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무슨 내용인가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친히 창조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무슨 내용일까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들어놓은 세상을 다 없애시고 새하늘과 새 땅을 새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과연 그것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게 하시되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들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만들기 위해 말씀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게 되면, "내가 전해주는 이 말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크게 활동하여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들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또 성경에 보면 이 관계를 달리 설명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에 신자를 예수님의 신부로 봅니다. 이것은 신랑에 따라 운명이 확정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모든 구원받는 자의 신랑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개념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표현 즉 '그리스도'입니다.
인간 세계의 모든 문제는 결코 인간들 선에서 해결이 안되고 오로지 하늘의 조정 하에 놓여져 있습니다. 과학이나 의학이 아무리 번창해도 그것으로 인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다 하늘에서 조성된 뜻에 의해 생겨난 땅의 현상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니 예수님이 잠시 제자들에게 천국의 일부를 보여주셨는데 거기에 보니, 엘리야와 모세가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다가 드디어는 공중으로 비상하는 것과 같은 운명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만치 가다가 추락하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이런 차원에서 쓰여졌습니다. 일종의 활주로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과 접촉하기 위해 출연한 출연진들입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하나님과 접촉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접촉이 가능합니까? 빌립보서 2:5에 보니, 예수님께서 낮아져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의 죄로 인해 낮아질 수 있는 그 한도보다 더 낮아진 위치까지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지은 죄의 무게 때문에 주저앉게 된 저주로 인한 겁니다. 어찌 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 무게 때문에 질식할 지경에 놓여 있다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현장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결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듯이 나는 병든 자를 찾기 위해 왔단다. 즉 나는 죄인을 찾아 구원해주려 왔단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가지 말들이 나옵니다만, 인물들만 나열해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등 등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무엇하기 위해 이 세상에 등장했던 자입니까? 모두다 하늘에서 누군가 오셔야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된 인물들입니다. 단순한 혈통에 따라 나열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종의 구원의 활주로 역할을 하라고 방향타로서 그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즉 하늘의 개입이 아니면 결코 나타날 수 없는 후손들로 조성되고 집합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사실 모두다 죄인들입니다. 죄를 남보다 더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공히 죄를 물러받았다는 점에서 모두다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을 하늘에서 조정해서 그리스도라는 하늘 쪽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십니다. 곧 이들의 일생에 이미 그리스도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야 자기 편으로 끌어당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적인 개입이 들어있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개입하실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로 그리고 '구세주'로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예수님이라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자녀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접적 관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며 더 이상 우리에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주님의 개입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축복된 현상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주님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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