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꺾이지 않는 의a

아빠와 함께 2022. 7. 13. 08:11

20220711a 부산강의 : [시편]50(34:21)-꺾이지 않는 의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34편. 성경에 보게 되면 특이한 게 34편 6절에 보면, ‘환난’이란 단어가 나오지요. 그리고 16절에 보면, 땅에서 끊어진다는 말이 나오고, 17절에도 ‘환난’이란 말이 나오고, 그다음에 18절에 ‘마음이 상한 자’란 말 나오고, 21절에 죄를 받는다는 말이 나오고, 21절에,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22절에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죄란 단어가 나와요.

성경을 사람들이 잘 안 보려는 이유가 일상 사회생활에서 통용되지 않는 단어들로 이렇게 구성돼 있습니다. 일반사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거요. 그것은 성경의 세계, 말씀의 세계죠. 말씀의 세계가 따로 형성돼 있어요. 일반적인 사회, 일반적인 또는 일상적인 생활세계가 따로 또 형성돼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계를 신약적 단어로 ‘세속’이라고 이야기해요.

세속이라면 성경의 세계는 거룩한 세계가 되는 거예요. 거룩한 세계, 그리고 세속의 세계 이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 특이한 개인이 들어가는 거예요.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 세계는 자기 눈으로 보기에 그냥 천국이 보이고 자기 일상의 세상이 보인다면 우르르 천국으로 몰려가면 되고, 세상 사람들도 따로 살고.

이렇게 되는데 이 세상이 어떤 특이한 개인에게 집중이 되고 그 특이한 개인이 초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할 수 없는 능가하는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사적으로 천국을 이야기하게 돼 있어요. 눈으로 보느냐? 아니. 사적으로 고백되느냐? 오케이. 천국이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고백되면서 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그냥 천국이 하늘에 환상적으로 보이면 이거는 개나 소나 다 쳐다보고 천국이 저기 있네, 이러면 되는데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보이는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그것도 특이한 개인에게 천국이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이에요. 특이한 개인에게 소개되고 있으니까 여기서 특이한 개인 앞에서 나는 뭐가 되느냐? 나는 부정돼야 된다. 이게 인간으로서는 힘든 거예요. 특이한 개인에게 천국의 소식이 일임됐다는 나는 뭐냐 이 말이죠.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뭐.

그래서 이 원리는 여러분들의 꼭 아셔야 돼요. 인간, 인간류, 나죠. ■나는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다. 왜 아무것도 아닌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니냐고 되묻지 마세요. 왜? 뭔가 된 양 여기니까 화가 나서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묻는데, 아무것도 아닌 근거를 대라, 이유를 대라 하는데 이유도 근거를 댈 자격도 안 돼요.

왜?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니게 살면 되지 뭐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가가 그렇게 불만이 되어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들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특이한 개인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경을 이해할 때는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말씀을 지킬 능력이 아니니까 특이한 개인이 아니에요. 그래서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의 결과는 받되 말씀의 실천에서는 손을 떼게 하는 겁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말씀이 누가 특이한 개인이 이룬 성과는 받되 내가 말씀의 실체라는 능력에서는 우리를 배제시킵니다. 안 그러면 자기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 것이라는 그런 오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일반적인 생활 사회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 양쪽을 조금씩은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티비 시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티비 켜고 들여다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잠자는 것 됩니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런다고 잠이 와요? 안 되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땀을 흘려서 샤워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변비 걸리면 내 속에 들어있는 데 내 마음대로 이게 빠집니까? 안 빠지지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인간은 한계를 느껴야 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것은 코로나 백신 맞는 것,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 흘린 피 앞에서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출세하고 자기가 성공한 삶을 살고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산은 한 100억 되는데 “나는 정말 죄인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변비 정도가 아닙니다. 잠자기 정도가 아니에요. 정말 인간이 못해내는 거예요. 못하니까 주님께서는 성도는 말씀의 결과는 받되 말씀이 실천에서 손을 떼게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끝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좀 남아라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반적인 생활세계에서 말씀의 세계가 들어오게 돼요. 들어온다, 또는 거기서 발생시킨다,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다윗을 통해서 발생시켜요. 다윗은 하늘에 계신 사람이 아니니까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발생시킵니다. 발생시켜버리면 다윗으로 하여금 이 일반적인 세계에 들어오게 해요.

일반적인 생활세계의 핵심요소가 특이한 개인, 오늘 본문은 다윗이죠. 다윗을 통해서 이 일반적인 생활세계의 아무것도 아님의 근원, 이유, 근거, 왜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게 뭔가 된 양 하는 현상이 일어나는지 다윗을 통해서 다 까발려요. 까발려버리면 다윗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돼요.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말씀이 되는 거예요. 특이한 개인이 설치고 다니는 그 흔적 자체가 계시로 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가 되려면 반드시 어떤 요소가 구비돼야 되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것인 체하는 일반적인 생활체제가 필수적으로 이 세계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시편 34편에 다윗의 특이한 개인의 활동을 그대로 신약시대에 있는 성도에게 그걸 반복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계속해서 세속으로 되돌려 보내요. 우리의 삶을. 다윗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시편 34편 1절 이전에 보세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이렇게 돼 있지요. 이게 노래니까 노래제목이다 이 말이죠. 노래제목처럼. 이것이 노래제목도 계시에요. 1절 이전에 0절, 1절부터 나오게 만든 어떤 현실적인 계기, 사건 이걸 이렇게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났다. 여기 다윗이 하나님 말씀 지키고 자시고 했습니까? 그냥 일반적인 생활세계에 부딪치고 튕겨져 나온 거예요. 이것은 미친척하다가 시껍했다고 자기가 큰일 날 뻔했다, 죽을 뻔했다 하고 튕겨져 나온 거죠. 튕겨져 나온 이것을 추방으로 이해한단 말이죠. 특이한 개인 다윗이 아기스 왕, 여긴 아비멜렉으로 돼 있는데 블레셋 왕들의 전체를 아비멜렉이라고 해요.

옛날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땅이 없어서 돌아다닐 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처나 이삭의 처가 예쁘니까 탐을 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탐을 낼 때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저주해버렸어요. 아비멜렉, 블레셋 추장. 그때부터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을 건드리면 여기서 뭐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린 징벌은 그냥 나쁜 짓했다고 징벌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이 갖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건드릴 그때 벌이라는 게 생겨요.

그래서 인간은 죄에 대해서 몰라요. 악에 대해서 모릅니다. ■악은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의 활동을 건드릴 때 비로소 악이 발생되는 거예요. 통회하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통회가 되지 다른 데서는 반성이 되지 통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제 낮 설교하면서 통회는 지옥에서 하는 거죠. 하나님께선 통회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뭐로 만드는가? 지옥 그 자체로 만드는 겁니다.

지옥이 뭡니까? 잘 들으세요. ■지옥이란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에요. 간단하지요. 뭐 불 심판, 그런 건 나중 문제고 그것부터 먼저 챙기지 말고 내가 고통 받는데 자꾸 그렇게 하지만 그건 불교에 염라대왕 있는 것과 똑같은 거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에요. 마태복음 9장에서 기뻐야 될 혼인잔치가 슬픔이 되는 것은 어떤 경우냐? 신랑이 없는 경우에요. 다들 신랑 계시지요. 다들 신랑 있지요.

여성의 창조적 의미는 본인을 쳐다보지 않고 신랑을 쳐다보라고 여성을 만든 거예요. 그리고 여성들이 이 땅에서 혼인을 할 이유는 신랑 같지도 않은 제대로 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는 신랑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혼하게 하신 겁니다. 해봐야 아닌 걸 알지. 결혼해보지 않으면 지가 잘난 척한다니까. 그러니까 여성이 결혼한 자체가 실패작이에요. 그런데 실패가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게 통회가 되거든요. 내가 미쳤지, 결혼은 왜 했나. 애는 왜 낳았나, 넷이나 낳았는데.

신랑이 왔다가 빠져나간 세계에 여전히 인간들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내년은 잘 되겠지, 대통령 바뀌면 잘 되겠지. 여전히 희망을 걸잖아요. 이게 무슨 생활이다? 일반적인 생활세계에요. 이 세상의 삶이 세속입니다. 주님께선 이 세속에다 성도를 돌려보내요. 거기서 지내라 하는 겁니다. 말씀 지키지 말고 그런 것 하지 말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지 말고 그냥 이 생활세계에 살아라.

살아가게 되면 이 세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몇 가지 같은 단어지만 여러 가지 단어를 나열해보겠습니다. 뺀질이, 그다음에 깍쟁이, 또 비슷한 말 뭐가 있지요? 얍삽한 것, 요령꾼. 이게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쫓기니까 겁나니까 죽을 게 무서우니까 내놓을 것은 뺀질이, 깍쟁이, 얍삽함, 요령꾼 이것밖에 없어요. 누굴 속이는가? 아기스 왕을 속인 겁니다. 그 대목을 찾아볼게요.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5절.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다윗이 진짜 미치광이 노릇을 한 거예요. 연기대상 받은 겁니다.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한 겁니다. 상대를 속인 겁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각자 재주껏 연기를 피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앞에서 속이고, 부모는 자식 앞에 속이고, 남편은 아내를 속이고, 아내는 남편을 속이고, 목사는 교인을 속이고, 교인은 목사를 속이고. 속이는 것 외에는 내놓을 게 없어요. 왜? 내가 살기 위해서. 여기 “두려워하여”

인간은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죽어도 무방한 존재인 것이 들킬까봐 연기를 피우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게. 말로는 쉽지요. “주여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로는 쉬운데 그 말했다고 말씀 지켰다고 하지 말고, 네가 이 세상을 세속을 다녀오너라. 말로 지킨 걸 순종이라 하지 말고 다녀와.

다녀오면 뭐로 변한다고요? 뺀질이, 깍쟁이. 특히 깍쟁이 앞에 뭐가 붙어요. 서울깍쟁이. 얍삽한 것, 말이 ‘것’이지 얍삽한 놈이죠. 여자는 말을 빼겠습니다. 천하의 요령꾼. 얍삽한 것, 깍쟁이, 뺀질이 이게 우리의 속셈인데 우리의 본질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본질이에요. 신을 믿는다,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다? 뺀질이에요, 깍쟁이입니다. 얍삽한 것, 요령꾼으로 신을 믿어요.

신을 자기에게 끌어당기면서 신에게 원망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원망할 대상을 총체적으로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모아서 원망하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겁니다. 대들기 위해서, 항변하기 위해서, 비난하기 위해서 신을 믿어요.

우리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이걸 세속세계에 속해봐야 압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것을 감추는 식으로 뭔가 된 양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잠을 못 자지요. 그러면서 변비가 되는 거예요. 왜? 십자가 앞에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평소에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늘 분노가 섞여 나와요.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해도 그 안에 분노가 있어요. 반갑습니다, 이럴 때 분노가, 식당에 와서 밥 안 먹고 가기만 해봐라. 인간의 모든 행동과 태도에는 분노가 들어있어요. 그 분노가 압축해서 뭉쳐진 걸 네 자로 ‘대표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부터 당회까지, 그게 분노의 화신으로 터져 나온 거예요. 이렇게 성경대로 기도해도 하나님 제 소원한 것 안 들어줄 거요, 이거죠.

십자가 앞에서 내 인생 어떻게 망가져도 괜찮아요, 하나님, 이런 게 없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오죽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죄인을 위해 피를 흘렸겠나, 그런 게 없고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주께서 성의를 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게 바로 특이한 개인 다윗이 실생활에서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친 척하다가 어떻게 됐지요? 미친 척하다가 쫓겨나지요. 왜? 여기 가드 나라 입장에서 볼 때는 다윗이 이스라엘에서는 만만이고 뭐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추방을 시킨 겁니다. 추방된 그것을 다윗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냈다고 이해한 거예요. 오늘 시편 34편 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자, 여기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다윗이 왜 이렇게 미친 척을 해야 되느냐? 다윗을 뭔가 떠미는 쪽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가 길더라도 여러분 알아야 돼요. 다윗을 떠미는 쪽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쪽이었어요.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한 게 아닙니까? 사울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사울 왕을 누가 용납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납을 했다니까요.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아무리 사적으로 어떤 사람을 돕고 싶어도 지가 속해 있는 집단의 힘이 나의 개인적인 힘을 지금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중요한 것 많이 한다.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중요하니까요.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됐습니다. 악인은 개개인이 악인이에요. 그러나 악이 개인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고 전면적으로 그걸 압제하는 다른 엄청난 전체적 악이 사적인 개인을 쥐고 악인으로 살도록 붙잡고 있고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개인적으로 다윗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그러면 뭐합니까? 전체 권력은 누가 쥐고 있는데? 사울 왕이 쥐고 있잖아요. 이걸 복음을 알고 큰 교회 부교역자로 생활해보면 그 부교역자가 제일 크게 느끼는 것은 주님의 뜻, 그런 걸 느끼는 게 아니에요. 세속세계, 교회세계죠. 교회라는 생활세계, 세속세계에서 권력의 맛을 봤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전도사 좋아하고 부교역자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심지어 삼분의 이가 넘는다 할지라도 교단에서 인정한 당회장의 권력이 교인들을 압제하고 교인들의 모든 결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 부교역자는 당회 마치고 종용히,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불러다가 그다음부터 잘리는 거예요. 교회는 그래서 유지되는 겁니다.

여전도사가 왜 버티는 데요? 뺀질이, 깍쟁이, 얍삽함, 요령꾼이기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입니다. 권력의 라인을 찾는 거예요. 교회에서 줄이 어느 쪽인지, 장로들 열 명 중에서 유력한 말발 있는 장로라인과 이쪽 라인이 어느 쪽인지, 지금 당회장이 허수아비인지 아니면 진짜 권력을 탈취해서 목사가 마음대로 부리는지? 어느 정도 부리느냐?

죽은 유훈통치라고 하지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김일성이 북한을 다스리는 것처럼 이미 죽은 당회장이 그 교회를 다스리는가? 어느 교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수영로교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영락교회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영락교회 가서 설교하면서 한경직 목사 욕하면 그 목회자 어떻게 됩니까? 대번에 잘리지요.

보이지 않는 악의 힘이 있어요. 그 악의 힘은 거기에 속한 교인들로 하여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준 그 은덕과 혜택을 입지 못한 겁니다. 나로 하여금 죄인 아니게 해준 내가 멀쩡하게 살 가치가 있음을 어느 누군가 나에게 그걸 덧입혀준다면 나는 그에게 충성봉사하리라. 이런 악의 권력에서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악에 의해서 그냥 죽어요.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죄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더 큰형님 같은 죄, 악, 악이란 인격화되거든요. 악마지요, 악마. 악마가 말씀의 세계와는 전혀 질이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너 가치 있어, 이걸 유포시켰던 그래서 내가 기분 썩 좋았던 그것이 한 통속이 되어서 같이 지옥으로 망해버립니다.

사람들은 죄라는 걸 몰라요. 가치 있는 내가 가치 있게 사는 이게 무슨 죄냐? 내가 무슨 남한테 해코지했나, 지금껏 내가 경찰서 간 적 없어. 나는 착실하게 자식 잘 키우고 밥벌이하는 게 왜 지옥 가야 돼? 거기에 대한 정답은 이렇습니다. 그거는 네가 할 수 있는 거야. 샤워하는 것, 티비 시청하는 것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백신 맞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뭐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뭔가 가치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에 인간은 모든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you raise me up 산에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어요. 찬양도 할 수 있고 헌금도 할 수 있어요. 예배 참석할 수 있고 교회 나올 수 있습니다. 왜? 누굴 위하여? 특수한 개인이 아닌 보통 그렇고 그런 개인을 위해서 내가 긍정되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부정이 아니고 내가 긍정할 수 있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여러분 아셔야 돼요. 교인들은 돈만 내고 예배 마치고 집에 가니까 모르지요. 그러나 그 실무자들 교회를 운영하는 실무자들 여전도사, 남전도사, 부교역자, 강도사, 당회장 목사, 그리고 그 행정에 참여하는 장로급들 이게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지 그냥 평신도로 뒤에 앉았다가 설교 듣다 자고 돈만 천원 내고 집에 간 사람 아무것도 몰라요.

교회가 운영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됐어요. 무슨 하나님이 교회를 운영해요. 그런 것 없어요. 교회는 없애는 거예요. 운영이 되는 게 아니고 계속 없애는 거예요. 일곱 교회 없애듯이. 교회는 있다가 없어지는 흔적만 남기라는 게 교회가 존재할 이유입니다. 흔적만 남기고 떠나간 그냥 사라지만 됩니다. 개인이 무가치한데 개인이 모인 교회도 역시 무가치한 거예요.

왜 무가치하냐? 실생활 속에서 우리는 뺀질이고 깍쟁이고 얍삽하고 요령꾼이니 무가치할 수밖에 없지 여기서 뭐가 잘난 게 나올 수 있습니까. 특수한 개인이 다윗이 실생활 현상 속에서 권력장 속에서 그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내가 여기서 아부하고 미친 척하는 연기 피우는 것 외에는 살아남을 재주가 없음을 혹독하게 다 경험한 거예요. 그게 계시에요. 그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지키란 말은 뭐냐 하면 네 주제파악하란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이만큼 산 것도 복입니다. 십오 년 전에 진즉에 죽어도 할 말 없는데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은 뭔가 내가 할 수 없는 은택을 입었기 때문에 바로 이런 나를 발견하라고 기회를 계속 부여하신 거예요. 아직도 너 모르지? 더 살아야 되겠어. 더 살면서 네가 아무것도 아닌 걸 알아라. 그런 기회를 계속 주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혜택을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 일단 여러분들이 아셨다 치고. 추방당했습니다. 누가? 다윗은 쫓겨났다했으니까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추방당한 걸로 보지 않고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당했다고 보는 겁니다. 다윗이 이 관점에서 시편 34편을 썼습니다. 다윗이 미친 척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순간 관점이 내 가치와 살기 위한 관점에서 뭐로 바뀌었냐 하면 주께서 왜 나로 하여금 미친 척하는 그런 환경을 조성했느냐, 로 관점이 바뀌어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 왕이죠. 그러면 아기스 왕은 가드 왕입니다. 공통점이 아기스 왕, 사울 왕, 오늘 본문에는 아비멜렉으로 돼 있는 블레셋 사람이죠. 우리 아는 상식은 성경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상극이고 서로 원수이며 화합될 수 없는 융합될 수 없는 질적인 대척관계에 있다고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란 인물로 인하여 사울이나 아기스나 둘 다 한 통속이 된 거예요. 왜? 둘 다 공동의 적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추적하는데 그 추적하는 이유가, 제발 너는 이 세상에서 꺼져줬으면 좋겠다,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 라고 누가 이야기한다고요? 세상에서 이야기하죠. 사울이 이야기하고 아기스 왕이 그렇게 원했던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는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악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이한 개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을 반기는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을 미워해서 배척하는 존재며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 그리고 죄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해서 그게 죄가 아니고 예수님과 연관해서 죄가 죄답게 규정이 되고 악이 악답게 규정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만날 성경 들이대면서 부모를 공경하라, 왜 부모 공경 안 합니까? 여러분 죄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갈 때 한 달에 부모 용돈 백만 원하고 늘 요양병원에 열 번 찾아가는 사람한테는 엄매 기 살아, 이러고 있다고요. 그 이야기 듣고. 왜? 지는 자기가 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는 죄인이 안 되지요.

왜 인간은 죄인이 안 되고 싶어 하는가? 인간이 ■1알 수 없는 죄책감이 있어요. 죄책감은 외부 타자에 대해서 외부인에 대해서 외부 사람에 대해서 ■2외부 존재에 대해서 분노하게 돼 있어요. 반발하게 돼 있다고. 마치 개가 낯선 사람 오면 본능적으로 짖는 것처럼. 인간은 개와 똑같습니다. 내가 오줌 눈 영역 안에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무조건 경계하고 짖습니다. 그러다 엘에이 갈비 하나 던져주면 좋다고 꼬리 막 흔들고 그러지요.

인간이 죄책감을 갖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떳떳치 못한 게 가득 들어있다는 것이 외부인으로부터 그게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겁니다. 겁을 내는 거죠. 그래서 ■3서로서로의 만남은 악수하고 만남은 서로를 지금 속이고 있는 현장임이 포착된 거예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서로 속이고 있는 거예요. 서로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악수를 한다는 것은 난 당신의 적이 아니라는 그러한 증거로 당신은 결투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옛날 외국에서 내려온 거예요. 인사하는 이런 것도 전부 다 우리 서로 싸우는, 당신을 때리는 손이 아닙니다, 하고 손을 내미는 거예요. 그런데 악수를 내치는 사람 있잖아요. 정치적 발언하지 않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사울과 아기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다윗을 내쳤다는데 그러면 사울과 아기스 둘 다 다윗을 표적으로 노리면서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그걸 생각해봅시다. 인류의 역사에서 시대가 지나가면서 인류 문명 가운데 두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구분한다면 하나는 뭐냐? 전제군주현식이에요. 또 하나는 뭐냐? 자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어떤 형식을 보여주면서 살아갑니다.

전제군주가 뭐냐? 제가 함축해서 적어볼게요. 설명하면 많이 기니까. 혈육을 통해 가문을 유지하는데 혼인전략으로 재 조직화하는 방식, 이게 전제군주입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가인의 칠대 후손 라멕이 국가를 조직해요. 도시국가를 조직하는데 그때 자기가 자기 조상 가인보다 더 당당하고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하죠.

내가 기분 나빠서 소년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그 소년은 어디 속하지 않느냐? 혈육에 속하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자기와 혼인한 사람에게 이야기해요. 왕과 혼인이 되면 여기서 왕가가 돼요. 왕가가 계속 세습제로 이어지요. 이게 바로 전제군주인데 독재 같은 전제군주체제가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구한말까지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까. 전주 이 씨, 조선을 이 씨 조선이라고. 이거는 유럽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바로 전에 있던 문명의 모습이고 현상입니다.

자, 사울이 보는 이스라엘, 그리고 아기스 왕이 보는 가드 왕, 둘 다 전제군주체제에요. 전제군주체제는 인간이 개인이 갖고 있던 욕망을 자신의 가문으로 통제하는 겁니다. 왕가의 핏줄로 통제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혈육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적인 힘을 자기 개인 가문에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힘이라 하는 것은 여럿 다른 힘들을 모았기 때문에 그게 강력한 힘이 돼요.

지가 강력한 힘을 만드는 게 아니고 남의 것을 빼앗아야 영끌 강력한 힘이 된다고. 네가 갖고 있는 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힘을 반 토막을 빼앗아 오던지 삼분의 일을 빼앗아 오던 빼앗아 와야 돼요. 그래야 힘이 하나의 질서가 중심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힘을 가지려면 딸이나 아들의 자유권에서 일부를 아버지 통제 하에 둬야 돼요. “저녁 열 시 이전에 집에 들어와.” 이게 뭡니까? 그 자식을 전면적으로 자식의 자율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엄마가 어린아이한테, “너 김치 안 먹으면 다른 반찬 계란말이 안 준다.” 이거 뭐예요? 계란말이 먹고 싶은 그걸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생기는 게 뭐냐? 죄책감이에요.

법은 엄마, 아빠라는 법에 대해서 자식은 뭘 배우느냐 하면 법이란 것은 위반했음과 위반 안 했음을 그걸 통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 죄책감을 안고 다른 친구들 만날 때 열 시가 돼갈 때 “나, 집에 가봐야 돼.” 왜? “우리 집은 열 시 이전에 들어가야 돼.” 그런데 친구가 붙들다보면 10시 2분 됐습니다. 뭘 느낍니까? 서두르게 됩니다. 왜 서두릅니까? 의와 죄 그 경계선에서 죄 쪽에 악 쪽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빨리 집에 가야 돼.

그래서 가장은 가장의 힘을 전제적인 군주로 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에서.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방법이 뭐냐 하면 보통 세 가지에요. 지대, 노역, 세금. 세금과 지대는 좀 구분해야 되는데 왕이라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가문이 왕이 되는 것은, 인물 좋다고 왕 되는 게 아니고 선거해서 왕 되는 게 아니고 이 왕이 깡패입니다.
깡패의 특징은 뭡니까? 지는 일 안 하고 남의 뺏기 위해서 사조직 만들어서, 깡패 밑을 양아치라 하지요. 양아치 조직해서 남들은 평화롭게 농사짓고 하는데 지는 칼 갈고 무술을 연마하고 싸움질 그런 것 배워서 자릿세 내놔라, 이게 깡패에요. 이 깡패가 상대방 깡패조직을 이기고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이게 바로 왕이 되는 거예요.

왕들은 사고방식이 깡패 되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재목감이 달라요. 깡패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자기 이력과 역사를 어떻게 합니까? 조작하지요. 깡패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 날 때부터 이미 재목감이 지도자, 우리의 영도자 감이었다. 그 깡패 중에 하나가 김정은이 아닙니까.

김정은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게 뭡니까? 어떻게 하면 남의 것을 빼앗는가, 그것 연구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하면 희생하는지를 배운 게 아닙니다. 스위스 유학 가서 그런 짓하면서 배운 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기능과 기술을 협박과 공갈로 빼앗을 수 있다는 것, 자기 고모부 총으로 쏴 죽이고. 그런 걸 배워야 돼요.

놀면서 월급 몇 천만 원씩 타는 그걸 네 자로 뭡니까? ‘국회의원’이라 하지요. 국회의원은 자기 직업에 환멸을 느낀 거예요. 이제는 고리타분해서 권태로워서 더 이상 자기 직업을 못하겠어. 그럼 때려치우고 뭐합니까? 검사 때려치우고 국회 나오면 돼요. 놀면서 싸움질하면서 월급 받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권력을 쥐고 있거든요.

집안에 국회의원 나가면, 다른 국회의원 욕하지요. 지 동생이 국회의원 나가면 믿어주세요, 유세 나갈 거예요. 유세하다 총에 맞고. 왜 아베를 죽입니까? 아베를 죽인 이유가 자기한테 아버지도 아니면서 아버지 노릇을 한 것에 대한 부모 때문에 아베를 죽인 거예요. 이 왕이 모든 국민에 어떤 이미지냐 하면 아버지 이미지에요. 아버지 때문에 뭐가 생긴다? 죄책감이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가 법을 만들기 때문에. 아베가 수상인 건 좋은데 왜 우리 엄마 재산 다 날아갔느냐, 이것 때문에 죽였잖아요.

분노라니까, 분노. 분노한다는 것은 힘을 느꼈다는 거예요. 누구로부터 통제받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통제를 계속 받고, 받고 하다가 마지막 자기 엄마의 재산, 곧 지 재산이죠. 자기 재산이 날아가니까 복수할 길이 없으니까 총으로 쏴 죽인 거예요. 아베가 종교단체에 가서 그 종교단체를 선전하는 연설도 하고 동영상을 날리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종교단체를 허물기 위해서 개인이, 그 41살 먹은 청년이 개인적으로 도살하는 방법은 뭡니까? 이미 그 종교단체의 소속 인들은 종교의 우두머리, 장에 정신적으로 예속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한둘이 총으로 죽인다고 종교가 사라질 건 아니잖아요. 대가리는 대가리치는 충격을 줘야 된다고 생각해서 다른 간부가 안 나오니까 아베를 찾아가 죽인 거예요.

죽임으로써 무엇을 면제한다? 나는 나한테 죄책감을 줬고 나로 하여금 못난 존재로 만든 그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자기 확인을 자기 증명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신에게 대들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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