속, 오늘날에는 생명의 약속인데 이 생명의 약속이 신약에는 3차원으로 되어 있지만 구약에서는 2차원이에요. 생명의 약속의 땅이라고 실제로 지도상에 나오는 가나안 땅, 그 땅을 주님께서 2차원, 그 평면에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이스라엘을 몰고 온 거예요.

그들로 하여금 실제 길을 걷게 하고, 땅을 밟게 했고, 그들로 하여금 꾸역꾸역 걸어서 약속의 땅으로 지도상으로 도달되게 했습니다. 그게 구약에서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약속이에요. 구약에는 평면, 2차원적으로 표현을 하고 신약에 오면 3차원적으로 표현을 해버려요.

3차원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을 일종의 ‘증강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빛이 들어오는 우물 내에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2차원 평면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이미지가 떠올라버리는 거예요. 그 ‘예수 안’에 본인이 들어있는 겁니다.

이 3차원적인 ‘증강현실’은 구약이 없으면, 구약의 설명 없이는 이게 설명이 안 돼요. 어떻게 2차원에서 3차원이 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려요. 지금도 이스라엘 정통 보수 유대교에서는 메시아 오기를 기다립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의 동쪽에 가면 불과 5백 미터도 안 돼요, 한 4백 미터, 제가 걸어보니 넉넉하게 잡아서 한 5백 미터 앞에 약간 높은 야산 같은 게 있어요. 감람산이에요.

예수님께서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도 거기에 있는데 그 감람산에 메시아가 두 다리 딛고 온다. 스가랴에 예언되어 있는대로 올 메시아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감람산과 가까운 곳에 황금 돔이라 해서 지금 이슬람 사원이 있지만 언제든지 그것을 빼앗을 역량이 있는 이스라엘이 같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거 우리 거야.’ 그 산을 가지고 모리아산이라고 하는 거예요.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산, 그리고 다윗의 아라우나 타작마당, 그 산이에요.

거기에 성전을 세운 겁니다. 헤롯이 성전을 세웠던 거예요. 그 감람산, 평면이에요. 2차원 평면에 메시아가 온다고 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메시아를 헬라어로 그리스도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예수’ 앞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있지요. 그게 메시아라는 뜻이에요. 메시아가 구약을 몽땅 그의 어깻죽지에 짊어지고, 구약의 모든 약속을 몽땅 자기가 다 짊어지시고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유대교와 이 복음의 차이가 뭐냐 하면, 유대교는 아직도 우리가 지킬 게 남아 있다는 게 유대교에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지금 기독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이야기합니다. 복음 안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복음을 알면서도 뭔가 어떤 행함을 추구하는 것, 복음에서는 그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구약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이 닦달 내던 법이거든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우상숭배 때문인데 우상숭배라 하는 것, 인간은 우상이 뭔지를 인간이 판정할 수가 없어요. 진짜 하나님의 메시아가 와야, 메시아가 행한 것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그때 우상숭배가 드러나요.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꼼지락거리면서 하겠다는 이 한국교회가 우상의 단체입니다. 이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딴 건 내가 자신이 없는데 이건 자신만만해요. 회 맛은 내가 구분 못 하지만, 광어회인지 뭔지 구분 못 하는데 이것은 구분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해서 뭘 할 게 있다고 가르치는 것, 선교, 헌금, 예배, 찬양, 성경공부, 그 어떤 방식이든 더 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우상 단체입니다. 노선이 달라요. 가는 노선이 다릅니다. 지옥 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우상인 줄도 모르고 진짜 천당 간다고 왜 그렇게 하느냐? 하나님이 지옥 보내려고 그렇게 하는데 뭐 말릴 수가 있어야지요. 복음 이야기해도 안 들어요. 못 알아듣습니다. 지옥 가겠다는데 뭐. 로마서 10장에서 그걸 ‘자기의(義)’라 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의’라 하는 것은 험하게 살았던 자기 인생의 모든 행함이 축적된 것을 ‘자기의’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룸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생산된 것이 ‘하나님의 의’거든요. 로마서 1장의 말씀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 17)

내가 ‘하나님의 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네가 왜 미진했어? 왜 제대로 못 했어?”의 탓함이 없어요. 복음 안에는. 그러니까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지요. 탓하지 않는다니까요! 그걸 로마서 8장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이야기했고요. 1,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복음 안에 있을 때, 콘택트렌즈 안에 있을 때 ‘다 이루었다’를 매일같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매일같이 ‘다 이루었다’를 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은 뭘 아느냐? 하나님이 나를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지 나를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그냥 쯔끼다시에요, 쯔끼다시. 곁들이에요. 회를 올리려고 접시에 까는 그 나무, 옛날 김밥 쌀 때도 쓰는 그런 것, 회 올리기 전에 밑에 깔린 것,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접시에 깔려 있는 그런 것, 회를 그 위에 올려서 많게 보이려고. 그래도 괜찮아요. 왜? 한 쟁반 안에 있으니까, 같은 쟁반 안에 있으니까. 그걸, 그 쟁반을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위주가 아니에요. 하나님과 아들 위주에요. 왜? 우리는 언약을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평적으로 표현해냈던 그것, 약속의 땅이라든지 또는 제사, 직접 그들의 손으로 제작한 언약궤, 그들이 제작했던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들, 그리고 성막 만들 때 또는 성전 지을 때 다듬었던 돌, 전부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원되었어요.

그것들은 물질이지요, 물질. 그러나 그 물질로 인하여 떠오르는 그 현상, ‘증강현실’은 물질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물질적인 인간이, 물체적인 인간이 물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율법 안에다 집어넣어서 그것을 구현하게 하셨습니다. 열심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제사 드리고 율법대로 산다고 세칙까지 여러 가지 준비했지만 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샘플로 보여줬지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평면적으로 그들이 살던 곳에서 그들이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과연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인류를 대표해서 테스트해봤는데 그 테스트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말씀이 있느냐? 이미 실패할 줄 아시고, 그럴 줄 아시고 율법에 따라서 어떤 한 인물을 율법안에 등장하도록 예언을 한 게 있어요.

그 예언된 자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못하는 것들을 미리 보내시고, 어떤 점에서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들춰내는 거예요. 그렇게 들춰냈을 때 그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어디에 가까우냐?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실의 바탕층, 제가 바탕층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그 바탕까지 그들은 눈 돌리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겁니다.

‘아, 이게 중간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행할 수준이 아니구나. 우리가 내 운명과 내 미래에 대해서, 확정된 내 장래에 대해서 내가 내게 손댈 게 아니’라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그들이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 운명은 다른 분 소관으로 넘어가 있지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내 운명은 약속에 달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 바탕층까지 내려가게 하는 거예요. 바탕층까지 내려가는데 신약에 보면 증강현실이에요. 예를 들겠습니다. 이미 증강현실이 다니엘 5장 5절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건 정말 기절 안 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에요. 사람의 손가락이에요. 손목도 아니고 팔도 아니에요. 팔도 없고 손모가지도 없는데 손가락만 나와서 그 손가락이 뭘 하는가 보니까 벽에 가서 글씨를 쓰는 거예요, 글씨를. 다니엘 5장 5절에요. 제가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말씀을 전한다고요. 언어방식을 사용한다고요, 언어방식을!

뭐 물 위를 걸으시고, 그런 것 아니에요. 언어방식이에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나중에 예수님 배신했습니다. 소용없어요. 오병이어 떡 먹었습니다. 제자들 다 떠났어요. 그리고 그러한 기적 같은 것은요, 이미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갖 기적 다 받았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여호와, 했는데 그 여호와 믿는 것이 우상인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본인 내부에 어떤 구조가 있는데 본인 내부의 구조를 몰랐던 거예요. 이번에 튀르키예, 튀르키예, 자기 맘대로 이름 지어서……, 터키죠, 옛날에는. 거기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 보세요. 지표면을 보세요.

지진이 뭐냐 하면, 생일 케이크에 초 꽂아놓은 거예요. 생일 케이크를 반으로 갈라서 이동시켜 버리면, 꽂혀있는 생일 초가 내진설계가 안 되어 있어요, 그 생일케이크에 꽂혀있는 초가 맥없이 넘어지지요. 인간이 지진을 몰랐다는 것은 지진의 내부 구조를 몰랐다는 거예요.

지각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학자들이 하지만 어느 시점에, 새벽 한 시에, 그리고 어느 동네에서 그게 갈라지는가는 누가 알아요? 몰라요. 인간은 지표면, 지각 면도 몰라요. 그런데 인간은 그것보다 더 모르는 게 있습니다. 자기 마음 내부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자기 내부, 이게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인간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개의 결과를 낳아요. 하나는 언약을 못 지키면 저주를 받고 하나는 언약을 지키면 영생을 얻어요. 그 자체가 언약으로 주어져서 언약 자체가 균열이 생겨버립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찢어지지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구원되었던 이스라엘……, 뭐 ‘이스라엘 나라 만들자’ 한 적 없어요.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나라 만들어 넣고, 하나님이 내부에 지진 일으켜서 나라를 둘로 남북으로 찢어지게 만들고, 마지막에 남아 있는 유대나라까지, 숫자로 12이에요, 열두 제자의 그룹과 12지파의 그룹 사이가 찢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부터 신약 초반까지 내용입니다. 그 역사에요.

그리고 신약 그 이후에 가면 육에 속한 요소와 성령에 속한 요소가 성도 내부에서 매일같이, 이게 지진이 일어나듯이 찢어지고 균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두 축으로 해서, 남극과 북극을 두 축으로 해서 멕시코 난류가 흐른다고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그처럼 컨베이어 벨트가 순환되는 것처럼 우리 내부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육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 이게 갈라디아서 5장의 이야기입니다.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은 서로 다투고 있는데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못하게 하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대로 못하게 하고 서로 싸우고 있다. “너 내부에 십자가 사건 터졌어. 이것들아!” 이런 이야기다, 그 말이지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없어요. 구원은 예수님이 구원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구원받은 그 2천 년 전의 살인사건 현장으로 성령은 데려갑니다.

다니엘 5장 5절에 나오는 그 ‘증강현실’ 손가락 나와서 글씨 쓰는 그 현실, 그것과 누가복음 13장 4절에 나오는 말씀 두 개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사실은 똑같은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의미 이미지’를 증강현실로 뽑아낼 줄 알아야 돼요. 13장 4,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다니엘 5장 5절에 나왔던, 손가락으로 글씨 썼던 것은 이 바벨론나라 망한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망한다.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누가복음 13장 4절, 지표층에서는 망대가 넘어져서 18명 죽었어요. 그걸 보고 사람들은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안 망하게 해서 감사합니다.”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남은 무너져서 죽고 너는 안 죽었다고, 네가 지금 살아 있다고 우기는데 네가 그걸 보고 회개치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 없다 그 말이야.”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거예요. 둘 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게 구조거든요, 구조. 지진을 대비 못 한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밑의 구조를 몰라서 그렇고, 사람이 회개치 못하는 것은 자기 내부의 구조를 몰라서 그래요. 지금부터 그 구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주무실 것 다 주무셨으니 이제 슬슬 일어나시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24절에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두 언약이라. 인간의 바탕에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 인간의 바탕, 일본의 동경 지하철이라고 보면 인간의 바탕은, 일본 전역 외곽에까지 지하철이 다 연결된 것처럼, 서울 지하철이 수원 지나 동탄까지 오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내부에 있는 이 구조, 깔려 있는 이 구조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아담이 있기 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조가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구조가.

그게 두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우리 좋으라고 우리 위주로, 우리 중심으로 일하지 않고 언약 위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언약구조를 알아야 복음을 알고 복음 안에만 영생이 있는 거예요. 언약구조를 모르면 그냥 겉도는 거예요, 겉도는 것.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이런다고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저 애 잘 키우고 열심히 사회생활 잘하면, 착하다는 소리 들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지요.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에 이르자.” 십자가는 통과하는 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들어가는 곳이고 그 안에 담기는 거예요. 담기는 것, 담기는 거예요. 십자가는 담아놓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거예요. 부활은 십자가라는 다이아몬드 구슬을 떠받치기 위해서 밑에 보조적인 시공간적인 환경을 부활이라 해요. 이게 원리입니다.

기계 만지는 기사들 시험치는 데 다 원리가 있어요. 그 원리는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의 중력원칙에 기초하거든요. 전기기사의 원리는 뭐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에서 나온 것이고, 화공학 기술은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4-1906)의 엔트로피, 열역학 제2 법칙, “항상 전체 계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난다.”라는 물리학적인 원리에 따라서 나중에 보일러 기사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 원리가 있는 거예요, 원리가.

이 세상에는 그 원리가 지금 바탕층이에요. 성령에 의해서 성도에게 안에 내부마음으로 이렇게 심어주는 거예요. 3D 프린팅처럼, ‘증강현실’처럼 그 원리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모든 원리입니다. 망대 무너졌다고 해서 그걸 아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이 글자 쓴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어떻게 아느냐? 1장 17,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되어 있어요.

성도라는 것은 껍질에 불과해요. 사탕 포장 종이에 불과해요. 안의 사탕이 뭐냐? 주께서 일하는 게 들어 있어요. 언약이 들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성령인데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다음에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콘택트렌즈입니다. 전기회로를 3D 프린팅한 그 회로가, 하나님의 언약구조를 우리 마음에 새긴 거예요. ‘증강현실’로 떠오르게 합니다.

‘증강현실’이라는 말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보되 세상에서 복음적 의미를 뽑아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증강현실’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망대 무너졌다. 지진으로 무너졌다. ‘아이고, 우리는 살았어.’ ‘아니야, 그건 아니야.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망한다는 뜻이야.’

말씀, 누가복음 13장 4절의 말씀이 툭 튀어나온다는 것은, 말씀이 이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자기를 지켜나가는 거예요. 그 언약의 구조에서 딱 두 개가 주어집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언약의 구조에서 두 개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의 뜻은 여기서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빠지는 이유를 제가 설명드릴게요. 갈라디아서 4장 22절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라고 했잖아요. 이것부터 따져봐야 돼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었어요.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또 하나는 이삭인데 이삭은 하나님의 뜻으로 낸 거예요. 이스마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자기 의사에 의해서, 자기 결정에 의해서 그냥 하갈이라는 종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어디에 흡수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한 짓을 내가 딱 가져와서 이것은 천국으로 통하는 그러한 언약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언약 속에 한 언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구원 안 받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두 언약, 천국의 요소와 지옥의 요소가 둘 다 나오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 들입니다. 아~, 저와 여러분을 여기에 집어넣어야 되는데요,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나 구원받았다.’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구조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없어져야 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그 하는 짓은 어디에, 어느 구조에 다 포함되느냐 하면, 그 두 구조, 두 언약구조의 에너지에 다 빨려들어서 그 안에 전부 다 흡수되어서 남아 있지를 않아요. 내가 하는 모든 짓은.

그 예가 마태복음 6장 3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세상에 어느 인간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너를 잊어버리는 쪽으로, 너를 도외시하는 쪽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이 말을 이 순신장군 버전으로 한다면 이렇게 합니다. “나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내가 아픈 것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가 아니라 “나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왜? 내가 죽는 것도 언약의 일환이기 때문에. 내가 아픈 것도 언약의 일환이에요. 하나님은 내 위주로 일하지 않고 언약 위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이스마엘은 자식이 아닌데’라고 후회를 하든 말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저주받은 자식을 낳게 만들고 그것을 두 언약 구조 안에다 집어넣어요. 아브라함이 하는 것은 지표면이거든요. 이걸 하나님께서는 바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구조 안에, 그걸 바탕으로 해서 이걸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께 있었던 약속으로 전철로 통하도록 만들어 버려요.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이것은 두 언약이 되어버려요. 언약이 되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뭐가 나왔느냐 하면, 저주받을 계집종, 하나님 앞에 복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저주받은 계집종에서 났는데 23절에서 그 표현이 뭐냐? ‘그것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육체가 있는 것은, 반드시 인간은 지옥 가기 위해서 육체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왜? 육체를 통해서 자식이 태어나니까요. 그 자식은 절대로 천국을 갈 수 없는 거예요. 다른 노선이 필요한 거예요. 기존의 육체로 해서 육으로 가는 것은 지옥으로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게 저주받은 언약에 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육체로 태어난 겁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정철(鄭澈, 1536-1593)의 시조에 나오잖아요. 그건 지옥 가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에요.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구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게 뭐냐? 육체로 태어난 자식들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그것은 예수님에게 어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로 하나님 아버지를 찾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내어쫒으라, 했으니까. ‘신이시여, 도우소서’ 알라신을 부르거나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불교도 마찬가지고 알라신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신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아버지와 관계있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우리 내부 구조를 통해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는 말이에요. 기도원에 가보세요. “아부지~, 아부지~!” 침 다 튀기면서 “쭈여~, 쭈여~, 아버지~! 믿~셥니다!” 하나님이 “뭐! 또 뭐 달라는데?” “애가 아프고, 우리 남편이 구조조정 당해서 잘리고요. 좀 도와주소서.”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잘못 불렀어요. 그것은 알라를 부른 거예요, 알라. 오, 알라신이여, 인샬라~! 알라신을 부른 거예요. 그것은 아버지 부른 것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2천 년 전 살인사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살인사건, 메시아가 죽는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가요. “봤지? 너희들이 죽였잖아, 예수님을! 이래놓고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어? 너희 아버지는 악마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같이 불러모아요. 그 가운데서 우상숭배가 무엇이며, 진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거예요. 근대법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 악하고 무도한 죄인이라도 의롭다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자’ 하는 것이 현대 법입니다, 근대법이에요.

사형제도 왜 없앱니까? ‘우리가 죽이려 하는 그 인간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성은 살려 줘야 되지 않겠느냐?’ 근대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 빼고 갑시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 빼고 우리 인간들끼리의 공동체 형성해서 그 공동체 유지할 수 있는 약속들로 법을 만들자.’ 그게 현대 법이에요. 변명의 여지를 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빼다 보니 하나님의 율법도 빼버렸어요. 빼버리니까 신명기 4장 24절도 빼버렸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극한으로 높이 드러내기 위해서 미움, 극한으로 미워해요. 참혹한 지경으로 몰아내요.

그 참혹한 지경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대충 저주하는 게 아니고 지독하게 저주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은 지옥 가도 구시렁구시렁 말이 많아요. 지옥에 가도, 지옥에 가도 자기 혈육 걱정, 동생들 걱정하고요.

누가복음 16장 23, 24절에 보면 지옥 간, 음부에 간 부자 나옵니다.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 맞은편에 있던 부자, 지옥 갔어요.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이 부자는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그 성깔머리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지옥 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위주로 세상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신이시여,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움직이소서.’ 이런 이야기 하니까 교회가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교회 다니면서 하는 일이 뭐냐? 내가 왜 선한 존재인지 그 증거 수집한다고 교회 다녀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집사 하면서 이런 일 했고, 장로 하면서 이런 일 했고, 목사 해서 이런 일 했고……, 자기 선한 일 수집해서 변명만 늘어놓는 것, 전부 다 자기 위주예요.

하나님은 나를 안 찾는다니까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찾아요. 나를 아예 찾지를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나는 어디 있느냐? 나는 없지요. 둘로 깨졌지요. 두 구조로 깨졌다니까요. 두 언약으로. 그러면 다시 갈라디아서 4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이것은 육체를 따라 났기 때문에 억압되어 있다는 거예요.

율법 따라 났다, 또는 육체를 따라 났다. 율법이 육체를 누른다는 겁니다. 층층이, 지진이 일어나서 첩첩, 단단한 철근과 벽돌이 얽힌 것이 아파트 무너지니까 층층이 눌려버렸잖아요. 이 율법이 우리를 누르고 또 누르고 계속 눌러요, 율법이. 손가락으로 막 긁어 파서 율법 지켰다고 하는데 그다음 다른 율법이 또 기다리고 있어요. 선교 헌금 냈는데 교육관 짓는 헌금 또 내야 된다니까요!

이건 미쳐요. 그다음에 목사 차 바꾸는데 또 돈 내야 돼요. 한국교회에 속았다, 해서 신천지 가서 거기서 더 속아버려요. 왜 그런 짓 하느냐는 말이지요. 이게 손가락으로 후비는 그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기 때문에, 육으로 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내가 하는 것으로 내가 기어이 탈출을 시도하겠다는 거예요.

층층이 그야말로 인간은 갇혀 있는 거예요. 율법에 갇혀 있는 거예요, 율법에. 구조대가 일곱 살 먹은 애 하나 건지니까 그 애가 나오면서 첫마디 말이 뭐냐? “살려주시면 평생토록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일곱 살 먹은 애가 구조되면서 그런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그동안 아버지 어머니에게 들은 게 뭐였겠어요? “너 공부 꼴찌 하면 남의 노예 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 아닙니까? 들었던 것이 그대로 있으니까 자기가 갇혀 있던 거기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 뭐냐?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여러분, 뉴스 보면서 그런 것 놓치면 안 돼요. 우리가 악마의 노예였던 거예요. “살려만 주신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허장강이 그런 말 했어요.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즉 “제 목숨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제 목숨 바치겠습니다.” 그것은 알라신이지요. 거래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구원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를 단독으로 구원하지 않고 생명 안으로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생명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생명은 어떻게 나오는가? 두 언약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면서 찢어지면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생명이 중간에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아예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매일매일 우리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야 내 것이 없고 전부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아는 겁니다. 제가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을 보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요. 아내가 남편보고 이야기하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해요.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어요. 부부 사이에 아내가 남편보고 평소에 이야기를 하면서 미소를 띄면서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지요.

‘아이고, 아직도 저런 부부가 있구나!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이것은 남편이 잘해줘서가 아니라 아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보고 일단 짜증을 내요. 일단 짜증스런 어투로 해서 아주 다부지게 말합니다. 불안이 체질화되었어요. 당신 만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마음속에 구조화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남편 탓이 아니고 본인 탓이에요. 본인 구조가 내진설계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늘 쪼개질까 불안불안한 거예요. 정말 주님의 생명이 그분한테는, ‘증강현실’이 마음속에, ‘하나님 아들이 다 이루었다’가 그 사람 속에, 빛의 우물 속에 떠 있는 이미지처럼 빛의 이미지로 떠 있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서 웃으면서 남편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발언을 하고 어떤 태도를 해도 저 괜찮아요.’ 그 안정감, 그 안정감이에요. 이게 또 잘못하면 율법 되니까 주의하세요. 남보고 또 강요하지 마세요.

이스마엘은 아버지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낳아주신 육체의 아버지는 있지만 그것은 구조적으로 돌아가면 가짜 아버지예요. 아버지 갇히고, 거기서 나온 나도 갇히고, 할아버지 갇혔고, 우리 조상 아담도 갇혔고, 죄에 갇혔고, 악마의 위력에 갇혔고, 율법에 갇혔고, 저주에 갇혀 있고, 아무도 빠져나온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연결된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요, 그분한테는 생명의 약속이 있는 거예요. 생명의 약속, 그걸 지금 “아들 같은 디모데야! 너희가 이것을 전해라.” 디모데 보고 교회 만들라, 소리 안 했어요. “복음을 전해라, 복음을! 내가 전한 것처럼 복음을 전해라. 생명의 약속을 전해라. 네가 성령 받았기 때문에 네 안에서 그게 된다.”

다시 갈라디아서 보게 되면 4장에, 이번에는 23, 24절에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자유 하는 것은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아버지가 없는데 아들이 와서 어디까지 오는가? 우리 내부까지 들어와요. 아들이, 우리 마음속까지 예수님이 들어와요. 예수님은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와서 다 이루었던 자기의 활동을 계속해서 활발하게 벌이면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5장에서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아버지 안다고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이 들어와야 됩니다. 아들이 들어오게 되면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이 인간 손에 죽었고 육체로 난 육의 인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살인사건을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계속 일으켜 버립니다.

일으켜 버리면 그 구조, 바로 선악과를 알았던 인간은 저주받고 생명 나무를 따먹을 수 없게 되었는데 친히 친절하게 생명 나무를 우리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간을 배밖에 내면 돼요. 그 간이 뭐냐? 선악과입니다. 내 안에, 내 안에 나 잘났다, 나는 내 의로 버틴다, 나는 나 잘난 맛에 산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변명하는 식으로, 그걸 수집하는 식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라는 것을 여러분 배 밖에 내세요.

그게 바로 나를, 우리를 지옥 가게 만들었던, 나를 전에 갇히게 만들었던 악마의 술책입니다. 그 간을 배밖에 내면서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그 신나는 일, 내 안에서 악마를 캐내는 그 즐거운 일, 그 가벼운 일을 왜 우리는 안 하려고 해요? 그 재미있는, 내속에 있는 나를 지옥으로 이끌기 위해서 온갖 나의 의를 부추겼던 그런 작당을 내 바깥에 끄집어내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 작동하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안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기서부터 벗어났다는 것, 예수님의 영이, 내 안의 영이 내 콘택트렌즈 안에 3D, 3차원 3D, 성령으로, 십자가로 프리팅, 박아 넣어서 ‘다 이루었다’가 되었기 때문에 바깥으로 그런 악마가 튀어나오는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 자기 일하는 현장으로 사용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나 잘났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까지 곧장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