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반박해 보자

아빠와 함께 2022. 6. 19. 08:19

서울의존강의20220616a 베드로후서 2장 9절(반박해보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2장 9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그렇게 되어있죠.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이 하신 조치가 있어요. 조치를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구성적 세계 체제. 이게 좀 어려우면 ‘세계’를 없애버리고 구성적 체제. 구성적 체제 또는 체계를 세상의 프레임(frame)으로 덮어씌운 겁니다. 이 세상의 프레임으로.

지구가 이렇게 있다면 지구를 철창 안에 가두어두는 것처럼. 동물원 철창 안에 고릴라 같은 것을 집어넣잖아요. 그럼 고릴라는 동물원 안에서 아주 자유롭습니다. 철창 안에서 자기 우리 안에서 너무너무 자유롭죠. 그런데 그 고릴라가 철창 안에 있으면 자유로운데 밖에 나가려면 철창을 만납니다.

그래서 ‘철창 안에서 자유로운 고릴라가 될래 아니면 철장 밖에 있는 인간이 될래?’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겠죠. 고릴라는 그 제한된 공간 안에 갇혀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때 인간들은 고릴라보고 ‘아이고, 이 어리석고 미련한 고릴라야. 넌 어쩌다 그렇게 잡혔냐?’ 라고 그렇게 측은해할 수가 있어요. ‘고릴라 네가 인간만큼 뛰어났다면 똑똑하다면 인간에게 사로잡혀서 그냥 인간이 주는 바나나 이런 거나 먹고 평생을 거기서 살다 늙어죽지는 않았을 텐데. 두뇌가 좀 크든지 안 그러면 스마트하든지 해서 네가 인간이 되었으면 참 좋았겠다.’ 하는 그런 생각도 들 수가 있어요.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는 그 고릴라를 보고 ‘엄마, 고릴라 너무 불쌍한 것 같아.’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너무 불쌍해, 고릴라가. 덩치는 인간보다 큰데 갇혀 사니까 너무 안됐어.’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 안목, 고릴라를 바라보는 인간의 안목이나 우리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안목이나 만만치 않습니다.

9절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갑자기 고릴라 튀어나왔죠, 여기에. 심판 날까지 어떻게 하신다? 형벌 아래 둔다는 말은 저주 아래 가두어둔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여러분들이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체제, 이 체제가 이미 확정 났다는 겁니다. 이 체제가. 지구를 둘러싼 이 체제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확정적이에요.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굳어졌다’. 이미 굳어진 거예요. 냉장고 세팅 다 된 것처럼. 이미 굳어진 거예요. 뭐가? 이 지구를 가둬두는 체제가 이미 굳어진 겁니다.

불신자한테는 이 체제가 보이지를 않아요. 확정적, 확정 나버린 그 프레임, 틀, 원리원칙, 주님께서 세우신 결정적이고 이미 종결시킨 원리원칙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이 체제가 철조망이 쇠창살이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냥 지구만 덜렁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프레임이 보이지 않는 이게 불신자죠.

베드로후서 2장 끝까지 가게 되면 불신자의 특징을 뭐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 하면 미련한 자에요, 미련한 자. 확정된 것, 결정난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뭐 손에 잡히는 건 없고 갈 때까지 가보자. 갈 때까지 가볼까~ 말 타고 가자. 강남 스타일에서. 갈 때까지 가보자. 모든 인류의 미래는 이미 결정 났다고 함부로 감히 말할 사람은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없지 아니하냐. 그런 식으로 세상은 그렇게 외치고 있고 불신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게 미련한 자죠.

미련한 자의 증거가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 나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잠언서 26장 11절에 보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는 미련한 자가 없어요. 없는데 잠언서 26장 11절에는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거듭 행한다는 뜻은 갇혀있다. 자기가 활동하는 그 구역, 나와바리, 구역이 제한적이에요. 놀던 가락이 뻔해요.

그래서 베드로후서 2장 9절을 다시 보게 되면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형벌 아래 둔 것은 가두어진 거죠.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럼 심판 날까지 형벌 아래 가두어졌으니까 10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뭣도 모르고 마음껏 자유를 행사하고 있는 거예요. 앞뒤가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뭐를 모른다 했습니까? 체제. 하나님이 확정지은 그 프레임, 틀 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알아야 될 것은 안 알고 엉뚱한 것만 알고 있다니까요. 이집트하고 축구 몇 대 몇이고 그런 거. 그거 뭐 4대1로 이긴 거.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고 그런 거예요. 이집트랑 축구할 때 손흥민이 한 골도 못 넣은 거. 굳이 그걸...... 한 골 넣고 안 넣고 그건 큰 문제가 아니거든요.

왜 사람들이 주님이 확정지은 틀에 대해 관심이 없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키우기 위한 체계, 틀을 자기가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도소 철장 안에 구치소 안에 있으면서 거기서 자기 집 짓고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 교도소 철창 안에 있으면서 거기서 자기를 보호할 구역을 따로 또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뭘 만들어내냐’가 아니라 ‘주께서 뭐로 모든 체제를 확정지었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 여러분 와 닿죠. 그러면 주께서 만드신 체제가 제일 먼저 적용되는 대상이 2장 4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참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객관식으로 해볼게요. 다음 중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①번-호랭이 나온다. 호랑이도 아니에요. 호랭이. 어흥. 호랭이 나온다. ②번-곶감 안 준다. 야, 이거 무서운 이야기에요. 곶감 안 준다. ③번-용돈 없다. 젊은 자식들한테 이제부터 용돈 너 알아서 써라. 다음 달에 나이 서른 되는데 서른 되거든 독립해라. 얼마나 당사자들은 무섭겠어요. 엄마, 대출 좀 받을까? 대출 7프로다. 올라가지고 은행 대출 7프로다. 영끌해도 영혼까지 다 끌어 모아도 너 안 돼.

맛있는 거 안준다. 호랭이 나와서 너 잡아먹는다. 다 무서운 이야기죠. 용돈 없다. 독립해라. 나가라. 나가버려. 이것도 무서운 이야기죠. ④번이 뭐냐 하면, 용서 없다. 몇 번입니까? 용서 없다. 같은 말로 속죄 없다. 속죄 안 해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속죄 없다, 용서 안 해준다는 거예요.

판사로부터, 행한대로 처벌할 거야. 자비는 없다. 네 행한대로 처벌할 거야. 이게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에 보면 행함책에 대해서는 그 특징이 뭐냐. 행함책 명단에 기록된 사람의 특징은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는 용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속죄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그럼 평생 그들은 도대체 뭐하고 살았어요? 재벌이 되고 뭐 위대한 대통령이 되고 어떻게 많은 재산을 가져도 그딴 것이 그런 권력과 재산이 내 죄를 용서해줍니까?

부자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거죠. 뭐 못 들어가죠. 어렵다 정도가 아니고 아예 못 들어가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 못하는 것과 똑같이 부자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럼 부자가 살 빼가지고 돈을 남한테 다 주고 가난한 사람 되면 낙타가 홀~쭉한 낙타가 돼서 바늘구멍 통과될 수 있습니까? 그 말은 어떤 경우라도, 이 김포공항을 옮기든지 말든지,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프레임 자체, 하나님이 만든 체계 자체가 속죄될 자와 속죄 안 될 자와 관련된 체계이기 때문에. 속죄가 되는 체제를 주께서 이 세상에 프레임으로 틀로서 이미 설치를 해놨어요. 인간이 사는 세상에다 지구보다 더 큰 구조로 체제를 만들어 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 돈 자랑, 주먹 자랑, 사람 자랑, 인물 자랑 그런 거 안 해요.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그런 말 있죠. 그 전라도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그런 말 있어요. 목포 그런 곳에 일제시대 때 돈 좀 있으니까 깡패들이 많이 있었죠. 주먹 휘두르면서 휙휙 이 소리는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오직 자기를 지키기 위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 체제의 그 나뭇가지들, 재료들 그거 끌어 모으는 데에 평생을 다 바치잖아요. 끌어 모아도 좀 새 거 아니고 순 고물들 이런 거 끌어 모으죠. 마치 새가 나뭇가지 해가지고 새끼 보호한다고 보금자리 꾸미는 것처럼 인간도 나름대로 꾸며요. 그 체계와 구성을 본인을 위해서 본인한테 향하도록 나 하나 안전하기 위해서 그 작업에 몰두하고 거기다가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큰 체제, 지금보다 더 큰 체제. 그것도 인간은 그냥 시도할 뿐이죠. 현재진형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체제는 확정 났고 끝나버렸어요. 이미 체제가 완성이 되어버렸다 이 말이죠. 누구 하나 봐주세요. 우리 아들은 복음 안 믿어도 어떻게 천국으로 빠질 수 없습니까? 제가 빽 써서 안 됩니까? 이러한 다른 경우의 수는 없습니다.

여기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 말은 여기서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넣는 그 체제가 뭐냐? 그 체제에 대해서 2장 4절에 나온다는 거예요. 그 체제가 뭡니까? ‘자비는 없다. 일체 속죄는 없다.’라는 체제. 그래서 불신자에게는 속죄와 자비와 은혜가 없는 체제를 주님께서 이미 설치해놨습니다. 확정지어놨습니다.

그리고 4절 끝에 보면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한 마디 한 마디, ‘심판 때까지’ ‘지킨다’ 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무리 지혜가 있고 권력이 있고 못하는 것이 없는 악한 천사라도...... 여러분 악한 천사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잖아요. 인간을 꼬시기까지 했으니까. 그 악한 천사라도 그 체제에서 탈출이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 악한 천사가 가능하지 않죠. 악한 천사라도 가능하지 않아요, 그게. 그게 뭐냐? 체제이고 그 체제는 변동이 있다, 없다? 이미 변동이 없어요. 확정되었어요. 이미 정답 나와버린 거예요. 정답이 나온 거예요.

악한 천사를 잡아가두었던 그 체제가 그대로 이 지구상의 인간들에게 적용되어버리면 똑같이 인간들에게 가동되어버리면 이 세상에서 속죄의 대상이 아닌 자에게는 악한 천사에게 적용시켰던 그 체제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적용되는 체제의 본질, 핵심은 뭐라 했습니까? 용서치 아니하시고. 용서치 아니하시는 것, ④번이 제일 무서운 거예요.

늦은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①호랭이 나온다. ②곶감 안 준다. ③용돈 없다. 나가라. ④용서 없다. 몇 번입니까? 너에게 줄 자비는 없다. 에서가 자기 아버지보고 “아버지, 저에게 올 복은 없습니까?” “없다.” “진짜 없습니까?”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네 동생한테 줄 거지, 너한테 줄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 이 체제, 용서가 없다는 체제가 있으면 어떤 체제가 또 신자한테 가동되겠죠. 용서가 없다는 체제의 반대말을 하면 되죠. 뭐겠습니까, 그 체제는? 용서 없는 이건 불신자한테 하는 거고 신자한테는 뭡니까? ‘용서가 있다’가 되겠죠. 그럼 이 문제, ‘다음 중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이건 불신자한테 해당되는 거고

신자한테는, 다음 중 가장 즐거운 소식은? 또는 기쁜 소식은? 아무리 해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소식은 무엇인가? 분노가 나지 않는 소식은? ①번-호랭이 나오다가 죽었다. ②번-곶감 한 포대기 준다. ③번-용돈 무한대로 줄게. ④번-용서 있다. 몇 번입니까? ‘용서 있다’죠. 용서 있다. 결국 이것은 용서받았거든 모든 걸 상실해도 너는 분노하지 마라. 너는 즐거워할 수 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것은 이미 확정된 체제다. 확정 난 결론이다. 이건 변동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2장 4절과 2장 9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했잖아요. 이 천사가 영물(靈物)이란 말이죠. 천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천사죠. 천사인데 범죄한 천사죠. 자, 천사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의 일 진행이 이렇게 돼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가동시킨,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을 가두어두었던 데에 가동시킨 체제가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이야기를 베드로후서 2장 1절부터 22절까지 계속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시험에 들고 불신자들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하는 것은 악한 천사에게 적용시켰던 그 체제가 체제답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하기 싫더라도 육체에 따라, 하기 싫더라도 그들은 육체에 따라 살아야 돼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월요일에 퇴근하고 소주 먹고 화요일에 퇴근해서 맥주 먹고 수요일에 퇴근해서 빼갈 먹고 목요일에 퇴근해서 위스키 먹고 금요일에 퇴근해서 또 소주 먹고. 토요일은 하루 종일 막걸리 먹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있겠죠? 그 사람에게 너 생활패턴 바꿔라. 생활패턴 바꾸면 어떻게 바꾸겠어요? 월요일에 소주 먹던 걸 막걸리 먹고 화요일에 소주 먹고. 그럼 바꾼 겁니까? 안 바뀔 거예요. 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한테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육체의 쾌락 말고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럼 너 교회 나가라. 교회 나가죠. 주일에 교회 나가고 월요일은 교회 안 나가니까 월요일에 소주 먹고. 그다음에 맥주 먹고 수요일은 교회 가는 날이니까 교회 갔다 와서 빼갈 먹고. 다른 대안 없어요.

10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 하나하나가 그들이 이런 짓을 안 하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그러한 힘이 능력이 악한 천사를 가두어두는 그 체제 안에서는 항상 진행되고 있다는 거예요. 항상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보고 “그거 나쁜 짓이야. 그 짓 하지 마.” 라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그 인간을 둘러싼 체제 자체가 악마를 잡아두었던 체제가 그대로 인간에게 넘쳐났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실은 굉장히 궁금해야 되고 정말 궁금해야 될 내용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말을 안 하고 있습니다. 말을 아끼는 게 아니에요. 뭔가 몰라요. 어떤 걸 모르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악마를 잡아 가두는 내용들입니다. 영적 내용이에요. 그래서 오늘 2장 4절에 범죄한 천사 나오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뭘 궁금해야 되느냐 하면 이 범죄한 천사한테 적용한 그 원리원칙을 9절에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둔다는데 여기에 불의한 자는 천사가 아니에요. 사람이잖아요. 어떻게 천사한테 적용되는 그 원칙이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 가능하냐?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간을 화나게 하는 욕을 타인에게 한다. 그럼 그 욕을 듣는 사람은 화가 나겠죠. 그런데 인간에게 한 그 욕을 지나가는 강가의 갈대보고 했다. 그러자 갈대들은 기분 나빠서 시들시들 시들더니 그 다음날 다 죽었다. 이게 신기한 일입니까, 아닙니까? 굉장히 신기하죠. 어? 사람 차원에게 적용되던 것이 어떻게 갈대라는 식물체에게도 적용이 되네. 이게 신기한 거예요.

어린 아기 임신했을 때 임신 7주부터인가 벌써 인간의 시냅스 두뇌 세포가 증가하면서 안정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것이 태교에 도움 된다. 처녀 때 클래식이라면 도망가던 그런 사람도 애 임신하고 난 뒤에는 갑자기 뭐 클래식 듣고 드뷔시 노래나 아주 장엄한 바흐 음악을 인간에게 도움 되라고 듣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인간에게 도움 되는 클래식 음악을 장미를 재배하는 화원에서 틀어주면 어떤 효과가 날까요? 장미가 그냥 장미다. 아니다. 장미가 방긋방긋 웃는다. 어떻게 될까요? 옛날에 제가 시골 교회에 있을 때 그 근처 화원들이 많았어요. 화원 주인들이 하는 말이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게 되면 이게 잘 자란다는 거예요. 개 키울 때도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 감정적으로 개가 온순해지고 하드 락 틀어주면 성질 아주 더럽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근거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면 그런 것처럼 인간에게 적용되는 걸 갈대에게 하게 되면 똑같은 결과 나오는 것이 참 신기하죠. 그러면 차원이 높은 영적 차원의 악마한테 한 그것이 과연 인간에게도 적용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져봐야 돼요. 인간에게 적용되느냐. 왜 그걸 따져야 되느냐 하면 ‘주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실효적이냐?’ 하는 이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냥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주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실효적이라는 말을 아시겠죠? 독도는 실효적으로 현재 한국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실증적으로’ 그런 뜻이에요. 현실적으로 실효적으로 주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냐? 가만히 보면 적용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람 대 사람 관계에서는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성경말씀 이것이 하나의 책이잖아요. 책 중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은 성경책. 그 말은 뭐냐? 그냥 책이에요. 두 번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런 거 있잖아요, 햄릿 같은 거. 그게 많이 팔렸다는 거예요. 그럼 이 성경책은 그냥 책이죠.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그런 책이에요. 무슨 말씀이 실효적입니까? 만화책 보면서 만화책 이건 실제로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런 말 안 하죠? 그럼 만화책과 성경책이 다른 점이 뭔데요? 똑같은 것 아닙니까? 인간의 활자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성경을 많이 보세요.’ 하면 그걸 어떻게 듣느냐 하면 ‘성경을 많이 읽으세요. 많이 들으세요.’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 ‘잔소리 많이 들으세요.’ 잔소리의 특징이 뭐냐 하면 듣는 건 듣지만 행동 결정은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그럼 말씀이 나한테 실효적인 게 아니고 나한테 현실적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제공하는 것은 내 결심이지, 성경책이 아니라는 거예요. 말씀은 소용없는 거죠.

악마한테 말씀이 진짜 효과가 있는 것처럼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효과가 있느냐? 있다면 그 근거가 뭐냐? 이걸 한번 따져봅시다. 이 말씀이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되는가. 정답은 이거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인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생각하신 인간이 있죠. 이 세상 인구가 78억이라면 인간이 생각하는 78억 인간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인간이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비우기 위해서 쓰레기통을 산다고 생각해봅시다.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따로 비워내기 위해서 따로 또 쓰레기통을 산다면 둘 다 쓰레기인 것은 마찬가지죠, 둘 다. 둘 다 쓰레기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쓰레기라면 인간이 생각하는 인권 같은 고상한 걸 아무리 내세워도 그 대상 역시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은 바로 포유류라는 거예요, 포유류. 자식 놓을 때 젖을 먹이고 하는 소위 박쥐나 고래처럼 포유류의 일종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던가요? 누가 이야기합니까? 인간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연구를 해도 출발점이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자기 바깥으로 벗어나지를 못해요. 자기 바깥에서 인간을 보는 그런 안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신학 그리고 과학, 철학, 예술, 문학, 경제 뭐 이런 거거든요. 그런 것은 전부다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선지자가 외쳐도 안 듣는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그들에게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귀가 없어요, 뭐가 없어요? 귀는 쓰레기인데 뭐요. 그러니까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귀 있다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인간이 ‘나는 귀 있다’를 주께서는 인정을 안 해준다니까요. 주께서는 들을 귀가 있어야 귀라 인정해요, 들을 귀가 있어야.

공부를 많이 못한 촌의 할머니께서 뉴스를 보는데 경제 관련 용어들이 막 등장하고 금리를 0.75% 인상하는, 미국에서 그런 결정을 했다는 뉴스가 톱뉴스로 나왔을 때 할머니가 “야야, 그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볼륨 좀 높여봐라.” 할 때 그게 볼륨 높인다고 들립니까? 큰 소리한다고 그게 들리겠어요? 일타 강사 와서 강의 해봐야 알아듣는가. 못 알아듣잖아요. 전문 용어를 기본으로 알아야 되니까.

들을 귀 없는 인간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인간에게 들을 귀 없다는 말은 인간에게 달려있는 것은 못 들을 귀다. 못 들을 귀. 이런 용어 나도 처음 써봤는데, 듣지 못하는 귀. 듣지 못하는 귀의 특징은 인간에서부터 나와서 자기 인간 이익 위주로 생각하는 게 듣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이 분노가 이는 이유는 간단해요. 자기를 믿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믿습니다. 누구? 나. 왜 믿는데? 무조건. 무조건 나를 믿어요. 나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에 마감도 나에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나 밖으로 따로 떨어져나간 적이 없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규정할 때 말씀대로 만든 것이 인간이라 해요, 말씀대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선과 악을 아는 그 과일은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 있잖아요, 그 말씀이 인간과 결합이 되면 그 말씀대로 말씀을 위반해서 선악과 따먹게 되면 어떤 실효적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네가 정녕 죽으리라’가 나와요. 죽으리라.

그러니까 보세요. 말씀이 인간보다 먼저 있죠. 중간 자리에 인간이 있고 말씀에 두 가지 결론이 났습니다. 말씀이 인간과 실효적, 실제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첫째 현상과 둘째 현상의 서로 상반된 현상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는 ‘생명을 얻으리라’와 또 하나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이 ‘죽으리라’와 ‘생명을 얻으리라’로 봐서 인간이 어떻게 되느냐는 관심 없고 말씀이 말씀대로 실제적으로 인간보다 더 우선해서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된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매개체로 인간을 동원해서. 인간을 동원해서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일종의 시험 쥐에요, 시험 쥐. 실험실의 생쥐 같은 거. 자, 새로 개발한 이 약품이 어느 정도 센지 독성이 있는지 한번 실험해보겠습니다. 쥐 가져와. 하얀 쥐, 하얀 마우스 가져와. 거기다가 5mg을 한번 넣어보겠습니다. 어? 픽 죽어버렸어요. 아, 이거 너무 세구나. 이번에는 2mg하니까 살아있거든요. 5는 너무 불안전하고 2는 괜찮습니다. 그러면 그 옆에 있던 생쥐들이 파업을 하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시험 쥐는 그만한다! 하더라도 밤에는 하지마라! 화물연대처럼. 밤늦게는 운행 못 한다.

그게 돼요, 안 돼요? 어디 피조물 주제에 독자적인 독자 노선을 고집해. 도대체 독자 노선을 하게 된 그 배후에 뭐가 들었어? 보니까 인간은 껍데기였고요. 그 안에 인간은 영물이었어요, 영물. 2장 4절에 “범죄한 천사”를 그다음에 용서치 아니했죠. 이 말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한 천사, 악마죠, 용서받지 못할 천사와 인간이 결탁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용서가 없는 것은 당연한 거고 마땅한 거죠.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영물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이는 식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졌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건 곧 말씀의 구체화가 되죠, 말씀의 구체화. 제일 먼저 영적 문제가 현실 속에서 말씀이 구체화된 시범대상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도 한 예를 들게 되면 그들이 광야를 통과했잖아요. 광야를 통과하면서 그들은 애굽에서 기뻐했던 것을 교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교체해야 되느냐 하면 ‘양식과 물은 당연히 제공되겠지.’ 하면서 양식과 물이 있는 것은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양식도 끊어버리고 기본적인 물도 끊어버렸습니다. 바닥부터 기쁨의 대상을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거였죠.

물을 주는데 탱크채로 주는 게 아니고 양식을 줘도 저장하기 위해서 주는 게 아니라 하루 단위로 주는 거예요, 하루 단위로 양식을. 특히 만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데 영적 말씀의 역사 속에 구체화가 만나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매일의 만나. 하루치만 주는 거예요, 그냥. 하루치만.

그럼 그들은 애굽에서의 기쁨은 이제 잊어야 돼요. 하루치만 만나를 줬잖아요. 그럼 그들은 매일 신비로움과 기적의 반복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이틀 치를 살려준 기쁨이 아니고 오직 하루치만 그다음날도 하루치만 그다음날도 하루만 살려주시는 데에서 오는 그 기쁨. 그 기쁨이 나중에 우리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걸 약간 번역하면 우리에게 하루치만 주셔도 됩니다. 하루치만 주시고.

그러니까 주기도문할 때 ‘일주일치 주세요.’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만 주기도문할 거예요. 일주일치 다 벌어놨는데 뭐 하러 또 일용할 양식을 달라 하겠어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날 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날 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 하면 나는 나로 인하여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그것을 깨우치라는 겁니다. 나는 나보다 우선되는 그분 때문에 후차적으로 있지, 내가 우선적으로 나 잘되라고 하나님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광야를 통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인간의 창조는 말씀에 있다 했잖아요. 그 말씀이 어디에 나오느냐. 그 말씀이 나오는 데를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장 1절. 여러분 다 아시지만 다시 한번 1장 1절을 그런 생각을 가지고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제가 해설하면 태초에 나는 없었느니라.

태초에 나는 없었어요. 나는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말씀은 없을 때가 없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선재하는 겁니까? 어느 것이 큰 체제에요? 내 중심에서 나온 내 체제가 나를 지킵니까, 아니면 나 없을 때 만들어진 확정된 체제가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바로 예수님이 만들어놓은 그 확정된 체제, 이미 결정 난 종결된 체제, 그 종결된 체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안전빵으로 살아갑시다. 흔들리지 말고. 호들갑떨지 말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 안정성의 안정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이에요. 아무리 분주해도 변화되어도 끄떡없이 존재하고 이미 굳어져버린 체제. 그것은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용서할 수 없는 자에게는 용서가 가지 않는 체제.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뭐냐 하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 십자가 믿는 자에게는 용서. 십자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죄가 죄 그대로 있고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 죄인이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확정된 체제입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하나님께서 하셨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우리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일단 빠지세요. 우리는 거기에 끼어들지 마세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말씀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썽꾸러기 남편, 말썽꾸러기 자식 그거 누가 만들었어요? 말씀이 만든 거예요, 말씀이.

우리가 언제까지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따라 살아가는 존재인지, 아니면 용서의 프레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기에 따라서 주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그런 대상자인지 그걸 우리가 봐야 돼요. 주님의 용서 프레임 속에 있는 사람은 내가 이 용서 프레임을 수긍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수긍하셔서 그 수긍이 나에게 주입되는 방식으로 동의하게 만들어요. 주님이 하신 조치에 대해서 동의하게 만듭니다. 아, 이 일이 일어나야 용서의 실효성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기 2장 9절에 보면 그 말씀이 어려운데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시험이라는 말이 바로 프레임이에요. 불의한 자를 가두기 위한 그 체제에서 경건한 자는 거기서 따로 빼내주시는 겁니다. 특혜죠. 편애이고 특혜고 일방적인 혜택이고. 그래서 우리는 차별대우 받아서 구원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20616b 베드로후서 2장 9절(반박해보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육이라고 표현해요, 육. 인간이라는 게 거의 없어요. 인간이라면 그럴싸한 존재처럼 여기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냥 그 본질을 말씀은 바로 쳐버립니다. 너는 육이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6장에 보면 나와요.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도 곧 소모될 때가 있다. 소모당할, 소비될 그냥 육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후서 2장도 마찬가지죠. 18절에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

육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어떤 영이 오느냐에 따라 휘둘리게 되어 있는 것. 함부로 휘둘리게 되어 있는, 자체적으로 방어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 다루면 충분히 다루어지는 것, 그걸 육체로 보는 거예요. 악한 영이 오면 악한 영대로 휘둘리고 성령이 오면 성령으로 사용되어지는 그러한 매개체. 그게 육체입니다.

성령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12절에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13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자, 이것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처음에 인간은 악마와 결탁되기 이전에 그냥 처음에는 사람이었어요. 악마와 결탁해서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그냥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이었습니다. 아담. 아담의 특징은 영적이지 않아요. 그냥 육적도 아니에요. 육과 영의 관계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특징은 낙원을 즐기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악한 영이 들어오면서 인간은 육이 되면서 그들은 자기가 기대했던 그 낙원생활 하기를 그들은 인간은 욕망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종로에 낙원상가 말고요. 인사동에 낙원상가 말고. 그 낙원생활을 내가 하고 싶은데 왜 말리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자기의 본질이 악한 영과 결탁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그때는 낙원생활에 대한 염원, 희구, 희망, 열망 그런 것들을 자꾸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낙원생활은 현실적으로서는 성립이 안돼요. 하나님께서는 낙원에서 추방시켰으니까. 그러면 낙원생활을 그리면서 만들어낸 게 환상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주어지지 않지만 계속 꿈꾸고 있는 거예요. 이 환상에 인간의 육은 놀아납니다. 놀아나죠. 환상적인 삶을 위해서 마약도 하고 온갖 육적인 쾌락을 다 누리죠. 환상이에요.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을 그냥 무작정 탓하지 말고요.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고 여러분들이 반박을 한번 해보세요. “당신은 왜 술을 먹습니까?” 물으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술 먹으면 기분 좋으니까.”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고 “당신도 한번 잡숴봐요. 나는 술 먹으니까 기분이 좋은데 당신도 내가 먹는 술을 먹으면 기분 좋아질 것입니다.” 전도하는 거죠. 그리고 술 먹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술 먹으면 기분 좋아지죠. 휑~하니 한시적이지만 환상 속에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는 기분을 느낄 겁니다, 술을 먹게 되면.

인간의 육의 작용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게 불신자한테는 실제적이에요, 실제적. 망상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그렇다니까요. 술에 의존하는 생활은 술을 안 먹으면 맹숭맹숭하고 술 먹으면 벌써 기대가 돼요. 인간의 두뇌세포가 그걸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육적 생활에서 벗어날 어떠한 대안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그걸 통해서 인간은 육의 본성과 육의 욕망과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고 헤어질 수도 없는 그런 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육은 악마의 욕망에 의해서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놀아나는 거예요.

이것이 세례에요, 세례. 세례라 하는 것은 결합 또는 연합. 연합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세례. 인간의 육은 그 욕망에 의해서, 악한 욕망이죠, 욕망에 의해서 환상을 쫓아갑니다.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MBC를 보아라, 뭐 그런 뜻은 아니겠죠.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꿈을 가져라. 꿈☆ 이루어진다. 상암 경기장. 꿈은 이루어진다. 전부다 환상을 쫓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배후에 뭐가 있습니까? 욕망이 있죠.

그 욕망이 있음으로써 인간은 환상을 낳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거예요. 살맛이 나기 때문에 그 패턴에서 굳이 벗어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내가 달성해야 될 목표가 있고 그 즐거운 날이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좌절하고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장미여관이라는 그룹이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퇴근하겠습니다> 라는 노래. 그런 노래도 다 있어요. <봉숙이> 다음에 히트 친 노래, <퇴근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 취직했는데 이제 지긋지긋하고 이 박봉에 못 살겠다. 이제는 사표내고 나간다는 그런 사회 풍자한 노래입니다. 왜 그 작은 월급에 그냥 있습니까? 여러분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왜 그 작은 월급 받고 나가지도 않고 한 직장에 그렇게 오래 있습니까? 질문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하는 겁니다. 뭐 답변은 간단하죠. 꿈을 접었기 때문에. 꿈을 접었기 때문에 그래요.

꿈이 있다면 내가 이거 아니면 밥 못 먹고 사나. 때려치우고 치킨집하든지 카페하든지 사업 벌이죠. 사람이 살맛이 날 때는 성공할 때가 아니라 꿈이 있을 때 꿈이 생겼을 때 마약같이 그때 즐거워요. 마약 같아요. 그래서 사업에 성공한다고 해서 꿈이 없어져버리면 그 사람은 살맛이 없습니다. 그 사업 말고 다른 사업 또 해야 돼요. 영화배우 하다가 무슨 가게 하다가 또 때려치우고 그다음에 택시운전 하다가 때려치우고 결국 오은영 박사한테 가서 우리 부부의 문제는? 이렇게 돼요. 자기 아내는 간호사 하다가 맨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나도 지쳤다고 또 울고불고.

이 욕망의 세계에서 육이 갇혀있습니다. 어디에? 욕망에. 그런데 욕망은 이 인간을 육을 낙원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거예요, 낙원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춘, 정말 내가 나 답다, 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된 어떤 이상세계, 그 세계로 나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나를 부추기고 재촉합니다. ‘네가 여기서 주저앉을 위인은 아니잖아.’ 하고 우리를 독려하죠.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여기서 이거 한다고 주저앉나. 힘을 내라. 지금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여기서 너 주저앉나? 인생 뭐 있어? 한방이지. 한 밖에 없는 인생, 나중에 후회하는 인생은 되지 말자. My way. 프랑크 시나트라의 노래처럼 나의 길을 가련다. 무소의 뿔로 누구를 들이박든지 무소의 뿔로 홀로 가겠다고 설치는 것. 그렇게 배후에 악마와 결탁되어 있는 사람이 주장할 때 이걸 여러분들이 반박해보세요. 뭐라고 반박됩니까?

인간의 육이라는 게 단순히 하나님의 평가가 아니에요. 인간의 육은 실제적입니다. 인간이 아니고 육이에요. 이게 실제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뒤에 육이 무엇과 결합되느냐 하면 물로 결합됩니다. 물로 결합되면 다 물속에 수장되어 버립니다. 이게 노아 홍수에요. 육은 저주의 물과 만나서 저주받는 대상이다. 물은 누가 보내었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보냈죠. 육은 누굽니까? 인간이죠.

인간들은 자기를 육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꾸 내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내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아니야. 너는 육이야. 육은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해요. 배후에서 조종하는 대로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체적으로 자기를 지킬 게 아무것도 없는 노출된 그냥 대상에 불과한 겁니다. 악한 영이 오게 되면 악한 영대로 움직이고 악마의 욕망이 오면 욕망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고.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패턴 같은 것은 본인이 정립하거나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에 있는 물을 결합하시니까 육과 물이 같이 한통속 되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물속에 죽죠. 나중에 육은 무엇과 만납니까? 물 대신 무엇과 만나죠? 물대신 불을 만나죠. 이게 지옥의 형편입니다. 영원한 불구덩이 속에 육이 들어가요. 마치 물속에 인간이 수장되는 것처럼. 물속에 인간이 들어갔을 때 인간은 죽음이죠. 불과 육이 만나면 육은 죽음입니다.

죽음이란 인간이 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 육이라는 평가가 실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죽음이에요.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거봐. 내 말 맞잖아. 넌 육이잖아. 사람 아니잖아. 육이잖아. 물과 만나면 물로 죽게 되어있고 불을 만나면 불로 영원히 고통 받는 그 대상자가 그게 육이야. 육이라는 것은 원래 내가 만든 그 아담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다 했죠? 말씀으로 만들었죠. 말씀으로 만들었잖아요. 말씀으로 만든 그 인간이 아니에요. 이미 거기서 탈락해버렸어요. 말씀을 해도 들을 귀가 없다. 귀가 있는데 이 귀가 고장 난 거예요. 귀가 고장 난 거예요. 코가 있는데 코가 고장 나고. 왜? 눈, 코, 입, 귀, 머리, 어깨, 무릎, 발 모두 한 통속의 육이 돼버렸어요. 코는 코대로 욕망에 놀아나고 눈은 눈대로 욕망에 놀아나고 귀는 귀대로 놀아나고 입은 입대로 놀아나고. 온 사지 전체가 인간의 욕망에 놀아나는 거예요. 어떻게 놀아난다 했어요? 인간은 환상을 추구하면서 이게 물인지 불인지 분간도 못하고 계속 꿈꾸면서 꿈꾸면서 그 꿈과 내가 합치되기를 애쓰면서 그런 육적 생활을 현재 인간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반박을 하면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뭐라고 반박하겠어요? 그들의 기쁨은 육에서 나온 기쁨이에요. 육을 짜릿하게 만드는 기쁨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그걸 반박하려면 용서 받은 자, 경건한 자, 성도의 기쁨은 육의 기쁨하고 다른 기쁨이 되어야 되겠죠.

그 기쁨을 소개드리겠습니다. 그 기쁨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간단하게 응용해서 나옵니다. 인간은 말씀으로 만들어졌죠. 그래서 기쁨은 말씀에서 나오는 기쁨이죠. 이게 육의 기쁨이 아닌 겁니다. 성령이 주신 기쁨은 말씀에서 나오는 기쁨이에요. 말씀에서 나와서 말씀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기쁨이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기뻐하는 기쁨, 이게 성도의 기쁨입니다. 자, 묻습니다. 성도의 기쁨은 본인이 행한 기쁨입니까, 예수님이 행한 기쁨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이 행한 기쁨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는 신경 뚝!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뚝!

내가 아고 실수했다. 나는 잘했다. 나는 또 실수했네. 또 잘못했네. 그런 것 좀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 안양강의 하는데 사도 바울이 지중해에서 살렸던 사람 수가 이백칠십육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동영상을 찍는데 이백사십육 명이라 했어요. 제가 그런 악한 행함을 했습니다. 신경 안 씁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한 것은 확정된 프레임이 아니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변경시키지도 않아요.

속죄라는 것이 내 행함으로 속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는 주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확정된 게 속죄에요. 속죄를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용서하심이죠. 용서하심이 내 행위에 따라서 용서되고 안 되고가 아니에요. 그 체제에 의해서 그냥 용서가 되어집니다. 수요설교대로 이야기하면 양푼에 담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용서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피로 샀을 때 이미 그들만이 용서받은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불신자 쪽에서 이야기해봅시다. 불신자 쪽의 기쁨이라는 것은 자기가 되어야 될 환상 속의 목표와 목적이 있잖아요. 그럼 목적과 목표를 세울 때 자기의 욕망이 작동하겠죠. 욕망이 작동해서 그 욕망이 나에게 행동을 지시합니다. 그러면 내 행동에 의해서 예상했던 결과가 나올 때 불신자들은 기뻐하죠.

그렇지! 오케이. 바로 그거야. 됐어, 이번에. 내가 나한테 선물 보내고.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보복소비를 하는 거예요, 나한테 보복소비. 갑자기 맛있는 거 막 먹고 괌에 놀러간다 하고. 왜? 나는 나를 이렇게 축하해도 괜찮을 만큼 나는 고생을 너무너무 많이 했다는 거예요. 자기를 축하하는 거예요. 나중에 돌아서면 돈 아까워하면서......

그들은 자기를 믿습니다. 자기를 믿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되면 여기서 분노가 일어나죠. 그런데 그것은 여전히 내 행함에 어떤 결과를 내가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내 행함이니까 내 욕망에서 나오겠죠. 욕망에서 나오니까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사이에 경쟁력이 거기서 발생됩니다.

시기와 질투와 13절에 간사하기 짝이 없는 간사한 것, 음흉한 것, 음심한 것. 이런 것들은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행한 것을 생각할 때는 사랑이 안 되고 자기 행한 것을 생각 안할 경우에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걸 사랑이라. 많이들 해봤죠? 이거 하면 나한테 뭐 해줄 건데?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자기가 행한 것을 잊어버리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닐 경우는 어떤 경우냐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식이에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겁니다. 상대를 노리개감으로 사용하는 거죠. 결국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내 하는 행위만 줄곧 못 잊는 거예요. 내가 한 행위는 못 잊는 겁니다. 아까 빵 몇 개 먹었어요? 그거 다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린 남매 간이라도 우리 외손자, 외손녀 이야기인데요. 견과류를 나눠주는데 누나와 남동생 사이에 견과류 봉지에서 다른 건 맛이 없어 안 먹고 건포도만 먹는 거예요. 동생이 견과류 봉지를 딱 까니까 건포도가 세 개 나온 거예요. 애가 좋아서 입이 막 벌어졌어요. 이번엔 누나의 견과류 봉지를 뜯었어요. 봉지 안에 들어있으니까 몇 개가 나올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뜯으니까 다섯 개가 나온 거예요.

그때 이 동생 눈빛이 확 달라졌어요. 자기가 자기 행위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그걸 기억하게 되면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에요, 자기가 기억하면. 세 개. 인상이 벌써 싹 갔어요. 그래서 제 아내가 누나보고 빨리 이 현장을 떠나라 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제 또 세 개로써 스스로 만족하고 있어요. 비교대상이 안 보이니까.

이걸 가지고 이성 없는 짐승 같다 하는 거예요, 12절에. 인간은 육이니까 육이 생생하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것이 덜 위선적이란 말이죠. 그냥 노출되는 거예요. 행동 하나하나마다 육적인 요소가 노출되는 거예요. 애들 하는 행동이 갈수록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만. 내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본능적으로. 윤종신 노래에 그런 게 있어요. <본능적으로>라는 노래 있잖아요. 본능적으로 오직 자기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것만.

그래놓고 말합니다. 내가 뭐가 잘못됐는지 반박해보라는 거예요. 그들은 진지해요. 내가 지금 나를 위해 사는 게 왜 잘못된 것인지 반박해보라. 오늘 제목을 <반박하기>라 할까요? 문제는 우리가 반박이 되어야 되는데 반박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반박을 못하느냐 하면 그들은 아까 욕망을 따라 자기 행한 것만 기억하죠. 자기 행한 것의 가치, 의미만 챙기는 거예요. 그러면 반박이 되려면, 어떤 사람만 반박이 가능하냐 하면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한 사람에 한해서만 반박이 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소위 신자라 하면서 반박이 안 되는 이유가 우리는 우리 행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요. 예수 믿기, 성경 읽기, 기도하기, 헌금하기 이걸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건 반박이 되는 게 아니에요. 너는 네 행동 기억하고 나는 내 행동 기억하는 것밖에 안돼요. 이것은 신앙과 불신앙의 관계가 아니고 스타일의 차이에요, 스타일의 차이. 삶의 스타일의 차이에요. 그게 무슨 복음과 비복음의 대조입니까?

부부 사이에 복음가지고 논쟁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이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라.” 하고 복음 아는 남편이 아내한테 점잖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게 되면 아내 쪽에서 0.1초도 안돼서 튀듯이 나오는 반발이 “너는 왜 너 행한 것 기억하는데? 뭐 성경공부하고 뭐 어떻게 해석하고... 너는 왜 네 걸 기억하냐?” 그렇게 반박하죠. “너는 성경 공부하는 그 재미로 살고 나는 내 욕망대로 살면 됐네, 고만. 둘 다 스타일대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겠네.” 이럴 때 그게 제대로 반박이 되겠습니까? 악마한테 도리어 구박당하죠.

말씀에서 나오는 기쁨이 있어야 돼요. 말씀에서 나오는 기쁨. 우리의 행함을 기억하지 않게 만드는 그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말씀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새롭게 나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있다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 둘러싸여 있어요. 인간의 환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적응을 유도합니다. 어떤 환경이든 인간은 쉽게 거기에 적응하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시간과 공간이 있는데 시간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흘러가는 거예요. 미지의 것은 점선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이만큼(실선으로) 살았는데 앞으로 이만큼(점선으로) 남아있다. 이게 현재 육을 둘러싼 시간 개념입니다. 공간 개념은, 육은 우주를 바라봅니다. 저 안드로메다 이후에 또 뭐가 있을까. 지금 달나라도 못 가고 로켓 고장 나서 쏘아 올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인간은 왜 로켓을 쏘아 올리려고 합니까? 그것은 꿈을 계속 생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도한다는 것은 새로운 꿈을 생산하는 거예요. 뭐든지 한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더 먼 장소, 시간적으로 더 먼 미래에 뭔가 우리가 바라는 꿈의 세계가 낙원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그런 희망이 지금의 인간의 행동을 들썩이게 만들어요. 움직이게 만듭니다.

꿈이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라 하잖아요. 정 꿈이 없다면 인간이 선택할 여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살이에요. 자살하는 겁니다. 꿈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욕망을 펼치려면 자기 주변에 공간이 형성되어야 돼요. 그 공간은 지리적인 공간만 공간이 아닙니다. 내 친구 몇 명이고 내 친척 몇 명이고 나를 예뻐해 주고 또는 내가 예뻐하는 사람에 둘러싸일 때 그것은 내가 숨쉴만한 여력을 주고 힘을 주고 가치를 주는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걸 스위트 홈. 즐거운 곳에서는~ 이거에요. 즐거운 곳에서는.

어릴 때는 행복한 가정. 독립해서는 젊은 자기들끼리 자기 공간을 만들어요. 해변가에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거 있잖아요. 모닥불 피워놓고 노래 부르면서 밤새도록 노는 그 시간. 간, 쓸개라도 다 내줄 것 같은 그런 친구. 거기다가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어라. 자 캡슐, 캡슐에 담아. 나무 밑에 묻고 십 년 뒤에 나무 밑에서 만나자.’ 나무 밑에서 만나서 나중에 귀때기나 맞고. 그 영화 있죠.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되서 만나리. 그런 노래도 있어요. 우리의 우정은 변치 말자, 이런 거.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 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않네
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 라라라라

나중에 새벽 되면 모닥불에 얼굴이 시커멓게 검댕이 다 묻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우정 변치말자 해놓고 군에 갔다 오면 그것도 다 깨져버려요. 하나만 군에 갔다 오면 다 깨져버려요. 방탄소년단이고 뭐고 군에 갔다 오면 다 깨져요. 그러나 그들은 그 순간이 희망이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고 공간이에요. 그게 그렇게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겁니다. 그게 자기 프레임이에요. 자기 삶을 둘러싼 아름다운 장미 울타리인 겁니다, 장미 울타리.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부추겨서 인간이 육이 됐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죠.

그러나 말씀에 보면 말씀의 시공간은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육신이라는 말은 이 시공간 안에 말씀 되시는 분이 창조주가 직접 들어왔다는 이야기에요. 들어와서 새롭게 만들어낸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다 이루었다. 지금이 바로 종말이다 이 말이죠.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했지만 전도라 하는 것은 ‘이 세상 멸망하니까 회개해서 예수 믿자.’ 그게 전도가 아니라 이 세상이 이미 망했다는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인 게 전도에요. 다 망했다. 왜? 예수님이 다 이루었으니까 인간들의 꿈의 현장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꿈은 그냥 개꿈으로 끝나는 겁니다. 개꿈.

여러분들이 어릴 때 친구들과 놀이할 때 학교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하고 길이 어린 아이 보폭으로는 너무 머니까 그냥 걸어가지 않고, 한 친구는 눈 감은 채 다른 친구 등 뒤에서 어깨잡고 따라가면서 ‘어디까지 왔나?’ 하는 거 있죠. 어디까지 왔나? 전봇대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우체국까지 왔다. 하면서 놀다보면 집에 도착하는데......

인간은 어디까지 왔나를 자꾸 생각하는데 주님에 의하면 어디까지 간들, 어디까지 왔나가 아니라 어디를 간들 그건 지옥이에요. 주께서 이 세상을 떠나버렸으니까요. 다 이루시고 우주선타고 외계인 떠나듯이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뭘 한들 뭘 해도 의미 없어요. 닭 쫓던 개 신세처럼 훌쩍 가버린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심정을 여러분들이 한번 헤아려보세요. 예수님을 배신할 만하죠? 거의 다 왔다. 이제는 메시야로서 승리해서 열두 고을을 이스라엘 정권을 쥐겠다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홀연히 자기 제자들을 버리고 홀로 죽음의 길을 택하여 가잖아요. 자기가 소크라테스도 아니면서 독배를 마신 듯이 그냥 무기력한 거예요. 그렇게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 할 때는 뭐든 다 하는 유능한 분인 줄 알고 안심 푹 놓고 따라다녔는데 실제 실효적인 권력과 마주치니까 뺨까지 얻어맞고 옷까지 빼앗기고 아무런 저항 기색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력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면 무력한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왔던 내 청춘은 누가 돌려줍니까? 이 젊은 청춘은, 나훈아처럼 젊은 청춘은 누가 돌려줘요? 청춘을 돌려달라고 할 때 그 청춘은 누가 돌려줘요? 분노의 행동이 나오죠. 어떻게 합니까? 약간의 스크래치 난 자존심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이왕 주님께서 내 마음에 배신감 준 거 내 쪽에서 선빵 때려야겠다 싶어서 자기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었잖아요.

그리고 그 가룟 유다는 오늘날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 같아요. 내 행동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반박해보라.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가잖아. 이렇게 했을 때 어떻게 반박할겁니까? 너희들도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다하면서도 나와 같은 동일한 기대감, 동일한 희망을 갖고 예수 믿을 게 뻔한데 그런 너희들이 감히 나에게 반박을 해? 반박하려면 반박해봐.

똑같은 처지에서 뭐가 반박돼요. 반박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반박이 되려면 가룟 유다하고 전혀 다른 생각을 가져야 반박이 되잖아요. 그 다른 생각이 뭘까요? 그 다른 생각이. 베드로는 이야기했지만 베드로는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소극적 반항이죠. 가룟 유다는 적극적 반발이고. 베드로는 소극적 반발이었어요.

그러니까 가룟 유다를 반박해보시라니까요. 어떻게 반박됩니까? “나는 주님 만나면 안 그런다!” 이렇게 큰소리치고 허풍 떠는 게 반박이 됩니까? 그럼 가룟 유다가 뭐라 하겠어요? “네가 예수님 영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나. 나는 실제 살았어, 3년 동안! 너는 구경했지. 나는 실제 살았다고. 예수님하고 같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쳐주고 권능도 행하고. 어? 너희들은 그냥 예수님을 멀찍이 봤지, 나는 마 예수님하고 같이 사우나 가고, 어! 점심 같이 먹고, 어! 식사 같이 하고! 느그 서장하고는 아니지만 내가 예수님하고 동고동락했다 이 말이죠. 오죽 했으면 배신하고 오죽 했으면 내가 팔았겠는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결말을 보여주니까 우리의 꿈은 어디서 보상받는데? 거기에 대해서 너희들이 적절하게 한번 반박해보라.”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반박합니까? 반박할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죠.

그런데 제자들이 가룟 유다 자살하고 난 뒤에 사십 일 지나지 않아서 제자들은 기뻐했어요. 자, 그 기쁨은 어디서 나온 기쁨입니까? 그 기쁨이 어디서 나온 기쁨이에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준비했습니다.

공간은 하늘에 “베드로야 너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올게.” 성령이 옴으로써 우리의 자리가 땅에 있던 나의 자리는 사라지고 하늘에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두 개의 자리가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하나를 내놓으면 될 게 아닙니까. 내놓을 때 가볍게 이 세상 자리를 내놓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옵니다. 한번 봅시다. 321페이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됐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다 했습니까, 하늘에 있다 했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주민등록은 여기에 없어요. 주민등록은 따로 있어요.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서 뭐한다고요?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게 중첩 현실이에요, 중첩 현실.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중첩되어 있어요. 닭 쫓던 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를 짊어지고 있어요. 우리의 진짜 생명을 우리의 육신이 짊어지고 있다고요. 점점 더 우리의 육신이 사라져감과 동시에 이 생명은 더욱더 크게 느껴지게 되어있어요, 우리의 생명은. 죽어도 상관없는 삶.

그러면 우리의 육신의 죽음 안에서 아까 욕망이 작동한다 했죠. 악마가 준 욕망. 그 욕망은 헛된 망상과 환상을 자꾸 생산해내죠.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다는 말은 우리의 욕망도 같이 죽게 되고 우리가 꿈꾸는 환상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망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소망은 뭐였습니까? 이 땅에서 성공하는 거였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죽는 거였습니까? 두 군데서나 이야기했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이야기하고 빌립보서 1장에서도 이야기하고. 나의 소원이 있는데 그 간절한 소원이 뭐냐. 내가 내 육신과 이별하는 것이다. 이 더러운 육신. 맨날 꿈만 꾸고 꿈꾼 자리에서 꿈을 또 생산하고 나로 하여금 꿈으로 나를 괴롭히는 그 시험, 그 유혹. 거기서부터 우리를 떼놓는 그때. 그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때는 오죠.

공간적으로 예수 안, 성령 안에 있고 시간적으로 ‘이미 우리는 다 이루었다’를 머리에 짊어지고 사는 거예요, 짊어지고.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굴리는가. 그것은 우리의 짊어진 생명과 다 이루었음을 증거하는, 복음 증거죠, 복음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주님의 성령의 지시가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주님의 지시가. 어떤 지시? 육의 꿈은 개꿈이고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은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네가 네 몸으로서 그걸 한번 실습해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의 몸을 우리가 속히 망하는 쪽으로 주께서 지시를 합니다. 뭐 이제 영혼도 구원 됐겠다. 안 망하고 조용하게 살란다, 그런 건 없어요. 자기 자신을 망하는 위험한 쪽으로 몰아세우세요. 위험한 쪽으로 몰아세우세요. 아마 주께서 그렇게 지시할 거예요.

내 식대로 한다면 그냥 연금이나 타먹고 그냥 조용하니 서울에 비싼 아파트 팔아서 저기 촌에 조용한 데 가서 개나 한 열댓 마리 키우면서 수염은 허옇게 하고 머리는 허옇게 길러가지고 양산 저런 데 가가지고 자연인으로 사는 것. 확성기 시위하든 말든 머리만 허여면 되거든요. 수염만 기르고. 하여튼 예능은 다 봤어. 온갖 자연인 폼은 다 취해가지고 거기 살면서... 집에 부인 옷은 많지 않습니까. 번갈아가면서 그동안 끌어 모은 옷 갈아입으면서 도인 행세하면서 살아가면... 그렇게 살면 어떻게 돼요? 나중에 불세례 받죠. 육이니까.

성령을 통해서 육이 영을 만나게 해요. 육이 물 만나면 물세례, 육이 불 만나면 불세례, 육이 영을 만나면 성령세례. 참 쉽죠잉?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시공간,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시공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지상에 와서 만들어낸 시간과 공간.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네 처소가 있다.

인간인 자기 제자를 하늘에 둘 수 있는 조건을 주님은 이 지상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그 조건을. 육신을 가져도 하늘나라에 가뿐하게 살 수 있도록 해같이 빛나도록 살 수 있는 그 조건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땅에 속한 육신이 있는 것처럼 이제 너희들은 땅에 속한 육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해서 가졌던 영광스러운 육신 있죠, 그 영광스러운 육신이 우리의 처음 아담이 되어가지고 새로운 노선의 아담의 시조가 되어서 그 시조가 가졌던 부활의 영광을 우리가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인수인계 받는 그날이 오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날을 사모하게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냥 공수표 날린 게 아닙니다. 괜히 한번 기다려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실제로 부활했다는 그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예수님의 재림과 하늘의 영광의 처소, 자동적으로 그것도 분명한 사실임이 드러나죠.

그에 비해서 오늘 본문 17절 봅시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확정된 체제입니다. 이 세상은 이미 저주받은 자를 저주받게 하기위한 그런 능력들이 작동해요.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에 대해서 거기에 대표 인물이 나오죠. 15절, 16절 거기에 어떤 인물이 나오죠.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발람의 길은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아예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발람이 미쳤으면 이 세상 몽땅 다 미친 거예요. 돈 좋아하는 사람 다 미친 겁니다. 그럼 돈 안 좋아하면 우리 구원받습니까? 백날 강의해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자기 행위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돈을 사랑하지 않는 가운데서 부~자 되게 하십니다. 왜? 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라고 한 달에 2억씩 벌게 하십니다. 진짜 꿈도 야무지다, 참.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3억 내지 내년에는 4억씩 벌게 해요. 이 세상에 출세하는 게 아무것도 아닌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자식 셋이 하나는 의사, 하나는 판검사.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걸 보여주기 위해서. 건강이 아무것도 아닌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건 뭐 나이 칠십 넘어서 백악산을 막 남산 위에 노루새끼처럼 막 뛰어다녀요. 건강이 아무것도 아닌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런 거예요. 주님의 지시대로 영양제 하루에 28가지 먹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에 주목하지 마세요. 용서는 예수님의 확정된 프레임에서 나오는 게 일방적인 용서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걸 알았고 가룟 유다는 자기가 갈 자리, 버림받아야 되기 때문에 결국은 합류되지 못하고 기어이 떼놓는 작업을 열두 제자의 한 명으로서 끼워 넣었다는 사실을 요한도 알았고 마태도 알았고, 제자들을 주께서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행동을 생각하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악마를 체포한 그 프레임으로 인간 세상까지 넘쳐 남을 감사합니다. 악마를 집어넣었던 그 원리원칙이 지금도 차고 넘치게 흐르고 있음을 이제는 우리가 영안으로서 성령으로서 그걸 밝히 보이고 그걸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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