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3a 부산강의 : [시편]49(33:17)-상다리
(강의:이근호 목사)
스타일-원판에 연결되어있지 않음
오늘은 시편 33편. 1절에, “즐거워하라” 2절에, “새 노래로 노래하라, 연주하라” 그 이유가 4절에, 말씀을 실천에 옮기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말씀대로 빈틈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가 6절에도 계속 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들었다. 9절에,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탄탄하다, 견고하다. 그다음에 10절부터 18절까지는, 인간의 모든 생각은 말씀에 비해서 맞지 않다. 부합되지 않는다, 합치되지 않는다. 인간은 기원에 닿지 아니한다. 기원, 다른 말로 하면 바탕, 또는 원판, 원래 판, 원천 전부 다 같은 뜻입니다. 또는 시작점. 인간은 시작점에 닿지 아니한다. 거기에 닿지 않으니까 인간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붕 떠있는 세계. 이거는 뭐냐 하면 허상이고 허망이고 허구고 달리 하면, 이거는 인간세계는 환상입니다. 환상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은 스타일,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이에요. 스타일과 스타일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너는 왜 내 식대로 안 사느냐?” 그걸 좀 정직하게 이야기해야지요. “너는 왜 내 스타일이 아니야.” 사람이 스타일이 다른 이유는, 살아온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이 다르다.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 내 스타일이 옳다고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이 스타일은 기원에 닿지 않는 허망하고 허상이고 허구고 환상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스타일에서는 옳다, 그르다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인생 스타일, 나는 내 스타일. 어떤 스타일이든 그거는 옳다고 할 수가 없어요, 내가 기준이라고. 내가 신앙의 기준이라고 삶의 기준이라고 우길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스타일이고 그 스타일은 자기가 살아온 기억, 이걸 과거라 하지요. 과거에서 살아오면서 체험한 그것이 인간의 두뇌 안에 기억으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기억을 흔히 아는 유명한 말로 이걸 ‘나’ self, 영어로 subject, 또는 moi. 나는 기억이 만들어내고 이 기억은 허망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허망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왜? 기원의 바탕에 원천에 원판에 시작점에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동안 우리 인생 도대체 뭘 보고 살아왔습니까? 무엇 때문에 살아온 거예요? 허망과 허구와 허상 때문에 살아왔는데 그 허망과 허상, 허구 중에 하나가 나거든요. 나를 위해 산다는 자체가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짓으로 평생 동안 살아온 거예요. 그래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나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허망한 걸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 허망한데 하나님이 왜 도와줍니까? 나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먼지 같은 존재고 그걸 하나님이 왜 나를 도와줘야 됩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금요일에 철야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 철야 기도하는 분위기 형상은 뭐냐 하면 그냥 허망한 것을 굳히기에 들어가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과연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그걸 실감하는 그 세월이 인생사라 하는 거예요. 허망한 것을 붙잡으려고 사니까 여기서 뭐가 안 나오느냐 하면, 감사 안 나오지요. 감사 안 나오니까 시편 33편 3절에 나오는 새 노래 안 나오지요. 새 노래 안 나오고 맨날 부르는 것이 헌 노래 나오지요. 흘러간 옛 노래. 자기 자신의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 아쉬움, 미련, 그때가 좋았었는데, 라는 회귀본능 이런 것들을 노래에 담으니까 새 노래가 아니고 헌 노래가 되는 거예요.그러니까 나 자체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과거에 속했거든요. 과거에 다 지나간 것에 내가 속해 있습니다. 더 살아봐야 지나간 것, 지나간 것, 지나간 것에. 그러면 시편 33편의 새 노래가 3절에 나오지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새 노래가 어디서 나오느냐는 거예요. 인간이 불러봐야 옛 노래거든요. 인간이 찬송을 해봐야 옛날 교회 때 불렀던 과거 은혜 받았던 그런 건 다 헌 노래에요.
새 노래-원판에 연결될 때
새 노래는 어디서 나오는가? 새 노래는 여기서 나오지요. 기원,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 여기에 닿게 되면 여기에 접선이 될 경우에만 새 노래 나와요. 그럼 접선 됐는지, 안 됐는지 어떻게 아느냐? 방금 이야기한 것을 볼 때 새 노래에 딱 접선되는 순간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은 붕 떠있는 세계, 아무것도 아닌 세계,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몇 십 년을 더 살아도 그거는 다 허망한 것이고 그저 내 기억이 나를 속인 거예요. 내가 나를 속이면서 살아온 겁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무엇을 가려버리는가? 기원과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을 다 가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시편 33편에서 기원,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을 시편 33편 6절에서는 이걸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거예요. 말씀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게 어려운 것 같지만 굉장히 쉬워요. 창세기 1장을 여러분들이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할 때 그때 빛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럼 뭐만 있었어요? 말씀만 있지요. 빛이 있으라하는 명령만 있지요. 빛은 없어요.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이 실제로 빛이 나타난 겁니다. 그러할 재주와 능력은 오직 우리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될 때 우리는 몰랐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노래는 부르기는 내가 부르지만 이 새 노래의 모든 내용은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말씀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에게는 주께서 매일같이 말씀을 주입시킵니다. 말씀을 주입시키면 붕 떠있는 내 존재가 바탕, 원판, 원천, 시작점 이것과 연결이 되면서 말씀이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하는 순간 백성이 되었더라. 천국이 있으라 하며 천국의 백성이 되었더라. 네가 의인이라 하는 순간 의가 내 안에서 생겨났더라.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주의 말씀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나라는 것은 나 자체는 허망하니까 기억에 불과하니까 말씀이 나를 그냥 두지 않고 새로운 나로 매일같이 교체하게 됩니다. 정수기 설치해놓고 정기적으로 정수기 필터 교체하러 오잖아요. 주께서는 성도 하나 꽂아놓고 그 속에 매일 말씀으로 이렇게 교체를 시킵니다. 교체를 시킬 때 무엇은 떨어져나가야 된다? 어제까지의 나는 환상으로 떨어져나가야 돼요. 어제까지 내가 아무리 믿음 좋고 신앙 좋아도 그거는 어제 분량이에요. 과거 믿음 좋다 어떻게 해도 그건 몇 달 전의 이야기에요. 오늘 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오늘은 오늘의 말씀이 계시매 그것이 오늘치의 말씀의 현장을 드러내야 되지요.그래야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이끄는 대로 그때그때 새롭게 생산되는 내가 될 수 있거든요. 이렇게 돼야 시편 33편이 옛날 구닥다리 말씀이 아니고 날마다 지금 작동하는 지금 여기에 적용되는 시편 33편이 되는 겁니다. 시편 33편 옛날 이스라엘이 시 지은 거고, 이렇데 돼버리면 그 말씀이 옛날 신화가 돼버리죠. 옛날 지나간 일이 되잖아요. 그럼 시편 33편을 찢어버릴까요? 우리와 상관도 없는데 다 지나간 것들인데. 그럴 순 없지 않습니까. 시편 33편 내용은 주님께서 그걸 가지고 지금 오늘날 그대로 우리에게 시편 33편의 사람이 되라고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는 겁니다. 시편 32편도 마찬가지고. 시편 1편도 마찬가지고. 모든 창세기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이거는 됐고라고 넘길 수 없어요. 성경공부 해봐야 우리 기억 속에 들어가고 이 기억은 환상과 허상과 허구에 불과합니다.환상과 허구는 바탕, 원판과 닿지 않기 때문에 붕 떠있는 상태지요. 붕 떠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아까 어떻게 이야기했지요? 어제까지 나, 셀프는 말씀으로 이걸 파괴시키지요. 만약에 어제 나가 파괴 안 되면 사람은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아가 자기의 자존심을 만들어내요. 나 이 정도야, 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 건드리지 마, 나 과거에 이렇게 잘 나갔어, 이렇게 되잖아요. 이거는 바로 허망한 겁니다. 그런 걸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스타일. 그게 바로 스타일인 거예요. “너만 잘났어. 나도 과거에 잘 나갔어. 애들 셋 다 키웠어, 내가.” 그게 바로 스타일이에요. 애들 셋 키웠다고 자랑질하니까 옆에 여섯 명 키운 사람이, “까불지 마. 나 여섯 명 다 키웠어. 대학 다 보냈어.” 이러면 세 명 키운 사람은 음매 기죽어, 하고 쑥 들어가지요. 어느 게 진리입니까? 진리가 어디 있어요? 하나의 스타일인데요. 진리란 게 인간에겐 없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진리가 없습니다. 왜? 내가 진리를 방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이 말씀을 방해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제까지 축적된 나에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듯이 오늘의 나는 네가 여기 있으라 하는 말씀에 의해서 여기 있는 거예요. 어제까지 악착같이 살았다고 그 여력으로 밀어붙여서 오늘까지 사는 게 아닙니다. 어제까지 심장이 뛰더라도 오늘 심장 뛰고, 안 뛰고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내 소관은 아니에요. 그래서 어느 강의 때 그런 말을 썼는데 강남강의에서 쓴 문장인데 여러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쓰겠습니다. 이 문장이에요. 비슷한 말인데 [왜 내가 여기 있지?] 이걸 본인한테 물어볼 수 있겠지요. 왜 내가 여기 없지 않고 아직도 여기 있느냐 하는 거예요. 답변은 이렇게 해요. 미친 것 아니야? 너무 말이 험하잖아요. 고상하게 바꿔야지요. 신비롭다. 이게 무슨 노래의 내용이냐? 새 노래의 가사입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부로 인생 끝나야 되는데 왜 여기 있지? 이게 새 노래에요. 이유가 뭐냐 하면 빛이 없을 때 빛이 있으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말씀은 모든 것을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고 없는 것에 말씀만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오늘도 살아, 라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가 여기에 살게 하는 겁니다. 나의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되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고집이에요. 피조물에게 밀리지 않습니다. 피조물들은 어제까지 살았으니까 오늘도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피조물의 고집이거든요. 창조주는 그런 인간들의 요구사항을 일절 거부합니다. 기도할 때도 살게 해달라가 아니라 오늘 치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가 돼야지요. 뭐긴 뭐겠어요? 말씀대로 살면 되지. 말씀이 새롭게 주어지니까 오늘 치 받은 말씀이 뭡니까? 말씀이 내 존재나 내 목숨 줄이나 내 생존보다 늘 우선된다니까요. 왜 우리가 이런 생각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에 신체가 있습니다. 신체를 무엇이 꽁꽁 둘러치느냐 하면, 신체를 뭐가 꽁꽁 묶느냐 하면 나가 이게 둘러쳐요. 그렇게 되면 이 신체는 누구 것이냐? 나의 것이 됩니다. 이 몸이 이 신체가 나의 것이란 것은 성경말씀 어느 구절에 나옵니까? 성경에 이 구절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내 몸이 내 것이란 게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진리가 아니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78억의 인구 가운데 내 몸이 내 몸 아니라고 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 세상 전체가 비 진리지요. 전부 다 허구지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간다고요. 말씀은 생각 안 하고 남들 보면서 흉내 내면서 모방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저 사람 잘 사니 따라 붙여야 되겠다.” 맨날 남 모방하면서 살아가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드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만들고 이걸 붙들고 살아가요. 이게 진리인 양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 스타일은 자기의 자아를 대표합니다. 간섭하지 마라, 이게 내 스타일이다. 이건 진리가 아닙니다. “간섭하지 마세요. 이거는 주께서 주신 말씀의 선물입니다.” 이러면 돼요. “간섭하지 마세요, 잔소리하지 마세요. 이건 내 스타일입니다.” 그때 뭐가 잘못이냐? 내가 들어갔잖아요. “간섭하지 마세요. 이건 오늘 치 주께서 주신 분량입니다.” 여기서 뭐가 빠지고 뭐가 들어갔습니까? 나가 빠지고 말씀이 들어왔잖아요. 하여튼 생각하는 건 참 쉽지요. 이해하면 굉장히 쉽지요.
새노래는 인간에겐 불가능-하나님의 강제조치-말씀과 인간세계의 전쟁
이게 실천은 불가능한 거예요. 왜 불가능하냐? 인간은 자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존재에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강제조치가 들어갑니다. 인간은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조치가 들어가요. 그러면 주님의 강제조치는 오늘 강의에 의하면 어떤 조치냐? 뻔하지요. 주의 말씀이 뭘 공격한다? 주의 말씀이 나, 또는 자아를 공격하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또는 실제가 또는 진실이 허구를 공격한다. 왜? 내 자신이 나밖에 모르는 내 스타일만 고집하는 그 자체가 허망한 짓이기 때문에. “난 평생 내 고집대로 했다.” 그게 뭐 자랑이라고……. 그게 자랑입니까? “건드리지 마라. 난 내 고집으로 산다.” 그게 무슨, 나 지옥 가, 이게 자랑이에요, 그래? “주님의 말씀이 나를 건드린 적이 없어. 꼴좋다.” 그래서 버림받아라. 그걸 자랑이라고. 어떤 사람은, 나 담배 피운다, 그걸 자랑이라고. 그것이 나는 내 고집으로 산다는 것이 왜 잘못인지 모르느냐 하면 얼굴에 박힌 게 눈이라고 남 살아가는 그걸 따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대충 같이 휩쓸리면 얼추 중간은 하겠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시편 33편 6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뭘 만들었느냐? 하늘을 만들었다. 둘째 날 이야기에요. 하늘은 그냥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 정도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 말씀이 돌 판 된 게 십계명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천지를 만드신 거예요. 율법에서 ‘율’자 빼버리면 하나님의 법으로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법에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법에 위반되면 하나님께선 자기의 법대로 피조물이 만들어지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그걸 파괴시킵니다. 그걸 저주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를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우리는 짝짝짝 박수로서 주님의 권한을 찬양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새 노래에요. 새 노래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파괴하심에 대해서 찬양하는 내용이 새 노래로 담겨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죽이시는 일을 하심에 찬송해야 되고 찬양해야 돼요. 뭐 지 사업 잘되고 몸 건강하고 이것만 자꾸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땅의 내 목숨을 앗아가는 그 일에 대해서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짐에 대해서 찬양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야 내 몸이 말씀의 것이지 내 몸이 내가 만든 내 것이 아님을 우린 분명히 알지요. 그리고 7절에 보면 하늘만 만든 게 아니고 물, 그 뒤에 땅도 나오지요. 8절에 보면 누구도 만드는가? 거민, 사람도 만들어요. 다 만들었습니다. 자, 시편 33편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 만들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이겁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다. 그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전쟁터입니다. 자, 방금 제가 강의를 했기 때문에 무엇과 무엇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은 이제는 알게 되실 거예요. 말씀과 누구와 전쟁해요? 인간세계, 본문 8절에서는,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 사람이죠. 인간세계, 사람의 세계와 여기서 전쟁을 하는 겁니다. 전쟁을 벌일 때 인간세계의 무기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무기가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내려다본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16절에,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그렇게 돼 있지요. 여기 말 나오잖아요. 영어로 하면 horse, 타고 다니는 말을 말하는 거예요.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전쟁터에서 인간들이 내세우는, 전쟁에는 무기가 있어야 되니까 이 무기가 인간들에서 나오는 무기들이에요.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무기. 그런데 인간의 무기를, 잘 들으셔야 돼요. 중요한 겁니다. 인간의 무기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었습니까, 안 지었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컴퓨터를 하나님이 지었습니까, 안 지었습니까? 컴퓨터, AI, 자동차, 기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고요? 다시 할게요. 말씀으로 짓지 않은 것은 파괴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 컴퓨터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안 지은 거죠. (인간에게 지혜를 줘서 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에게 지혜를 줘서 그 지혜가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다른 영에 의해서 인간의 지혜가 생긴 거예요. 인간의 지혜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이 방향성은 순환구조를 갖고 있어요. 나로부터 나갔던 지혜가 그 결과가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 나의 영광으로 돌아와요. 이게 인간의 모든 지혜입니다. 예를 들까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이거 죄에요, 죄 아닙니까? 죄지요. 왜냐하면 ‘나’가 들어가거든요. 내가 시작한 일은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에게로 돌아와요. 믿습니다, 라는 말을 집어넣었든, 예수를 집어넣었든, 십자가를 집어넣었든 나로부터 출발한 것은 전부 다 죄가 되어 나한테 되돌아와요. 그러니까 기독교나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교회도 허망한 거예요. 자동차 천국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동차, 오토바이 천국에 타고 돌아다니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거는 인간이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솜씨, 내 지혜가 다 나온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지시한 언약궤 천국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상자로 만든 것 없습니다. 모조리 다 부셔져요. 그래서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안 해서 그런데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지었잖아요. 말씀으로 지은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어지는 거예요. 옛 하늘과 옛 땅은 다 없어져요. 인간은 거하는 사람은 물론 없어지고요. 노아 홍수 때 사람들 어디 갔습니까? 물속에 빠져죽었지요. 노아 방주 어떻게 됐어요? 아직도 박물관에 있습니까? 없어졌지요.
범죄할 때마다 역사가 끊긴다-영적요소와 수직적 접합의 계기
이걸 한꺼번에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데 뭐로 구분하는가? 범죄로 구분해요. 범죄 할 때마다 여기서 역사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범죄 하도록 유도하는 거죠. 첫 번째 범죄가 뭐였습니까?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었지요. 범죄 하는 순간 여기서 뭐가 내려오느냐? 영원의 요소가 와요. 그걸 영적 요소라 하는데 여기에 뭐가 침범하느냐? 악마의 영적 능력이 인간세계에 침범하지요.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요. 범죄지요. 범죄 하면서 악마의 영적 요소가 인간세계에 침투하게 되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다가 끊어지면서 인간세계만 눈에 보이는 그게 다라고 하는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배후에 악한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게 시간의 틈이 갈라지면서 그 틈 사이에 영적 요소와 수직적으로 접합이 되는 계기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앞의 역사와 뒤의 역사가 끊어지면서 영적 요소가 개입된 채 다시 이어져서 그다음 시대로 흘러가는 거예요. 지나온 모든 역사의 최후의 마지막 범죄 역사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렇지요. 십자가지요. 십자가에서 주님께선 다 이루었다 했단 말이에요. 다 이루었다 하면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금에 있는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모조리 다 파괴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헨델의 메시아도 마찬가지고 음악, 예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전에는 물로서 사라지게 했는데 마지막 땐 뭐로 사라지게 합니까? 불로 태워서 사라집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그걸 세례라 하는 거예요. 세례의 특징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게 기본이에요. 세례에서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동창회 됩니까, 안 됩니까? 동창회 안 됩니다. 강원도 놀러가는 것 소용없어요. 동창회 성립 안 됩니다. 자, 부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부모자식 관계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 관계없어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세례 관계에서는 기존의 인간 대 인간의 인위적인 모든 관계는 다 헛방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타인과 하나 된 적이 없어요. 인간은 자아의 기억 중심이기 때문에 아무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해서 백날 붙어서 평생 부부해도 따로 놀아요. 모든 생각과 심지어 잠자리를 같이 해도 꿈은 따로 꿉니다. 부부가 하나 된 적이 없어요. 친구와 하나 된 적도 없고. 왜 그러냐 하면 하나 되고 싶지요. 하지만 자아가 범죄로 인하여 위에서 뭐가 왔습니까? 영적 요소가 개입되어 이 자아가 신체라는 자아를 악마의 지혜로 인하여 감아버리니까 인간은 끝까지 혼자 갑니다. 생각이나 자존심과 가치, 의미 끝까지 혼자 그걸 그냥 쥐는 게 아니고 꽈악 쥐고 갑니다. 요양병원에 가도 꽉 쥐고 입니다. 안 놔요. 요양병원에 들어갈 때 노인들이 얼마나 발악하는 줄 알아요? 내가 집 놔두고 뭐하려고 미쳤다고 여기 들어왔느냐. 인간은 영원히 홀로입니다. 그 홀로를 주께선 죽여 버리죠. 지옥 가서나 혼자놀이 많이 해라. 그래서 비유지만 그 비유로 하신 주께서 하신 나오는 등장인물이 뭐냐?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 부자가 지옥 가서 내뱉는 모든 대화가 전부 다 뭐냐? 자기밖에 몰라요. 가서 지는 끝났으니까 동생 걱정 다섯 명 하고. 그 동생이 남의 동생 아니고 자기 동생이에요. 인간은 자신의 확장이에요. 모든 인간들의 친하게 지내는 것은 나와 확장입니다. 나한테 잘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내가 일방적으로 판단해서 받아들인 거예요. 같은 동향이냐?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우리 아는 같은 집안이냐? 같은 교인이냐? 거기에 따라서 진리가 그때그때 달라요.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다 달라집니다. 나와 얼마나 좋은 관계로 엮이느냐, 아니면 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내 돈 떼어먹은 사람은 철천지원수 지옥이나 가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 돈 건드리고 내 자존심 건드리면 너는 내 자식 아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악마의 전쟁상대는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들었습니까? 악마가 하나님을 대든 이유를 아시게 되면 인간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 같은 한 통속이기 때문에 딱 통해요.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들었느냐 하면 악마가 예수님에 대해서 주가 되게 하신 것에 대해서 반대해서 악마가 된 거예요. 악마가 하나님께 대든 게 아니에요. 악마가 하나님의 아들 주에게 대든 거예요. 그래서 악마의 종교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을 숭배하는 거예요. 신을 숭배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의 종교에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 이게 악마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특수한 이스라엘에서는 뭐냐?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 이걸 줄이면 주가 됩니다. 주의 특징은 뭐냐? 언약을 갖고 있어요. 이쪽은 이 세상의 종교는 언약이 없어요. 나는 인간이고 신은 신이니까 신을 경배하는 이게 좋은 관계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모든 종교가. 특히 천주교 같은 경우에 그렇지요. 예수님 중심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핵심은 하나님을 뭐로 바꾼다? 하나님은 우상이었다. 여호와가 우상이었다. 사울이란 사람이 여호와 잘 섬기려고 예수 믿는 사람 죽였을 때에 사울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까, 주님이 나타났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나타났지요. 부활했다는 말은 언약을 완성했다는 뜻이에요.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 아까 바탕이 되고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오셔서 하는 말이,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악마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욥기 1장에 나오고 스가랴에 나오고 심지어 야고보서 2장에 나옵니다. 악마도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떤다. 부들부들 떤다는 거예요. 악마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시비 걸지 않아요. 다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간에 심판주가 따로 끼어들 이유 있음에 대해서 악마는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내가 하나님 섬기는데 왜 십자가 지신 나사렛 예수가 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간에 끼어드느냐, 죽여 버리자. 그래서 나온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유대인에 의해서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어요.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구원자, 심판주로 만든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게 복음이 아니에요. 그건 개나 소나 다 아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절에 가는 사람도 아이고 하나님, 이럽니다. 신은 모든 인간이 신을 알고 있어요. 그거 안다고 성도가 아니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끼어드느냐를 알아야 돼요. 내 인생에 대해서 왜 끼어드느냐? 네가 악마와 한 통속이니까 끼어들었지요. 네가 하는 품새가 네가 모든 스타일이 내 고집이 자아가 누구 작품이에요? 악마의 작품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게 악마의 작품이라고요. “오늘 치의 인생은 주께서 말씀으로 허락한 겁니다.” 이게 아니고 “평생 나는 자아를 이렇게 구축했으니까 건들지 마세요.” 이게 인간의 기억 아닙니까, 이게 자아고. 어떤 사람이 내 차를 툭 치고 갔다. 이 정도면 좀 성질나더라도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지. 그것 뭐 흠집 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용서해준다. 그 정도는 용서되는데 내 말에 토 단다든지 나한테 약간 인상 그리면서 할 때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차는 용서하고 돈 오만 원 사기 당한 건 용서가 되고 내 자존심 건드리면 이거는 용서가 안 됩니다. 나는 남편 바람피운 건 용서가 되도 친정 건드리면 용서가 안 돼요. 존재 자체를 건드리면 안 돼요. 인간의 존재 자체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아까 뭐라 했습니까? 역사에 영원히 파악되려면 역사에 금이 가야 되지요. 역사에 홈이 패어야 됩니다. 홈 패이려면 나의 역사가 주님 앞에 뭐로 등장해야 돼요? 범죄자로 등장해야 되지요. 범죄자로 등장할 때 나의 바탕, 근원도 등장하고 그다음에 내가 허망한 허구적인 자아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도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세계가 언약의 세계고, 언약의 세계가 율법의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는 저주도 있어요. 저주, 그리고 축복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조건 기도할 테니까 내 기도 들어 달라, 하는 이런 것은 너무나 무지막지한 일방적인 자기의 요구에요. 언약대로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버리시는 것도 찬양합니다. 주께서 저를 그리스도에게 끊어지게 한다면 그것마저도 찬양합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잖아요. 주께서 저를 끊어지게 한다면 그것마저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오케이. 그것조차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저는 흔쾌히 그걸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나라는 자아 자체가 이미 범죄자로 인하여 이게 내가 쥐고 있을 나의 대상이 아니라 이게 어디로 넘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심판과 재판에 피고로서 용의자로 이미 넘어가 있는 상태를 내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무슨 사건에 의해서 그걸 발견한 거예요? 십자가 사건에 의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지요? 로마서 3장 10절에 나오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씀의 세계에 우리를 거기다가 던져 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일체 못하지요. 이미 자아의 고난에서 넘어가버렸으니까. 언약의 세계 안으로 넘어가버렸어요.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 넘어가버린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런 상태다. 오케이? 오케이. 그럼 그걸 그대로 그러한 오케이 상태가 우리가 근원과 닿아있으면 그 말씀의 세계가 우리 입을 통해서 튀어나오면 그게 바로 새 노래지요. 뭐 가락을 붙여야 노래가 아니라 그냥 삶이란 자체가 새 노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주님 앞에 저주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게 진리인 줄 알지만 그래도 내가 지옥 가면 나만 손해인데 그럴 순 없나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디까지나 어제까지 구축된 나에요. 아까워 죽지요. 평생 천당 가려고 교회 오십 년 다녔는데 이제 와서 파토 나버렸으니까 아까운 거예요. 자, 아깝다. 누가 아깝단 말이에요? 내가. 아깝다, 그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은근히 반항하기. 반항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립니까? 감사 날아가지요. 새 노래 날아가지요. 이건 항의거든요. 항의, 또는 항변.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상태가 인간의 흔한 모습이에요. 이 세상의 흔한 모습이에요. 이건 표준말이지만 안 좋은 말인데 경상도 말로 주둥이라고 하는 거예요. 늘 평소에 사는 자체가 주둥이가 튀어나온, 앵그리버드라 하는데 늘 화난 상태가 돼요.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그걸 차마 말은 못하고 안으로 삭이면서 화난 상태로 나가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첫째 마쳐볼게요. 이게 무대입니다. 말씀을 작동하는 무대에요. 그러니까 인간세계가 죄 짓는 것은 하나님 앞에 꼭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무대가 돼요. 브레히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브레히트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연극배우는 반드시 연기임을 드러내면서 연기해야 한다.” 상당히 의미 있는 이야기에요. 연기임을, 이거는 실제가 아니고 연기임을 드러내면서 연기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과 똑같이 해버리면 이거는 무엇에 혼동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것이 연극무대란 사실을 관객들에게 잊게 만든다는 겁니다. 실재세계와의 차이를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에게 이 말씀이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나에게 하는 모든 일은 내 이익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익을 위해서 하면서 이게 뭐다? 내가 육신이 있는 한 더러운 육신, 욕망이 살아 있는 한 내가 이 세상 무대에서 나는 뭐다? 죄인이라는 가면 뒤집어쓰고 하는 나는 연극배우임을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 그 차이가 성도입니다. 차이가 성도되게 해요. “주여, 내가 이런 주장했는데 이것 죄인 것 아시지요.” 왜? 세상을 이렇게 연극무대 만든 연출자는 주님이란 걸 알기 때문에 나에서 어떤 진실감과 순수함조차도 그게 주님 보시기에 뭐가 된다? 그냥 연기 피우는 거예요. 아주 야무지게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연기, 그것을 너무나 성도가 알기에 주께서 그걸 지적할 때에 그걸 흔쾌히 감사함으로 지적해주셔서 감사함으로 우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20220613b 부산강의 : [시편]49(33:17)-상다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니다.
복음을 안다 해놓고 결국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주께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라는 그 대목에서 전부 다 쿠당탕 넘어지고 코 깨지고 다 해요.
신과 인간이 같이 사라진다. 이것이 언약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이 무대에서. 하나님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진다는 것, 이게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죽고 이 땅에서 사라질 때 예수님이 그냥 아픈 척 연기했습니까, 진짜 죽어버렸습니까? 진짜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뭘 받았나? 저주받았지요. 그 저주에 합류시켜준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 줄 몰라요.
자아는 가면 속에서 작동하거든요. 주님께선 이 가면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숨지 말고 내 앞에 나와라. 내 앞에 나오면,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상이 있잖아요. 한국에 앉아서 먹을 때 상 펴잖아요. 보통 손님 올 때 잔치할 때 앉을 때 이 상다리는 평소에는 접이용이에요. 접어서 벽에 세워놓지 않습니까. 이 상다리가 성도고 본 테이블은 주님이에요. 주님 가신 길에 상다리가 안 따라갈 수 없어요. 같이 있어요. 같이 있으니까 주님이 가신 그 길, 주께서 저주받게 하신 그 길이 부활의 주님이 되는 그 길이라면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그 저주가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셨잖아요. 저주받고 사흘 만에 부활되지 않았습니까. 그 길에 같이 합류한다는 것, 합류하니까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서 그게 주님이 한 일이란 걸 통해서 나는 주님의 상다리에 해당됨을 다시 한 번 실감하지요. 이걸 달리 하면,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나를 망하게 하시는 일이 곧 지금 주의 일이다. 뭘 집어넣어야 되느냐? ‘망하게’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돼요. 이것 안 집어넣으면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다, 이렇게 되게 되면 이건 모든 종교에서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슬람, 기독교, 불교 모든 종교에서 모두 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다 부처님의 은혜다, 주의 은혜다. 이것 누가 못해요. 어느 산당에 가도 교회란 이름의 산당에 가도 다 이 소리해요. 이게 있어야 돼요. 나를 망하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주부가 되게 하고, 나로 하여금 집사나 목사가 되게 하고, 나로 하여금 학원에 취직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자동차 운전하게 만들고, 또는 농사짓게 만들고, 고기 잡게 만들고. 지금 내가 하는 일, 카페 오너로 있게 하고 내가 하는 이 일은 이 코스로 가야 내가 망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나를 망하게 하는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에요. 내가 안 망하면 내가 살아 있으면 내 손에 괴물이 살아 있는 거예요. 좀비가 따로 없습니다. 지금껏 시집 와서 취직한 적도 없고 나는 애 둘 키우는 이것만 했다. 그게 바로 나를 망하게 하는 나의 스타일이에요. 안 망하는 길은 없습니다. 왜? 주님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망하는 길이 곧 천국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 ‘자기’가 뭡니까? ‘나’지요, 나. 누구든지 나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물 건너간 거예요. 그래서 지 잘난 척하는 스타일 주장하는 사람들 다 모인 곳이 지옥입니다. 거기 가보면 시끄러워요. 민들레가 어떻고 수박이 어떻고. 거기에 민주당 있고 국민의 힘도 있고 많아요. 거기 모여서 맨날 케이블 바꾼다고 하루 종일 다 보내요.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인 이유가 그 속에 나라는 복수의 나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저런 식으로 망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망하는구나. 그 망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주 앞에서 새 노래로 감사하고 찬양해야 되지요. 그러면 이렇게 해도 우리는 또 하기를 내가 왜 굳이 망해야 됩니까, 라고 한다면 아까 전쟁터라 했지요. 전쟁터에서 인간은 그냥 빈손으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기가 있습니다. 이 무기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방민족 다 때려치우고 오직 자기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이 무엇이며 진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 택한 이스라엘을 시범으로 삼아서 거기서 다 보여줬는데 그 보여준 내용이 시편 33편이에요. 자기 백성 안에서 먼저 그걸 보여줬습니다. 오늘 본문 33편 17절 다시 한 번 읽고 사무엘상 보겠습니다. “구원함에 말(horse)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돼 있지요. 사무엘상 17장 47절에 보면, 이게 다윗과 골리앗이 전쟁하는 가운데 있어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이 전쟁의 이유가 그렇습니다. 전쟁할 때 인간들이 내세울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 전쟁에는 소용없고, 소용없는 정도가 아니고 그 무기를 부셔서 인간의 자아를 부수는 것이 하나님 전쟁의 이유겠지요. 잠언서 21장 31절에도 비슷한 말 나옵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우리 인간이 준비하고 있는 이김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인간이 인생에서 이긴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출세했다, 성공했다 이 말이에요. 인간의 전쟁터에서 인생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승리는 도로 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이것뿐입니다. 이걸 세 자로 줄이면, ‘도로남’이에요.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순환구조를 갖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악마로 시작해서 악의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자기 스타일 고수하면서 망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상다리라 했지요. 어차피 우리는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그런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두뇌작용이 나를 버리면서까지 하는 그런 두뇌작용으로 훈련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두뇌가 자체적으로 자기의 프레임, 또는 자기의 원칙을 만들어내요. 자기 원칙은 반드시 나의 이익이 원칙이에요. 나한테 좋으면 선이고요 나한테 나쁘면 악이 돼요. 그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이게 선이냐, 악이냐를 판별하는 그 절대적인 중심자리에 자기를 꽂아놨기 때문에 아무리 옳고 그름을 따져도 결국은 누구 좋으라고? 판단하는 나 좋으라고 그 선악체계는 윤리도덕은 그렇게 작동하게 돼 있어요. 자아가 상상의 구성물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전쟁, 이 전쟁이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전쟁하는 나라인데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자기의 가마로 여기고 전차로 여기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타고 누구와 싸웁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쪽과 싸우지요. 전쟁 보세요. 한쪽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쪽이고, 한쪽은 하나님이 없는 쪽이에요. 그러면 전쟁은 누가 이기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잖아요. 하나님의 의로 승리한다고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하고 저쪽은 더럽기 때문에 거룩이 반드시 더러움을 이기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쪽에 이스라엘은 뭘 준비해야 됩니까? 말을 준비해야 돼요, 창을 준비해야 돼요, 활을 준비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가, 그걸 생각해야지요. 왜? 주의 이름 자체가 무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주의 이름이 있다는 상자가 무슨 상자냐?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이 벌이는 전쟁, 주의 이름 중심으로 벌이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언제 지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중심이죠. 이걸 이스라엘이 역사와 시간이 지나면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서 내가 속해 있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주의 이름을 여기다가 도용한 거예요. 이용한 거예요. 그게 언약궤 빼앗긴 사건이에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 하면서 언약궤 앞장세웠는데 홀라당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겨버렸어요. 주의 이름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무 무기가 없는 이스라엘을 또는 소년 다윗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찬양되고 주의 이름이 승리해야 되는데, 홍해 건너올 때 그 사람들 무기 뭐 있었습니까? 없잖아요. 그래도 바다는 갈라졌고, 요단강은 갈라졌잖아요. 주의 이름 자체가 되고 주의 이름을 이스라엘 앞장세울 때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음이 되는 거예요.
소년 다윗이 뭘 내세웁니까? 소년 다윗이 돌 던져서 골리앗 이겼다고요? 그러면 블레셋 쪽에서, “야 한 번만 더하자. 삼세 판 하자.” 하면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그다음부터는 돌에 안 맞도록 얼굴 다 가려서 나올 텐데요. 안 되지요. 물맷돌로 이긴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으로 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솜씨가 좋아서 그 솜씨로 골리앗을 이긴 게 아니고 하필이면 이마를 막는 투구, 그 투구 사이의 빈틈을 주께서 돌이 가서 부딪치게 했고, 그것도 남자가 돌 한 번 맞는다고 죽으면 안 되잖아요. 하필이면 맞아죽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소년 다윗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이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은 안 보이잖아요. 총, 칼, 수류탄 눈에 보이잖아요. 이스라엘이 보이지 않는 이름 중심으로 해야 될 텐데 자기가 중심이 되어 주의 이름을 무기로 사용해서 내 것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오늘날 대표적으로 이 짓을 하는 이스라엘 중심으로 주님 이름 부르는 동네가 무슨 동네입니까? 교회지요. 나이 많은 장로들 자본금 대고 교회 하니까 젊은 아들 안 나오지요. 그저 있는 건물 관리는 해야 되겠지요. 형광등 갈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돈 필요하지요. 새로운 돈줄이 들어와야 교회란 기업이 돌아가는데 그게 안 되니까 젊은 목사해서 닦달내고 계속 교인들 모아오라고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요? 노털들 장로들이. 옛날에 부흥되어 예배당 크게 지어놨는데 예배당이 여기처럼 작으면 안 부끄러운데 면적은 큰데 한 백 명 깔아봐야 회 납작하게 깔린 것처럼 듬성듬성 앉아있는 거예요. 교인이 예배당에 와야 축복을 받는다고 그렇게 알고 있던 사람이 코로나 이후에 그게 아니구나, 교회 안 나와도 되는구나, 해서 새로 안 오고 간 사람 안 오고 이래저래 그들 안 오면 돈 안 들어오지요. 중요한 것은 돈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맨날 주의 이름 부르고, 주여 도와주소서. 우리 교회가 커야 부산이 삽니다. 부산 살아서 뭐하는데 지금 부산은 망하려고 하는데 왜 그걸 살려요. 주께서 부산을 불태우려하는데 부산을 왜 살리느냐 말이죠. 왜 주님이 걱정하는 걸 지가 걱정하는지 지가 주님도 아닌 게.
그래서 제가 지금 뜸 들이는 게 뭐냐 하면 아까부터 세례란 게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기 때문에 뜸 들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는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게 안 되는데 우리는 나 중심이에요. 인간 교회 백날 다녀도 소용없어요. 모든 게 나의 이익 중심이에요. 오직 나, only me, 나뿐이에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는가? 출애굽기 33장에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19절, 세례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상다리. 우리가 주와 함께 지옥에도 가고 주와 함께 천국에도 가는 그 상다리, 상 가는데 다리가 안 갈 수 없잖아요. 성도가 자꾸 걱정한다는 것은 자아를 생각하니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어야 될 텐데. 지금 함께 있는데 뭘 걱정이 돼요. 상다리가 걱정하는 것 봤습니까? 상이 가게 되면 같이 붙어서 가게 돼 있는데. 옛날 금성티브이에 채널이 있었잖아요. 또륵또륵 돌아가는 거요. 티브이 본체 가면 그 채널 따로 갑니까? 아니지요. 그 안에 같이 붙어 있잖아요. 화면 있고 올라가는 것 같이 있잖아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어요.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을 잘 믿어야지 하는 것도 쓸데없는 불신앙의 표현일 수 있어요. 말이 안 돼요. 사람이 마귀가 자꾸 자아를 부추기니까 그때부터 “주님을 떠나면 안 돼. 그럼 나는 지옥 갈 수 있어.” 이건 마귀가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함께 있는데 함께 있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자꾸 아버지를 찾는 것은 아버지한테 많이 맞습니다. “니 갑자기 미쳤나?” 같이 있는데 주여, 하고 자꾸 아버질 찾고 있어요? 그냥 살면 되지. 주께서 망한 길로 해서 우리를 구원 가는 길로 인도하시면, 아 내가 이래서 망하는구나. 월 이천 받고 땅 한 이십 만 평 있는 것 이래서 망하는구나. 뭐든지 되어진 일이 망하는 방식으로 주와 함께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이거든요. 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출애굽기 33장 19절 누가 읽어보세요.나는, 여기 나는 주님이죠. 주님은 여호와께서는, 그다음에 뭐라고 됩니까? 핵심부분만 하세요.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 보세요.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렇지요. 주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것은 주님이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데 인간세계에서는 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서로 주고 왕래가 가능해요. 그러나 주님이 은혜를 주는 것은 너의 요구사항이나 네가 기대했거나 네가 원한 것과 상관없습니다. 나를 마치 아예 없는 자처럼 만들어서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은혜 받을 자를 나중에 만들어내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상을 먼저 만들고 상다리는 뒤에 만드는 거예요. 이 상이 뭐냐? 은혜와 긍휼에 따라오라고 세트도 아니에요. 그냥 같이 붙어 있는 걸로 상다리 성도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인간들만 있기 때문에 성도가 없어요. 그럼 성도는 언제 나타나는가? 은혜가 나타나면 필히 성도도 은혜와 더불어서 은혜의 수혜자로서 받는 자로서 같이 등장하게 돼 있습니다. 이걸 세례라 합니다. 이 세상에 세례는 이것이, 모든 인간은 단독이거든요.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은 개인위주입니다. 개인한테는 세례라는 것이 형성이 안 돼요. 세례는 연합이 돼 있거든요. 긍휼이 등장하면 긍휼 주는 자가 등장하게 되면 반드시 필히 긍휼 받을 자가 같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게 세례입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야곱을 사랑하는 그 뜻이 먼저 있고 야곱은 나중에 태어나요. 야곱아 사랑해줄게, 이게 아니고 이미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만들고 창세전에 그걸 먼저 생각해놓고 사랑받을 자를 사랑받기 위해서 야곱이란 인간이 태어났어요. 그다음에 야곱의 형 에서 봅시다. 에서는 뭐하기 위해 태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미워할 자를 미워하시고 미워할 자를 위해서 에서가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미움 없이 사랑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하늘과 땅, 거민, 그 사람들은 영적 세계의 투쟁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의 전쟁, 그건 누가 누구와의 전쟁입니까? 주님과 악마의 전쟁이죠. 악마는 하나님과 전쟁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과 전쟁해요. 그래서 성경에 주의 원수에요.
주의 원수는 언제 함락이 되는가? 내 주께서 내 주에게, 하나님이 아들 주에게 오셔서 그 악마의 힘 있잖아요. 어떤 인간도 이길 수 없는 어떤 인간도 자아를 못 이겨요. 자아 속에 갇혀있습니다. 모든 이익 위주로 하는 것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그걸 이겨버린 인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귀를 이긴 게 아니고 친히 악마의 권세 안에 들어가요. 그게 광야에 사십 일 금식하면서 시험 받은 거예요. 십자가까지 인생 전체가 그래요. 악마에 들어가 보면 예수님 외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완전히 드러내는 겁니다. 악마가 다른 인간은 다 붙잡을 수 있어요. 심지어 베드로도 악마는 잡을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진심을 다하여 내가 주를 위해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교회들 보면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많습니다. 그런 고백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가 구원 받겠다는 이익을 위해서 그냥 내질러보는 소리에요. 인간의 본성이죠. 아까 이스라엘 중심으로 주의 이름을 이용하는 그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주를 위해서 뭐든지 하겠습니다. 아골 골짜기고 뭐고, 아골 골짜기가 요샌 어딘지 모르겠어. 북한에도 가겠습니다, 이런 것. 우크라이나도 가겠습니다. 뭐든지 가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왜 자꾸 돈 없인 아무것도 안 되니까. 결국 그 말은 뭐냐? 돈 달란 이야기에요. 싶어도 돈 없어 못한다는 뜻이에요. 돈이 인간의 무기에요.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무기가 되고 말았어요, 돈이. 아무리 신앙해도 돈 없으면 주의 일 못하고 주의 일 못하면 신앙 없는 사람 되니까 자존심 상한 거예요. 돈 있어서 나눠주면 얼마나 사람이 삐까삐까 폼이 납니까. 주께서 하시는 이 전쟁이 예수님은 하늘에 있다고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악마와 이겼다는 그 바탕이 있어줘야 돼요. 누가 요한복음 16장 33절 읽어보세요. 크게 읽어보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가시는 코스, 이 코스는 성도가 가는 동일한 코스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살면서 이러다 진짜 망하겠다. 예수 괜히 믿었네. 이쯤해서 예수 믿는 것 포기하면 내가 안 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돼 있어요. 예수 안 믿는다는 뭐냐 하면 대충 남들 살아가는 것처럼 보냈으면 좋겠다. 인간의 본성은 환란을 당하고 이기는 게 아니고 아예 환란 자체가 안 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걸 경상도 말로 “제발 내비 둬.” “좀 가만히 놔둬. 나 조용하게 살래. 나는 내가 불편해지는 것 제일 싫어.” 사람이 자기가 불편해지는 게 제일 싫어요. 불편해지는 이유는 뭐냐? 환경이 달라질 때 인간은 불편해 하거든요. 이사한다든지, 혼자 잘 사는데 갑자기 자식이 와서 요양병원에 등록했다 한다든지. 어머니, 자식들이 바빠서 정기적으로 돌보지 못하겠습니다. 반찬 해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반찬 해대던 둘째 딸은 요새 학원에 취직해서 못 옵니다. 그러니 우리 불편하니까 자식들 다 불편하게 하지 마시고 혼자 요양병원에 가시면 불편 감수하시면 자식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렇게 협상하자고 나오지요. 정기적으로 면회 갈게요. 그 말은 헛말, 소용없고. 그럴 때 부모는 이야기하죠. 내가 언제 너한테 효도해 달라 하던가. 나는 너희들 시집장가 보내고 일체 기대 안 했다. 내 연금 타고 그것으로 생활하고 나는 혼자만 편안하게 살다가 안 찾아와도 되니까 그만 고독사로 죽을래. 그냥 내비 둬. 조용하게 살래. 나는 불편해지는 게 제일 싫어.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건들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 누구 마음이었어요? 나, 자아, 절대성이거든요. 이 절대성 누구의 마음입니까? 이게 바로 악마의 마음이에요. 악마가 피조물 되길 싫어한 거예요. 피조물 시킨 대로 하되 선과 악에 대해서 내가 판단하지 나 말고 예수라는 심판주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악마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슬람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모든 종교가 누구에게 대적하느냐? 예수님의 심판에 대해서 대적합니다. 그 비슷한 내용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나와요. 소설이지만 예수님이 재림하려고 하니까 거기에 러시아정교회 최고 높은 사람 있지요. 푸틴 보고 전쟁하라고 칭찬하는 사람, 러시아정교회 그 사람이, “예수님, 우리가 알아서 하는데 왜 오십니까?” 우리가 알아서 교인들 관리 잘하고 있는데 왜 오십니까? 당신은 이스라엘, 우리 교회를 주의 이름으로 도와주기만 하면 되지 이 교회는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그렇게 나왔어요. 도스토옙스키 그 사람도 그런 책을 쓰면서도 나중에 니콜라이 1세라는 그 당시의 러시아 황제가 너 까불면 죽인다고 해서 사형을 시켜버렸어요. 도스토옙스키는 그렇게 자기가 신앙적으로 고백을 했지만 그 고백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본인은 몰랐지요. 주님 보시기에 이런 신앙 괜찮게 통할 줄 알았지요. 막상 자기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니까 발발 떨었습니다. 그런데 니콜라이 1세가 장난친 거예요. 자꾸 신앙 있는 척하니까 그럼 죽음 앞에서도 신앙 있는 척할래, 하니까 벌벌 떨거든요. 그것 봐. 너 신앙 없잖아. 악마가 할 일이 그거에요. 우리가 얼마나 신앙이 없다는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악마는 활동하고 있어요. 왜 우리가 신앙이 없어야 되느냐 하면 이 신앙이 나의 신앙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신앙도 이건 독단적이에요. 홀로 사는데 필요한 신앙과 소망과 사랑, 이게 인간의 본성과 부합됩니다.
그런데 세례는 뭐냐 하면 나의 존재 자체를 어떤 나를 지키는 무기를 없애버리거든요. 나를 지키는 어떤 무기, 돈부터 해서 건강 모든 걸 없애버려요. 나를 지킬 게 없어버리면 나 자체가 습자기 같아. 이거는 뭐 어제부로 죽어도 할 말 없게 돼요. 왜? 지킬 게 없으니까요. 언제 죽어도 날 왜 죽이십니까, 할 그게 없어요. 마치 세리와 창기 같아, 예수님 당시에. 절뚝발이 문둥병 같아요.
내가 나를 지킬 어떠한 장점들이 나한테는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주님의 상다리인데 뭐.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힘 쏙 빼서 나를 지키는 무기가 없게 만들어요. 그게 시편 8편에 나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주의 이름으로 찬양케 한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무슨 자기를 지키는 무기가 따로 마련되겠습니까. 한 번 정리해봅시다. 무기란 나를 나답게 지키기 위해 동원된 것. 그런데 이런 무기 있잖아요. 나를 지키는 무기가 네 무기, 내 무기 있을 게 아닙니까. 그걸 다 합쳐버리면 이게 뭐냐? 이게 무너질 환경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따로 뽑아낸 그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세상 환경의 일부에요. 세상 무너지면 내가 갖고 있는 내 무기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아무 소용없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차라리 막달라 마리아나 세리, 창기처럼 그냥 죄인입니다, 이렇게 살면 된다 이 말이죠. 자꾸 의인 되려는 내가 살만한 가치 있다는 무기를 갖고 있으니까 이 무기가 나로 하여금 나를 못 버리게 만들어요. 나는 괴물이거든요. 괴물이 발작을 일으키도록 누가 그렇게 바보짓을 하느냐 하면 내가 바보짓을 하는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면 불편한 것도 없는데, 그렇잖아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 불편할 것도 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가치를 안 놓고 안 빼앗기려고 쥐다보니까 그 쥐고 있는 그것이 너무 힘을 줘서 여기 온 어깨에 갑자기 근육통이 생겨요. 나를 지키려고 하니까 안 아픈 구석이 없네. 계단도 못 올라가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데 내 얼굴은 보지 마라. 네가 나와 같이 상거래하거나 상담할 대상 아니다. 일방적으로 줘버린다.
세레는 두가지
세례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어낸 게 아니고 세례 요한이 한 이야기에요. 하나는 성령세례에요. 또 하나는 불세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성령세례, 불세례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이게 바로 물세례에 근거해서 둘로 나눠져요. 성령세례, 불세례는 왜 물세례에서 나눠지느냐 하면 여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물세례에 합류를 해버려요. 그러면 보세요. 이게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광야에 나가서 세례 요한 만나서 뭘 받는다? 물세례 받지요. 그런데 이 물세례에 누가 들어오느냐? 예수님이 이 물세례에 들어와 버리면 인간이 물세례 받아서 깨끗하게 죄를 씻어준다는 이걸 예수님이 인수인계해버려요.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거든요. 심판주는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분류하는 걸 심판이라 해요. 창세전에 사랑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를 가려내는 그 역할이 심판이거든요. 심판은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가려내는 거예요. 구분하는 거예요. 구분하려면 이게 인간세계 위에 올라가야 구분이 돼요. 인간세계는 구분해봤자 자기 이익을 위해서 구분하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님께서 쳐주질 않습니다. 항상 모든 판단이 자기가 잘났다, 나는 어떤 이익을 봤다, 나는 불편하지 말아야 돼,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모든 선택과 결정이 일단은 나를 챙기고 보거든요. 나부터 잘나고 당연하게 나는 의인이라는 것을 일단 그것부터 챙기고 하기 때문에 이건 반칙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내 편이에요. 사람들이 편 가름할 때 뭘 하느냐? 우리 편, 남의 편하잖아요. 우리 편 속에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필히 자기가 들어있다 이 말이죠. 이런 판단을 주께선 인정한 적 없어요. 인간에서 물세례가 예수님이 개입함으로써 여기서 성령세례와 불세례가 되는 겁니다. 이미 인간 세례노선에서 예수님 노선으로 하게 되면 여기 따라 나올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이 판단은 누구 판단이냐? 일방적인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메시아의 판단이에요.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 일체 하나님께선 그거 헛방입니다. 그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시험문제 내고 내가 푸는 그것 인정 안 해줍니다. 시험문제를 주님이 내지 왜 우리가 내요?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매일의 삶이 문제를 내가 내요. 왜? 그래야 내 잘난 맛에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가 문제 내게 되면 거기서 자기 잘남이 되니까 필히 거기서 저주가 나옵니다. 이런 문장이 있어요. 남을 저주하는 맛에 내가 산다. 그러니까 저주할 대상이 없으면 하루하루 지겨워서 못 살아요. 씹어야 돼요. 고기는 씹는 맛이라니까요. 씹는데 씹는 사람 없으니까 티브이에 연예인들 있잖아요. 가수들 이런 사람들. 난 정동원이 별로더라. 역시 가수는 김호중이지, 이런 것. 또 듣고 있다가 임영웅은 뭔데? 임영웅이 더 낫지. 저희끼리 싸우고. 옛날 우리 어릴 때는 남진이냐, 나훈아냐 학교까지 싸움 번졌어요. 인간은 좋게 라는 게 없어요. 남진을 씹어야 나훈아가 되고, 나훈아를 씹어줘야 남진이 커요. 남진은 전라도, 나훈아는 경상도. 남진 편이었어요, 나훈아 편이었어요? 이렇게 재미없는 인생에서 유일한 재미는 남을 씹는 재미에요. 저주받을 자를 씹는 재미에요. 그래서 선거가 재미있는 겁니다. 일종의 게임이에요. 내가 돈 탔던 그쪽이 승리하느냐? 베팅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산사람들은 맨날 뭐하느냐?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경남은행은 롯데가 5강에 들어가면 가을야구 하게 되면 2프로를 더 줍니다. 이자율이 높아요. 부산은행에서. 그래서 교회는 곁다리고 나의 종교는 뭐냐? 내가 저주받을 사람을 찾아내는 게 나의 종교입니다. 그래야 사는 맛이 나기 때문에. 그리고 씹음으로서 나의 판단은 역시 현실적으로 롯데가 이겼다. 요새 롯데가 잘 나가거든요. 롯데가 13:0 이기고 하는데. 롯데 이겼다 하면 하나님은 누구 편이다? 내가 예상한 대로 되가는 그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게 바로 세례 요한 세례의 문제점이에요. 이러한 남을 씹어야 저주해야 사는 맛이 나는 이 세계에 누가 들어가느냐? 예수님이 들어와 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씹힐 대상이 돼버린 거예요. 도살할 양 같이 가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런 나를 고치지를 못하니까 방법은 뭐냐? 남을 늘 저주하다가 이젠 누굴 저주한다? 나를 미워하는 거예요. 나의 본성을 미워하는 거예요. “주여, 내가 괴물입니다.” 그것도 웃으면서 즐겁게 하는 거예요. 왜? 새 노래니까. 내가 예상도 못한 노래 내용이거든요. 그 새 노래 부르는 거예요. 그게 상다리에요. 오늘 제목, 상다리로 정해버렸어. 그게 주님의 십자가와 연결된 떨어질 수 없는 상다리. 은혜를 받는다는 말은 죄인이기 때문에 은혜 아니면 안 돼요.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하거든요. 긍휼 아니면 남을 씹어야 맛이지, 이런 인간에게 주님의 속죄와 긍휼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일방적 속죄입니다. 그냥 주님의 속죄에 참여함으로서 속죄되는 거예요. 그걸 뭐라 하느냐? 종합이 아닙니다. 인간에겐 종합 없어요. 그냥 연합, 이걸 세례라 하는 거예요. 같이 하게 하시는 거예요. 주의 뜻대로 우리를 같이 다루시는 겁니다. 어딜 가도 너는 뭐만 해라? 너는 네 본성만 드러내라. 우리 본성이 뭐지요? 씹어야 맛이지, 이게 본성 아닙니까. 내가 판단자고 내가 심판주고 내가 세상을 판단한 그것은 무조건 나에겐 옳은 거고 그래서 나는 잘난 맛에 사는 것, 그걸 평생토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배울 필요 없어요. 타고났어요. 이거는 저절로, 에요. 그런데 그게 뭐다? 고맙게도 내가 몰랐던 이게 죄라는 것을 나를 통해서 내가 알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래야 은혜가 나보다 우선이고 긍휼이 나보다 우선이죠.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뭐냐? 착해야 은혜 받는다는 거예요. 착해야 은혜 받으면 은혜가 은혜답지 못하고 긍휼이 긍휼답지를 못해요. 내 행동 이전에 은혜가 먼저 우선돼야 되고 긍휼이 우선돼야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해도 내 위주의 행동을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럴 때 적어볼게요.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연합되었음, 세례 되었음. 세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뭘 안다? 내가 나의 이익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즐겁게 찬미할 수 있어요. 내가 드디어 주님 가신 길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주님 가신 길이 사람들에게 저주받는데 그 용의자 중에 한 사람이 누구다? 바로 내가 용의자 중에 한 사람이에요. 왜냐? 계속 아담 안에서 태어난 자가 용의자. 내가 주님 십자가의 범인으로서 주님을 핍박하는 자로서 했다는 게 눈에 들어오면 이거는 그야말로 육의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세례 이야기를 계속 해봅시다. 물세례까지 인간이 할 수 있어요. 내가 물세례에 들어감으로서 결정함으로서 죄를 씻으신다는 그것까지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누가 합류했다? 예수님이 합류함으로서 드디어 인간들은 생각도 못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가 같이 연동해서 오는 거예요. 불세례라 하는 것은 세상 전체가 불바다 되는 걸 불세례라 합니다. 다 타버리죠.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지요.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다 타버리는 겁니다. 이 물세례 예수님 자체가 기원입니다. 알파요 오메가, 원천. 원천에서 성령세례는 미리 계획하신바 곧 말씀의 본내용이 이것이 성령세례, 불세례로 나눠집니다. 불에 타는 것, 지옥이라 하지 않고 지옥 불, 불세례의 주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지옥이. 반드시 지옥이 있어줘야 돼요. 성령세례는 우리가 선택하거나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껏해야 물세례까지 전부니까. 여기서는 무슨 세례가 작동하느냐? 성령세례는 주님의 일방적 호출, 이걸 로마서 8장에서 미리 아신 자를 호출. 호출 알지요? 119 호출. 어떤 자리에 있든지 거기서 나와. “나사로야 나오너라.” 호출하는 거예요. 부르심에 의해서 부르시게 되면 이미 주께서 성령을 받았거든요. 성령 받은 주께서 마련된 그 세계에 우리는 호출당하는 겁니다. 호출당해서 그다음에 뭘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하신 일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남한테 미움 받고, 아까 했지요. 환란을 당하고. 이미 게임 끝났어요. 상다리니까.
의인이면서 죄인인 척 살아가는 즐거움
게임 끝난 상태에서 환란 좀 받아도 싱긋이 웃지요. 많이 해라. 나 많이 묵었다. 주께서 이런 환란을 받고 있구나. 그러니까 환란 받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내 본성대로 내 것으로 살아가는 그 차이 있잖아요. 이 세상 사람도 아니면서 연기를 하는 거예요. 죄인의 연기. 제목 바꾸고 싶다. 죄인의 연기.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척 살아가는 이 즐거움, 이 자유, 이 여유로움 얼마나 감사합니까. 죄인 아니면서도 죽을 때까지 죄인 역할 하는 나의 이익만을 챙기는 그걸 누가 알아요? 우리 안의 성령님이 알려주니까 본인들이 알아요. 주여 남은 속여도 누구는 못 속인다? 주님을 속일 수 없음을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 노래입니다. 나를 지킬 무기는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21절 보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그다음에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구약이니까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남아 있잖아요. 그러나 이미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은 약속대로 이뤄질 겁니다. 상 가는데 상다리 같이 가는 거예요. 자, 우리가 33편을 다 보면서 마귀가 이런 성도를 가만두겠습니까, 흔들기에 나서겠어요? 흔들기에 나서지요.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게 하셔요. 흔들기에 나서면서 그 흔드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나를 다시 한 번 자극시키는 거예요. “너 믿음 있나? 시편 33편 좋지. 그런데 그걸 믿나?” 자꾸 내가 뭘 해야 되는 것처럼 내가 뭘 소유해야 되는 것처럼 자꾸 흔들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지금은 흔들리지 않지만 문 열고 나가면 그다음부터 매사가 내가 이래도 될까, 자꾸 내가 착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 자체가 의식된다는 것, 그때마다 접이용 상다리를 생각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또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고 알기 이전부터 세상 모든 것이 시편 33편대로 차질 없이 정상적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