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십자가와 짐승(계11;7-11)이근호070204

아빠와 함께 2013. 12. 8. 03:03

본문 : 요한계시록11장7-11절
 이근호 07-02-04 13:20 
십자가와 짐승
2007년 2월 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7-11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계 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계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1: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무저갱’이라든지 ‘짐승’, 혹은 ‘십자가’, 혹은 ‘하나님의 생기’라는 용어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기에 마치 현실에 있지 않는 비현실적 용어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사태나 이 세상의 내막을 파악하는 것은 기껏 어두운 산길을 작은 손전등에 의지하여 앞길을 개척하는 식 밖에 안됩니다.

만약에 새벽이 되어 여명이 떠오르면 자기 손에 손전등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비로소 여기 저기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배치도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여명이 떠오르게 되면 비로소 발견하는 숨어있는 큰 현실의 배치를 알려줍니다. 즉 악마가 실제로 있고 모든 것이 십자가 사건을 큰 뜻을 펼치는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를 살려낸다는 구조 속에서 비로소 ‘나’라는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가 알려집니다.

이 때부터 성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합니다. 즉 말씀이 내 속에 살아나면 나는 죽게 되고, 반대로 내가 크게 살아나면 말씀이 내 안에서 썩은 채로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경 말씀 전체를 해석하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성경 말씀을 자체적으로 흉내내면서 실천에 옮길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자기 의로움’이고 이것은 날이 갈수록 우리 내부에서 축적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려진 하나님 사랑과, 지독한 자기 집착으로 인해 우리의 내부에서 치열한 힘 겨루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은 주장하게 됩니다. 과거에 교회에 충성을 하고, 돈 바치고, 정성 바치고, 시간 바친 그런 노동을 한 우리 자신을 천국까지 밀어붙이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그렇게 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날아오는 하나님의 긴 팔 같은, 하나님의 자기 아들 사랑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면 신으로부터 보상받게 될 예상도를 미리 머리 속에 그려보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기 예상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성도는 마치 태평양 넓은 바다를 하염없이 둥둥 떠다니는 사랑의 편지가 들어있는 투명한 병과 같아서, 언제가는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병이 깨어져야 그 안에 담긴 사랑의 편지가 공개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만이 담겨 있기에 깨어지기는 커녕 자신이 끌어 모은 재산 속에 자기만의 영원한 영지를 따로 만들어서 그 어떤 외부인의 침입을 거절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을 찾거나 예수를 찾는 것은 자기 만의 영역을 더욱 확산시키려는 탐욕의 의도에서입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깨어지기 싫다는 겁니다. 인간의 소유란 단순히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오늘날에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 자기 절대화를 확정받으려는 법적 권한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 소유물에 대해서 그 어떤 외부인도 배제한다는 권리를 법적으로 확답받는 개념이 ‘소유권’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 소유권 개념이 교회 안까지 침투했다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는 이유가, 자신을 깨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더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절차 같은 용도로 도입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들 속에 있는 사랑의 편지를 드러내기 위함으로, 그리고 또 도대체 어떤 세력이 하나님의 사랑에 정면으로 대드느냐를 밝혀내기 위해 성도로 하여금 짐승 세력에 깨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운명이란 자기가 선택한 운명이 아니라 자기 안에 낯선 운명이 이미 들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그 운명이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아드님의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는 그 운명의 코스를 성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악마는 악마대로 확실히 드러나고, 성도가 성도로서 확실히 드러나는 그 만남의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것이 바로 소돔이고, 애굽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자신 곳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스스로 악마라고 소개하면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오로지 십자가만을 증거할 때, 그것이 미워서 배척하는 계기를 통해서 악마의 정체를 폭로케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사야 1:10에 보면, ‘소돔’이란 딴 동네가 아니라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겠다는 자칭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이 모인 집합소입니다. 거기에는 악마의 화신들이 성도를 죽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고 주목하고 있는 곳입니다. 요즈음 같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지붕 꼭대기까지 장식을 해놓았지만 정작 그 건물 안에서는 돈이 되는 교회 행사 준비로서 일년 세월을 다 보내게 됩니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특별 주일 같은 것으로 교인들은 교회 스케줄에 얶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 생활에 보탬이 된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실은 돈을 긁어내는 이벤트일 뿐입니다.

만약 그 교회 안에서 십자가만을 외쳐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얼굴을 찡그리며 흉하게 나오는지를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은, 자칭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만을 외치는 자들이 망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을 강단을 세우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만 외치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큰 힘이 못되는 지경이 이르면 그들은 큰 승리하도 한 것처럼 서로 축하하기 바쁩니다.

결국 이것은 십자가 복음으로 위장한 악마의 화신들입니다. 오로지 악마의 말에만 충실하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소위 자본주의 정신을 긍정적인 것으로 교회 안까지 주류적 진리로서 번창시켰다는데 있습니다. 돈과 병행해서 인간들의 자기 의로움과 같이 병행시키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도의 이러한 절망적인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죽어야 성도 안에 담겨 있는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사랑의 힘의 위력이 넘칩니다. 그 사랑이 그 성도를 그냥 자신을 간직하다든지 간수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봉사하고 하게 헌신하게 합니다. 이미 죽음까지 가벼운 짐이 되었기에 성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위력을 발산케 합니다.

에스겔 37장의 말씀처럼 성도는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음을 상기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생각말고, 지독한 자기 사랑이 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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