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31011a (평강)―이 근호 목사
살후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여기에 나오는 평강이라는 계명이 상당히 난해 한 계명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이 편안하다하고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 평강이라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신약의 교회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하는 뿌리를 봐야 돼요. 그 뿌리가 구약의 이스라엘이 돼요.
그래서 그림을 그려보면 이게 구약이라면 이스라엘이 커집니다. 이스라엘이 커지다가 제일큰 것이 다윗 때입니다. 바벨론 갔을 때는 좁아지면서 가늘어지다가 여기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드디어 여기서 막장, 끝이 되어 버려요. 더 이상 없습니다. 끝나 버렸습니다. 여기서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요 데살로니가 후서에 보면 교회에게 뭐라 하느냐 하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다른 말로 하면 ‘평화가 있을 찌어다’ 이렇게 되고 평화라고 하는 것은 전쟁 또는 투쟁 중에서 너희에게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만 평화가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벌리는 전쟁 가운데 하나님의 안식은 뭐냐 하면 투쟁 속에 있다는 겁니다. 태풍의 눈, 알지요? 태풍이 도는데 태풍의 제일 한 가운데는 고요합니다. 굉장히 고요합니다.
고요한 지점에 있다는 말은 지금 태풍이 주위의 소용돌이가 고요를 가마 태우듯이 몰고 인도 하는 겁니다. 고요님, 우리가 잘 인도 하겠습니다. 옆에 주변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고 그 중앙에는 생산되는 것이 뭐냐, 고요함이 생산되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밖에 전기날 톱같이 맹렬한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안에서 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평강과 평화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하는 나라이고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싸움 인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전쟁 중, 투쟁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평강을 이해해 버리면 이게 무슨 식이 되느냐 하면 ‘요새 잘 지내지? 아무 일 없고?’여러분, 아무 일 없으면 안 돼요. 항상 하나님의 평강과 평화라는 것은 계속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가운데 태풍의 눈으로 거기에 자리를 잡아야지 ‘음, 요새 아무 일 없어!’아무 일 없으면 나가 떨어져 간 거예요. 전쟁터에서 패배자로 한 쪽에, 바깥쪽에 나가떨어진 샘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태풍의 소용돌이가 이스라엘이 겪어오면서 태풍의 눈처럼 이 안에 씨앗이 들어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터지고 막장이라는 말은 여기서 완전히 절벽으로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자체가 이미 완성이기 때문에 더 완성한다고 더 나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평강이나 평화라 하는 것은 그 뿌리가 되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바로 전쟁 중에 고요, 전쟁 중에 하나님의 안식, 휴식이라 보면 되는 겁니다.
항상 이 세상 주변은 투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평강, 태풍의 고요에 들어가려면 전기톱같이 돌아가는 속에 통과해서 이 안쪽으로 태풍의 눈으로 우리가 들어가면 되겠네! 이렇게 하지만 여기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밖에서 밀어내고 있거든요.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어디를 들어가요? 못 들어가요. 들어올 경우에는 본인이 나서서, 설쳐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빨려 들어가야죠. 진공청소기처럼 윙하고 전기의 빨림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오면서 먼지도 휩싸여 들어오죠. 같이 빨려 들어가거든요. 그런 경우 아니면 여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식의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안식, 쉽게 말해 영생이고 구원이고 천국인겁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유명한 말이 나오죠. 하나님의 나라는 뒤에 괄호가 있다면 그 괄호를 여러분이 채워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기분)좋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 위에 있다) 여러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데 로마서 14장 17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고 뒤에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그런데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했으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천국, 영생나라를 하늘나라를 태풍의 눈처럼 이렇게 합류하고 포함하고 있더라도 먹고 마시는 것이 성공했다, 먹고 마시고 돈 벌고 생존하는데 성공했다는 그것을 만약에‘야, 나는 이제 살만해 나는 월급얼마 얼추 돼, 밥 먹고 살 수 있어! 나는 너무 평강해!’ 이런 평강 같으면 이쪽에 있는 평강에 참여하지 못하고 전부 다 전기톱에 튕겨나가버려요.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이쪽에 들어오려면 뭘 해야 돼요? 성경말씀을 다 의심해야 돼요. 성경 말씀을 다 의심하세요. 이게 의심이 안 된다면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에게 의심이 안 된다면 우리는 지식으로 알았던지 아니면 정신을 생존에 팔렸던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말인데 그 이전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내가 존재하는 것을 의심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무엇을 생각하는데? 내가 지금 존재하는 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존재 안하는 게 아닌가! 존재하는 게 맞기는 맞는가? 내가 나 맞는 거야? 내가 나, 맞는 거야? 생각할 수 있는 권한이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우선이 아니고 내 생각이 우선이란 뜻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없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까 말까 하는 결정권도 누구한테 있다는 겁니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전부가 일임되어있지 믿으라하는 것은 네가 결정하라는 그런 뜻이니까 내가 결정하겠어! 믿을만하면 믿고 안 믿을만하면 안 믿겠어!
어쨌든 믿을까 말까를 생각을 나는 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철학자는 전부 다 천주교이거든요. 천주교에서 사람을 구원한답시고 성당 만들고 거기에 제도와 규칙을 만들어 났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의심을 하면서도 ‘아이 차려진대로 밥을 먹어야지 내가 따진다고 돼?’구원받는다 했으니까 구원받아야지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전부 다 헛수고 했다는 겁니다.
네가 생각할 수 있다면 생각하는 네가 너의 인생을 책임져야지 왜 자꾸 너 생각은 안하고 뭐 신부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교회가 이런 소리 하니까 뭐 나는 전문가도 아니니까 맞는 소리겠지, 미궁으로 남들한테 자꾸 그렇게 떠넘기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소리 하면 그 쪽에서 뭐라 하겠습니까? 내가 성경말씀이 따지려고 하니까 믿고 싶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잘 안 믿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믿을 것만 골라 믿고 안 믿는 것은 안 믿는다, 이렇게 마음 정리하고 싶어도 옆에 있는 신부의 말, 형제여! 그러면 믿음이 없는 겁니다. 몽땅 믿으면 믿는 거지 골라 믿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라는 그런 구박을 받을까봐 그게 듣기 싫어서 아예 신부님 시키는 대로 다 믿겠습니다. 이게 속이 편해 하고 나갔다면 그 사람은 이 태풍의 눈에 시작도 안했다는 겁니다. 이 태풍의 변두리에 있는 겁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이 옛날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준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사람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진짜에요 안 믿었어요. 그러면 안 믿었는데 이스라엘이 유지되었는가? 유지 되게 하셨지 유지되었다고 너희들이 믿는 것이 맞는다고 하나님이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지 시켜 줬죠. 유지시켜 준 것하고 그러니까 믿습니다.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노아방주에서 8명이 살아남았잖아요. 8명 다 살아났으면 노아 뒤쪽 이야기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8명 다 구원받았습니까? 어떻습니까? 그중에 함 식구는 구원을 못 받았죠. 저주 받았잖아요. 그러면 저주 받았는데 방주는 왜 탔는데요? 의심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타라 해서 타는 거예요. 자기 빼 놓고 남이 타니까 자기는 친구 따라가야 돼요? 누구 따라갈까요? 남의 집을 따라갈까요?
의심을 하게 되면 그것은 불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천국에 못 가잖아요. 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천국을 못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예수 믿어 아무 소용없다는 의심을 왜 사전에 안하셨습니까? 그것을 의심을 안 하고 믿으니까 믿어도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처음부터 구원의 배를 다시 타야돼요.
오늘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6절에 마지막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했거든요. 여기 평강이라는 단어가 옛날에 구약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쟁에 승리했다고 준 단어입니다. 평강, 그것은 그 이스라엘 내부에 제사가 있는데 마지막 제사가 뭐냐 화목제사가 있어요. 그 화목제가 통과되었다 화목제에 대한 혜택을 입게 된 너희들은 이제 하나님의 역사를 얻게 되었다는 표시로 평강이라 하는 겁니다. 이 평강이 요새 잘 있나? 별일 없지? 이런 뜻의 평강이 아니에요. 우리는 별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밥 먹고 사는데 바쁘다보니까 정작 주님께서 투쟁하시는 영적 전쟁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예 발을 드려 놓지도 않았어요.
발을 들여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내 밥 먹고 사는데 개콘식으로 하면 신입이 그렇게 해서 밥 먹고 살겠니? 빌어먹고 살겠니?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이래가지고 밥빌어 먹고 살겠나를 매일같이 아침 눈만 뜨면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나온 평강이라 하는 것은 이제는 밥 빌어먹고 산다할 경우에만 평강이에요. 어휴- 이제 됐다. 이제 직장에 앉아서 월급 제때 나오고 4대 보험 되고 보너스도 1년에 몇 번 나오니까 어휴 이제 평강이다. 그것은 평강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평강이라 하는 것은 모든 구약에서 흘러내려오는 이 말씀에 대해서 완성 속에 내가 포함되었다 하는 이름의 평강입니다. 그러면 그 완성 속에 있다 하는 말의 평강이라는 말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을 봐야 이해가 갈 텐데 마태복음 10장 12절을 보면
마 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어떤 제자들이 둘씩 짝지어갈 때 어느 집에 들어가면 평강을 빌라 그런데 평강이 그 집에 합당하지 않으면 도로 튕겨 나올 것이고 합당하면 그 집에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다? 그렇게 해서 10장 6절을 보면 내가 잃어버린 이스라엘 집의 양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현재 이스라엘이 있어도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엉터리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나라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만드는 작업방식이 뭐냐 하면 평강을 외쳐서 합당하지 않으면 평강이 튕겨 나오고 합당하면 평강이 임하게 되고 평강이 임한 그 집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평강이 합당하지 않으면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이게 무슨 말이냐는 말이죠. 우리 송재원 집에 평강이 임할지어다고 했는데 이야기하자마자 튕겨 나오면 평강을 줘도 평강을 받을 그런 위치에 있지 않는, 이스라엘이 아닌 집에 평강을 빈 거예요. 왜냐 하면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는지 모르잖아요. 모르기 때문에 그냥 평강을 빕니다. 합당치 아니하면 튕겨 나오는 거예요. 합당하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합당하지 아니하는 그 집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생각해 봅시다. 합당한 사람이나 합당치 않는 사람이나 둘 다 현재 이스라엘이 없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있는데 예수님이 오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없어요. 어디에도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나,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끊어진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된 것을 가지고 그들은 오해하기를 착각하기를 자신이 열심히 기도 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이라고 그나마 유지 되었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되게 했는데 이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를 잘 믿었기 때문에 그나마도 유지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노아방주에 있어서 노아방주에 8명이 들어갔는데 8명이 들어가도 그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게 아니지요. 누구는 빠져야 돼요? 함과 그 자식들은 빠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방주 들어갈 때 빠질 것 같으면 애초부터 재껴 놔 버리지 왜 그 사람들을 방주에 들어오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노력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센 거예요. 그래서 노아방주의 이스라엘들이 다 망해야 되는 겁니다. 사실은 망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오해해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됐기 때문에 그러면 차라리, 나는 내가 구원을 받아? 약속으로? 말도 안 돼! 이것은 의심해 볼 일이야, 나는 이 성경 말씀을 아무리 봐도 성경말씀을 믿을 수가 없어! 이래야 정상이에요. 이게 믿음의 시작이에요.
베드로가 물을 위를 걸었어, 안 믿어져, 그럴 일이 없어,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면 나도 걸을 수 있는데 해 보나 마나지 물에 빠지는 것이 당연한 거고 누가 물위를 걸었다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것은 말이 안 돼! 라고 의심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의심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게 있느냐 하면 네가 이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느냐? 믿습니다. 하는 이런 인간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지 예수님께서 평강을 주실리가 없거든요. 이스라엘의 끝이 예수님이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것은 아들이 아니고 진짜아들은 예수님이 아들입니다. 아들이 가짜 아들을 기다린 거예요. ‘어서 오너라! 가짜들 어서오너라 내가 아들이야!’ 이스라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아들,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 만드는 겁니다. 만들 때 만드는 그 제공하는 그 혜택은 예수님이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을 주시는 것이지 우리한테 협상하거나 타협하거나 우리를 달래거나 네가 내 말을 알아 듣겠나?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너는 내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협상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인간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인간은 믿음에 대해서 실패했어요. 이스라엘이 싸웠다는 것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하고 적군들하고 싸웠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전쟁에서 항상 하나님은 자꾸 요구하는 게 있어요. 제발 너는 좀 빠져 줘! 이 말이거든요.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겨놓고 나중에 골리앗을 잡아놓고 하는 말이 이것은 내 전쟁이 아니고 나의 여호와께서 개입한 전쟁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도 주위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어요.
그러나 당사자 다윗은 알아요. 이 전쟁이 내 전쟁이 아니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안다 이 말이죠. 다윗만 알고 나머지는 아무도 몰라요. 사울도 몰라요. 그럼 다윗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덕분에 골리앗도 이겼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덕분에 왕이 된 거예요. 그러면 왕이 되면 끝나지 않았습니까? 끝나지 않았어요. 다윗은 또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덕분이라는 그 깊이가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 줘야 돼요.
하나님의 덕분이라는 것을 어느 시점에까지 계속 쓸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계속 죄를 지어야 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야 장군을 죽였거든요. 우리야 장군을 죽였으면 우리 같으면 이 정도 하면 다윗은 이제 지옥 간다 싶은데 우리야 장군을 죽여 놓고,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죽인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죽이도록 했죠. 그러면 다윗은 죄가 없습니까? 죄가 있기 때문에 죽도록 했다니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우리가 사람을 죽이면 내가 사람을 찔러 죽인 죄인이라 하잖아요. 다윗은 그 죄를 안게 아니에요. 내가 우리야 장군을 죽이기 이전에 밧세바와 간음하기 이전에 이미 나는 그 다음에 뭡니까? 죄인이죠. 다윗이 안 것이 내가 사람을 죽였다니 나같이 나쁜 놈, 나같이 나쁜 놈, 그것은 납득이 돼요. 왜? 나쁜 짓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뒤편에 세워놓고 계속 모르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아직까지 사람도 안 죽이고 간음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살만하다 하는 그 자체는 주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의심만 자아낼 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의심으로부터의 자유, 의심에서부터의 믿음이 아니고 의심으로부터의 자유, 의심한다는 그 죄, 그 죄로부터 벗어나는 그 구원을 준 겁니다. 우리가 의심하세요. 하지만 구원밖에 일어나야 됩니다. 구원하고 상관없는 의심입니다. 우리의 평생은 의심의 세월이에요. 모정의 세월 아닙니다. 의심의 세월입니다.
평생 우리는 의심합니다. 또 의심합니다. 에이 하나님이 없을 건데……. 우리는 항상 의심의 세월입니다. 실컷 의심하다가 주님의 평강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다윗의 잘못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오기전까지의 잘못은 뭐냐 하면 내가 나쁜 짓을 할 경우에만 내가 죄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그 생각입니다.
나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없다는데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도저히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나는 그것을 의심하겠어! 했는데 그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야 장군을 죽게 했고 그래서 다윗이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우리야 장군을 죽여서 죄인 되는 것, 간음해서 죄인이 아니라 나는 언약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는 죄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평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태풍의 눈, 전기톱 같이 날카로운 태풍 안쪽에 하나님의 안식, 휴식이 있는데 여기에 합류를 해야 되는데 합류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합류할 때 이 돌아가는 날카로운 투쟁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투쟁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죄 같으면 이런 숙제를 내지도 않아요.
여기에 돌아가는 톱니바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일으켰고 그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하는 영적 세력과 싸움입니다. 이 사이에서 인간들은, 이스라엘은 그냥 빨려 들어갈 뿐이에요. 싸움은 하나님이 하시고 그들은 그냥 빨려 들어가서 하나님의 혜택을 입었어요. 혜택을 입으면서 그들은 뭐라고 오해를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이게 다 하나님의 덕분이라고 의심도 하지 않고 오해 가운데서 자기를 믿는 사람인양 그렇게 처신한 것, 그거 실수입니다. 멸망해야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쁘게 봐서 하나님이 우리나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우리가 할 수 없는 전쟁을 주께서 치러서 우리는 그 혜택으로 편안하게 지금 이스라엘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거 신앙 아닙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있는 장차 오실 누구를 지키는가?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내가 있다를 예수님 보다 앞장 세운 겁니다.
예수님이 있다고 느낀 것은 그 당시 소수의 선지자들뿐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선지자속에 무슨 영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들만이 엘리야, 모세 같은 사람들 보세요. 그들만이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면서 이스라엘 속에 있다는 혜택은 나 말고 다른 분의 공로로 혜택 입은 것이지 내가 여호와의 말에 순종해서 얻은 혜택이 아닙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의심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우리가 아는 것이 없고 무지해서 그런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의심되는 일만 만들어 내요. 저보고 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기어이 우리의 힘으로 믿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그런 사태와 사건들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매일같이 우리에게 나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야구중계를 보니까 9회 초에 두산하고 넥센하고 야구를 하는데 2대1로 두산이 한 점 이겼어요. 마지막 마무리 투수가 와서 공만 잘 던지면 이제는 두산이 승리를 가져오는데 카메라가 찍는데 두산 팬들을 카메라에 잡는데 전부 다 여자 분들이 기도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윤명산인지가 던지는데 공을 던지는데 하늘에 던지고 있어요. 그래서 쎄컨에서 써드로 올라갔거든요. 그 다음에 공 던진 건 밑으로 세서 한 점 나서 동점이 되어 버렸어요.
이 기도 발은 뭡니까? 이게 무슨 기도발이에요? 세상에 그 선수가 공을 그렇게 던진 적이 예전에 한 번도 없었어요. 그 두산 팬이 에이 내가 다시 하나님 믿으며 기도 안한다고 할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평강을 영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믿어서 영생 얻는다는 소리를 못하도록 에이씨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도록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골라 믿는 겁니다. 내가 시나리오를 짜서 믿는 겁니다. 그것은 사기이고 엉터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심하는 자체로부터 자유를 얻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의심은 하면서도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 관계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전에는 의심했었는데 이제는 성령이 임해서 잘 믿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요? 그 믿는 것 따져 볼까요? 오늘도 두산하고 넥센하고 야구하는데 믿는데 기도해 보지, 의인의 믿음은 능력이 있는데 응답이 있나 기도 해 보죠?
우리가 신약 대목에 와서 우리가 구약은 어렵고 신약은 쉽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오산입니다. 신약에 와서 우리는 어려울 정도는 아니고 말씀이 완전히 우리의 손을 떠나 버렸어요. 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완전히 우리가 질수는 풍선이 아니에요. 우리가 할 것은 우리는 매일같이 의심하는 의심의 하루하루 일기장의 달력을 넘길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여! 일이 이렇게 돼서는 내 앞길이 막막한데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라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야, 일이 터졌는데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자꾸 하나님이 감당 안 되는 일을 주시는지 모르겠다! 그게 주께서 일부로 그렇게 만들어요. 하여튼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평강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땅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평강이 없어요. 그러면 평강은 어디 있느냐, 이것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들사이에만 평강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죄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강이라 하는 것은 조건이 붙어요. 죄가 없는 경우에만 평강이 해당되고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평강의 반대, 전쟁, 하나님의 죄에 대한 맹렬한 심판과 저주와 전쟁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평강은 물 건너갔어요. 인간에게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빈 공간으로 추방한 게 아니에요.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따라온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저주가 따라온 거예요. 애를 목욕시키면서 욕조에 넣으면서 하나님께서 뭘 탔어요. 죽으라고 독약을 탔어요. 낙원에서 살다가 그래도 좀 힘들지만 여기서도 살만하다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살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이마에 땀이 삐질 삐질 나도록 만들고 여성에 애기 낳는 고통을 줘서 결코 절대로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겁니다.
살만한 곳이 못되면 그러면 살지 말지 뭐! 라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없거든요. 살만한 곳이 못되더라도 내가 오기가 있어서 기어이 나는 살아야겠다는 하나님의 뜻과 이질적인 뜻을 함께 주께서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평강이라는 것은 아예 찾을 수 없는 세상에 우리를 던져 넣는 거예요. 아담을 던져 놓고 전부 다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평강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평강이 있었잖아요. 하면 이스라엘은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님 사이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잠시잠깐 평안이 있을 뿐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평강이라는 게 없습니다. 평강이 없다는 것에 여러분, 한 표 던지세요. 그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평강은 없습니다.
평강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있습니다. 왜냐, 그 사이 에서만 죄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안지면 되잖아요? 인간이 죄를 안 짓겠다는 그게 죄입니다. 인간은 이미 새삼스럽게 잘하겠다는 자체가 자기 주제를 모른데서 오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입 다물고 있지, 입 다물고 있어도 죄입니다. 그러면 입 떼지, 입을 떼도 죄입니다.
왜 그러느냐?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누구를 탓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나무라는 게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아닌 이상 평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평강이 없는데 우리가 태어났느냐? 그것은 죄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죄는 뭐냐? 죄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앞에서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발휘할 때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 말씀은 전부 다 믿는다고 하지 말고 이것은 도저히 못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모든 말씀이 따지고 보면 다 그래요. 빌라도가 예수님 재판할 때에 자기 마누가 뭐라 했습니까? 여보 꿈자리가 사나우니까 재판할 때 당신이 그 점을 참작해서 재판해 달라고 할 때에 빌라도가 그것을 생각해서 재판하고 난 뒤에 세숫대야에 손을 씻었지요. 바로 그 자세가 이게 빌라도답지 않은 자세인거예요. 왜냐 하면 그 다음에 재판할 때에 손을 세숫대야에 또 씻습니까? 아니죠. 아이 남자가 돼 가지고 내가 여자가 한 마디에 했다고 이렇게 나약한가? 돌아서면 자신의 나약한 행동에 대해서 굉장히 후회하게 되어 있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전에 교회 한번 다녔잖아요. 그때 내가 남자가 돼가지고 스스로 일어날 생각안하고 하나님 덕 봐서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뭔가 어려움 헤쳐 보려는 그 줏대 없는 행동, 지금 와서 나는 너무 후회스럽다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잖아요. 어려울 때 교회 나오지만 그 다음부터는 다시 제 정신 돌아온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아주 극한 어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교회 안 나올 가능성이 높아요. 그게 우리의 본 모습이고 또 지금 어중간하게 있는 것은 어중간하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믿음도 없으면 믿는 있는 척하는 그런 모습일수가 있어요. 차라리 우리가 잘 먹고 잘살기 이전에 처음부터 의심부터 하고 들어갑시다. 잠시만요, 우리 의심하고 들어갈게요. 하여튼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부터 하자 말입니다.
의심을 하게 되면 그게 우리의 속마음과 딱 맞아요. 제가 울산 가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 사모님이 교회가 멀다고 교회를 안다녔답니다. 말로는 우리교회가 머니까 제 아내는 가까운 교회를 가겠다고 하는데 사실은 가까운 교회를 가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6개월 동안 인가 1년 동안 인지 교회를 안다녔답니다. 교회를 안 다니까 그렇게 편할 수 없답니다. 교회를 안 다니면 그렇게 편해요.
교회를 억지로 나오니까 교회를 안 나오는 그 평강이 얼마나 좋은 평강인지를 우리가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속이지 맙시다. 처음에는 좀 찝찝하지만 그 찝찝한 것은 과거의 관습 때문에 그런 것이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교회 안 다니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교회 다니는 시간에 목욕통 들고 목욕탕 다니는 것이 그렇게 편하고 좋고……. 처음에 생중계할 때는 시간 맞춰서 보지요, 그 다음부터는 안봅니다. 생중계할 때 녹음되니까 생중계할 때 딴 짓하다가 다 끝나고 봐요. 편해요.
왜 자기한테 솔직하지 못합니까? 그 편한 것을 왜 평강을 놓칩니까? 그렇게 편한데 구원은 받았거든요.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이런 수가 다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빡세게 애써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12제자를 통해서 전하게 하는 겁니다. 어떤 집에 문을 열어 갑자기 들어가면 누구십니까? 이 집에 평강이 있을 찌어다! 아아 하나님이 쳐 들어왔구나! 그러면 그 집은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된 집이고, ‘저리 안 나가! 야야 소금 뿌려라!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이러면 그 사람은 지옥갈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더 위선적이고 더 올라오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평강이 있을 찌어다! 하면 그것을 보고 이 미친 인간이야! 하고 말하는 자가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아멘! 감사합니다. 제게 구원을 주시다니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 것은 이것은 항상 의심 하는 내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다 두고두고 항상 의심하는 누가 의심한다고 누가 뭐라 하면 의심안한 척하지만 사실은 의심 다하는 그게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렇지 않고 믿어진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나는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이미 본인이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같이 의심 많고 나같이 편한 것 좋아하고 나같이 하나님하고 사귀기 싫어하는 인간은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까발려 주면서 이 태풍의 눈에 빨려 들어가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이 태풍의 눈이 무엇의 싸움이냐 하는 그 점을 밝혀내야 됩니다. 태풍의 눈을 감싸고 있는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이기에 우리인간이 나도 믿습니다. 하고 끼어들 그런 자리가 왜 아니냐 말이죠. 야, 헌금하겠습니다. 전도하겠습니다. 교회 봉사하고 교회 충성 다 하겠습니다. 이런 것으로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 이 싸움이거든요. 인간은 여기에 끼어들면 안돼요. 빠져야 돼요. 그 싸움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싸움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왔어요. 하나님이 아들하나님과 아들사이 에 언약이 있고 이 아들이 아들 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말고 다른 인간들하고 싸우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은 싸울 대상이 안돼요. 안되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은혜로 인도하듯이 저쪽에는 뭐로 인도 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온 이야기, 뭡니까? 강퍅케 하시는 작용을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발시켜 버려요. 그 출애굽 10가지 재앙가운데 바로 왕이 사람 됨됨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닌데 성경에 보면 10가지 재앙이 떨어질 때 마다 바로 왕은 뭐라 평가를 받습니까? 바로 왕은 강퍅케 됐는데 그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음이라 우리가 그 말을 고지 들어 봅시다. 저 사람은 진짜 괜찮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약을 올려버리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퍅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해서 그 인간을 하나님의 전쟁 통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영적 전쟁에다가 넣습니다. 본인은 영적 전쟁을 할 생각도 없는데 강퍅한 원수의 종노릇 하도록 주님께서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주님한테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쪽에는 강팍대신에 긍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되어 있어요. 긍휼로 인도하는데 이스라엘은 뭐라고 오해를 했느냐 하면 우리들이 믿음이 좋아서 긍휼을 뽑아냈다고 믿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도 쌉니다. 그리고 그 망한 후손들이 뭐라 주장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땅에서 떠났지만 70년 만에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돌아온 그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예레미야 에스겔에 약속했거든요.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뭐라고 장담하겠습니까? 그렇다 역사적인 약속대로 우리가 70년 만에 돌아와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에스라에게 준 그 약속의 땅, 그 땅 맞는다고 했는데 그 애미가 뭡니까? 그 애미가 마귀인데요. 지금 하나님의 긍휼로 입었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이 모든 섬김은 우리가 이 만큼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새끼에요.
우리가 십자가할 때 십자가를 사건으로 보지 마시고 십자가 사건을 유발요인인데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아요.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 됐을 때는 긍휼을 입을 때는 긍휼의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여깁니다. 긍휼의 원인이 나한테 없는 이유는 저 사람들이 바로가 강퍅한 것은 바로가 나쁜 사람이라서 강퍅한 것이 아니고 강퍅하게 했기 때문에 강퍅하게 된 것처럼 우리는 긍휼을 입도록 했기 때문에 긍휼을 입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원인을 저 사람이 나빠서 강퍅하고 우리는 착해서 긍휼 입었다고 생각하는 이거 의심해도 천번 만번 의심하면서 살아 가야될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보고요? 아니에요.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행하보고 하는 이야기이에요. 태풍의 눈 속에 빨려 들어가게 한 거예요. 누구 덕분에? 십자가의 능력으로 잡아당기다 보니까 너희들은 강퍅해야 되는 대상, 강팍하는 대상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는 불쌍히 여김 받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전쟁 속에 우리는 말려들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평강이라 하는 것은 돈 받고 주는 것도 아니고 착하냐를 검정해서 시험 쳐서 주는 게 아니고 그냥 외치죠. 너희 집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을 찌어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보고 하는 그 평화가 이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네가 이스라엘백성 맞나? 잃어버린 양 맞나? 해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고 이야기해 봐라, 튕겨 나오거든 이것은 강퍅한 인간들이고 받아들이거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다. 그런 식으로 제자들에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한 제자들이 나중에 누가 더 높으냐, 낮나 누가 더 위대하냐! 되지도 않는 온갖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자체가 뭐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혜택을 받으면서도 믿음도 없으면서 곁에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자기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집단인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통하지만 주님한테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통하지 않지요.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어디 갔지? 하면서 목자 친 양들이 아무도 없어요. 그게 십자가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십자가 믿는다고 할 때 그들도 함께 우리도 수용해서 믿어야 돼요. 십자가 쳐버리니까 걸음아 살려라 하고 삼십육계 다 뛰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목자가 치니 다 튕겨버리는 거예요. 걸음아 나 살려라! 믿기는 뭘 믿어! 믿는 척 했지, 믿기는 뭘 믿어요? 그래서 첫째 사건 마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매일 의심하세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뭘 했겠나? 괜히 죽은 사람 기념한다고 했겠지! 지금 성령이 어디 있어! 인간들 노는 것밖에 없는데 …….
늘 의심하세요. 늘 의심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의심에 그냥 눌러 앉을 것이냐 아니면 의심의 바다 그 자체에서 빠져나와서 안식에 들어 갈 것이냐 그 의심에서부터의 자유, 그게 바로 성령이 주는 믿음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31011b (평강)―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 후서 3장 마지막에 보게 되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했는데 은혜라는 것이 어떤 역사나 시간에 구애를 받게 되면 지나간 혜택을 오늘도 받을 수 있어서 은혜냐 아니면 지나간 혜택은 그때만 은혜이고 또 이 시대에 필요한 은혜가 따로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제가 처음 교사로 일할 때 첫 월급을 19만원 받았는데 그 때 생각에 야, 이건 참 주의 은혜다 19만원을 이렇게 하나님이 취직하게 해 주셨구나! 그럼 19만원을 평생 계속주면 얼마나 은혜롭다 할 때 지금 19만원가고는 못 삽니다. 그 때의 너무나 은혜로웠던 그 상황이 지금 그대로 주어질 거냐 말거냐 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지금 19만원 주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죠. 왜 같은 예수인데 한 쪽은 은혜가 되고 그때 은혜가 지금은 왜 저주가 됩니까? 문제가 어디서 발생된 거예요? 그때 19만원이 은혜 같으면 지금 같으면 19만원이 아니라 10만원도 은혜가 돼야 되지요. 은혜다 아니다 할 때 처음에 19만원 받은 것을 은혜라고 여겼을 때 자기는 은혜라고 철석같이 믿었었죠. 그거 의심해 봐야 해요. 의심을 안 해 봤어요. 나는 지금 은혜 받은 거 맞다 했는데 몇 십 년 지나고 보니까 그때는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나 좋은 대로 나 편한 대로 내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은혜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일방적인 해석을 해 왔던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를 누가 가로막느냐 하면 내 포부, 나의 이상, 나의 꿈, 나의 희망, 나의 기대 이것을 은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우기게 만든 이유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은혜는 반드시 방해물을 통과한다. 이 방해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은혜 받은‘나’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소유하려고 하거든요. 소유하는데 은혜는 꼭 침같아요. 여러분, 한의원에서 침 맞을 때 우리가 침을 소유했습니까? 의사 선생님, 방금 뭐 찔렀는데 뭐 찔렀어요? 네 침 찔렀습니다. 침 그거 나 주세요. 진료비 줬잖아요. 침 내놔요! 침은 고객님 갖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받을 테니 주서요. 그런 뜻이 아니고 나는 찌르고 당신은 침을 맞으면 낫습니다. 경락에 침을 맞으면 병이 낫습니다. ‘침도 안주고 혼자 가져가면서 나는 맞아주기만하고 돈은 내가 내고…….’ 이렇게 불평 나오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이 목욕탕에 가서 때주지 돈 주지 이런 손해가 어디 있어요? 우리는 은혜를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이 주시는 침이라고 생각 못하고 나를 분해하고 찢어버린다고 그래서 은혜를 생각 못하고 뭔가 풍성히 풍성하게 푸짐하게 뭐 한가위만 같아라! 이런 식으로 송편 느긋하게 많이 먹는 것을 은혜로야 하는데 송편 많이 먹어 배탈 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가 사도바울이 2차전도 세웠잖아요. 2차 전도했고 3차 전도때 다시 한 번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이 편지를 해요. 은혜가 있을지어다. 계속 은혜가 있을 찌어다 했거든요. 사도 바울이 은혜가 있을 찌어다 하는 것은 마치 침 맞는 것처럼 너를 관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관통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내가 좋아 할 때만 은혜이고 안 좋아할 때 은혜가 아닌 게 아니라 시대를 떠나서 영원토록 은혜 되는 그 은혜를 받아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를 껍데기로 만들고 우리를 만두피로 만들어요. 밀가루 반죽해서 홍두깨로 밀고 막걸리 잔으로 팍팍 찍어 돌리면 동글동글하게 밀가루 피가 나오거든요. 주님은 은혜는 우리를 밀가루반죽해서 밀 듯이 일어버려요. 어려운 이야기인데 우리가 밀가루 반죽이 있으면 밀가루 a, b, c 가 있으면 이것을 한꺼번에 반죽을 해 버리면 ABC가 없어지고 밀가루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은혜를 잘못 오해하는 것이 여기 나, 개열자, 독립자 따로 ‘나’가 있기 때문에 뭐가 와도 충분한 은혜가 소유가 되어 버렸어요. 나를 뭐로 바꿔야 되느냐 하면 이게 아담 덩어리, 큰 밀가루 반죽으로 뭉쳐야 돼요. 우리는 같은 배를 탔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저주 받은 땅에서 같이 태어났고 같이 고생합니다. 한 쪽이 밀면 한 쪽이 밀립니다.
저는 이번에 동양증권의 어음부도사건을 보면서 거기에 만 여명이라는 사람이 완전히 밑 빠진 독에다가 자기 퇴직금 넣고 수억 수천만 원 넣었답니다. 그것도 어려운 동네 사람의 수천만 원 같으면 이것은 전셋돈 빼서 이자 더 받아먹으려고 그렇게 넣었거든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또 젊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디서 찾습니까? 그것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아이 고소해’이것을 느끼거든요. ‘아이 고소해 이자 더 받아 먹은 거 참 돈 빵구 나라! 아이 고소해’라고 할 때 갑자기 삐리릭 전화 와서 ‘언니, 동양 증권에 돈 넣었어!’할 때 갑자기 나와 연관된 사람이 있게 되면 동양증권 이거는 나라에서 갚아 줘야 돼 하면서 갑자기 저쪽 편에 서 버려요. 그게 전부 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 위주로 세상을 은혜라는 것을 내가 잘되는 위주로 은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가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 찌어다 하는 말은 너 이름으로 너 자격으로 너 개별적인 이름으로 은혜를 준다는 말이 아니고 너를 어떤 또 다른 덩어리, 아담 덩어리 말고 또 다른 예수님 덩어리로 생각했을 때 은혜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거 여러분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혼자 있어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은혜에 소속되어 있고 같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을 때 그 때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런 은혜를 주시게 되면 그것은 나에게도 은혜이고 같이 묶여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이고 의존교회도 은혜이고 우리교회도 은혜이고 새순 교회도 은혜이고 화평교회도 은혜이고 또 교회 없습니까? 동양증권 해결됐다고 그게 은혜가 안 되겠죠. 왜냐 하면 동양증권 안 산사람은 같으면 그게 무슨 은혜이고 고소할 뻔 했는데 에이 갚아준단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너나 가리지 않고 같이 예수님하고 붙어있으면 다 은혜가 되는 그 은혜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살후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다음에 뭡니까? ‘강림하심’, 이기 동양증권 이야기 아닙니다. 강림하심입니다. 그 다음에 1절 9절에 보면 살후 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이게 바로 전 역사와 전 시간을 관통하는 한의사가 말하는 침, 길 다란 침 그 침을 우리한테 놓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나만 잘되는 그런 은혜 없어요. 그런 은혜는 거기서 찾으세요. 기존교회에서 찾으세요. 나만 잘되는 은혜, 기도 열심히 하면 나에게만 주는 은혜, 그런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 은혜는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가짜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헌금하는 것을 시주한다고 해요. 아하, 그 표현 참 멋있다 생각 했는데 나는 기껏 기부금 준다고 했는데 그 사람은 더 나가 교회에 시주한다고 했어요. 교회에 시주한다고는 것은 대가가 있었다는 거예요. 누구의 대가? 나에게만 돌아오는 은혜, 그 은혜만을 챙겨서 은혜 없는 저쪽을 한번 꺾어보려고 그쪽보다 우열함을 얻기 위해서 그러나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볼게 되면 우리 중에 가난한 사람이 누구이며 강한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중에 지혜로운 자가 누가 있냐? 가난한 것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없게 하시니라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자랑할게 없나니 이렇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은혜잖아요. 그러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장 2장 3장 했지만 그 전체 내용은 결국 뭐냐 하면 은혜 받고 죽어라 이 이야기입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내 목숨 받칠 때 생겼다는 그것이 진정한 처음이요 마지막까지 가는 영원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내 목숨 걸어도 괜찮은 그러한 내용을 내가 부여 받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맛이 나는 세상이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에다가 자기 목숨을 걸었어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죽어가면서 남 걱정했어요. 주여 저들의 무지함을 용서해 주세요! 몰라서 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위로를 하지 않고 남을 위로 했습니다. 그것은 왜냐? 자기 개별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것들과 한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합시다. 밀가루반죽을 해서 홍두깨로 밀어서 만들게 되면 얇은 만두피가 되잖아요. 만두피는 홀로 있으면 의미가 없어요. 만두피에 무엇이 담겨야 되느냐 하면 은혜가 속이 되는 겁니다.
김치, 당근, 두부, 돼지고기 다지고 후추 뿌려서 섞어서 숟가락으로 퍼서 만두피에 돌돌 싸게 되면 니 만두 내 만두 내 만두 니 만두 없습니다. 왜냐 하면 떠 넣으면 똑같은 은혜의 내용이거든요. 그 은혜의 내용을 데살로니가 후서 전서라는 내용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형제 맞지요. 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세상은 만두피가 될 생각을 안 하고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가 만든 알맹이를 자기 것으로 자기 야망으로 채워서 훌륭한 만두 되려고 하려다가 것은 만두도 아니고 비브리오균에 의해서 전부 다 우리가 전염병 걸려요.
그것은 썩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아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이룬다는 것이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인줄 안겁니다.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람들의 관심사가 하나님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이 뭡니까? 이렇게 돼야 되는데 하나님, 이거 좋아합니다.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해요. 그러면 너 뭐 좋아하는데 나는 이 땅, 고생 많은 세상 떠나서 천국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거 하나님이 안주지요. 왜냐 하면 니가 좋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예수를 위하여 구원받는 것을 좋아해요. 여러분 같은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누가 구원받는 것을 좋아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 너무 힘드니까 어떻게 예수님 덕 봐서 죽어서 천당 가는 것, 그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개별자가 계속 개별자로 끌어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 자기가 만두피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골라 채우다 보니까 십자가도 넣고 언약도 넣고 피도 넣고 온갖 좋다는 것, 성령의 열매도 넣고 온갖 것을 다 집어넣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성경 내용을 바리새인처럼 담아서 이렇게 하면 충분하게 구원받겠지! 거기다가 예수님의 피도 뿌려놓고 이정도 하면 구원받겠지! 그것은 니 좋아하는 거지 주님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 하셔야 하나님이 합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도서 수련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제가 전도서 속에 그리스도를 마지막 정리하면서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요. 어떤 내용이냐 하면 세상에 살 때에 어떤 여자가 남자 7명을 사겼습니다. 전부 다 같은 형제에요. 형이 죽고 난 뒤에 그다음 동생하고 결혼하고 동생 죽고 난 뒤에 또 동생하고 결혼하고 일곱째까지 다 결혼했어요. 하여튼 그 여자는 팔자도 좋아, 부럽다. 남자 일곱하고 진짜 축복받은 느낌인데 문제는 그렇게 결혼해서 살다가 천국에 가니까 그동안 자기 마누라 보고 싶어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아내가 올라온다고 소리를 듣고 전부 다 장미 꽃 한 송이를 준비했다 이 말이죠. 드디어 소방서 내려가는 홀처럼 밑에서 봉타고 천국 올라가서 고개를 내미니까 같은 형제 일곱 형제가 쭉 서어 내 꽃을 받아줘 하면 누구의 장미꽃을 받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리새인이 이야기한 거예요. 한 여자가 7명과 결혼하고 난 뒤에다 죽고 천국 가서 그 여자는 누가 진정 자신의 여보라고 부르면서 할 남자가 7명 가운데 누구냐 이 말이에요. 7명 다 달려들면 밟히고 그 중에 누가 남편이 되겠느냐? 라는 문제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참 예수님은 섭섭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에는 결혼식이 없다. 천국에는 부부가 없다. 천국에는 부부가 없데요. 이 세상에서 마지막입니다.
천국에는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정보가 어떻게 됩니까? 분명히 결혼했는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천국 가니까 아 저 여자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까물까물하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저쪽에서 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이럽니까? 지금 이 지상에서 우리가 얻었던 경험에서의 기억들이 천국 가서 그대로 유지 되느냐 아니면 소멸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수련회 때는 제가 이야기를 안 했어요.
데살로니가후서를 끝내면서 우리가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 은혜가 있을 찌어다 했잖아요.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 찌어다 했지요. 그 은혜라는 만두속에 그 재료가 은혜입니다. 무엇이 섞여서 은혜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만두피고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껍데기가 은혜가 오게 되면 껍데기를 싸는데 이 안에 있는 내용은 너 다르고 나 다른 게 아니고 전부 다 그리스도 안에 동일하거든요. 그 동일한 내용이 뭐냐 하면 이것이 구약전서를 보게 되면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율법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무수한 율법들이 완성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우리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유리하고 우리생존에 필요해서 율법을 준게 아닙니다. 인간을 위해서 율법을 준게 아니에요. 율법은 항상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가 율법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우리가 낀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하고 아빠하고 침대에서 잠자고 있는데 번개 친다고 무섭다고 거기에 끼어든거예요. 침대 한 복판에 나 엄마하고 잘래, 아빠 하고 잘래! 하고 번개 치니까 무서워서 거기에 끼어든 것으로 보면 돼요. 번개 치면 애들 다 무서워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보세요. 거기 아이들 6명이 전부 다 마리아 선생님 침대에 들어와서 노래 부르는 거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이 둘 사이에 우리가 주재 넘게 은혜 받아서 이 가운데 끼어든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누구의 나라가 아니다? 원래 우리나라가 아니에요. 나의 개별자의 나라가 아닙니다. 나 좋으라고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 좋으라고 하늘나라가 주어진 게 아닙니다. 만약에 나 좋으라고 하늘나라 가면 나는 거기서 나는 대장질해요. 동네 깡패 갑니다. 만약에 내가 좋아서 하늘나라 갔는데 지상에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놈이 왔으면 우리는 같이 있기 싫어요. 저 인간 낯짝 보느니 내가 차라리 지옥가는게 낫다 하고 지옥 갑니다.
극락이 왜 지옥이냐? 거기가 나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가짜가 되는 겁니다. 불교의 극락이 가짜입니다. 불교는 만날 극락이고 만날 좋은데 간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그 숨어 있는 아버지와 숨어있는 아들, 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이 만들어 낸 종교가 뭐냐? 불교이고 이슬람교 아닙니까? 그런 나라에 죽어서 간다는 말은 다들 자기 인간들의 공통점을 끌어 모아서 그것을 다시 극대화시켜서 아마 이쯤하면 우리가 영원히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거야! 라는 그 세계가 천국이라 겁니다.
특히 이슬람의 천국은 여자가 많아요. 그래서 그것을 이룬다고 지상에서 일부다처제를 해서 네 명까지 나옵니다. 사실은 마호메트는 네 명 더돼요. 7명 정도 됐어요. 그게 뭐냐 자기들 즐겁고 자기들이 행복하면 자기 자신이 행복하게 계속 유지 되면 그것을 사람들은 극락이다, 천국이다, 영생이다, 구원이다, 축복이다 그렇게들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은 큰 교회 간 겁니다. 큰 교회 모인 겁니다. 사도 바울이 당회장 하면 교회가 클 수가 없어요. 십자가 못 박아 죽이라고 하면 달려들 걸요.
우리가 살고 봐야 돼요. 어느 교회가 재밌더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생에서 얼마나 행복하냐가 아니라 성경대로 살고 봐요 성경에 있는 대로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참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이 땅에서 인기 좋으면 뭐 합니까? 천국에 못가면 그만인데요. 아까 제가 길에서 젊은 사람이 담배 핀다고 시비를 거니니까 젊은 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달려들면 뭐해요 중요한 것은 천국인데 이 세상에 왜 지옥인지 알아요? 사람들 마다 담배 피우지 말라하는데 자존심 상하는 거 그게 천국이 아닌 증거예요. 천국 가서 자존심 상하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천국가면 여기서 무슨 소리를 해도 자존심이 상할까요? 안 상할까요? 안상하죠. 아예 안상할 사람들만 오게 되어 있어요. 아예 자존심 없는 사람만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땅에서 자존심 애는 방법을 해야 돼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교회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몇 번 왔다 갔다 하지만 천국은 한번 가면 끝입니다. 천국에는 자존심 없습니다. 인간이 자존심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자존심 없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있던 모든 정도를 없애 버립니다. 어떻게 없애는가! 예를 들께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르다 마리아 오빠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까 한 것을 복습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을 강퍅케 해야 바로 왕이 강퍅케 해 집니다. 벌써 몇 분 지났다고 다 잊어버린 게 아니겠죠. 저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은 본인이 마음이 악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못 믿게 만들었기 때문에 때려 죽여도 안 믿어요. 주님이 손길이 가해졌어요. 주님이 손길이 같이 하면 안돼요. 주께서 알아서 강하게 하신 것은 왜 나는 믿는데 왜 안 믿었는가? 내가 착해서 믿는 게 아니에요. 저쪽에 강팍케하는 것은 너도 잘난 인간 아니야 그런 뜻에서 강퍅케 하는 거예요. 주께서 강퍅케 안 해 주신 것을 천만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쪽은 강팍케해서 안 믿고 이쪽은 긍휼을 줘서 우리가 믿는 게 아니고 긍휼을 믿죠. 믿지도 않는 것을 불쌍히 여겨 줘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긍휼, 사랑을 믿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에게 일부로 병을 들게 해요 병에 들고 즉시 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시름시름 앓게 만들어요. 여기에 마르다 마리아가 이것은 예수님을 호출할 타임이다 싶어서 급한 마음에 예수님께 후딱 호출했어요. 지금 우리 오빠가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오락가락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실 차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오빠 죽기 전에 와 주세요! 할 때에 그것을 제자들도 듣고 예수님도 다 들었어요.
듣고 난 뒤에 제자들을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얘들아! 어떻게 생각하지? 고쳐야 됩니다. 가셔야 됩니다. 그래, 좀 기다렸다가 가자! 그리고 기다렸는데 그만 오빠가 죽었어요. 죽었다는 소식 듣고 이제 가자하고 일어났습니다. 지금 지상에 사는 정보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그 대목을 설명하는 거예요. 이야기하면 뒤 돌아서면 다 잃어버리죠.
이미 오빠는 죽어버렸습니다. 오빠가 스스로 나는 몇 년 살다가 아프게 될 것이고 예수님은 아마 안 올 걸 안 오고 나 죽고 난 뒤에 오실거야 하는 이런 계산 전혀 못하고 있어요. 아프다. 자기가 나는 낼 모레 아플 거야 하는 이런 인간은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낼모레 아플 것을 예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못 살아요. 다 주께서 이미 계획한 대로 갈 뿐이지 우리가 내 인생 내가 살리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살려줘야 사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 죽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르다 마리야가 오빠는 이미 죽어 없어지고 오빠의 모든 기억들은 마르다 마리야가 그대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드디어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 마르다 마리야가 이야기합니다. 왜 이제 왔습니까? 진작 오시죠. 일찍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건데요.
그 상태로 마르다 마리아는 천국 못갑니다. 왜? 이 세상 모든 기억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은혜의 방해물이 누구라 했습니까? 은혜 받는 내가 방해물이에요. 따라서 은혜를 우리에게 소유하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그 한방 의사가 침을 놓듯이 우리를 관통하게 만들어요. 뭐가 지나갔지? 뭐가 나를 뚫고 지나갔지?
제가 대중가요를 몇 개 알지는 않지만 노래들을 때 마다 늘 가슴 아픈, 슬픈 노래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나훈아가 불렀던 청춘을 돌려다오 인데 6시 내 고향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부르는데 너무 슬픈 거예요.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옆에 할머니까지 합창을 하면서 불러요. ‘청춘을 돌려다오’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청춘을 돌려다오는 하는데 이게 돌려집니까? 청춘을 돌려달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청춘이라는 젊음을 다오 내가 소유하겠다는 거예요. 청춘은 관통하는 겁니다. 소유하는 게 아니고 관통해서 흘러가버리는 거예요. 은혜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돌려다오 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는 그냥 통과 하는 거예요.
통과하게 되면 내가 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나 위주의 정보, 나 잘되기 위해서 나 출세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했던 모든 것은 같이 관통이 되어 버려서 그게 은혜의 방해물이라는 사실을 똑똑하게 우리가 보여 주면서 천국 가서 면류관까지 반납하게 돼요. 주여! 관통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청춘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청춘을 통과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통과한 그게 나를 살렸어요.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살린 것이 아니고 나를 뚫고 지나가면서 내 허점과 허접스러움과 내 죄악과 내가 얼마나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인가 노출시킨 그 긴 침이 나를 살린 거예요. 십자가가 살린 거예요.
예수님의 강림의 소식이 나를 살린 거예요. 예수님의 강림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냥 덮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만 신경 쓰고 못 갖는 것은 버리거든요. 오빠를 내 놓으라는 거예요. 제가 꿈을 꿨는데 치매 걸린 우리 어머니께서 육군 복장을 하고 도쿄 근처에서 나무를 공격하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죽은 내 남편 찾아내라 죽은 내 남편 살려내라! 자식도 필요 없고 내 남편하고 살던 그 시절이 그립다는 겁니다. 오껭끼데스까 하고 똑같은 거예요. 내 남편, 그 때 잘 계십니까? 만날 대전국립묘지에 찾아간다는 거예요. 왜? 거기에 아버지 묻혀있으니까 그때 내 남편 있던 그 시절이 좋다는 거예요.
소유로서 살다가 그 소유된 것이 없으니까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그 빈자리를 메꿀 어떤 방법도 없으니까 자기가 괴로워 미치는 거예요. 뭐로 자기의 빈자리를 메꿉니까? 그 빈자리가 있어야 나다운데 나다운 보여 주는 그 빈자리가 텅비어있는데 그것을 뭐로 채웁니까? 자식의 사랑? 요양사? 백날 해도 메꿔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죽은 내 남편 살려내라! 내 옆에 붙어 있으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 마리아는 전혀 예수님을 몰랐어요. 그런 상태로 천국못 갑니다. 오빠하고 살던 그 정보, 이 세상에 살던 그 정보가지고 천국가면 안돼요.
주께서는 바로 왕을 강퍅케 한 것처럼 구원받을 사람에게 믿음을 만들어 주는 작업에 나섭니다. 그 작업이 뭐냐? 소유 대상되는 그 오빠를 죽여 버립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자기가 안 죽었지만 자기 오빠가 죽었지만 웁니다. 왜냐 하면 오빠가 있을 때 자기는 비로소 자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만큼 그 사람의 기억 속에는 오빠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이 곧 자기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치워버렸었어요. 예수님께서 일부로 병들게 해서 죽기 전에 고쳐달라고 했는데 일부로 그 소리 들어도 안 들은 척하고 그 다음에 죽고 난 뒤에 가버리죠. 그러면 오빠의 빈자리 아는 어떤 것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채워 주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오빠를 채워줄 때 그때 예수를 계속 믿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자기 청춘을 믿을 수 있도록 주께서 도와주시면 그때서 예수를 믿겠다는 겁니다. 내가 나다울 때 내가 내 식대로 살 때 그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할 용의가 있지 만약에 내 것을 뺏어 가버리면 나는 예수고 뭐고 안 믿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는 모든 일은 바로 우리가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본색을 그냥 들어 내 주는데 삼남매를 이용합니다. 이게 성경이고 이게 계십니다. 계시는 뭐로 봅니까? 바로 우리의 진면목을 다 보여 주는 겁니다.
예수님 보다 오빠를 더 사랑했던 겁니다. 그래서 우는 겁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우리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 적이 없구나! 하고 우시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말하기를 오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더 중요해! 아주 기본 중에 기본 아닙니까? 오빠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 말이죠. 죽은 오빠는 내가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내가 더 중요해. 구약성경에 나오죠. 여호와는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높게도 하고 낮추게도 하고 있다가도 없게 하시고 없다가도 있게 하시고 주신자도 하나님이 거둔 자도 하나님이요. 구약성경 뭐 봤습니까?
우리는 백날 봐도 그게 내 욕망에 부합되지 않으면 우리는 믿을 생각도 안 해요. 잘 해 줘야 좋아하지 잘해 주지도 않는데 뭐, 예수님께서 신약때 의도적으로 오빠를 죽이고 마르다 마리야로 하여금 오빠 믿지 말고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오빠와 더불은 인생보다도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 이것이 바로 진정 그리스도와 영원히 사는 인생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오빠한테 가자했습니다. 어디에 묻혔느냐? 주위사람들이 가지마세요. 소용없다 했습니다. 너나 소용없지, 소용없습니다. 죽은 지 나흘 됐습니다. 자, 퀴즈입니다. 죽은 지 나흘된 것을 살리기 편합니까? 죽은 지 넉달된 것을 살리기 편합니까? 죽은 지 40년 된 것을 살리기 편합니까? 죽은 지 4천년된 것을 살리기 편합니까? 어느 게 살리기 편합니까? 죽은 지 한 4천년 되면 그 뼈 조립하는데 시간좀 걸릴 건데? 힘줄 챙기는데 힘줄 어디 갔어? 박테리아가 다 먹었구먼! 그거 찾는데 힘듭니까? 어떻습니까? 사라졌다고 보세요. 그 모든 게 인간이 죽으면 그 자체로 사라지고 주안에 있으면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겁니다.
결혼도 안 하고 장가도 아니 가고 마치 하늘에 뭐와 같이? 천사와 같이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무엇을 재료로 해서? 죽은 나사로를 재료로 해서 죽은 마르다 마리야, 그리고 죽게 될 저와 여러분들을 재료로 해서 주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천사되게 하시는 겁니다. 리모델하시고 주의 신부로 만드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어요. 보여 줘도 못 믿어요. 왜? 우리는 아직도 청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직 내께 있으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태를 일으켜서 이 땅에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체크해서 지워나가는 삭제해 나가는 그런 사태를 우리에게 성도에게만 해당하게 주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옛날 사귀었던 사람과 갔던 그 바다가 새끼손가락 끼고 지문찍고 둘이 안고 그렇게 약속하면서 좋았던 그 시절, 야, 그 때로 돌아가 봤으면……. 둘이 그 바닷가에 가 보세요. 그때 기분이 나는지? 하나도 안 나거든요. 아무리 우리 좋았던 타이밍에다 그 장소에다 그 노을에다가 똑같이 배경 잡아 카메라 달고 돌려놔도 이상하게 그 때 그 기분이 안나요. 찬송가도 여러분 은혜 받은 찬송가를 그 다음에 불러보세요 지루하지요. 4절까지 있고 뭐 이래 다른 거는 3절까지 있는데 뭐 이렇게 길어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인간은 뭔가 처음부터 우리는 본인이 삭제당하면서 뒤로 펄펄 뭘 날리느냐 하면 추억과 낭만만 자꾸 날리고 있는 거예요. 그 추억과 낭만은 허구입니다. 없어요. 지금 있는 것은 이 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 때 우리는 인간이 생각이잖아요. 이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없고 인간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을 몸으로 바꿉니다. 인간을 몸으로 바꾸게 되면 그냥 바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십자가, 하나님의 언약, 율법, 십자가 다 이룬 언약, 이것을 동원 시켜 버리면 인간이 아니고 몸이 되는데 이 몸이 뭐냐 하면 육신이 돼요. 육신이 남긴 모든 추억 기억은 하나의 낭만이며 허구에 불과한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몸은 옛날 그 몸이 아니고 그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날 잡아봐라 잡히면 죽인다 하면서 따라 다녔던 그 몸은 지금 없어요. 그런데 팔팔했던 그 몸은 없고 머리카락은 한 쪽은 다 빠지고 없어요. 지금 늙어 빠져서 그렇게 하면 욕합니다. 주께서는 안 쉬십니다. 지금도 일 하시는데 이 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흙으로 육신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요. 바꾸면서 우리는 옛날 우리의 몸이 남겼던 이 낭만과 추억을 잊어버리고 뭐만 해야 되느냐 하면 언약은 나를 죽게 만들어요. 그 언약의 믿음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언약의 믿음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주님의 강림 그리고 십자가 그리고 부활, 이런 것들을 우리 몸을 육신으로 되게 하는 거예요. 부활을 보여 주기 위해서 육신이 돼야 되고 강림을 위해서 죄의 몸이 돼야 되고 언약을 보여 주기 위해서 다윗은 우리야 장군을 죽여야 했던 거예요. 다윗이 그것을 알았던 거예요. 내 추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정보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었다는 모든 정보는 사실은 언약의 흔적이고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아요. 언약이 다녀간 언약이 작동했다는 언약의 증거물들이에요.
그러면 아담아 네가 흙이 되라 할 때 이 몸은 뭐가 됩니까? 흙이 돼서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흙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보다 더 세다 그 센 것이 나를 구원한 겁니다. 왜? 그 약속안의 십자가와 용서와 부활과 영생이 그리고 강림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육신을 하나님의 언약대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이 사슬을 모르고 성질이 급해서 인간에서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니까 인간에 있을 때 있던 모든 추억과 기억과 정보를 그냥 그대로 가져가려고 했었던 거예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바로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예를 들기를 어떤 여자가 남자 일곱을 사겼는데 천국 가서 누가 남편이 되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바로 그들은 인간에서 하나님이 믿고 새로운 피조물 되겠다고 자기 의지로 자기 의심 없이 자기 믿음으로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통로를 밟지마시고요 인간을 몸으로 만들고 육신으로 만드는 죄의 몸을 만드시는 이 경로를 따라 가게 되면 이 경로 가운데서 우리의 추억이나 우리의 정보라는 것은 그저 펄펄 냄새나는 죄의 잔재들뿐이라는 겁니다. 저주 받은 그런 조합들이라는 그것을 우리가 알지요. 아무리 10대 때 아름다워도 80대되면 그것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말을 하지를 못해요.
어제 발표한 세계 노벨문학상 받은 캐나다 여자, 수필 단편작가 나이가 82세에요. 제 생각에 52만 됐어도 그 지성의 미모가 얼마나 빛이 났겠는가! 너무 늦게 받았어요. 82세 옆에 보니까 83세 된 친구가 좋아하고 있어요. 둘 다 늙었어요. 상금이 2십 몇 억 된다고 하는데 보세요. 아무리 잘 쓰면 뭐합니까? 몸은 수시로 늙는데요. 사람이 생각할 때 가장 괴로운 게 뭐냐 하면 바로 어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따져 보세요. 어제가 없다는 사실, 날마다 끊어지는 것 같아요. 늘 끊어지는 것 같아요. 여기 애들 3살, 4살 때 얼마나 예뻤어요. 지금도 예쁘지만 안 이쁜게 아니고요. 그런데 애들이 말썽 부리면 7살 때는 얼마나 예뻤는데 엄마 젊은 것은 생각 안 하고 애 늙은 것만 걱정된다 한다니까요. 본인 달라지는 생각은 안하고요.
옛날의 은혜가 은혜롭다면 지금도 은혜가 은혜로 와야 해요. 단 조건이 있어요. 옛날 은혜가 내 욕망을 채워줬기 때문에 은혜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구원받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은혜라면 그 과정 속에 우리가 여전히 놓여 있다는 그 자체가 여전히 오늘도 우리는 은혜로와야됩니다. 그렇다 은혜로우려면 우리는 내가 갖고 있던 욕망과 포부에서 나오는 내 본색은 그저 노출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믿어도 내 뜻대로 안되고 믿기지도 않아 하는 의심을 마음껏 원 없이 의심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 없이 의심을 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감추었던 나의 죄성이 그대로 노출되면서 그래 이런 정보는 천국에 다 갖다 버릴 거야 필요 없어 하는 그것을 느끼시면 됩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내가 의심을 하는데 어떻게 그게 믿음이 됩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마음껏 의심을 해 보세요. 마음껏 의심을 해 보면 비로소 말씀이 내 손에 의해서 다루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이 믿어져요.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다루어지지 말씀이 내가 관리하고 내가 쥐고 내가 소유하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유된 그 말씀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의 본색은 뭔가 소유해야 믿음도 소유하고 소망도 소유하고 소유해야 안심을 하는데 안심해야 뭐합니까? 내일되면 또 내가 달라지는데 이 몸은 점점 더 죄성을 보여 주는데요. 짜증내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감사하기는커녕 미워하고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믿지 맙시다. 결국은 그 말이에요. 우리 자신을 믿지 말고 이 말씀은 주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존교회 평화로우냐? 평강이 있을 찌어다! 아멘 하면 돼요. 가만 있어보자 내가 평강 받을 짓을 했나 따져보고요. 이러지 말고 너희에게 강림이 있을 찌어다 하면 고맙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왜 따집니까? 내가 그만한 것을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요. 그러지 말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끝으로 이것만하고 마치겠습니다. 마르다 마리야가 주님에게 나사로를 보여 줬습니다. 그래서 마르다 마리야가 나사로와 행복하게 영원하게 살았습니까? 결국은 나사로가 살다가 죽잖아요. 죽게 되거든요. 죽을 때 또 마르다 마리야가 예수님을 부릅니까? 우리 오빠 죽었어요. 이렇게 부르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오빠는 주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처럼 오빠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들도 누구 손에 달려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들었다 놨다 주님이 요물 같아요. 주께서 들었다 놨다 이 사용하신다는 그 연관성,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의 발걸음과 머리카락이 세시는데 우리는 건성으로 믿었다고 우겼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왜 그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 기쁨이고 은혜인지 은혜가 임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왜 내 힘으로 못 믿는 것인지 두고두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