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 7-16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타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출현된 자들입니다.
세상적으로 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한 사람을 증거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 특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운명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특이성이 여전히 있는 자만이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란 세상 사람과는 달리 특이해야 합니다.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를 증거해야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특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포함 안되면 안 되는대로 살면 그만이지"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로도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면 영원한 형벌이 그 사람을 기다립니다.
성경에서 괜히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족보의 중앙에서 예수님께서 두 팔벌리고 죽는 자세로 우리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의 본질이니라"하고 말입니다. 이 본질을 거쳐서 부활의 세계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산다고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생이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만이 영생과 이어짐과 동시에 그러한 관계성으로 인해 이미 이 땅에서도 영생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죽는 것은 그저 잠자는 겁니다. 이미 부활에 참여된 예수님 이 전의 인물들처럼 예수님 이 후에는 이들과 같은 성도들이 생겨나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들 족보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우리들과 똑같이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죽어 없어진 자들입니다. 죄값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이들의 운명과 같습니다. 아니 전 세계에 모든 이들이 자기 죄로 인하여 다 죽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에 의해서 그 중에서 따로 구원될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성경 이사야에 의하면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만 구원하시겠답니다.
따라서 이 족보에 나와 있는 자들이 행여 구원받게 된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재주나 인품때문이 아닙니다. 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들의 죄를 처리하시는 분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이 됩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예수님과 관계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님과 관계 있어야 구원받습니다. 마태복음 1:21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여러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방식을 아시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이 뭔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아니라 오직 '자기 백성만을 건져내 가시는 구세주'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추호의 실수나 오류나 부족성이 없이 일을 빈틈없이 마무리까지 하실 분으로서의 메시야가 곧 예수라는 겁니다. 이 점을 아셔야 예수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남은 자만 건지겠다는 그 구원 계획에 대해 완벽하게 실현시키겠다는 뜻에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는 자라면 그야말로 '예수'로서의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민중들의 소원 달성을 이루어주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염두에 두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염원이 있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 선행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남게 되었다고해서 '남은 자'입니다. 로마서 9:2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와같은 능력이 다른 이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믿는 자가 진정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됩니다.
그러면 오늘 족보에 나오는 이들은 평생 아무 탈없이 계속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고 하나님의 약속만 쳐다보고 살았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1:21를 다시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여기에 보면 '저희 죄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성도라는 자들도 여전히 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죄는 마치 질긴 콜타르처럼 끈적끈적해서 아무리 죄에서 달아나려고 해도 달아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평소에도 싫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거부하고 싶은 죄들마저 더 짓게 만듭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누가 자신의 마음 다스림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은 그 떨어지지 않는 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맨 먼저 무엇부터 염두에 둡니까? 그저 주님의 능력을 잘 활용해서 이 세상에서 호강할 생각부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과연 우리가 진정 예수를 압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란 첫째, 자기 백성만을, 둘 째 오직 죄에서부터. 세 째 구출시키는데 있어, 네 째, 조금의 오류도 없이 너끈하게 성취해 내시는 분으로서의 예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는 분들이나 오늘날 성도된 자들이나 모두 예수님의 덕을 봐서 구원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6절에 나오는 말씀, 즉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는 말씀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쉽게 말해서 "김씨는 박씨의 부인으로부터 자기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 인데 정말이지 어떻게 이런 문귀가 버젓이 자랑스레 족보에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실제로 우리아의 아내와의 관계에서 낳았더라도 그냥, "다윗은 밧세바라고 이름하는 아내로부터 솔로몬을 낳았다"고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성경에서 기어이 그 여인의 본 남편 이름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해서 족보에 나와 있는 사람치고 다윗에게 내린 하나님의 용서의 덕을 보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역대하 21:6-7에 보면,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등불이 갖는 구원의 위력을 소개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왕들은 역할들의 무엇입니까? 이렇게 보시면 간단합니다. 모두 다 부족한 자들인데 이 점을 잘 알고서 다윗을 다윗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왕들에게 대해서 ■다윗같은 면모가 나타나도록 하고 그렇지 않고 다윗을 다윗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무시하면 ■무서운 진노의 면모가 나타나게 되는 역할을 하는 왕들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들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압니까? 오늘 본문에는 전면에 왕들 이름만 줄줄이 엮여져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뒷 배면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다가 순교까지 한 많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계자되는 왕이 엉뚱한 것에 신경쓰고 관심두면 선지자들을 파견합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게 합니다. 아사 왕 때의 오뎃과 아사랴 선지자가 그런 분들이었고, 여호사밧 시대 때는 미가야 선지자와 예후 선지자가 그런 분들이었고, 아하시야 때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그런 분이요, 요아스 왕 때는 스가랴 선지자가 그런 분이었고, 아마샤 때에는, 어떤 선지자가 한 분이 그런 분이었고, 웃시야 때는 아사랴 제사장 및 80명의 제사장들이 그런 분들이었고, 아하스 때는 히스기야 때는 이사야 선지자가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사실 왕들이 제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아비야 왕이나 요시야 왕이 그런 분들입니다. 왕이 제대로 서면 나라도 잘되고 백성들도 평안합니다. 반면에 왕이 제대로 못하면 온 나라가 시련을 겪습니다. 나중에서 아예 통째로 유다 나라가 도로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가운데서도 남은 자에게 계속 은혜를 주십니다. 요시야 왕 때는 나라 전체가 신앙심으로 하나 되어서 비록 선배 왕의 죄로 인해 약속의 땅에서 추방은 되지만 남의 나라에 가서 그 신앙으로 약속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들로 전환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계속적인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를 과시하겠다는 의식으로 중무장한 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특이하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늘 회개시켜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진정 교회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성으로 인해 우리가 성도로 존재함을 결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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