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진짜 신앙인은, 말씀에 준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역사 속에 제대로 보여줬어요. 이것은 요셉 본인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마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인생이 뭐가 잘못되었기에 내 인생은 날마다 더 아래로, 지하실 쪽으로, 감옥같은 지하로 멀쩡한 나를 멀쩡하지 못하게 이렇게 조지십니까? 내가 원하는 거 있는데 왜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벌려놓으십니까?
그것은 사람이 찾아가지 못하는 노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찾으려고 아무리 애쓰고 심지어 환란과 고난을 흉내 내서 스스로 치고,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백날 해도 찾아갈 수 없는 노선이 우리를 마중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노리는 평강을 제끼고, 그것을 꺾어버리고, 그것을 찢어버려야 비로소 내가 예상치도 못한 평강이 확 밀려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복음이 열리고 말씀이 열린다고 하는 겁니다.
감춰있던 것이 비로소 면면을 드러내는 거예요. 어떤 분이 말합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 자신은 있어도 평생 결혼할 자신은 없다고. 심지어 삼십 대인데 그런 발언을 막 해요. 그것은 내가 결혼을 선택했을 때의 후유증을 미리 씻김굿 하듯이 미리 차단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차이를 이야기해도 기존의 자기 노선에서 노선 바꾸기가 인간의 힘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보라는 것은 요셉을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건 인간이 본받을 수 없어요. 말씀이 자생적으로 자기 내부에서 용암 터지듯이 말씀이 터져 나오니까, 말씀이 자기를 데리고 우연적으로, 우발적으로 데리고 가는데 자기가 현기증 나요. 자기 인생에 자기가 당황스럽다고요.
순전히 마중 나오시는 오는 세대의 주도자, 그분의 몫입니다. 성경 말씀은 주님이 지키는 것이지, 주님이 우리에게 실현하는 것이지, 내가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어떤 차이가 올 때는 도리어 감사하시고, 그 차이에서 ‘나는 이렇게 했다’라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품어서 차이를 차이 되게 드러내게 하신 거, 그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차이 남을 통해서 나를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주님과 서로 사랑한다면 사랑은 서로서로 속박되는 관계죠. 주님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도 주님 앞에 버림받지 않는 거, 오히려 그것을 평강이고 즐거움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