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20714a 베드로후서 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2장 19절부터 하겠습니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While they promise them liberty, they themselves are the servants of corruption: for of whom a man is overcome, of the same is he brought in bondage.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저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육체의 정욕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그 특징이, 정욕이 나라는 것을 장악하고 있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빠져나올 수가 없죠.
여기 보면,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에게 종이 된다. 이 말은 전쟁을 재미로 한번 붙어보고 각자 자기 길로 가는 게 아니고 하나의 전쟁이 그 사람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어버렸다는 겁니다.
둘이 누가 세나 한번 붙어보자 재미로 하자, 이게 아니라 여기서 만약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그런 내기가 인간 세계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 세계에서. 인간 세계에 그 내기를 누가 하고 있는가? 자기 욕망과 했죠. 육신의 정욕으로 한 거예요.
첫 번째로 육신의 정욕과 육신과의 싸움이 있었는데, 두 번째, 정욕이 이기고 육신은 졌다. 세 번째, 따라서 육신은 정욕의 종이 되었다. 정욕은 이기고 육신은 졌기 때문에 육신은 정욕의 종이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정욕은 항상 육신에게 이기고 육신은 정욕에게 늘 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베드로후서에서 이 전체를 가지고 인간이라 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멀쩡하게 외부적으로 생겨먹은 것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간이다, 가 아니라 그 내부에 육체의 정욕이 있음을 부정하지 말자. 인간은 “너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네 속에 끊임없이 전쟁이 있는데 백날 붙어봐야 너는 그 육신의 정욕에게 지게 되어 있다. 그게 너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육신이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안다고 한다면 그 육신은 정욕한테 이기겠는가, 지겠는가? 우리가 그걸 생각할 수 있죠. 이 육신이 예수님을 알았다. 예수님을 안들, 육신은 이미 정욕에게 패배한 자체로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았다고 해서 정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았는데 정욕한테 진 상태, 이걸 인간하고 좀 달리 이야기하면 이게 교인들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도 구원 못 받고 교인들도 구원 못 받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 가서 열심히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포로 수용소에 철조망이 있는데 이 안에 어떤 애가 잡혀왔습니다. 그런데 철조망 바깥에 자기 아빠가 와 있단 말이죠. 애가 아빠를 알아보고 아빠한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 분은 우리 아빠에요. 아빠, 뭐해? 나 여기 갇혀있는데 빨리 나를 건져내라.” 이렇게 애를 써도 이 견고한 철조망이 애보고 뭐라 합니까? “너는 이미 이 수용소에 종 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아빠든 바깥에 누굴 알아도 너는 종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뭐냐 하면 이 전체가 인간이라 했죠. 전체 이야기는 “인간은 구원이 없다” 뭐 그런 이야기죠. 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는 거예요. 왜 구원이 없어요? 이미 졌기 때문에. 누구의 종이 되었다? 정욕의 종이 되었다. 그걸 여러분들이 확인해보라는 거예요, 베드로 사도가. “확인해봐. 네가 예수를 믿어? 그럼 네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어? 예수 믿고 난 뒤에 정욕을 이겨본 적 있어? 없잖아. 없으니까 소용없지 뭐.” 이런 뜻이에요.
21절에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이 철조망 안에 갇혀있는 아들이 아버지보고 살려 달라 하는데 아버지가 “너는 정욕의 종이야. 노예야. 우리는 못 구해.” 이렇게 하니까 애 입에서 갑자기 욕이 나와요. “에이, 난 아버지 모르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이런 뜻이에요. 차라리 예수 모르는 게 더 낫지. 예수 알아서 내게 보탬 된 게 뭐가 있는데? 내 정욕 하나도 못 이기는데 내가 예수 믿는 게 무슨 소용 있느냐.
그래서 22절에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여기 개 나오고 돼지 나오죠. ‘개돼지한테 교육시킨다고 개돼지의 성품이 달라지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안 달라지죠. 그런데 개돼지뿐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말씀으로 교육받는다 해서 새 사람 되고 구원받고 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알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이기는 육체의 정욕이 어디서 온 거냐? 육체의 정욕은 악마로부터 온 겁니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온 거죠, 인간 육체의 정욕이. 인간의 정욕이 어두움으로부터 또는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왔다 이 말이죠. 이 세상 신,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로부터 왔거든요.
그럼 악마로부터 온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말씀을 지키고 해도 이미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하고 악마하고 언제 전쟁했습니까?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에이, 한번 졌는데. 한번 진 게 영원히 진 거예요. 한번 지면 다음에 또 삼세판 하자, 이런 거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 그런 거 없어요. 전반전 뭐 준결승, 결승 이런 거 없어요. 딱 한번 지면 그걸로 땡이에요.
영원한 죄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은 죄의 종이라고. 이것을 베드로는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현상을 이야기한 겁니다.
20절에 보면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성도는 대단히 즐겁죠, 이 이야기가. 왜냐하면 성도는 주님이 자아를 처리해줬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나만 웃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심각한데.
구원의 시작은 우리가 멀쩡할 때 구원해준 게 아니에요. 죄의 종일 때 구원했거든요. 그럼 죄의 종일 때 파닥거려가면서 자기 힘으로 벗어나려고 백날 해봐야 오늘 본문의 개돼지처럼 도로 돌아가요. 그게 교인들이에요.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 교회 와서 자기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 백날 이야기해봤자 자기의 정욕한테 지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뭐 다른 예를 들 수 있어요. 어떤 애가 시골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여해서 “예수님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요.” 이러고 있는데 그 엄마의 종교가 보살 수준이라. 불교에 특심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엄마 허락도 없이 여름 성경학교 하고 있을 때 엄마가 와가지고 “엄마, 한 시간만 듣고 갈게.” 하면 엄마가 용납합니까? “우리가 4대째 불도 집안인데 어디서 이게 허락도 없이... 가자, 가자.” 데려가잖아요. 그럼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개돼지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무리 몸부림치고 맘부림쳐도 이미 부모 힘이 세면 부모 발언권이 있으면 걔는 교회 못 가고 절에 가든지 더 심하면 머리 깎고 어릴 때부터 절에 들어가서 꼬마 중 되든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죠.
그 정경, 인간 생활상을 그대로 지금 베드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합니까. 내가 노력해서 구원받고자 했더라면 이런 꼴이 날 뻔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넌지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자유인지 몰라요. 큰 자유죠.
주님께서 우리 자아를 날마다 죽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내 힘으로 구원 받으려 애쓰는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시는 그 이유가 있었구나. 그 이유가 있어요. 성도는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법에서 벗어나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과 무관하게 벗어나서 그런 거예요.
지독한 법.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그 법. 육신의 정욕은 우리 안에서 멈추지 않고 발작을 일으키고 주님의 율법은 거기서 그러한 우리 자신을 향하여 법이 원하는 수준으로 다 요구할 때, 거기서 성도는 딜레마를 느끼는 겁니다. 열심히 해볼게요. 최선을 다 해볼게요. 성심성의껏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와가지고 야, 절에 가자, 하면 끝나는 거예요. 엄마가 와서 야, 여기 왜 있노? 집에 가야지.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왜 참석했어? 데려가면 끝나는 거예요.
방금 이 이야기를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립니다. 밭에 씨를 뿌리면 밭의 성질에 따라서 이쪽에는 길 가에 씨가 뿌려지죠. 그다음에 안에 바위가 있는 농토. 이것은 가시덤불에 휩싸인 농토. 네 번째는 뭐겠어요? 그냥 옥토.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길 가에 떨어지니까 마귀가 와서 주워 먹는다 했잖아요, 말씀을. 길 가에 새들이 와서 먹는다 했잖아요. 이건 허비된 거죠, 아무 결실 없이. 그리고 바위에 떨어지니까 바위가 그 기운을 막아서 더 뿌리가 자라지 못하겠죠. 이것도 허비됐잖아요. 그다음 가시덤불 때문에 또 열매를 못 맺잖아요. 이것도 허비됐죠. 옥토는 어떻게 됩니까? 열매가 몇 배죠? 30배, 60배, 100배. 허비된 것 보상 다 했네요. 남는 장사에요. 30배, 60배, 100배. 2배 정도 같으면 허비된 것이 더 많다 할 수 있는데 이거는 30배, 60배, 100배나 옥토에서 열매 맺으니 허비된 게 너끈히 보상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 말씀(씨)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열매 없는 결과, 하나는 열매 있는 결과. 하나님께서는 열매 있는 결과와 열매 없는 결과를, 말씀은 이 둘 다를 보여줘요. 둘 다를. 따라서 열매 있는 결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면 열매 없음이 왜 열매가 안 생겼는지...... 하나님께서는 그 탓을 누구 탓으로 돌립니까? 농토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죠. 농토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 농부가 씨를 뿌렸다는 것은 열매 맺는 것도 목적이 있지만 이 세상이, 말씀을 뿌리는 이 세상에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이야기를 제자들이 듣고 있었잖아요. 열두 명의 제자들이 듣고 있었잖아요. 듣고 있을 때, 제자들은 본인이 어느 영토에 엮일까, ①길 가, ②바위, ③가시덤불, ④옥토, 자기가 어디 가고 싶어 할까요? ①번 간 사람 땡이고, ②번 간 사람 땡이고, ③번 간 사람 땡이고요. ④번 간 사람 땡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골라잡을 그런 권한이 없기 때문에. 골라잡을 권한이 없어요.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존재에요, 애초부터. 애초부터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이 구원 받은 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남아있게 하겠다는 게 주의 계획이에요, 말씀이.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법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나 법을 안 지킨다.’ 이게 법을 벗어난 게 아니고 육신의 정욕에서 이미 인간은 종이 되었잖아요. 그 인간을 없애버리고 지워버리고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없애는 방법의 법이 무슨 법이냐 하면 그게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그게 사랑의 법이에요. 로마서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는 아내로서의 법 자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렇죠? 3절에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여기서 자유라는 것은 법의 자유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남편이 율법인데 율법 된 남편이 죽었으니까 아내에게 남편이 죽으면 이것은 남편에게 아내가 죽은 것과 동일하게 되어버려요. 둘 중에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그 관계 자체가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였으니”. 3절까지는 남편이 죽었잖아요. 율법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4절에 보면 아내가 죽었다는 거예요. 남편은 살아있고 아내가 남편한테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으니까 더 이상 법적인 아내가 아닌 거예요.
남편이 아내를 죽여 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그 남편한테는 아내가 없죠. 아내가 없는데 그 아내가 살아서 다시 부활해가지고 어떤 남자랑 사니까 “너 왜 내 여자인데 저 남자하고 사노?” 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네가 죽였잖아, 네가! 네가 나를 죽여놓고 아직도 네 눈에는 네 아내로 보이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성도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돼요. 안 당하면 육신의 정욕한테 영원히 종 노릇해서 백날 교인으로서 열심히 해봐야 개돼지하고 똑같이 되는 거예요. 자기 딴에 열심히 해도 이미 종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의 종, 욕망의 종이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공부 하려고 해도 지금 친구 와서 친구가 ‘이따 좀 나올래?’ 하면 ‘응, 나갈게. 나 나갔다 올게요.’ 하고 간다니까요. 말씀 사랑요? 주님 사랑? 아니에요!
육신의 정욕이 예수님 사랑보다 더 세게 작동하도록, 우리는 주의 종이 아니고 육신의 정욕의 종이 된 겁니다, 인간은.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욕망의 종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원수의 종이에요. 하나님 편이 아니고, 하나님 원수 편의 종으로 사는 인간이 어쭙잖게 흉내 낸다고 교회 다니고 성경책 끼고 성경공부 하고...... 참, 마귀가 웃겠다. 아이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녔노? 학원 6개월 끊었나? 공인 중개사 시험은 에듀윌, 뭐 이런 거. 공무원 시험도 에듀윌, 이런 거. 경찰 공무원도 에듀윌.
학원 끊어가지고 교회 다니고 교회 등록하면 구원 받습니까? 말씀 사랑한다고요? 참, 진짜 개가 웃겠다, 말씀 사랑. 내가 안 죽으면요.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안 죽으면. 뭐 악마가 호락호락 놔주는 줄 알아요? 내가 안 죽었으면 악마가 ‘나한테 너 그동안 내가 밥 먹여주고 너 돈 갖다 벌게 해준 거 전부다 백배로 보상해라.’ 이 법을 내세우면 다른 데 시집가지도 못해요. 남편 빚도 못 갚았기 때문에. 이게 종인 거예요.
율법의 빚을 갚을 수가 없어요. 종이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네가 죄의 종인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네 원래 자리가, 응애~하고 태어나서 보니까 종으로 태어난 거예요. 죄의 종으로 태어난 겁니다. 죄의 종으로. 어떤 다른 상황은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해도 인간이 누구냐를 제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이 성경말씀뿐이에요.
15년 동안 군만두 먹었던 올드보이가, 15년 동안 군만두 먹었으면 질문을 “누구냐, 너?” 이런 질문할 필요 없어요. 15년 동안 군만두 먹고 꼼짝 못했으면 자기는 누구냐 하면 바로 내가 너의 종이죠. 그러니 꼼짝 마라 했단 말이죠.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어서 꼼짝 마라. 백날 노력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백날 해봤자 우리는 도로 도루묵이다.
진짜 개돼지처럼 개가 토한 것을 먹듯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와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것을 절감하는 것이...... 성도라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겁니다. 나는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었다. 누가 주는 줄도 모르고, 누구 노예인 줄도 모르고... 나중에 구원 받고 보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노예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그러니 지금 이런 이야기가 무척 중요한 이야기인데 왜 그러냐 하면 성경말씀을 보고 또는 복음을 들었을 때에 반드시 내가 있을 원래 자리가 날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느낌이 온 상태에서 성경말씀을 봐야 되는데, 성경말씀 백날 공부하고 자, 이제 내 자리 찾아가자. 자기 자리가 어디 있는데? 자기 자리가 없어요. 이미 우리는 우리 자리가 없다니까요, 우리 자리가. 우리 자리가 있어버리면 이미 그것은 육신의 종이 된 자리였어요. 육신의 종이 된 자리에 있든지 아니면 내 자리가 없든지 둘 중 하나만 하세요.
내 자리에 돌아오게 되면 반갑다, 친구야, 해서 육신의 정욕이 거기서 악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네가 뭐 성경공부하고 어떻게 목사, 장로 되니까 신앙인인 것 같지? 그래, 이제야 네가 네 주제를 파악하네. 넌 안 돼! 너는 내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 이걸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말씀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떤 인간도요.
그러면 말씀을 보면서 그럼 제대로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해야죠. 말씀을 보면서 “도저히 육신의 정욕을 벗어날 수 없고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내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라고 이야기를 해야죠. 내가 노력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구원되었습니까? 그것은 나를 쥐고 있던 하나님의 원수를 주님께서 단번에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교인이 아닙니다, 용어를 잘 구분해야 돼요. 교인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지는 일이 없어요. 혼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죄에서 이기고 악마에게서 이기고 사망에서 이긴 분이 함께 우리의 남편으로 있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이렇게 싸울 이유가 없다니까요.
만약에 밤에 아파트에서 자는데 비밀번호를 어떻게 훔쳐서 알게 된 강도가 들어와서 앞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더라. 그때 밤귀가 밝은 아내가 같이 남편과 침대에서 자다가 그걸 알았거든 혼자 야구방망이 찾지 말고요. 옆에 남편을 깨우세요. 왜냐하면 남편은 이미 강도 잡는 베테랑 전문형사로서 25년 동안 형사했거든요. 집에 수갑도 다 있어요. 정 안 되면 권총까지 있어요. 사제권총도 있다니까요. 남편 태권도 7단이고, 아니 7단은 너무했다, 3단이고, 유도 2단이고 합기도 5단이고 뭐 그 정도 되는 유능한 형사가 옆에 자고 있는데 아내 자기가 연약한 손으로 야구방망이 들지도 못해가지고 낑낑거리면서 강도야, 이리와. 내가 너를 잡으리라!
강도한테 맞아가지고 쓰레기통에 도로 처박힐 때, 그게 바로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도로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는 거예요. 왜 네가 나대냐, 네가? 물론 그러기 전에 남편이 벌써 잠을 깼죠. 남편이 그 강도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저 인간, 저거 나한테 한번 얻어맞고 또 왔네.” 강도는 뭐라 하겠습니까? “아이고, 형님. 내가 못 알아봤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도망가기 바빠요.
주님을 옆에 놓고 왜 우리가 설칩니까?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못 이겼다는 것이 이미 판명 났는데요. 다 교인 생활 해봤잖아요. 교인 생활해서 구원 받았던가요? 교인 생활해서 지옥 갔잖아요. 교인 생활해가지고. 교회에서 하라는 등록하고 성만찬 빵 먹고 잔 마시고 다 해봤다 이 말이죠. 선교한다고 선교비 내고 또 뭐 성만찬 머리에 물 뿌리라 하면 물 뿌리고 다 했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구원 받았습니까? 성당 같으면 고해성사 정기적으로 하고 처방전 받아놓고 다 했다고요. 그래서 구원 받았어요, 그래? 그게 구원인가요? 그게 육신의 정욕을 이기던가요? 그거 받고 난 뒤에는, 난 이제 돈을 돌같이 본다, 이렇게 되던가요? 턱도 없는 소리에요. 인간은 이 세상의 유혹을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번 크게 적어보겠어요. [성도는 돌아갈 나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 장난칠 때 사소한 장난이지만 그래도 화나는 장난이 뭐냐 하면 제가 방금 의자에서 일어났잖아요. 그런데 뒤에 꼬마요정이 있어가지고, 강의한다고 정신없어서 있는데 의자 뺀 줄도 모르고 앉다가 와장창 넘어갈 때 짜증나죠. 장난도 좀 상황 봐가면서 해라. 짜증내죠. 성도는 자기 승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승리로서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내가 나서서 나의 승리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어요. 성도는 돌아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돌아갈 자리가 있어요. 교인들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그럼 응용문제 하나 낼게요. 교인들은 돌아갈 자리가 있다, 없다? 있죠. 그게 악마의 자리죠. 백날 가봐야 몇 미터 못가고 도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응용문제니까... 목사는? 목사는 돌아갈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것 때문에 목사를 안 버리고 있는데.
이 돌아갈 자리가 뭐냐? 나의 자존심과 가치가 유지되는 곳이에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여전히 나는 □다,를 붙들고 있는 자리에요. 나는 □다. 앞에 뭘 하나 더 붙인다면, 날 무시하지 마. 적어도 나는 □다. 이걸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요. 술집에 가서 술 먹는데, 수요일부터 술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친구가 칭찬해줘요. 야~ 너 요새 술 많이 세졌다. 그게 자랑입니까, 술 센 게? 여러분, 술 센 게 자랑이에요? 너 요새 담배 많이 늘었네. 그게 자랑입니까?
성도는 일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을 남겨두지 않았어요, 주님께서. 나로 인하여 자랑할 게 없어요. 성도가 기껏 이제 불평하는 건 이런 겁니다. 이 육신의 정욕이 얼마나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지...... 한 달 수입이 이번 달에 이천육백 나오고 지난 달은 삼천이백 나오고. 왜 자꾸 돈을 버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난 이미 성도인데 왜 자꾸 돈을 벌어가지고 돈이 자꾸 나를 유혹하는 것 같이... 나 아주 괴로워죽겠어. 이번 달은 사천팔백 만원 벌고. 아, 미치겠네, 정말.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기껏 요 정도. 고 정도. 나는 십자가만 귀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데 왜 자꾸 돈이 십자가 앞에 얼쩡거리고 왜 자꾸 끼어드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성도는 지는 법이 없어요, 성도는. 하나님의 원수를 이긴 그 분 안에 함께 동거인으로 있기 때문에 지는 법이 없습니다. 동거인으로서 호적에 올라가있어요. 그걸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호적은 땅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하늘에 있다 했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호적은 하늘에 있어요. 땅에 있지 않아요. 땅과의 싸움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성도가 된 것은 이 육신이 꺼져가면서 소실되어가면서 점점 늙어 없어져가면서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자랑질 하려고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예요. 너 강남에 빌딩 4채 있다며? 4채가 대수냐, 십자가가 최고지! 요렇게 하는 거예요. 이번에 또 외제차로 3대 바꿨다며? 그게 뭐 시시한 일이지. 그게 뭐 대순데? 십자가가 중요하지. 요고. 요고 하라고 주께서 3대나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베드로가 악마 이야기, 2장부터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들 이야기를 쭉 하면서 이 거짓 선지자들, 목사 아닙니까, 거짓 선생들 이야기하면서 결국 그들은 돌아갈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내가 돌아갈 자리.
그럼 그동안 그들은 왜 교회 나왔느냐? 간 보기 위해서 나온 겁니다. 얼마나 맛있게요. 간을 보는 겁니다. 이 교회 간 보다가 맛없으면 다른 교회 간 보고. 그 간을 보면서 나는 어떤 내 자리를 내 식으로 확보하게 되면 구원을 보장 받겠는가, 그거죠. 쉽게 말해서 어느 보험을 들면 생명보험을 제대로 받겠는가 하는 것과 똑같은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안 죽었으니까 율법이 계속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 지키라고, 지키라고, 지키라고.
그래서 이것이 에스겔에도 나오는 강의인데요. 미리 한번 잠시 하면 이렇습니다. 간음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음죄뿐 아니라 모든 성경 율법에서 지적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종이기 때문에 그 티를 내요. 주님의 율법은 우리가 죄의 종이라는 것을 겨냥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벗어나 의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성경에서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신기한 게 있지만 그중에 신기한 것은, 천국은 개인을 통해서 설명한다는 거예요. 하늘나라 천국을 개인을 통해서 설명해요. 거 참 이상하죠. 여러분, 하늘나라 저기 있습니다. 보이죠? 봤죠? 자, 들어가세요. 이러면 간단할 문제를 왜 개인문제, 자아문제로 파고드느냐 이 말이에요, 천국 얘기하면서. 아니, 천국은 아름답다, 살기 좋다, 평수가 몇 평이고 앞에 분수 있고 잔디밭 깔리고 이렇게 설명하면 오죽 좋아요.
그게 아니고 천국은 포도원에서 일하러 온 사람을 모집하는 포도원 주인과 같으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국을. 거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 등장하죠. 인간을 왜 그렇게 등장시켜요? 천국 설명하고 좋다 싶으면 저 좋은 천국 가겠습니다, 하고 손들면 끝날 문제를 왜 개인 문제로 다가서느냔 말이죠.
그것은 천국이 예수님이라는 개인에 품어져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을 모르면 천국은 물 건너 간 겁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천국 이야기하는 것은 교인들이에요, 교인들. 성도가 아니고 교인들이라니까요. 교인들은 좋다 하면 그거 다 찜하고 좋다 하면 악착같이 10억이나 통일교에 갖다 바치면서 자기 아들이 아베를 죽이든 말든 자기는 통일교 좋다고. 왜 좋으냐? 그게 내 자리거든요, 내 자리. 내가 괜찮은 자리를 내가 결정하겠다는데 10억을 줘서라도 통일교 들어가고 또 신천지 들어가서 십사만 사천 자리를 얻겠다는데...... 남들한테 열심히 전도하는 거, 자기 십사만 사천 거기 한 자리 얻으려고 하는 짓이거든요. 티켓 얻으려고.
임 윤찬 피아니스트 티켓 벌써 다 나갔어요. 방탄소년단 티켓 구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죠? 힘드니까 도전할만하다는 거예요. 전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경우에만 십사만 사천 확정된 제한된 좌석을 하나 할당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뭐 강남 아파트 당첨보다 더 열심히 매진해서 전도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헌금 내고. 그 수법이 기존 교회 수법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 있더라도 게으르면 거기서 지워지고 탈락합니다. 그러니까 안 지워지려면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이렇게 안심할 게 아니고 열심히 교회 충성 봉사해야 됩니다.’ 이게 기존 교회 목사 설교잖아요.
목사님 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20절에,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교인들이 뭐 교인들이니까 성도가 아니니까 복음에 대해서 알 수가 없죠. 그러니까 목사의 그 발언 자체가 나의 육신의 정욕을 자극한 거예요. 일본말 써서 죄송합니다만, 요시! 이거 승부 걸만하다. 내 열심과 충성을 다해서 기어이 따내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는데 죽도록 충성해야지. 선교해야지. 학교 졸업하고 취업 때려치우고 파키스탄 가서 선교해야지, 이런 거. 울지마, 톤즈. 해서 남수단 가가지고 의사로서 봉사해야지.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게 바로 육신의 정욕이에요. 내 자리를 내가 노력해서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한테 시켜만 주이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시켜만 주이소.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성경공부 하라면 성경공부하고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하고 다 하겠다는 거예요.
내 자리는 없습니다. 그게 로마서 7장 4절에 나오잖아요. 이미 남편은 죽고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우리의 남편 되었으면 이거는 남편집이지, 더는 내 집이 아니거든요. 내 집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존재의 가벼움이고 가뿐하고 편안한 삶입니까. 내 집 없어도 괜찮잖아요. 남편 집이 내 집이니까.
그걸 가지고 ‘법에서 벗어난 것’이라 해요. 법에서 벗어난 것. 일체 모든 법에서 벗어난 것. 이런 일 잘 안 하는데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세요. 법에서 벗어난 게 뭐냐? 따라해 보세요.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 사랑은 뭐라고요? 어디서 벗어난 거예요? 모든 법에서.
사랑의 특징은 내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내 자리가 없어요. 그대 있음에 그대 있는 곳에 나 있으면 그게 오케이죠. 굳이 내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어요. 형편 따라 성경공부 못 나올 수도 있고 형편 따라 헌금 한 푼도 못할 수 있고. 형편 따라 이렇게 예배참석 못 할 수 있어도 그게 법이라면 나는 그 법을 지키지 아니하겠노라. 왜? 사랑을 법이 가리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육신에 남아있는 육신의 정욕이 계속해서 시비 걸어요. 성도가 되가지고 그것도 안하면 그건 기본도 안 되어있는 거지. 뭐 온갖 숙제를 계속 주는데 내가 지금 다 끝난 마당에 숙제할 이유가 없잖아요. 끝난 마당에. 구원은 됐지만 하늘나라 상급이 있어야 되지. 하늘나라 상급, 그거 누구 이름이 되는 거예요? 주님 상급입니까, 내 상급 돼요? 내 상급 되죠. 그럼 내 자리 있네요. 결국 내 자리 있네요.
천국, 안 가봤죠? 천국 가봤어요? 안 가봤죠? 요한계시록 4장에 천국에 가니까 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도가 자기 상(賞)이라고 여겼던 그 면류관을 어떻게 합니까? 방향을 보세요. 어디서 어디로 던집니까? 갖다 지옥으로 던집니까, 어디로 던집니까? 내 쪽에서 어느 쪽으로? 주님 발 앞에, 하나님 발 앞에 던지는 거예요.
그걸 성령께서 이 땅에 우리가 살면서 진작에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진작에 그걸. 천국 가서 하는 게 아니고 벌써부터 하는 거예요. 이 구원의 공로를 왜 내가 확보해? 드려야지. 계속 주님 쪽으로 던지는 겁니다, 주님 쪽으로.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생각하는 방법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 가운데 그걸 적용할 수 있어요. 아내가 잔소리 좀 하더라. 그때는 잔소리하는 아내도 주께 던져버리세요. 어떻게 던지는가? 무거워서 못 들지만 어떻게 던지는가? 주께서 하게 하셔서 잔소리 한다, 이런 식으로. 자식이 “엄마, 또 수학 빵점이다.” 그걸 주님 앞에 도로 던져버리는 거예요. “그거는 네가 빵점 맞은 게 아니고 주께서 빵점하게 하셨단다. 너는 원래 백점 맞아도 네 자리 없고, 빵점 맞아도 네 성적 아니고 백점 맞아도 네 성적 아니야. 네가 지금 숨 쉬는 것도 주의 은혜인 줄 알아라.” “엄마, 너무 어려운 것 같아.” “너 크면 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는 벌써부터 예수님 말씀 가운데 다 했었어요. 여러 가지 말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에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흔히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 강도 만났는데 제사장 지나가고 레위인 지나가고 그다음에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를 돌봤다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하기 전에 요한일서부터 보고 그 이야기 들어가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3절부터 제가 보겠습니다. p.390입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아까 옥토하고 옥토가 아닌 밭하고 너무나 확연하게 차이 나죠. 내가 옥토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옥토로 다루시는 것은 주님이지만 말씀이지만, ‘내가 옥토 할래.’ 나설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살아있어야지,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 라는 그 정도로 나는 괜찮은 존재라는 나의 괜찮은 존재를 남기는 나의 괜찮은 자리가 있으면 안돼요. 말씀의 자리로 넘겨버려야 돼요. 남편의 자리, 주님 자리로 넘겨버려야 돼요.
그게 혼인생활입니다. 아내가 자기 주장하면 그게 뭐 결혼한 겁니까. 그거는 아니죠. 결혼 안한 사람이죠. 결혼했으면 모든 주도권을 남편에게 넘겨야 돼요. 그 남편이 누구냐? 주님이란 말이죠. 세상 남편에게 넘기란 말이 아니고요. 여기서 말한 남편은 그냥 아저씨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모든 걸 넘겨야 된다. 법으로 맺은 게 아니고 사랑으로 맺었거든요. 사랑은 모든 걸 용납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합니까? 사랑만 있으면 되죠.
여기 보면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되어있죠. 그래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서 세상의 사람들이 이걸 율법으로 보고 있더라는 거예요. 이걸 사랑으로 읽어야 되는데 느긋하게 즐겁게 봐야 되는데...... 우리가 옛날에 이랬었지. 교인될 때 우리는 맨날 사랑, 사랑하면서도 실제로 주께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라 하니까, 미쳤습니까, 내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게. 결국은 우리는 이 말씀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이룰 수 없는 그러한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단 말이죠.
그러면 사랑을 알게 되면 어느 자리가 없어요? 내 자리가, 남아있는 내 자리가 없어요. 그러면 주께서 하게 하는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주님의 형제에 대한 사랑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마음먹고 사랑해봐야지, 이렇게 나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체가 형제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이 나보고 돈 천만 원 빌려달라고 하는데 같은 성도인데 좀 빌려달라, 하는데 빌려줘야 되는가? 안 빌려주면 형제 사랑 아닌가? 라고 하면 그게 형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본인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지, 형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돈 천만 원 없다고 돈 빌려달라고? 진짜 형제 같으면 이렇게 해야 돼요. “돈 없이 그냥 지금 당장 죽어, 인간아.” 이럴 때 “아멘” 하면 형제고 “그래도 돈 있어야지.” 이건 형제 아니에요. 형제를 이용하는 교인이지, 형제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20714b 베드로후서 2장 22절(개와 돼지)-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천국 이야기하는데 여호와 증인 같은 데서 천국 이야기를 할 때 천국의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놓고 ‘여러분들이 거기 갈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선택 잘 하시면 천국 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성경의 천국은 우리가 하늘에 그려놓고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찾아오는데 사람들로부터 천국이 거부당하고 막히게 돼요. 막히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성, 자기 자신이에요. 이것을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게 자기 의였습니다. 자기 의. 자기 가치. 자기 의미.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할 때 자꾸 자기 의를 공격하면서 설명을 하거든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아침 10시, 12시, 3시에 온 사람 전부다 화냈는데 제일 뒤에 온 사람만 좋아했다, 이런 거. 천국을 설명하면서 그냥 곱게 주시지, 왜 인간이 그토록 집착하는 자기 의를 건드리느냐 말이죠, 그 천국이. 그것은 천국이 개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이 어떤 영토가 아니고 개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라는 개인 속에 천국이 거기서 펼쳐지고 전개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고 예수님 자체가 길이고 예수님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겁니다. 빌라도가 예수님 죽이고 또 다른 기회가 있겠지, 가 아니라 빌라도는 진리 자체를 죽인 거예요. 자기가 진리를 죽여 놓고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고자 허락했느냐? 본인이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본인의 가치가, 본인의 의미가, 평생 동안 내가 일구어온 내 인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그 자체가, 최종적인 생명과 진리가 자기로 이미 굳어진 상태입니다.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고 본디오 빌라도인데...... 아니,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 그렇죠. 모든 인간이 다 그렇죠. 그런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게 이상해요. 그럼 마귀가 거짓 복음을 전한 게 분명합니다.
애시당초 천국을 못 가는 인간이에요. 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계약을 해도 인간자체는 계약 상대자가 되지를 못해요. 그래서 중간에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거예요. 인간하고 계약이 안 되기 때문에. 누구를 대신해서 계약한 게 아니고 예수님 본인으로서 계약자가 마감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 본인뿐이라는 뜻이에요. 아무도 구원될 사람 없어요. 자기 구원 하나로 완전히 끝나버렸어요. 끝내놓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이제는 아버지 이름이 아니고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의 공로를 사랑으로, 아내 이름으로 신부라는 이름으로 또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예정되었다는 그 약속된 이름으로 자기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예수님 자신이 기록한 그 이름, 그 명단에 있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 자기 고유 권한에 의해서 선택한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거기에 나누어줍니다. 영을.
그러니까 성령이 오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어요. 축복은 없습니다. 성령이 오는 것, 예수님의 영이 오는 것. 예수님의 영이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아까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옮길 때 실제로 나타나는 기호,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기표라 하는데 기표라는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기호. 이 세상에 나타나는 기호는 성경 히브리서 같은데서 굉장히 강조하는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 죽은 자가 피로 말미암아, 오직 피로 말미암아 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죠.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은 자. 히브리서 같은 경우에는 피 언약이니까 피가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고 많이 나와요, 피. 이것은 예수님이 마지막 언약 때 내 살과 내 피라 할 때 그것도 같은 뜻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계약이 완성되었어요, 예수님의 자기 피로. 잘 들으세요. 아버지 앞에 예수님이 뭐라고 계약 맺었다고요? 자기의 살과 피로 계약 맺었어요. 그럼 계약조건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다른 것은 하나님 쪽에서 계약조건으로 안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로만 계약되었기 때문에 계약조건이 피에요. 그 피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그 피가 우리에게 도달되도록. 그게 바로 제자들에게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피다.” 제자들은 뭘 먹었어요? 예수님의 피를 먹었죠. “받아먹어라. 내 살이다.” 제자들은 뭘 먹었습니까? 살을 먹었죠. 그걸 오늘날 성도가 제자들이 먹었던 그 살, 그 피 그걸 우리가 지금 먹는 거예요. 이제는 나의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받고 예수님의 그 피를 받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피를 흘린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순교한다는 말이 아니라, 나 말고 예수라는 외부인이 와서 그 피와 그 살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내 노력과 행함과 내 업적과 성과는 뭐가 됩니까? 피를 피답게 하는 그런 환경으로 작동하죠. 피를 피답게. 그러면 예수님 피는 어느 가운데 생겼습니까? 예수님 피는 바로 하나님의 원수들로 인하여 생긴 것이 피잖아요. 그래서 피를 피답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생각을 갖고 활동하는지 우리 육신을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우리 안에서 피가 피답게, 언약 완성이 완성답게 드러나는 증인으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제 어려운 것은 뭐냐? 주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뭐하라 했습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했죠. 사랑하라. 야, 이거...... 원수를 사랑해야 너는 내 형제가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원수를 사랑해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킬 수 없고 제자들이 뭔 뜻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예수님의 영토에 함께 있는 자라야 원수가 누구인지 그때 규명이 되는 거예요. ‘아, 원수라 하는 것은 인간 자체, 모든 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 그걸 알게 돼요. 그런데 성령을 안 받으면, 나의 원수가 나의 원수가 되어버려요. 내가 이미 원수된 것을 내가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원수는 아니고 원수 될 뻔한 자를 사랑한다, 이거는 가능한데 이미 원수가 되어버린 자를 사랑하는 그 법은, 그런 것은 우리 육신의 욕망으로서는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된 자를 사랑하라. 이것은 말씀이죠. 말씀이 이미 성도된 자를 가지고 활용해서 그것을 실현에 옮깁니다. 주님이 그렇게 주의 일을 하세요. 그걸 가지고 ‘내가 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하였다.’가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 있죠. 자, 한번 물어봅시다.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에요. 왜냐하면 육신의 영 안에 사로잡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원수입니다. 악마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고 악마가 인간을 붙들고 있는 이상, 그 종이 된 이상, 거기서 못 빠져나오는 이상 인간도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으로 한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원수죠.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은, 이 아니고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할 때 이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게 돼요. 내 이름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고 있음을 베드로와 요한은 그걸 목격자로서 옆에서 증언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단다. 얘, 일어나.”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게 전도거든요.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주의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못해냅니다. 우리의 육신으로서는 할 수가 없어요.
자, 그럼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원수의 특징은 ‘동질성’이에요, 동질성. 어렵지만 쭉 그냥 나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리라 기대하면서. ‘동질성이란 시간과 공간이 나의 동질성 유지를 위하여 있다고 믿는 가운데 나오는 결과다.’ 이렇게 해서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동질성이라 하는 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보장해주기 위해서 이 시간과 공간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의 마음자세입니다. 어제 침대에서 잤다. 오늘 일어났다. 침대에 어젯밤에 누웠던 나와 침대에 누워있는 그 공간, 그리고 시간, 7시간 지난 시간. 그 시간과 공간은 침대에 누웠던 어제의 당사자가 그 침대에서 일어난 오늘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사고방식이에요. 너무나 당연해보이죠. 인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1초, 어떤 순간에도 똑같은 적은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데 이건 환상이에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같은 인간이고 싶어서 같은 인간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주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지, 주님의 동질성을 위한 일이지, 나의 동질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나의 동질성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다 보니까 그 자체가 주님의 동질성을 가로막는 하나의 원수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는 것, 주님이여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충성했는데 주님은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그냥 무심코 아무 격의 없이 편하게 그냥 속내를 툭 드러냈는데 여기에서 전혀 그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세계를, 예수님 중심의 현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허락된 시간과 공간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주장하는 주장에 불과한 거예요. “지금껏 주를 위해서 살았는데 주께서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너 몇 년 했는데?” “10년 했는데요.” “10년 시간이 어떻게 너를 위한 시간이냐? 그것은 내 활동을 위한 시간인데 왜 너는 주님 활동을 뺏아가서는 10년 동안 난 이렇게 노력했다고 너를 증명하는 시간으로 왜 건방지게 가져가느냐?”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그러니 원수들의 특징이 뭐냐? 왜 천국을 설명할 때 말씀이 개인의 자아를 겨냥해서 천국을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 이미 인간의 자아는 자기 중심의 현실을 따로 환상처럼 따로 갖고 있어요. ‘이 세상은 나한테 이렇게 의미가 있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옳았다는 것을 확인해줄 배경으로서 지금껏 내가 이만큼 살아왔다. 여기서 살았다.’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무슨 뜻에서 이야기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첫 번째, 제사장이 그냥 가죠. 강도 만난 사람. 어떤 공간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어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거예요. 그 강도 만난 사람의 공간은 범죄한 공간이죠.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는 사건이죠. 그러면 제사장이 이 공간을 그냥 지나가요. 왜 이 공간을 그냥 지나갑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는 빨리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올라가면서 지금 제사지내야 돼요. 예루살렘이 자기의 자기 됨을, 자기 동질성을 보장해주는 공간입니다. 남의 일에 끼어들 이유가 없죠. 타인의 공간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아쉬운 공간이지, 내가 아쉬운 공간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사장이 지나갔다고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강도 만난 자의 공간, 이 공간을 위해서 제사장이 그 타이밍에 지나가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지나가면서 제사장은 그냥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예수님 중심의 시공간에서 인간은 모두 비켜나가고 있는 그러한 실정을 그대로 지금 폭로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 원인이 뭐냐? 자기 동질성에 거의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만 잘 되면 되지. 나만 바르면 되지. 나만 의로우면 되지. 내가 남한테 해코지 안하면 되지. 나만 반듯하게 살아서 나중에 나만 천국가면 되잖아. 이게 자기 동질성이에요.
수련회 때 내가 강의하려고 준비한 게 있는데 인간에게 놀라운 사실을 과학이 밝혀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나 사이에 동질적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동질적 요소가. 그 기표가 뭐냐? 그 기표가 DNA에요, DNA. 이게 대단히 신기한 일입니다. 왜 신기하냐 하면, 그야 닮아서 그렇지, 가 아니라 왜 닮느냐는 거예요, 왜? 왜 굳이 닮아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DNA가 있어서 닮았다,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고 나는 나만이어야 돼요. 누군가 나를 닮으면 안돼요. 이게 육신의 정욕입니다. 왜? 악마는 신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나만이 신이어야 돼요. 나만 절대자이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환경은 나만을 위해서 내게 적합한 시간과 공간으로 우리가 개조하고 변경시켜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었어요. 왜? 그 목적이 뭐냐? 오직 이 세상 천하에 둘도 없이 오직 나. 오직 나는 나만 나다워야 돼요. 나같이 닮은 거 둘 있으면 안돼요. 여러분, 이런 걸 한번 상상해보세요. 공중 화장실에 갔다가 볼일 보고 나오는데 나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바깥에 그다음 차례로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똑같이 생긴 사람. 하나의 복제물로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1번-반갑다, 2번-죽여 버린다, 몇 번입니까? 죽여 버리죠.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주님은 나와 똑같은 나를 만들어버렸어요. 죄인인 나 대신에 예수님께서 만든 똑같은 나를 만든 거예요. 예수님의 씨앗, 피, 언약을 집어넣어서 똑같은 나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천국에 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닮았다는 것은 우리가 DNA적으로는 규명되지만 우리의 모든 평소의 행동과 본성은 그걸 거부하고 싶어요. 동생하고 내가 왜 닮아야 되는데? 그게 뭔데? 동생은 동생이고 나는 난데 내가 왜 닮아야 되는데? 완전 에서와 야곱처럼. 왜 닮아야 되는데? 이 미경씨 왜 닮아야 되는데? 닮을 필요가 없는데. 자기는 자기고 나는 나지.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 이게 동질성이라는 겁니다. 동질성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티를 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 것을 악마는 몹시 불쾌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독자적인 것으로 확보하고 싶은 것이 악마의 생각이에요. 악마는 육신의 정욕으로서 인간을 종으로 삼아서 전부다 거기다가 나처럼 이 악마처럼 너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라고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자기가 하나님 되고자 교회 가는 거예요. 교회 가는 이유가.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모든 교회 기도는 넋두리라 했어요. 넋두리하고 기도하고 내용 차이 뭐 있습니까? 혼자서 공원에서 중얼거리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교회에서 하면 그게 기도에요. 그 넋두리 내용, 그 원고를 누가 작성해줬습니까? 마귀가 작성한 거죠. 너는 너다워야 돼. 어제의 너와 오늘의 너는 동일해야 돼. 네가 달라지면 안 돼. 너는 꼭 너를 쥐고, 항상 나는 나답게, 이걸 붙들고 가야 돼.
그게 원수의 이야기이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면서 개인을 건드린다 하죠. 개인을 건드린다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좋은 나라 있습니다. 가세요.’가 아닙니다. 그냥 개인을 건드려요. 자아에 구멍을 뚫어야, 자아에 구멍이 뚫어져서 더 이상 돌아갈 나의 자리가 없게 만들 때, 뚫고 그 뚫은 자리에 동전 꿰듯이 꼬치 꿰듯이 거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꿰어버리면 그게 바로 천국 백성이에요. 내 건 없는데 줄줄이 형제들하고 주님하고 주님 중심으로 꿰어져 있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에 관통하고 있는 그 작대기, 언약이라는 작대기, 그것은 동질합니까, 동질하지 않습니까? 작대기, 천국 백성을 통과하는 작대기는 동일해요, 동일하지 않아요? 동일하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동질성이죠. 예수님의 동질성에 인간들이 거기서 반항하고 대항해가지고 대척관계를 만든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예, 이거에요. 인간이 뭐냐? 자기 동질성으로서 예수님께 대드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그렇게 해요. 교인들은 ‘하나님 믿고 하나님 사랑합니다. 십자가 이제 알았습니다. 회개합니다.’ 백날 해도 교인들은 육신의 정욕이, ‘네가 기도했지?’ ‘기도했어.’ ‘헌금했지?’ ‘헌금했어.’ 헌금한 너, 기도한 너, 신학한 너, 너는 너를 믿어야 돼. 이게 바로 교인들이에요. 그게 신학입니다. 예수 믿는 너를 믿어야 돼. 그래야 네가 구원 받아. 구원은 내가 없어져야 구원이 되는데 자꾸 내가 있는 채로 구원이 되라고 악마가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놓고 네가 얼마나 믿음 있는지 돌아보라. 말씀대로 얼마나 살았는지. 말씀대로 못 살면 너는 안 돼. 탈락이야. 더 열심히, 더더더더 더 열심히 해야 돼. 그러니까 10억이나 갖다 바치고 그러죠. 자기 아들도 아베 죽이고 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뭐 아베 죽이는 그런 일이 일본에 있었지만 그거 아니라도 아들이 유리창 깨고 하는 일은 허다합니다. 엄마보고 설득이 안 되니까 유리창 깨고, 딸이 신천지 빠지니까 온 친척들 다 동원해서 친척들이 딸 납치해가니까 신천지에서 고소해서 그 부모들이 고발당하고. 완전히 애 하나 두고 밀고 당기고 난리도 아니에요. 왜 그렇습니까? 너는 우리 가족이잖아. 우리의 동질성이잖아. 저쪽은 우리 신천지 동일성이잖아.
무슨 내 자리가 어디 있어요, 내 자리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했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요. 무슨 내 자리가 있습니까. 내 자리를 통과하는 예수님의 언약이 있을 뿐이죠. 말씀 완성이 있을 뿐이에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움직이고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말씀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에요, 성도는. 교인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성도는 말씀이 속에서 작동하는 사람이에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제가 또 이런 이야기하면 또 ‘목사님, 저는 말씀이 나를 안 움직이는데요.’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그거는 네가 네 동질성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자꾸 측정하려고 할라 해요. 내가 지금 말씀을 지키나 안 지키나. 내가 나를 자꾸 측정하려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 치고 ‘내가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은 다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한다.’ 하면 되는데 ‘주여, 주의 지시에 따라서 지금 밥을 먹습니다. 90도 각도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왜 자꾸 자기가 말씀 지키는 데에 중간 다리로 끼어드느냐 말이죠. 이미 죽은 놈인데, 나는. 우리는 결과물이에요. ‘말씀이 이렇게 했다. 그것이 너다.’ 이렇게 결과물로 나와야 되는데 시작을 나부터 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부터. 그것은 나의 동질성을 포기 못했기 때문에, 내가 나답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에 놀아나요. 이렇게 베드로후서 주신 말씀은, 성도는 일체 그런 일이 없다, 가 아니라 성도한테는 활발하게 개와 돼지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걸 즐겨라 이 말입니다. 그걸 가볍게 보라 이 말이죠. (웃으면서) ‘내 육신이 이렇구나. 아이고 죽어라, 이 육신아.’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아니, 이러면 나 구원 못 받은 거야.’ 이거는 육신의 문제가 아니고 자아의 문제에요. 성령을 안 받아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왜 헌금을 반 속입니까? 자기가 헌금 반으로 돌아갈 내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반 드리고 반 내 것 챙기고. 챙기는 건 둘다 다 죽어버렸으니까 챙길 사람도 없어졌어요. 둘다 죽어버렸으니까.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죠. 세 번째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디를 보셔야 되느냐 하면, 35절 봅시다. 이튿날에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과 자기가 동질성 됐죠.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건이 이게 자기 사건이 된 겁니다. 자기 사건이 된 거예요.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과 선한 사마리아인은 복제물이에요. 쌍둥이에요. 왜?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성령을 받으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이 성도의 시간과 공간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시간이잖아요. 성도의 시간도 십자가 안에 있다 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나는 성령 안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했죠.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다 했죠. 그럼 예수 안의 시간과 공간은 성도들과 공유되는 주님의 시간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동질성이 부각되는 거예요, 주님의 동질성이. 거기서 인간들의 동질성은 날라가 버리죠. 주님의 동질성을 인간들의 동질성이 우호적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방해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동질성, 내 자아가 굳건하면요. 우리는 뭐든지 남을 이용하려고 해요. 남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타자 또는 타인과의 동질성을 예수님께서는 언급하시는 거예요. 타인과의 동질성. 자, 뭐부터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이건 좀 복잡하지만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게 우리 대신 지셨다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 대신. 고린도후서에도 나오고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내 일이 남을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인간세계에서 과연 그게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불가능해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각자의 동질성이 다르고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따로 생각하기 때문에 똑같이, 똑같이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대신하는 게 아니에요. 모방하는 거죠. 부처가 가는 길을 모방하는 것이지, 대신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가 노력했다면 나도 노력하면 되고 소크라테스가 노력하면 나도 노력하면 되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내 인생을 대신해주지 않아요. 부처가 내 인생을 대신하는 게 아닙니다. 대신해주고 싶어도 논리상 대신이 안돼서 그래요. 대체가 안돼요. 대신이 안 된다니까요. 똑같아야 대신이 되는데 똑같지 않으니까 대신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35절에 봅시다. 첫째 날 급해서 돌봐줬잖아요.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내가 돌아올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갚으리라 하였으니” 갚으리라 했죠. 결국 이 강도 만난 사람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남입니까, 남 아닙니까? 남이 아니죠. 곧 나가 되는 거예요, 나가. 왜 예수님께서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했느냐? 아무도 해낼 수 없는 대신하심,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으심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거예요. 끝까지 책임지잖아요. 만약 모자라면 내가 돌아와서 마저 채우겠습니다. 내가 갚아주겠습니다. 이거는 강도 만난 사람과 선한 사마리아인 본인을 동일시, 동질시하는 거예요. 더 이상 타인이 아닌 거죠. 네가 나이고 내가 너라는 거죠. 두 개의 나가 아니라 하나의 나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의 나가. 이게 신약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세례 받음으로 한 몸이 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안 되죠. 안 되는 이유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동질성으로 독자적으로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나와 동일시될 수가 없어요. 이걸 자충적이라 하는데 스스로 충족되기 때문에, 모든 게 만족하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의 나의 나됨은 내가 있는 그것으로 나됨으로 나됨의 요소로 가득 차 있고 그다음에 누가 나를 도와준다면 내 허락 맡고 들어오면 그게 내 것으로 추가되는 것이지, 허락 없이 그냥 들어와 버리면 이건 이질적이 되는 겁니다. 이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돼요. 바이러스랑 우리가 지금 몇 년째 싸웁니까. 내 허락도 없이 나의 동질성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고 나가라고 난리잖아요. 예수님이 코로나 바이러스입니까? 바이러스 아니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인들은, 성도 말고 교인들은 거리를 띄워놓고 하는 거예요. 내가 아쉬울 때 부를 테니까 그때 오세요. 내가 아쉬울 때. 내 허락 없이 예수님 들어오면 안돼요. 그러면 무엇이 허물어집니까? 평생 동안 일구어놓은 나의 나됨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성경공부도 내가 알아서 갈게요, 이런 거. 헌금도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은 받기만 하고 내가 참석하면 고맙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지금 내 일 바빠요. 내 일이 있어요, 내 일이. tomorrow말고 나의 일. 나의 일이 있어요. 무슨 나의 일이 있습니까? 당신이 무슨 나의 일이 있냐 하면 평생토록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내 일을 얻기 위해서 내가 구축하기 위해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거예요.시간과 공간, 그거 누구를 위한 건데? 그거 주님을 위한 거잖아요. 그럼 당신은 도둑놈이네. 주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는 딴 살림 차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강도죠. 그럼 성도는 뭡니까? 그 강도한테 얻어터진 사람이죠.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을 뻔했어요,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자기 동질성이 지금 다 허물어질 판이다 이 말이죠.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여기에 사마리아인 비유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보면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율법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의 특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만 운집해있는 나라, 이게 천국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그 이웃에 뭐를 포함시켰습니까? 원수까지 포함시켜버렸죠, 원수. 자, 한번 복습해봅시다. 원수가 뭐라 했죠, 원수? 자기 동질성이라 했죠. 원수라 하는 것은 자기 동질성입니다. 나만의 독자성, 나의 독립성. 예수님은 그냥 이용대상, 하나님은 그냥 이용대상. 내 것을 내 마음에 맞도록 채우기 위해서 그냥 기도하고 헌금하고 온갖 알랑방구를 끼면서 헤헤거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빼낼 거 다 빼내겠다는 겁니다. 자기 자립성, 독자성이죠. 독자성, 이게 하나님 원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했죠.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시간과 공간 자체가 주님을 위한 겁니다. 주님의 동질성을 위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동질성을 위한 이 환경에 이런 마귀적인 것, 독자적으로 독립 선언한 인간들이 등장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악마가 시켜가지고 악마가 배후에서 쫙쫙 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사랑하느냐. 독자성을 갖고 있는 이것을 허물어버리고 주님의 독자성, 동일성으로 이걸 품어줘야 되겠죠. 품어줘야 되죠. 품어주려면 내 동질성이 깨진 사건이 터져야겠죠. 그게 무슨 사건이냐? 강도 만난 사건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자기도 역시 인간이라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자기가 뭐 강도보고 때려달라고 돈 주고 부탁한 적 없잖아요. 그냥 강도 만나기를 두려워하면서 자기 단속하면서 살았는데 강도가 와서 때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누가 나쁘냐, 누가 의로우냐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느냐, 누가 누구를 싫어하느냐 그 문제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를 싫어합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싫어하고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굴 좋아해요? 강도 만난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온 것은 우리가 잘해서 못해서를 따지는 게 아니고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오신 거예요. 내 기뻐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너는 내 기뻐하는 자라. 누가복음 2장에 나오잖아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주님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를 그냥 받아주는 거예요. 네가 무엇을 하며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옥경이한테 물으라 해요. 옥경이한테 묻고, 희미한 등불 밑에서. 그거 말고 그냥 받아주는 거예요, 그냥!
원수와 한 동질성을 이루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원수가 다 깨질 판이에요. 와장창. 그래서 주님께서 그 원수의 죄를 대신 갚아주는 겁니다. 어떻게 갚아준다고요? 부비가 더 들면 더 주겠습니다. 끝까지 갚아주는 거예요. 끝까지 사랑하시는 거예요.그럼 끝까지 사랑하는지는 그때 돼봐야 알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안 가봐도 알아요. 왜냐하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성령을 보냄으로써 성령이 최종적인 보증이 되는 겁니다, 보증. 혹시 네가 일 있거든 네 안에 있는 보증수표 꺼내라. 그게 뭐냐? 성령이에요. 주여,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아하하하하 웃으면서. 이미 죄 사함 받은 성령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육신이니까 육신의 정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까 안양강의하면서 인간의 마지막 유혹은 자기 자신이다. 이것을 오늘 시간으로 한다면 자기의 동질성이다. 동질성. 나의 나다움으로 둘러친 그 구역, 그게 나에요. 나의 나다움으로. 어느 곳까지 내 손길, 내 애틋함이 안 닿은 곳이 없는 그 동그라미, 이게 내 동질성이에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내 차를 툭 치고 가면 우리가 그걸 보고 화내죠. 왜? 내 손길이 닿은 것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내 자식 욕하면 우리는 가만있지 않죠. 왜? 그 자식에 내 손길이 닿아있으니까. 그게 나의 동질성, 자아성이에요.
자, 좀더 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에 보면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겼다고 되어 있죠. 이게 바로 긍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불쌍히’가 그릇에 담겨있는 사람이 성도에요. 주님의 불쌍히 여김이. 아이고, 불쌍한 것. 하고 불쌍함이 여기 안에 들어있어요. 어디까지 불쌍하냐? 우리 육신이 남아있을 때까지 끝까지 불쌍해요. 끝까지 도와줍니다. 끝까지 갚아주십니다. 끝까지 죄를 다 갚아줘요. 갚아주는데 예수 믿어도 또 율법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그건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게 되면, 여러분 아는 이야기지만 이것과 관련해서 이렇게 알아두면 더 좋죠. 2장 14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되어 있죠.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우리의 육신의 정욕이 예수님께 원수였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계속 그것이 같이 연동해서 일어나야 된다는 말이죠. 자, 이게 율법책입니다. 율법책이 펄럭인다고 봅시다. 십자가가 이 율법책을 관통해서 꽂아 벽에 박아놨어요. 율법책을 통과해서 십자가로 박아버린 거예요. 이 율법이 작용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 육신이죠. 이 육신을 십자가로 박은 거예요. 앞으로 들어가서 뒤로 튀어나와버렸어요, 십자가가.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율법에 대해서 이미 내 육신이 죽은 자가 돼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 거예요. 죄가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관여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 죄는 계속 나오는데 그 죄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야 될 주님의 시공간 가운데 주님의 말씀의 작용이다 이 말이에요. 그럼 죄가 뭡니까? 죄는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원했던 게 죄이고. 원수가 뭘 원했습니까? 그건 자기의 동질성이에요. 쉽게 말해서 혼자 살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데 결국은 나 절대성, 나 독자성,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게 불교이론이잖아요. 모든 인류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게 불교에요. 모든 인류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니체란 철학자도 불교 쪽, 헤르만헤세 데미안도 불교 쪽, 들뢰즈란 철학자도 불교 쪽, 라캉도 불교 쪽. 유대교는 물론이고 소위 수도하는 프랑스의 수녀들, 수도원 전부다 불교 쪽이에요. 불교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 마음의 평정이에요. 이 불교와 한판 붙은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이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불교하고 붙었어요. 그 당시 불교가 스토아학파에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목표에요. 지금의 통일교하고 똑같은 거예요. 통일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거예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거예요. 가정에 토대를 삼아서.
지금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개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인간들을 끌어 모아놓고 교인 끌어 모았다고 우기고 있어요. 전부 개돼지로 다 돌아가는데요. 예배 후딱 끝내고 자기 할 일 하기 바빠요. 말씀 앞에서의 자아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이뤄놓은 성과가 나의 나됨을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의 가치, 자기가 후딱 돌아갈 내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어쩌면 천국보다도 십자가보다도 그게 더 마음에 와닿고 있죠, 사람들에게. 뭐 남 이야기할 것도 없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마다 다시 못 박힌 십자가가 관통된 것을 느끼게 하시는 그 역할은 누구 몫입니까? 그건 오직 성령께서, 내 그럴 줄 알았지. 쥐어박으면서 날마다 우리를 일깨워주는 겁니다. 이 말씀으로. 성경말씀으로. 너를 살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말씀, 이 언약, 십자가를 살려내기 위해서 내가 애쓰는 너는 피조물이야.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드리고 물어보고 답변하고 끝내겠습니다. 매니지먼트에서, 매니저가 중요합니까, 가수가 중요합니까? 매니저가 맨날 가수 앞장세워서 칭찬하는데 그거는 누구를 위함이에요? 매니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가수를 이용한 거죠. 앨비스 프레슬리 매니저가 파크대령이라고, 그 사람 영화가 <앨비스>라는 영화에요, 얼마 전에 개봉했어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앨비스는 여기 없다.” 자기는 여기 있죠. 우리가 예수님의 매니저 노릇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를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이게 전도되고 거꾸로 되고 말았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속으로 남한테 들키지 않는 마음으로 있는 이 마음. 남한테 들키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들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