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해체

아빠와 함께 2022. 5. 21. 07:32

서울의존강의20220519a 베드로후서 2장 7절(해체)-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2장 4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사람 이야기가 아니죠. 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천사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되는가? 이 천사와 인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범죄한 천사의 특징이 있어요. 범죄한 천사의 특징은 해체되지 않으려 한다. 산산조각나지 않기를 원한다. 기존의 자기의 영토와 영역을 포기 못하는 자가 범죄한 천사의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범죄한 천사를 꼭 빼닮았죠. 똑같은 식으로 그들도 이 세상은 해체되지 않으려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여기 5절에 나오는 노아, 그다음에 6절에 나오는 롯, 노아 가정과 롯의 가정의 특징은 뭐가 되겠어요? 당연하게 ‘해체되어버림’입니다. 해체된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자기 것이 날아가 버렸다. 내 것이라는 것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요새 고등학교에서는 애들을 못 때리지만 옛날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애들을 많이 때렸거든요. 애들이 잘못했을 때 선생님은 아주 사정없이 팹니다. 팰 때 한번 맞고 도망가는 아이들이 있어요. 도망가는 아이들,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아이들입니다. 도망간다는 말은 일종의 비겁함이고 비겁하다는 것은 나는 의롭거나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거죠. 나는 아프면 도망가는 비겁한 인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때릴 필요가 없죠.

그런데 선생님을 아주 화나게 하는 것은 맞고도 그 자리에 버티는 인간. 아주 조져버립니다. 이게 개기냐? 선생님한테 대드냐? 그게 바로 범죄한 천사들의 특징이에요. 개기는 거예요. 대드는 겁니다. 때리면 해체되면 돼요.

무슨 남편이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어도 남편은 룰루랄라~ 자기는 살겠다고 아내 버리고 자기 두 딸하고 그냥 가버리잖아요. 이게 얼마나 멋있는 해체에요. 롯의 경우. 만약에 롯이 뭔가 내 것, 나의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것은 개기는 겁니다. 대드는 겁니다.

방금 이 말은 뭐냐 하면 천국은 지옥과 함께 형성된다는 거예요. 천국은 지옥과 함께 형성돼요. 적어볼게요. ‘천국은 지옥을 규정하면서 같이 규정된다.’ 천국은 지옥을 규정하면서 같이 규정되는 거예요.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말인데요.

이 말은 이런 경우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것이 <매트릭스>라는 영화에도 나오고 흔히 스릴러나 이런 영화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브루스 윌리스, 저돌적인 형사, 나이 많아 대머리 된 형사와 시한폭탄이 있는데 이 시한폭탄에 빨간 선 있고 파란 선이 있다. 어느 쪽을 잘라야 시한폭탄이 멈추겠느냐. <미션 임파서블> 영화 마지막에도 이런 장면이 더러 나와요. 빨간 것, 파란 것. 잘못 건드리면 지옥이고 잘 건드리면 천국 되는 거죠. 이런 경우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거죠, 이런 경우는.

장소가 하나, 장소가 둘, 장소가 셋, 이런 경우는 없단 말이죠. 세 개 되는 경우는 없어요. 천국과 지옥이 같이 규정되어버리면 장소 하나, 장소 둘, 둘밖에 없어요. 제3의 지역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너 천국갈래, 지옥갈래? 빨간 선 자를래, 파란 선 자를래?’ 이런 식으로 왜 안 묻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선악체제 안에서 자아죠, 본인, 본인이 선악을 알았으니까 자아① 있죠, 선② 있죠, 악③ 있죠. 벌써 몇 개 입니까? 장소가 세 개가 되기 때문에 이 형식, 이 형태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믿을래, 부처 믿을래? 어느 쪽을 믿어서 구원받을래? 이 자체가 성립 안돼요, 이 자체가.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게. ①번, ②번밖에 없기 때문에 천국을 정하면 자동적으로 지옥이 정해지고 지옥을 정하면 자동적으로 천국이 정해져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져요? 제3의 지역에 있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겠다는 나의 올바른 선택의 자리는 해체돼버립니다. 용납이 될 수 없어요.

방금 한 이야기를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양한다. ‘지양(止揚)’이라는 말이 있어요. 지양이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득하는 것, 이게 지양이에요.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하는 거예요.

자, 인간은 선악체계 안에 이미 놓여있습니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하겠습니까? 답 딱 나오잖아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취득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버리겠죠. 한번만 그러겠습니까? 어떤 경우가 지나고 난 뒤에 또 다음 경우 오면 거기서 또 선과 악을 잘라내겠죠.

막대기가 있는데 너 오른쪽 할래, 왼쪽 할래? 너 좌하면 나 우하고 너 우하면 나 좌할게,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느 쪽 할래? 나 왼쪽 할래. 그럼 오른쪽 날라갔죠. 이게 지양이에요. 남은 왼쪽 중에서 오른쪽 할래, 왼쪽 할래? 또 자릅니다. 인간이 평생 하는 일이 이거에요. 인생을 살면서 하는 일이 이거에요. 나한테 유리한 것, 유리한 것 이리 오고 불리한 것, 불리한 것 저리 가 저리 가. 계속 내보내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시집을 갔더니만 서울로 시집와서 서울서 살림살고 있는데 촌에 있는 시동생이 취직한다고 올라와가지고 집값 비싸다고 갈 데 없으니까 같이 살면 되지 않느냐, 해가지고 남편이 일방적으로 내 동생 같이 살자했을 때 그 부인은 그다음부터 시동생이 독립해서 나가는 것만 기다리겠죠. 나가서 잘라내면 그것은 지양이 되는 겁니다. 지양. 귀찮은 거 내보내고 우리끼리 사는 날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자기 여동생, 남편 보기에 처제가 취직한다고 데리고 왔을 때 내보내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촌에 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올라왔다. 다단계 빠져가지고 집 날리고 같이 살자, 손자 봐줄게, 이런 조건 하에...... 또 쳐내는 거예요. 다 쳐냈는데 이번에는 또 동서가 외국 가는데 개 맡길 데가 없다 해서 개 맡긴다고 왔어요. 그다음부터는 개 쳐낼 날을 기다리죠. 이게 지양입니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득하는 이 지양을 사람들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바로 구원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나한테 유리한 것, 천국은 유리하죠. 내가 천국은 선택하고 지옥은 버리는 것, 사람들은 구원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접근해갑니다. 다 엉터리에요. 몽땅 다 엉터리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이것 가지고 장난치고 장사하겠죠.

둘 중에 너 어느 것 할래? 그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너희는 거기에 합세하지 말고 따로 나오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너는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고 따로 나오라 할 때 따로 나오면서 생겨나는 게 뭐냐? 따로 나오면서 생겨나는 것. 여러분들은 수준이 있으니까 오늘 아주 독하게 어렵게 갑니다. 여러분들 수준이 있으니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네가 그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고 따로 나오라 할 때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경계에요. 경계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고 있죠. 경계가 생기는 거예요. 따로 나오라 함으로 말미암아 따로 나온 너희와 저쪽 사이에서 와, 나는 구원받았어, 이걸 바라보라는 게 아니고 저쪽과 이쪽을 가로지르는 경계가 어떤 요소로 되어있지? 그걸 증거하는 자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거예요.

경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기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우리의 구원보다 주님은 더 중요한 거예요. 왜?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님은 피조물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는 계획과 스케줄과 남기고 하는 그것이 주가 되지 우리의 구원은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을 거예요. 나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게 나의 소원입니다, 라고 하더라도 그 성도의 소원은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그럼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이 뭐냐? 그것을 나는 드러내겠다.’ 이게 바로 성도의 바른 자세에요. 똑바로 앉는 게 바른 자세가 아니고. 성도의 바른 마음자세가 ‘내가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주께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만 제대로 제시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른 태도에요. 이게 성도의 삶의 태도입니다.

주님이 가름했던 기준이에요. 주님이 파고들어왔던 기준이죠. 주님의 기준,이 기준의 취지를 알려면 반대말을 보면 돼요. 기준의 취지와 반대되는 개념이 뭐냐 하면 소유입니다, 소유. 나는 천국을 소유했다. 나는 천국을 소유했는데 먼 데 여기까지 피곤한데 갈 필요 뭐 있나, 이런 거죠. 나 성도 맞는데 뭐.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했는데 뭐. 난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귀찮은 거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자, 이 사고방식이 뭡니까? 이 사고방식에 대해 아까 제가 강의했어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겠다, 이 사고방식을 두 자로 뭐라고 하죠? 나왔는데 두 자로 뭐죠? 지양. 지양이에요. 나한테 좋은 것은 취득하고, 몸이 편한 것은 좋은 거예요, 귀찮은 것은 제거하는 것. 이미 구원받았는데 뭐.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 편한대로 살아도 되죠. 구원받았다, ‘받았다’를 다른 말로 하면 소유. 천국을 소유했으니까 난 챙길 건 다 챙겼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지양이고 사람들은 구원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이 지양 개념을 가지고 구원을 접근해나갑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악과 따먹은 티가 어디로 가겠어요? 그대로 발산되죠. 이래놓고 마귀 탓을 하고 있어요. 마귀는 지옥 간다. 하지만 난 천국 간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귀가 지옥 가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네가 아느냐고 묻는 거예요.

다시 설명하면 마귀가 지옥 가는 이유는 마귀는 자기 세계를 해체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8장 29절에 나옵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악마가 귀신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 보세요. 이런 태도에요. 당신 것은 당신 거고 내 것은 내 거니까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내 거 건드리지 마세요, 그 뜻이에요. 건들더라도 아직 때가 안됐잖아요. 시간이 안됐잖아요. 왜 미리 오십니까?

그에 비해서 성도는, 오늘도 오셨군요. 단골 손님이에요. 오늘도 오셨군요. 악마는, 왜 미리 오십니까? 그 앞에 덧붙인다면, 내 허락도 없이 내 의논도 없이 왜 미리 오십니까? 성도는, 오늘도 날마다 성령께서 오셨군요.

자, 성도의 특징은 내 자리, 내 것이 없죠. 그게 바로 해체에요. 나의 것의 해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게 자기 해체잖아요, 자기 해체. 배알도 없어요. 배알도 없어, 이것은. 자존심도 없어요 그냥. 주님 앞에 흐물흐물해요 그냥.

주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 것을 갖는 것을 주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가져버리면 이게 구원이 안 되고 지양이 돼버려요. 가진 것을 가치 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해서 악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은 취득해버리는 것, 이것은 선악체계가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고 저것은 필요 없다는 결정을 뭘 노리고 합니까? 결국 나는 구원받았다, 그걸 지금 원하고 있거든요. 나는 구원받았다, 가 되어버리면 뭐가 날라가겠어요? 경계. 주님의 기준을 그 사람한테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자기 구원받은 자랑질이나 하지 주님의 기준이 뭔지를 몰라요, 주님의 기준. 심판의 기준.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제가 부탁합니다만 여러분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 이 세상 떠나더라도 주님의 기준은 알고 그걸 전하고 떠나셔야죠. 세상을 언제 떠날지 모르겠지만. 아까 빵 4개 먹었잖아요. 빵 4개 먹고 베지밀 2개 먹었죠. 먹었으니까 이제 떠날 때 됐죠. 떠날 때 떠나더라도 내가 떠난 이유는 베지밀 먹어서였다, 이러진 말자 이 말이죠. 이러지는 말자.

그 기준이 뭐냐? 내가 빵을 4개 먹든 100개 먹든 주께서는 나를 해체시키는 것이 기준이었다. 왜? 난 악마에 속했으니까. 전에 내가 악마와 똑 닮았으니까. 악마는 자기 것에 대해서 절대로 티끌하나 손 못 대게 했어요. 내 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관여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런 나, 전에 성령 오기 전까지는 그걸 지키면서 내가 하나님 보기에도 천국에 합당한 구원에 합당한 완벽한 인간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으로서 좋은 건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버리는 그런 식으로 살았을 때, 세상에 그게 악한 천사가 지옥 가는 이유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이것은 어려운 게 아니고요.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요. 이걸 더 어렵게 쓰겠습니다. 자꾸 어렵게 쓰는데...... ‘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비교’.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 안 받은 사람하고 비교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교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본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주님의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남아있기 때문에 굳이 내 걸 다시 조립 또는 정립해가지고 내 것 있는데 네 건 어때? 하고 비교할 하등의 재료는 우리 성도한테는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성령이 와서 나를 부정시켜버렸어.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어.” 할 때 이게 뭡니까? 지금 기준이 들어왔잖아요. 기준이 들어옴과 동시에 내 것은 어떻게 됩니까? 주섬주섬 끌어 모을 내 것이 없어요. 내 것이 없다고요.

만약에 구원받지 못한 아내가 남편보고 “당신은 복음에만 왜 이리 관심이 있어?” “누가?” “당신이” “그건 주께서 하셨지.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편이 자기만 천국 가려고 복음만 끌어 모으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이게 지양적 활동을 하는 줄 알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실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먹든지 마시든지 매사에 주를 위해서 하도록 했는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본인이 자기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아주 예민하게 정신 바짝 차리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의 애씀이 주님의 애씀을 가린다.’ 이것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안 하던 짓을 한번 해야 되겠어요. 안 하던 짓이 뭐냐 하면 이 짓이에요. (안테나로 가리키는 것). 나의 애씀이 주님의 애씀을 가린다. 나 천당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은혜를 완전히 망치고 있는 거예요. 안테나 가리키는 건 끝났어요. 다음에 또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참 애쓴다.

지양을 한다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 유리한 것, 필요한 것, 도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취득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그 지양적인 것으로 자기 구원을 챙기려 하면 이게 무엇에 걸리느냐 하면...... 선악체계 자체가 함량과 관련되어 있어요. 함량 알죠? 함량 미달 또는 함량에 충족하는 것. 함량과 관련되어 있어요. 좋은 것이 얼마나 퍼센트가 많은가를 보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평가할 때. 이게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해체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를 가꿀 생각하는 거예요.

마당에 정원이 있다. 마당에 정원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집 정원 가운데서 몇 퍼센트는 잡초고 몇 퍼센트는 알곡이고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의 마음밭을 정원이라 본다면 몇 퍼센트 알곡이 있고... 이건 함량의 문제거든요. 질의 문제가 아니고 양의 문제에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반박해버리죠. 함량의 문제에 대해서 누가복음 5장 38절, 마태복음 9장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준비한 새로운 영토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영토에 포획이 되는 거죠.

포획, 삼킨 바 되는 것, 포획이 되어버리면 그 자체로 그 사람은 선악체제의 함량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거죠. 함량이 아니고 둘러싼 외부환경이 그 사람의 미래를 확정지어놨기 때문에.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부대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함량 문제와 상관없이 그 술은 새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새 술은 새 부대입니다. 이게 구원방식이에요.

그럼 부대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부대는 우리 인간이 못 구해요. 격리시키잖아요. 옛 부대와 새 부대를 격리시킬 때 옛 부대는 그 자체로 지옥이 돼버려요, 지옥.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과 지옥은 같이 시작한다. 같이 개시가 되는 거예요. 천국 등장하면 지옥 등장하고 지옥 등장하면 천국이 같이 등장해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 둘 중에 어느 것 갈래? 이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뽑히는 거예요. 청군, 백군 뽑히듯이. 청군 뽑아놓으면 나머지는 백군이고, 백군 뽑아놓으면 나머지는 청군이고. 뽑는 거예요. 뽑을 때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그게 노아 때 있었던 거예요. 노아 때 하나님께서 언약 주실 때 언약은 노아를 삼켜버리죠. 그러면 그 노아는 선악체계의 함량과 전혀 상관없이 두둥실 바다를 유유히 떠돌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 죽고. 그래서 노아가 떠다닌 방주 밑에는 그 당시에 언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신이 깔려있어요. 시신 위에 유영하고 있는 노아의 방주.

y∣→ x, 이 말은 x: 무한, y: 유한이고, 유한(y)은 무한(x)에 삼켜진다는 뜻이에요, 논리학에서. 무한은 일부인 유한을 삼켜버리고, x∣→ y 그 무한에서 유한이 새롭게 탄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삼킴을 당하는 1단계, y∣→ x, 내뱉어지는 2단계, x∣→ y 이것을 누가 먼저 실시하십니까? 1단계, 2단계를 먼저 실시하시는 분이 누구시게요? 그렇죠. 예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에 삼킴 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부활로 다시 나오신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저주를 받으시고 그게 해소되면서 부활이 되었다는 그 과정,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여준 전과 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전/후. 예수님의 전/후가 그대로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이 성도의 전/후가 되겠죠, 성도의 전/후. 그러니까 지옥이고 천국이고 간에 지옥, 천국 가름하는 것이 인간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주님의 일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구원 문제, 천국 지옥 문제에 있어서 이미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어버렸잖아요. 그렇죠? 따먹어버렸으니까 인간의 운명을 인간에게 일임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인간에게 준 적이 없어요. 인간이 자기 결정을 뭘 하든 인간 말고 예수님의 전/후가 구원의 기준이 되니까요. 잘 알아들으셔야 됩니다.

인간이 무슨 몸부림을 치든 어떤 노력을 하든 주께서는 그걸 완전히 개무시 해버리고 하나님의 천국과 지옥은 뭐로 결정됩니까? 따로이, 인간 말고 인간 속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 즉 말씀을 이 땅에 보내셔서 보내신 그 분에 의해서만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기준이 가름되고 결정되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경계가 되는 거예요, 경계.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나름대로 애쓴다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체제 안에서 자기가 선악체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거거든요. 그건 제가 아까 얘기했죠. 함량의 문제라고요. 선한 비율을 많이 가지고 악한 비율을 적게 가짐으로써 뭔가 배려 차원에서 아이고, 예수는 안 믿지만 많이 착했구나. 착한 만큼 천국에 넣어줄게. 네가 예수는 안 믿지만 너무 착해서 천국 넣어줄게. 이게 연옥설이에요.

천주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천국 갔다고 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 그 아씨 집안이 뭔데 천국 가요? 왜 천국 가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 뭘 천국 가요? 천주교에서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하면 천주교는 말씀 복음 중심이 아니고 교회 중심이잖아요. 교회가 되려면 사람들이 모여야 되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 고객이 원하는 것을 고객이 왕이니까 제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맨날 주장하는 게 진심이 문제이고 정성이 문제다, 맨날 그러는 거예요. 분투노력하자. 열심을 내서 노력하자. 진심으로 순종하면......

본인 진심은요, 진심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게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의 전후를 비교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안 쳐줍니다. 나는 전에 담배 피웠다가 지금은 담배 끊었다. 나는 착하다. 이것은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 요소를 거론하려면 담배만 그래요? 그럼 술은? 술은 아직 먹는다. 그럼 안 되지. 그럼 술 담배 말고 다른 것은? 기준을 대면 기준이 수천 수백 가지가 돼요. 수백 수천 가지가 된다고요, 요소가.

직업, 성격, 남녀 성별, 나이, 재산 특히 건강. 이런 것들이 자아를 이루는 요소가 되잖아요. 이런 것들이 지양을 해요, 지양을. 구원을 하는 게 아니라 지양을 한다고요. 건강에 안 좋은 것은 버리고 건강에 좋은 것은 취득하고, 이걸 지양하니까 이런 노력을 하는 것, 인간이 기껏 하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더 좋은 직업. 성격 개조, 괜찮은 성격.

이런 것이 전부다 해체되어야 되는 거예요. 해체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방주 밑으로 전부다 버려야 돼요. 방주가 물에 떠다닐 때 물에 이런 것들 다 갖다버려야 돼요. 성별, 나이, 건강 이런 거. 아프면 지옥 갑니까? 그런 거 아니잖아요. 아프면 지옥 가는 거 아닌데 왜 주님보고 병 고쳐달라고 그렇게 달려듭니까? 달려든 사람들 전부다 결국은 예수님 버리고 가버리고. 병 고침 받은 사람이나 병 고쳐준 베드로나 전부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 떠났죠.

목자를 치니 어디로 갔습니까?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목자를 치니 침을 받은 때림을 받은 목자만 있더라, 이렇게 되는 거죠. 목자가 있던 자리에 애초부터 목자만 있었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들이 한때 있었었던 것처럼 됐지만 그건 ‘처럼’이고. as if, 마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은 양들은 제 갈 길로 다 가버리고 목자로부터 시작된 일이 마지막에는 목자 되시는 주님만 남았던 거예요.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끝나는 일이에요. 이게 기준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비교, 내가 나 된 것은 나의 전과 후의 비교가 아니에요. 내가 전에는 불신자였는데 지금은 신자라고 비교가 안 돼요. 전의 나와 후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전에는 마귀 안에 있었던 나와 지금은 예수 안에 있는 나.

그러니까 이게 예수님이 나를 붙잡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덮치잖아요. 예수 안이 나를 덮쳐버리면 y(유한)라는 것, 인간이 어떻게 이동하든 간에 주도권은 x에 있는 거예요. 무한에 있는 거예요. 무한이 덮치고 무한이 거기서 새롭게 토해내고.

그렇다면 성령받기 전 나는 나 홀로 나였지만 구원받은 나는 새 부대를 뒤집어쓴 그런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구원받았다 해서 나에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나는 뭔가 뒤집어쓴 거예요. 병아리 그림에 그런 게 있잖아요. 병아리 중에 그냥 병아리가 있는 반면에 머리에 계란 껍질 깨진 걸 뒤집어쓴 병아리가 있죠.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이러한 병아리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럼 주도권은 뭐냐? 머리에 뒤집어쓴 계란 껍질.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된 거예요.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불신자는 뒤집어쓴 계란 껍질, 이게 없는 거예요. 태어남이 없어요. 다시 태어남이 없어요. 옛날의 나는 나쁜 나였는데 지금의 나는 좋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지양이 되는 거예요. 뭘 바라보는 지양. 더 발전된 나. 전에는 나쁜 것의 함량이 많았는데 지금은 좋은 것의 함량으로 많이 채워진 나. 이것은 새 부대가 아니에요, 이것은. 옛 부대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옛 부대에서.

그러니까 나이트클럽에서 철없을 때는 아무 여자나 들이대면서 부비부비 하다가 이제는 나이 오십 되어서 추어대니까 점잖게 달라진 나이트클럽 출입자. 맨 나이트클럽 안에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나이트클럽이 나쁘다고 내가 단정한다면. 나이트클럽 자체가 나쁠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음악 나오고 술 팔고 춤추고 그게 나쁘진 않겠지만, 나이트클럽이 밤의 문화라면 그 밤 문화가 문제 있다면 그 밤의 문화 속에서 아주 점잖게 행동한다 해서 그 밤의 문화에서 벗어난 건 아니잖아요. 내 것을 지탱하고 내 것을 사수하겠다는 이 사고방식, 나는 죽어도 해체 못하겠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지양했지, 구원된 게 아닙니다.

아까 4절 보면 범죄한 천사와 노아의 차이점을 아시겠죠? 언약이 뒤집어썼다, 언약이. 언약이 주도권을 가진다. 개인적인 노력과 애씀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다음 6절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인간이 달라지지 않을 때,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인간은 그대로 있고 좀더 개선되는 식으로 또는 발전되는 식으로 쭉 나갈 때 그 원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죠. 달라지지 않을 때 이것은 영어로 하면 and, 수학에서는 플러스(+)가 돼요. 새로운 요소를 자꾸 추가하는 거예요. 김정은이 평양 대광장에서 뭐 할 때 김정은 옆에 장군들 복장 보세요. 뭐가 주렁주렁 달렸습니까? 훈장들이죠. 옷 늘어지겠어요. 전부다 훈장 플러스하겠죠. 플러스하는 거예요. 플러스. 그 인간 원판은 그대로 있는데 훈장 개수만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달라진다는 말은 차원이 다른 거예요, 차원이. 차원이 다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수학에서 플러스(+)라 하는 것은 선이 10cm이다. 더 플러스하게 되면 15cm, 더 플러스하면 20cm 되겠죠. 선이라는 차원은 그대로 있어요. 이게 더하기에요. 10+5+5+... 계속 더하기 더하기 나오는 겁니다. 차원은 그대로 있고 추가해서 더 보태게 되면 뭔가 자기가 양적으로 달라졌다고 자부하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한 달 수입이 백만 원인데 지금은 백오십 만원, 이백 만원되면 뭐 달라졌어요? 수입은 늘어났는데 본인이 달라졌어요?

차원이 달라질 때는 플러스가 아니고요. 곱하기에요, 곱하기. 이 더하기하고 곱하기의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곱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더하기는 알겠는데 곱하기는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선을 1차원이라 한다면 면적은 2차원이 되는 겁니다.

여기 (동일 선상의 한 지점에) 있는 개미가 몇 시간 만에 이리로(다른 지점으로) 기어갈 수 있느냐? 이것은 1차원 문제죠. 그런데 이 개미가 어떤 면적 안에 있느냐? 이것은 이미 1차원이 아니고 면적이 되면 2차원으로 차원이 다른 거예요. 개미는 이 선상에서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더하고 빼고 이런 건 되지만, 면적 안에서 이런저런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면적은 밑변×높이가 된다고요. 다른 차원끼리 결합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선은 뒤와 앞이 되지만 면적은 안과 밖, 바깥과 안쪽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서 롯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는가를 보려는 게 아니고 네가 차원적으로 네 환경에 의해서 얼마나 시달렸는가를 보는 거예요. 얼마나 시달렸는가.

노아 때는 뭐 고통한다 이런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거 없죠. 노아가 개인적으로 믿음에 의해 고통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노아를 다룰 때는 방주에 있는 사람, 방주에 없는 사람 이렇게 나누잖아요. 그것도 방주 안은 사실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 안이라는 그런 거대한 안이 아니고 방주는 좁은 하나의 배니까 방주와 더불어 함께 있다. 방주가 추가되어 있고 저쪽에 물에 멸망한 사람들은 방주가 하나님의 언약이 추가되지 않았으니까 더하기가 안 됐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경우는 방주가 아니고 새삼스럽게 뭔가 추가된 게 아니고 불신자나 신자나 소돔과 고모라에 같이 살았잖아요. 같이 살았죠. 같이 살면 운명이 같아야 된다는 게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같이 살면 동일한 운명이 되어야 돼요. 동일한 운명에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바깥 사람이라는 특징이 뭐냐? ‘고통 받았다’ 이게 특징이에요. 훨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깊이 있는 내막을 언급해주죠. 세상을 떠나자, 이것은 노아 같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고통 받아라, 이건 뭡니까? 롯 같잖아요, 롯.

성경에 그런 경우가 많아요. 롯과 비슷한 사람의 이름이 뭡니까? 룻이죠. 룻은 바깥에 있는 사람, 이스라엘 택한 민족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온 거예요. 훨씬 더 내용이 더 깊이 있어요. 언약적 내용에 추가적인 내용들이 이렇게 십자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거기다가 덧붙여지는 겁니다.

언약 지키면 율법 지키면 복 받는다, 이것하고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어느 것이 십자가에 가깝습니까? 율법 지키면 복을 받는다, 레위기에 나오고 신명기 28장에 나오잖아요.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 이것하고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어느 쪽이 십자가에 가깝습니까? 이사야가 가깝죠.

10분 쉬고 그 이사야 53장이 왜 중요한가를 드디어 계속 이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서울의존강의20220519b 베드로후서 2장 7절(해체)-이 근호 목사

해체라는 것은 직업과 나이, 성별, 성격, 인물, 건강상태 저런 것을 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내가 직업이 뭐고 한 달 수입이 얼마며 건강상태가 어떠냐 그런 것은 구원받은 성도한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안개처럼 그 요소들이 다 삭제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나 성격 이래도 구원받았다. 나이 이만큼 되도 나는 구원받았다. 그렇게 되어야지, 성격 좋아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하면 그런 것 가지고 복 받은 증거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하죠. 아브라함에게 복을 받아서 야곱의 양떼가 늘어나지 않았는가. 구약 때 되게 되면 뒤에 것이 앞의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또 다른 말로 하면 뒤의 것을 위하여 앞의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복의 형태를 쭉 가져오다가 하나씩 하나씩 해체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스펠송 보면 유명한 가스펠송에 하박국 내용을 가스펠송 가사로 만든 노래가 있을 거예요. 비록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라는 말씀 나오죠. 하박국의 그 대목을 잘 한번 음미해보세요. 소가 없다, 가 아닙니다. 외양간은 있어요. 외양간은 있는데 소가 없을 때 더 가슴 아프죠. 포도농원은 있는데 포도송이가 없을 때 더 가슴 아파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박국 예언 자체가 망해야 구원이 보인다는 겁니다. 안 망하면 구원이 안 보인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안 망하게 되면 가진 것에 대한 기쁨에 아직도 미련을 갖게 돼요. 그걸 아까 제가 해체라 했죠. 몽땅 해체되어버리면 몽땅 소멸해버리면 원래부터 옛 부대에 속한 것은 있든 없든 그것은 새 부대와 상관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재산이 날라가든 안 날라가든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외양간에 그다음에 소가 100마리 들어왔다 할지라도 구원의 기쁨은 소 100마리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새 부대에요. 새 부대입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거지처럼 살아라, 가 아니라 구원받고 난 뒤에 한 달 수입이 한 천만 원 되더라도 그 뭐 천만 원 돈 되나, 이런 식으로. 좀 시건방지지만 그 뭐 천만 원이 요새 서울 살면 겨우 사는 거잖아. 나중에 한 2천만 원 되니까 아이고, 이제 숨 좀 쉬겠네. 이제 좀 밥 먹을 수 있겠다, 이천만 원 버니까. 이런 식으로. 별로 기쁨이 안 되는 거예요. 구원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이게 바로 유한한 것이 무한에게 삼킴을 당하고 우리가 죄인이 의인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삼킴을 당하고. 십자가, 머리에 얹힌 계란 껍질,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기쁨이 세상의 소나 그런 재산 증식과는 비교도 안 될 큰 기쁨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계속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게 첫째 시간에 말한 기준이죠, 기준. 경계. 기준을 증거하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 구원이 초점이었죠. 그것 때문에 지양하잖아요. 구원에 도움 되는 것은 다 얻고 구원에 도움 안 되는 것은 다 버리고 그런 식으로 살았는데. 예를 들어서 구원에 도움 된다면 나는 성경공부는 참석하되 도움 안 되는 다른 세상의 댄스클럽 그런 건 다 버렸다. 그게 지양이에요. 그러면 지양이 아니고 구원된 사람은 복음은 복음대로 듣고 춤추러 다니고. 그 춤추는 기쁨보다 복음의 기쁨이 더 크니까 주께서는 춤추는 건강을 허락해주신 거죠.

그걸 더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범용 컴퓨터, 옛날 컴퓨터는 여기에 input, 입력하고 +프로그램을 집어넣으면 여기에 출력이 생기는 그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라면 인공지능은 입력+출력을 집어넣으면 여기서 프로그램이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인공지능과 일반 컴퓨터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밀가루에다 레시피를 집어넣으면 빵이 나오는 것은 옛날 컴퓨터라면 지금 컴퓨터는 밀가루하고 빵 집어넣으면 여기서 레시피가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공지능에다 집어넣어버리면 우리가 구원받았다, 가 출력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나와요. 예수님이 튀어나와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춤추러 다니든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내가 벗고 다니든 춤추러 다니든 뭘 하든 간에 빵을 두 개 먹든 한 개 먹든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인 거예요.

기존 교회가 구원을 하는 게 아니고 자꾸 우리 인간보고 자꾸 닦달내는 거예요, 지양하라고. 너 인간을 바꾸라고 개조하라고. 그건 도 닦는 거거든요. 도 닦다보니까 갈수록 이게 위선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아, 가증스러운...... 그런 식의 구원은 이미 성경에 선배들이 있어요.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네 속이 더 더럽다고 하는 것. 네 나오는 속이 더 더럽다는 거예요. 들어가는 빵보다 속이 더 더럽다고. 빵보다 끄윽하는 트림이 더 더러운 것처럼.

그래서 아브라함의 양떼가 늘고 소떼가 늘어난 것은 맞아요. 그게 복 받은 것 맞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은혜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점차 신약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런 식으로 핵심부위에 도달한 게 아니다. 그럼 구약에 어떤 요소가 최종 어떤 인격과 결부될 최종 기준이냐?

사도행전 8장 3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게 빌립의 이야기인데요. 어떤 에디오피아 내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병거타고 돌아갔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사야 글을 봤던 모양이죠. 이사야의 글을 보고 글을 읽는데 이 내시가 정말 참 구원받으려고 하니까 이런 지혜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사야 글을 읽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사야가 글로 되어 있잖아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글로 되어 있으니까. 국가의 행정관리는 엘리트입니다. 문자 해독이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우리 한국의 엘리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검사들이잖아요, 검사들.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이에요. 글을 보고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깨닫게 해줘야 되지 내 실력으로서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무슨 글을 읽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 글을 읽었어요. 이사야 전체에서 어느 부분이 그렇게 막히던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사야 전체 중에서 어느 부분이 막혔던가. 막힌 부분이 여기 32절에 나옵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이 선지자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이 선지자는 누구냐 (34절,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절에 보면,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이 빌립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이 빌립이. 성령 받은 사람의 성경해석은 이렇게 한다는 표준을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해석은 바로 목숨을 빼앗겼던 사건, 십자가 사건부터 해서 전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해석 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해석이고 그 외의 다른 해석은 악령 받은 사람이 하는 해석입니다. 어느 해석이 좋으냐 고르지 마세요. 그것은 지양입니다. 성령께서 오게 되면 성경해석을 십자가로 다 연계시켜버려요, 십자가로.

그런데 그 십자가로 연계시킨 해석은 누구한테 적용되는가? 구원받기로 된 사람은 이미 낌새가 달라요. 인간이 글을 다 알면서도 이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다고 그걸 갈급해하고 “이 사람 누구야? 이 세상에 의롭게 오셔가지고 죽음을 당한 그 분이 누구야?” 이렇게 묻는다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은 이미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꽂히고 있는 거예요. 꽂혀버린 거예요. 질문 자체가 이미 그 안에 답변을 갖고 있는 질문을 한 겁니다.

교회 나와서 “내 병은 어떻게 고칩니까?” 그런 질문 하는 게 아니고 교회 나와서 가정문제가지고 “어떻게 원만한 가정이 됩니까?” 이런 문제를 묻는 게 아니고 “억울하게 죽었던 이 분 누구냐?” 라고 묻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됩니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그것은 성령 받은 자의 질문이 아니에요.

이것이 참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쓰겠습니다. 나 아닌 타인. 내가 알고 있던 자가 아닌 타인. 내가 알고 있던 자가 아닌 타인. 그분과의 만남을, 빌립과 내시가 그 만나는 대화 가운데서 너 아니고 나 아닌 다른 타인을 언급하고 있어요. 이게 성도의 교류 아닙니까?

이 빵 어디서 사왔어요? 지금 이런 질문이 중요한 질문이 아니고. 당신이 한 거 아니고 내가 한 게 아닌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했고 이렇게 부부가 되게 했고 우리 인생을 지금까지 이렇게 이끌어오셨습니까?’ 하는 그 이유. 부부가 원만 안할래야 원만 안할 수 없어요. 오은영 박사가 와도 소용없어요, 이거는.

그러면 일반 부부, 성령 없는 지옥 가는 부부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너는 왜 내가 아는 네가 아니야?” 이것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타인이 내게 필요한, 내가 원하는, 내가 발전하는데 지양이 되는, 지양하는 데에 필요한 타인이 되기 위해서는 너는 나에게 이 정도는 해줘야지, 라고 하는 거예요.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런데 처음엔 그렇게 하다가 지금은 네가 변했어. 달라졌어.” 그럼 상대방은 뭐라고 하느냐? “사랑은 변하는 거야.” 자식 놓고 달라졌다든지 이런 거죠. 그럼 상대방이 “너도 만만치 않거든. 너는 지금 너 할 일 다 한다고 해서 나한테 지금 큰 소리치고 닦달내는 거야?”

이야기가 뭐 요정도만 해도 그냥 5분 내에 끝날 문제인데 그다음부터 이제 더 성질나면 거기서 나오지 말아야 될 대화가 나와요. 너 하는 행세 보니까 너희 아버지 닮았다. 드디어 이제 시가집 친정집 물고 뜯고 하면 그건 끝난 거예요. 그럼 2개월 냉각기간 거쳐야 돼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거든요. 내 과거까지 들추어내가지고. “네가 25년 전에...” 이렇게 나오면 벌써 골치 아픈 거예요. 25년 나오면 아주 골치 아픈 거예요. “그것은 벌써 해결된 문제가 아니냐?” 이렇게 또 나오게 되죠. “다 그거 지나간 거야.” 그럼 또 상대방에게서 노래가사가 나오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 또 이렇게 되고.

그러니까 이 둘 다 서로가 나를 위한 타인으로서 타인이 존재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자기를 우상시 하는 거죠. 나를 위한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자식이 부모한테 그러면 되나?”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전부다. 너, 나 말고 다른 타인.

베드로후서 2장 봅시다. 롯에 있어서 롯과 롯의 아내는 부부죠. 부부니까 아내가 될 거 아닙니까. 이 부부가 헤어졌어요. 헤어졌다고요. 누가 헤어지게 했습니까? 천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절대로 헤어지지 않았어요. 천사라는 예상 못한 다른 타인이 이 가정에 개입해서 아내와 롯이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렇게 되어있죠, 7절에. 롯의 아내가 음란했습니까? 무법했어요? 아니죠. 롯의 아내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제3의 자기 고유의 영역을 따로 챙기고 있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남편 롯의 고통에 아내는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이고. “이왕 사는 거 당신 제발 남들한테 욕 안 얻어먹고 살 수 없나?” 이런 식으로. “아이, 나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왜 그렇게 오지랖을 떨고 있어? 그냥 조용하게 가자. 조용한 게 안 낫냐? 낫지. 온 데 간섭하지 말고. 남이야 무법을 하든 음란을 하든 우리 가정만 깨끗하면 되잖아. 신경 쓰지 말고.”

그건 롯의 아내 이야기고 롯은 그랬어요? 롯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여기 본문에 보면 롯은 안 그랬다 했죠. 어땠습니까? “고통하는 의로운 롯”이라 했죠.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언약과 체인되어 있어요. 언약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에게 천사가 가도록 한 거예요.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천사가 일부러 롯의 가정을 찾아간 겁니다. 그러면 롯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생각지도 못한, 우리 가정이 아니고 제3의 인물이죠. 어떤 타인인 인물이란 말이죠.

그래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구원이란 내 속에 있는 타자 또는 타인이 아닌 예상 못한, 그 예상을 뛰어넘는 타인의 방문입니다. 타인의 방문, 구원이란. 타인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돼요. 구원이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가 찾아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한 성령이 아니고 다른 성령이 찾아오는 것.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타인은 나와 더불어서 이게 자아가 돼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 혼자 있다고 자아가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타인과 더불어서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까 안양강의 모임에서 한 예를 들었는데 같은 예를 두 번 들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둘 다 다 보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가 식상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같은 예를 뭐 욕 얻어먹더라도 들어야 되겠어요.

어떤 17~18세 되는 소녀가 보살한테 찾아갔어요. 무슨 보살이냐면 물어보살, 서장훈한테 찾아갔어요. 아버지가 자꾸 꿈에 나타난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래서 서장훈이 놀린다고 순간적으로 자기가 아버지 역할을 해가지고 그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아버지다.” 앉아서 그렇게 하니까 소녀가 막 우는 거예요. “아버지 보고 싶어요.”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마자 서장훈이 “정신 차려! 사기꾼한테 당하지 말고 정신 차려.” 아버지가 택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 소녀의 자아상에는 소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공유한 기억들이 있어요. 그게 현재의 자아를 이루는 거예요. 부부가 그렇게 싸우다가도 남편 죽고 나면 아내도 곧장 따라죽는 이유가 뭐 지남철이 당겨서 그런 게 아니고 그 타인의 자리가 부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부재가 돼요. 남편하고 같이 살다가 남편이 죽게 되면 이 자리가 텅 빈 자리에요. 견디기 힘든 자리란 말이죠, 견디기 힘든 자리. 엄마 있고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면 그 자식들이 뭐라고 합니까? “엄마, 내가 아버지 역할 할 테니까 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자식만 믿으이소.” 그걸 믿는 엄마도 없겠지만...... 싸우기만 안 해도 괜찮아요.

이처럼 인간의 자아 속에는 기억들로 자아가 형성되는데 그 자아가 내가 원했던 인간, 내가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만 했던 타인들이 여기 우글거리고 있다고요. 그거 하나 잃어버리면 굉장히 가슴 아파요. 예를 들면 이런 사람, 강수연. 아십니까, 강수연? 여러분, 최진실 죽었을 때 국민들이 얼마나 앓았어요. 최진실 자살했죠. 최진실 죽었을 때에. 온 국민의 스타였잖아요, 온 국민의.

만약에 손흥민이 아프다 해보세요. 우리나라 20대 전부다 괴로워할 거예요. 손흥민이 아프다 하면. 지금 누가 골 챔피언 되느냐 마느냐 하는데 아파보세요. 안되잖아요. 특히 북한의 김정은. 북한의 아줌마들한테 아이돌이잖아요. 우상이잖아요. 북한은 김정은의 은혜로 사는 나라에요. 일종의 신천지거든요. 김정은이 이만희에요. 종교단체에요. 종교단체는 대화가 안돼요. 종교단체는 대화가 안 되게 되어있어요. 국가가 아니고 종교단체라니까요, 이거는. 문선명하고 똑같은 건데 무슨 대화를 해요.

사랑이 이렇게 아플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네. 사랑은 좋은 건데 좋은 건 맞지만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할 거예요?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뭐 사랑을 해봐야 알지. 사랑해 본적도 없는 사람한테는 이거 해당되지도 않는 말인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지시를 받았던 자식은요? 자식을 바쳐라. 그것도 사랑하는 자식을 바쳐라. 무슨 수로 감당을 할 거예요?

이렇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어느 정도의 기쁨인지 인간은 미리 예측이 안돼요. 예측하라고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 잃어버리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해체입니다. 이래도 복음의 기쁨은 더 커졌지, 그렇지? 라고 하면서 밑에 밑둥치를 빼버려요.

남들 보기에는 “하나님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이럴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 받았잖아요. 성령 받은 대가가 목숨 빼앗긴 거죠. 그렇잖아요. 성령 받은 대가가 목숨 빼앗기는 거라고요. 그것도 그냥 빼앗겼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죠. 이게 바로 외양간의 소가 없어지는 상황인데 구원의 기쁨은 그걸 월등하게 능가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세상살이하면서 온갖 시름과 걱정 다 들고 와요. 그런데 복음만 딱 전해버리면, 쉿! 마치 폭설이 내린 것처럼 그런 문제는 다 시시하고 시답잖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 우리가 예민하게 굴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이제 늘 반복돼요. 그래놓고 간지 두 시간도 안 돼서 또 세상에 푹 젖어 삽니다. 다시 복음 들어버리면 아이고, 이거 문젯거리도 아닌 걸 이렇게 했네.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직업과 나이, 성격, 인물, 건강상태, 재산 그건 복음의 기쁨과 비교할 건덕지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악마와 같이 내 것이 해체되기 싫어하는 거예요. 거기에 인생의 모든 걸 걸고 살아가는 겁니다. 복음을 기뻐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기뻐하는 방향성이 이미 정해진 이상은 복음은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반대쪽으로 방향이 안 바뀌어요. 벡터가 다르다. 수학 용어로 물리학 용어로 벡터, 화살표 방향이 다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서장훈이 물었어요. “어이, 아가씨. 아가씨는 도대체 잠만 자면 아빠가 나타나는데...” 그래서 아가씨가 점쟁이한테 가니까 지금 아버지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니까 돈 들여서 굿하면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서장훈이 화가 나가지고 “아가씨, 잠을 하루에 몇 시간 잡니까?” 11시간 잔대요. “잠 줄이세요. 그럼 아버지 나타나는 것도 줄 겁니다.” 너무 많이 잤어. 아이가 통통해. 잠을 많이 자서 부었는지.

우리가 세속의 잠을 너무 오래 많이 자요. 그러니까 시시하고 사소한 일이 너무 많이 걱정 근심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구원 아니고 내가 지양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했던 사람들을 내게 필요한 타인으로서 내 자아 속에다가 전부다 심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그것들이 늘 배반하거든요. 왜? 배반할 수밖에. 자기는 자기 인생 따로 있으니까 내 말 들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늘 배신하죠. 철석같이 믿었는데 내 뒤에서 이렇게 칼을 꽂냐? 주의 뜻은 뭐냐. 그것도 한 번 꽂힐 땐 아프지만 여러 번 꽂혀봐라. 별로 아프지도 않아. 그것도 시시해. 그게 주의 해결책이에요.

소돔과 고모라에 다른 사람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에 주민들 중에서 롯밖에 없습니까? 다른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죠. 선악적인 함량을 따져보겠습니다. 죄는 그 죄의 무게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죠. 선악체계에서. 눈 먼 천사가 저울질하는 것, 법원의 상징이잖아요. 옳고 그름은 사람의 안목을 보지 않고 오직 징벌의 균형만 맞춘다는 그 의미거든요. 그들이 하늘에서 무엇을 받았습니까? 롯 빼고 하늘에서 그들이 뭘 받았어요? 하늘에서 유황불 내려왔죠. 도대체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기에...... 남녀노소에요, 노소. 거기 두 살짜리도 있어요. 두 살짜리가 음란하면 얼마나 음란했겠어요?

무법과 음란의 의미는 뭐냐 하면 노아도 마찬가지에요. 노아가 방주 탈 때 그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잖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을 만큼 그렇게 중한 벌이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벌을 내릴 때 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죄는 인간들이 생각한 타인 말고 새로운 타인이 등장해서 이 죄와 벌을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린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내가 예상 못했던 타인의 등장이 기쁜 소식이란 말이죠.

그럼 마지막 때에 우리의 타인은 어떻습니까? 흉한 얼굴을 하고 채찍에 맞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채로 이 땅에서 속죄 제물로 죽었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할 때 아이고, 착한 사람 안됐다. 지금 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게 절대기준이에요.

우리가 몰랐던, 말을 달리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레벨의 수준의 죄와 벌은 이미 그것은 옛 부대에 관한 겁니다. 그것은 따져볼 것도 없이 그것은 잊어주세요. 내가 나쁜 짓하기 때문에 벌 받는다, 이러면 함량을 높여버리는 거예요. 선한 함량을. 나쁜 짓했으니까 고아원 방문한다든지 선한 일하게 되면 갑자기 마음이 편해져서 이만큼 착했으니까 이제 나쁜 짓은 묻지 않겠지. 지금 이런 기준이 근본적으로 내가 해체되지 않으려고 하는 저 악한 천사, 지옥 가는 악한 천사들이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동질의 사고방식이에요, 이게.

지금 노아 이야기했죠. 6절에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했고 7절에 롯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4절에서 누구 이야기합니까? 오늘 본문 4절에서는 범죄한 천사에 대한 이야기했죠. 이 문제가 어려운 거예요. 인간과 인간을 비교하는 게 아니에요. 천사와 인간이 어떤 점에서 연속성을 가지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묶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으로서 지옥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말았어요.

더 쉽게 말해서 누가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지옥에 가는 사람을 데려오는 식으로 구원이 된다 이 말입니다.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까. 몽땅 다 마귀 생각인데 롯도 마찬가지이고 노아도 마찬가진데 여기서 낯선 타자가 등장하죠, 낯선 타인.

노아 같으면 난데없이 방주 만들기. 롯 같으면 천사가 방문하기. 방문해서 롯보고 일방적으로 이렇게 합니다. “이 무법하고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너는 고통했다.”라는 평가를 일방적으로 내려버려요. 롯은 내가 그만큼 고통스러웠나? 논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돈이 없어 고통스럽지. 오지랖 떨어서 남 무법한 것 때문에 고통스럽고 그런 건 없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이 점이 참 어려운 점이에요. 정말 어려운 점이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필히 성령께서 고난을 주죠. 여러분 지금 예수님 복음으로 고난 받습니까? 프로야구 보면서 고난 받아요? 아, 또 졌어. 삼성 또 졌어. 이게 고난입니까? 손흥민이 한 골 넣어야 되는데. 이게 고난입니까? 북한에 코로나 걸린 건 고난이 아니고 아주 신이 났지. 이게 고난이에요?

고난이라는 정의는 일방적으로 낯선, 예상 못한 타자가 우리의 삶 자체를 고난으로 이미 규정을 해버렸어요.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스테이크 써는데 이게 잘 안 썰리는 것도 주님이 주신 고난이에요. 왜 이리 칼이 안 들지?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누가복음에 세례 요한 나오죠. 여러분들이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 이야기부터 언급하지 않아요. 그렇죠? 누가복음. 확인해보면 되죠. 누가복음 1장 5절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누구 이야기합니까? 예수님 이야기 안합니다. 세례 요한 이야기해요, 세례 요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성령의 예언대로 애기 못 낳는 부모한테서 아기로서 태어나거든요.

누가복음에서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세례 요한이 어떤 타자를 이끌어내는 선지자라는 겁니다. 이걸 도선사라 해요.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데 조그마한 배가 큰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사람을 도선사라 해요. 도선사 월급 많아요. 재주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도선사거든요.

이 말은 구원받는 자는 항상 낯선 타자를 이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그것이 성령께서 주님과 자기 백성을 주선하는 이유라는 겁니다. 성도가 뭐냐? 세상이 모르는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는 낯선 타자를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거예요. 일종에 주님 오시는 길을 미리 와서 물렀거라, 하는 식으로 그렇게 먼저 선포하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리에 딱 안착하니까 그다음부터 세례 요한은 역사상에서 사라져버려요. 그것도 비참하게 사라져버리죠. 그럴 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고난과 동일한 동질선상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은 특징이 뭐냐? 예수님의 고난과 같은 고난을 공유하고 있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밥 먹고 살려고 고난 받는 게 아니에요. 그건 고생이고.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을 때 예수님이 나에게 성령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소개하도록 평생을 이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기대했던 고난이에요.

그 이끌림이 한 달 수입 2천만 원 될 수도 있고 그 이끌림이 할 일 없어 빈둥빈둥 누워가지고 그냥 야구나 보고 이럴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그 야구 보는 것조차 주께서 주신 일이라고 믿어지는 그것이 그런 야구 좋아하는 야구광 세례 요한. 축구 좋아하는 세례 요한. 모든 성도는 세례 요한 같은 존재에요. 왜? 낯선 타자, 세상이 모르는 외부인을 소개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도의 고난 받음과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참 쉽죠. 어떤 점에서 쉬우냐 하면 낯선 타자가 오게 되면 홀로 오는 게 아니에요. 어떤 변화를 몰고 옵니다. 새로운 세계, new 세계를 끌고 와요.

방금 지면에 착지한 공수부대들 뒤에 뭐가 있습니까? 큼직한 뭐가 있어요? 낙하산이 아직도 안 빼가지고 그대로 있죠. 주님 오실 때 낙하산처럼 낯선 세계가 있어요. 그 낯선 세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필요한 도구 같은 것. 그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오셨잖아요. 성령이 낙하산처럼 펼쳐가지고 왔고 그 낙하산을 이제 우리 성도에게 짊어지운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세례 요한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루 세끼를 먹고 아침에 뭘 먹고 살더라도 매사가 낯선 타인, 타자를 소개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걸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난.

이제 롯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이라는 이 신약적 규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롯이 맨날 세상 돌아다니면서 오지랖 떤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걸 신약에서는 뭐라고 규정합니까? 새로운 세계에 비해서 기존의 인간 세계가 얼마나 불법적이고 음란한지를 경계선상에서 롯을 그 시대에 꽂아 넣은 거예요. 지금 이 시대에는 여러분들을 꽂아 넣은 겁니다. 비록 베지밀이나 먹고 있지만. 주께서 꽂아 넣은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뭐라고 했습니까? 낙하산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낙하산, 성령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따라서 나보고 뭐라고 하지 마. 나보고 뭐라 하지 마.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타자, 타인이 나에게 찾아왔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내려가면서 사울아 사울아, 이름 부르면서 찾아오셨잖아요. 졸지에 자기는 해체됐죠. 왜? 눈이 가버렸으니까. y(유한)는 무한에 잠식당했어요. 눈이 갔죠. 거기서 비늘이 떨어지면서 새로운 사울이 되었죠. 이름도 사울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바울로 바뀌었잖아요. 그것이 성도됨의 일종의 표준처럼 그렇게 발생된 사건이에요.

자, 그다음에 베드로후서 보기 전에 마태복음 19장 보고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 30절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기 버린 자 나오죠. 해체입니다. 어느 인간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죠.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예수님 따라가려고 하다가 자기 아버지 돌아가셨잖아요. 그래서 제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따라가긴 따라가겠는데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아주 싸늘한 비정한 단어를 날렸죠.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너희 아버지 죽었어. 너희 아버지는 그냥 목숨 끊어진 정도가 아니고 죽은 자의 세계에 속한 존재니까 살아있지만 너희 아버지하고 똑같은 운명인 자한테 처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기존에 알고 있는 타자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세례 요한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형식의 인간성이 등장해서 그 인간성인 세례 요한이 결국은 누구를 만납니까? 둘 다 엄마 뱃속에서 이야기하던 그 세례 요한이 3장에 보면 드디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장면이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이에요. 세례 받는 장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의 배후에 해체되기 싫어하는 뭐가 있어요? 악한 천사에 의해서 인간과 결탁된, 그런 기존의 옛 부대에 속한 그러한 이 사회가 있고 이 세상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후서를 보게 되면 여기에 여러 번 나오는 게 멸망이고 12절 같은 경우에는 멸망, 훼방, 멸망을 당하며. 그 뒤에 계속 나오는 게 멸망 이야기에요. 심판 이야기, 멸망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형제나 부모나” 이걸 이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차라리 버린 자마다 영생을 상속한다. 원래 자식을 버려버리면 상속이 없잖아요. “그런 세상적인 상속 말고 내가 영생 상속할게.” 하고 나서시는 이유는 나 예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네가 아는 그러한 이 세상의 안목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거나 해석할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버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죠. 예수님 말씀은 아무도 못 지켜요. 못 지키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비로소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알고 가능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다’를 전제로 하고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가 돼요. 단, 전제를 버리면 안 됩니다. 이게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쉽게 압축을 하면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무능하다. 지금이라도 주께서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당연한 조치다. 내가 뭘 할 줄 안다고. 이게 밑에 깔려야 돼요. 기본으로.

왜냐하면 나의 애씀은 무엇을 가린다 했어요? 나의 애씀은 무엇을 가린다? 주님의 애씀을 모독하고 가리는 짓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럼 내가 애쓰지도 않고 주님도 애쓰지 않으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애쓰지 않음으로써 주님의 애씀을 유도할 수 있어요, 없어요? 내가 뭔데 주님을 유도해요?

다만 내가 애썼다, 내가 애쓰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생각한 나의 전과 후죠. 나의 전과 후는 주께서 무가치하게 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전과 예수님의 후에요. 예수님의 전에는 어떤 인간도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주를 위해서 바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전(前). 그 후에는 역시 내 돈 한 푼도 주님께 바칠 생각이 없는 나를 주를 위해서 고난 받게 하는 주님의 능력. 바로 그런 식으로 낯선 타자, 주님을 소개하는 그것이 우리 성도에게 말씀으로 부여된 업무입니다.

자, 이제 베드로후서 보고 정리하겠습니다. 9절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벌써 제3의 자리 없죠. 일방적이죠. 천국 아니면 지옥, 지옥 아니면 천국이지, 골라볼까 하는 나의 중립지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국에 속한 사람은 주께서 무조건 경건한 자, 그리고 그가 빠져나온 세상은 무조건 성도를 시험케 하는 더러운 세계로 규정을 해버려요. 규정을 그렇게 해버린다고요. 왜냐하면 새 부대이기 때문에. 주님이 생각했던 전(前)이거든요. 십자가 질 수밖에 없던 그 상황 속에 성도가 들어왔기 때문에 “성도 너도 지금 살아가는 이 환경이 내가 당했던 십자가 졌던 그 시대하고 똑같아, 이 인간아.” 하고 그렇게 규정을 해줘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다시 한번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이제는 제대로 알게 해주시고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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