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세례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남

아빠와 함께 2022. 8. 27. 17:33

예수님과 의(義)
마태복음 3:13-17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신령한 것이 없다면 제대로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만드실 때는 거기에 생명 나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하고 한 뒤 부터 그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추방당하고 맙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신령한 것이 없는 채 그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자기 삶의 터를 닦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성경을 펄친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가 말해주는 것과 다른 것을 하나님께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령한 것, 곧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신령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생명 나무와 더불어 있는 것이 원래의 인간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기준에 의해서 인간됨됨을 결정하려 합니다. 그리고 실패와 성공을 논합니다. 여러분, 장기에 졌다고 자살할 필요가 있을까요? 바둑에 졌다고 스스로를 인생 낙오자로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이란 신령한 것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게임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는 존재로 보시므로서 원래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즉 죽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정말 인간에게 가치있는 것은 과연 신령한 것이 있으냐 없느냐입니다. 이 세상 게임에서 패배자이냐 낙오자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인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과 현재의 인간의 모습, 이 양쪽을 다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우리 인간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일부러 세례를 받습니다. 이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은 이제부터 죄인의 세례 안으로 합류된 것입니다. 죄인이 본래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그 때부터 죄가 있는 분으로서 살아가시는 겁니다. 그 끝이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지울 수 있습니다. 즉 죄의 끝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상 위에서의 모습으로 그 내부가 다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저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최후는 곧 우리의 실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짊어진 죄는 어디서 나온 죄인가하면 우리에게서 나온 죄입니다. 인간들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렇게해서 인간들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 나 할 것없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이 십자가에서 알려집니다. 그 모두에게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만족하실 만한 수준의 '의'가 없다는 것이 인간들 모두 저주받아야 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평가하신다는 이 점을 어떻게 알까요?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내막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저주는 곧 우리를 보는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들에 대한 저주,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의'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저주를 내리시지만, 의에 대해서는 두말 하지 않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의의 열매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즉 의의 열매로서 비로소 영생이 주어집니다. 어떻게하면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의'라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세례라는 장치를 통해서 하십니다. 인간에게 있어 세례가 아니면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전혀 맛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세례의 삶을 우리보다 먼저 경험한 무리들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0:1-5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세례를 설명할 때 곧장, 큰 체육관 예를 들곤 합니다. 체육관 밖에 서 있던 사람이 세례라는 출입문을 통해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 안에는 화장실도 잇고 벤치도 있고, 칠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체육관의 주인되시는 분이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기 있는 화장실은 그냥 화실실이 아니라 신령한 화장실이요, 여기 있는 벤치는 그냥 벤치가 아니라 신령한 벤치요, 여기 있는 칠판은 그냥 칠판이 아니라 신령한 칠판이다"고 소개합니다. 이 말을 밖에서 도청한 사람이 들으면 실성한 사람들끼리 서로 착각 속에 노는 셈으로 들리겠지만 그러나 체육관 주인이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의미 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체육관 밖에서는 구입할 없는 '신령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다르고 생소한 것, 즉 신령한 것들을 제공합니다. 그것이 신령한 음료요, 신령한 양식입니다. 바로 이런 대규모 체제가 곧 세례로 인해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우리들이 왜 교회옵니까? 세상것을 못이루어 그것이 한이 되어 하나님에게 따지려 옵니까? 여러분 그런 것은 결코 신령한 것들이 아닙니다. 영생이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왜 만나가 신령하고 왜 물이 신령한 음료가 되는가요? 사도 바울이 하는 취지는 이렇습니다."반석은 그리스도니라" 즉 모세와 더불어 구름과 바다 한 가운데서 통과해서 세례받은 자는 이제부터 애굽 시절 때와는 달리 생소한 것을 받게 되는데 그 생소한 것이 왜 신령한 것이 되는가 하면,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탕으로해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해야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이 말씀 말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가시고 해내신 그 공로가 결국에는 신령한 의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의가 우리에게 영생으로 이어집니다. 이 논리는 로마서 3:25-26에 나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신령한 의는 인간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애굽에 있을 때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물을 하나님께서 홍해와 구름 기둥 안에서 함께 세례 받은 무리에게만 구경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공로에서만 나온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업을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에게만 맡겼습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저주받을 죄인인 것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런 공로를 믿는 자에게는 선물로서 의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보여주신 겁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참다운 성공자가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신령한 것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인간에게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점 일획이라도  (0) 2022.08.27
소금과 빛  (0) 2022.08.27
나사렛 사람  (0) 2022.08.27
라헬의 통곡  (1) 2022.08.27
출생의 비밀  (0) 202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