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리 하는 사람이 있어요.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에 이르자.” 십자가는 통과하는 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들어가는 곳이고 그 안에 담기는 거예요. 담기는 것, 담기는 거예요. 십자가는 담아놓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거예요. 부활은 십자가라는 다이아몬드 구슬을 떠받치기 위해서 밑에 보조적인 시공간적인 환경을 부활이라 해요. 이게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원리가 지금 바탕층이에요. 성령에 의해서 성도에게 안에 내부마음으로 이렇게 심어주는 거예요. 3D 프린팅처럼, ‘증강현실’처럼 그 원리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모든 원리입니다. 망대 무너졌다고 해서 그걸 아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이 글자 쓴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어떻게 아느냐? 1장 17, 18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되어 있어요.
성도라는 것은 껍질에 불과해요. 사탕 포장 종이에 불과해요. 안의 사탕이 뭐냐? 주께서 일하는 게 들어 있어요. 언약이 들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성령인데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다음에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콘택트렌즈입니다. 전기회로를 3D 프린팅한 그 회로가, 하나님의 언약구조를 우리 마음에 새긴 거예요. ‘증강현실’로 떠오르게 합니다.
‘증강현실’이라는 말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보되 세상에서 복음적 의미를 뽑아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증강현실’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망대 무너졌다. 지진으로 무너졌다. ‘아이고, 우리는 살았어.’ ‘아니야, 그건 아니야.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망한다는 뜻이야.’
말씀이 툭 튀어나온다는 것은, 말씀이 이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자기를 지켜나가는 거예요. 그 언약의 구조에서 딱 두 개가 주어집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언약의 구조에서 두 개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의 뜻은 여기서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었어요.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또 하나는 이삭인데 이삭은 하나님의 뜻으로 낸 거예요. 이스마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자기 의사에 의해서, 자기 결정에 의해서 그냥 하갈이라는 종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한 짓을 내가 딱 가져와서 이것은 천국으로 통하는 그러한 언약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언약 속의 한 언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구원 안 받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두 언약, 천국의 요소와 지옥의 요소가 둘 다 나오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 들입니다. ‘나 구원받았다.’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구조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없어져야 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그 하는 짓은 어디에, 어느 구조에 다 포함되느냐 하면, 그 두 구조, 두 언약구조의 에너지에 다 빨려들어서 그 안에 전부 다 흡수되어서 남아 있지를 않아요. 내가 하는 모든 짓은.
그 예가 마태복음 6장 3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세상에 어느 인간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너를 잊어버리는 쪽으로, 너를 도외시하는 쪽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이 말을 이 순신장군 버전으로 한다면 이렇게 합니다. “나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내가 아픈 것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가 아니라 “나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 왜? 내가 죽는 것도 언약의 일환이기 때문에. 내가 아픈 것도 언약의 일환이에요. 하나님은 내 위주로 일하지 않고 언약 위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이스마엘은 자식이 아닌데’라고 후회를 하든 말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저주받은 자식을 낳게 만들고 그것을 두 언약 구조 안에다 집어넣어요. 아브라함이 하는 것은 지표면이거든요. 이걸 하나님께서는 바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구조 안에, 그걸 바탕으로 해서 이걸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께 있었던 약속으로 전철로 통하도록 만들어 버려요.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이것은 두 언약이 되어버려요. 언약이 되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뭐가 나왔느냐 하면, 저주받을 계집종, 하나님 앞에 복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저주받은 계집종에서 났는데 23절에서 그 표현이 뭐냐? ‘그것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육체가 있는 것은, 반드시 인간은 지옥 가기 위해서 육체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왜? 육체를 통해서 자식이 태어나니까요. 그 자식은 절대로 천국을 갈 수 없는 거예요. 다른 노선이 필요한 거예요. 기존의 육체로 해서 육으로 가는 것은 지옥으로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게 저주받은 언약에 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육체로 태어난 겁니다.
아버지와 관계있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우리 내부 구조를 통해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2천 년 전 살인사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살인사건, 메시아가 죽는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가요. “봤지? 너희들이 죽였잖아, 예수님을! 이래놓고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어? 너희 아버지는 악마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같이 불러모아요. 그 가운데서 우상숭배가 무엇이며, 진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거예요. 신명기 4장 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극한으로 높이 드러내기 위해서 미움, 극한으로 미워해요. 참혹한 지경으로 몰아내요. 그 참혹한 지경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대충 저주하는 게 아니고 지독하게 저주해요.
하나님은 나를 안 찾는다니까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찾아요. 나를 아예 찾지를 않아요. 나는 어디 있느냐? 나는 없지요. 둘로 깨졌지요. 두 구조로 깨졌다니까요. 두 언약으로. 그러면 다시 갈라디아서 4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이것은 육체를 따라 났기 때문에 억압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구원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를 단독으로 구원하지 않고 생명 안으로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생명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생명은 어떻게 나오는가? 두 언약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면서 찢어지면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생명이 중간에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아예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매일매일 우리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야 내 것이 없고 전부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연결된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요, 그분한테는 생명의 약속이 있는 거예요. 생명의 약속, 그걸 지금 “아들 같은 디모데야! 너희가 이것을 전해라.” 디모데 보고 교회 만들라, 소리 안 했어요. “복음을 전해라, 복음을! 내가 전한 것처럼 복음을 전해라. 생명의 약속을 전해라. 네가 성령 받았기 때문에 네 안에서 그게 된다.”
아버지가 없는데 아들이 와서 어디까지 오는가? 우리 내부까지 들어와요. 아들이, 우리 마음속까지 예수님이 들어와요. 예수님은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와서 다 이루었던 자기의 활동을 계속해서 활발하게 벌이면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아들이 들어오게 되면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이 인간 손에 죽었고 육체로 난 육의 인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살인사건을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계속 일으켜 버립니다. 일으켜 버리면 그 구조, 바로 선악과를 알았던 인간은 저주받고 생명 나무를 따먹을 수 없게 되었는데 친히 친절하게 생명 나무를 우리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간을 배밖에 내면 돼요. 그 간이 뭐냐? 선악과입니다. 내 안에, 내 안에 나 잘났다, 나는 내 의로 버틴다, 나는 나 잘난 맛에 산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변명하는 식으로, 그걸 수집하는 식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라는 것을 여러분 배 밖에 내세요.
그게 바로 나를, 우리를 지옥 가게 만들었던, 나를 전에 갇히게 만들었던 악마의 술책입니다. 그 간을 배밖에 내면서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그 신나는 일, 내 안에서 악마를 캐내는 그 즐거운 일, 그 가벼운 일을 왜 우리는 안 하려고 해요? 그 재미있는, 내속에 있는 나를 지옥으로 이끌기 위해서 온갖 나의 의를 부추겼던 그런 작당을 내 바깥에 끄집어내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 작동하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안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기서부터 벗어났다는 것, 예수님의 영이, 내 안의 영이 내 콘택트렌즈 안에 3D, 3차원 3D, 성령으로, 십자가로 프리팅, 박아 넣어서 ‘다 이루었다’가 되었기 때문에 바깥으로 그런 악마가 튀어나오는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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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 자기 일하는 현장으로 사용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나 잘났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까지 곧장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