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사람 아닌 공간

아빠와 함께 2023. 5. 23. 15:30

강남-누가복음 16장 29절 (사람 아닌 공간) 230050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6장 19절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렇게 19절부터 시작하지요. 30절에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처음에 이야기가 한 부자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신 거에요. “한 부자가 있는데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어떤 부자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뭐냐? 이 부자와 아브라함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거든요.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이야기하시는 그 취지가 뭐냐 하면은 너와 아브라함과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이웃집 사람하고도 관련이 없는데 남의 나라 아브라함과 우리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 언제 봤다고요.


아브라함과 우리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우리 쪽에서 그것을 확인하거나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호화로이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열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브라함과 관계없어서 지옥 갔다 지금 이 이야기하시거든요. 아브라함과 관계없어서 지옥 갔다는 거에요. 그런데 앞집에 어떤 거지가 있는데 그 사람은 아브라함과 관계있어서 아브라함 품에 천국에 갔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왜 내 운명이 나의 행함과 무관하고 관계없고 왜 생뚱맞은 아브라함과 왜 관련이 있지요? 윤석열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없잖아요. 인간은 자기 빼놓고 관계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날마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상관있을 경우에는 자기를 경유해서 상관하지요.


그래서 여기 너와 아브라함과 관련성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과 인간이 상대하는 것,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상대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여기 19절에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날마다 부자가 파티를 열어서 사람들을 초청하고 흥겹게 놀잖아요. 신나게 놀지요. 그러면 이 부자는 지금 하루하루를 누구하고 상대하고 있는 거에요? 사람하고 상대하고 있지요.


그런데 거지는 누구하고 상대하지요? 거지는 상대하는 게 있지요. 개와 상대하지요.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사람하고 상대해요.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아브라함과 상대하는 것을 방해하는 거에요. 막을 형성해버리는 거에요. 사람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누구하고 상대해야 된다는 생각을 우리가 막혀버리는 겁니다.


아브라함하고 상대해야 될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하는 거에요. 그리고 천국은 누구하고 상대해야 천국 간다? 나사로가 어디 품에 안겨요? 아브라함 품에 안기죠. 평소에 아브라함하고 상대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어떤 공식이 하나 또 나오는데요. 공식 제가 만든 거지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일부다. 아브라함의 일부에요. 아브라함 뒤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계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사로의 이름으로 지상에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옛날 사람 아닙니까. 관계하고 싶어도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막벨라 굴에 시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확장, 연장 시키는 방식 중에 하나가 거지 나사로를 그 시대에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투입시킨다는 거에요. 역시 비유입니다.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을 투입시킨다는 거에요.


여기서 비유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비유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실제입니다. reality 또는 real. 비유의 반대말이 실제가 되는 이유가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잘 들으세요. 비유의 내용은 실제가 하는 모든 내용을 뒤집어서 표현해요. 뒤집어서. 뒤집는다. 뒤집어서 표현한다. 이게 비유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실제는 인간은 몰라요. 모르는데 모르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방법이 뭐냐? 비유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딱 이야기하면 그거는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 던지는 함정이요 미끼에요. 덫이에요. 비유를 딱 이야기하니까 “아! 나 알아챘어”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이걸 뒤집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모르고 인간들은 그 비유의 내용을 그들이 갖고 있는 현실의 내용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려요.


그래 그동안 이 비유에 대해서는 몰라도 나머지는 알고 있었는데. 추가적으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네. 이거 괜찮은 정보네. 이 정보 기존에 있던 것에다가 같이 추가하면 내가 천국에 대해서 보다 많은 지식을 확보할 수 있겠다 해서 예수님의 비유를 그들이 살아가는 지식에다가 그 옆에다가 이렇게 축적이 연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이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뜻을 모르는가를 들추어내는 거에요. 그러면 이 비유를 실제에 있는 감추어있지만 실제로 있는 인간 현실에다가 비유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요소를 여기에 담았느냐 하면은 금지요건이에요. 금지요건을 담아서 비유로 이야기해버립니다. 금지. 넘어오지 마.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거지 나사로, 부자 이야기의 특징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서로 대치되어 있다는 거에요.


거지는 이쪽으로 못 건너가고 부자도 저쪽으로 못 건너가는 것은 장벽 기능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장벽 기능. 장벽 기능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금지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특징이 금지가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는 할 때까지 해보는 거고. 목성을 가든 토성을 가든 막 쏴 올리는 거에요. 계속 개발하고 연구하고 발전하고 진화하고 발달하고. 끝? 우리한테 끝이라는 말하지 마. 끝은 없어요.


끊임없이 호모 사피언스니까, 지혜자니까. 지혜자는 끝을 용납하지 않아요. 끝이란 말은 인간 우리 지혜자한테는 그지없는 모독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요. 모독적인. 끝이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끝이라 하는 것은 우리 사전에는 그런 거 없다. 포기는 없다. 그냥 가긴 가는데 어떻게 가느냐? 협력해요. 협력. 협력할려면 누구와 누가 만나야 해요? 인간과 인간이 만나야 하지요.


그런데 인간과 인간 만나는데 거기 거지 나사로 만나줍니까 안 만나줍니까? 거지 나사로는 개가 만나준다니까요. 거지 나사로는 안 만나주지요. 아브라함의 일부가 뭐냐? 거지 나사로에요. 비유 속에 있는 거지 나사로의 등장은 너희들이 하는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금지했다는 그 요건에 충실하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만나자. 의논하자. 협력하자. 짜내라 지혜. 지혜 짜내고 아이디어 좀 내봐. 창의성 없어? 창의성. 창의성을 좀 개발해봐. 창의성을. “사장님, 그 창의성은 베낀 건데요. 특허난 건데요.” “우리 회사에서 돈벌이하는데 금지는 없어.” 금지가 없어요. 이게 왜 거지 나사로가 왜 덫이 되느냐 하면은 부자의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은 앞집에 사는 거지 나사로 봤을 거 아닙니까.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왜 그렇게 사노. 몸까지 아프네. 돈도 없고. 나 같으면 죽는다. 자살하지 왜 살지. 가자 우리 파티 하러 가자.” 간다고요. 그들이 뭘 놓치느냐 하면은 그들은 사람과 사람을 보잖아요. 거지 나사로가 설치된 의미는 공간입니다. ‘공간’. 사람이 아니에요. 공간이에요. 어떤 공간? 사람이 있어도 없는 공간. 빈 공간을 거지 나사로를 대변해서 딱 부잣집 파티 앞에 설정을 한 겁니다. 미리 만난 천국과 미리 만난 지옥이에요.


이게 거지 나사로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미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주님께서는 공간 대 공간으로 만남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인간이 잘못된 게 아니고 공간 자체가 폐쇄되고 갇힌 공간이야 라고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거지 나사로 집어넣은 거에요. 거지 나사로는 이 인류의 전혀 공헌을 할 수 없고 도움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 인간 공간에.


사람은 주님을 볼 때 그 뭐..신학적으로 예수님은 인간이고..(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고 공간이에요. 특수한 공간입니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 부활할 때 비로소 부활이라는 공간이 생기거든요. 인간이 죽고 살아나는 것은 소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아무도 부활 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아버지가 다시 살렸다는 말은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공간과 예수님과 공간을 분리시킨 거에요. 나머지 공간은 죽은 자들이에요. 죽은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요.


그래서 죽은 자는 부활을 탐내면 안돼요. 구원을 탐내면 안돼요. 구원을 기대하면 안돼요. 그러면 죽은 자들이 안돼요. 개인적으로 성질이 나쁘다 죄 졌다가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부활 될 수 없는 공간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기 아들 보냈다가 혼자서 빼내버린 거에요. 내 아들 예수는 너희들 공간에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첫 번째 부활. 부활의 첫 번째에요. 엘리야가 부활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려낸 그 사람들이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부터 처음 시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에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이렇게 구라를 떨어요.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 아닙니다.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 이동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해요. 못 가지요. 갈 수가 없지요. 못 갑니다. 공간 문제에요. 인간 세계는 그 예수님의 부활의 공간에 막혀있습니다. 신약 입장에서는 부활의 공간에 막혀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누가복음 16장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에 막혀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16장 19절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파티를 열었는데 해놓고는 뒤에 30절에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이 튀어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 22절에 보면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 밖의 공간과 아브라함 안의 공간으로 구분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강의는 이제 골치 아프게 생겼지요. 제가 강의 처음 할 때 물었어요. 아브라함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순신하고는 상관있어요. 다 같이 조선 사람이니까 관계있어요. 그럼 아브라함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있어요? 상관없지요. 젤렌스키하고 우리하고 관계있습니까? 상관없잖아요. 상관없지요.


상관없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아브라함에게 갈 수 있다? 없다? 갈 수가 없어요. 상관없기 때문에 못가요. 우리는 우리 아는 일가친척하고 관계하지 그 멀리 있는 아브라함 그것도 돌아가신 아브라함하고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나라 조상 아닙니까. 우리나라 조상 아니잖아요. 단군 아니잖아요. 성경은 단호합니다. 아브라함과 상관없으면 지옥 간다. 단호해요. 저 한국 사람인데... 그런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께서 궁금해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우리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그 상관관계 거기 연결되는 연결절차가 필요하겠지요. 그 절차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자, 오늘날 갇혀있는 인간 세계의 모든 사람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한국사람, 브라질, 미국사람, 우크라이나, 러시아사람 다 있어요. 있다 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관계있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 있는 현대인들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제가 아까 여러분들에게 힌트 드렸습니다. 부자 있잖아요. 부자. 이 많은 사람들 인간 세계의 공통점을 예수님께서는 공통점을 이렇게 언급을 했어요. 누가복음 16장 13잘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할 수 없다.


자, 쉽게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 쪽으로 봅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쪽에 있습니다. 이쪽은 뭐냐? 이쪽은 어느 쪽에 있느냐 하면은 재물 쪽에 있어요. 재물이 지배하는 쪽에 있습니다. 재물 있는데 금지할 법이 없어요. 그런데 이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하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이 세상을 계속 리얼리티 진짜 실제세계로 보는 거에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서.


이 세상은 뭔가 있다. 뭐가 있는가? 해와 달도 물론 있지 하지만 우리가 해와 달 상대할 건 아니고 대화도 안통하고 우리가 매일같이 만나야 할 것은 같은 인간만 있다 라고 그렇게 형성된 세계에요. 같은 인간만 있는 거에요. 그러니깐 인간들의 분류는 뭐냐? 나한테 좋은 사람과 나한테 섭섭한 사람 그 두 종류로 기준해서 인간과 만나거든요.


그런데 제 질문은 뭡니까? 아브라함과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고 했지요.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인데.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이에요. 살아있는 사람하고 만나가지고 뭐를 획득해야 돼요? 하나님과 재물로 분류된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편에 속한다면 나머지 모든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재물이 하나님처럼 통제하는 세계. 재물이 정신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세계. 그 세계죠.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가보면 거기에 뭐가 기다리고 있다? 돈이 기다리고 있는 세계. 돈이 기다리는 세계.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돈만 생길 수 있다면 그깟 수모 그걸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어요.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하나님 쪽과 재물 쪽으로 청군 백군 둘로 나눠버렸어요. 그리고 이 재물 쪽에 설명하면서 나온 게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였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몸부림치고 있어요.


뭐냐 하면은 돈으로 자기 인생을 해결하고자 몸부림친 사람입니다. 돈으로. 자기 돈도 아니고. 전에 있던 자기 사장님 돈인데 그 돈 자기가 횡령해가지고 몸부림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참 지혜롭구나. 네 한계를 아니까 네가 갇혀 있음을 아니까 네 장래가 암담하다는 것을 아니까 참 지혜롭구나. 불의한 청지기 말고 너희들도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좋은 곳에 갈걸.’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은 뭐다? 돈으로 사귄다는 말은 이 세상은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사람과 누굴 만난다?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 거에요. 아브라함 만나는 게 아니죠. 사람 대 사람을 만나서 친구 사귀어놓으면 내가 이 세상에 힘들 때 보탬이 되는 거에요. 그만큼 이 세상은 재물이라는 체제 안에 구조 안에 갇혀있는 그 구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빠져나올 방법은 없어요.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돼요. 둘 다 이거는 반칙입니다. 그거는 용납 안돼요. 한쪽을 해야 돼요. 한쪽 할 것도 없이 재물이죠.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선망의 대상, 참 성공했다. 나도 저렇게 돼야 되는데 내 인생은 저게 목표였었어 라고 누가 등장해야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내 숨겨진 내 인생의 목표도 거기 다시 노골화되지요. 바로 저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고 누가 등장해야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부자’.


그 부자가 그냥 구두쇠 부자가 아니고 돈 좀 쓰는 부자. 호화롭게 연락하고 날마다 파티 열어서 자기 사람들 끌어모으는 부자. 부자가 선망의 대상인 거에요. 부자가 선망의 대상이 됨으로서 인간들은 부자를 모독하거나 본인이 부자 아님에 대해서 시기 질투가 나가지고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네가 부자여도 네가 하나님 믿어?!” 이런 소리한다는 자체가 참 구차하기 짝이 없는. 차라리 질투심이 난다고 이야기해.


“그럼 너 하나님 믿고 거지할래? 하나님 믿고 부자할래? 어느 쪽이야?” “하나님 믿고 부자할래.” “거봐. 거봐. 두 주인 섬길 수 없다는데 둘 다 가질려고 반칙하는 거 봐.” 버릴 수가 없어요. 버릴 수가 없어요. 버릴 수가 없는 거에요. 버릴 수가. 따라서 이것은 재물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이 공간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은 나중에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이 집단 그대로 지옥 갑니다. 왜냐? 아브라함과 상관없기 때문에. 상관없기 때문에. 그럼 아브라함과 재물에 푹 젖어있고 돈에 미쳐있는 이 인간과 어떻게 만나게 되느냐? 그게 어디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율법입니다. 율법. 율법이에요. 이러니까 성경이 참 어렵지요.


갈라디아서 3장 8절부터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여기 아브라함의 복이 어디까지 도달하느냐 하면은 모든 이방인민족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도달하면서 복 받는 그 조건이 변질될까요? 그대로 갈까요? 여기 갈라디아서 3장 8절 9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복 받은 그 복의 원칙이 이방인에게서 달라질까요? 동일할까요? 동일하지요. 동일한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행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이죠. 행함은 대상이 없는 게 행함이에요. 왜? 내가 나를 믿는 게 행함이거든요. 행함은 믿음의 대상이 없고 행함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행함이라고 해요.


정리가 되셨지요? 예수 믿는 것은 행함입니다. 예수 믿는 나를 설정하니까 행함이에요. 믿는다는 것은 나는 이미 포기했다 손 들었다를 전제로 해서 믿음이에요.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 믿는 믿음을 나는 믿지 않겠다를 선언하고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처음 하나님 믿을 때 하나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었지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은 메시아가 아니니까요. 아브라함은 비유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아브라함의 두 아내는 비유거든요. 비유란 것은 실제의 내용을 인간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거꾸로 뒤집어버린다 했어요. 거꾸로. 아! 알겠네 가 아니고 막혔네. 금지됐네. 차단되어버렸네. 이게 비유의 기능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잉태되는 자고 하나는 잉태되지 않는 자다. 아 알겠네. 여자 하나는 애 낳고 여자 하나는 못 낳았으니까 뻔한 거 아니야. 이게 인간들이 바로 비유를 대하는 태도에요.


그런데 실제로는 뭐냐? 여자가 없다. 이 땅에 어떤 여자도 여자로 쳐주지를 않아요. 여자로 잉태한 것은 사람으로 쳐주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어디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어머니에요. 그게 비유에요. 그러니까 이 비유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 그것도 알겠네. 하늘이 우리 어머니 있네 라고 또 접근해 들어가겠지요. 누구 집 딸 누구 집 아들 이런 생각했어요? 저는 우리 어머니의 딸이에요. 그러니까 너는 어머니가 있잖아. 네 어머니가 있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지금 어떤 모순에 빠졌느냐 하면은 우리 어머니는 없어. 어머니는 하늘에 있어 라는 그 말과 연결이 안 되어버리는 거에요. 지금 말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뭐냐? 성령이 온다는 거에요. 이게 차라리 쉽지요? 성령이 온다는 말은 성령께서 뭐를 다 도려낸다? 내가 아무리 나를 안 믿는다고 우겨도 천 번을 우겨도 그 우기는 나를 내가 믿거든요. 우기는 나를. 이것도 어려우면 더 쉽게 할게요. 나는 결과물이다. 나는 결과물입니다.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만든 결과물이에요. 처음에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이었잖아요. 아브람이 뭘로 바뀝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지요.


아브람 때 아브라함은 없어요. 없는 인물이에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될려고 지어낸 거 없어요. 없는 인물입니다. 왜냐 하면은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이에 뭐가 끼어들었느냐 하면은 금지가 끼어들거든요. 금지가. 인간은 천국에 오지 못한다. 인간은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금지가 끼어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람은 아브라함에 이르지 못하고 어디로 뺑뺑 돌아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느냐?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고 약속을 이루어낼려면 그 약속의 결과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고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질 때 약속이 아브람 행함보다 더 쎄다. 더 우선이다 더 먼저였다는 것. 하나님 약속이 먼저였다는 것을 아브람을 통해서 실습시키고 그걸 제시한 거에요.


지금 제가 갈라디아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아브라함이 이방인들까지 확대돼요. 아브라함 자손들이. 확대되면서 430년 후에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17절 430년 후에 율법이 투입돼요. 430년 후에. 그러면 아브라함 복이 이방인에게 어떻게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 할 때는 여기에 그 전선이 통과하는 튜브가 있어야 돼요. 튜브. 둘러싸여 있어야 돼요. 서브웨이 알지요? 샌드위치. 먹어봤어요? 빵에 채소 집어넣는 것. 율법의 튜브 안에 통과하게 하는 거에요.


그럼 율법의 기능은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어요. 로마서 7장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죽은 괴물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율법이 꼭 430년 후에 투입이 돼야 돼요. 율법이. 율법. 모세 율법. 하라, 이건 하지 마라 하는 그 법.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십계명에 쭉 나오지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쭉 나오지요. 그 법.


그 법이 주어지면서 아! 법 지켜서 내가 하나님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법도 믿었으니까 이거는 믿음에다가 경건한 행함까지 추가했으니까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네 라고 생각하겠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믿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경건치 않음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완악입니다. ‘완악’. 고집 쎈 것. 교만을 말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걍팍. 걍팍함이에요. 씨도 안 먹혀요. 씨도 안 먹힌다고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씨도 안 먹힙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거에요.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에게 찾아온 그 부자청년이 본인은 굉장히 겸손해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거에요. 지금 주님 보시기에는 기가 찬 게 주님은 공간을 이야기해요. 공간. 너 부자청년아 네가 어느 동네에 놀고 있는가를 보는데 부자청년은 나를 쳐다봐요. 나를. 내가 이 법을 이렇게 지켰습니다를 바라봐요.


주님께서는 이게 저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저주를 더욱 더 저주로 확산시키는 기능으로 430년 후에 율법을 준 겁니다. ‘네가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를 좀 알고 죽어라’ 이 말이죠. 율법을 주니까 ‘나도 아브라함처럼 믿어서 복 받아야지’ 이러고 있는 사람에게 뭐가 왔습니까? 율법이 들이닥치니까 ‘아브라함처럼 복 받아야지’ 한 이 전체가 율법의 저주 안에 놓이게 되는 거에요. 율법의 저주 안에.


그러니까 거기서 뭐냐 하면은 그들은 나의 믿음이라는 것조차 나는 아브라함처럼 믿어야지. 행하지 않고 오직 믿어야지 하는 그 믿음도 율법의 점검을 받아버려야 돼요. 율법의 점검을. 율법의 점검을 받아 보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믿음은 1로부터 시작해서 2로 나가는 척 하지만 결국 1, 나에게로 돌아오는 그러한 자기 원칙에 해당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사람들은 성경보고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을 해버리는 거에요. 12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그들이 쓰는 모든 단어가 결국은 뭐냐? 주님에게 거부당한 이유가 이 율법의 저주 안에서 통용되는 단어, 믿음이라는 단어였고 복이란 단어였어요. 성경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1로부터 2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은 뭐냐 하면은 2로부터 1로 와서 1에서 2로 가는 이것을 성령을 통해서 줬습니다. 여기 2가 뭐냐 하면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란 두 분의 관계가 2가 됩니다. 믿었는데 두 분 생겼어요. 두 분이 등장합니다. 이게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 올라와서 혼자 올라와서 모리아 산에 제사드려라 양 한 마리 준비해와라” 이러지 않았죠. 누굴 데려갑니까? 아들 이삭을 데려가죠. 창세기 22장에 보면 거기에 참 슬픈 대화가 나와요. 22장 7절에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가슴 찢어지는 이야기를 자식이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스마엘 아들 있고 이삭 아들 있으면 누굴 잡겠습니까? 이스마엘을 잡을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이스마엘은 약속된 아들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생각한 타인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타인은 하나님이 지정해서 보내준 타인이어야 돼요.


그게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초청하지 않았어요. 죽은 아브라함을 왜 초정하겠습니까. 부자의 잔치 집에 거지 나사로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부자가 거지 나사로 초청할려고 만약에 그런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거지 나사로를 더 아프게 했을 거에요. 기어다니지도 못하게 만들었을 거에요.


창세기 22장에서 두 사람 올라갑니다. 둘 다 약속된 사람이에요. 약속된 사람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이 지상에 둘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둘이 가서 하나를 남기고 다시 둘이 되어버렸어요. 처음 올라갈 때 그 둘의 관계가 아니에요. 처음에 올라간 둘은 그냥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산 내려올 때 두 사람은 둘 다 살아 내려왔거든요. 큰일날 뻔했어요.


살아 내려온 두 사람 관계는 뭐냐? 하나는 희생양이 되어버려요. 희생양이 되는 겁니다. 중재자. 중보자. 매개자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바로 율법을 통해서 금지를 뚜렷이 만들고 그 금지를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은 위인은 이 갇힌 공간에서는 어느 누구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어느 누구도. 돈에 미쳐있는데 재물에 미쳐있는데 어느 인간이 가겠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네가 영원한 처소 영접한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럼 여기서 다 백지냐? 도로 취소되느냐? 주님께서 공연히 한 말씀이냐? 이렇게 생각할거에요. 그때는 주님의 뜻을 보다 더 정밀하게 알기 위해서는 또 다른 비유가 있어요. 또 다른 비유가 있는데 그게 누가복음 12장을 잠시 보고 다시 16장으로 돌아와봅시다. 누가복음 12장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3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되어있지요. 이건 비유 아닙니다.


그 다음에 16절에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이렇게 시작되는 거에요. 지금 16장에 나오는 “한 부자가 있어” 하는 이것도 비유고 12장 16절에 나오는 한 비유로 하는 이것도 비유고요. 비유. 그럼 비유는 고발의 취지가 있지요. 고발의 취지. 고발한다는 것은 정신 차리고 깨달아 넘어오라는 말이 아니에요. 금지를 금지로 계속 확정 짓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복음 12장에서 도대체 뭘 금지하느냐? 지금 이 부자 된 농부가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해요? 19절에 내 영혼에게 이야기하지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 세계에서 재물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영원한 친구는 뭐다? 돈이다. 돈이 영원한 친구였어요.


그러면 사람이 사귀고 만나는 것은 뭐냐? 영원한 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타인을 이용하는 거죠. 남을 이용한 겁니다. 이는 인간이 이미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굳이 부자가 지옥 가지 않더라도 이미 지옥의 내용은 부자가 다 꽉 채우고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옥 간 부자의 특징은 뭐냐? 여전히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서 입도 안 열어요. 누가 대신 이야기해줍니까? 아브라함이 대신 이야기 해줘요. 아브라함은 중보자니까. 아브라함은 변호사에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이야기해줄게. 우리에게 변호하는 분이 계시니 성령께서 우리를 변호할 것이라. 가만있어. 가만있어. 내가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 그런데 부자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도 부자고 지옥 가서도 부자거든요. 부자 인성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살아있을 때도 지옥이고 살아있을 때 지옥인 사람이 죽어서도 지옥이고. 살아있을 때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도 죽어서도 언약 안에 있고. 그럼 뭐에요? 죽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은 별 의미없지요. 동일한 본질이 그냥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한다는 그 낙원. 천국인데. 그럼 천국은 뭐냐? 인간이 죽으면 그냥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누구냐를 보다 명확하게 해주는 공간일 뿐이에요. 인간의 죽음이라는 게. 그래서 이 말은 인간이 죽기 전부터 인간은 뭐냐 하면은 죽음체입니다. ‘죽음체’. 제가 만든 단어인데요. 여러분 이 죽음체하고 시체하고 달라요. 시체는 꼼짝도 안하지만 죽음체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죽음체라는 말을 굳이 해석한다면 죽음을 품은 채 활동하는 것. 더 줄이면 죽음의 활동이에요. 죽음체가. 죽음의 활동이라고요. 그러면 이 죽음의 활동은 낙원에서 금지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은 뭐냐? 천국은 똑같은 죽음체로 똑같이 적용하면 돼요. 천국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 그 자체.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가 천국이 돼요. 예수님 죽음 그 자체가.


우리는 이렇게 해요.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으니까 저를 천국에 보내 달라 이렇게 하지요.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의 중간으로 하고 천국가고 난 뒤에는 다리를 걷어차버리면 되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용해야 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내가 사람을 만나듯이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예수님한테 기도하고 해가지고 예수 십자가 피 믿습니다 하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못 자국, 창 자국 그 자체가 우리에게 덮쳐버려요. 그 자체가. 그 자체가 덮쳐버리면 우리는 내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겠다 하는 이것은 나 인간 자체는 죽음체이기 때문에 이거는 구원 대상이 아닌게 돼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구원 대상이 안 되는 걸로 들통내는 것이 뭐냐? 예수님 죽음 그 자체에요.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이기 때문에 성도한테는 어떤 기쁨이 있냐 하면은 성도의 어떤 도덕적 윤리적 행위도 문제 삼지 않아요.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일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은 밀어붙이고 앞장세워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것은 전부 다 버려야 되지요. 우리는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이렇게 덮친다는 생각을 못했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덮쳐버리면 켁켁켁 우리는 숨이 막혀가지고 내 생각을 할 여지가 없게 만들어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 들어가버리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냐? 그냥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조성한 주님의 죽음의 공간. 이 세상 사람이 보면 내가 있어도 없는 빈 공간이 되는 거에요.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무능하고 극히 무능하고 극히 뭘 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돈도 없지 몸 아프지 완전히 어떤 것도 해낼 수가 없는. 개가 와도 저리가! 할 능력조차 마비되어 버린.


인간으로서는 이 재물 좋아하는 인간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그 누구도 거부하고 싶은 인간. 그것이 바로 주께서 내세운 금지의, 네가 천국에 못 온다는 금지의 싸인이고 표징, 표시입니다. 표시입니다. 여기까지. 부자야 너는 거지한테 오지 마. 너 자리는 거지한테 못 오는 이것이 하나님께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천국을 가로막는 막을 살아생전에 이미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막을 쳐버렸어요. 고랑을 만들었어요. 건너올 수 없도록.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6장 29절 (사람 아닌 공간) 2300509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한번 정리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옛날 사람이죠. 아브라함이 옛날 사람이란 말이죠. 옛날 사람. 아브라함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낙원에 같은 인간이 왜 나사로가 인간 품에 안기고 왜 부자는 단지 아브라함 품에 안기지 않아서 지옥 가거든요. 쉽게 말해서 부자야 너는 왜 거지 나사로를 아브라함의 일부로 못 받아들이느냐를 지금 주께서 닦달내고 있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금지를 확대하고 보편화시킨다고 보면 돼요. 금지를 확대하고 보편화시키는 거에요. 보편화시킨다. 확대해서. 어디까지? 이방인에게까지 전부 다. 이방, 이스라엘 전부 다 확대시켜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민족에게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망해버렸던 그 원리 원칙을 그대로 이방인에게도 예외 없이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에요.


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어겼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망한 걸로 알지요. 이게 이스라엘을 통과한 그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이 모세 언약이 이방인에게까지 가버리면 나오는 결과는 확정되었어요. 뭐냐 하면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섬겼기 때문에 그래요. 재물을. 그래서 지옥 간 대표자로 부자를 내세우는 거에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언약의 내부에는 금지의 요소를 지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확대시켰다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내가 소실되고 해소가 되어버려요. 해소가 된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없어진다는 뜻이에요. 덩치 큰 강호동이 나하고 씨름하는데 나한테 덮쳐버리면 헥헥 거리면서 내가 거기서 해소되고 소실되어버려요. 그 코끼리 같은 등치에 깔려가지고.


그런데 만약에 강호동 등치가 나하고 비슷하다면 나는 강호동한테 잘해보든지 이기든지 사귈려고 깝죽댈 거란 말이죠.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내가 잘해줄게요. 내가 어떻게 섬기면 됩니까? 이 깝죽댄다는 말은 아직까지 큰 등치에 안 뭉개져서 그래요.


뭉개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이여 어떻게 살면 됩니까? 기도는 어떻게 하면 되고 헌금은 어떻게 하면 되고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거는 아직도 자기가 미꾸라지처럼 살아있어요. 자기 자신이. 이게 한번 뭉개져봐야 아~~ 내가 그런 요구가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주님 이용해서 내 사랑을 질질 끌고갈려고 하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번에 들통 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식이냐 하면은 주님의 죽음이 오게 되면 내가 세운 법칙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거는 나쁜 일이고 옳은 일이라고 하는 그 모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불붙은 화산의 분화구에다가 집어넣어버려야 돼요. 주님의 죽음 속에 다 집어넣어버려요. 그게 필요치 않거든요. 내 삶의 원칙은 이렇고 삶은 이렇게 하고 어떻게 하고 그것 자체를 주께서는 그걸 요구한 적이 없어요.


거지 나사로가 뭐했습니까? 거지 나사로가 뭐했어요? 평소에 아팠지만 기도했다 뭐 그런 거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거지 나사로는 그냥 아팠고 그냥 가난했을 뿐이고 개가 와서 친구삼아 핥았을 뿐이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반면에 부자는 바빠. 굉장히 바빴어요. 잔치 벌린다고 백화점에 옷 사입는다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날마다 갈아입고 파티 연다고 바빠요. 거지 나사로는 하나도 안 바빠요. 바쁠 건덕지가 있어야 바쁘지. 아무것도 바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16장 19절에서 31절까지 보면서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거지 나사로 생각하지 말고 부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가 그것만 찾아보면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이 부자의 생각을 금지했는가. 이제부터 부자의 생각에 들어갑니다. 부자의 생각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어요. 인간에게 있어 진리란 욕망과 관련되어있다.


인간은 진리를 욕망해요. 그래서 문제에요. 인간이 진리 알아서 뭐하는데? 지금 예수님의 그 죽으심을 앞장세워 쳐들어올 때 그걸 아까 아브라함 언약의 확장이라고 했어요. 확장.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된다는 사실을 그전에 상상도 못했어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내 손으로 내 아들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에요. 왜 굳이 나에게 그런 짓을 시키는지 알 수 없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가장 귀한 진리를 인간의 욕망의 생산물로 간주해요. 진리를. 내가 진리를 안다는 것, 쉽게 말해서 내가 복음을 안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 이거는 하나님께서도 굉장히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되겠지요. 아닙니다. 그거 욕심이에요. 욕망의 하나의 결과물이에요. 욕망의 하나입니다.


그냥 죽어지면 되는데 왜 그걸 생각하지요? 내가 죽기 싫어서 예수 믿는 거에요. 내가 죽기 싫어서. 뭔가 예수 믿으면 좀 더 살려줄까 싶어가지고. 죽기는 싫고 지옥가기는 싫고. 누가? 내가. 남 말고 내가. 주님 시키는 대로 진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진리는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진리는 우리를 없애는 게 진리에요. 주님의 금지하심이 진리에요. ‘너 오지마’가 진리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에베소서 5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주님이 우리를 뭐로 간주해요? 아까 죽음체라고 했지요. 죽음체. 시체로 간주하는 거에요.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다시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은 금지의 막이 있는 한 우리는 천국에 못갑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 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거에요. 우리가 간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늘나라 아브라함 언약 공사를 한 거에요. 공사를. 공사하다보면 내 속이 시끄러워. 왜 시끄럽나 보니까 내 안에 아브라함 언약 공사하고 있어요. 내가 기획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기획하는 것은 부자 되기에요.


그러나 주님의 기획은 뭐냐 하면은 우리를 거지 나사로 만드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너 잘했어 너 훌륭해 너 열심히 했어 가 아니라 네가 속한 공간은 네가 예상 못한 공간이라는 거에요. 네가 속한 공간은. 이런 공간이 어떤 공간인데 도대체 내가 이 땅에서 하여튼 어떤 경우라도 그걸 일체 인정하지 않는 오히려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그 희한한 공간을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내가 한 일체에 대해서 의미 주지 않는 공간.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게 뭡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잖아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어느 쪽에서 어느 쪽을 믿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쪽에서 하나님 찾아갔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밀고 들어갔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밀고 들어갔잖아요. 모리아산에서 제사하는 거 자기 아이디어 아닙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 가정에 관여했어요. 관여했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둘 다 죽어. 둘 다 죽어. 이삭이고 뭐고 둘 다 죽어버려 이 뜻이란 말이죠. 언약의 확대라는 말은 인간이 하는 것에 대해서 일체 그걸 안 받아주고 그것에 대해서 의미주지 않는 죽음, 특이한 죽음, 특이한 죽음이 통치하는 세계. 그 세계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세계. 바로 그 언약의 완성이 하는 것이 십자가의 세계, 천국입니다.


결국 거지 나사로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이에요. 예수님 본인. 왜? 아무도 안 오니까. 아무도 자기를 선택 안 할 거니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서라”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꿈은 해석이 있을 경우에만 현실이 된다 했지요. 우리는 지금 꿈꾸고 있습니다.


여러분 좀 어려우시더라도 저렇구나 하고 그냥 들어주세요. 한번 적어볼게요. 온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있어요. 온 우주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가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수가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내가 다룰 수 없는 내가 손댈 수 없고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리 고리의 연결고리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겁니다. 온 우주가 서로 연결되어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나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우주의 작품이에요. 나의 코, 눈 뭐 이런 거. 우리는 언어적 습관이 이래요. 나는 눈으로 본다. 보통 이 말을 우리는 옳다고 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눈이 나를 통해서 본다 이게 정답이에요. 눈이. 왜냐하면 눈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눈이 내 주인이에요. 나는 눈의 똘마니에요.


이걸 이야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쓴 사람. 들어봤습니까?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 인간 속에 DNA가 주인이라는 거에요. 인간의 눈과 코, 귀는 우리 몸이 본다라는 기능 때문에 눈이 박혀있고 씹는다는 기능 때문에 이가 있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의 세포가 허약하다는 것 때문에 보약 먹어야 돼. 허약해. 그게 뭐냐? 동양의학 아닙니까. 한의학 아닙니까. 한의학에 내가 있습니까? 없어요.


한의학은 인간의 물체는 자기들끼리 의논하고 회의하고 다해요. 자기들끼리. 자기들끼리 의논해요. 막 기가 흐르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 기가 무슨 기냐? 우주의 기에요. 우주의 기. 내가 듣는 게 아니고요 귀가 들어요. 귀가 들어놓고 우리 두뇌에서 대표자 세워야죠. 내가 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나는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귀, 눈, 코의 집합체에 불과한데 나는 어느 부분에도 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기분대로 온도, 습도 따라서 생각과 기분이 다 달라져요. 그때그때 다 달라져요. 짜증난다? 마사지 받으세요. 마사지 받으면 기분 좋아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신, 영혼 자꾸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영혼 그것은 후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거고 실제는 우리 몸은 우주와 소통이 되고 있는 연락체제 하나의 모나드, 하나의 단자들의 집합체에요. 그냥.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동물도 그렇고.


그래서 뭐냐 하면은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나의 육체는 주님의 살갗이다. 살갗. 다시 말해서 우리는 피부에요. 피부. 피부를 오려서 이렇게 책상에 피면 평평해 지지요. 여기에다가 습도에 바람 불고 그리고 세월 지나가게 되면 이 세포가 자동적으로 노화되잖아요. 그걸 다시 뭉치면 우리 몸이 돼요. 몸이 되는 거에요. 그리고 나중에 죽으면 다시 흙으로 분해되는 거에요. 이거는 성경에 너무 많이 나와서 찾아본다는 게 이상할 정도에요.


그런데 그런 ‘나’가 왜 자꾸 나를 고집하느냐. 그것은 배후의 악마가 너라는 것을 자꾸 이렇게 없는데 허구로 만들어가지고 우리는 악마의 아바타거든요. 악마의 자기 얼굴을 인간 얼굴로 대체해가지고 자꾸 이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게 하는 거에요. 내 중심으로. 그걸 인간들은 뭐냐? 진리라고 하는 거에요.


인간은 뭐냐 하면은 피부껍질이거든요. 피부껍질. 그걸 모르고 인간은 자아를 만들어놓으니까 인간이 거울보고 나오는 내 모습 있잖아요. 자아를 해가지고 여기서 점점 더 확산시키고 확대시켜나가는 거에요. 확산시키고 확대시켜나가요. 우리 외손자가 있어가지고 아침에 제가 학교에 데려다주는데 자기 관심사 이야기를 해요. 9살인데 무엇에 관심있느냐 하면은 우리 아버지가 어린애들 먹는 우유를 마시는 게 그게 굉장히 우습다는 거에요. 그게 우크라이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우크라이나하고. 아니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까 식사 시간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둘이 결혼했는데 세상에 그런 사위 없다 참 훌륭하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직장 여성하고 16년 동안 내연관계였단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지고 3년 전에 헤어지고 자기 부인에게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지고 말한다. 사실은 16년 동안 직장에서 사귄 여자가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참 이 이야기 듣고 골치 아팠어. 내가 10년 동안 다른 여자하고 내연관계에 있다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냐 하면은 마치 여보 사실은 나 비밀이 있어. 어떤 비밀인데? 내가 오늘 치즈돈가스 먹었어. 그거하고 그거하고 수준이 같은 수준이에요. 자기 치즈 돈가스 먹은 이야기를 왜 합니까? 참 인간이 바보 병신도 아니고 그 이야기를 왜 해요.


그게 뭐냐? 자기 의에요. 자기 의는 어디서 나온다? 악마의 마지막 발목 잡는 것이 자기 의 입니다. 그렇게 솔직함으로서 내가 이혼은 당했지만 뭐는 남아있다? 나는 싸나이다. 그놈의 싸나이. 지옥 가라해. 그게 문제 거리가 됩니까? 그거 듣고 부인이 단번에 이혼했지요. 그 부인이 복음을 모른 거에요. 복음을 알면 이렇게 답변해요. 복음을 알면. 여보 10년 동안 다른 여자하고 내연관계였어? 여보 그동안 나를 안 버리고 이렇게 집에서 같이 살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주여 찬양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복음을 알아요. 이렇게 나와야.


제가 왜 이 말하느냐 하면은 이 세상은 진리를 원해요. 그 진리가 누구 중심 진리입니까? 자기 의를 여기서 확산 확대시키는 것. 이게 공간이거든요. 내가 있는 내 의를 확대시키면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신 거에요. 지금 내가 얼마나 의롭고 반듯하고 살고 바르게 살고 욕 안 얻어먹고 남 배려할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 그 모습이 바로 딱 지옥입니다.


왜? 그 사람은 뭘 추구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은 진리를 추구할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왜? 영생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추구하는 진리는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도 인간에게는 막혀있지요. 금지되어있지요. 그 다음에 길? 길도 없어요. 문? 문도 없어요. 그럼 성경은 뭐에요? 언약적으로 성경을 모든 것이 전부 다 막혀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하고 부자하고 살아 있을 때도 막혀있었고 죽어서도 막혀있는 거에요.


이제 남은 문제는 막힌 문제를 어떻게 뚫느냐 그 문제. 어떻게 뚫느냐? 맞교환합니다. 맞교환하는 거에요. 뚫는 방법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희생물이 나와요. 그 희생물인데 그 맞교환을 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은 사람은 못해요. 사람은 자기 의에 미쳐가지고 자기 진리 찾아서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구원받을려고 환장했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이 상대할 가치도 없어요. 내부에 있는 맞교환할 수 있는 그것을 중보자 또는 중재자 또는 매개자라고 합니다.


매개자라고 하는 것을 둘 사이가 떨어져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을 매개자 또는 중재자라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잃어버린 자가 돼요. 예수님 자신이. 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본인을 잃어버릴 사람이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절대로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못 먹어도 고에요. 지옥 가도 자기를 포기 못합니다. 지옥 가서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를 위로해요. 절대로 자기를 포기 못합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에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류가 생겨서 하자 있어서 그래요. 마귀가 물론 그렇게 했지요.


인간들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내 중심의 메아리를 댕~ 하고 종을 치면 종소리가 퍼지잖아요. 퍼져나가죠.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이 점은 비유에 속한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에요. 거지 나사로는 비유니까 감추어진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없습니다. 없는데 아브라함에서 댕~ 하고 퍼져나오는 파장이죠. 파동. 파동 그것이 바로 거지 나사로에요.


그러니까 죽었다는 말은 만났다는 뜻이에요. 죽었다는 말은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만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만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는 거지 나사로가 고무줄 딱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팅~ 하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요. 구원 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주님이 몸소 뭐하면 돼요? 거지 나사로 되면 되지요.


주님 오셔가지고 이 안에 오셔가지고 이 안에 공간을 만들어요. 공간에다가 성령을 집어넣으면 팅~ 하고 놓으면 여기 있던 주님의 지체들이 어느 품에 안기느냐 하면은 주의 품에 팅~ 하고 회기하는 주님의 품 안에 안기는 거에요. 이 품 안에 안길 때만 예수 안이 아니고 이 세상 안에서도 예수 안이라는 특이한 공간이 마련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성경에 나오는 의롭다할 때는 그냥 의롭다하는 게 아니지요. 어느 안에서 의롭다? 예수 안에서 의롭다. 네가 생명을 얻었느니라. 어디 안에서? 예수 안에서. 네가 성도로 부르심을 얻었다. 어디 안에서? 예수 안에서. 네가 십자가로 죄 사함을 얻었다. 어디 안에서? 예수 안에서예요. 내 공간 말고 예수 공간 안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공간 안에서 질식해야 되지요. 헥헥헥. 질식. 숨 쉬지말아야 되지요. 왜? 숨 쉬면 우리는 내 중심의 진리를 찾아나서게 되어있어요. 성경공부하고 착한 일하고 이만하면 됐겠지. 이만하면 됐겠지. 여러분 다 아는 상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E=mc2 다 아는 거에요. 에너지는 질량의 차이점에다가 광속의 제곱의 에너지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이 공식이 나와가지고 이게 원자폭탄의 원리가 나왔는데.


여기 보면 에너지라는 것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질량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질량. 질량이라는 것은 물체, 입자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게 인간 세계에서의 논리입니다. 뭔가 입자가 있어야 덩치가 있어야 움직여줘야 거기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거에요.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좀 더 연구해보니까 질량이 없어도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왜냐 하면은 광자라는 것은 질량이 없어요. 빛의 광자는. 질량이 없는데 에너지가 있거든요. 그 에너지는 뭐냐? E=pc. 파동운동량. 질량이 없어도 파동운동량 곱하기 광속하게 되면 에너지가 나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거지 나사로는 남들 보기에는 입자, 사물체,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사실은 아브라함의 파동이었다. 파동이었다. 이걸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간단하게 해요.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너희들은 예수님의 파동이 된다. 내 증인이 된다. 갑자기 뭐가 빠졌어요? ‘나’라는 질량이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께서 주신 조건 안에서 움직이는 거에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이죠.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고 이거는 지키는 겁니까? 지키지 않는 겁니까? 방금 범사에 감사하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이거는 내가 지키는 겁니까? 지키지 않는 거에요? 둘 중에 하나인데. 이게 지켜버리면 나한테 질량이 생겨 질량이. 내가 입자가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출발은 뭐로부터 하느냐 하면은 출발은 이번에 오전 설교에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유혹을 뭐한다? 생산한다 했지요. 유혹을 생산해야 우리 힘으로 우리 입자로 유혹을 못 이긴다는 것이 계속 확인돼야 돼요. 유혹이라는 것이 돈 유혹이죠. 결국 돈 아닙니까.


파혼해도 380만원 건졌답니다. 그럼 됐지 뭐. 고양이 키운다고 파혼했는데 700만원 썼는데 그 중에 380만원 건지면 됐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돈이 우리를 웃게 만들고 우리의 보상감을 느끼게 만들어요. 이거는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죄인을.


그렇다면 이 말씀 자체를 우리는 입자가 없어요. 우리를 입자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파동 되시는 주님이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죄인이라는 입자가 우리 안에 자아 속에 들어와있어야 된다니까요. 들어와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성도는 자유지요. 왜? 왜 그러느냐 하면은 나중에 죽으면 성도가 아쉬운 게 죄를 못 지어. 죽으면 죄를 못 지어. 아 죄 더 지을 건데. 그만 살다 와. 죄인이 있어줘야 그 다음에 옆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죄를 사해주시는 분은 누굽니까? 진짜 나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우리 주님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된다? 한분이 아니고 나 하나 주님2. 두 분. 사랑은 혼자하면 안돼요. 이건 인간들이 하는 짓이에요. 내 영혼아 농사 잘 되었으니까 즐기자. 이건 내 사랑이에요. 그 사랑에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는 그 사이를 파고들어갈 수가 없어요. 워낙 독해서. 내가 내 사랑이 그 인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자식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뻰치로 강제로 빼게하시는데 뭘로 빼게 하느냐 죄인 되게 해서 빼버려요. 죄인 되게 해서.


빼버리면 이 죄인이 누구냐? 오늘 본문에 누구냐? 부자. 다시 말해서 거지 나사로는 누구? 예수님. 부자는 누구? 나. 두 개 다 내 안에 있으면 나는 말씀의 사람이에요. 그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면 안 되지요. 입자 노릇은 주님이 해야지 우리가 지키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파동이죠.


주께서 말씀이 말씀되게 하게 되면 악인과 선인이 생기잖아요. 그 악인 생기는 그 역할 그 기능 댕~ 하고 파동 역할 우리가 하는 거에요. 이미 우리 안은 누가 접수했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이 접수해요. 주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접수를 했어요. 완전히 우리 구역을 주님의 죽음의 구역을 접수를 했어요. 본인이 가져가버렸어요.


가져가고 너는 너를 몰라.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줘? 바리새인이 네 모습이야 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 왜 기쁜데요? 왜 기쁩니까? 말씀 안 지켜도 되거든요. 말씀을 이제 안 지켜도 되거든요. 왜? 주께서 바리새인 역할, 부자 역할, 세리 역할 그리고 하여튼 못 된 역할 있잖아요. 가룟 유다 역할. 이 역할을 우리 중에 스스로 자기 연극을 벌려 버리는 거에요. 자기 드라마를 벌리는 연극 무대로 활용해주시니 우리는 움직이는 주의 말씀의 사람입니다. 움직이는 주의 말씀, 주의 지체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아직도 안 죽이시는 거에요. 쓸모가 없을 때 죽여요. 여기 죄인과 그리고 용서하시는 주님 사이는 마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마주할 수 없는 관계에 우리는 주님을 안 믿습니다. 나만 믿어요. 나만 믿고 자리 하나 마련해서 주님 믿어줄게요. 아주 배려를 하는 것처럼 해가지고 예수님에게 해주는 거에요. 마치 기독교 학교에서 영어, 수학, 국어에 아주 집중하면서 주님을 배려해서 채플시간 하나 쓱 끼워주는 것처럼. 도덕시간 비슷하게 채플시간 끼워주는 그 나라 의를 하는 것처럼 착각. 그렇게 시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평소에 우리 자신을 나 공간을 키우는데 우리는 날마다 욕망을 생산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 우유를 마시는 것이 우스워. 왜 어른 우유를 안마시고 내 우유 마셔 라고 했던 그 9살 먹은 아이가 나중에 한 50년 지나서 59이 되면 아버지는 왜 자기 땅 놔두고 왜 내 땅 팔려고 해? 그렇게 변하는 거에요. 아직까지 자기 공간이 안 커졌기 때문에. 우리가 더 살고 싶다는 말은 본인도 모르게 나는 더 폭 넓게 죄를 짓는 체험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폭 넓은. 보다 많은 죄를 짓고 싶습니다.


여기서 그림 하나 들어갑니다. 천국생활과 지옥생활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말미암아 천국생활은 뭐냐 하면은 지옥생활이 되고 지옥생활은 천국생활이 되는 거에요. 이게 지상이라면 죽기 전의 이 세상이라면 이건 죽음 후의 세계. 죽음을 통과해서 지옥 같은 거지 나사로가 어디 가고? 천국 가고 천국 같은 호화로이 사는 부자가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이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비유로 했잖아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현장에 있던 부자도 있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완전히 뒤집어진 이 세상에서 그때는 예수님이 안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자리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모세와 선지자 집어넣어요. 모세 + 선지자의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선지자 말씀이 반대로 거꾸로 세상을 뒤집어놔버려요.


그럼 이 지상 생활을 뭐라고 합니까? 이걸 가상 또는 판타지. 환상이에요. 환상. 이게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이 판타지 가상세계가 계속 유일한 현실이라고 밀어붙이게 만든 것은 누구냐 하면은 악마가 그렇게 했지요. 악마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질 때 누가 가장 반대하겠어요? 예수님 보고 스타 되라고 이 땅은 스타를 원한다고 부추긴 사람이 있지요. 광야에서.


누굽니까? 예수님 기도할 때 40일 금식할 때 악마가 뭘 이야기하던가요?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이 땅의 스타가 되라 이 말이죠. 영웅이 되라 이 말 아닙니까. 모든 인간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유명인사 되는 것. 언론에 뜨는 것. 그것도 대단한 걸로. 그걸 예수님한테도 그대로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마귀보고 하는 말이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지 나는 네 말 안 듣는다 했거든요.


두 가지입니다. 나는 너의 말을 거부한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 이거 잖아요. 그럼 예수님께서 나는 너의 말을 듣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 할 때 그냥 처음부터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 하지 않고 너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우리 인간들은 못해요. 인간에게는 마귀가 없고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그럼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나는 내 말을 절대로 안 듣는다. 이게 인간에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해요. 나는 내 욕망대로 내가 시키는 대로 절대 안 해. 이게 인간한테는 모순입니다. 이거는 성사가 안돼요. 이거는 인간이 할 수가 없어요. 그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이 뭐냐 하면은 스타가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심이에요.


그러니까 이 죽으심이 결국 이 가상세계에서 뭐냐 하면은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 그런데 잃어버린 자가 가로막혔던 바로 언약이 통했던 유일한 자리에요. 인간에게 금지된 것에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가지고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구멍이 생긴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9장에서 “다 이루었다” 했지요. 다 이루면 뭐합니까?? 우리가 거기 관심도 없는데. 다 이루면 뭐합니까. 따라서 그 구멍에서 뭐가 흘러 내려오느냐? 성령이 내려와요. 성령이 내려오면 뭐합니까? 성령에 관심도 없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를 두고 그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죄인 되게 만드는 이 말씀대로 죄인 되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는 거에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속죄자 되시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로 죄인 되게 하는 관계를 잇는 겁니다. 이어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은 보지 못해도 십자가와 마주 대할 수 있지요. 그게 사랑인데.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사랑은 내 안에 나를 부정하는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내 안에 부정한 요소가 있다는 말은 주님 쪽에서 일단 너는 오지 말라고 금지해줘야 돼요. 금지를 해주고 너는 못하지만 나는 해냈다가 짝을 이뤄야 그게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게 되면 5절에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런 것이 전부 다 뭐냐 하면은 성령의 은사로 와야 이런 결과를 나타내요. 이런 결과를. 그럼 이런 결과를 나타낼려면 이 결과에 보조를 맞출려면 주님 내가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쳐주세요 이렇게 돼야 되고. 예언하는 능력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라고 쳐주세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고 내어주는 것도 이걸 그 자체로 사랑이라고 쳐주세요 라고 우기는 내 모습이 성경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발각돼야 되겠지요. 내 모습이. 뭐 좀 착한 일 해놓고 오늘 복 받을거야 이러고 있잖아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건 결정타죠. 내 이익도 없는 행동을 내가 왜 하겠어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너무 잘 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관리에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를 부탁해요~ 당부하고 싶어요. 우리가 우리 관리에 나서지 마세요. 우리의 관리에 나서 버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은 나한테 일어나는 주님의 요소를 내가 가리는 식이 되어버려요.


아무것도 안 해줘도 다 해줬는데 내가 괜히 나서서 설치니까 이거는 뭐 내가 안 나서면 일이 하나도 되는 것이 없다고 착각을 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착각을 해가지고 주님은 뭐 한 것이 없어. 우리 안에. 그렇게 되어버린다고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사랑을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은 바로 거지 나사로의 무능력함 무기력함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 그것이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병을 붓는 행위와 똑같은 행위에요. 많이 사랑하기에 제가 저를 다루지 않을게요. 주께서 다뤄주시는데 굳이 제가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럼 주님이 “너 뭐할래?” “저 죄만 지을게요.” “이거 이거 귀여운 것.”


자,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귀여울 때 손가락으로 볼을 잡아 올리지요. 치켜 올리지요. 그러면 물리적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표면넓이가 늘어나요. 이 골짜기의 골 사이사이에 주님의 사랑이 그득해요. 이거 이거 이거 이 이쁜 것. 이걸 보고 세상에서는 미쳤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복음 알더니 아주 미쳤구나. 문제는 우리가 덜 미쳐서 문제에요. 그거는 사랑의 볼따구가 더 올라가야 돼요. 사단은 볼따구 올라가는 게 380만원 받고 나머지 날린 거에요. 이혼한 거에요.


세상에 어떤 일도 우리는 파동이니까 주님이 관여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어요. 관여를 어떻게 하는가? 오직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특급사랑 알지요? 김희애가 한 것. 드라마에서 나왔잖아요. 볼 잡으면서 특급사랑.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굴곡진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특급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혼자 살고 싶어 했고 내 원하는 대로 돈 챙기며 살고 싶어 했습니다. 또 그런 마음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주의 자기 일로 집어넣어주시는 그 큰 사랑에 우리는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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