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눈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 앞에 자신의 몸을 개방하셨습니다. 거침없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죄가 예수님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들이 스며듭니다. 하지만 갈수록 집단화되고 하나로 응축된 양상을 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죄는 권력화된 죄입니다. 따라서 그 죄의 무게에 의해서 예수님은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속으로 죄가 채이기 시작했고 그 끝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저주받으시기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봐야 할 표적인 바로 이런 ‘요나의 표적’입니다. 죽음의 바다에 빠지는 요나의 몸이 지닌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자신을 망하고 하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모른다는 말은 곧 자신의 멸절되어야 될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들’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인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정작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자리인 아들의 자리는 인간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저주성은 사실 인간이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는데 있는 당연한 하나님의 처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사랑은 오직 인간을 건져내신다고 치러야 할 그 ‘빚’의 형편을 표면화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복음에 대해서 관람객이나 손님이나 구경꾼이나 쇼핑객이 아니라 복음 전개의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반에 물 세례 받고 물 세례 받으셨는데 이제 남은 세례가 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 세례’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즉 전에는 물로 심판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합니다. 피할 생각 마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방법은 다니엘 세 친구들처럼 ‘자기 의’를 가지고 불 속에 미리 던져넣는 일입니다. 거기에 미리 불세례 받으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내 자랑’을 용납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나의 가치를 날마다 묵살하는 자리에 내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사랑이란 이런 겁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둘이 사는 겁니다. 여태 가보지 못한 곳으로 그분의 것이 된 채 함께 가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때로는 두려울 겁니다. 하지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과 성도 사이에 ‘사랑의 힘’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표면으로 드러내시고, 속에는 자기 의로 인한 죄 인식을 심화시키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 것을 받는 신 (0) | 2023.04.09 |
---|---|
제3의 영역 (0) | 2023.04.07 |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 (0) | 2023.04.04 |
그 역할 하라고 태어남 (0) | 2023.04.04 |
할례안에 우리의 고향이 (0) | 2023.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