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구조와 증상

아빠와 함께 2023. 5. 9. 08:05

강남-누가복음 16장 13절 (구조와 증상) 23041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 10절까지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불의한 것             참된 것

재물                     하나님

이 세대                영원한 처소

지극히 작은 것    큰 것

하인                    주인

나의 것                남의 것
그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보면 불의한 것과 반대가 되는 참된 것이 나옵니다. ‘참된 것’. 그리고 끝에 보면 하나님 나오고 그 다음에 반대가 재물 나오죠. ‘재물’. 그리고 앞에 보면 8절에 보면 이 세대 나오고 반대가 ‘영원한 처소’가 나와요. 그 다음에 지극히 작은 것이 나오고 그 반대가 뭐냐 하면은 큰 것이 나오죠. ‘큰 것’. 그리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하인이 나오고 주인이 나오고 또 마지막에 나의 것이 나오고 12절에 남의 것이 나와요.


전부 다 대립되고 대조되고 반대가 되는 요소들이죠. 이 반대가 되는 요소를 이중에 어떤 하나가 그걸 마구 통과하고 있는 거에요. 끝까지. 통과하고 있습니다. 통과하고 있는데 그 통과하는 그 시작점이 뭐냐 하면은 바로 지난 시간에 봤던 불의한 청지기가 돈을 횡령하는 거에요. 이 돈, 재물이 이런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파친코 같애. 톡톡톡 튕기면서 딱 내려오는 거요. 사다리 타기하는 것처럼. 그 핵심 되는 것.


모든 반대되는 대립이 되는 그 사이를 뭐 하나가 계속 살아있으면서 계속 끝까지 뭔가 꿰뚫고 지나가는 그 요소가 뭐냐. 그게 바로 재물입니다. 그래서 재물은 뭐냐 하면은 매개에요. 또는 매개체. 어떤 드라마 같은 경우에 말썽꾸러기 하나 등장해서 말썽꾸러기와 주인과의 관계가 드라마의 축을 이루지요. 이야기의 축을. 선과 악이 분명해야 되니까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자기가 선을 지향하고 악을 배제한다는 그런 기본적인 선악지식이기 때문에 드라마를 통해서 자기가 영웅이 되고자할 때만 그 드라마에 몰입합니다.


악한 자를 빌런이라고 하지요. 악한 자. 속으로 죽여라 죽여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그 체계를 짤 때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가 막 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뭐냐 하면은 인물이 좋다 인물이 나쁘다 키가 크가 작다. 그것도 대립이잖아요. 좋은 집안이다 나쁜 집안이다 대립이 되는데 그 전체를 꿰뚫고 다 통과할 수 있는 그 요소가 예수님께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최종적으로 재물이야 말로 매개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재물과 하나님과의 대립관계를 하나님을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은 주인으로 집어넣는 거에요. 주인으로. 재물이 매개다 이 말이죠. 하나님과 재물 딱 결론이 났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너 하나님 섬길래? 재물 섬길래? 를 묻는 겁니다. 13절부터 거꾸로 들어가는 거에요.


너 하나님 믿을래? 재물 믿을래? 하게 되면 ‘나 하나님 믿을래’ 하잖아요. 하나님 믿을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된다는 거에요. 이미 마지막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긴다 재물을 섬긴다라고 나왔기 때문에 이미 이 재물을 섬길래? 라고 묻는 그 자체가 인간들이 재물의 위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하나님과 라이벌이 되는 재물의 위력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인간도 재물에 위세에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불의한 것이 되는 거에요. 불의한 것. 재물에 쫓기는 재물에 후달리는 인생. 재물에 후달리는 인생을 모델로 딱 내세워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은 없고 공백이 되고 재물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주된 인간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 세상이 이것이 대비자가 누구냐? 불의한 청지기가 되는 거에요. 계속 후달리고 있으니까요. 쫓기고 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모델로 내세웠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불의한 청지기처럼 살지 않습니다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이 불의한 청지기가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 믿을래? 안 믿을래? 하나님께 충성할거야? 안 충성할거야?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 재물에 충성할거야 말거야 라고 그걸 바꿔버린 거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구조에요. 구조의 반대말이 뭐냐? 증상입니다. 인간은 이미 구조화되어있다는 거에요.


구조화되어있으니까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하나만 끄집어내도 인간의 구조를 총괄적으로 다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가 표현하고 있는 그의 노력, “거기서 나는 빼주세요” 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까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말고 네 돈에 대한 태도가 이 시대의 구조에서는 돈에 대해서 충성하면 그게 뭐냐 하면은 충성된 자로 인정받아요. 훌륭한 자로.


그런데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재물을 다루는 이 자를 처음부터 참되고 충성되고 정직한 경리, 정직한 직원을 모델로 삼은 게 아니고 불의한 그 직원, 경리를 모델로 삼았다는 말은 인간은 이 불의함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거에요. 불의한 구조 안에서 돈이 총체적으로 매개가 되어있는 돈으로 구조를 만들고 체계를 쌓는 이 세상 안에서 인간들 내가 다시 묘사하겠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증상들을 내가 끄집어내겠다.


11절에 봅시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여기 불의와 참된 것을 대비시켜놨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난 돈 일체 안 밝히고 돈과 상관없는 참된 것을 나는 추구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재물이 총체화된 구조화된 세계에서 있을 수 없다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재물을 어떻게 귀하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참된 인간으로 평 받는다는 겁니다. 평가 받는다는 거에요.


12절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남의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남의 것에 뭘 집어넣어야 하느냐 하면 남의 돈, 남의 재물 보면 돼요. 남과 나의 대립구조는 재물이라는 매개체를 집어넣어서 설명해야 합당하는 것이 이 세상의 재물 위주의 인간세계의 구조입니다. 구조. 13절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하인 나오고 반대편에 주인 나오지요. 주인이 하인을 볼 때에 다른 거 안봐요. 내 돈 잘 지키고 있냐? 이걸 봐요. 돈을 매개로 집어넣어요. 중간 매개로. 돈을 매개로 집어넣어서 내 돈 잘 관리하고 있지? 예. 그럼 네가 돈 주인인 나를 잘 섬기는 게 돼요. 잘 섬기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인이 돈 주는 주인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 맘에 안 든다고 다른 주인을 섬겨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돈 준 주인은 기분 나쁘겠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돈은 내가 주는데 왜 다른 주인 섬기느냐. 너희들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주께서 애초부터 불의한 청지기, 이거는 누가 봐도 나쁜 청지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그 나쁜 청지기 같은 그런 인식과 사고방식으로 구성된 것이 바로 이 인간사회라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인간사회를 대변해주고 있는 거에요.


이야기를 하거나 행동을 할 때 돈을 집어넣지 않고 이야기나 행동을 하는 자체가 이 세상에는 의미가 없는 거에요. 친구 사귀라? 아니지 아니지. 돈 가지고 친구 사귀라가 되지요. 그런데 그 돈 앞에 뭘 집어넣습니까? 불의한 재물.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사귀는 그러한 경우만 이 세상에 일어나고 깨끗한 돈으로 친구 사귀는 그러한 경우는 이 세상 구조 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꽈도 비비비 꼬는 거에요. 전부 다.


10절에 “지극히 작은 돈에 충성된 자는 큰 돈에도 충성되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서는 충성되다 그리고 게으르다는 평은 내 돈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그런 구조 그 짜임새 그 체계 안에서만 인간세계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표정들 보니까 꼭 그런가? 이런 표정들인데. 이 한마디가 뭐냐 하면은 구조에요 구조. 구조는 반드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그 구조의 증상들이 나옵니다. 왜 구조와 증상을 분리하느냐? 이 증상의 원판이 구조로 들어가야 이게 설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구조를 지었어요. 인간 구조를.


그런데 왜 제가 구조를 말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은 자기 재물과 더불어서 자기 밥 먹고 사는데 여기에 몰두하기 때문에 뭐를 놓치느냐 하면은 이게 증상인줄 모르고 구조를 모르는 거에요. 구조를. 자, 구조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런 뜻이에요. 못 빠져나온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갇혀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너희들은 쫓기고 있다. 마치 뭐와 같이? 불의한 청지기처럼. 계속 쫓기고 있는 거에요.


컴퓨터에 게임 나오잖아요. 게임. 폴짝폴짝 뛰는 게임. 마리오. 마리오 게임을 보세요. 마리오가 아무리 뛰고 탈출하고 해도 그 구조 안에 갇혀있잖아요. 빠져나오지를 못하지요.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봤자 그 안에 구조 안에 갇혀있어요.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다급해요. 쫓기고 있어요. 후달리고 있다고요. 불의한 청지기가 누굴 만나요? 불의한 청지기가 지금 하나님 만납니까? 아니지요. 뭐를 사귀라? 불의한 재물로 뭐를 사귀라? 친구. 사람 만나는 거에요. 사람. 사람 만나는 거에요. 사람이 사람 만난다는 것은 그거는 허겁지겁 자기 살 궁리 챙기는 거에요. 매일 같이.


그런데 그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떤 구조 안에 빠져 나올 수 없는 구조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 구조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 못하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신한다. 이게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으로 드러냈잖아요. 주님은 뭐냐 하면은 너는 너를 바꿀 수 없다. 왜? 구조에 갇혀있으니까. 백날 누구 만나고 백날 누구하고 좋은 관계 해봤자 컴퓨터 게임 안에서 뱅뱅 돌고 있는 거에요. 안에서.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 그 외에는 그 누구하고도 상대하지 못한 채 갇혀있는 거에요.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 16절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율법 나와요. 주님께서는 재물을 매개로 해서 재물을 어떻게 다루느냐 대한 구조 안에 모든 인간이 거기 갇혀있는데 그렇게 재물 안에 갇혀있다는 구조가 있다는 것을 누가 그걸 지적하느냐? 그 지적을 누가 그렇게 했느냐? 어떻게 하면 그게 바깥에 나가서 지적할 수 있느냐? 그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율법 안에서는 오로지 오직 불의함 밖에 없다. 시작을 불의함으로 시작하는 거에요. 율법 안에서는 오직 불의함 밖에 없어요.


아무리 인간이 바뀌어 봐도 그게 구조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바뀌어 봐야 이쪽 불의에서 저쪽불의로 가는 것, 큰 불의 작의 불의함 그것뿐이지 어떤 불의함에서 빠져나올 어떤 것도 없도록 외부에서 누가 가둬놓느냐? 율법이 그렇게 가둬놓은 거에요. 율법아래. 인간이 불의한 것은 본인이 마음씨가 나빠서가 아니라 이 구조 자체가 나쁜 증상이고 징후에요.


자, 콧물이 난다 할 때 다음 중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1번 콧물을 먹는다. 2번 코를 잘라낸다. 몇 번입니까? 이게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닌 이유가 코는 증상이기 때문에 증상. 사람이 불의한 것은 증상이에요. 마음씨가 나빠서 나쁜 짓하는 게 아니고 증상이라니까요. 어떤 증상? 율법이 율법 되기 위해서 그 안에는 모조리 불의해야 돼요.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를 주신 이유입니다. 이 증상인줄 모르고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살 궁리 챙기는 거에요. 자기 살 궁리.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삼아서 자기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살 궁리 찾는 거에요. 끝까지 불의하죠.


예를 들면 인간은 자기 구조를 모르고 본인 하는 것 증상인 것을 모르고 자꾸 구조도 생각 못하는 그런 한 예가 코미디 프로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어떤 남편이 출장 간다는 남편이 갑자기 출장 시기를 앞당겨서 허겁지겁 막 자기 집 안방에 들어왔어요. 와가지고 “거봐 거봐 하여튼 내가 집에만 없으면 이런다니까. 내가 집에 없을 때 행거에 옷을 바르게 걸어놔야지 안 그러면 옷 입을 때 구겨진단 말이야. 내가 뭐라고 했어. 내가 없을 때 옷 잘 챙기라고 했지.” 이렇게 했어요. 코미디입니다. 코빅이라는 그 프로.


그때 아내는 뭐하고 있느냐.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자고 있어요. 다른 남자하고 같이 누워있다가 놀라는 거에요. 그런데 남편은 거기에 신경 전혀 안써요. 자기 행거에 옷만. “아저씨 비켜요. 왜 아저씨가 여기 있어.” 지금 내 옷 삐뚤은 것만 신경 쓰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앞으로 잘해 나 갈테니까.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가버리는 거에요.


율법이 구조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아 바람피워서 되겠냐 이러고 있다고 지금. 그 구조 자체가 주께서 뭐를 보는지를 모르고 자기가 이 땅에 사는 것은 하나의 증상인데 감기증상 같은 거에요.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이 땅에서. 제가 아까 처음 시작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에 뭐가 다 통한다고요? 매개체 뭐라고 했습니까? 재물이라고 했지요. 재물.


재물이 매개가 되가지고 끝까지 마지막에는 무엇과 무엇을 대비시킵니까? 하나님과 재물. 그 하나님과 재물 해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율법 선지자 이야기가 나와요. ‘율법과 선지자’.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주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것을 율법이라는 구조 안에 모든 인간세계를 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로마서 8장 7절을 한번 봅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이게 율법이잖아요. 율법이죠. 율법의 기능을 말하지요. 여기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어져야죠. 왜? 안된다는데.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어요. 뭐 이정도 돼야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 정도 돼야 기쁜 소식이죠. 이 정도 돼야.


그러면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뭡니까? 율법의 구조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거에요. 무시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선악체계 있잖아요. 착함. 이런 것을 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구조를 만드는 거에요. 구조를. 그리고 그 구조 만드는데 일조한 자가 누구냐 하면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 16장 14절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이 주로 하는 일이 율법으로 체계 만드는 거에요. 율법체계. 구조를 만드는 거에요. 구조.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 했죠. 그 당시 유대사회는 구조가 있어요. 그 구조의 제일 위층에 펜트하우스, 아파트 제일 높은 층이죠. 높은 층에 누가 살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살고 있어요. 아래 내려다보고 사는 거에요. 그들은.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 16장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불의한 청지기 딱 던지죠. ‘불의한 청지기’. 계속 불의해요.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이 뭐냐 하면은 불의한 청지기하고 같이 달라붙어서 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뭐지요? 재물. 그 재물은 무슨 재물입니까? 불의한 인간이 다루는 그 재물은 어떤 재물이겠어요? 불의한 재물. 참 쉽죠. 되게 쉬운 거에요. 인간 자체가 불의하니까. 그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재물도 불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16장 19절까지 이어집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벌써 낌새가 이 부자에 대해서 좋은 평 안주겠다는 뜻이죠. 지금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거에요. 부자가 인간성이 나쁘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돈이 많다는 거에요. 던지고 보니까 어려운 문제인데. ‘돈이 많다’가 이게 증상입니다. 무엇의 증상? ‘인간은 불의하다’를 보여주는 증상이에요.


인간은 구조 안에 갇혀있고요. 그 인간이 터트리고 표현하는 내뿜어내는 모든 것들은 현재에 있는 불의한 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증상들입니다. 제가 증상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감기 걸리면 ‘콧물아 좀 흘러라’ 이런다고 콧물 나오는 게 아니에요. 콧물이 내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를 않습니다.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콧물이 주르륵 열이 나고 기침 나는 거에요. 감기증상이 그래요. 그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감기 들렸다고 하지요.


내가 감기를 선택했습니까? 아니지요. 감기가 와서 쳐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이런 증상을 드러내잖아요. 주님께서는 율법 지키라가 아니라 율법이 쳐들어오게 되면 이러한 증상들이 인간세계에 안 일어날래야 안 일어날 수가 없이 이게 나온다는 겁니다. 율법은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방식으로 율법의 진가를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율법의 진가를.


그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8절에 나옵니다. 이거 하게 되면 분명해질 거에요.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9장을 한번 봐야 됩니다. 여기 재미난 현상이 일어납니다. 19장 4절부터 하겠는데요. 미리 이야기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구조와 증상을 좀 따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활동을 증상이라고 했지요. ‘증상’. 증상에서 뭘 따로 분리해내느냐 하면은 율법을 딱 분리해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너희들이 이런 이런 행동하는 자체가 거기서 그런 불의한 행동 속에서 뭐를 끄집어내겠다? 율법과 선지자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그렇게 활동하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믿으라가 아니라 그냥 가만 있어. 십자가에 내가 너희들 때문에 희생했다는 사실을 너희들의 불의한 행동 속에서 따로 뽑아낼게.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뽑아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십자가 믿으라가 아닙니다. 가만있어. 내가 십자가로 뽑아낼게. 너는 그냥 불의한 증상만 보여란 말이죠. 그 증상 속에서 십자가 알갱이를 뽑아낼 테니까.


뽑아낸다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정신분석학 책 중에서 정신병 걸린 사례들을 쭉 나열하고요 그 사례 하나하나에서 정신 분석 이론이 어떻게 딱딱 들어맞아서 치료가 되느냐 그런 책이 있어요. 임상 사례를 곁들인 정신분석학 책이에요. 프랑스 사람이 쓴 책인데 그 사례 중에 아주 흥미로운 정신병이 하나 있어요.


어떤 정신병 들린 여자 분이 병원에 입원해있는데 간호사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환자가 “간호사님 저 오늘 무슨 약 먹으면 돼요?” 이렇게 하니까 간호사가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의사 선생님에게 물었어요. “의사선생님 이 환자에게 주사를 놔야합니까 알약을 줘야합니까?” 이렇게 하니까 그 의사가 “캡슐로 해서 먹이면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간호사 의사 둘 사이의 이야기잖아요. 그 소리 듣고 그 환자가 칼 들고 와가지고 의사 죽일려고 했어요. 의사가 상처를 입었어요.


나중에 안정되고 난 뒤에 물었어요. 왜 칼 들고 날 죽이려고 했습니까? 정신병 여자 환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를 캡슐 안에 집어넣어서 그 집어넣은 캡슐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려고 너희 둘이 작당을 했지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그 이야기 듣고 아까 말한 거 다시 들어보세요. “캡슐 안에 넣어서 먹이시면 됩니다” 할 때 캡슐 안에 들어가는 것이 본인 자신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의료진은 그 사람에게 뭐를 뽑아낼려고 하는데 환자는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거에요. 우습지요? 오늘날 인간들입니다. 전부 다. 주인공이 나라고 여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 정신병자들이에요. 주님은 우리 배제하고 일하잖아요. 그 배제하는 게 어디 나옵니까? 아까 로마서 8장 7절. 배제도 이런 배제 없지요. 육신은 누구 보고 이야기합니까? 정신병자 같은 우리. 육신의 생각은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킬 능력도 없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스스로 자기를 치료해서 구원받을 일은 없다는 것을 인간들이 설치고 있는 그 속에서 율법의 정신을 뽑아내려고 하는 거에요. 그 율법의 완성이 뭡니까? 십자가에요. 인간은 불의한 재물로 구성된 게 인간구조다. 그러면 율법의 구조는 뭡니까? 물으면 바로 그게 인간들이 자기가 돈 좋아하는 것을 감추면서 바리새인이 최고로 밝히는 사람 아닙니까 그 당시에.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바리새인들이 제일 위층에 있으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그들은 뭐를 못 이겨요? 재물이 총괄적인 매개가 되는 이 인간구조를 불의한 재물로 짜여진 인간증세에서 바리새인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내가 나를 바꾸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바뀌어지는 거에요. 바뀌어지는 것. 구조 때문에 우리는 못 바꾸지요. 그러면 새로운 구조가 오면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구조가 바뀌면 불의한 구조가 아니고 의의 구조 오게 되면 우리는 손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우리는 뭐 됩니까? 빠른 속도로 빛의 속도로 우리는 의인 되어버리죠.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뭐.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5장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왕 노릇 구조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구조잖아요.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구조와 구조의 관계죠. 개인과 개인의 관계 아니죠. 개인의 성실 문제가 아니지요. 개인의 착함 문제가 아니지요. 20절 봅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어떻게 한다? “더욱 더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로마서 5장 20절에 나온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에서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 이야기는 복잡하지만 복잡할 수밖에 없지요.


그때는 이미 율법구조,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바리새인 주도하에 율법구조 체계 있으니까 복잡하게 가져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불의한 청지기. 너희들 다 횡령했으니까 다 불의하지. 그 불의한 청지기가 너희들보다 더 지혜롭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처소에 자리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겠어요? 안 사귀겠어요? 바리새인들이. 안 사귀죠. 자기는 의로움이 있는데. 계속 주님께서는 윽박지르는 거에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불의한 청지기 보고 오늘날 교인들이나 오늘날 설교자들이 난감한 거에요.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말씀은 명령조고 명령은 지시에 따르라는 그런 식이거든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안사귀면 더 큰 것도 안준다 이러니까 불의한 재물 충성해야 돼 말아야 돼. 난감하지요. 작은 불의한 것에 충성치 않으면 큰 것도 안준다 하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해서 천당가야한다 이런 논리인데.


“싫어요 싫어요. 천국 안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쁜 짓하기 싫어요.” 이러고 있는 거에요. 주께서는 “놀고 있네. 지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그 이야기 아니야. 너 구조에 갇혔어” 라는 그 이야기란 말이죠. “너는 구조에 갇힌 거야 구조에” 아까 로마서 계속 봅시다. 20절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를 죄 되게 뽑아주는 하나하나가 그게 은혜잖아요. ‘아 내가 이래서 죄 지은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었구나. 이게 십자가구나.’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로 뽑아줄 때 비로소 십자가에 눈이 뜨여져요. 십자가만 믿으면 되지. ‘주님 다음에 뭐 믿을까요? 십자가 제가 믿겠습니다.’ 이러면 눈 안 떠져요. 더욱더 죄인 되게 할 때. 율법이 있는 세계에서는 죄가 더욱더욱 더 증가하기 마련이에요. 왜? 불의한 재물이 매개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 하나님 해도 돈을 더 섬긴다는 것이 이미 이 세상에는 우리의 기본 증상이 되어있어요. 증상이라는 것은 내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생리는 이거는 나이 들면 나이 들수록 계속 나오게 되어있어요. 나이 90 가까이 됐다고 나 돈 싫어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밝히죠.


5장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영생 그렇게 안주겠다고 고집 부리시는 그 하나님. 창세기 24장에서는 아예 천사까지. 천사는 개거든요. “물어! 물어!” 천사를 풀어버려요. 풀어가지고 아예 영생 꿈도 꾸지 말라고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결심을 굳게 변동사항 없이 굳게 섰던 그 주님이 여기 보면 “영생에 이르게 함이라”


안 준다 해놓고 왜 “영생에 이르게 함이라” 이건 왜 마음이 회까닥 바뀌었어요. 주님은 마음 바뀐 적이 없어요. 구조가 바뀐 거에요. 구조가. 구조가 바뀐 거에요. 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구조에 그냥 갇혀버린 거에요. 우리는 죄의 구조에 갇혔다면 우리는 의의 구조에 갇힌 거에요. 그게 유명한 찬송가는 아니지만 찬송가 비슷한 노래 있어요.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묶어라. 나를 풀 수 없도록. 사랑의 밧데리. 사랑의 밧데리 채워줘요.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베데스다 못. 자비의 못이라는. 베데스다 못가에 다 모였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한사람 선착순 1등을 무조건 베푼다는 그 전설의 호수.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오늘도 잊지 않고 지독한 사람. 공짜 되게 좋아하지요. 베데스다 못 특징은 뭐냐 하면은 일체 네가 뭐가 잘못되어서 저주처럼 병을 얻었느냐를 일체 묻지 않는 곳이에요.


자비의 출처는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되 우리의 죄를 생산해서 끄집어낸다는 거에요. 죄 없다 하는 인간도 죄 짓게 만들어서 끄집어내는 것이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긍휼과 자비의 시작이에요. 구조 이야기했으니까 제가 준비한 그림 하나 그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이 그림 하나로 정리할 수 있어요. Sa,Sb,Sc,Sd 해놓고 대문자 S 인간은 너, 나, 그, 그녀 어떤 제 삼자 it 고만고만한 인간들 있지만 인간들은 이 인간들의 공통점을 가지고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대단한 어떤 인간인데 위대한 인간을 기다리고 있어요. 큰 바위 얼굴이죠. 큰 바위. 나, 너 인데 나, 너를 모든 것을 통합한 진짜 위대한 당신. 이것을 인간들은 초점을 모아서 고대하고 있습니다. 큰 대타자, 큰 당신, 큰 타자와 나 사이에 연결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들 세계에서. 연결점이 있지요.


언젠가는 우리나라 위대한 대통령 태어난다. 언젠가는 위대한 지도자가 와서 우리나라 잘됐으면 좋겠다. 자식이 5명인데 그 중 하나는 대단한 자식이어서 무너진 우리 집안 자존심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다 고대하고 기대하는 게 있잖아요. 나 말고 나보다 더 대단한 존재. 대표적인 것이 한석봉이죠. 한석봉 엄마죠. 불을 꺼라. 그게 제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공평치 않아요. 불을 꺼라 했으면 너도 글씨 쓰고 나도 글씨 쓰자 했어야 하는데 불 꺼라 나는 떡을 썰고 너는 글을 써라. 엄마는 35년 동안 재래시장에서 계속 떡만 썰었는데 이거는 눈감고 해도 도사지요. 불공평한 게임을 벌리는 거에요.


엄마처럼 되지 말고 너는 엄마를 능가하는 대단한 사람 돼야 돼. 이게 뭡니까? 이게 인간구조에요. 이 세상에서 사람을 이렇게 보는 거에요. 언젠간 지구를 구원할 의인이 올 것이다. 건담v라든지 독수리 5형제든지 크로스 하든지 어벤저스 나타나든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은 이것을 A 율법 죄에 갇힌 거에요.


죄에 갇혔다는 것을 모르고 인간은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어디에? 같은 인간들의 동료들의 지혜와 용기에 그들의 성공에 박수칠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신약 개발 박수칩니다. 새로운 물리학 원칙 박수칠 준비되어있어요. 우리의 희망이니까. 그러나 이 자체가 뭐냐? 불의한 세계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6장 13절 (구조와 증상) 230418b-이근호 목사


                                                             증상
나는 내게 속하지 아니했다. 이건 나는 정상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내 인생이라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누가 그걸 알려주느냐. 율법이 오면 돼요. 내가 법을 지켜서 법을 지킨 내가 건전하고 더 깨끗하고 더 정결하고 거룩한 내가 만들어지라고 율법을 준 게 아니고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죽게 하는 죄라는 것이 율법이 와서 나와 율법을 분리해내는 거에요. 분리해서 정죄하면 십자가 되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없으면 십자가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이는 자의 특징이 뭐냐? 우리 율법 잘 지켰는데 왜 당신은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말하느냐 라고 분노하는 자들이 있어야 십자가 사건이 터져요. 이게 율법의 완성이 된다고요. 새로운 사실은 거짓이 새롭게 등장해야 새로운 사실이 등장하는 겁니다.


내가 몰랐던 내 죄, 고상해지고 대단하고 거룩해지려는 내 죄가 발견 될 때 비로소 나는 죄인 된 기쁨을 또다시 새롭게 느끼게 되는 거에요. 콧물 질질 흘리면서 코 잘라버릴까? 마치 수도원처럼 콧물 나니까 더러운 세상 못 살고 따로 홀로 살래. 이래서 기도원에 가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 코를 자르는 거에요. 그럼 기도원 가면 콧물 안 납니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 수도원에 가면 안 샙니까?


수녀들 신부들 보세요. 공부 못하는 수녀들 얼마나 구박받는다고요. 좋은 대학 나온 수녀들 대우받아요. 똑같아요. 뿐만 아닙니다. 못 생긴 수녀는 안돼요. 이쁜 수녀는 대우받아요. 잘생긴 신부는 대우받고 못 생긴 신부는 대우받지도 못해.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그것 가지고 해봐야 또 마찬가지라니까요.


나는 내게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는 영원히 나를 만날 수 없다. 나는 영원히 나를 만날 수 없어요. 왜? 나 자체가 율법에서 내가 돼야 되는데 율법 빼고 같은 동료들 있잖아요. Sa, Sb 그것들과 공통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분류된 그 체제에 의해서 우리는 일단 식물은 아니고 이것 분류해서 역시 우리는 인간이다. 지혜로운 존재다. 이렇게 분류한 거기. 이건 백설공주 계모가 거울보고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한 것과 똑같아요.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냐?” 제대로 말 안 해서 거울 깨졌어요.


그래서 깨진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깨졌잖아요. 마태복음 19장에 요한복음 베데스다 못가 그것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내게 속하지 않고 나는 대타자에 속했다.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대타자 속에 나는 그분의 자녀요 그분의 피조물이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 대문자 S와 나 사이에는 연속성이다? 불연속성이다? 연속성인거에요. ‘연속성’.


여기서 교회 생긴 게 종교 아닙니까. 오 신이시여. 내 기도 받아 주옵소서. 연속성이라니까. 연속성. 그게 바로 그 선배가 누구냐 하면은 바리새인들이에요. 주님께서 네가 불의한 재물로 사귀지 않으면 너는 영원한 처소에 못가 이 바리새인들아. 천국 같은 소리하고 있네.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사귀어야 천국 간다는 그런 조로 이야기해버리니까 그들은 비웃을 수밖에 없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이 말씀대로 살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에요. 어느 누구도. 저 불의한 구조 안에 들어있습니다.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없어요. 세상은 악해도 나만 착실하면 되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를 위한 구조를 구축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는 불의 안할래야 안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성령 받은 그 사도들이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성령 받고 난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했지요. 그리고 “내가 율법에 흠이 없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죄 씻음으로 나는 의롭다”고 했지요. 히브리서와 여러 군데 나와요.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증인일 뿐이다. 증인이 뭐냐? 증상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희망 안에 갇혀 있고 나는 포부 안에 갇혀 있다. 연속성인 거에요. 그런데 이 자체가 뭐냐? 이 자체가 율법이 율법 되기 위해서 이런 죄의 구조가 주께서는 필요했던 겁니다. 따라서 너는 죄이기 때문에 나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만날 수도 없고 너희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이렇게 돼야 창세기 3장24절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서 한결같은 취지가 유지되고 있는 거에요. 일관성이 있어요. 일관성. 주의 일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게 아니고 일관성이 있어요.


그러면 베데스다 못에 38년 된 병자가 있단 말이죠. 38년 동안 병자로서 기웃거렸지만 항상 선착순 1등이 되지 못해서 자비의 혜택을 받지 못한 거에요. 그런데 그 병자가 몇 년 동안이라고요? 38년. 끝났어요. 끝났어. 희망 없어요. 끝난 거에요. 꼴지도 그런 꼴찌 없습니다. 39년 된 사람 없습니다. 40된 사람 없습니다. 주께서 찾아갈 때 38년이 제일 인간의 한도의 끄트머리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 38년 병자 주변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할아버지 당신은 안돼. 끝났어. 끝났어. 당신은 들러리에 불과해. 그래도 인간은 뭐다? 자기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포부를 버리지 않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뭐냐? 연속성을 주장해요. 내가 누가 와서 나를 먼저 들어서 물속에 풍덩 집어넣으면 참 좋겠는데. 연속성이죠.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연속성을 주는 게 아니라 뭘 주느냐? 참 충격이죠. 결과로 만들어진 구조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구조는 시작을 주님이 시작하는 거에요. 이게 죄도 마찬가지고 의도 마찬가지고 구조를 주님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죄가 뭐냐는 것은 주님만 알아요. 이번 주일날 설교 때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의 하나님이 아시는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생명이 됨과 연류되어서 의미가 담겨야 그게 죽음이에요. 숨 끊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건 호출이고 예수님의 부활되고 예수님이 생명인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부착되어있는 옆에 붙어있는 그것이 바로 죽음이에요. 지옥이죠. 지옥은 천국의 시다바리에요. 천국을 빛내기 위해서 보조로 있는 게 지옥입니다. 듣는 지옥 간 사람 섭섭하겠지만.


어쨌든 저쨌든 간에 인간은 주인이 아니에요. 섬기는 존재지 주인은 아닙니다. 종이에요. 주님은 인간을 주인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본인이 누가 와서 나를 들어서 제일 먼저 집어넣는 인간들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가? 38년 된 병자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에요. 그 병자는 자기의 포부와 꿈에 갇혀있는 거에요. 이런 방식으로 해주면 참 좋겠는데요 여기에 갇혀있어요. 이렇게 가서 이렇게 가면 참 좋겠습니다 하고 갇혀있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놀라운 역주행을 해버려요. 자, 차가 밤에 역주행한다. 무슨 사고 나겠습니까? 충돌사고. 그 충돌사고를 세 자로 ‘십자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십자가’. 들이박아버렸어요. 역주행해서. 우리는 뭔가 열심히 해볼까 하는데 게임 끝났대. 모든 게임 다 끝나버렸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버렸대 라는 사실이 와서 이렇게 완전 내 차를 박아버려요.


그러면 나는 그 구조에 빠져버려요. 새로운 구조에. 어떤 구조? 예수님이 행하심으로 조성된 구조. 율법의 완성이라는 그 구조 체계에 우리가 하나의 증상으로 증인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증인으로. 그러면 이 그림을 수정 안할래야 수정 안할 수가 없지요. 수정 들어갑니다. S는 주체죠. A라는 것은 미지의 타인. 이것 수정 들어갑니다. 다 지우고 Aa, Ab, Ac.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율법 안에서 a가 되는 거에요.


그럼 이게 뭐냐 하면은 한 겹이 있고 또 하나의 한 겹이 있는 거에요. 율법의 죄를 용서한 의가 있어요. 그러면 결론적으로 뭐냐 하면은 주님은 주님 내부적으로 하나님 내부적으로 거래한 셈이 되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두 양 사이의 거래가 이루어져서 완성이 된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새 언약이에요.


우리의 것을 일체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들의 살과 아들의 피를 받아서 언약을 완성했습니다. 그 완성된 구조체계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죠. 그걸 영생의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겹 있고 한 겹이 더 있어요. 겹이 두 개. 그럼 안쪽은 무슨 쪽인가? 율법으로 죄인 될 수밖에 없지요.


마태복음 19장 봅니다. 3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성격이 안 맞는다든지 게으르다든지 고양이 키운다든지 이것 때문에 아내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까 이런 뜻이란 말이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율법이에요? 율법 아니에요? 율법이죠. 오리지널이니까.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디서 다 깨졌습니까? 아담이 선악과 따먹으면서 구조 자체가 율법으로 구조 자체가 다 깨져버리고 인간 본인이 주인공이 되가지고 자기 위주의 자기를 위한 새로운 인생이라는 구조를 짜나갈 때 시작할 때 이 율법은 깨지라고 있는 거에요. 결국.


왜냐하면 선악과는 왜 심어놨는가. 선악과 율법이 깨지라고 선악과 있는 거에요. 따먹으라고 유도한 거에요. 결국은. 왜냐하면 생명은 인간에게 줄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 주신 분이 새 생명 줘야 예수님 사람 돼요. 인간인데 생명주는 것은 하나님이 애초에 그런 계획이 없어요. 죽어야 돼요. 죽어야 주께서 나를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아까 그 동영상 했지요.


나를 믿는 자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로 인하여 상처를 유발한 자라고 해석했죠. 상처. 주님 생긴 상처. 그 상처의 내용이 들어 있을 때 믿음이 된다는 거에요. 나를 믿는 자는 나와 상처를 같이 하는 자는 영생 주어진다는 말은 내가 단독으로 너한테 생명 줄 그런 뜻도 없고 그런 생각도 없고 줄 이유도 없다는 거에요. 네가 너를 고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구조니까요. 인간은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증상일 뿐이거든요.


그렇다면 계속 봅시다. 그러면 어찌하여 마태복음 19장7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라고 했어요. 출애굽기 7장10절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열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모세 앞장 세워서 애굽을 파괴하겠다는 목적이에요. 율법을 내세운 것은 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함입니다. 파괴하는 것.


그런데 파괴할려면 파괴할 빌미가 있어야 파괴가 되겠지요. 빌미가 있어야. 빌미가 11절에 나옵니다.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애굽 나라가 모세 앞에서 또는 하나님 앞에서 파괴될 이유가 하나님께서는 술객들이 하는 수준처럼 해버리면 술객들이 가만있지를 못하고 마술사들이 마술사들은 눈속임이에요. 전부 다. 흉내 내기에요. 사람 눈만 속이면 되니까요. 이 마술사는 누가 신뢰하느냐? 바로 왕이 신뢰하는 거에요. 바로는 애굽의 총책임자에요. 총책임자가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는 하는 사람 있다고 불러낸 게 술객들이란 말이죠.


지팡이가 뱀 되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재앙  두 번째 재앙까지는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못하지요. ■지팡이가 뱀 되는 것, 그리고 ■첫번째 재앙, 지팡이 가지고 물에 던지니까 물이 피가 된 것, ■두 번째 재앙, 개구리 올라오는 것.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대로 그와 같이 행하여 개구리가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세 가지는 됐어요. 되니까 점점 더 인간들은 하나님의 방식에 지금 슬슬 말려들기 시작하는 거에요.


망해야 될 이유를 모세를 통해서 벌리면서 한꺼번에 망하는 게 아니고 망해야 될 이유를 발췌해내면서 망해가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가 보기에 어땠습니까? 되네! 저거 되잖아요. 되니까 하나님의 대단함 신비로움 이거 뭐 별론 거에요. 번개가 친다.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번개 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다. 미국에 대통령이 피뢰침 만들었잖아요. 3대 대통령. 피뢰침 만들었죠. 번개는 스파크 일어난 거네. 우리 되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건방떨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렇게 유도한 건데.


8장18절에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세 번째  재앙 못했잖아요. 네 번째 재앙부터 애굽이 살던 지역과 그리고 히브리인 사는 지역이 분간됩니다. 분간되어서 저쪽에만 재앙이 떨어지고 이쪽에는 재앙이 안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주님께서 뽑아낼 거 뽑아냈다 너희들 정체를 밝혀라. 이제 좀 맞자. 소매 걷었어요. 이제 좀 맞아도 되지?! 너희들. 바로 왕은 걍팍했어요.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줬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법이 무서워 이혼 안 했을 뿐이지 실은 인간 마음속에 “아 진짜 뭐 이래. 결혼이 지옥이야. 왜 중고품이야. 지금 신품 계속 생산되고 있잖아요. 결혼이 족쇄네. 결혼은 불행을 안겨주는 거야. 한 남자와 살고 한 여자와 살고 이런 게 어딨어. 모세님 어떤 비법 없겠습니까?”


“이혼증서 써줄게” “만세! 복음이야!” 이러고 있단 말이죠. 덫에 걸린 거에요. 봐 법적으로 이혼증서 써줬으니까 법적으로 맞는 거야. 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숨겨진 자기 본색이 드디어 하나 둘 뽑혀져 나옵니다. 추가적인 율법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뽑아져 나오는데 나중에 신약성경에 봅시다. 어디 정도까지 뽑혀 나왔는지를 구약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을 거에요. 율법 제작자가 누굽니까? 율법 출제자가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그럼 예수님 말씀하는 게 곧 율법이죠.


마태복음 5장27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외부성과 내부성’. 누가복음 16장에서 재물 이야기는 이건 외부성이에요. 물론 증상입니다. 내부성도 증상이에요. 증상인데 외부성을 통해서 내부성이 율법이 드디어 꽂히게 됩니다. 너희들은 이미 외부뿐만 아니라 이미 마음속 내부까지 누가 장악했다? 이미 율법이 다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이.


외부성은 뭐냐? 재물이죠. 재물은 뭐냐 하면은 경제문제에요. 경제문제. 현재 아르헨티나 물가가 102%. 물가가. 세계기록 세웠습니다. 102%. 우리나라 은행 금리가 얼마입니까? 3. 몇 퍼센트 얼마죠. 은행금리가 48%에요. 48%. 서민들이 돈을 못 빌립니다. 이거는 악덕업자 꼽배기에요. 나라에서 왜 이렇게 올리느냐? 나라에 돈이 없어요. 왜 돈이 없는가? 표를 달라고 돈을 다 줘버렸어요. 돈을 다 뿌려놔서 돈이 없어요.


그러면 세금 걷으면 되지 않느냐. 돈 받은 사람은 세금 낼 능력이 없어요. 부자세 15억 이상 되는 사람들 세금을 강제로 때려버렸어요. 부자세 받아서 재정을 모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 부자들 이민 갔습니다. 이민 가기 전에 뭐했어요? 재산 외부로 다 빼돌렸어요. 다 빼돌렸습니다. 돈 없어요. 국민들이 그 나라가 세계에서 소고기 최고로 많이 생산되는 나라로 유명했어요. 소고기 못 사먹습니다. 너무 비싸가지고. 이 나라가 뭐냐 하면은 하루하루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국민들 하는 일은 물건을 매일같이 사는 거에요. 왜? 매일같이 사야 내일 되면 물가 또 오르기 때문에. 102%는 망한 베네수엘라보다 더 높아요. 35.1%가 빈민층. 그냥 못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만큼 돼요. 그런데 44% 빈민층이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멕시코에요. 멕시코. 빈민층이 더 심해요. 물가는 좀 낮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자, 이건 뭐냐 하면은 인간이 매일같이 고통스럽죠. 외부적인 고통이에요. 외부적인 고통. 인간은 외부적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 돈이 없을 때 고통 받습니다. 이럴 때 뭐가 감추어지느냐? 자기의 내부 고통이 감추어져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물가지고 재물을 매개로 해서 세상을 설명한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그것 보고 왜 비웃습니까? 돈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넉넉하니까요. 그들은 넉넉하니까.


누가복음 16장 다시 돌아와서 16장 봅시다. 16장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부자 등장하지요.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실제 인물이 아니고 비유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외부에서 뭐라고 합니까? 외부만 율법이 장악한 게 아니고 내부적으로 율법이 장악되어있으니까 그 증상으로 외부에 돈의 순환 재물로 순환으로 짜여지는 인간세계의 체제를 불의한 재물로 일관성으로 묘사가 되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의 취지가 이겁니다. 외부적으로 돈이 순환되는 돈의 세계죠.


그러면 그걸 율법으로 지적하게 되면 돈 밝히지 말고 하나님 섬겨야지 이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섬기고 돈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지요. 그럼 그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까? 율법 완성한 사람이에요? 아니죠. 율법은 외부를 통해서 인간이 외부에 정신팔린 거. 나도 돈 좀 있었으면 나쁜 짓 안 할텐데. 외부의 그 재정으로서 커버하려는 이 고통이 사실은 원인이 돈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 있다는. 내부에. 그걸 설명하는 거에요.


그럼 내부에 어디 있느냐? 내부에 율법에 의해서 율법 완성의 세계를 너희들이 보지 않는데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율법 완성의 세계를 뭐라고 되어 있느냐 24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세계에요.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2절-24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그 다음에 어느 품에 들어가지요?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지요. 왜 예수님 품은 안 됩니까? 십자가 지시기 전이거든요. 십자가 지시기 전이에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죠.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에요. 신앙의 아버지는 누구죠?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이죠. 그 아브라함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조상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이 12 아들 낳은 야곱이고, 야곱 이름이 바뀌어서 이스라엘 됐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민족과 차이 나는 그 지점에서의 이스라엘의 조상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오잖아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


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여기 지금 십자가 전이기 때문에, “십자가 율법을 이루었다” 하지 않아요. 그냥 율법과 선지자가 다 이룬 상태가 어떤 상태냐를 말해주는 겁니다. 여기에 16절을 한번 봅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 때까지고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느니라 했죠.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is being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NIV)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 man presseth into it.(KJV)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en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NASB)  침입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냥 와해되고 무너진다는 거에요. 무너질 때 그냥 무너진다 하지 않지요. 이유가 있어요. 불의하기 때문에 무너져야 되는 거에요.


17절에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이 말은 뭐냐하면 이 천지가, 눈에 보이는 모든 창조물이 유지되는 것은 율법이 완성되기 위한 재료로서만 이 천지, 이 대자연이 버티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리고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이건 아까 제가 마태복음 19장에서 간음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간음 문제는 마태복음 5장에도 나오지만, 본인이 지킬 수 있는 게 아니고 어겨야만 되는 거에요. 어겨야만. 그래야 인간의 내부성이 있는 거에요.


외부적으로 어겼다가 아니라, 안 어기더라도 내부적으로 잠재적으로 이미 어긴 상태가 되어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이 내부적으로 다가오게 되면 간음이 성립되는 거에요. 왜 그러냐면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선악과 따먹은 이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나는 나지, 내 안에 다른 사람이 하나가 들어올 수 있는 그러한 경우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이 한 몸이 되는 경우는 이미 깨어져버렸어요. 그 깨어진 것을 제가 아까 로마서 5장이나 로마서 8장에서는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부부가 이야기할 때 “여보, 물 끓여놓은 거 어딨어?” 할 때 “물 끓여놓은 거 부엌에 있어요.” 그러면 “알았어요, 고마워요” 하면 되는데 “그런데, 물 끓여놓은 거 부엌에 있는 건 아는데 말투가 왜 그래? 나한테 뭐 감정 상한 거 있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닌데?” “아닌데, 말투가 어제랑 다른 거 같은데?”


평가를 누가 합니까? 평가를 의논해서 평가합니까? 일방적으로 평가하지요. 자기 안에 아내 몸 없지요. 또 아내 몸에 남편 몸 없지요. 없어요. 이미 깨져버렸어요. 인간은 어떤 율법도 하나도 못 지켜요. 결과로서는 하나도 못 지키는데, 과정에서 하나도 못 지키는 그 과정을 주께서는 두 개의 구조를 가지고 주께서는 그걸 밝혀내주는 것에요. 밝혀내면서 투입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면 거지 나사로입니다. 일종의 예수님이죠.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는 가난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해요. 이게 뭡니까? 내부성입니까? 외부성입니까? 참 중요한 질문이다. 이게 거지 나사로가 부자 문간에 주저앉아있는 모습이 내부성입니까? 외부성입니까? 외부잖아요. 눈에 보이잖아요. 지금 어떤 사람이. 거지 나사로 착하다는 내부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거지 나사로 맞은 편에 누가 있습니까? 부자 있지요, 그게 바로 하나의 그림이에요. 외부적인 그림이에요. 사람들은 그걸 본다고요.


아르헨티나 빈민층 안에 빌 게이츠 산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에요. 여기서 빌 게이츠라 하는 것은 제가 거지 나사로를 말하는 거고, 아르헨티나 빈민층을 저는 부자로 대입시키겠습니다. 혼란 일으키지 마세요. 왜 혼란 일으키지 말라 했냐면, 내가 해놓고 미안한데,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외부적으로 자기 내부를 볼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인간은 외부성이 와야 내부가 비로소 자기의 반응을 나타내요.


돈 있을 때에 자기가 다들 착하다 여겨요. 근데 있는 돈 사기 당하고 전세 떼이고 엄마 2만원만 줘 하고 자살하고, 그 미추홀 그 동네 전세사기 당해가지고. 그런 일 당할 때 다 내 탓이요 할까요? 세상 험하다고 탓할까요? 인간은. 내가 나쁜 짓해서 당한 겁니까? 세상이 험해서 당한 겁니까? 사기 당해봤어요? 사기 당하면 사기 친 사람이 나빠요? 내가 나빠요? 사람들 뭐라 합니까? 그놈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린다 하잖아요.


인간은 외부성에 머물러 있는 거에요.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가 돌아다니는 거에요. 전체를. 너는 계속 감추고 있다는 거에요. 돈 많으니까 율법 잘 지킨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돈 횡령한 불의한 청지기는 돈도 지금 바닥났고, 그리고 횡령했으니까 율법적으로 불의하잖아요. 불의한 가운데 불의로 뭘 한다? 친구로 매수하지요. 그게 자기가 착하다고 우기는 인간, 너희들 바리새인보다 더 지혜롭다 이 말이죠. 수능 정답 나왔어요. 수능 정답.


어쨌든 간에 율법으로 어쨌든 간에 죄를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죄를 들추어내는데 주께서는 전력으로 다하고 있어요. 외부적으로 죄라 하니까, ‘나는 가난하니까 상관없고 저 나쁜 사람들이 그랬어요’ 이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보자 이 말이요. 내가 이야기 할게. 부자가 있고 여기 가난한 사람 이야기해줄게. 거지가 데모했습니까? 부자 앞에서. 네가 나한테 준 게 뭐냐? 이렇게 막 데모하고 부자한테 대들고 했습니까?


만약에 가난한 사람이, 왜 그래서 제가 아르헨티나 빈민촌을 부자로 보는 이유가 있어요. 가난한 사람은 이 탓이 우리가 가난한 것은 미국의 자본주의와 결탁된 우리나라 자본가들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외국 자본이 다 수익을 다 가져가서 우리 4500만 국민들은 빌어먹게 되었다. 이 탓을 누구에게 합니까? 외부자 탓을, 외부성을 탓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거지 보세요. 얼마나 거지가 순한지 부잣집 개가 가서 핥아도 가만있어요. 반항했습니까? 아니죠. 반발했습니까? 아니죠. 아무것도 안하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라고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이러해야 된다는 거에요. 외부는 돈이 있든 없든 간에 내부는 율법의 완성, 언약의 완성으로 기뻐해야 이게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이 되어서 아브라함과 합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이것이 십자가 이전의 이야기죠. 그렇다면 이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땅에 있다? 없다?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거지 나사로가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서 부자 탓, 사기꾼 탓, 세상 탓하는 그 탓 탓 하는 인간들의 그 율법 위반은 네가 부자가 되는 거지가 되든 상관없이 모조리 다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율법의 위반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해주고 있죠.


16절 다시 해보겠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 때까지요. 그 후로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럼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뭐냐? 완성했으니까 요한 이후에 하늘나라가 복음으로 완성될 게 아닙니까? 그게 뭐냐? 15절에 나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뭐다?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러면 지금 그 당시에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사람들 누굽니까?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이 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죠?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높임을 받는 거에요. 성스러움에 가장 근접한 부류라고 생각해서. 속으로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면서도 율법으로 그게 커버되는 거에요. 자기는 불의하지 않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바리새인을 겨냥해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이 세상이 구조 자체가 불의하다. 율법으로 바르게 살면 구원받습니다 그 구조 자체가 그게 바로 불의한 거에요. 율법을 지킬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여기에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그것이 미움 받는다” 하면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높임을 받겠죠.


그러면 주님께서 그 다음 이야기하는 거에요. 누가 사람에게 높임 받고 누가 하나님께 높임 받는가? 고르세요. 하나는 부자, 하나는 맞은 편에 거지 나사로. 이게 무슨 성? 내부성이 아니고 외부성. 외부적으로 나타난 증상. 내면적으로 나는 증상은 나중에 지옥 가서 부자가 이야기할 거에요. 지금 남들이 봐도, 심지어 개가 봐도 개도 알아요. 사람 무시하는 거 개도 알고 같이 무시해요. 개도 얍삽해, 인간 닮아가지고. 힘 있는 세력 있는 걸 좋아해요. 특히 손자 손녀들은 누가 돈, 힘을 갖고 있는가 기차게 알죠. 재물이 매개라니까요.


오늘 제목을 재물이 매개라고 할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일단 외부적으로 누가 미움을 받는가? 거지 나사로, 누가 높임을 받는가? 부자죠. 그 다음에 16장9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죠.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거에요.


영원한 처소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 불의하다 참되다 거짓되다 라는 이 대립된 구조, 이 구조 말고 영원한 처소와 이 세상 자체의 구조를 율법이 의도적으로 양산한 거에요. 율법이. 율법이 개입됨으로써 이 땅에 있는 것은 무조건 천국과는 대립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왜? 율법의 완성은 또 하나의 구조를 만드니까.


거기에 간다는 것은 이 땅에서 얼마냐 착하냐가 아니라 이 땅에서 얼마나 미움 받느냐로 가는 거에요. 본인이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누가 떠밀어야 돼요. 마치 불의한 청지기를 불의하다고 욕하듯이. 떠밀어야 돼요. 너네는 뭐 천국 가는 방법이 왜 그래? 십자가 피만 빌리면 다가? 다다! 뭐 그렇게 하는거야. 미움 받죠. 너는 왜 착한 일 안하는데?


주께서 피를 뽑아내는 증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모든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숨겨놓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그 구조의 율법의 완성하는 이중구조에 우리가 Aa, Ab, Ac로 성도가 있는 거에요. 증상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의 증상. 그걸 증인이라 해요. 증인. 거지가 뭘 했습니까? 개한테 핥아졌다고 천국 갑니까? 아니에요. 거지는 증상이에요. 다른 구조, 영원한 처소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대립되었냐 하는 요소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에 의해서 은연적으로 배치를 딱 한 겁니다.


지금 남은 시간동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부자가 지옥 가서 드디어 자기의 내부성을 드러내요. 자기의 내부성. 뭐냐 하면은 자기의 잘못을 모릅니다. 잘못은 이미 아브라함이 이야기했어요. 25절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얘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잖아” 좋은 것을 받았잖아. 뭡니까? 인간은 자기의 내부성은 외부적인 재물로 내부성을 눌러버려요. 부자 되었으면 모든게 용납되는 거에요.


그런데 지옥가면 부자가 박탈되어요. 다 빼앗아버려요. 외부성이 박탈돼버리면 내부성은 뭐가 나와요. 자기 내부성이 그대로 노출되겠지요. 부자 되었기 때문에 건방진 정도가 아니고 원래 건방졌어요. 원래 건방졌어요. 가난한 자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돈이 없어 못 건방져서 그래요. 가난한 자 돈 줘보세요. 금방 한 건방하죠. 건방 떨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부자와 거지라는 것은 여기서는 주님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지 본래 인간이 착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지는 이 땅에서 누리지 못했어요. 미움 받았어요. 하지만 너는 좋은 거 받았잖아. 그리고 26절, 전에 했죠, 너와 우리 사이는 뭐가 껴있다. 갭이 있어서 건너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그럼 동생들 여기 못 오게 하소서. 이렇게 하니까 31절이죠.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듣지 않는다”


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자. 거지 나사로가 죽은 데서 살아났다 했죠. 그럼 여기서 거지 나사로의 일을 하시는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이죠. 율법 지킨다고 성경 지킨다고 하는데 막상 인간들은 뭘 안 지킵니까? 예수님 십자가 믿고 부활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뭘 안 믿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의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을 못 믿는 거에요.


내가 예수 십자가 믿고 내가 부활 믿어서 그걸 토대로 천당 가려고 하는 거에요. 주님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증상이 아니라, 나는 나의 훌륭함의 증상으로 살려고 하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아직도 자기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우기는 자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증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구조를 다 박살냅니다.


끝으로 다니엘 5장 5절 벨사살 왕 때에 벽에 뭐가 나타납니까? 벽에 손가락 글씨 나타나죠. 율법이 외부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죠. 그리고 신약이 되면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율법이 우리에게 내부적으로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라. 그걸 못 지킵니다.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우린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죄가 더욱 더 죄인 드러나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십자가 전의 말씀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할 때에 그 이루어진 내용 안에 누가복음 16장이 다 들어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씀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감사히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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