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책은 예수님의 일기장이에요. 생명책의 존재는 예수님이 등장 안했으면 그 생명책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약에 나오지만 그것은 모호해요. 왜 객관적이 아니니까. 객관적이 아니에요. 실제로 그 책을 본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생명책의 그 내용은 그 생명의 노트에 있는 그 명단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뽑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께서 출몰하셔가지고 예수님 하는 모든 이야기가 데려갈 자만 데려가고, 생명책 명단, 명부에 기록된 사람만 구원받기 위한 작업으로서 주께서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작업의 과정중 하나가 인간의 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름으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몸을 이름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죽여 버리고 우리의 이름을 죽은 이름으로 간주해서 그 죽은 이름과 그 다음에 누구의 이름이냐 하면,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결합시켜서 그래서 자기 이름으로 된 그 생명책, 주님의 일기장에다 “나는 10월 00일에 또 하나 건졌다.” 하는 그 일기장, 일지 쓰듯이 일기장에다 죽은 자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등록시켜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 명단, 리스트, 그 명단은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창세전에 이미 의논이 끝난 이야기에요. 다 이야기 된 거예요. 사람의 몸은 죽으면 이름도 죽는다는데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이름이 성도한테는 그냥 이름이 아니고 인자의 이름이거든요.
인자(人子)라는 말은 뭐냐? ‘사람의 아들’이에요. 내가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왔다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에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일의 출발점이 이 땅에서는, 하늘나라에서는 아니고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일의 출발점을 나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출발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누구 이름이냐 하면, 이것은 사람의 이름이지요. 인자에요. 사람의 아들 이름이에요. 예수가. 예수라는 그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이 사람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사람의 아들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구약의 말씀, 기록된 그것과 결합이 되어버리면 사람의 아들이 이게 주의 이름이 되어버린다고요.
분명히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자기를 인자라고 호칭을 하는지?’ 그 의미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다 담겨 있어요.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약 올리듯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자, 인자는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기록된 것과 결부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과. 나는 성경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 절차대로 가게 되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자와, 진짜 사람의 아들과 사람도 아니면서, 흙이면서도 사람이라고 우기는 자들의 그 차이, 그 차이를 예수님께서 최초로 우리보다 먼저 앞서서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 차이성을. 그러니까 성도가 할 일은 차이남, 그것만 하시면 돼요.
최종적인 차이점은 뭐냐 하면, 생명책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생명책의 내용은 예수님의 자기 행하심으로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생명책의 내용에 대해서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자리나 내가 보탤 것은 전혀 없어요.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보탤 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님의 나라에 가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또 책 하나가 있는데 그걸 데스노트, 죽음의 책이라 했는데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책들이 있고 또 다른 책이 있어요. 그 책들은 자기 행한 대로 기록한 책이에요. 한쪽 책은 인간이 행한 대로 기록된 책입니다. 행한 대로 기록한 그 행함의 모든 집대성, 거기에 정신이 결집이 되어서 나타난 결과가 뭐냐 하면 십자가 죽음이거든요. 인간의 모든 행함, 생명책에 없다고 여기면서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그 정신의 집대성, 집결된 그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을 유발한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을 결집할 때 그들은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거든요. 그 책은 행함책이에요. 다시 말해서 행함책이라 하는 것은 생명책의 명단에서 빠져버린 지옥 갈 자들의 명단이 모여 있는 책, 생명책 외의 다른 모든 책, 그래서 모든 책은 자기 이름과 관련된 책이에요. 자기 이름대로 살았던 사람의 전력이 죽 기록되어 있는 각 개인의 책들이에요.
책들이니까 그 책들이 죽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책은 뭐냐? 각 사람이 행한 그런 내용은 여기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의이름으로 행했기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기 때문에. 오직 주의 이름만 드러나는 책이 생명책입니다.
인간의 몸이 다가 아니고 이름이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실 때에 몸부터 먼저 보내신 것이 아니고 이름부터 먼저 보낸 거예요. 그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이라고 구약에서 죽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으로 오셔야 될 이유가 뭐냐? 이름으로 오셔야 연약한 인간들과 함께 동행이 가능해요. 그냥 몸으로 와버리면 너무 영광스럽기 때문에 다 죽어요. 모세가 살았던 것은 주의 이름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산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제는 이 산위에서는 모세라는 네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너는 모든 혜택을 입게 되어 있어요. 그 이름으로.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걸 보직이라고 합니다.
생명책은 성도들의 직장이에요. 회사입니다. 내가 결정한 스케줄이 아니고 주님 결정한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모세가 묻지요. “제가 하나님을 무슨 이름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까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자, 이 이름으로 인하여 이 세상 모든 신들,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이렇게 스스로 있는자가 투입함으로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생명책에 명단이 있어 결정 났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고 스스로 결정할 몫이니 구원받는 네가 거기에 개입하고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네 구원에 대해서 뭔가 설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신자체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훈련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가 실습해야 돼요. 이 땅에서. 보통 만나는 사람에게. ‘네가 감히 나를 해석할 생각하지 마 이런 식으로. 너 나를 분석할 생각하지 마. 네가 추구하는 세계와 내가 추구하는 현실 자체가 달라.’ 스스로 있는 이름, 그 이름에 의한 부산물, 그 이름에 의한 생산물, 그 이름이 우리 이름이에요.
스스로 있는 이름에 의해서 똑같은 본질로서 반복해서 재생해서 이 땅에 퍼트려진 이름이 바로 성도라는 이름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인데 성도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예요. 그 이름이지요. 그래서 성경전체에서 그 이름의 특징은 뭐냐? 왜 이름이냐? 왜 몸체가 아니고, 사물이 아니고, 개체가 아니고 이름이냐?
이름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속성 끊어짐이 없기 때문에. 너는 죽지만 나는 기록된 대로 인자는 영원한 거예요. 그러한 연속성이 어떤 식으로, 리스트가 이 세상에 어던 구체적인 현실을 보여주느냐? 그 리스트가 지워지고 다시 기재가 되는 그 과정을 거쳐서 진행됩니다. 그러니 인간세계에서 생명책의 리스트 해석이 불가하지요.
출애굽기 32장 30-32절에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주께 책이 있고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책을 봤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책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남는 것은 기록된 말씀밖에 없다. 그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기록된 말씀이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남는다는 것은, 마감이 책밖에 없다는 것은, 시작이 책으로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알파요 오메가가 책으로 나와요. 두루마리 책으로.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이 책을 그 시작과 끝을 누가 구체화시킬 것이냐? 이걸 누가 풀어서 세상으로 완전히 현실화 시킬 것이냐’ 하며 울고 있을 때 ‘울지 말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책의 앞뒤를 다 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은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활동,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의 활동에 의해서 일기장처럼 기록된 것이 생명책이에요. 그러니 생명책은 그냥 책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책에서의 내용이 지상에 구체적인 현실로 전개되고 펼쳐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펼쳐지고 그것이 응집되고 다시 모아지면 그게 책이 되는 거예요. 생명책과 그리고 그 외의 책들, 인간의 행함책들. 불 못에 들어가는, 유황불에 들어가는 책들, 기록된 명단 리스트. 이렇게 인간이 이름위주로, 이름으로 살아야 될 운명은 바로 인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는 이름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그래요.
몸이 아니고 이름으로 활동해요. 이름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이름은 아까 출애굽기 3장에 의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이름을 대시고 그 스스로 있는 자가 뭐냐? 15절에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그러니까 이 영원한 이름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께서 던져준 언약대로 실시된 결과가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언약대로. 그러니까 성도에게서 나올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된 것만 나와요. 약속된 것만!
하도 같은 예를 수십 번 들어서 나도 지겨운데요. 또 그 예를 이 자리에서 들 수밖에 없습니다. 꼬마인형인데 말을 못하는데 배를 꾹 눌러보니까 “알라뷰!(I love you) 알라뷰!” 자꾸 말을 하는 거예요. 그게 숨겨진 정보인데 그것밖에 말을 못해요. 성도를 쑤시면 주님의 약속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알라뷰. 주님으로 된 나라는 뜻이거든요.
“주님 때문에 내가 있어요. 나로 인하여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로 인하여 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있고 나는 나중이었습니다.” 그게 최종성이야. 마지막 때, 위기 때 마지막 나타나는 특이한 인간종류야. 이게 특이한 인종이야.”
모세가 ‘주님께서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달라.’ 할 때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그냥 사람을 건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워짐이 뭔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이 뭔지를 실제로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하나님 명단이 회복된다는 것이, 이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 뭔지를 부활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그 기록, 예수님이 하신 그 기록이 여기에 장착된 자들이 성도에요. 성도는 주님의 기계요, 인형입니다. 주님의 운명이 우리 운명이에요.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주를 사랑하면 되지 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굳이 그 개념을 확보해서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겁니까? 그러면 안돼요. 그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행함이 되지요. “너 신앙인 아니야? 뭐하는 사람이야?”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러면 될 것 아닙니까?
구약 때도 주의 이름으로 나타날 때는 그 당시 이스라엘과 차이 나는 모습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붙잡고 그것으로 자신의 목적 희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은 또는 주의 이름으로 온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주의 이름은 그들의 계획과 목적과 기대를 부숴버려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 해보자.’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갑자기 해가 멈춘다든지 그래서 전쟁에서 이긴다든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생명책에 있는 그 내용은 인간 네가 끼어들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끼어들 내용이 없어요.
인간이 생명책을 가지고 자기 소유화시킬 수가 없어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살만큼만 살면 됩니다. 지낼 만큼 지내면 되고요. 어떤 세상적인 가치에 대해서 휘둘릴 필요가 없어요. 그들의 평가에 놀아날 필요가 없다고요. 이 땅에서.
아브람과 아브라함. 언제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려고 애를 썼습니까? 야곱이 이스라엘 언제 야곱이 이스라엘 이름을 사전에 예상을 했겠습니까? 야곱은 인자의 이름, 육의 이름이에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이냐? 주의 이름입니다.
주님이 얍복강에 찾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이 몸이 내 이름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다뤄진 야곱의 몸인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지금 오늘날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다 없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여기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지난 시간에 ‘주안에서’ 했거든요. 오늘은 생명책. 생명책, 주안에서. 그 다음에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다음에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이 관용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해석불가라는 뜻이에요. 네가 나에 대해서 해석할 수가 없어. 왜? 나는 차이 그 자체니까. 차이 그 자체에요. 내가 예수님을 갖고 다닌다든지 예수님을 내 맘대로 한다, 그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차이 나는 그 자체를 보이듯이 우리도 차이 나는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에서 그 이유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는 거예요. 이것도 차이 아닙니까? 이것도 차이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골로새서 3장 3절입니다. 하도 유명하니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나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이것도 차이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 아버지, 내 것 따로 챙기지 말고 주께서 이 땅에 자신의 차이남을 보인 것처럼 사람의 이름과 주의 이름의 차이남을 보이는 하나의 기계로서, 증인으로서, 우리가 이런 보직을 맡은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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