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는 하나님의 하나의 시료(sample)로써 동원된 겁니다. 이 사도가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기를 멀쩡하게 봤을겁니다. 그런데 사도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뭘 구원하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자기를 구원하려고 노력한 게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주님의 일, 사명을 건지려고 그렇게 애를 많이 썼습니다. 뭔가 사람이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놔버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있던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쑥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변화, 이러한 변화가 왜 생겼으며 어떻게 발생되는가?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여기서 존재한다면, 내가 나를 놓지를 못해요. 놓지를 못하고 아무리 세상에 좋은 것 귀한 것 있지만 끝까지 나를 건지기 위해서 하는 여러 가지 정보 또는 지식 그러한 어떤 도움 얻는 것, 그런 것만 계속 끌어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오면서 내가 죽더라도 영원히 안 죽는 방법이 없을까,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서 교회 나오지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찾아오기 전이에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직접 찾아오기 전이고요,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왔을 때 그 효과가 여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수작부리는게 아닙니다. 본인이 죄인이어서 얻을게 뭐가 있다고요? 오히려 죄인 안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요. 죄인이 안 되어야 내가 이 땅에서 존재할 큰소리를 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되어 버리면 “에라, 죄인아! 죽어버려라.” 이러면 우리가 할 말이 없잖아요. 그래서 어쨌든간에 죄인 아니되기 위해서 나 죄인 아니라고 외치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던 자가 누구냐?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어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보다 더 완전과 거룩을 나보다 더 챙긴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그런 식으로 외쳤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한 이유는, 내가 구원받는 방식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엉터리라고 단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 할 도리 다 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은 다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 선함이 채워져 있는 가득 차 있는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할 말이 있고 내세울 게 있기 때문에 기죽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무 아깝기 때문에 나를 포기못하는 거예요. 그랬던 자가 누구냐? 바로 사울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냥 죄인이 아니에요. 죄인 중에 괴수,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못 놓고 자기 자신을 의롭게 지키고 싶어서 애썼던 그 노력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어떤 누구보다도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전혀 천국하고는 관계없고 지옥으로지옥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어요. 자기 자신을. 이런 효과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게 아니고 그 말씀대로 직접 육신이 되어서, 말씀 자체가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나타나서, 나타난 정도가 아니고 직접 사울을 찾아간 효과입니다.
찾아가니까 사울은 비로소 내가 지킬 자아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지킬 나가 없다는 그것만큼 복된 상태가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최고에요. 이것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참 그동안 사울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주님 찾아오기 전까지는 고생 많이 했어요. 뭐 매일같이 자기 점검 했을 거예요. 반성문 쓰고 일기 쓰면서, 어디까지 내가 깨끗해졌는가를 검토하면서 하나님 알고 믿던 세월만큼이나 내가 더 순수해졌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바로 이러한 이 사울, 이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와서 완전히 죄인중에 괴수라고 만든 것과 꼭 정반대의 사람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 진리라는 것은요, 하나만 알아서 진리가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두 개를 다 알아야 그 가운데서 진리가 완전히 굳혀지게, 파악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 반대가 뭐냐 하면, 가룟유다에요. 가룟유다는 마태복음 27장 5절에 보면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스로 자살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닌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모여서 뭐로 끝났느냐? 자살로 끝난 거예요. 자살로 이어진 겁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것도 자진해서, 스스로 자살하기 위해서 그동안 주님 일행이 되어서 따라가면서 심지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면서 그런 권능을 행사했어요. 자살하려고. 그 자살한 이유가, 자기가 양심이 가책이 되어서 자살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가룟유다가 죽을 때까지 못놓은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기 양심이라는 겁니다. 끝까지 양심 지킨 거예요. 그 양심이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아주 착실하게 데려간 겁니다. 여러분은 양심 없지요? 없기를 바랍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양심 없기를 바랍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가룟유다가 자기 자신이 ‘마지막 양심이라도 지키자. 스승을 팔아먹었으니까 나같은 인간은 내 양심상, 양심상 어떻게 내가 돈 몇 푼에 스승을 팔아먹을 수 있는가? 내 양심이라도 마지막 지키기 위해서 내 몸을 그냥 죽이겠다.’ 이게 가룟유다의 마지막 남은 자아성이예요. 양심으로 남아 있으니까. 가룟유다는 이런 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나에게 죄만 있었다는 고백을 못해요. 그래서 ‘양심은 있잖아’ 그것 들이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가룟유다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살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건전한 양심, 깨끗한 양심만큼은 깨끗하게 살아 있어서 그 양심 안에 내가 살아 있다고,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가룟유다가 마지막 생각한 것은, 나의 죽음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요, 예수님의 오심이 바로 내 자아보다 더 세다고 본 겁니다. 내 죽음보다 더 센 게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예수님의 죽음 앞에 내 죽음은 이것은 시답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내 죽음보다 더 센 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주님이 주신 사명이에요. 그게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사명과 동일한 사명이에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사명 줘서 보낸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자신의 사명을 주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의 모습은 그냥 사명이 살아 있는 그 모습으로 생명을 표현할 수가 있어요. 이 사명 앞에, 사명 그 자체가 지켜져야 되기에 그 외 다른 지킬 것은 없습니다. 나의 목숨, 나의 양심, 나의 자존심, 그것 사명 앞에 지키면 안 돼요. 사명이 죽어 버립니다. 물론 사명이 죽을 리가 없지요. 사명이 더 세니까요.
그러면 그 사명이 뭐냐? 그 사명이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 하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사명에 대해서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나니아에게 이야기를 한 것인데요.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방인들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이방인들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사도바울에게 사명을 준겁니다. 여기에 ‘이방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인간이라도 천국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라도. 이 말은 인간이냐? 그러면 지옥이야! 이게 당연한데, 하나님 앞에 당연한 것이었는데 인간이지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이게 적당해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는 것, 그 방식에 대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죄인 중에 괴수 되면 된다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시료로 사용해준 거예요. 사울은 이방인이 아니지만,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될 것인가에 대해서 시범조로 사울을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울에게 일어난 그 경우를, 똑같은 경우를 이방인에게 적용시켜서 이방인들도 천국 갈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방식 방법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나한테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이 “너 죄인이야” 하면 “오케이”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뭐 지킬게 있어야지요? 그런데 이것은 과연 이방인에게만 해당될까? 사도행전이나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유대인들도 역시 해당되는 것입니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간다?’ 이게 가당치도 않거든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입장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뭐냐? 쫓겨난 존재. 인간은 뭐냐? 두 번 다시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못들어 오도록 내쳐야 될 대상,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 이게 정답이에요. 창세기 3장 24절에서. 그러니까 천국에 갈 수 없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겠다고 교회 나오니까 벌써 그 심보가 아주 더러운 심보가 된 거예요. 어느 심보보다 더러운 심보에요. 뭐하려고, 뭐하려고 오느냐 이 말이지요.
정인협 감독이 1979년도에 낸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 제목이 뭐냐? <꽃순이를 아시나요>
촌에서 순진한 아가씨가 서울 올라와서 다방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사진 찍는 바람둥이 만나서 순정을 바쳤어요. 정윤희, 영화에서 이름이 은아에요. 은아가 바람둥이한테 순정을 바치고 그래도 자기 마음을 다 줬다고 생각했는데 그 은아가 버림받았어요. 그다음에 대학교에서 레슬링선수로 있는 사람 만나서 동거했다가 또 버림받았어요.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윤락가, 환락가로 내려가서 거기서 윤 할아버지라는 외롭고 나이 많지만 재산은 많은 그 할아버지와 살다가 그 할아버지는 나이 많으니 금방 죽어버렸지요. 인생 실망했지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촌에서 알던 사람인데 그 이름이 봉수에요, 그 봉수가 찾아와서 “이제는 다 잊고 나와 같이 새로 시작하자.” 하는데 결국은 은아가 그 봉수를 버리고 떠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 김국환이 불렀던 노래.
꽃순이를 아시나요 꽃처럼 어여뿐 꽃순이 나의눈에 이슬남기고 내 곁을 떠나간 꽃순이
아 어딜가면 찾을까요 첫사랑 꽃순이 내 사랑 꽃순이 꽃피는 봄이 돌아오며는 내 곁에 오려나 꽃순이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 제목을 오늘 설교와 관련해서 바꾸겠습니다. “자아를 아십니까?”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 영화가 히트하고 노래도 히트한 것은 전부 다 인간의 관심사가 내 자아한테 있어요. 자아한테 있으니까 촌에 올라와서 순진한 처녀 인생이 망가져 버린 정윤희 그 은아지요. 그 은아의 삶에 감정이입이 되는 겁니다. 불쌍해 죽겠어요. 그 인생이 내 인생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의 평생의 관심사가 바로 저 꽃순이처럼 저렇게 망가지면 안 된다는, 온통 관심사가 꽃순이, ‘나 자신이 실망스럽지 않은 자아로서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피를 아십니까?” 사도바울의 사명이 바로 그거에요. “피를 아십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꽃순이를 아십니까, 가 천지인데, 그게 대세인데 그것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내 자아만 건전하게 챙기면 된다고 여기는 그것 거기에다 “피를 아십니까, 십자가의 피를 아십니까?”라고 지금 사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런 사명을 받았어요. 여러분도 그런 사명 받았지요?
갈라디아서 2장 21절 사도바울이 사명 받아서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인간이 양심상 교회 나와서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헛되이. “십자가 피를 아십니까?” 이 말이에요. 사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먼저 고백하는 것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더 이상 자아를 챙길 필요조차 없게 된 그 자유를 사도는 지금 기쁨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쁨으로!
여러분이 오늘 본문 15, 16절 보세요. 이 사도의 기쁨이 여기서 안 느껴집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믿을만하다, 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이야기가 뭐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그러면 나는 뭐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는 자기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을 잡아 죽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거예요. 내 식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이게 상식에 맞고 합당하고 이게 사랑의 하나님의 증표로서 이것 외에는 없다고 여긴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자아를 사랑하니까 내 자아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말씀을 꼬박꼬박, 따박따박 지키는 것, 이게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이게 뭐가 문제가 되고, 이게 뭐가 나쁜 행동이고 잘못된 행동이냐? 사울은 자신만만 했어요. 그래서 맨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만 드립다 생각하는 거예요. “이만큼 하면 됩니까? 하나님, 이정도 기도하면 됩니까, 하나님? 이정도 헌금하면 됩니까, 하나님? 이정도 헌신하면 됩니까, 하나님?” 맨날자기가 하는것만 신경쓴 거예요. 그걸 또 지키고. 그게 틀려먹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꽃순이를 아십니까?” 외치는 것처럼 “여러분, 나는 알아요.”라고 외치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 찾아와서 “네가 하는 짓이 지금 나를 핍박하는 짓”이라고 먼저 운을 뗐지요.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했잖아. 지금까지 네가 핍박했잖아. 개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나를 핍박했잖아. 너는 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온 이유를 몰라. 네가, 네가 드립다 하늘을 향하여 네가 상상한 하나님을 위해서 노력만 할 뿐이지 친히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모르잖아.”
와서 그냥 뭐 했습니까? 잔소리 했습니까? 죽었습니다. 돌아가셨어요. 우리는 안죽으려 하는데 하나님은 죽었어요. 어떻게 같은 세상에서 한쪽은 살려고 애를 쓰고 한쪽은 죽으려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없음이 천국의 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 있는 것,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비어 있는 곳이 문이 돼요. 눈에 보이는 것은 문이 아닙니다. 뭔가 있다는 것은 문이 아니에요. 없음이에요, 없음. 있는 것들, 있는 자아들, 자아만 챙기는 있는 것들에 의해서 사라진 그 현장이 문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었던 그 장소가 문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 7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다. 자, 양의 문이 어떤 행위를 하시느냐 하면, 16절에 보면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목숨을 버림이라.” 인간 눈에 보이기에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그 현장성을 보여주는 것 그게 문이에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 그냥 인간이란 낯짝만 있고 뒷부분은 매일 시간에 의해서 갉아먹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냥 낯짝만 들고 다녀요. 마스크 하고 돌아다닌다고요. 낯짝만!
여러분이 무대나 세트장이 봤지요? 얇은 베니어합판, 합천에 가면 세트장이 있어요. 겉을 보면 번지르르한 극장이고 관공서 건물이고 그래요. 그런데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베니어합판에 그림 그려 놓은 거예요. 허무해요. 얇은 베니어합판이고 뒤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못질해서 짜 놓은 것이고 베니어합판 쪼가리들이 떨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인간은 방패연이에요, 방패연. 방패연은 귀신 그림도 있고 이런저런 그림이 거기 그려져 있지요. 그런데 방패연 손으로 한번 만져 보세요. 얇아요. 얇은 종이에요. 과거는 다 갉아먹었다니까. 오늘만 그럴싸하게 낯짝만 들이대는 게 이게 인생입니다. 우리 뒤에 꼬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오늘만 때우자는 식이지요.
그걸 자아라고 떡 걸쳐놓고 하루하루 그저 낯짝만 있는 것으로 다행이다, 여기고 살아가는데 그게 마귀의 밥이 되는 겁니다. 그게 가룟유다처럼 마귀의 밥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26,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속히 하라. 이 말은, 주님께 사명 받지 않은 모든 자는 마귀로부터 이미 사명 받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속히 하라. 네 마귀 일을 속히 하라.” 그런데 가룟유다는 본인이 마귀의 사명 받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모든 것이 나는 양심에의해서, 내가 스승을 파는 것도 내가 알아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죽을 때도 내가 알아서 죽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게 마귀가 그렇게 조종했다는 사실을 가룟유다는 끝까지 몰랐어요. 가룟유다는, 다른 것은 망해도 자아의 양심, 그동안 지켜온 이 양심의 착함, 이것 하나만큼은 지키려고 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나에게 배신 안 당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거예요. 남은 배신해도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 나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배신을 안 당하려고 애쓴 그 만큼 마귀한테 속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본인이 아무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본인이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지킬거라고 여러분 자부하지요. 그것은 전쟁 속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군인들은 도망갈 것이고 상대방 점령군이 와서 점령하지요. 그다음부터는 그 들이 주민들을 가만두는지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민들을 길거리에 다 모아놓고요, 그들로 하여금 굴욕감을 주는 군기 잡는 행동을 해요. 나이와 관계없이, 남녀노소 관계없이 총부리 코밑에 들이대면서 그 철딱서니 없는 젊은 군인들이 욕구와 욕망대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굴욕적으로 다 해야 돼요. 그러면 내 속에 나도 몰랐던, 살기 위해서 구걸하는 이 본성이 그 전쟁의 맨땅 앞에서 살기 위해서 어떤 짓거리도 하고 있는 굴욕적인 내 모습, 아부하는 내 모습, 목숨을 구걸하는 내 모습이 전쟁통에 다 튀어나옵니다. 점령군이 혈기 넘치는 젊은 애들 앞장세워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진정한 승리를 내 자아 앞에서 상대의 자아가 굴욕과 모독을 당할 때 나는 상대적으로 참 승리했다는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전쟁이라는 힘든 노동 가운데서 에너지를 그런식으로 얻는 겁니다. 그 맛에 전쟁하는 거예요. 배우고 돈 있고 잘나고 똑똑하고 잘생긴 인간들, 내 총 앞에서 비굴하게 목숨 살려달라고 비는 것을 볼때에 나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이겼다는 성취감을 갖는 것, 그것이 계속해서 전쟁을 하게 만드는 그러한 에너지가 되고 힘이 되는 거예요. 무식해서 갑자기 졸지에 땅 잘 사가지고, 물론 그게 잘못 산 거지만, 잘 사가지고 땅값 올라서 졸지에 떼돈 번 그 부자가 직원들한테, 그런 사람 없겠지만 있다고 치고요, 직원들에게 하대하고 갑질하는 것, 그것은 뭐냐? 더럽게 구걸하면서 살아온 자기 인생을 그런 식으로 보상하려고 하는 짓 아닙니까? 그리고 그짓이 부러워서 우리도 빨리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돈 못벌면 자식이라도 돈 벌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자식 내 맘대로 안되지만.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산다는 것이 이렇게 추접고, 더럽고, 굴욕적이고, 비굴하게 마귀한테 빌면서 이만큼 살아왔다는 사실을 본인은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보다 더 모르는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 세상에 마귀 말 치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악마의 말치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요. 예수님 말씀치고 맞는 말이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보냈습니다. 보내서 굶게 할 때 그때 능글능글한 마귀가 찾아오지요. 찾아와 가지고 “배고프지? 기도도 좋은데 먹고 해야지.”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게 맞는 말입니까? 여러분 돈 없이 일 되던가요? 예를 들어서 돌멩이가 지붕에서 내려와서 차 유리를 박살 냈을 때에 기도하니까 앞 유리가 멀쩡해 지던가요? 보험회사에 전화하고 정비소에 가서 전면 유리 가는데 25만 원 들이고, 23만 원이랍니다, 그렇게 하고 돌멩이 치우고, 차 청소 다시 하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역시 돈만이 해결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절실하게. 전에 문 대통령 있을 때에 코로나 한 명 나오면 나라에서 호들갑 떨면서 돈 40만 원 주고 다 해줄 때는 보건소에 따박따박 신고 다 했지요? 그런데 새 정권 들어서서 코로나 걸려도 네가 알아서 해라, 하니까 신고 안 하지요? 이게 전부 다 돈이잖아요, 돈. 돈이 사람 살리는 겁니다. 이게 진짜예요, 이게 실제고. 뭐 아닌 척 하고 교회 나오지 마세요. 그래도 다 소용없습니다. 돈이 사람을 살리는 거예요, 돈이. 지옥갈 때까지만. 이게 체질화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요? 이게 체질인데요. 그러니까 죄인 중에 괴수 맞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줬습니까? 살아 있을 때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느긋하게 그걸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이 구원시킵니다, 아무것도 없이. “그러면 뭐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런 고백도 필요치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고백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히브리서 9장 19-22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하나님의 그 저주받은 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받은 그 피, 그 피가 구약 때부터 모형으로 그 피를 한 바가지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주님께서 찾아오는 거예요. 성령이지요. 주께서 찾아오고 난 뒤에 말씀을 보니까 뒤늦게 ‘아,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이미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맞구나.’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은 인생은 뭐냐? 왜 내게 지킬 게 필요치 않은가, 내가 왜 그 자체가 죄인가, 그걸 계속해서 알아가는 거예요. 살아 가면서. 교회 다니면서, 말씀 보면서 모든 환경 가운데서 알아가는 겁니다. 왜 우리가 내 목숨에 비굴하게 굴고 내 삶에 아등바등 애를 쓰는지, 이게 그냥 말로만 죄인이 아니라 진짜진짜, 찐, 찐, 죄인이기 때문에 살아보려고 그렇게 비굴하게 더럽게 살아가는 거예요. 방패연에 불과한, 아무 폭도 없고 두께도 없이 뒤돌아보면 남아 있는것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낯짝만 멀쩡해가지고 그래도 그 낯짝이라도 살아보려고 더럽게 굴욕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입니다. 가룟유다가 왜 자살했는가? 그것은 자아 문제를 자아가 해결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자아 문제, 자아구원 문제가, 내 구원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던 겁니다. 그 해결이 안 된 것에 대한 패배감, 그 패배감을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한 거예요. 주 앞에 지면 되는데, 이 자연 앞에 자기가 패배하면 되는데.
악마가 준 사명이 뭐냐? 고집이 뭐냐? 어떤 경우라도 너는 져서는 안 된다는 이 마지막, 닭 뼈처럼 목에 걸린 거예요. 그냥 지면 되잖아요. “네 아들 뭐하노?” “의사인데 돈 별로 벌지도 못해. 한 달에 뭐 5천만 원 번다든가? 별로 벌지도 못해. 아, 우리 아들은 그걸 죄라고 간주해.” 그런 것. 지금 와닿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도하는 그런 것, 멋있는 것, 바로 그 멋있는 게 바로 죄라는 사실이에요. 멋있는 것을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게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성공 없어요. 그냥 죄인은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인간을 거꾸로 뒤집어 세웠어요. 거꾸로 뒤집어 놨습니다. 요새 보니까요 샴푸도 그렇고 요구르트도 그렇고, 입구로 먹는 게 아니고 바닥으로 거꾸로 먹는 게 나왔어요. 요근래 처음 알았어요.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거꾸로 뒤집어서 구원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죄인이 구원받는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나의 의를 얼마나 모으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갈수록 나오는 이 죄가 구원이 될 수 있는 소재가 되는지, 구원의 재료가 되는지, 그 인간으로 완전히 반대로 바뀐 거예요. 자아가 죄만 나오는 자아를 주신 것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감사하는 거예요. 기뻐하는 겁니다. 전에는 자기 착한 재미로, 기도 잘하는 재미로, 하나님께 그걸로 사랑받는 재미로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겁니다. 그래야 세상에 목숨 구걸 안 하지요. 이래도 또 구걸할 거예요?
문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의 문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비로소 구원의 문이 되신 거예요. 현재 눈에 보이고 존재한다고 우기는 것들은 오히려 문을, 있는 문도 가려버리는 거예요. 어떤 목사 훌륭하더라, 어떤 성도 어떤 집사 훌륭하더라. 이것은 비워 있어야 할 자리를 그 인간이 땜질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이야기는 내가 바로 주의 문을 지금 가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 어때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명 없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그 자리에서 치워 버려야 돼요. 그러면 치우는 방법이 뭐냐?방법은 주께서 알아서 다 챙겨줬습니다.
시편 41편 9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참 인생을 살면서 이 말씀처럼 정확한 말씀이 또 있을까요?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럴 때 아멘, 나와야 돼요. 누가 배신하는가? 가까운 사람이 배신해요. 가까운 배우자로부터 해서 가까운 자식, 부모, 친구, 바로 내가 가깝게 지내는 자가 나를 배신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주께서 배신하라고 가깝게 해주신 거예요. 왜 그렇게 배신하느냐? 내가 나를 배신을 안 하거든요. 이러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자꾸 세상은 더럽다, 악하다, 하면서 나 자신은 계속해서 나는 나에게 신뢰하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독종인지를 우리 자신은 그걸 애써 부인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좋게 보니까 자꾸 동정심을 유도하는 겁니다. ‘나 동정 받아야돼, 나 사랑받아야돼.’ 본인이 악한데 뭘 동정을 해줘요? 우리는 우리를 배신을 안하니까 주께서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배신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는 배신당해도 쌉니다. 마땅하지요. 배신당했다고 불평할 가치 없어요. 오히려 배신당함이 다행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나 미련을 갖지 않을 거거든요. 주님께서는 배신 당한분으로써 찾아오십니다. 그게 바로 사울에게 찾아올 때 그렇게 한 겁니다. 몇 번 이야기 했지만 또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지금 율법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자신도 모르고, 자아밖에 모르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그들도 천국 갈 수 있느냐? 그걸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거예요. 사울에게 찾아갈 때 사울을 배신자로 간주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게 네 본성이고 마귀로부터 온 사명이 뭐냐?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 그게 마귀로부터 온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요구르트병 거꾸로 하듯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놨어요. 좋은 게 나오는게 아니고 배신하는 그 속성, 근원적인 본질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배신 아닌 경우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배신 아닌 경우가. 그래서 궁극적으로 가룟유다처럼 내 자아의 양심, ‘나는 나를 지켜야 돼.’ 자아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그 가룟유다 가는 그 길, 저주의 길과 전혀 다른 길로 지금 사도를 이끄십니다.
자, 이끄는 방법에 대해서 좀 난해하더라도 참아줘야 돼요. 거의 마지막이나 좀 참아주셔야 돼요.
인간이 관찰한다는 게, 인간의 자아는 인간의 관찰에서 나왔거든요. 관찰해서 자기가 상상해서 거울 보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상상한 그것이 나의 자아가 되거든요. 그래서 내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도 보지만 자꾸 남들을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서 “친구야 너 나 어떻게 생각해?” 말로 묻기도 하지만 딱 만나보면 알잖아요. 자꾸 사람들 만나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좋게 생각하느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럴 때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다시말해서 쉽게 해서 남들을 만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싫어서 만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그냥 낯짝만 있기는 싫다는 거예요.
관찰을 할 때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설탕을 커피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았다.’ 설탕을 커피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았다. 그 말하고 ‘설탕을 커피에 넣으면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는다.’ 이 말이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다시 할게요. ‘설탕을 커피 안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았다.’ 이 말과, ‘설탕을 커피 안에 넣으면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습니다.’ 이 말이 완전히 대비되는 반대되는 말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관찰하는 존재기 때문에, 나를 관찰을 통해서 규명하고 정립하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탕을 커피 안에 넣었더니 설탕이 커피 안에서 녹는 것은 내가 눈으로 관찰이 돼요. 그런데 그걸 원리로 삼아서 ‘설탕을 커피 안에 넣으면 설탕이 반드시 커피 안에서 녹는다.’ 이것은 나중에 자꾸 미루어지는 거예요. 나중으로 미루어지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고, 어렵지만 중요한 이유가 되느냐 하면, 같은 제자인 도마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고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찰을 넘어서는 거예요. 나의 관찰에서 나온게 아니고 나, 자아를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릴 때 뒤에 남아 있는 것,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의 사명이 남아 있지요. 주님이 하신 일은, 네가 관찰해서 증거를 모은다고 해서 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너의 죄악의 한계다, 그 말이지요.
기껏 “하나님을, 예수를 믿을테니까 증거 주옵소서. 믿을만한 증거 주옵소서. 그거 수집해서 믿습니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형적인 불신자에요. 가룟유다가 그렇게 살아갔던 겁니다. 똑같은 제자인데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이 창에 찔리고 못에 박힌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당신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하는거예요. 이럴 때 도마는 자아가 날라가 버렸어요. 나의 증거, 나의 관찰, 거기서 생긴 나, 자아라는 자체가 더이상 지킬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이 내 자아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걸 대신 죽었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대신 죽음 앞에서 나의 죽음은 이제 시시한 문제에요. 그것은 문제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구걸할 필요도 없어요.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걸 신앙이라고 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디모데전서 1장에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15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죄인을 구원하는 겁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죄인밖에 없어요. 이미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생명나무 못갑니다. 죄인인데, 죄인 중에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시료가 되려고, 시범 조교가 되기 위해서, 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똑같이 일어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관찰을 믿지 않는 거예요. 나의 신앙, ‘50년, 60년 믿었다.’를 믿지 않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행한 것을 믿지 않는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친구라고 이야기합니다, 친구. 나한테 배신당할 친구가 아니라 먼저 배신당했던 친구로써 후차적으로 찾아오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13-15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의 자아는 배신할 때까지만 친구에요. 일가친척, 가족은, 배우자는 나를 배신 안 할 때만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에요. 부모가 돼요. 그런데 항상 배신은 유보적이에요. 언제 배신할지를 모르니까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이제 배신당하고 난 뒤에는 울고불고 하면서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내가 한평생 어떻게 어려운 인생을 살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굳이 그걸 알아야 돼요?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똑같이 죄인 중에 괴수인데 왜 동정받으려고 해? 왜 자꾸 너 동정받으려고 해? 꽃순이를 아십니까. 피나 알아라, 인간아. 피를 알아?”
주님은 이미 배신을 당했어요. 그리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모르는 것은, 내가, 네 자아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관찰은 주님이 관찰하는 거예요. 주님의 관찰이 믿어지는게 믿음이에요. 내 관찰을 믿는게 믿음이 아니고 주님께서 “너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몰랐잖아요. 내가 가룟유다인지 몰랐잖아요. 내가 내 양심 지키고 내 가치 지킨다고 그게 주님의 배신으로 돌아갈지 몰랐잖아요. 사울이 그걸 몰랐습니다. 자기 딴에 율법 지키면 천당가는 줄 알았지요. 여호와 잘 믿으면 그것이 구원인줄 알았고, 그것이 배신인줄, 이땅에 오신 주님에 대한 배신인줄 몰랐지요. 주께서, 아까 갈라디아서 2장 21절 중요하니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헛되지 하지 않기 위해서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우리는 몰랐지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그런데 우리가 그걸 알게 됨으로써, 성령으로 알게 됨으로써 십자가의 사명이 구원되고 십자가가 살아나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오직 십자가만 살아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남 앞에 잘 보이는 자아 되기 위해서 얼마나 더럽게 살아오고 있습니까? 잘났다, 자랑질하기 위해서 아닌 척하면서 얼마나 위선 떨었습니까? 왜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무게 나가고, 스스로 괴롭게 하는 어리석은 생활 하는지, 이제는 그것 깔끔히 청산하고 십자가만 크게 자랑하는 사명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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