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꺾이지 않는 의b

아빠와 함께 2022. 7. 13. 08:12

20220711b 부산강의 : [시편]50(34:21)-꺾이지 않는 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전제군주 이야기했지요. 전제군주와 자본주의사회. 대체로 전제군주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넘어왔지요. 전제군주에서는 혈통중심주의. 혈통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국가의 시조라 합니다. 시조의 특징은 힘을 가지고 뺏는 자였고, 뺏기는 자는 힘이 없는 자였고, 힘 있는 자는 힘 있기 빼앗은 거예요.

그런데 힘을 모으기 위해서 일단 자기 사조직, 자기 부하들까지 포섭을 해야 되잖아요. 그 포섭하는 과정에서 그 주민들이 하나님이 특별한 영웅적인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른 특출한 영웅이라고 영웅시되는 그러한 절차가 필요했던 거예요. 한 번 영웅은 영원한 영웅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신화라고 해요.

이 신화가 어디 속하느냐 하면 신화는 역사 안에 있어요. 그냥 역사라 하면 그렇고 그런 역사인데 역사를 빛내기 위해서 신화를 제일 앞장세우지요. 열차에 기관차 있고 뒤에 객차 있잖아요. 기관차 쪽에 신화를 해버린 겁니다. 그래야 이 역사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로 가요. 우리의 조상은 신과 관련돼 있다. 그게 단군신화 아닙니까. 모든 민족들은 다 그런 거예요. 단군신화가 있어요.

단군신화는 단군을 섬기자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만든 유구한 오천 년 역사를 신봉하자. 그 법적인 테두리 밖으로 나가지 말자. 만약에 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거죠. 죄인이 되면 죄책감을 지니게 되고 그는 그 공동체에서 추방돼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모든 역사가.

그러면 이 역사를 선조 못지않게 후손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남의 것을 빼앗아야 돼요. 빼앗으려면 전쟁을 해야 됩니다. 전쟁을 하려면 군사력을 키워야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푸틴 자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 자기보다 약한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겁니다. 현재 러시아 백성들은 기분 좋아요. 자기가 우월한 민족의 국민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개코도 없으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북한이고 그건 빌어먹게 돼 있고, 좀 가난하지만 뭔가 자부심 갖는 것은 러시아고. 그들은 미국의 자유분방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는 하나같이 단결해서 이번 전쟁을 푸틴이 앞장서서 끝내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 푸틴의 승리가 나의 승리와 결부돼 있기 때문에. 내가 승리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게 돼요. 가치 있는 존재.

이게 바로 뭐냐? 사울이고, 이게 뭐다? 아기스에요. 여기서 다윗이 추방된 거예요. 추방되면서 다윗을 추적했던 사울과 다윗을 쫓아냈던 그 아기스가 왜 악의 화신이고 이게 왜 범죄자인지 비로소 하나님의 계시차원에서 말씀차원에서 규명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고 아플 때는 자기가 천하의 의인처럼 여겨지지요. 그러나 몸이 아파서 같은 병원에 여럿이 있는 병실에 누워있으면 저희들끼리 환자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면회 가면 같잖지도 않지요. 저 할망구가 나에게 비난했다, 자기 아들 자랑했다. 그 내부, 좁은 병실에서도 간호사가 왕질하고, 의사는 대왕이며 회장님 역할하고. 조그마한 조직인데 하여튼 인간들이 모였다 하면 이게 전부 다 전제군주의 신화가 거기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전제군주가 자본주의사회로 변했어요. 변할 때 1789년에 이게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전제군주 혈통에 준한 세습된 어떤 혈통은 고귀한 혈통이고 왕가라 하는 그 왕가의 모가지를 친 사건이에요. 이게 프랑스대혁명이란 거예요. 프랑스대혁명에서 세 가지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평등, 자유, 박애(사랑). 특히 평등.   왕, 그다음에 성직자 계급, 그다음에 귀족계급 이게 프랑스혁명 때 전체에 3%에요.

3%가 97%를 다스리고 거기서 뭘 냈다 했습니까? 지대, 노역, 세금 이걸 3%가 다 가져간 거예요. 특히 성직자들은 십일조를 거둬서 다 가져간 거예요. 왜 지대냐? 땅을 넓혔기 때문에. 남의 땅을 넓혀야, 군인들의 지휘관이 누굽니까? 왕이죠. 왕이 다른 나라에서 돈 빌려서 용병 사서 전쟁에 일단 승리만 해놓으면 땅이 생기고 그 땅으로 지대 받아서 먹고 살면 빌려왔던 돈을 갚고도 자기 왕가는 돈이 남아돌죠. 왕가가 돈이 있어야 또 용병과 무기를 구입할 수 있어요. 그러면 왕가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긴긴 세월 최고의 혈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게 돈의 힘이에요. 돈의 힘=잉여의 힘, 여분의 힘. 아껴 쓰고 바꿔 쓰는 것 있지요. 아껴 쓰면 여분의 힘 남고 이 여분의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남의 것의 노동의 가치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제도가 자본주의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모가지 날아갔잖아요. 이제는 대대로 물려주는 혈통이 아니라 누구도 돈만 있으면 귀족적인 생활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한 시대의 문화와 문명은 귀족이 살던 것을 얼마나 많은 퍼센티지로 따라 붙이는 것, 이게 바로 문명세계의 특징입니다. 옛날에 귀족들의 누렸던 것을 지금의 평민들이 그걸 누리는 동시에 귀족 맛을 보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커피에요. 커피, 클래식음악, 골프, 마장경기. 이거는 돈 한두 푼으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림을 수집하는 것, 이건 전부 다 화가들의 귀족에게 팔기 위한 그림을 그렸거든요.

그러니까 귀족들의 누렸던 것을 너만 귀족이냐? 귀족 모가지 날리고 나도 귀족 될 수 있다. 어떤 개인에게 개인의 가치를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줄 수 있는 목표를 누가 정했는가? 이 전제군주의의 귀족들이 정한 거예요. 따라서 돈만 있으면 내가 옛날 귀족 대우받던 그때처럼 살 수 있다고 보는 것, 이게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러면 나라는 게 뭐냐? 전에는 나라는 왕의 나라에요. 이게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데 너희는 아직도 왕 제도를 좋아하느냐? 사무엘상 8장에서 사무엘이 백성들을 나무랬어요. 이방나라는 왕을 구해도 우리는 왕이 필요 없다. 율법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이스라엘이 그걸 반대했지요. 반대해서 나온 자가 사울이었고 그 사울이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망해버리죠. 이스라엘이 망하고 그 뒤에 다윗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전제군주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죄와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 원했던 죄와 의의 기준이 아니다. 전제군주를 박살내고 전제군주한테 추방당하고 밉상 받고 쫓기는 죽기를 바랐던 독특한 개인의 나라에서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가 비로소 밝혀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개인의 활동이 계시에요. 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왜? 다윗 개인의 문제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어요. 다윗에게 일어난 상황을 시편 34편이고 그 상황을 오늘날 말씀으로 성도의 삶의 상황으로 바꿔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효과입니다. “네가 현재 시편 34편의 상황에 놓여있어.” 이걸 우리한테 일깨워주는 거예요. 지키라는 게 아니고, “네 눈 뜨고 똑바로 봐. 네가 똑같은 처지야. 세속 세상으로부터 쫓기고 있는 그런 입장이야.” “제가 언제 쫓깁니까?” “네가 지금 얍삽하게 노니까 모르지.”

사기를 한 번 당해봐야 내가 나만 쳐다보고 살았구나, 그걸 봐야 돼요. 사람들에게 실망을 느껴봐야 되고 남에게 애매한 모독과 무시와 비난을 받아봐야 되고 복음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 추방돼봐야 아아 세상이 교회가 이게 믿을 게 못 되는구나 비로소 아는 거예요. 교회도 하나의 권력단체고 돈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겁니다.

이 나라가 해야 될 일이 뭐냐? 자본주의에서 계급을 칠 때 돈을 누리는 것을 너희들만 누리느냐, 나도 누리자. 돈, 자본의 축적된 잉여의 힘에 대해서 사람이 이미 규정이 되고 난 되에 자본에서는 뭐냐 하면 적어볼게요. [자본의 증식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이게 오늘날 현대국가입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에요. 뭘 위한?

자본의 증식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국가에요. 자본을 지키는 거예요. 나를 지키는 게 아니고 자본을 지키는 겁니다. 돈 값 못하는 인간들은 죽어야 돼요. 돈 값, 옛날에는 밥값 못하는 인간은 죽어야 됐어요. 그러니까 뭔 뜻이냐 하면 나이 칠십 넘어 이미 은퇴한 사람이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을 이미 가정의 권력을 쥐고 있는 안 사람 입장에서는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나가! 돈 벌어와. 돈 안 벌어오려면 집구석 들어오지 마! 한 푼이라도 벌어. 십만 원이라고 오십만 원이라도 벌어와. 어딜 놀고먹으려고.” “내가 젊을 때 많이 줬잖아.” “젊을 때 번 것 자식 장가가고 집 사주고 다 끝났어, 그건. 딸 시집보낸다고 없어 우리는.” 돈 버는 기계로 보는 거예요, 기계.

그래서 돈을 벌지 못하면 자본 증식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이걸 가지고 죄인 됩니다. 그러니까 돈 없으면 빈대떡, 요새 빈대떡이 얼마나 비싼데 가사를 이핼 못하겠어. 돈 없으면 죄인이고 돈 있으면 의인이에요. 돈 없으면 빌어먹든지, 권력을 인수인계라도 하든지 아내 돈 벌고 남편 못 벌면 아내에게 일임이라도 하든지 종속되든지, 난 당신의 영원한 부하입니다, 딸랑딸랑. 이거는 돈도 없는 주제에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은 살아서, 돈 벌 때 남자지 돈 못 벌면 남자 아니에요. 빌어먹는 첫째 아들에 불과하지요.

여기서 뭐냐? 법과 제도에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전제군주의 원칙에서 전제군주는 계급제도잖아요. 지금은 계급제도가 사라졌다는 걸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람이 높은 계급이 없으면 살맛이 의욕이 없어요. 그래서 계급이란 말 안 하고 민주주의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계층이라고 이야기해요. 계층이나 계급이나 둘 다 똑같은 거예요. 계급하면 공산주의 생각나서.

공산주의는 뭐냐? 돈 있는 놈 조져서 계급을 뒤집자는 이런 의식이 있어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을 쳐서 파업하든지 태업하든지 해서 그들의 돈을 뺏자, 이러면 사회주의사회에요. 진보에요. 진보적 가치라 하는 것. 평등을 유지하자는 거예요. 그 평등을 같이 하는 인간들이 뭐가 되느냐? 그게 계급이에요. 평등을 주장하는 그들이 하나의 계급단체가 되는 겁니다. 계급은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속세계에 미련을 갖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피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울이 여호와를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사울이 여호와를 믿었단 말 하지 말고 사울이 여호와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지요. 사울이 율법을 몰랐습니까, 알았습니까? 알았지요. 그래서 사울이 전쟁할 때 뭐했는가? 율법대로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 제사 드리고 요새 같으면 예배드리고, 예배드린 의도가 뭐예요?

사무엘상 15장에 아멜렉과 전쟁할 때 분명히 다 죽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사울 왕은 다 죽이면 자기에게 남은 게 없잖아요. 사울 왕은 하나님을 의식한 게 아니고 백성들을 의식해요. 이게 전제군주의 특징이에요. 목사가 교인을 의식해요. 주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주님 의식하려면 아예 목사 된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목사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용납이 안 되는 세계에요. 예수님을 안 믿는 대신 교회를 믿는 목사가 된 거예요.

일반교인들은 몰라요. 그들의 영혼을 교회 악마에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몰라요. 목사가 되고 교회가 되고 난 뒤에 그들은 뭘 해야 되는가? 자기가 교회의 어른이 되기 위해서 이단을 만들어야 돼요.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돼요. 이단이 하는 주장을 이야기함으로서 나는 이단이 아님이 교인들에게 세뇌하듯이 그들의 정신을 장악하는 방법을 씁니다. 그걸 두 자로 ‘목회’라고 하는 겁니다. 신천지는 여기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붙여놓은 것 있지요. 그게 정치영역이에요. 성경을 알아서 목사가 아니라 정치를 배워서 목사가 되는 거예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사울이에요. 사울은 입만 떼면 전부 다 이스라엘을 위함이고, 보세요. 이스라엘은 사람들이죠, 백성들이죠. 백성들은 좋아하지요. 내가 다윗을 싫어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고, 사람들 일단 기분 좋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다음 뭘 위한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함이 되는 거예요.

이 논리를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서 하나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 이야기 안 한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교인들이 평생을 두고 속고 있어요. 저 목사 비난하는 것은 우리 교인들이 할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거야. 이게 바로 계급화잖아요, 이게 계층화잖아요.

사실은 그 말이 믿어서 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간증해서 친구들 목사 와서 설교할 때 어떤 사람 목사 건드려서 그 집안 파탄 난 이야기하니까 그걸 안 믿지만 내 인생에 흠이 나는 일은 내가 싫으니까,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뭐 있나.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이거는 그 목사를 사랑함이 아니고 누구 것 챙기려고? 내가 갖고 있는 누적된 내 재산과 내 자본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앞으로 목사를 사랑하면 목사를 지적하자, 그런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인간은 자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손상이 가는 일은 어떤 일도, 그걸 어제 설교에 분란을 일으키는 일, 내 평화에 분란을 일으키는 일을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지를 않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평안만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주님의 평안은 없는 거예요. 내가 익히 알던 평안, 가정의 평안, 교회의 평안만 있으면 그걸로 인생 선방한 것처럼 여긴다니까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에 호소해서 이스라엘이 자기를 왕 되게 한 바탕되는 힘의 집결로 본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사람들에게 거짓말한 거예요. 그런데 거짓말이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모르고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체제와 법을 알기 때문에 사울 왕의 주장에 대해서 조금도 이의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네가 힘없는데 힘 있는 자에게 대충 고개 숙이면 되잖아. 거기에 나오는 오늘날 상투적인 것이 교회에서 무슨 일 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잖아요. 계란으로 바위 치면 계란이 깨지지 바위가 깨지냐. 그만 대충 넘어가라. 그냥 은혜롭게. 교회 모든 회의는 마지막에 은혜로 끝나요. 주님께서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이유는 계란이 깨지기 위해서입니다. 바위가 깨지는 법은 없어요.

바위가 깨지지 않기 때문에 바위가 악이며 바위에서 계란이 깨짐으로서 계란은 비로소 생길 수 없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 깨진 달걀이. 그게 오늘 본문이야기에요. 안 깨지면 같은 악인이에요. 깨지라고 계란, 힘을 안 주신 거예요. 내가 힘이 있어서 교회 문제, 국가의 문제 정치적으로 데모하면 이거는 지가 악인이에요, 그게. 마치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가 돼버려요.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거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계속 아무것도 아님을 유지시켜야 되는데 뭔가 의롭고 정의로운, 이걸 세 자로 이렇게 합니다. ‘오지랖’이라. 문재인 그 집 앞에 가서 데모하고, 데모하면 일당 나오거든요. 양산에 가서 데모하고, 수갑 네가 차야 된다고 주렁주렁 수갑들 달아놓고.

왜 그런 짓하나?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그것보다 달리 돈 되는 일이 없어서 그래요. 모든 것은 자본의 세계니까. 자본을 돈을 가져야 계급이 내가 귀족 생활할 수 있어요. 고급차를 탈 수 있고 내가 호사롭게 살 수 있고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적을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정당하게 돼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바위 같은 사울 왕의 나라와 누구와 대결시켰다? 특이한 개인 다윗과 대결시켰습니다. 다윗은 자기 힘으로 사울 왕을 이깁니까, 못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면 어디로 피합니까? 여호와께 피하는 거예요. 그게 여호와께 피하는 것, 그게 통회하는 것 이게 시편 34편에 쭉 나옵니다. 18절에 봅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고 돼 있지요.실망한 사람 옆에 야훼 함께 계시고 낙심한 사람들을 붙들어주신다.(공동번역) The LORD is nigh unto them that are of a broken heart; and saveth such as be of a contrite spirit.(KJV)  The LORD is near to the brokenhearted, And saves those who are crushed in spirit.(NASB)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영혼이 짓밟힌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표준새번역)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상한 사람들 곁에 계시고 뉘우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 남아있는데 이제부터 해보겠습니다. 이제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다윗dl 사울에게 철저하게 깨졌지요. 그걸 사무엘상 24장 14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것 읽고 본격적으로 갑니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자, 여기 두 종류의 동물 나오지요. 하나는 개도 그냥 개가 아니고 뭡니까? ‘죽은’ 개. 또 하나는 뭡니까?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벼룩.

다윗은 이걸 누구라고 합니까? 본인. 본인이 죽은 개고 벼룩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스라엘 왕 사울은 현재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는 임금이요, 임금 앞에서 나는 죽은 개고 벼룩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세속적으로 미친 척해도 이렇게 쫓겨 다니는데 갖고 있는 재산이나 능력이나 나를 추종하는 세력 이것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야말로 연약한 계란밖에 안 되는데 왜 저를 자꾸 쫓아오십니까, 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사울의 위세 앞에서 이 상황 전체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의 세계, 언약의 세계, 진짜 이스라엘 세계에서는 이런 상황들이 필수적으로 있어줘야 말씀이 말씀답게 구체화되고 실현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신은 어떤 역할? 아무것도 아닌 역할, 그리고 세상은 어떤 역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추방하고 쫓아다니는 역할을 하는 그것이 필수적이에요. 하나님의 세계가 필수적인 거예요.

하나님 나라 천국은 특이한 개인을 통해서 나타난다, 강의 첫 번째에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지옥은 특이한 존재를 비난하면서 지옥이 구체화해서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추적하는 이 현상이 일어나줘야 이 지옥은 지옥답게 되는 거예요. 그걸 저는 악이라 했고 악의 힘이 돈의 힘과 어떤 특정 인물의 힘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을 조종하고 있고 장악하고 있는 이 상태, 이게 지옥인데 아까 지옥은 뭐가 없다 했어요?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죠.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따라 벼룩 될래,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저도 주님 따라 개 될래요. 이게 바로 예수 믿는 거예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또 자기를 새로이 영웅시하는 그런 태도밖에 안 됩니다. 세상에서 배운 가락이 힘을 갖는 것밖에 안 배웠기 때문에 우리 가정 무시하지 말고 나 무시하지 말라, 그것만 철저하게 조종 받고 배웠기 때문에 백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적을 만들고 해도 전부 다 똑같이 한 통속입니다. 다윗은 좀 특이하죠. 복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은데 이런 다윗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관련돼 있는가? 그게 여기 나옵니다. 아주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20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이죠.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말씀, 31절에서 37절에 보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빌라도가 군인들에게 실무자에게 지시를 했어요.

“뼈 꺾어라.” 왜 꺾느냐 하면 십자가 달리는 가운데 간혹 숨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기에 아예 야무지게 끝까지 죽이기 위해서 꺾으라 했어요.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만 달린 게 아니고 몇 사람 달렸습니까? 두 사람 추가해서 세 사람 달렸지요. 양쪽 강도는 꺾였어요. 뼈가 꺾였어요. 그 사람들 특이한 개인이 아닙니다. 다윗 계열이 아니에요. 그냥 보통사람이었지요. 뼈가 꺾였어요.

뼈가 꺾였다는 말은 악에게 패배했다는 거예요. 뼈가 꺾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가 악에 꺾였다는 이야기고 사실은 악인이 악에게 꺾였다는 말이고,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말은 악이 어떤 것인지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마지막에는 그 악은 모든 자는 다 꺾을 수 있었어도 딱 특이한 한 분의 뼈는 고스란히 손 못 되고 남겨두었다는 것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취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요한복음의 십자가 달린 것과 바로 연결시켜버려요. 그 연결고리에 우리가 주목해야 돼요. 이거는 우리가 모르는 악과 의, 의와 악이 어떻게 해서 이게 가름되는지를 이거는 주님의 시선, 주님의 관심사고 주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바로 십자가에 있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으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가야 돼요. 십자가에서 멈춰야 돼요. 최종적은 십자가지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에 가면 자꾸 자기 이익만 생각해서 지 편한 것만 생각하죠.

그러나 모든 비밀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겁니다. 부활에서 이룬 게 아닙니다. 재림에서 이룬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게 내가 하나님 믿고 어떤 이득이 있는지 그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내가 구원 받는다, 천당 간다 이득을 위해서 만약에 하나님 믿는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 속에 있지 않아요. 십자가 앞에 오질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 오게 되면 뭐가 날아가느냐? 나의 일 자체가 다 날아가 버리고, 주께서 무슨 일을 하느냐, 주님과 특이한 개인 예수님과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는가, 그것만 남아요. 그게 남아줘야 우리가 몰랐던 의, 우리가 몰랐던 악의 정체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에 관련된 성경말씀을 제가 찾아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스가랴 12장 10절, 요한복음 19장부터 먼저 봅시다. 요한복음 19장 31절에 보면,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실무자가 두 사람은 꺾었는데 예수님을 꺾으려할 때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러니까 이 군병들이 하는 행위가 예수님의 예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군병들은 몰랐지요. 찌르는 것조차도 말씀에 예언됐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에 37절 보세요.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야 이게 요한복음 19장에서 36절에서 마감되는 게 아니고 37절까지 성경 두 구절을 바로 그냥 연결해버리는 거예요. 찌른 자를 본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스가랴 12장 10절에 나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이렇게 돼 있지요. 여러분 지금 정신 좀 바짝 차려야 돼요.

누가 찔렀고 누가 본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누가 찔렀고 누가 찔림을 당하고, 그리고 찔림을 당한 자가 본다는 말인지 찌른 자가 본다는 말인지, 아니면 찌른 자도 아니고 찔림을 받은 자도 아니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찌르는 사건 행위를 본다는 말인지, 이게 성경말씀마다 다 달라요. 틀리게 돼 있어요.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 뼈를 꺾지 않았다는 말은 악은 악인에게만 작용할 뿐이지 하나님이 택하신 준비된 의인한테는 그 뼈가 유지가 돼줘야 악이 저지른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증거용이니까. 그러니까 찌른 자가 나쁜 게 아니고 찔렀던 자가 찔림을 받은 자에 의해서 찌른 자뿐만 아니고 그를 보는 모든 자가 다 나쁘다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찔림을 받은 특이한 한 분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재편해버려요.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구원을 시도해도 소용없어요. 구원을 시도하는 자체도 나쁜 짓이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구원 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봐야 나중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됩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누구냐?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열두 제자들이잖아요. 주님 따라가겠다는데 주님을 훌쩍 담 넘어가버렸어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렸어요.

주님은 천국에 간 게 아니에요. 천국은 누가 찔러줘야 돼요. 찔림을 받은 그 창자국 아니면 천국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막혀있으니까. 사람들이 구원 받겠다고 교회 오잖아요. 교회 가니까 목사가 성경대로 말씀대로 믿고 실천해야 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목사 시킨 대로 그 성경말씀 믿습니다, 하고 실천한다 이 말이죠. 그래 막 달려가지요. 결국 남는 것은 에이와 씨가 남아요. 합치면 뭐가 되지요? 에이씨.

닭 쫓던 개, 제자들 모습 그대로 굳어집니다. 우리 놔두고 혼자 떠나버리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 노골적인 가룟 유다였어요. 사전에 내가 알았지. 그러니까 돈 삼십 냥 챙겼잖아, 이런 식으로. 나중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했지만. 지 양심이란 게 인간의 자기의 죄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마시킬 수 있는 게 안 됩니다, 양심이란 게. 인간의 어떤 선함과 내세울 수 있는 어떤 착함도 우리를 가둔 악의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내가 설친다고 노력한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특이한 그분만이 빠져나오는 그 힘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의 구멍이 어딘지 알 수도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할 때 아까 두 개의 구절이 거기에 집중된다 했지요. 뼈가 꺾이지 아니한다. 도대체 뼈가 꺾이지 않는 게 뭔 뜻인가? 또 한 가지는 거기에 찌른 자도 볼 터이요.

요한계시록 1장 7절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를 뭐로 규정하는가? 그를 찌른 자로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그 찌른 자가 누구냐 하면 군인들이에요. 그 군인들이 잘 찔렀는지 못 찔렀는지 자기가 예수님을 찔러놓고 찌른 것을 군인들이 그걸 봤어요.

요한복음 19장 다시 봅시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이게 힘들어요. 성경구절 같이 연결시킬 때는 반드시 십자가 실로 꿰매야 돼요. 십자가 피가 통하지 않으면 성경해석 일체 되질 않아요. 십자가 피가 남는 해석이 돼야 되지 나 구원 받았다는 해석이 되면 안 돼요. 그거는 지는 마치 구원 받아 마땅한 잘난 존재가 되니까 그렇게 돌아오면 안 됩니다. 십자가 피만 나와야 돼요.

33절에서 찌르니까 피와 물이 나왔지요. 그러면 다 나온 거예요. 뼈 꺾는 이야기 나왔지요. 그다음에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37절) 이 말은 뭐냐 하면 찔린 자가 예수님이고 찌른 자는 그 당시에 누구냐 하면 군병이죠. 그 당시 군인들이죠. 그 군인들이 어떤 최후의 목격자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십자가 현장에서 마지막에 성경말씀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끝까지 쳐다보는 유일한 목격자가 찌른 자에요. 악입니다.

악의 지시를 받는 악인이 십자가의 유일한 목격자에요. “상관님, 지시대로 처리했습니다.” 없애버렸습니다. 이 전제군주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아무짝도 소용없는 예수를 없애버렸습니다, 라고 보고할 수 있는 그 마지막 보고자가 직접 창을 들고 직접 예수님을 찌른 자, 바로 그 자가 악의 마지막 모습을 대신해서 보여준 자에요.

그러면 악은 뭡니까? 예수님의 존재도 아니고 예수님의 인물도 아니고 바로 십자가 사건을 유발할 때 거기에 참여된 자가 악이에요. 그게 악마에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지요. 나는 십자가 지혜 외에는 다른 지혜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너희가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은 것, 그 사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해서 만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나를 핍박한다. 그때 사울은 뭐하다가 예수님 만났습니까? 예수 믿는 자를 공격하러 가면서 예수를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전 세계 모든 움직임이 십자가 그때 그 사건의 현장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야 이 세상이 악의 천지고 저주받고 지옥이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할 말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언약에 의하면 저주의 세계,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받는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가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소위 잘난 자들이 등장해서 이거는 중구난방 아무 진리가 가려져요.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고 반복이에요. 그 말씀에 찌른 자도 볼 것이요, 했는데 스가랴에 의하면 그 찌른 것 때문에 그다음에 뭐냐? 애통하는 자가 등장해요.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애통했습니까? 애통 안 했지요. 걸음아 날 살리라고 도망쳤잖아요. 애통 안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애통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도 될 자격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성도는 찔림을 받은 자가 자기를 찔렀던 그 세계로부터 찔림을 받았다는 이걸 근거로 해서,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해서 주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그 사람에게 그대로 일어나게 하는 대상이 된 자만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이걸 미리 그 삶을 살았던 자가 오늘 본문에 누굽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얍삽한 사람이고 비겁한 사람이고 요령꾼이고 연기 피우면서 자기 살 길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은 여호와께 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요. 그게 말씀 완성의 세계에 피하는 거예요. 그때 피하면서 다윗은 통회해요. 애통하는 겁니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닌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4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께서 원하는 것은 무슨 심령이다? 상한 심령이다. 그 상한 심령의 당사자가 누굽니까? 다윗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다윗을 세속사회에 보내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를 교회 마치고 자꾸 세속세계로 보내는 이유가 우리의 기도는 오직 회개하는 기도만 하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의 악의 조종을 받아서 ㉯예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쓸데없는 대상인 것을 계속해서 내 내부에서 그게 끓어오름을 고백하면서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 육신의 본성을 보면서 아까 통회가 시편 34편 몇 절이죠? 상한 심령이 몇 절입니까? 18절, 19절이죠.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절을 그게 과거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시편 34편 18절이란 말씀이 늘 살아 있게 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증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뭐 느긋하지요. 왜? 이미 우리는 말씀세계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 피했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이건 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을 때까지 되풀이하는 거죠.

이 되풀이도 나중에 죽고 나면 뭐예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 더 이상 세속세계에서 떠났기 때문에 육신은 죽었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고 뭐고 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통회가 돼요. 우리 자신이 몰랐던 것 말씀이 와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시편 34편에서 다윗은 감사하지요. 주의 환난에서 감사하고 뭐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느냐, 21절 보겠습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비로소 죄라는 게 뭔지 아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의인인 특이한 개인이 등장하지 않으면 죄를 몰라요. 내가 죄 사함도 감사하지만 내가 죄가 뭔지 근원적으로 알게 된 것이 감사하지요. 죄가 뭐냐? 주님 없었으면 죄가 없었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비로소 저주가 개시되고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주께)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그 죄, 다시는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입장에서 시편 34편의 삶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마음껏 재현해도 괜찮습니다. 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왜? 죄를 아니까. 내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했고 흘린 피와 물로써 그 피로 누가 찔렀는데 찌른 자나 우리나 같은 통속이었는데 그 찌른 자도 볼 것이고 누가 찔림을 받았는지 누가 이 세상에서 밉상 받았는지를 이제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분이 나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에게 밉상 받은 분이 피로 말미암아 그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겐 죄가 없어진다는 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 우리 손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 손으로 실천되었음을 우리가 그 혜택이 얼마나 큰 혜택이고 혜택 자체가 복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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