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3a 부산강의 : [시편]51(35:1)-덫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35편하겠습니다.
시편 35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이렇게 돼 있지요. 여호와를 따로 상정하고 아래쪽에 ‘나’가 등장하고 그다음에 저쪽에 ‘너’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싸우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에 남이라고 다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나와 싸우는 자가 등장해서 무엇이 여기서 규명이 되느냐 하면, 여호와의 뜻이 규명이 됩니다.
내가 싸움에 말려들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은 여호와의 뜻을 모른다가 돼버려요. 시편 35편에 의하면. 시편 35편이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이 세상은 말씀대로만 돼 가지요. 말씀에 의하면 나와 싸우는 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기회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여기 시편 35편 3절에 보면,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너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저한테 일러주소서. 너 구원 받았다고 일러주소서. 그런 뜻이거든요. 그다음에 여기에 9절에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구원을 기뻐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뭘 아느냐 하면 구원이란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뜻 자체가 구원을 어떻게 형성시켜주는가? 그걸 아는 겁니다. 그러면 나와 다투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느냐?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 구원은 여호와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지 여호와의 뜻에 관심 없는 사람은 구원 없어요.
구원 없다면 이들에게는 뭐가 있느냐? 여기에 25절에 보면,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이렇게 돼 있어요. 나와 싸우는 자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소원이 있어요. 성도한테는 구원이 있지만 성도와 싸우는 자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싸움이 없어요. 어떤 싸움이 없이 어떤 장애가 없이 인생에 자기 소원성취에 매달려 있습니다.
구원이 없고 소원이 있는 사람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걸 제가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싫고 천국은 원하는 인간의 이중성] 예수님은 싫은데 천국은 원해요. 인간이 예수님이 왜 싫냐 하면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게 뭐냐? ‘나’에요. 그래서 교회 와서 구원을 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교회 와서 소원을 원해요.
예수님은 싫고 천국은 원하는 인간의 이중성,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천국이라 하는 것은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이게 누구의 나라냐 하면 예수님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싫다는 말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고, 천국에 못 가는 이유는, 나는 예수님의 나라를 원한 게 아니고 내 나라, 나의 나라를 원한 거예요.
나의 나라 원해서 만든 게 뭐냐?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 온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자기가 자기한테 너무 좋아서 교회 온 거에요.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그 소원이 뭐냐?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그게 소원이니까. 예수님을 잃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나를 잃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 잃어도 나만 챙기면 오케이로 여기는 자들, 교회로 갑니다. 그들이 자기 종교를 갖게 되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나 말이나 태도, 평소에 생활습관이 딱 이걸로 들통 다 났습니다. 예수님이 싫고 천국을 원한다. 그 천국은 무슨 천국? 내가 잘 되는 천국을 원한다. 이것을 인간은 숨길 수가 없어요. 예수님에 미쳤고 예수님 좋고, 이런 사람 거의 없습니다. 자기한테 미쳤고 자기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그 자기 안에 뭐냐? 자기 가족과 가정이 함께 포함이 돼 있어요. 내 직장,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잘되는 것 그 외에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구원이 소원이에요, 소원.
그럼 구원은 뭐냐? 소원을 깨고 나오는 게 구원이 되는 거예요. 내 위주를 깨고 나오는 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가도 구원 받은 사람 거의 없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자기 소원 얻으려 교회 왔기 때문에 구원과 아무 상관없는 짓들을 하는 거예요. 찬양하고 헌금하고 예배하는 데 소원과 관련돼 있지 구원과 관련돼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 마치곤 후다닥 자기 소원대로 열심히 하는 겁니다.
이 소원을 네 자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소원을 뭐라고 하느냐? ‘목적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성경에서 인간의 목적의식은 한 마디로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냥 이래요. 뭡니까? 더럽다. 사람이 인생이 사는 게 힘든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 목적의식이 더러운 이유는 이것과 자기의 구원과 관련 없고 소원과 관련 있어요.
따라해 볼까요? 목적의식(소원)이 더러운 이유는 무엇 때문에?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덫에 자기가 빠져버렸어요. 덫 알지요. 쥐 잡을 때 덫, 짐승 잡을 때 덫. 내가 내 인생에 덫을 놨어요. 지 인생에 지가 덫을 놓고 저 사람한테 사기 당했고, 저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이러고 있어요. 네가 나를 힘들게 했다. 전부 다 남 탓하고 있어요. 본인이 본인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는 더 나아가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자아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정리할게요. 인간이 기독교라는 종교, 교회를 가는 이유가 뭡니까? 궁극적으로 빠져나오는 게 뭐예요?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그럼 이 사고방식, 목적의식이 나중에 구체화됐다면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일까요, 자기 나라일까요? 자기 자신이 영광 받는 자기의 나라지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했어요. 너희들이 절대로 내게 올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게 뭐냐? 각자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도 요한복음 12장인데요. 본문 알려드릴게요. 아주 친절하게. 이게 친절한 건지 짐을 지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 12장 43절,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이 소원에서 못 벗어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영광으로부터 못 벗어나요. 본인이 잘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말이 어려운 거예요? 안 어려워요. 본인이 잘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본인이 잘되기 위해서 소원의 덫에 빠졌는데 이게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되겠습니까? 구원이 안 되죠.
소원으로 계속 머리 처박고 거기 기어들어가는 데 무슨 구원이 돼요. 교회를 오십 년, 육십 년 다녀보세요. 구원이 안 돼요. 소원이 자기한테 최종 목적이 목표 자체가 자기 자신인데 무슨 구원이 됩니까? 안 되지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세상에 아까운 게 인간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범죄는 귀중한 것을 귀하게 못 보기 때문이다. 귀한 게 뭐냐 하면 햇빛과 공기와 주께서 우리를 오늘도 살려내심이죠. 주께서 여호와께서 살려내심이죠. 그러면 살려냄을 당한 내가 귀합니까, 주님이 귀합니까? 주님이 귀하지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이 먼저 있었느니라. 사람이 귀한 거예요, 사람 있기 전의 생명이 귀한 겁니까? 생명이 귀한 거예요.
그런데 살아나서 뭔가 문제가 생겼어요. 예수님은 싫고 나는 좋고. 내가 들어갈 천국은 좋고. 본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한시도 Don't forget, 절대로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나한테 이익이냐, 이걸 한시도 긴장 늦추고 잊은 적이 없어요. 왜? 내 소원은 내게 있으니까.
이게 시편 35편 아니면 어떻게 알겠어요. 다윗이 등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어요. 왜? 너나 나나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다윗이란 것은 특이한 존재에요. 하나님의 선지자고 예언에 의해서 등장한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시편 35편 1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여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시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귀중한 것을 보지 못한 게 범죄가 되니까, 범죄란 것은 하나님께서 더럽다하니까. 인간의 모든 목적의식은 어떤 목적의식이든 그거는 더럽다가 돼요.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지 않으니까 더러운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죄인밖에 없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러면 인간의 목적의식, 소원이죠. 목적의식은 인간이 왜 힘든지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목적의식은 현실과 자기의 목적이 일치되기를 한시도 긴장 늦추지 않고 그걸 계속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소원에 유리하게 되도록 바짝 졸아서 살아가고 있어요. 아주 예민해집니다. 모든 신경구조가 예민해지죠. 소원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는 이 땅에서 고인이 되었고 죽은 자가 되었고, 고인의 특징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산책로라고 이야기했지요. 왜냐하면 죽어버린 자에겐 뭐가 없어요? 더는 목적의식이나 자기 소원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의 소원이 나에게 일을 할당시키고 주님의 소원이 나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굳이 내 소원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그런 사람은 이미 어딥니까? 자기 나라에 있는 게 아니고 어느 나라에 있어요? 예수님의 나라에 있는 거예요. 아들의 나라에 있는 거예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답변은 주님의 지시에 따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지시가 시편 35편에 보면 바로 어떻게 아느냐? 인간의 주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아요. 나와 다투는 자와 만나게 해줍니다. 이게 바로 나에게 장애물이 돼요.
인간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내 앞길을 막는 것을 아주 괴로워하고 혐오는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소원이 세상 돌아가는 내 계획이 있고 스케줄이 있는데 그걸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나의 적이에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태클을 걸지 마> 영탁이 불렀고, 그 사람 이전에 진성이 먼저 불렀어요.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라. 죽여 버린다 이 말이거든요. 죽여 버린다는 말은 꼭 칼로 죽인다는 뜻이 아니고 미워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제가 저번, 저번 낮 설교에 했지만 이 세상은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이미 죽어 있고, 내가 미워하지 않더라도 미워하고 이미 죽어 있다는 미움의 대상이에요. 누가 보기에? 예수님 보기에. 왜냐하면 다윗은 선지자기 때문에 다윗 속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영이 와 계신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11절 말씀처럼. 이미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들어가 있어서 그리스도 영이 어떤 식으로 선지자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앞당겨서 그 시대에 펼쳤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에는 뭔가 쌓여진 게 있어요. 성도라 할지라도 이 쌓여진 것을 자기 힘으로 떼어낼 수 없어요. 쌓여진 게 뭐냐 하면 기억입니다. 그 기억은 어디에 응축되느냐? 나, 나로 응축돼요. 성도라 할지라도 항상 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건 없어요.
그런데 교회 와서 복음의 말씀을 듣잖아요. 그때는 잠시 나가 느슨해지고 나가 풀어지고 나가 잘 생각나지 않아요. 복음에 빠져 들어간다고. 그런데 교회 문만 열고 나가면 다시 풀어졌던 내가 나로 하나가 돼요. 마치 뭐와 같나 하면 두부 만들 때나 밀가루 풀 할 때 스프처럼 돼 있지만 다시 굳으면 뭐가 됩니까? 액체가 서서히 고체가 되지요. 나 생각 안 하던 것이 세상에 나가자마자 내가 하나로 굳어지지요.
나로 굳어진 순간에 내가 조금 전에 들었던 성경말씀 복음은 전부 다 기억의 창고에 들어가서 그게 버려져서 지식이 되고 살아 있는 건 내가 살아 있어요. 분명히 예배시간에 말씀이 살아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거는 어느새 그러니까 15분내지 17분 사이에 벌써 아스라한 옛날 기억이 되고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 소중한 내가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면 내 소원이 이뤄지나, 나의 행복은? 내 자식은 잘돼야 될 텐데. 갑자기 아들의 나라는 날아가 버리고 나의 나라가 그 현장에 등장하지요. 나만이 잘됐다고 소문난 현장, 소문난 세상.
주께서 만나를 매일 주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쉬울 때 뭐가 소중했다? 양식이 소중했는데 만나 먹고 난 뒤에는 뭐가 소중했다? 양식 먹은 내가 소중해버린 거예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 이 말은 날마다 “너는 이 양식보다 소중하지 않아.” 계속 그걸 일깨워주는 거예요.
“너보다 소중한 분은 따로 있어.” 너보다 소중한 분의 존재와 그분의 활동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 너에게 사료 주듯이 개 키우듯이 먹을 것을 주는 거예요. 나는 개한테는 내 자식 아니다. 맞습니다. 내가 개입니다. 개도 뭔가 아들한테 주어질 것을 얻어먹으면 그 개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개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줄 양식이 굴러 떨어졌으니까. 우리는 개보다 더 더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언약의 사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아들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작동하는 작용하는 말씀이 더 소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고 복음이고 전부 다 기억의 창고에 집어넣고 그다음부터는 나로 굳어져서, 나로 굳어지면 가만있지 않아요. 자기의 목적의식을 향하여 부단히 발발 떨면서.
떠는 이유는 뭐라 했습니까? 현실과 내 목적의식이 일치돼야 될 텐데, 그것 때문에 바들바들 떨면서 이런 자들(아들의 기능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 지난 복음 들은 것 어디 갔습니까? 나도 안다, 이러거든요. “너만 신자냐? 나도 신자다.” 갑자기 분노가 일어나요. “너 아는 복음, 십자가 피 나도 다 알아.” 이렇게 나온다고요. “나도 교회 오십 년 다녔어.”
이게 뭐예요? 그게 다투는 자의 특징이에요. 내 소원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주님은 구원인데 나는 때려죽여도 내 소원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잘돼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잘돼야 되는데 방해한다면 누가 방해한다? 바로 예수님이 방해하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방해하느냐? 너도 죽어라.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나 혼자는 못 죽는다.
네가 내 앞길 막았으니까 장애가 되니까 내 소원이 혹시나 흠집 날까 싶어서 나는 죽일 수밖에 없다. 방금 들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느냐 하면 티비 예능프로나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대사를 한 번 스캔해보세요. 예능프로에 젊은 아이들 까부는 말 하나 행동 하나 다 스캔해서 방금 이 이야기, 인간의 목적의식과 결부시켜보세요. 그들이 왜 더러운지요. 지옥 가는 것은 기본이고요 일단은 더러워요.
<나는 SOLO>라는 예능프로가 있는데 삼사십 대 혼자된 남녀가 선 봐서 짝 맞춰주는 프로그램에요. 거기에 의사, 변호사,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에 여자도 보통 잘 나가는 사람 아니에요. 처음엔 이름 안 가르쳐주고 영자, 숙자 가상 이름하고, 이쪽은 영철이 영식이 해서 선 보는 프로그램인데 그들 삼사십 대 사회의 중추 아닙니까. 그들이 삼사십 년 동안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뭘 듣고 배웠는지 기억에 누적된 게 그들의 멘트로 말로 나오는 거예요.
말로 나올 때에 이런 구조, 시편 35편의 구조를 보게 되면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요. 내 자식도 저렇게 잘돼서 선 봤으면 좋겠다. 아직도 시집도 안 가고 있는데, 이런 식이에요. 왜? 그걸 친화성이다. 어제 낮 설교에 친화적이다, 친근하다. 그러니까 복음을 들을 때 지식 하나 얻은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세상 자체와 나와 다툰다는 시편 35편을 못 느껴요. 친화적이라서.
못 느끼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도 거기에 끼워줘, 이렇게 돼요. 나도 거기 한 자리 달라는 거예요. 왜? 그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는 나를 잊지 않는다. 나를 잊지 않았으니까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짝짓기에 참여하지요. 신청하고. <무엇이든 물어보살> 서장훈 나오는 프로 있거든요. 거기 나오는 멘트 보세요. 오은영 박사가 하는 이야기 들어보세요. 하여튼 티비 모든 프로그램과 드라마 내용 보세요. 그들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계시록 20장에 보면 나를 잊지 않는 사람, 이걸 바로 행위 책이라 해요. 행위 책은 어디 들어가기로 돼 있느냐 하면 불 못에 들어가요. 아까 제가 강조한 걸 상기하면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이야기가 갑자기 동의가 되고 동조가 되고 친근하다는 말은 뭡니까? 그들의 끝이 지옥 불, 불 못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깜빡 놓친 거예요. 깜빡인지 본래부터 놓친 건지 모르겠지만 이걸 완전히 까먹고 있는 거예요. 이걸 삭제한 채 그 사람을 대하는 거예요.
불 못에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의 특징은 나를 잊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의 특징은 뭐겠어요? 주님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자에요. 왜? 지시는 누구한테 오기 때문에? 주님한테 오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시하게 되면 소중한 내가 소중한 나 되라고 내가 현재 지시하는 나와 소원을 성취한 내가 일치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들바들 떨며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이걸 제가 아까 한 자로 뭐라 했습니까? 덫. 오늘 제목을 덫이라 할까, 덫이에요. 성경 모임에 갈까요? 바빠서. 왜 바쁘지요? 이런 사람은 예외로 합시다. 꼭 가고 싶어서 벌써 두 달 전부터 마음속에 주여 꼭 가게 하옵소서, 이랬는데 어쩔 수 없이 국가가 불러서 못 한다든지 진짜 소원은 세상에 가는 소원이 아니고 말씀에 소원이 있는데 이게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은 예외로 합시다.
그럼 나머지는 뭐예요? 누가 소중하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싫고 누가 좋다? 나는 좋다. 그 끝은 어디 간다? 이건 이유가 뭐다? 항상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끝은 뭡니까? 지옥 불이죠. 왜? 그 사람들은 구원은 관심 없고 자기의 소원을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자기 소원을 구원이라고 오해하고 있어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한국교회에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모습이에요. 교회 교인들도 거의 대부분이라면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세상이 만든 방송국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지옥체험, 지옥 구경하려면 티비 틀면 이준석부터 해서 전부 다 지옥 가는 사람 이야기 뉴스 시간에 다 나오잖아요. 실감나지 않습니까. 지옥을 미리 실감한다는 것, 재미나는 체험 아닙니까, 그게. 그동안 몰랐어요? 그게 지옥인지.
자기가 소중해서 자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은 현실과 내 소원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그 모습, 그것이 뭐다? 지옥이다. 그게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거든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잖아요. 우리는 안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안 그러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왜? 나는 내가 다치기 싫으니까. 남으로부터 다치기 싫고 나로부터 다치기 싫고 주님으로부터 내가 다치기 싫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다투는 자를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 가는 길에 장애를 만들어서 이 장애를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요. 세상이 내가 내 소원대로 이뤄지지 않게 해주시는 그 간섭하심에 그 기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야아 이게 시편 35편이구나.” 나는 구원, 구원했는데 나중에 소원돼버렸어. 구원으로 시작해서 소원으로 돼버렸다고. 이걸 다시 소원, 소원에서 구원으로 돌리시는 것은 바로 주님이 나와 다툰 분으로 등장할 때 비로소 나의 소원은 잊어버리고 이게 주님의 구원의 과정이고 일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하는 데 이렇게 나를 밟아서 구원하시는구나.” 이게 멀쩡하게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나를 안 잊고 싶으니까. 나뿐만 아니고 내가 살았던 내 가정도 잊기 싫어요. 내 평생 고생고생하면서 일궈낸 가정이기 때문에.
지난 주 <인간극장>인가 나이 육십 이상만 보는 프로그램 있어요. 젊을 때 <6시 내 고향> 누가 보나 했거든요. 그건 칠십 이상 보는 거예요. 전라남도 무안에 칠십 넘은 할머니가 있는데 제목이 <어머니의 소금밭>이에요. 땅에서 일하는 가운데 제일 힘든 일이 소금밭, 염전 일이에요. 그래서 장애자들 납치해서 일시키잖아요. 돈도 안 주고. 제일 힘든 게 염전하고 주물공장 이런 게 가장 힘들거든요. 실내온도 55도 되는.
소금밭에서 네 자식들이 일하고 커서 서울로 갔는데 서울에 직장생활 힘들고 어렵다고 하잖아요. 소금밭에서 일하고 나니까 직장생활은 노는 거예요. 데모는 왜 해, 파업은 왜 합니까. 미친 거예요. 소금밭에서 일해 보면 그건 일도 아니라. 뭐 잔업? 돈 몇 푼? 그건 일도 아니에요. 월급 적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만큼 힘든 게 소금밭이에요. 이 소금밭이 그 할머니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내 인생 내 고생한 기억이 창고에 누적이 돼 있는데요. 창고에 누적이 된 걸 스스로 불태울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 할머니와 오늘날 우리가 다른 점이 뭐예요? 누가복음 12장인가 그런 말씀 나오지요. 어떤 농부가 농사가 잘됐어요. 농부가 잘되려고 농사지을 것 아닙니까. 망하려고 농사짓지는 않지 않습니까. 해서 창고에 들이는 순간 그다음부터 그 농부에게 자아가 갑자기 소중해져버렸어요. 내 영혼아, 자기가 자기에게 묻는 거예요. “내 영혼아, 이제는 편안히 쉬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게 생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을 추구하다가 막혀버린 거예요. 생명의 라인을 넘지 못하고 유사 생명에 멈춰버린 거예요. 이제부터 어려운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에게 왔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5편의 다윗에게. 다윗은 어느 계통이냐 하면 아담 계통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아담을 수축시킵니다. 다윗도 자기 기억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다투는 자를 만나게 해서 수축시켜버립니다. 수축이란 말은 참기름 짠다 이 말이에요. 깨를 위에서 누르면 아파야 기름이 나오지요.
수축을 하는데 어디까지 수축하느냐? 수태장소, 처음에 잉태한 그 자리까지 가버려요. 니고데모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한테 어떻게 내가 이 나이에 모친의 태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자에게는 자기가 처음 태어난 수태장소로 눌러버립니다. 수축이란 압축을 시킨다, 눌러버리는 거예요.
수태장소가 어떤 장소냐 하면 없음과 있음을 가름하는 경계지점이에요. 이게 인간에게 뭐냐 하면 심연. 심연이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깊은 어둠의 세계, 아무 것도 없는 그 세계. 심연의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1장 1절, 혼돈 속에 아무 형체도 없고 뭔가 만들어졌다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 세계로 가지요. 그 세계가 바탕이 돼야 돼요. 이건 뭐냐?
다윗이 수축이 된다면 결국 다윗은 다투는 자와 만나서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그 다투는 자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나를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게 시편 35편에 나오는데 5절에 보면, 다투는 자를 천사가 와서 그들을 멸망의 길, 그러니까 심연의 길로 가게 하는 거예요. 지금 다윗을 예수님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까 예수님과 다투는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심판할 수 없는 대상 누구지요? 우리 자신이죠. 아담에 속했으니까. 이런 자를 심연으로 가게 해요. 누가? 천사를 보내서.
그럼 우리는 누구 앞에 오느냐? 주님 앞에 오지요. 그러면 구원 받아야 될 우리가 스스로는 구원 될 수 없어요. 소원의 덫에 빠졌으니까. 이것을 구원하는 자가 구원 받아야 될 우리와 더불어서 함께 데리고 우리의 운명이 가야 될 그 길을 우리를 함께 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원래 시작의 수태의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가시는 거예요. 이게 시편 35편 말씀의 완성이 십자가로서 완성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치에요.
그럼 있음과 없음의 자리,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죽음의 자리에요.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일단 물어보고 설명 이어나가겠습니다. 생명나무와, ‘나’는 숫자로 하면 2가 돼요, 1이 돼요? 1이죠(나=1). 1이 수축이 되니까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2가 기다리는 거예요. 있음과 없음의 경계 2가 기다리는 거예요.
생명나무와 선악과 할 때 죽음은 여기서 어디 있습니까? 선악과에 있다고 생각했지요. 사실은 죽음이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 이 사이, 이 차이에 죽음이 있습니다. 이 죽음의 결과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죽음이에요. 아담의 죽음은 결과고 원래 진짜 죽음은,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예수님이 죽어야 진짜 죽음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그 차이, 그 사이에 진짜 죽음의 있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우리의 존재가 수축된 상태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1은 2에서 새롭게 1이 되는 거예요. 뭘 품고, 뭘 품는가? 예수님의 독생자의 죽음을 품고 새로 등장한 1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예수님의 죽음만 있습니까, 자기 백성의 죽음의 함께 들어있습니까? 함께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나는 고인 되었고 죽은 자가 되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일로서 시편 35편을 이제는 이게 현실화되는 그 장, 그 영역 속에서 성도가 말씀의 세계 안에서 던져지고 그 안에서 생애를 보내는 겁니다. 인생을 보내는 거예요. 어렵다 하지만 들어보니까 논리는 간단하지요. 그렇지요.
자, 여기 1에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말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나의 의지는 죽고 그리스도의 의지가 있고, 나의 힘은 죽고 없고 주님의 힘은 살아 있고 또는 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무엇이다. 뭡니까? 주님의 은혜지요, 힘이죠. 주님의 힘보다 주님의 의사 또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의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목적이 내 목적을 없애려면 반드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로 시작이 돼야 돼요. 거기서. 사는 것은 주님의 의지로 살고 우리의 뭐만 자랑하고?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에 대해서 아시겠습니까? 알아도 문만 안 열면 돼요. 문 열면 ‘나’가 갑자기 건드려진 내가 생성되니까.
이것을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할 예정인데 미리 이야기하면 그게 뭐냐? 비밀입니다. 이게 바로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창조전의 비밀이에요. 비밀의 특징은 알려줘도 모른다는 것. 알려줘도 모르는 이유는, 알려고 하는 네가 죽어야 비로소 안다는 거예요. 내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게 비밀이에요. 살아 있으면서 비밀 해버리면 이게 기억이 돼버려요. 지식이 돼버려요. 그 지식은 나를 살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윗은 자기 다투는 자가 있지만 신약에 오면 그 반대가 되어 다윗과 다투는 자가 주님이 돼버려요. 그리고 우리와 다투는 자가 주님이고, 주님 입장에서 다투는 자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인이 소중하니까 본인은 멀쩡하니 살아 있고 얼마 전에 십자가에 죽었던 그 양반은 뭡니까? 가짜였다가 유포되기 시작합니다. 신약시대에서. 그리고 제자들은 속았다고 고기 잡으러 가버리고. 그 똑같은 현실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이 사실에 직면해야 돼요.
인간은 아는 비밀을 원해요. 내가 모르는 비밀은 원치 않습니다. 내가 아는 비밀은 사실은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이었더라도 내가 아는 비밀로 넘어오기를 바랍니다. 그 목적이 뭐냐? 소원이 있기 때문에. 비밀이라도 알아서 기어이 내가 천국에 가겠다는. 그런데 그 비밀이 오는 과정에서 누가 다툰다? 주님이 나와 다툰다는 사실을 그걸 모르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수준이 다르다. 수준이 다르다는 것은 층이 다르다는 게 아니고 다른 세계에 속한다. 세상이 말하는 누가누가 잘하나, 그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고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비밀이 주어지는 겁니다.
다시 시편 35편에 돌아와서 4절을 보겠습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생명을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찾는 자” 그러니까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자, 그런 뜻입니다. 사울도 그렇고 시므이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고. 하여튼 사무엘상과 하에서 블레셋도 마찬가지고. 특히 사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죠. 사울은 다윗을 대할 때 내 손에 죽어야 될 자로 본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성경 보는 입장에서 사울 원망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썼지요? 예수님은 싫고 뭐는 좋아하고? 천국은 원하고, 할 때 이 ‘싫고’에서 뭐냐 하면 내 손에 걸리면 죽인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내 소원을 방해하는 자는 비록 그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죽여 버린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데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 내가 없애버릴 예수는 가짜였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제거하는 것은 이건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왜? 내 지식 안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해야 구원 받는다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실제로 그 지식은 누구에게 봉사하고 누구를 받드는 지식입니까? 주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누구? 나를 받들기 위한 지식이기 때문에 주님께선 그걸 지적하는 방법은 나와 다투는 자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어요.
나의 큰 존재를 압축시켜서 점으로 만들어버려요. 아주 면적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요.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이 말은 뭐냐? 너는 잊어버리고 잃어버려도 생명 되신 말씀이 있고 주님이 계시면 너한텐 그다지 손해 아니잖아,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우리는 하도 이익을 찾기 때문에 이익 쪽으로 계산하자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잃어버려도 나를 새롭게 만들 분이 계시다면 괜찮잖아. 이게 어디 나오느냐?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죽여 버렸어요. 나사로는 손해 본 거예요. 자기 귀한 목숨이 손해 본 거죠. 그런데 나흘 만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등장하면서 뭐냐? 내가 곧 생명이고 내가 곧 부활이라 했어요.
주님이 우리를 부활시킨 분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되기를 소원하면서 예수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 자신만 계시면 됩니다, 이게 믿음이라 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뭘 획득하려고 하지 마시고. 믿음을 만약에 갖고 있으면 우리는 못 잊어요. 나는 잃어버려도 예수님만 생각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미 아들의 나라, 천국에 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10분 쉽시다.
20220913b 부산강의 : [시편]51(35:1)-덫
(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의 역사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에 붙었던 모든 민족들 멸망해요. 이상하죠. 여러분들이 어떤 물건이 있는데 너도 손대고 나도 손대면 다 화상을 입더라. 뭔 뜻입니까? 불덩어리란 말이죠. 손대면 뜨겁다, 탔다. 불이 나온다는 이런 뜻이잖아요. 같이 붙었다가는 그 불이 어디까지 미친다? 손을 댄 민족에게 불 붙어버려요. 파괴돼버리고.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붙었던 민족은 망했다는 말은 지금 이스라엘이 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던 거예요. 멀쩡하게 이스라엘이 보이니까 이스라엘을 멀쩡한 걸로 보고 또 자기도 멀쩡한 걸로 보고 누가 더 멀쩡한지 붙어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건드리니까 이스라엘 파괴를 거쳐서 이방민족까지 파괴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주님을 믿는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 가시 십자가가 드디어 나한테 옴팍 뒤집어썼다는 뜻이에요. 즐겁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재주로 무슨 능력으로 무슨 지혜로 십자가 길을 가겠습니까? 주께서 나한테 접촉이 되니까 십자가 길을 가는 거예요. 손대면 톡하고 터져버리죠. 주님이 손대니까 터져버린 거예요. 왜? 주님 자신이 터져버렸으니까.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인간의 고민은 이거에요. 하늘로 갈 것인가, 땅에 정착할 것인가? 이게 고민인데 이유가, 중간에 붕 떠서 그래요. 붕 떠서 산다. 인간은 땅에 두 발을 딛는지 아니면 디뎌야 되는데 인간은 본성이 선악과 따먹어서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향하여 구원 받기를 소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붕 떠서 있어요. 아예 노숙자 되든지 아니면 사장님 되든지 해야 되는데 과장 정도로 붕 떠있는 거예요.
뭔가 미래가 지금 이 땅의 지저분한 천박한 땅의 생활을 언젠가 청산하고 높은 데서 멋진 데서 살 것이라고 마음먹는 순간 그 사람은 하늘에 도달하지 못하고 땅에 발붙이지도 못하고 붕 떠있다. 이걸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게 뭐냐 하면 소중한 것, 귀중한 것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범죄가 시작되는 겁니다.
나 이 정도 되는데 월급 이백만 원이 뭐야. 이천만 원 받아야지, 할 때 주식투자하고 어설픈 부동산 투기한다고 대출받아 하다가 아파트 값 떨어져서 서울에 의왕은 16억짜리가 8억까지 떨어져서 대출도 못 갚고, 주식도 삼천 원대 사서 이천삼백 원까지 떨어지고. 이게 뭐냐? 마음이 붕 떠서 그래요. 그걸 허영심이라 하죠. 허세.
그래서 허영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술 먹고 담배피우는 사람은 백 프로 허영심 갖고 있습니다. 땅에 눌러 살든지 더 나아질 걸 포기하고 살든지 안 그러면 자살하든지 해야 되는데 자꾸 지금 땅으로 내려가긴 싫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노래 부르면서 나아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걸 제가 왜 언급하느냐 하면 인간의 허황된 붕 떠서 불안정한 여기에 오은영 박사 끼어드는 거예요. 상담한다고. 가정문제 상당해주고 정신병, 신경질환 상담해주는 이유가 이제 붕 떠서 그래요. 풍선에 바람 들어가서 그렇다니까요. 이게 주저앉아야 되는데 붕 뜬 거예요. 주님께서는 땅으로 내려왔어요. 주님께선 하늘에서 방향이 땅에 내려왔지요. 이것은 모든 인간은 땅이 딱 적합하다는 뜻이에요.
땅의 생활, 땅에 기어가는 생활, 땅이 있으면 땅에 기어가는 게 누굽니까? 뱀이죠. 땅에서는 주께서 저주를 피어오르고 이 저주를 가장 가까운 근접한 데서 저주를 다 호흡하고 마시면서 살아야 될 운명, 이게 뱀의 자식들의 특징 아닙니까. 그게 딱 맞는다는 거예요. 붕 떠서 하는 건 허황된 거고 주님 가신 방향은 땅에 밀착하는 거예요. 저주받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죽음은 주님이 죽었기 때문에 진짜 죽음은 주님만 안다 했지요. 주님의 죽음이 모든 비밀의 완결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완성이에요. 이게 인간들은 믿질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26장인가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울 때에 새 언약 세우는 매개, 이쪽과 이쪽을 연결하는 걸 매개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의미로선 중보, 더 정확한 말은 매개하는 거예요. 연결시키는 거예요. connect시키는 것, 매개입니다.
이 매개물로 주님께선 뭘 등장했습니까? ①성경책, ②만나, ③언약궤. 이 중에서 주님의 매개물로 새 언약을 세우는 매개물로 등장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전부 다 기적과 관련된 것, 물 위로 걸으심, 오병이어 그 떡을 매개로 했습니까? 병에서 나은 사람을 등장시킴, 그랬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거기다 집어넣었습니까? 아니죠.
여러분 아시다시피 매개물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신 피에요. 왜냐하면 주님의 죽음이 완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피입니다. 피의 소원 말고 다른 소원 가지면 그 소원은 더러운 거예요. 왜? 새 언약 입장에서 새 언약이란 최종기준, 심판의 최종기준이 새 언약입니다.
제가 낮 설교할 때 저 나름대로 중요한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인간이 여러 가지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단 하나의 죄로 지옥 간다고 언급했지요. 인간이 여러 가지 착한 일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단 하나의 의로 천국 가는 거예요. 그 하나의 의가 하나님의 십자가 의고요, 그리고 하나의 죄로 지옥 간다는 그 죄는 뭐냐? 예수님의 피를 소원으로 하지 않은 죄가 그 하나로 지옥 갑니다. 지옥 가는 내력이 의외로 단출하지요. 간결하고 단순하잖아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게 뭡니까? 피 흘리고 제사 드렸어요. 그래서 창세기 9장에 보면 피를 먹지 말라. 인간의 피는 더럽다 이 말이죠. 정결한 짐승의 피만 깨끗하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 너 무슨 피 가져올래, 이 대화를 성경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시편 35편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광을 받지 않아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41절,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찬양이고 예배고 헌금이고 간에 그런 것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매개물만 부각시키기 때문에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만 주목하기 때문에. “너 뭐 가져왔어?” “찬양 가져왔습니다.” “가져가, 가져가. 찬양하지 마.” “헌금 가져왔어요.” “하지 마.” “십일조 가져왔어요.” “치워.”
주께서는 일체 인간에게선 아무 것도 받질 않습니다. 새 언약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에 더럽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불순물이라 해요. 섞여서는 안 될 것을 인간은 갖고 들어오지요. 그럼 왜 갖고 들어오느냐? 갖고 들어온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갖고 들어오는 거예요. 이거는 이미 예수님과 자기 존재를 바꿔치기해야 되는데 바꿔치지 않고 저 어때요,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자기 아들만 받아요. 우리 안 받습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창세기 3장 24절에 나는 모든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추방한 그 철칙, 원칙이 계속 유지돼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견지돼야 되거든요.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변개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제목을 이걸로 할지 저걸로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제목하든 주께서 그것 때문에 구원하는 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비밀을 제시하시고 비밀을 이 땅에서 암호화시킨 겁니다. 암호화시킨 것이 성도면 성도는 암호화된 이 땅에 오신 육신, 예수님 자신이 암호에요. 암호 속의 암호가 성도에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말조심해야 돼. 여러분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여러분 모르니까 말할 수 있나.
우리 자신이 암호에요. 하나님의 아이디는 없어요. 하나님의 아이디는 몰라도 돼요. 하나님의 비밀번호는 있어요. 뭐냐? 피에요. 그것도 우리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비밀번호입니다. 띠띠띠띠 눌러야 돼요. 주님의 아이디는 몰라요.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하나님의 그 이름은 인간의 언어로서는 포착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존재는 나의 존재로 인하여 내 존재함을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주님은 존재 안함이 되기 때문에 존재함으로 찾을 수 없고 인간의 모든 존재는 뭐로 구성이 되느냐 하면 인간의 언어로 구성이 돼요. 언어로 구성이 되니까 실제가 아니고 대충 언어로 거기다 달아보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상징이라 합니다. 언어의 세계를 상징계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말은 하지만 그 말이 정확하게 그게 그건지 말하는 본인도 없어요.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남자가 아가씨에게 “야 남의 감정 잘 읽는데 내게 감정 어때?” 여자가 “불안함?” “또?” “뭐 듬직함?” “또?” 계속해서 ‘또’로 묻는 이유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안 나오기 때문에 계속 또, 또, 또 하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가 그냥 친구지 좋아하는 감정 없어요. 남자가 듣고 싶은 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거에요. 그것 나올 때까지 유도했는데 계속 유도에 안 말려들었어요. <작은 아씨들> 그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암호니까 나타나는데 비밀이 나타나긴 나타나는데 암호로 나타나는 거예요. 암호란 뜻은 아예 모른다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끼리만 아는 거예요. 자기끼리 창세전에 이미 정해놓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암호가 새 언약이죠. 예수님의 피에요. 자, 예수님의 피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매개자, 또는 매개물은 피 밖에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는다, 이게 매개에요.
놀라운 사실은 암호가 사라졌어요. 예수님이 사라졌잖아요. 인간 눈앞에. 그래서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뿔뿔이 헤어졌잖아요. 사라지는 매개자인데 사라지고 히브리서 9장 17절에 보면 나오지요. 하나님의 언약은 피로 말미암은 언약은 죽지 아니하면 이게 언약이 안 된다 했어요.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For a covenant is valid [only] when men are dead, for it is never in force while the one who made it lives.그것을 제가 주일 낮에 표현했어요. 주일 낮 설교 마지막에 죽은 자의 명령. 제가 예를 들었는데요.
자식 불러놓고 아버지가, “자식아, 네 눈에 뭐가 보이느냐?” “아버지가 보입니다.” “아버지 말 듣지 마. 왜? 보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고 살아 있는 자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 마라.” “엄마가 보이느냐? 엄마 말 듣지 마라.” “그럼 나 어떻게 해?” “죽은 자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라.” 그게 뭐냐? 새 언약 중심의 세상으로 재편되는 거예요. 이거는 예수님의 피로 재편돼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실질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은 사람입니까, 주님이십니까? 주님이 일하시지요. 왜냐하면 모든 세계는 새 언약으로 재편됐기 때문에. 그 중심에 새 언약이 있거든요. 새 언약은 피라 했지요. 피는 뭐라 했습니까? 죽음으로 완결된 거죠. 아까 죽음은 어디서 생긴다 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 인간이 죽는 건 당연하고요.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없는데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합해서 이루기 위해서 여기 중간에 등장하신 매개자가 죽어 버렸지요. 이 죽음이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같이 통합시키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있는 그 생명나무 강물, 요한계시록 22장에 완전히 다시 새롭게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셨고 만들어줬어요. 예수님께서 모든 언약을 이뤘기 때문에. 이 말은 주님이, 이거는 대구강의에서 한 건데요. 하나님의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힘이 있는데 이걸 어디다 투입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쪽에 주의 자리를 마련하시고 그 주의 자리에 자기 아들이 내부순환구조를 통해서 여기에 등극할 때 시편 110편 1절과 2절이 완성될 때 하나님의 뜻은 다 완성되는 거예요.
이 땅에 내려와서 올라갈 때 내려왔을 때 이게 비밀이거든요. 그런데 암호는 있지요. 내려오면서 생긴 암호가 피였습니다. 피가 있으면 이 피로 말미암아 피에 대해서 끌려오는 사람은 성도가 되고 피에 대해서 다투고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원수가 있고 주께서 일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님답게 되시는 과정 속에서 거기서 원수가 주변에 발생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암호거든요. 암호가 가게 되면 주변에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을 찾아봅시다. 35절, 36절 누가 읽어볼까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자, 그 말씀이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라 했지요. 그러면 질문을 내가 잠시 바꿔보겠습니다. 나에게 있어 집안 식구는 □다. 네모에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나에게 있어 집안 식구는 뭐다? 내 운명공동체다. 나의 목적이다. 나의 생명이다. 특히 나의 보물이다.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 되는 내가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다치지 않도록 살아남도록, 시집가면 아이 내가 다 키워줄게, 이런 것. 전세금 모자라면 집 잡혀서 자식 살도록 해줄게. 이게 엄니다. 손자, 손녀 다 키워주고 일어서도록 해주고 사업자금 내 이름으로 대출받아줄게. 나중에 죽어서는 남은 재산 1/n 하라고 끝까지 다해주는 것. 이건 뭐냐? 내 집안 식구는 곧 나다. 나의 부활체에요. 나의 연속체. 나는 나에게 덫이니까. 오늘 제목이 점점 ‘덫’으로 굳어져가고 있는데.
내가 나의 덫이었어요. 주님은 둘로 분리됐는데 주님께선 분리된 쪽으로 이끄는 데 우린 버티고 있으니까 끝까지 나는 나로 끝나는 거예요. 절대적인 나. 그러면서도 뭔가 내가 무한하지 못하고 유한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까 공중에 붕 떠서 그래요. 땅에 내려가긴 싫고 하늘에 올라가는 건 버겁고.
그래서 하나님 좀 도와주이소. 교회 갈 테니까, 이런 식으로. 하늘로 독수리처럼 날게 해주세요. 소년이라도 힘을 얻고, 이사야의 말씀처럼 내가 올라가서 점점 더 나아지는 발전하고 훌륭하고 그리고 존경스러운 대상이 된다는 남들에게 좋은 소리 듣게 해달라고 저 높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성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기도하는 이유는, 본인이 앞장서서 그래요. 찬송가에 그런 찬송 있지요. 앞장서신 주님이라고 분명히 돼 있는데 히브리서 6장 20절에 분명히 주님이 앞장섰는데 기도할 때 보면 전부 다 누가 앞장서느냐 하면 본인이 앞장서있고 주님에게 그걸 채워달라는 거예요. 현실과 내 소원이 비워있으니까 내가 아는 소원에다 내용물은 주님이 후원해줘서 꽉꽉 채워달라는 거예요. 완전히 어머니의 소금밭이에요.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들은 기도도 안 하데요. 복음 알아서 기도 안 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려 하니까 쪽 팔려서 내 힘으로 기도하는 대신 주께 기대는 의존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내가 고생하더라도 내 고생으로 그 내부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는 추잡스러운 모습보다도 노력하는 장한 내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 기도 안 해요. 더 못됐어. 기도하면 순진하기나 하지, 이건 더 못됐어. 더 얍삽해. 그래놓고 남들은 복음 알기 때문에 기도 안 한다고? 무슨 구라를 떠세요, 구라를.
성도가 하는 기도는 비밀이 암호화되기 위해서 내부에서 말씀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거예요. 너는 너를 위한 암호가 아니어야 한다 이 말이죠. 인간치고 각자 자기 비밀 없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비밀은 자기의 기억 속에서 어느 것을 비밀로 분류할 것인가? 어떤 것은 대외비로 하고 어떤 것은 공개해도 되는 것인가? 어느 것이 내 생존에 유리한가? 그것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서는 두 개의 창조가 있는데
■첫 번째 창조는 생물학적 창조입니다. 마굴리스라는 유명한 생물학자, 이 사람이 정리한 건데 인간이 생물학적 정의, 그러니까 의미, 생물학적 규정이 있는 반면에 여기는 말씀, 성경의 규정이 있겠지요. 생물학적 규정이 뭐냐 하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한다? 아니라는 거예요, 이 사람은.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게 아니고 환경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모든 세포와 모든 미생물도 환경을 뚫고 자체 스스로 자발적으로 경계를 만들어내요. 이 경계를 한 자로 하면 막이 돼요. 이게 세포막이 되거든요. 세포막이 그 경계 이전의 혼돈은 뭐냐? 화학적 세계고 물리적 세계에요. 어떤 곳도 생물을 없습니다. 생물이 없는데 생물이 나올 때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이 말이죠.
그런데 아무 연고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걸 우발성이라 하는데 그냥 우발적으로 거기서 세포가 나오고 DNA가 만들어지고요 그게 자기 성숙해서 보다 더 큰 세포가 많은 보다 덩치 큰 생물체가 나올 때에 이건 뭐냐? 인간의 창조는 본인이 본인을 창조한다. 이 주장입니다. 현대과학이에요. 생물학, 과학에서 주장하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창조하느냐? 내가 알아서 환경 속에서 부단하게 투쟁하면서 내 열정을 쏟아 넣으면서 내가 노력을 다해서 오늘날 지금 요만큼이라도 나는 나의 세계를 건설했다. 이 본성, 세 자로 하면, 파이팅. 하면 돼, 이길 수 있어. 네 날개를 펼 수 있어. 움츠리지 말고, 임재범의 <비상>의 가사처럼, 움츠리지 말고 이제는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나가 보라 말이죠. 나가 보다 날개 다 부셔지고 깨지고 죽겠다고 다시 집에 돌아가 아빠, 엄마 찾고.
경계입니다. 옛날 우리 국민학교 때 여자아이, 남자아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책상에 삼팔선 그어요. 넘어오지 말라고. 팔뚝도 넘어오지 마. 받침대도 들이밀지 마. 이건 내 영역이야. 이게 본성이에요. 본능적으로 생물학적 본성으로 자기 세계를 따로 구성하면서 점점 더 유기체다운 자아체다운 자아로 형성되고 구체화돼 가요. ‘나’가.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는 뭐냐 하면 파괴 작업, 있는 것을 부셔버리는 게 창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 오신 것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예수님과 다투는 자가 되었다는 시편 35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톡톡 다 깨서 헤쳐야 우리는 우리의 단독적인 나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그냥 주님의 비밀에 암호화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예수님부터 먼저 암호화되었고. 암호의 특징은 뭐냐? 보고 있어도 정체가 누군지를 외부에서 밝혀낼 수 없는 그것이 암호입니다. 숫자로 돼 있는데 57764 있는데 그게 의미를 찾을 수 없어요.
인간세계의 의미라는 것은 인간 문명, 문화에 자연이 끼어들면서 생긴다. 자연이 인간 문화와 문명에 끼어들면 자연은 인간의 요리 대상입니다. 민어라든지 또는 제주도의 갈치라도 음식재료가 셰프한테 걸려들면 뭐가 됩니까? 음식이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질서잡기에요. 질서잡기 이걸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의미 이전은 뭐냐? 무질서하지요. 무질서한테 인간의 문화와 문명 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건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남자가 있는데 많은 아가씨들이 옆에 지나간다. 이건 의미 없어요. 없는데 딱 첫눈에 반했다. 뭡니까? 나란 유기체가 만든 나만의 문명과 문화, 여기에 딱 걸려든 거예요. 이게 우발성입니다. 이걸 사건이라 하거든요. 사건,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가 되려면 사건과 사건이 연속해서 어떤 계열화를 이뤄요. 계열화 알지요. 재벌이라면 재벌이 회사를 사서 계열화시켜요. 전자 계열, 영업 계열 하잖아요. 계열화시킬 때 의미가 되는 거예요. 계열화 자체가 이게 질서니까요.
그래서 어떤 자기 아들 부인, 며느리가 들어오고 난 뒤에 마음에 들면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명절에 이러지요.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우리 집안이 다 풀렸다.” 이게 계열화에요. 이 말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자기가 처음 이 땅에서 세상에서 자아를 등장시킬 때 했던 그 습성과 버릇을 그대로 며느리에게 전수하는 거예요.
내가 자수성가했다. 뭔 뜻이니까? 내가 자수성가해서 이만큼 내가 의미 있는 누구한테 욕 얻어먹지 않고 당당한 오늘날 나의 위치, 자아라는 영역이 발생되었다. 따라서 그런 관점을 나한테 적용시킨 것처럼 그 적용을 너한테 적용시키겠다. 내가 건사한 이 집안에 네가 많은 보탬이 되었구나. 그래서 너는 우리 집안사람이다. 아까 집안사람을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원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뭡니까? 원수니까 원수는 뭐가 돼요? 파괴돼야 돼요. 제거돼야 돼요. 긁어내야 되고 뜯어내야 돼요. 찢어버려야 돼요. 그래야 뭐가 등장하기 때문에? 비밀이 등장하거든요. 비밀은 질서 없다가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로서 인간의 생각으로서 포착이 안 되는 게 인간이 따로 알고 있는 의미로서는 그 의미의 세계 속에 들어올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문화, 문명은 뭐로 돼 있나? 이게 바로 언어로 돼 있다. 인간의 문화, 문명은 언어로 된 거예요. 언어는 개념인데 누구한테 지시받는가? 어릴 때는 부모로부터 커서는 학교나 교회, 그리고 더 커서는 사회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겁니다. 회사에서 불러서 오늘부터 사표내고 나가, 라고 한다면 그 직원이 우리 말 모르는 콩고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라. 나가, 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나가, 라고 하니까 그 콩고 사람이 사직서를 쓸 때 이 무슨 뜻이에요? 모두 다 동일한 의미체계 속에 같이 있다는 거예요. 언어의 개념이 의미가 통하니까 나가란 뜻은 오늘부터 잘렸다는 뜻이다. 이미 의미를 아니까요. 그래서 인간치고, 그러니까 취직한다는 게 뭘까요, 성공한다는 게 뭘까요? 나 하나가 어느 세계 속에 끼어드는 걸 말합니까? 지금 기존에 돼 있는 의미의 세계, 실제는 아니지만 의미가 있다고 소문난 세계, 별 의미 없어, 중소기업이죠. 의미가 좀 있다 하면 삼성, 현대지요. 의미의 세계에 이력서 내고 끼어들 때 나도 넣어줘. 내가 이 동네 삼성맨으로 현대맨으로 엘지맨으로 살고 싶어요. 큰 교회 등록하세요. 뭔 뜻입니까? 이 교회의 역사와 유구한 전통의 인센티브, 혜택을 당신도 입을 수가 있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하 2층에 있는 노인마당을 당신은 이제부터 정식으로 돈 안 내고 사용할 수 있고, 무료 영어강좌에 꽃꽂이강좌에 돈 안 내도 할 수 있고, 교회 올 때 정식으로 주차장 사용할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모조리 다 불살라져야 되지요. 왜?
아까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사람들이 이스라엘 건드렸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멀쩡하게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도 멀쩡한데 저 멀쩡한 나라 잡아볼까,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멀쩡한 게 아니었어요. 누구로부터 파괴당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자꾸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뭡니까? 나도 저 나라처럼 저렇게 괜찮은 문명과 문화를 갖고 싶어, 이것 때문에 하거든요. 솔로몬의 잘못이 그거였어요. 이방나라 여자들은 자꾸 수입해서 혼인을 시켜서 정책적으로 외교적으로 현재 있는 이 나라를 안정화시키려고 한 그게 문제였습니다. 우상들의 계속 수입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성경에서는 우상이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굉장히 친화적이고 친근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끌린다.
통일교가 운영하는 백화점의 쇼윈도에 마네킹이 입은 옷에 끌린다. 통일교는 통일교고 저것 나를 위한 옷이네. 이렇게 끌리는 것은 그만큼 친화적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친근하도록 덫에 빠진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그 옷 입기를 나의 목적의식이 되는 겁니다. 나의 소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이 있다가, “당신 복음을 알면서 허영심이 있느냐?” “복음 나 다 알아.” 갑자기 그 복음이 뭐가 됐어요? 나한테 기억의 창고에 있는 지식으로 이미 파묻어놨어요.
그런데 그다음 주일에 돈 모아서 가려니까 그 백화점 불났어요. 백화점이 아깝습니까? 내 평생에 나한테 저렇게 맞는 옷은 처음이라고 느꼈던 꿈이 불난 거예요.
그게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너는 세상의 사람이 되지 말고 비밀의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걸 우리가 잔소리한다고 들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주께서 실제로 활동해서 이 세상에 움직일 때 이 세상은 누가 일하십니까? ①나, ②주님. 몇 번입니까? 주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내가 일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일해 버리면 우리는 스트레스 받아요. 내가 일하면 여기서 대가를 원하죠. 대가가 나의 소원이 돼요. 나의 목적이 되는 겁니다. 그 대가가 제대로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는 슬퍼서 인생 좌절을 느끼고 인생 실패로 느껴지는 거예요. 죽어버릴까, 이런 식이에요. 어떤 보상도 없을 때 그러면 문제점이 뭐예요? 누가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낭패를 자진해서 당한 거예요. 이것 덫에 빠진 거예요. 오후 설교 때 한 성경구절 언급했는데 여기서 다시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이건 다른 분이 크게 읽어보세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누가 개시했어요? 우리가 했어요, 주님이 했어요? 주님이 했지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이번엔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우리 안에서 무엇이 시작했다? 말씀이 시작한 거예요. 무슨 일을? 착한 일을.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의 말씀, 주의 모든 것은 십자가로 데려가야 피로 데려가야 이게 비밀이 돼요.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설교 삼십 분, 두 시간 동안 해놓고 마지막에 뭐만 남아야 돼요? 우리가 피를 안다, 전한다, 이게 아니라 피만 남아야 돼요. 피 앞에서 누구도 없어져야 돼요? 나를 잊어야 되고 나를 잃어버려야 돼요. 나의 하는 일을 잃어버려야 돼요.
그런데 복음 전하는 교회라 해놓고 맨날 피 이야기해놓고는 그러니까 우리가 피를 위해서 뭐합시다, 이렇게 나와요. 이거는 피를 전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피를 알았으니까 서로 뭐합시다. 그건 피를 전한 게 아니에요. 피는 우리를 잃어버려야 돼요. 안 그러면 피를 이용한 게 돼요. 우리의 소원은 천당 가는 거니까 피 괜찮네. 믿어줄게. 그거는 내가 시작한 일이에요. 내 속의 악마가 시작한 일이지 주님이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말씀에 이런 게 있어요. 들풀을 내가 키우는 데 언제까지 키운다고 돼 있어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오늘 키우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죽이기 위해서 오늘 살리는 거예요. 뭐 섭섭해, 주께서 이런 이야기하지요. 세상에 내일 죽는 것을 소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죽기 전에 알아서 기어서 너를 잊어버리란 말이야. 너의 일을 잃어버리고 지금 모든 일이 누구 일입니까?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지금 북한 쳐들어왔으면 못 모여요. 우리 가만있어서 굶어죽으면 못 모입니다. 배 아파서 죽으면 못 모여요. 오늘 두 시간 내내 강의한 것은 뭐냐? 우린 덫에 빠졌다는 거예요. 우리 소원의 덫에 빠졌어요. 그런데 덫에 빠져야 뭐가 시작되느냐? 주의 구원이 됩니다. 소원 말고 구원. 구원을 그때 시작되는 거예요.
시편 35편 다 끝낸 거예요. 뭐 더 이야기할 것 없어요. 다 끝났어요. 35편 끝까지. 자, 남은 시간에 비밀이 뭔지 설명해야 돼요. 에베소서 3장 보겠습니다. 비밀이라 할 때 에베소서 3장의 표현에 의하면 앞에 하나 붙어요. 3장 9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자,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는 뭐가 내재돼 있었다? 비밀.
에베소서 3장 4절에 보면,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렇게 돼 있지요. 비밀. 지금 사도가 무슨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3장 3절에 봐도,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렇게 돼 있지요. 지금 사도가 계속해서 그 편지를 읽는 성도에게 이야기하려는 것은 뭐냐? 그건 비밀이고 그 비밀이 이미 지상에 나타났는데 그게 뭐라고 합니까? 피였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 주님의 죽으심이 주님의 모든 일의 완결입니다. 종결이에요. 피를 흘렸다는 말은 인간의 피나 정성이나 열성이나 일체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성과 희생은 나름 노리는 게 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소원이 있다고요. 나 희생하면 천국 보내줍니까, 이런 거요.
특히 인간들의 모든 희생은 자기가 유한하고 자기가 수명이 있다는 것,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희생의 보상을 어디에 넘기느냐? 자식에게 넘기지요. 주일 날 했거든요. 제가 유월절 설명하면서 유월절이란 뭐냐? 자식을 미리 죽이는 게 유월절이라 했지요. 그런데 아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니까 집안 식구가 뭐라 했어요? 원수지요. 내가 소원하는 보물이 원수라면 곧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 비밀이에요.
열두 제자의 그 어떤 노력도 주께선 안 받아주고요 베드로가 주님 따라서 삼 년 동안 따라다녔으니까 이젠 얼추 같이 갈만도 한데 주여 가겠습니다, 따라가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보고 가자, 했습니까? 오지 마라 했습니까? 오지 마라. 네가 올 수 없는 곳.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이거는 바로 그냥 없는 곳, 그냥 없음입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이 땅에 천국은 없어요. 인간이 조작한 것, 지어낸 거예요.
천국은 없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게 비밀이에요. 성령 받은 자만 알아요. 그리고 왜 천국이 없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식으로 오느냐? 이게 문제가 아담의 속성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있고 내가 나를 자꾸만 창조하려고 해요. 어떤 경계를 지어서 영끌, 끌어 모은 이것을 계속 존재케 하고 키우고 이걸 번창케 하고 있음을 있음으로 이어가려는 그것이 자아의 생리, 자아의 본능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힘으로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일하실 때 어떻게 일하느냐 하면 주님이 자아를 깨는 기회를 계속 부여해요. 그런 계기를 부여해요. 모든 일이 내가 나로 인하여 구원 받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늘 깨닫게 하시고 이끌어갈 때에 우리가 나타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주의 일이니까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주께서 시작한 착한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①다윗에게 주어졌던 그 우발적인 사건이 ②지금도 여전하게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짐을 감사케 하옵소서. 그래서 파괴되는 것이 그게 이미 만들어진 주의 세계, 아들의 나라, 천국을 드러내는 유일한 암호의 운명인 것을 이제는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