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6장 9절 (짝) 230404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6장 소위 말하는 불의한 청지기 내용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직원이 있는데 그 주인이 어떤 것을 눈치 챘느냐 하면은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다는 것을 눈치 챘어요. 그래서 이 주인이 그 직원에게 통보합니다. “당신하고 일 못하겠다.” 그러니까 이 직원이 말하기를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다.’ 철저한 자의식이죠. 소위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은 친족관계에서 사회관계로 번집니다. 인간의 관계가. 사회관계로 번지면서 자아성을 키워나간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자, 왜 갑자기 친족관계인가.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가지 잃어버린 경우 나옵니다. 1. 양과 목자. 2. 동전, 주인. 양과 목자는 친숙하죠. 유목생활 하니까 친숙하지요. 그런데 여기 목자는 주인으로 바뀌고 양은 동전으로 바뀝니다. 3. 가족관계. 아들과 아버지. 주인에서 아버지로 돼요. 이 3개는 하나의 범위가 좁아요. 친족관계.
그런데 네 번째 잃어버린 관계. 16장에 들어가보면 여기는 회사 사장과 직원의 관계에요. 직원과 사장의 관계입니다. 잃어버렸지요.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뭐냐 하면은 사장님의 돈을 잃어버린 거에요. 1번에서 잃어버린 것은 양 자체를 잃어버린 거죠. 여기서는 15장에서는 주인이 동전을 잃어버렸죠. 여기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렸잖아요.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사장이 갖고 있는 재물, 돈. 돈을 잃어버린 거에요. 돈을 잃어버렸으니까 친족관계에서 인간의 정과 이런 것으로 매개가 형성되는 거에요. 여러분 어릴 때 많이 해봤겠지만 엄마 지갑에서 아빠 지갑에서 돈 좀 훔쳐갔다고 그 다음부터 너는 내 자식 아니라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는 일은 없잖아요.
아주 어릴 때 2살 때 1살 때 아주 어릴 때. 언니하고 공모해서 돈 빼낼 때. 언니는 정보를 제공하고 나는 실행 요원으로서 가서 훔치고 하는 그런 경우 있잖아요. 간혹가다가 있답니다. 서랍에서 용돈 빼먹는 거. 가끔 가다가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거죠.
친족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요. 그런데 사회관계에서는 뭐냐 하면은 인간은 날라가버립니다. 사회관계는 뭘로 형성되어 있는가? 내 돈과 네 돈 관계죠. 사회관계에서는 사람 나고 돈 난 게 아니고 돈이 있고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키우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돈과 연관해서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관계가 사회관계에요. 내 놓을 돈도 없고 돈 없으면 안 다니죠. 사장이 돈 없다는데 왜 다닙니까. 돈 벌어줄 직원 없으면 그 직원 짤라버리죠. 모든 관계가 사회관계는 인간 대 인간적 혈족, 친족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남이기 때문에 돈의 관계에 있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 이해할려면 여러분들이 몇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요소들이 있어요. 이거 잊어버리면 전혀 풀리지 않아요.
누가복음 16장은 제가 보기에 이런 거 같아요. 천국에 돌파하는 마지막 수능시험. 이거 해석안하면 끝. 인간 대 인간을 매개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재물로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럼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람을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내가 주목하는 돈이 날라갔을 때 그거는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둘 다를 신용도 잃고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다 날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모르면 16장 전혀 풀리지 않습니다. 이거부터 확실하게 해야 돼요.
우리는 남이 될 수 없다. 때려죽여도 이게 안돼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분명하면서도 우리는 이걸 자꾸 잊고 놓쳐버려요. 잘 해줬으니까 잘 대해줬으니까 부모한테 효도했으니까 부모가 내 심정을 알겠지 이런 거 안 통합니다. 인간은 남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식은 내 마음 모르고 부모는 자식 마음 몰라요. 아내는 남편 마음 모르고 남편은 아내 마음 모릅니다. 전혀 몰라요.
지금 여기 첫 번째 15장에 나오는 양을 잃어버린 목자, 동전 잃은 주인, 아들 잃은 아버지, 이거는 내가 굳이 아버지를 알고 동전이 주인 알고 양이 목자 알 필요 없어요. 왜냐 하면은 목자가 일방적으로 나를 건져주니까. 주인이 일방적으로 열심히 찾았고 아들은 내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나왔기 때문에 알아서 기었잖아요. 그러니까 주도권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한테 있는 거에요. 아버지가 아들 삼으면 아들이고 내치면 아들 아닌 거에요. 한쪽 관계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16장에 들어가서 잃어버린 것은 뭘 잃어버렸는가. 사람을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재물을 잃어버린 겁니다. 재물. 주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왜 재물 잃어버렸느냐. 우리는 남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릴 용서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잘 못 들어봤지요. 우리는 누굴 용서 못한다? 하나님을 용서 못한다. 하나님이 나한테 아픔을 줬기 때문에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아서 내가 하나님 봐줬다. 이게 안돼요. 이게 되지를 않는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 못합니다.
따라서 친족 관계에서 떠나서 사회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기 사람을 찾는 방법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재물을 집어넣어서 주께서는 그렇게 설명해주시는 거에요. 주님께서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 대신 재물을 집어넣었다는 말은 인간은 철저하게 재물에 종속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나 착합니다 훌륭합니다 그딴 소리는 사회에 통하지 않습니다. 내 돈 어떻게 했어? 내 돈 어떻게 했어? 이게 사회에요.
자식 둘이 있는데 하나는 미국 가있고 하나는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데 아버지가 홀로 계시는데 한국에 있는 자식이 아버지를 다 돌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미국에 있는 동생이 묻습니다. ‘참 언니는 아버지 잘 섬겼지’ 이거 묻지 않습니다. 뭘 묻느냐? “아버지 돈 어디 있어. 아버지 분명히 강남에 빌딩 하나 있는 거 아는데 어떻게 했어? 언니 어떻게 했어?” “다 처분해서 아버지 병간호 하는데 다 썼다.” “명세서 내놔. 영수증 다 챙겨.”
언니 동생 없어요. 돈입니다. 이 말은 뭐냐? 늙으신 아버지가 아니에요. 늙으신 아버지의 재산은 어디 있을까. 늙으신 아버지의 재산은 어디 있을까요 이게 사회관계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어줍잖은 동정, 사랑 그거 내가 남이 아닌 이상은 그리고 내가 남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의 심정을 알아서 용서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분노에 대해서 내가 나한테 용서하는 거죠. 네가 나를 알아? 용서를 하게. 안돼요. 내가 너한테 갖고 있는 악한 감정을 내가 나보고 용서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인간 없습니다. 오직 돈의 흐름밖에 없어요. 자본의 흐름.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주인, 사장님. 사장님은 누구십니까? 사장님은 예수님밖에 없죠.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유일한 인간이에요. 이 땅에 신자가 있을 거라는 망상은 하지 마세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신자가 있습니까. 사람 자체가 없는데 무슨 신자가 있어요. 신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만이 신자여서 가능했던 거에요. 예수님만이.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할 때 양으로 대하느냐? 동전으로 대하는가? 아들로 대하는가? 좀 더 사회생활하고 있는 인간의 넓은 범위를 보면 우리를 뭘로 보느냐 하면은 재물로 봅니다. 누가 품고 있던 재물? 주인 자기 자본금이에요. 자기 투자금입니다. 이거 아니면 16장 이해 하나도 못해요. 11절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또 19절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걸 무슨 수로 해석을 해요. 해석할 토대가 있습니까? 없어요.
12절에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여기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남에게 충성하라는 말이 아니고 남의 것. ‘남의 것’.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주님께서는 여기서 사장님이고요 우리를 뭐로 보는가? 우리를 불의한 자로 보지 않아요. 사장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은 자기의 돈에 관심 있습니다. 그게 사회관계에요. 인간성 좋다고 회사 더 오래 있으라 하지 않습니다.
돈 못 벌어 오면 물건보다 돈 곱빼기 못 벌어오면 돈 못주지요. 네가 100벌어오면 내가 50먹고 네가 50먹고 이게 회사 아닙니까. 이걸 가지고 사업이라고 해요. 이것이 사업이죠. 교회 자본금 냈던 그 장로들. 목사 새로 뽑습니다.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 교회 헌금 100 들어오면 50 너 먹고 50 교회 돌리기. 콜?! 이거라니까요. 무슨 수를 쓰던지 간에 헌금이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교회 유지가 되니까. 교육관도 넓히고 앞에 보살집도 사들이고 해야 되니까. 숯불갈비집도 주차장 없으면 안 들어오거든요. 교회도 주차장 없으면 왜 들어옵니까. 저 교회나 이 교회나 다 똑같은데. 하는 소리 똑같은데. 이제 설교 똑같이 될 건데 뭐. 이것 베끼고 저것 베끼고. ‘천국 설교 해보세요.’ 인공지능하면 ‘여기 있습니다.’ 쭉 다 나올 건데. 이것저것 다 베껴놨는데.
회사든 뭐든 간에 사회관계는 돈이라는 것은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지금 이야기 자체가 잃어버렸다는 거에요. 그러면 지금 이야기 자체가 잃어버렸다는 거에요. 여기 16장에 보면 이미 그 직원이 그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 되어있지요. 주인의 관심사는 소유이니까. 소유를 허비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낭비한 거죠. 허비했다는 것을 이미 감 잡았어요. 그러면 주인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게 뭡니까? 돈을 잃어버렸지요. 그럼 돈을 잃어버린 것을 스탑시킬려면 그 대책은 뭐지요? 그 직원을 내보내는 거에요.
그러면 이거는 뭡니까? “주인의 재물에 충성치 아니한 자는” 여기 9절의 말씀처럼 “영원한 처소에” 들어갈 수 없는 거에요. ‘영원한 처소’. ‘천국에 못가는 것’. 그런데 8절에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참 진짜 어렵다. ‘옳다’ 반대말은 뭡니까? ‘그르다’죠. 옳다, 그르다죠. 그러면 ‘지혜롭다’는 여기 어디 낍니까? 낄 데 있어요 없어요? 옳다 그르다에 껴줍니까? 안 껴줍니까 끼질 않지요. 옳다 아니면 그르다. 그르다 아니면 옳다니까. 이걸 한 묶음으로 묶어버리면 ‘지혜롭다’는 것은 여기 낄 자리가 없지요. 그렇지요? 옳다 그르다는 주인의 시작이에요.
그런데 지혜롭다는 말을 할 때 누가 지혜로운 거에요? 8절에 보면 청지기에 대해서 평이 뭡니까? 옳은 청지기에요? 나쁜 청지기에요? 옳지 않은 나쁜 청지기죠. 나쁜 직원이죠. 나쁜 직원이 자기가 자기한테 주인이 되어버려요. 주인이 되어서 자기 재물을 챙긴다면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 돼요. 주인의 시작. 이걸 가지고 전에 주인이 하는 말이 “네가 참 지혜롭구나”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새로운 주인의 전환, 주인이 전환된 거에요. 갑자기 주인이 하나였는데 주인이 둘 된 거에요.
그렇다면 이 불의한 직원, 짤린 직원, 직원이 시작할 때 기본 돈이 있을 거 아닙니까. 자기가 독립해 나왔으니까. 짤려서 독립해 나왔을 때 먹고 살려고 독립할 때 그 독립한 재물 어디서 온 거에요? 자기 돈입니까? 저번 주인 돈이에요? 저번 주인 돈이죠. 그러니까 저번 주인이 보기에는 나쁜 거에요. 불의한 거에요. 그런데 이 새로운 사장이 된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한 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불의한 것부터 출발하는데 뭘 뽑아내는가. 불의한데서 놀랍게도 지혜를 뽑아내는 거에요. 지혜를.
그 지혜가 뭐냐? 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이것을 이렇게 하면 됩니다. 시간을 지배. 미래를 지배하는 거에요. 1번 주인 두 번째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 첫 번째 주인의 관심사가 재물에 있지요. 이 재물에 대해서 불의한 청지기가 횡령을 하지요. 노골적으로.
짤린다는 소식 듣고 기름 백말 빚진 자에서 50이라고 서류를 조작하는 거에요. 경리에 해당되는 거에요. 이 사람이 경리. 자기가 아직 경리 수정할 위치에 있을 때 짤리기 전에 미래에 대해서 시간 지배를 시도하는 겁니다. 미래의 시간을 지배하는 거에요.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해요. 재물을 다룰 때 어떻게 다루느냐. 이게 뭐냐? 산술적. 산술적이라고 하는 것은 산수. 셈하는 거에요. 무엇이 이익이냐 손해냐를 결국은 마지막에 남는 게 있는 것을 떨어지는 콩고물 있는 것을 고려하는 그 논리가 산술적이란 말이죠. 플러스 마이너스 적이다 이 말이죠. 산술적이니까 상당히 기계적인 거죠. 인정사정 다 빠졌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회관계 속에서 이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우리 주님은 어떻게 그걸 찾아내서 구원하느냐 여기 있거든요. 목자가 양을 찾듯이 동전 잃어버린 여자가 동전 찾듯이 집나간 아들을 아들로 맞아주듯이 이 인간사회에서 친족관계 말고 인간사회에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어떻게 뽑아내느냐 하는 겁니다. 철저하게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사회관계를 형성하느냐. 그게 분명히 돼야 되겠지요.
그걸 뽑는데 결정적으로 산술적으로 계산을 했을 때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 두 번째 주인 불의한 청지기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지혜롭다고 결정적으로 하느냐 하면은 재물을 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은 9절 불의한 재물로 뭐 한다고 했어요? “친구를 사귄다” 친구를 사귄다. 불의한 청지기에서 이거 뽑아내면 여러분 정답 가진 겁니다. ‘짝’. 구원은 본인이 얼마나 지혜롭고 똑똑하고 산술적으로 잘하고 개인으로 사장으로 자기 회사 관리하느냐가 아니라 구원은 짝이 없으면 구원이 안돼요. 짝이 없으면.
짝이 없으면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무엇을 누락시킵니까? 자기한테 돈 될 때만 친구고 애인이고 가족이고 하지만 돈이 안된다하면 자기 쪽에서 재물을 건사하기 위해서 누굴 잘라내요? 자식이고 부모고 가족이고 다 잘라내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고독. 자진해서 고독하는 거에요. 인간은.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정리가 깔끔하게 됩니다. ‘진리란 거짓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사회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 인간사회 전체가 다 잃어버린 자들이에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에요.
버림받고 잃어버렸으니까 인간사회에서는 하나님과 뭐가 형성되어 있느냐 하면은 간격이 형성되어있지요. 간격. 이것은 누가복음 16장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아멘. 간격이 성립되어있지요. 간격이 성립된다는 말은 인간의 사회관계가 전부 다 너와 나 사이에 간격이 생기지 아니하면 내 재물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없어요.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돈 가지고 친구를 사귀죠. 그게 틀렸다는 것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 재산 땡겨 써서 도망친 자가 결국은 돈 떨어지니까 친구 다 떨어졌잖아요. 창녀도 다 떨어져나갔지요. 돈 떨어지니까. 그런데 16장에 보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된 거에요. 15장에서 탕자가 돈 들고 나간 그 탕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은 자기가 불의하다는 것을 몰라요. 돈 있음 자체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만약 여러분 앞에 간암4기 말기 암 환자가 와가지고 얼굴 누렇게 다 떴어. 휠체어 타고 등장해가지고 머리에 수건 감고 눈 시커매가지고 누가 봐도 암 말기를 넘어섰어. 말도 제대로 못해요. 여러분 앞에 와서 “내가 골프 좀 치는데” 이렇게 하면 여러분이 “아이고 부러워라” 이렇게 합니까? “내가 벤츠를 타고 다니는데” 그게 부러워요? “내가 가만히 있어도 상가에서 세가 한 달에 3천만원 나와” 그게 그렇게 부럽습니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하지요. 그걸 뭐냐 하면은 ‘시니컬’, 냉소적이다. 오늘 본문은 16장은 냉소적이에요. ‘냉소적’. 냉소적으로 본다고요. 왜? 거짓이 없으면 뭐가 안 나오기 때문에. 진리가 안 나오기 때문에. 이 거짓된 세계에서 진리는 거짓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암 말기 환자가 지 딴에 자랑할게 없어서 골프치고 매달 월세 수천만원 받는 거 그거 자랑할 때 아이고 퍽이나 부럽겠다 그게. 그게 부러워요?
그때는 마음껏 위로해도 괜찮아요. “대단하십니다~~~ 어이구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혀 부럽지 않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되고 장관 되고 빌딩 세우고 강남에 몇 채 있고 그거 암 말기보다 더 마귀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고독한 사람이에요. ‘고독한 사람’. 짝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불의하다는 것을 몰라요.
오늘 누가복음 16장은 시작을 불의한 청지기부터 시작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해요. 나빠요. 나쁜데서 옳게 가는 게 아니에요. 나쁜데서 지혜로 가버려요. 지혜로. 뭐냐 하면은 자기가 경리 권한이 있을 때 기름 100 빚진 자에게 50이라 쓰고 밀 100 빚진 자에게 80이라고 쓰는 이 행위를 통해서 당신 나 짜르고 난 뒤에 내 편 될 수 없느냐 라고 지금 호소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한번 봅시다.
첫 번째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주인은 나의 주인과 주인 됨은 신경 어디 쓰느냐 하면은 내 재물은 허비되지 말아야 된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주인도 첫 번째 주인을 닮았어요. 내 재물을 제공해줄 자는 내 재물로 친구가 된 당신들뿐입니다 라고 하는 거에요. 둘 다 공통점은 둘 다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뭐에 있다? 재물에 관심이 있는 거에요. 둘 다.
왜 그러느냐? 불의한 세대. 이 세대 자체가 불의한 세대거든요. 여기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8절에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라고 했지요. 이 세대의 아들. 나오지요. 이 세대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이 세대만 있는 게 아니지요. 이 세대의 아들을 동일하게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자기 시대”라고 했어요. ‘자기 시대’. 이 세대의 자기 세대죠.
그러면 자기 세대는 뭡니까? 이 세대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거에요. 이 세상의 경향.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빛의 세대라고 본거에요. 빛의 세대. 자, 빛의 세대니까 너는 옳다 그르다에서 어느 쪽에 속합니까? 빛이니까. 그르다가 아니고 어둡다가 아니고 옳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세상 옳다. 옳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자기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고상하고 견고하고 거룩한 생활을 해서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집단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거에요.
16장 1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뭐냐? 자기가 불의하다는 것을 어떤 경우라도 인정하지 않는데 특징이 있다. 간암 말기 환자가 ‘내가 나빴어 내가 전에 골프 친다고 한 것도 나빴고 빌딩 있다고 자랑질한 것도 나빴고 벤츠 좋은 차 타는 거 그것도 나빴어’ 라고 하면서 ‘그래서 나쁘기 때문에 암 걸려도 이거는 나는 할 말 없어. 당연히 죽어도 마땅해’ 이렇게 오지 않았다고 제가 이야기했지요.
본인은 비록 암에 걸렸지만 암에 걸린 건 자랑거리가 아니니까 빼돌리고 남한테 기 안 죽을라고 너희들 이런 거 해봤어? 하고 자랑질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게 특징이 뭐냐? 자기시대에요. 자기 시대. 이 세대에요. 이 세대.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빛의 세대라고 우겨가지고 이 세대에 자기가 포함이 안 된다고 우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대, 자기 세대의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가지고 누굴 치느냐? 빛의 세대를 공격해버리는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16장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 그건 어디 갇혀있는 자들이에요?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정신세계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들. 바리새인들이 만든 정신세계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들. 바리새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돈보다 더 좋아한다고 자부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실상을 예수님은 알고 있거든요. 네가 돈보다 말씀을 더 좋아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돈 바치라는 이야기를 우회한 거잖아 이렇게 따지는 거에요.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어떤 드라마에 보게 되면 그 나쁜 사람들이 장례식에 와가지고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원조회를 해가지고 밝혀가지고 복수할라고 몰래 그 사람이 버린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그걸 알고 있는 좋은 사람 쪽에서 모범택시 쪽에서 마치 자기 자식에게 전화하는 것처럼 전화를 겁니다. “야! 너 거기서 뭐해?!” 깜짝 놀래요. “도서관에 가라고 했잖아. 당신보고 이야기한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그 나쁜 사람이 휴 나보고 이야기한 거 아니구나. 빨리 가져가야지. “그거 왜 가져가는데!” 깜짝 놀래요. “책가방에 왜 가져가는데?” 모범택시2에서 그런 이야기한 거에요.
지금 주님께서 도둑놈 들으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어떤 도둑 같은 직원 있었는데 주인이 자기 돈 아끼는걸 뻔히 알면서도 그걸 빼먹었어.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주인이 자기 직원이 자기 돈 낭비하고 횡령하는걸 뻔히 알면서도 지혜가 있다고 칭찬 비슷한 이야기를 해버렸다. 그러니까 그 소리를 듣고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어요? 비웃지요. 비웃지요. 예수 당신은 어떻게 선이 지배하는 세상이 돼야 되는데 악을 장려하느냐. 이런 식으로.
당신이 메시아 맞아? 어떻게 나쁜 짓을 노골적으로 장려를 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 보고 하는 소리야. 너희들이 그런 거야. 자기는 돈 좋아하면서도 우리는 돈을 초월해서 말씀만 생각하는 쪽이니까 뭐 내놔라? 돈 내놔라. 그러니까 돈 좋아하는 것은 사라진 적이 없고 인간사회에 근거해서 너나 나나 돈 좋아하는데 방식이 뭐냐? 노골적으로 돈 좋아하는 서민계층. 빛의 자녀 행세하면서 돈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하는 고단수 도둑놈들.
이 모든 원인은 어디 있느냐? 인간은 고독 점점 더 고독하게 되어있어요. 왜? 타인이 될 수가 없고 타인일 수 없고. 인간은 타인이 될 수 없고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타인이 되길 무서워한다는 사실. 내가 나 아닌 것을 무서워해요. 인간은.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품성이기 때문에. 악마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절대로 악마이기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걸 그대로 빼다 박은 자 누구냐?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서 누굴 끌고 오느냐. 짐승을 끌고 옵니다. 제가 대구강의 때 했지요. 개를 키우는 이유는 자기가 개보다 못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개가 주인 말 잘 듣지요. 먹을 것만 주면 아무 소리 안하고 불평 불만 안하지요. 먹을 것만 주면. 좋은 옷 입히라고 개가 앙탈하던가요? 개는 털이 옷인데 왜 거기에 옷을 입혀요? 횡포 아닙니까. 개권에 대한 도전이에요. 개권.
그 고분고분이 인간에게는 없는 거에요. 인간은 고독을 추구하기 때문에 내 고독 추구에 방해되는 것, 절대 자아에 방해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든 누구든 이단옆차기로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왜? 그게 악마의 품성이기 때문에. 이집트에 피라미드 있는 곳 지명 이름 테베라는 곳이에요. 어느날 테베를 지나가던 오디푸스 왕이 테베를 지나가는데 그 테베 시민들이 굉장히 고민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무슨 고민이냐 하면은 괴물이 나타나가지고 수수께끼 내서 못 맞추면 돌이 되어서 절벽에 떨어뜨리는 그러한 힘을 발휘해서 여러 사람이 죽어간 거에요. 그러니까 오디푸스가 딱 나섰지요. 테베 피라미드 옆에 뭐가 있느냐? 스핑크스가 있어요. 얼굴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몸은 사자를 하고 있는데. 괴물이죠. 묻습니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오후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게 뭐게? 라고 물었어요.
그때 오디푸스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인간이라고 한 거에요. 인간이라는 소리 듣자마자 스핑크스 지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어요. 그것은 인간만이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짐승들이 분노하고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해 좌절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의 최고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유아기, 성년기, 노년기를 같은 한 몸, 한 목소리에 묶을 수 있는 이게 인간 말고 다른 모든 짐승한테는 영원한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한 수수께끼처럼 여겨지는 거에요.
이게 오디푸스 신화인데 왜 이런 신화를 만드느냐? 신화의 마지막 해답은 뭐냐 하면은 최고중의 최고는 여러분. 인간이다. 최고 중의 최고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 찬미죠. 그 인간 찬미가 신들을 대할 때도 역시 악마의 심정으로 인간 찬미하는 거죠. 제가 주일날에 악마가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아요. 아이 낳고 그 다음에 전쟁이 일어난다고요. 악마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악마로부터 시작하지만 현재 인간사회 관계를 보게 되면 인간보다 더 위대한 건 없어야 돼요. 그게 오디푸스 신화로서 정리된 겁니다.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생각이 동일한 생각, 어떤 집안이나 어떤 가문 항상 공통점은 합의 보는 것은 뭐냐? 인간을 최고로 하는 것만이 이게 진리가 되는 거에요. 그 진리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에서 그걸 뭐로 고발하느냐? 그 진리 자체를 불의하고 거짓으로 출발해서 인간 자리에 재물을 집어넣어가지고 인간은 재물에 미치지 못 한다를 보여주요. 인간을 재물화시켜버려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뭐냐? 마귀의 자식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인간을 최고로 여기는 모든 인간 내부의 보편적으로 들어있는 신성 그 자체, 그걸 인간들은 지혜라고 이야기해요. 지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진리라고 하는 거에요. 어떤 인간도 악마가 심어놓은 진리와 지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신자는 끝까지 없어요. 끝까지 없는 거에요.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림은 누굴 위함이다? 인간을 위함이다. 이러고 있으니까 이게 신자 될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인간의 유일한 신자는 고독한 자기 자신이에요. 고독한 자기 자신. 제가 또 준비를 치밀하게 해 왔습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양인자씨가 썼던 시. 조용필이 불렀던 킬리만자로의 표범.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언젠간 두고 보자는 거에요. 스핑크스가 부러워하는 나는 오디푸스 왕이 되고 싶다는 뜻이죠.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6장 9절 (짝) 230404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마지막에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거 봤는데 중요한 것 들어가보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이거 뭐하는 거에요. 독백이죠. 자기가 고독을 확인하는 몸짓이고 생각이고 사고방식이고 행동들이죠. 나 혼자 있다는 것. 왜? 나는 남이 되기 싫으니까. 이게 악마의 품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장에서는 뭐냐? 친구를 사귀어라. 이거는 내가 주인인데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주인1번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주인1번 아까 했지요. 주인2번이 불의한 청지기. 주인의 전환이니까요. 주인1번이 2번을 보면서 지혜롭다고 한 거에요. 처신 제대로 한다 이 말 아닙니까. 돈을 산술적으로 했잖아요. 이건 인간요소 배제한 거에요. 인간 요소 배제. 상대방이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너도 산술적으로 나오고 나도 산술적으로 대하자.
기름 100말 빚진 게 있는데 50하게 되면 win win 양쪽 다 좋지 않으냐. 둘 다 산술적 계산하는 게 이에 인간사회에요. 사회관계입니다. 재물이 돈의 기능을 하니까. 그런데 주인1이 주인2 보고 하는 말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두 번째 시간이니까 해답이 나와야 돼요. 이 불의한 재물은 원래 어디서 나온 재물입니까? 주인1번에서 나온 재물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불의한 재물을 불의한 청지기가 가져갔으니까 여기서 피해자가 누구에요? 주인1이 되겠지요. 피해자.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자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지혜롭다고 이야기해요. 지혜롭다고. 불의한 자가 지혜롭게 행동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불의한 자가 지혜롭게 했다. 그 불의한 자가 지혜롭게 행동한 것은 불의한 내 돈 가지고 자기 친구 사귄 거에요. 내 돈 가지고 자기 친구를 사귄 거에요.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 불의한 자가 지혜롭다가 통하느냐 하면은 주인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자신이 주인이 되었을 때 돈 없으면 안 되거든요. 자기 도와줄 사람 없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주인이 있을 때 예수님은 이것을 이 세대로 보는 거에요. 이 세대 또는 자기 세대. 그러면 이 세대는 뭐냐 하면은 오는 세대 그리고 이쪽에서 처소가 날라가버린 세대. 9절에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 내 자리가 몽땅 다 없어질 때. 내 자리가 없어질 그 때에 지혜가 빛을 발한다.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렇다면 이 비유에 하신 예수님의 주인공은 누구냐? 주인공은 바로 격차를 유발하시는 분. 주인1번과 주인2번의 격차를 의도적으로 유발해버려요. 인간은 격차 나는 것을 간격이 생기는 것을 인간은 원치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6장 22절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할 때 나옵니다. 부자가 거지 있는 곳에 가고자 합니까 아니면 거지 보고 자기 쪽에 오라고 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부자는 자기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요. 자기는 고독한 표범이고 싶어요. 인간은 자기가 둘로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갈라질 거 같으면 괜찮은 쪽을 남기고 나머지를 잘라내요. 인간은 고독을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에요. 절대자아를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주인1,주인2 둘 다 누구냐? 둘 다 예수님입니다.
원리가 뭐냐? 죄인이 되지 아니하면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도 타인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이 되셨어요. 예수님은 죄인이 되셔가지고 죄인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풍덩 어디 빠졌느냐? 바리새인의 정신이 지배하는 바리새인 배후에 누가 있어요? 바리새인은 요한복음 8장에서 누구 자식입니까? 악마의 자식이죠. 악마의 정신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다른 민족도 있지만 다른 민족은 계시적이 아니니까 이스라엘이 계시적이니까 주님의 계시가 집중하는 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거든요.
십자가 사건 일어나는데. 첫 번째 주인1이 특징이 뭐냐 하면은 피해자에요. 피해자. 피해자이기 때문에 불의하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 자격이 있어요. 불의하다. 불의한 것은 죄인이잖아요. 그런데 관건이 뭐냐? 주께서 오신 것은 예수님만 구원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에요. 목자가 되어서 잃어버린 양을 얻으러 왔고 주인 여자로서 잃어버린 동전 찾으러 왔고 아버지로서 집나간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받아들이는 그 기능을 하러 왔어요. 그 기능이 될려면 인간은 타인이 될 수 없는데 예수님은 두 개의 역할을 다 해야 돼요.
건져주시는 분과 건짐을 당하는 자. 또는 피해자로서 또는 피해 입힌 자의 그 몸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방금 한 말이 어렵게 들린다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습니다. ‘말씀은 현실을 남긴다.’ 이 한마디로 하면 다 돼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창세전에 이미 합의된 게 있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버린 아들을 아버지가 되찾는 방식, 그게 마지막 언약 새 언약이에요.
그럼 세상 돌아가는 현실은 이 아버지와 아들 합의한 바깥에 벗어나겠습니까? 못 벗어나겠습니까? 벗어날 수가 없지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아들이 버림받고 아버지가 되찾는 식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탕자 비유 아닙니까. 그렇다면 버림 받는다고 했을 때 버림받은 이유가 성립 돼야 돼요. 그럼 예수님은 어디 빠졌는가?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득 찬 이 세상에 오신 거에요. 불의한 곳에. 불의한 곳에 오시면서 뭐도 건져야 되고? 지혜는 건져야 돼요. 건짐 당할 때 그게 지혜가 되는 거에요.
빠져있는 자를 건지는 것은 빠져있는 자보고 알아서 기어 나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친구가 있어야 되죠. 짝이 있어야 되죠. 그걸 다른 성경에서는 이야기하죠. 바로 사랑하는 자가 있어야 돼요. 사람은 혼자 살면 안돼요. 사랑하는 자가 있어야 돼요.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 분은 나를 사랑하는 자로서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발생될 때 나오는 현상은 뭐냐 하면은 바로 거짓의 역할이 진리의 내용을 보여준다.
내가 하는 역할은 불의한 역할이에요. 거짓된 역할이에요. 바리새인이 하는 역할. 돈 밖에 모르는. 고독한 사람이 살려면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어요. 돈이 있는 곳에 고독은 빛이나요. 돈도 없는 주제에 고독할라고 하면 산 사람 되든지 자연이 좋다 거기 가든지. 주님께서 자신이 주인1이 되고 주인2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건 계속 불의해요. 그런데 불의하면서도 추가적으로 덮쳐진 요소가 뭐냐 하면은 지혜롭다는 겁니다.
불의한데 어떻게 불의한 것이 지혜와 결합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는 세대에 가능해요. 오는 세대에 가능할려면 이 세대말고 오는 세대에 계신 분이 이 세대 속에 풍덩 들어와야 돼요. 풍덩 들어와야 됩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낚시하면 안돼요.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야 돼요. 내려오셔서 인간의 한계를 끝까지 몰아붙여야 됩니다. 인간의 한계는 자기가 분열되기 싫다는 겁니다. 내 안에 간격 만드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아요. 두 개 쪼개지는 것을 싫어해요. 마치 거지 앞에 있는 부자처럼.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주인 행세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주인 행세하는데 이게 반칙이에요. 왜? 인간이 자기 주인행세하는 것은 좋은데 거기에 필요한 재료와 모든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다 하나님께 나온 것이에요. 하나님 것을 그걸 낭비하고 자기 것으로 전환시켜놓고 나도 사장님이다 이렇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럴 거 같으면 지혜는 누군가? 바로 예수님 본인을 지혜라고 했어요. 예수님 설교할 때 남방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서 온 시바 그 여왕처럼 “이방인이 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올 것이다. 그런데 본 자손들은 나를 배척하는구나”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사랑한다. 우리 사랑은 소용없어요. 내 짝이 주는 사랑이어야 돼요. 나를 사랑하는 짝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내가 한없이 거짓되고 나쁘다는 사실을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지적해주신다는 거에요. 왜? 그분은 주인1으로 계신 분이니까. ‘내 다리 내놔라’ 이 말이죠. ‘너 내 것 가져갔잖아’ 내 것 가져갔잖아.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사회의 시작은 모조리 다 불의한데서 출발한다. 그러면 인간의 유형은 불의함의 변주곡들이다. 변주곡 알지요. 모차르트 C장조에 나오는 노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 있어요. 반짝 반짝 작은별 그 제목은 미국에서 와서 그렇고요 그 제목은 어머니 제 말 들어보세요 뭐 이런 뜻인가 있어요. 모차르트가 작곡한 게 아니고 전래동요가운데서 변주를 한 거에요.
모차르트 곡을 듣고 라흐마니노프. 전부 다 앞의 작곡가에게 영감 받아서 한 거에요. 변주곡들이에요. 이 세상은 변주곡의 파도에요. 네것 내가 베끼고 변주곡들이에요. 변주곡인데 무엇의 변주냐? 불의함의 변주에요. 불의함의 변주. 이게 인간의 유형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을 구원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짝이 되어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거에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어요? 그 불의한 친구가 또 내 돈 횡령해가지고 차릴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불의함이 불의함을 전파시키는 이 세대, 이 보편적 세계가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오직 거기서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는 세대에 속한 오늘 본문에서 “영원한 처소”, 영원한 처소를 미리 알고 있는 그분. 그분만이 지혜롭구나!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거에요. 그분이 불의한 자의 짝이 되면 되겠지요.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타인이 되기 싫다. 같은 말 인간은 자기 내부에 간격, 격차 가 생기는 것을 용납 못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인간 이걸 재물로 바꾸는 거에요. 인간은 있다? 없다? 인간은 없고 재물밖에 없어요. 내 것 왜 가져갔느냐? 내 것. 그러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앞에 있는 주인을 흉내내가지고 이게 원래 주인에게 피해를 입힌 그 돈 가지고 자기가 자기 단도리하고 있는 거에요. 자기 미래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단도리한다는 말은 이 인간세계에서 자기가 불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에요. 결국. 왜냐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될려면 원래 주인의 있는 돈을 횡령 거기서 파생되어서 나와야 되거든요. 파생이라는 말 아시지요? 이야기 처음에 어떤 사장님이 돈 가지고 있다 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러면 불의한 사람은 거기 취직한 사람이에요. 아직 불의한지 아닌지 그건 없어요. 돈을 횡령할 때 뭐가 발생됩니까? 불의가 발생되는 거에요.
그 불의조차도 어디 범위 안에 있는가? 주의 말씀 범위 안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건질 자를 어떤 절차가 있는데 그 절차가 뭐냐? 불의하다는 절차를 밟아서 지혜롭다는 평가를 내리면서 건지는 방식을 주께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계획 잡은 절차입니다. 왜냐? 인간은 왜 못 끼느냐? 인간은 자기가 불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 나오는 지혜롭다 칭찬받은 본인은 본인의 뭐를 알아요? 내가 불의한 돈 가지고 내 장래를 챙길 산술적으로 챙기고 있다는 이 점. 당연히 불의하죠. 당연히 불의한데 당연히 지혜로와요. 왜? 내가 이거 아니면 살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에. 살길이 없다. 나는 죽었다 이 말이에요. 왜 죽었는가? 주인 돈을 횡령했으니까 죽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은 죄인이기에 나에게 돌아온 것은 지옥밖에 없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걸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게 지혜로운 거에요. 우리는 뭐합니까? 또 한 고집하지요. 지옥가지 뭐 지옥가면 될 거 아니야. 지옥에 안 보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게 하신 분이 우리의 짝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의 짝이 되시기 때문에. 주님은 왜 저렇게 불의한 청지기라 하면서 왜 구원시킵니까?!
그거는 누가복음 16장의 말씀 때문에 그래요. 성도는 말씀 안에 못 벗어나요. 성도는 말씀대로 되요.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고 영원한 처소를 받는다는 그 계획서가 이미 나와 있어요. 문제는 이 계획서대로 필요한 사람을 예수님이 뽑으면 되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이 하실 일은 뭐냐? 죄인 발굴. 자, 죄인을 어떻게 발굴하는가? 오늘 제가 서울 오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질문이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목사님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다는데 어떤 것이 육체의 소욕이고 어떤 것이 성령의 소욕입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주위는 시끄러워서 간단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끄러우니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같이 있는데 육체의 소욕은 어떤 경우에 발생되느냐? 성령이 자기 할 일을 찾고 있을 때 육체의 소욕을 유발시킵니다. 성령이 하실 일, 자기 일을 위해서 주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상황을 몰아넣어요.
상황에 몰아넣으면 성도는 육체 밝힘증이 발생됩니다. 이미 죽었던 욕정이 다시 생기게 만들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것을 정과 욕심을 다시 이 몸을 통해서 주변의 상황과 사회관계 인간관계를 통해서 다시 발생되도록 성령이 유도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을게 뭐냐? 바로 갈라디아서 나옵니다. “네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가 되풀이되지요. 십자가가 되풀이되는 거에요. 십자가가. 그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한번 봅시다.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그 다음에 현재로 되어있습니까? 과거로 되어있습니까? 과거죠. 십자가에 못 박았죠. 오는 세대는 시간은 지배해요. 과거 일어났던 것을 언제든지 현재화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음을 확인하기 때문에. 너는 불의하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에 못갑니다. 신자여야 가는데 신자가 아니에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자 아닌 자는 짝이 필요합니다.
너 불의해. 불의하지만 지혜로운 불의한 자가 되게 해줄게 라는 짝이 필요해요. 그거는 첫 번째 주인이어야 가능한 거에요. 왜? 자기 돈이기 때문에. 자기 돈 횡령 갖고 나가가지고 그 돈 불의한 청지기가 자기 돈도 아닌 내 돈 가지고 지 살 길 찾는데 그거는 반칙이거든요. 반칙인데 자기 살 궁리한다 이거 보니까 맞다 그게 지혜야. 왜 지혜냐? 나는 이 돈 없으면 난 어떻게 된다? 나는 죽었어. 나는 못살아. 죽음을 느끼는 거에요. 나 망했다를 느끼는 거에요.
그 망함을 유지하라는 거에요. 나는 예수님 아니면 나는 진작에 나는 망했고 나는 불의해서 지옥가야 했고 나는 주님인 첫째 주인에게 영원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요 그걸 유지하라는 거에요. 그게 육체의 소욕이에요 그게. 그걸 밝혀내는 것은 성령의 소욕이고. 십자가가 해결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죄인을 발굴함으로서 내가 죄인이라고 느꼈을 때에 우리는 뭘 하느냐? 지옥 간 부자, 천국 간 거지 사이에 그 격차를 굳이 안 죽어봐도 이 격차가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새록새록 일어나는 거에요. 그때는 땀을 좀 닦아야 됩니다. 아이고 큰일 날 뻔했다. 아찔했어. 지옥갈 뻔했어.
그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니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16장 26, 27절 보게 되면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간격이 말씀이잖아요. 이 말씀이 어디 있는가 지금 성도 안에 말씀으로 자리 잡아요. 성도가 걸어다니는 성경책이어야 해요. 지킨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그렇게 하게 하심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그 뒤에 보세요. 그 뒤에 지옥 간 부자가 이런 이야기해요.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31절에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네 동생하고 똑같은 성질인데 받겠느냐 이 말이죠.
모든 인간의 특징은 짝이 없어요. 이거는 불의한 청지기로 이미 드러났어요. 불의한 청지기는 모든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나만 살면 돼요. 그걸 이제 여러분들이 간편하게 말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거침없이 뱉어버리고. 의리? 친구? 우정? 사랑? 다 거짓된 겁니다. 그리고 거짓이 아닌 진실 있느냐? 없어요. 오직 거짓뿐이에요. 그러면 이 세상 진실이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뭐냐? 거짓의 변주곡. 모차르트 변주곡.
그걸 아주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민화투라고 해요. 민화투. 민화투, 고스톱, 섰다, 짓구땡. 48장의 화투로 변주된 겁니다. 민화투. 이거는 숫자계산해서 하는 거고요. 고스톱은 그것 가지고 변주해서 섰다 안 섰다 하는 것. 전 할 줄 몰라요. 그 다음에 섰다는 뭐냐 하면은 두 장 두 장 해가지고 더하기해서 앞자리 빼고 뒷자리해서 누가 높으냐. 세상의 인류의 문화의 변천,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피해자로 만든 변주곡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주신 것 가지고 불의하게 써먹는 변주곡이에요. 자기가 고독한 절대자, 악마의 품성을 받은 절대자로 등장하는 이 시대. 아무도 신자 없고 아무도 천국 갈 사람 없습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15장 16장 계속해서 한 가지 주제가 뭡니까? 잃어버렸다는 거죠. 잃어버린 거에요. 그것도 영원히 잃어버린 거에요. 찾고 안 찾고는 누구 소관이다? 찾아오시는 피해자 소관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나 자신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 피해자가 찾아오면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바로 간격이에요. 벌어져도 너무 벌어졌어요. 어떤 노력을 해도 너는 나에게 갈 수 없고 너는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런데 갈 수 없는 곳에 오지 못해요. 오지 못하는 대신 주님의 방법은 뭐냐? 주님의 묘책은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죄 있는 육신으로 오면 올 수가 있는 거에요. 대신 처참한 죽음을 감당해야 됩니다. 쓴잔을 감당해야 돼요. 자, 그것이 바로 언약의 주인공인데 그런 방식은 구약 때부터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은 킬리만자로 표범에 나오는 제일 끝에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지금 이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특징은 짝이 없다는 거에요. 민중 속에 군중 속에 있어도 짝이 없어요. 가족끼리 하하 웃으면서 티비 봐도 짝이 없어요. 나뿐이에요.
바깥에서 돈 벌어온다고 유세 떠는 남자들 하는 품세 보세요. 여자는 집에서 살림한다고 아주 개무시하고 지는 돈 벌어온다고 해가지고 퇴근해서 쇼파에 앉아서 리모콘 줘. 발을 들어요. 발을. 저쪽! 다 그렇진 않겠지만. 그러다가 다리몽둥이 부서집니다. 이쪽 말고 이쪽. 그런 남편이 아내보고 뭐라고 하느냐. 내가 너를 키워줄게. 의리! 너는 내 식구 내가 목숨 바쳐 내 식구, 내 자식, 내 마누라 못 지켜줄까봐. 의리 하다가 주식 몽땅 망해라.
예수님은 그거 아닙니다. 종으로 왔어요. 종으로 오셨다고요. 그 예가 어디 나오느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시편 51편 나옵니다. 남자들의 그 허세, 아휴 정말 입만 떼면 허세 입만 떼면 허세라. 그 주둥이를 매우 쳐라 하고 싶어. 남자가 돈 벌어다주는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종이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왜 유세를 떨어. 나 고생하는 줄 알아? 자식을 위해 고생하는 게 아니라 지 자신을 위해서 고생하지.
시편 51편에 보면 이스라엘 왕은 죄인 되어야 해요. 이게 비밀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죄인 돼야 돼요. 죄인이라도 그냥 도둑질하는 횡령죄인 정도가 아닙니다. 철저한 죄인. 여기에 대해서 다윗이 자기의 의인성과 자기의 윤리와 양심이 자기 죄인 되는데 가로막지 못합니다. 방해 될 수가 없어요. 밧세바? 이쁜데 어떡해. 이쁜면 끝난 거에요. 이쁘면.
어떤 남자 사귄다 해서 여자 집에서 데려왔는데 여자 아버지가 맘에 안 들어요. 갈라서라. 헤어져라 백날 해도 한번 꽂히면 못 말립니다. 애 낳았어요 이러면 완전히 아침드라마. 막장 나와버려요. 좋다는데. 너 후회한다 백날 해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좋은데 뭐 좋은데. 그냥 밀어붙이죠.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고 이 세대에 내가 좋다는데 어떡해. 내가 좋다는데. 못 말립니다.
객관식을 내겠습니다. 객관식. 다윗이 왜 밧세바를 좋아했는가? 1번 신하의 부인이라서. 만만해서. 2번 앞태가 예뻐서. 3번 뒷태가 예뻐서. 몇 번입니까? 3번. 무슨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유. 뒷태가 예쁘다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모든 게 말씀대로 되는데요. 무슨 짓을 해도 말씀대로 된다 하면 되니까. 킬리만자로 표범보다 훨씬 낫다.
밧세바는 예수님과 짝이에요. 밧세바는 예수님과 짝입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의 말씀처럼. 밧세바는 희생자의 아내죠. 희생자의 부인. 그러니까 다윗으로 하여금 밧세바를 겁탈했을 때 다윗은 혼자 몰랐어요. 그러나 주님은 알았지요. 반드시 그 다음 살인사건이 준비되어있다는 사실을. 간음을 넘어서서 살인사건까지 가는 거에요. 모든 산을 넘어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디로 이끄느냐 하면은 십자가로 이끌어요. 십자가로.
너 죄 지어서 이 분이 죽었다가 아니라 이 분이 이 예수님이 죽은 것을 위해서 너는 죄를 지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시편 51편에 4절에 내가 누구한테 범죄 했죠? “주께만 범죄 했다” 아 이거 현실법정에 서면 가중처벌 받아요. 이 뻔뻔함에. “피고한테 할 말 없나?” “없다.” “그러면 너 누구한테 죄 지었는데?” “주께만 범죄했다.” 어느 판사가 듣고 가만 있겠습니까? 10년 때리고 20년 때리죠.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오니”
내가 사람의 아내를 건드린 게 아니고 내가 주님의 아내를 건드렸습니다. 주님의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5절에 나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것. 다윗은 무엇의 자식이냐? 분열의 자식입니다. 차이의 자식입니다. 무엇과 무엇의 차이냐?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은 한사람 밖에 없어요. 여자의 후손 누굽니까? 예수님지요. 그 다음 나머지 모든 자는 누굽니까? 뱀의 후손. 그 차이에서 나온 자식이 다윗입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자식이죠.
그러면 다윗은 뱀의 자식인데 왜 구원 받느냐? 다윗이 구원받는 것은 뱀의 자식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말씀의 자식으로 전환됐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언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모든 말씀이 그 다윗에게 집중해서 적용돼야 됩니다. 왜? 다윗의 위치가 자리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주님이기 때문에. 메시아 자리거든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야 됩니다. 그 자리가 인수인계되어서 마감된 자리에 예수님이 다윗에게 일어난 모든 예언들과 말씀을 혼자 껴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홀로 부활하셔서 부활한 그 모든 그 성과를 성령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줘버리죠. 그걸 가지고 영의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성령에 속한 사람이에요. 로마서 8장과 고린도전서 2장 끝에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영의 사람의 특징은 뭘 아느냐? 인간은 아무리 육에서 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백날 해봐야 육에서 나온 것은 어디로 마감된다? 육에서 마감되죠. 아까 스핑크스 신화 봤지요. 그 신화를 만들고 신화가 유행되고 신화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은 그래도 동물 보다는 낫잖아 이걸 가지고 인간은 스스로 서로서로 위로 받으면서 살아가는 거에요. 동물보다 낫잖아. 그러니까 이 세상 위로 받을 것은 누구 밖에 없다? 사자? 아니. 독수리? 아니 믿을 건 누구밖에 없다? 우리들 인간밖에 없다. 인간밖에 없으니까 인간들끼리 지혜 모으고 단결하고 노력해서 우리 인간들 살기 좋은 세상 만드세.
그게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짓한 거에요. 이방민족의 신들 섬기면서. 이방민족 바알신의 특징은 인간과 거래, 대화가 되는 신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 속에 뭐를 남깁니까? 희생자를 남겨요. 그 희생자가 뭐냐? 선지자요 제사장들이에요. 경건한 자들이죠. 특히 선지자들이죠. 모세 같은 사람들. 백성들 약속의 땅 보내기 위해서 자기는 빠지잖아요. 왜 빠집니까? 희생 없는 약속은 없기 때문에.
너를 인도했던 모세가 못 가는 덕으로 너는 들어간다는 거에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모세를 죽였던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너희가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그럼 모세는 왜 못 들어가게 하는가? 약속의 땅 못 들어가고 죽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질내게 만들었어요. 무슨 성질? 억지도 진짜 이런 억지 없다고요. 전에 바위를 칠 때 지팡이 가지고 바위를 쳐서 물 냈잖아요. 모세가 첫 번째 물 낼 때.
그러면 두 번째는 주님께서 매뉴얼을 이야기 안했다고요. 가만 있는 거에요. 가만 있으니까 모세는 인간이라 인간은 항상 과거의 지식의 정보를 가지고 현재에 써먹거든요. 처버린 거에요. 치니까 그냥 가리켜야지 왜 쳤느냐? 그럼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잘 할께요. 나오잖아요. 왜 살인했느냐? 왜 도둑질했느냐? 왜 간음했느냐? 왜 우상 섬겼느냐 할 때 우리는 즉각 반응이 뭡니까?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아니야 잘하지 마. 그냥 망해.” 결국 이 말은 뭐냐? 율법은 뭐냐 하면은 벗겨내는 거에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향나무 연필 갖는 게 소원이었어요. 향내 나는 연필. 다른 나무는 연필 깎다 보면 연필 다 날라가요. 하도 질이 안 좋아가지고. 깎다가 겨우 몽땅 연필 하나 건질 정도로 질이 안 좋아요. 향나무는 냄새부터 달라. 향이 나면서. 이렇게 연필이 육각형으로 굴러가지 않기 위해서 있는 거에요. 있는데 심이 숨어있다고요. 옆을 깎아내잖아요.
거짓된 것을 깎아내는 거에요. 거짓을 깎아내면 진리가 와서 박혀서 이 깎아내는 이 아픔을 심지가 온 몸으로 다 받아내야 돼요. 우리아의 죽음이 다윗을 살린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밧세바와 헤어지지 않지요. 당신 남편 때문에 나 살았다. 당신의 이스라엘의 자리는 죽은 자의 자리에요. 우리아가 이스라엘 왕이고 우리아가 이스라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아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장합니다.
이 말은 진짜 왕은 누구다? 여호와 하나님이죠. 그게 그 구조가 그대로 신약에 들어옵니다. 우리 보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지요. 이거는 우리 보고 ‘너는 죽었어’ 이런 뜻이에요. 같이 맞먹어 라는 뜻이 아니고. 너는 너 살아가면서 모든 것은 육체의 소욕을 벗겨내면서 뾰족한 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라는 그 까만 심지를 드러내도록 이런 상황들을 만들어 줄게. 그때 시편 51편이 비로소 이해될 것입니다.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옵소서” 안 쫓겨가니까 자신만만하게 이런 이야기하는 거에요. 안 쫓겨가니까. 뭐냐 하면은 나는 나보다 더 소중한 짝이 내 앞에 그분이 격차를 넘어서서 지옥과 천국의 간격을 넘어서서 나와 동일한 죄인의 모습으로 짝이 되려고 오셨다. 내가 지혜가 아니라 그분이 바로 지혜고 그 지혜가 있는 사람은 영원한 나라 또는 영원한 처소가 그 지혜의 몫으로 장만했다는 사실이죠. 그게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앞에 여러분들이 7절 8절에 보면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우슬초가 뭐냐? 희생자의 피를 적셔서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그러니까 한번 보세요. 내가 모친의 죄 중에 잉태했지요. 그럼 시커먼 심지지요. 시커먼데 여기 7절에 보면 뭡니까? 시커맸다가 뭐 됐어요? 하얗게 된 거에요.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를 적용시켜서 성령께서 시커먼 우리를 뭐로 만든다? 하얗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네 속에 말씀 완성 들어있다 그걸 알려주는 거에요. 그 기능, 그러한 유형의 기능들 그게 성도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지키라가 아니라 교훈 받아라가 아니라 알아서 하라가 아니라 십자가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십자가 완성된 상태에서 반복해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지옥 간 부자의 다섯 형제들은 자기 앞에 있는 말씀 모르면 거지 나사로 밤중에 찾아와도 내쫓아버려요. 자기 형이 무시하듯이 거지 나사로 오게 되면 휘황찬란하게 올 줄 압니까? 또 거지꼴로 오지요. 거지꼴로 온 것을 부자가 못 알아보듯이 그 형제의 동생들도 나사로가 부활해서 와도 구라떨지마 거짓말하지마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 거짓말하지마. 이런 식으로 내쫓을 거 뻔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나 부활도 말씀에 담겨서 우리에게 십자가 부활만 오는 게 아니고 십자가 부활을 드러내는 그런 보조적인 말씀이 오늘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실 때 누가복음 16장 되셔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하신 말씀을 모두 거두어서 예수님 자신이 홀로 이루신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지적할 수도 있는데 불의하다고 심판할 수 있는데 오히려 지혜롭다고 건져주시는 짝으로 오신 짝이 되신 주님을 항상 관심 두고 자랑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관심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