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11-14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여기 ‘지키라’ 그리고 ‘전하라’ 하는 내용들은 다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고, 인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홀로 행하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오다시피 우리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39).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우리가 다시 내 것으로 되찾을 생각은 성경 앞에서는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관심 없고, 우리가 되찾는 것에도 관심 없고,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것을 어떻게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의 주님의 자신의 것을 어떻게 다시 되찾아 오느냐, 채워지느냐, 라는 것에 관심 두는 겁니다.
내 것 안 잃어버리기, 이런 것은 성경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신의 것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채우고 그것을 회수시키느냐, 그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거나 인간의 잃어버린 것을 충족시키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과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마귀가 하나님의 것을 앗아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것을 훼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 주님께서는 자기의 것을 되찾는 작업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작업이 오늘 내용을 통해서 나오는데 첫째는 복음이고, 두 번째는 고난이고, 세 번째는 성령입니다. 복음도 주님이 만든 것이고요, 이 고난이라는 것도 1차 적인 주님의 고난이 있었고, 그 코스를 성도가 닮아가도록 되어 있고, 세 번째는 성령인데 성령이라 하는 것은 ‘나는 너희들의 실력과 너희들의 지혜나 너희들의 총기나 노력을 나는 일체 받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인간들아,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는 아느냐?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하겠다는 말인가?’ 아버지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다 해주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일을 하심으로써 인간들에서 나오는 모든 발상들……, 그 발상들은 우리가 맨날 선택하는 거지요. 쉬운 예로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이런 선택이지요.
성령께서는 분명히 언급하는 것은 이거예요. ‘네가 짬뽕을 먹으나 짜장면을 먹으나 거기에 대해서 일체 너한테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에게는, 어떠한 진지함도 어떠한 심각함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심지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이 하는 일 앞에서는, 하나님을 유일하게 아는 성령입장에서는 인간에게는 심각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문제점은 문제 거리도 아닌 것을 문제 거리로 삼는 것이 인간세계의 문제에요. 또 우리 자신의 문제지요. 그래서 우리가 문제 거리도 아닌 것을 예를 두 개 들면, 내가 죽는 것과 내가 아픈 것, 이런 것은 전혀 문제 거리도 안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에 죽을 때 그냥 죽지 않고, 곱게 죽지 않고 아파서 죽는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건데 새삼스럽게 인간들이 “주여, 저 아픕니다.” “너 원래 아프게 되어 있어.” “죽겠습니다.” “너 원래 죽도록 태어난 거야.” 인간이 문제 삼는 것은 전혀 이것은 시답지 않은 것들이에요.
또 인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런 것을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하지요. 주님의 뜻은 간단합니다. “네가 굳이 원하는 게 있어야 돼? 네가 굳이 피조물 주제에 주는 대로 먹어야지 네가 원한다? 네가 뭔데 원해? 네가 뭔데? 그동안 내가 주는 은혜로 살아왔는데 네가 주제 파악도 안 되고 네가 뭘 나에게 원하는데?”
아직도 네 주제 파악이 안됐다는 뜻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심지어 저에게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복음 들어보니 인생이 참 허무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허무하다는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에요. 네가 뭔데 허무를 논해요? ‘참, 인생무상이다.’ 돌멩이가 무상한 게 있습니까? 인간은 죽으면 사물체가 돼요. 딱딱한 물체가 되는데 물체가 무슨 인생무상을 논합니까? 물건인데, 딱딱한 물건인 주제에요.
인간은 허무를 논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주체가 무슨 허무를 이야기하고 “이걸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몸이 아픕니다.” “아프라고 만들었어, 아프라고!” 아파서 죽으라고 만든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것 잃어버리는 데에 관심 1도 없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보통 전기라는 게 뭐냐하면, 전자거든요. 마이너스(-)전하를 띤 전자가 움직이는 것을 전기라 합니다, 전류. 이 전기라는 것이 마이너스(-)가 플러스(+) 쪽으로 가거든요. 그런데 이걸 몰랐던 옛날 시대 사람들은 전기가 플러스(+)극에서 마이너스(-)극으로 간다. 전기가 그렇게 흐른다고 하는 그게 관행이 되어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시간이란 뭐냐 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주워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 현재-미래’로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고 미래가 과거를 마중 나오는 것이 그게 시간입니다. “들어 와 들어 와! 어서 와, 어서 와!” 이게 시간이거든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늙어가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인간을 자기 앞으로 당기는 것이 시간입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 자기중심으로 하니까 모든 것이 실제와 정 반대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작이 복음으로부터 시작돼요. 자, 복음이 뭐냐? 예수님만이 홀로 행한 것을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홀로 행한 것. 어떤 인간의 보탬이나 도움도 없어요. 예수님이 홀로 다 한 것을 복음이라고 이야기해요. 새언약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한 그 복음입니다.
복음에서 시작했는데 그 복음에서 시작한 것이, 아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쪽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12장을 설명하겠습니다. 12장 7, 8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8절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는 악마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악마가 와서 터 잡고, 이 땅에서 악마가 인간을 사로잡고 터 잡고 자기 하수인 만들어서 있다면 그 악마가 터 잡은 이 세상 어떤 인간도 하늘나라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자리가 없는데. 무슨 천국을 가요? 천국에 자리가 없어요. 그러니 2천 년 교회가 주장했던 게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요. 천국에 인간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악마와 결탁이 안 됐으면 있을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이미 악마와 결탁이 되었고, 악마 자체가 하늘나라에 있을 곳이 없어서 왔어요. 하늘나라에는 악마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또 확정된 사실은 그 악마에 예속된 인간도 천국에 있을 자리 없습니다. 가기는 뭘 갑니까?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이렇게 봐야 돼요. 왜 인간은 천국에 가서는 안 되는가? 여러분이 교회 올 때도 그 생각 해야 돼요. 왜 나는 천국에 가서는 안 되는가? 이게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데 같은 성경인데 2천 년 걸렸어요. 올해가 몇 년도에요? 2천 23년, 이게 안 보이는 거예요.
왜 그럴까? 마귀가 시켜서 종교라는 것, 기독교라는 것, 교회를 만들어 놨거든요. 그 교회에서 인간은 ‘죽어서 좋은데 가야지.’ 꿈과 희망을, 죽어서 천당 간다는 희망을 두니까 교회가 장사를 하려면 그런 구라를 떨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야되지요. 우리 자리 없는데요?
이 땅에서 인간들이 악마와 함께, 악마에 결속되고 예속되어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모든 시작을 나로부터 시작해요. 나는 누구다, 나는 뭐다, 나는 죽어서 천국 간다. 누가? 내가. 항상 앞에 ‘나’가 붙어요. ‘나’가 붙는 이유는, 내가 태어날 때 나 말고 나를 길러준 타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타인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그 타인 속에서, 자라난 거기서 개화된 나예요. 만들어진 나.
타인이 있어서 나라는 것은 항상 언제 느끼냐 하면, 보는 눈이 있을 때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신체 자체가요, 타인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그런 태세로 체제화되어 있는 게 우리의 신체입니다. 우리 자율신경계부터 해서 모든 게. 특히 아미그달라(Amygdala) 하는 편도체라는 것이 뭘 하느냐?
※ 편도체(扁桃體, Amygdala)는 대뇌의 변연계(limbic system)에 존재하는 아몬드 모양의 뇌부위이다. 감정을 조절하고, 공포 및 불안에 대한 학습 및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편도체가 예민하다. 편도체를 제거하면 낯가림을 느끼지 못한다.사람들이 많이 가지는 오해로, 실제로 공포 감정을 느끼게 하는 뇌 부위는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암묵적 방어 생존 회로에 가까운 것으로, 공포를 느끼는 감정과 별개로 몸의 반응을 만드는 역할이다.[1] 공포의 감정(의식적 공포)이 만들어지는 곳은 전전두엽 피질.
인간의 가장 본성 중의 본성이 나오는데 그것은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겁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에 의해서 자기방어체제가 점점 더 옛날부터 진화되었다고 우기는 것이 진화론이에요. 인간의 모든 신체는, 옛날 오래 전에는이런 몸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 몸 된 것은 외부에 대한 방어체제를 자율적으로 갖추기 위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걸 ‘육신’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 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모든 인간, 혈육에서 나온 생산물이 ‘자녀’라는 거지요. 우리를 포함한 모든 자녀는 혈육에서 나오는데 이 혈육을 누가 잡았는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며” 혈육은 누구 손에 놓여 있느냐? 사망의 세력,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라고 되어 있어요. 악마가 우리 혈육을 잡고서, 또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은 뭐냐? 예수님이 자기의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오는 작업, 곧 예수님 이야기가 복음이에요. 내가 알아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천국을 내가 찾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는 짓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어야 돼요. 우리를 잊으려면 모든 인간관계, 타인 관계를 잊으면 되는 거예요. 새로운 타인이 들어오면 모든 관계, 기존의 타인 관계가 다 청산돼요.
새로운 관계, 새로운 타인이 뭐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타인이에요. 마귀에 속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들이 오시면 ‘누구세요?’ 누구세요, 새로운 타인이에요. 그 타인이 ‘너’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몰랐던 새로운 그분이 불러주는 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그분이 불러준 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불러준 나는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받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처럼 살면서 고생하는 것은 고난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자기 두려움에서 편도체, 두려움에서 오는 거예요. 무서움에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복음을 주시는 것은, 잊으라는 거예요. 뭘? 모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어떻게 잊을까 어찌 하면 좋을까
세월 가도 아직 난 너를 못 잊어하네
나훈아의 <영영>이라는 노래 가사지요. 잊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잊는 방법이 뭐냐? 복음이 들어오면 잊게 되고, 그 잊은 것 때문에 기존의 타인들이 우리를 정신적으로 윽박지르고 그게 뭐냐? 고난이지요. 예수님 통과했던, 그러면서 겪었던 고난입니다.
자, 말씀이 들어와서 잊으라, 하는데 그 말씀 중에 여러 말씀이 있지만 로마서 7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에서 말씀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영(靈)은,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예수님의 영으로서 했던 성경 말씀 로마서 7장 1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여기 새로운 ‘나’가 나와요.
나는, 예수님이 보는 나는, 예수님이라는 타인 낯선 타인,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이게 정답이거든요. 내가 몰랐던 나, 진짜 죽어도 여한이 없는 명백한 나는 뭐냐?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끝난 문제에요. 나는 육신에 속했어요. 육신에 속해서 죄에 팔렸다.
세상 어느 종교 책에, 어느 철학책에 나에 대해서 이렇게 확실하고 요지부동으로 일러주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너 누구지?” “나? 육신” “육신이 뭔데?” “죄에 팔린 몸” 뭘 더 이야기해요? 나, 증명사진 찍는다고 나 아는 게 아니에요. “나 누구야?” “육신” “육신이 뭔데?” “죄에 팔린 몸” “무슨 뜻인데?” “뭘 해도, 짬뽕 먹어도 죄고, 짜장 먹어도 죄고, 어떤 선택을 해도 죄”라는 거예요,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게 내가 아는 타인, 그동안 악마의 세계에서……, 참, 천국에 갈 자리도 없는 악마에 예속된 인간으로서 타인들이 일러준 그 ‘나’가 아니에요. 그 나, 나의 모든 관계를 잊으세요. 잊으면 무엇도 날아가느냐 하면, 윤리와 도덕도 같이 다 날아가 버려요, 윤리와 도덕도.
죄에 팔렸는데 무슨 윤리와 도덕이 거기에 작동합니까? 죄에 팔렸다는데, 나를 죄에게 팔아먹었다는데, 내가 죄의 노예라는데 무슨 윤리 도덕이 거기서 왜 나옵니까? 무슨 선한 것이 나옵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고난받았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고난을 준 것은 사도바울 당시의 진리체제, 그 당시의 인간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법적체제나 진리, 과학, 철학, 이런 것과 너무나 차이 나기 때문에……, 사도는 성령이 임했거든요.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세 번째, 복음으로 시작해서 고난, 그리고 세 번째가 성령이잖아요. 성령이 임한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곡해와 오해와 핍박을 받는지, 그게 바로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사도바울 입장입니다,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복음을 가지고 사도에게 찾아왔던 그 입장인 반면에 오늘날 이 시대, 21세기 이 시대는 로마서 7장 14절로 이미 규정이 되었어요. 우리는 뭘 하든지 죄에 팔렸고, 그걸 끝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이 시대의 철학과 과학은 뭐라고 우리를 핍박하고 고난을 주고 비난하느냐? 인간들의 그 두려움, 그 두려움은 아까 본 히브리서 2장 보셨지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죽기를 무서워하도록 고리를 딱 잡고 있는 게 누구냐 하면, 마귀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마귀도 인정 안 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가 느끼니까 이것은 부정하지 못하지요. 죽기를 무서워하면 계속 살아남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계속 살아남는 방법이 뭐냐? 그 방법중 하나로 생물학과 관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과학 이야기니까 좀 지루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뉴클레오티드(Nucleotide)라는 것이 있어요. 이게 DNA와 RNA의 구성요소입니다. 세포는 그 안에 핵이 있는데 그 안에 DNA가 있습니다. 크기의 비율로 볼 때 뉴클레오티드라는 핵산이 주먹만 하다고 친다면 그 세포의 제일 표면의 막은 거기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수백 킬로 떨어진 그 표면의 막에 있는 세포 외부에서 오는 여러 가지 신호가 어떻게 수백 킬로 떨어진, 크기의 비율로 한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수백 킬로나 떨어진 이 DNA까지, 핵에까지 전달되느냐?
표면 막에 칼슘이라는 이온이 있습니다. 칼슘이온, 지각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거예요. 그 세포막 아래 좁은 공간에 칼슘이온이 모이게 돼요. 그 칼슘이온에 이동하는 단백질, 튜블린(tubulin)이라는 단백질에 의해서 가는데 뒤에 모터가 있어서 수백 킬로를 단 5초 만에 도착이 돼요. 표면 막에서 표면의 수용체가 받은 신호가 세포막까지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걸로 인하여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 생식계열의 막까지 들어가게 되면 나중에 생긴 면역체계가 생식계열에 들어가서 새로운 다음 세대까지 면역체제가 유지가 된다, 또는 유지가 안 된다는 논쟁이 있어요.
빠르게 정보를 움직이는 것을 ‘엑소좀(Exosome)’이라 하는데, 이것은 ‘세포외소포체(Extracellular Vesicles, EV)’라는 것인데요, 특히 줄기세포 엑소좀이 요새 뜹니다. 화장품이나 의약품으로 떠요. 이것이 줄기세포, 생생히 살아 있는 세포, 노후화되지 않은 처음 만든 성분과 정보가 그대로 빠른 속도로, 모터 달려서 빠르게 전달하기 때문에 치료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줄기세포 엑소좀이라는 게 0.1 퍼센트밖에 안 되니 어떻게 그것을 분리시켜서 대량생산하느냐, 그것이 관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연구를 왜 합니까? 그 연구를 왜 하는 거예요? 죽기가 무서워서 살고자 하는 거예요. 그 연구를 하는 연구소에 사도바울이 등장했다고 칩시다. 등장해서 하는 말이 ‘네가 하는 것이 몽땅 죄’라고 규정한다면 그들은 사도바울을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핍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네가 인간의 노력을 알아? 무수한 천재들이 등장해서 연구한 그 업적을 네가 뭔데 한방에 짓누르느냐? 인류의 발달을 보라.”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그것 가지고 영생을 얻느냐?” 그 말이에요. 그것 가지고, ‘엑소좀’이라는 세포의 소포체 가지고, 줄기세포에서 뽑아낸 그것 가지고 생식세포 계열에 집어넣어서 후세대까지 자동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된 새로운 면역체계가 자동적으로 후대까지 전해지면 그것 가지고 인간이 영생을 얻느냐, 그 말이지요.
창세기 5장에 보면, 태어나서 죽고 또 애 낳으면 태어나서 죽고, 계속해서 죽는 이것이 변동이 없거든요.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이 뭐라도 해야 되지 않느냐? 인간이 살아야 되지 않느냐? 우리는 뭔가 해야 된다. 그게 인간의 마음이다.” 사도바울은 말할 거예요. “마음이 뭔데요?”
현대과학에서 마음이라 하는 것은, ‘마이너스(–) 70 μV(마이크로 볼트) ~ 플러스(+) 30 μV’의 전기의존적 ‘이온채널’ 단백질입니다. 그게 마음이에요. 전기신호에요. 전기, 전기 에너지가 마음이에요. 인간의 두뇌, 시냅스 안의 축삭돌기 안에서 신호가 전달되는 그게 인간의 마음인 거예요. 현대 뇌과학에서는.
그러니까 인간이 근본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사는 쪽으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가야 된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꾸 천국에만 욕심내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죽어서 천국 가야 된다.’ 네가 누군데 천국을 가, 누군데? 천국이 없는데요.
무엇이 되어야 되는가? 성경에 나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데요, 성경을 인간이 무시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한테 관심 있으니까 말씀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성경 마태복음 11장 25-30절에 보게 되면, 성경 내용은 인간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는가, 가 나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어린아이와 무엇과 대비를 시키느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어른들이지요, 어른들은 자기의 지혜와 슬기를 뽑아내서 그걸로 뭘 하느냐? 자립하려고 해요. 자존적이고 자립하는 것,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 그게 어른의 어른다움이라고 보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 줄기세포, ‘엑소좀’이라는 ‘세포외소포체’에 대한 연구, 오늘날 생명체의 활발한 이슈가 된 그것, 왜 그렇게 이슈가 되고 연구를 하느냐? 자립하려고, 자립. 자립한다는 말은, 나는 안 달라지고 싶다는 거예요. “당신 안에 두려움이 있잖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 “있어도 그냥 안고 갈게. 인간은 어차피 허무하니까.”
인간은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은 허무를 논할 자격이 못 됩니다. 돌멩이, 딱딱한 돌멩이가 되는데, 경색된 돌멩이가 되는데 무슨 허무를 논합니까? 자립적인 어른이 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독한 자기에 대한 미련이에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이 왜 생기는가? 아까 설교한 것을 다시 한번 도입하면, 인간이, 내가 나를 집착하는 것은 그를 주목하고 있는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타인들, 나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 보기에 그들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타인들이 늙어 죽어도 그 타인들의 이미지는 내 안에 살아 있어요. 내 안에 살아 있어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저 하늘나라 가신 내 아버지는 내가 여기서 어떻게 성공하는가 지켜보실 것이다.’ 뭘 지켜봐? 뭘 지켜봐요?
제가 지난번에 했잖아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자기 연출이라고요. 국가요? 그것은 ‘자아집단’이지요. 긴 역사를 진화론이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다 배운 것이 모든 것이 뭐냐? 전부 다 이게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말씀 속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 한, 예상도 못 한, 기존에 내가 알던 타인이 아니고 다른 타인이 등장해 버리는 거예요, 다른 타인이.
그 사람들, 나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들의 호응에 부응하려고 하니까 자기는 사는 게 그렇게 피곤한 겁니다. 애들이 있다가 아빠보고 “아빠! 이거 문고리 고쳐줘.” 아빠가 “못 고치는데?” “에이, 아빠가 그것도 못 고쳐?” 그 말 한마디가 아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요. ‘왜 아빠는 나의 타인이면서 왜 나를 즐겁게 해달라는 그 호소에 왜 부응을 못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애가 나이 한 40되고 50되면 ‘우리 아버지는 문고리도 못 고치는 아버지’ 그렇게 각인 돼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보고 “자기를 부인하라” 했어요. 단, 조건은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왜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라 하는가?
십자가는 우리가 배척하고 싶은 타인이거든요. 우리가 타인을 골라요. 내가 성장하면서 나의 가치를 높이는데 도와주는, 나의 가치를 드높여주는 타인들만 골라서 내 편 삼았는데 예수님은 그걸 공격해 들어오니까 “타인은 저리 가세요” 하고 예수님을 밀어낸 거예요.
예수님 밀어내고 그 자리에 사랑의 하나님을 타인으로 세운 거예요. 누가? 본인이 하나님을 선택한 거라고요. 그건 완전 마귀지요. 마귀가 고른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이지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했다 하는데 내가 실험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방금 배달된 치킨, 거기에 콜라까지 곁들인, 그리고 맛있는 치킨 무, 식초에 절인 것, 그 치킨 앞에서 자기 부인이 어렵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 어렵습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 부인한다고 하면서도 치킨 앞에서는 도저히 참지를 못하는 겁니다. “두 개만 먹어라.” 하는데 도저히 두 개만으로 참을 수가 없어요. 먹고 난 다음에 “하나 더!” 구두를 좋아하는 여자가 빨간 구두 앞에서 자기 부인이 어렵지만 교회 나와서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했대요.
그러면 빨간 구두도 부인해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 앞에서. 그것은 부인 못 해요. 전부다 구라입니다. 자기 부인은 구라에요. 거짓말입니다. 이게 고난이에요. 분명히 이론상으로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마태복음 18장 3절에 보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은 뭐냐? 어른들만 세워놓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어른들이 이미 되어버린 상태인데 도로 어린아이 되라는 이게 말이 됩니까? 이 말은 뭐냐? 현재 네가 아는 자아로서는 천국에 갈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분명한 주님의 뜻입니다. 선언이에요.
그리고 로마서 7장 14절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너’라 하는 것은 육신에 속했는데 육신이라는 것은 이미 죄에 팔려버렸다, 그 말이지요. “그게 너 자신이다. 너는 너만 보이지? 너를 노예로 부리는 마귀는 안 보이지?” 그저 가끔가다 죽는 게 무서울 뿐이지요.
인간은 자기의 주관성을 못 버립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없어요. 어린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나중에 크면 다 어른 되니까. 그냥 어른 됩니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가 자기의 목표가 되어가지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 한 수 배우려고 그렇게 애쓰는 어른들, 어른 다운 어른들, 그게 인생의 목표가 된 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없는데,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11장 26절에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아이라는 것은 뭐냐?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뭐가 되느냐? 없었던 어린아이가 여기서 나타나는 거예요. 계시, 하나님의 계시, 계시 안에 예수님은 새로운 타인이에요. 새로운 타인으로 등장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체의 자기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짬뽕 먹을 것이냐, 짜장면 먹을 것이냐’를 일체 책임지지 않습니다. 치킨을 두 조각 먹으나 세 조각 먹으나 일체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유가 뭐냐? 하나도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결정이.
어린아이의 특징이 심각하게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심각하게 되는 것은 법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거예요. 누가, 출세 안 했다고 누가, 누가 책임을 묻는데요? 누가? 마귀가 책임을 묻지요. “네가 출세 못 하면 안 된다. 출세해야 된다.” “출세하면요?” “오래 산다.” “오래 살면요?” “약간 죽는 것 보류해 줄게.” 결국 마귀가 이거잖아요. “안 아프고 죽게 해줄 게.” 이런 거요.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보류. 인생사 뭐 있어요? 그것뿐인데요.
그래서 계시받은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합니다. 28, 29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하나님의 자식이니까요, 하나님의 아이니까요. 29, 30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 수백 번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죽어서 천당 가려고 이 본문을 보기 때문에 해석도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어디에 가는 게 아니고 달라지기만 하면 됩니다. 복음이 알아서 다 해줘요. 물론 달라지게 되면 고난받는 것은 있습니다. 왜? 주위에서 납득이 안 되니까. ‘도대체 저게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구나.’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지요. ‘사람이 진지한 게 없어.’
왜? 여러분, 진지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우리가 합격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주님의 계시, 복음이지요, 복음이 옴으로서……, 처소는 없어요. 없는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야 기다려라. 내가 하늘에서 그 없는 처소 내가 만들면 내가 그 처소에 데려가기 위해서 다시 올게.”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합격된 거예요.
이것은 뭐냐?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은 거예요. 자기 양이 여기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았다고 되어 있잖아요. 성경 좀 보세요. 이 계시가 요구한다고 오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주님이 선택해서 자기에게 있던 자기 계획을, 주님의 계획을 집어넣은 거예요.
주님의 자기 계획이 뭐냐? 내 것을 찾는 거예요. 내 것, 예수님의 것 찾는 거예요. 우리 것 찾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잊어야 되지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갖고 있던 것 다 잊어.” 과거를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지난 여름밤에 뭘 했는지 다 잊어버렸어요. 그거 다 인간관계였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잊어버렸다는 말은 윤리 도덕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타인들에 대한 부응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타인들, 나에 대한 타인의 기대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진짜 찬송가 부르고 싶다, 정말!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어떻게 잊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계시 받으면 되지 뭐! “어찌하면 좋을까~” 복음 받으면 되잖아요. 다 이루었다는 복음을! 어린아이같이 되면 되잖아요.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어린아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이 땅에서는 합격자, 불합격자, 둘밖에 없어요. 1등 밖에 없어요. 2등은 지옥입니다. 진짜 복음 안에서는요, 1등만 아는 더러운 세상이에요.
27절 다시 보게 되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외’라는 말은, 모든 인간은 다 글러 먹었고, 모든 인간은 악마의 봉쇄조치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보내신 거거든요. 그게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음이에요.
사도바울은 “복음의 가르침대로 디모데야, 가르쳐라.” 그 말이지요. 그 복음의 시작이라 할 때 “복음 안에 있는 고난을 나도 받았지만 너도 받을 것이다.”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굴하지 말고 네가 전하는데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게 뭐냐? 성령으로 행하라는 거예요. ‘복음→고난→성령’ 이게 예수님의 코스였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나오는 코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이게 고난이잖아요. 죄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에 있듯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죄 있는 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지요. 죄 있는 육신으로 보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육신을 입었어도 육신이 뭔지를 모르고 있고요, 그걸 악마가 봉쇄했으니까요. 악마의 세상이거든요. 하늘에 있을 자리가 없어서 쫓겨났으니까 이 땅을 자기 세계로 만든 겁니다.
이거 거짓말 아니에요. 성경에 나오는 이것이 거짓말 아니라는 증거가 뭐냐?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걸로 확실합니다. 어느 인간이 죽었다가 부활합니까? 소생한 사람은 더러 있지만 그건 기절한 거지요. 잠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십자가 죽음이 장난이 아니다.” 부활을 통해서 증명해 주신 겁니다. 우리가 지금 헛된 종교 교리를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 자신이 누구냐를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나 자신이 누구냐를! 교회 와서 바르게 살려는 이 헛짓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육신을 입은 주제에 뭘 바르게 살아요? 육신은 죄 덩어리인데요. 바르게 살려니까 스트레스 받고, 바르게 산다는 그 기준, 타인의 기준, 윤리 도덕 기준에 맞춰서 산다는데 그게 얼마나, 지금 암 발병 원인인데 얼마나 그게 스트레스받을 일입니까, 그게!
주님이 이미 1등 했습니다. 1등 했다는 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맏아들, 맏아들이에요. 이미 그분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맏아들 되었어요. 그분 코스 외에는 다른 코스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게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잃어버리지 않은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공간에 집어넣고, 그 잃어버린 공간을 부활을 통해서 다시 되살린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교회가 뭐 더 필요합니까? 인간의 이야기가 왜 들어가요? 주님, 예수님 이야기뿐인데.
이제 성령을 보기 위해서 뭘 봐야 되느냐? 사도행전 2장을 봐야 되겠지요. 사도행전 2장 1-4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보여”,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 위에” 각 사람 위에, 새로운 타인입니다. 성령이라는 이름이 타인이에요. “각 사람 위에” 그러면 기존의 사람은 뭐냐? 타인들의 시선을 부정 못 하는, 타인들이 우리한테 요구하는 그러한 관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각사람, 움직이고 싶어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바들바들 떠는 그런 자아성, 그런 자아성.
힌두교에서는 자아를 아트만(ātman)이라 해서 불변의 것 보는 것을 자아성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현대철학 용어로 주관(主觀)이라 하는데 객관(客觀)을 보고 있는 이것을 자아라고 한 겁니다. 불교에서 특히 후대 불교, 유식불교(唯識佛敎), 유식이라는 것은 유식(有識)하다, 그게 아니고 유일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유식불교에서는 자아를 뭐라고 하느냐? 유식불교의 ‘아래아식’에서 내가 보고 있는 그것을 내가 보는 것, 그걸 자아라고 해요. 자기들 딴에 연구한다고 연구를 많이 했어요. ‘내가 보고 있는 나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나를 내가 보는 것’ 내가 나를 객관화해서 보는 그 주관을 나라고 보는 거예요.
유식불교에서는 그것조차 허상이라는 거예요. 그걸 허상이라 하는 그 너는 뭔데?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제가 불교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불교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남들이 볼 때의 행동과 안 볼 때의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만큼 인간들은 남에게 휘둘리는 인생을 평생토록 살아온 거예요. 휘둘리는 인생.
결혼식 하면 이게 5만 원짜리 내야 하는지, 10만 원쯤 내야 하는지, 그걸 왜 봅니까? 20만 원 내야 될 자리인지 그런 것을 왜 봐요? 그만큼 끈끈한 인간관계로서, 촘촘한 인간관계로서 꽉 짜여 있거든요. 촘촘한 인간관계 보려고 하면 담양에 가면 알 수 있어요. 담양에 대나무숲이 있어요. 그 대나무들이 얼마나 촘촘한지요. 몇 번이나 가 봤어요. 인간관계 같아요. 여기 가면 여기 걸치고, 저기 가면 저기 걸치고, 여기 가면 동창생 있고, 저기 가면 또 뭐 있고.
일곱 단계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관계라고 그걸 수학에서 밝혀냈습니다. 일곱 단계만 거치면 이 세상 72억이 다 엮여 있는 관계에요. 그래서 이 국가, 이게 하나의 자아 집단이에요, 자아 집단. 성경은 인간들이 기껏 뛰어봐야 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셔요.
그래서 너희가 아무리 죽었다 깨나도 못하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천당 가려고 보니 이게 해석이 됩니까? 되지를 않지요. 오순절 날 각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은 어떤 대인관계와 관계없이 성령이 직접 주도적으로 각 개인을 호출하는 겁니다. 찾아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사도 되기 전에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주님이 직접 찾아오잖아요. “너 누구한테 배웠나?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 했을 것 아닌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데 ‘저 사람 누구한테 배웠나?’ 배우기는 누구한테 배워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나는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직접 배웠다, 직접.’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직접 배웠는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3, 4절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말하기를 시작한 게 뭐냐? 다 각기 뽑혀 나왔는데 말하는 것은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냐, 다수냐?’ 이런 문제가 생겨요. 분명히 개인인데 벌써 찾아옴부터 통합되어 있어요, 하나로. 이게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거예요. 이걸 교회라 하거든요. 성경에서 똑같은 이야기에요. 무슨 이야기? 로마서 7장 14절 이야기. “너 육신 있나?” “있다” “그러면 죄의 포로네. 죄에 사로잡혔네.” 그러면 서로에게 묻지요. “죄에 사로잡혔는데 어떻게 합격을 했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게 되지?”
그 이야기는 요한복음 3장 21절에 나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네가 보기에는 내가 행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또는 예수님이, 또는 성령님이 지금 이 일을 나에게 발생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진지한 것도 하나도 없고 꼭 어린아이 같아요. 심각한 것도 하나도 없고. 심각한 게 있고 진지한 게 있다면 주님의 지시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프라고 하면 아프고, 죽으라고 하면 죽으면 되고,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요. 무슨 허무가 있습니까? 인생무상이 뭐가 있어요? 그리고 주님이 불러주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에,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때에는 주님의 얼굴을 본다 했어요. 나이가 대수냐? 나이야, 가라!
나이측정은 태어날 때부터 측정하잖아요. 주님이 불러주는데 시간은 점점 더 삭아지지요. 내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드는 거예요. 늘어나는 게 아니고. 80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 만날 시간이 내 시간이지요. 그저 멀리 떨어져 있던 사이가 이제는 가까이, 가깝게 가깝게 있는데 거기서 무슨 나이를 논합니까? 죽기를 무서워했다고요? 만나기를 즐거워하세요. 죽기를 무서워하지 말고.
천국에 우리 자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마련되었어요.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이거! 이거 자랑하세요. 이거 자랑해도 돼요. 매일같이 자랑하세요. 이것이 뭐냐? 인간이, 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새롭게 계속 내놓는 겁니다. 말씀은요,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은 쑥 들어온 거예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쑥 들어와 버린 거예요.
요한복음 3장 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게 그냥 쑥 들어와 버린 거예요. ‘육신, 그것은 죄에 팔렸지. 빨리 가져가라고 해. 이 고물 빨리 가져가라. 죄에 팔렸어.’ 뭘 해도, 밥을 먹어도 죄고, 잠을 자도 죄고, 뭘 해도 죄 아닌 게 없는데, 죄 아닌 것이 없는데 굳이 거기서 왜 선악 체제를 적용시킵니까!
이것은 옳은 것이고, 이것은 잘한 것이고, 못한 것이고, 그게 왜 있어야 돼요? 그것은 아직도 성령이 안 찾아와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찾아오면 첫째는, 어떤 인간의 도움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어떤 목사가 준 게 아니에요. 성령이 직접 여러분에게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 대 인간관계는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새롭게 인간관계를 조성했지요. 왜? 똑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이상해요. 이게 이상한 거예요! 이상하고 새로운 겁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거예요. 똑같은 말을 해도 새로워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글쎄 말이다.’ 안 나와도 되잖아요. ‘교회 나온다고 누가 돈 주는 사람 없어. 그런데 왜 나와? 너 말씀 안 봐도 되잖아. 그런데 말씀 왜 보는데?’ ‘글쎄 말이다. 나 어린아이 같애.’
주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어린아이, 이것보다 더 큰 특권은 없습니다. 미리 시작하는 천국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전하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받으면서, 그것마저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주님 가신 코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척하는 세상, 코앞에 있는 멸망도 모르고 그게 배운 것 다라고 여기는 그 어리석음, 한때 우리도 그랬던 저희들, 이제는 낯선 주님,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나고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저 충격적이고 놀랄 수밖에 없는 이 복음 앞에서 이제는 주님의 이끄시는 대로 시키는 것만 즐겁게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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