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뿌릴 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씨를 받을 밭을 선택하신다. 이 세상에는 원래 씨를 심을 밭은 없었으나 농부가 뿌렸기에 떨어진 씨앗이 썩어서 발아하여 열매를 맺으니 그제야 열매를 통해 밭이 있었음을 안다. 농부는 밭을 수거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거두어 간다. 성령이 자리를 펴신 성도라는 장막에서 잉태된 생명은 하늘로 올라가고 성도의 장막은 여전히 남겨져 낡아지고 쇠하나 저주에 감싸진 생명같은 주의 이름의 효과는 갈수록 선명하게 우러난다.
믿음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고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지는 것이기에 성령이라는 말은 있지만 보이지 않고 설명할 수 없기에 납득 시킬 수 없으니 결국 인간이 사는 세상에 성령은 없다. 출발점이 눈에 보이는 사람, 물체, 또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자유의 법이 속에 심어지고 마음에 새겨져서 내 생각이 아닌 주의 생각이 작동하고 내 마음이 아닌 주의 마음이 움직이기에 누구를 가르치며 주를 알라고 설득하고 납득시키지 아니할 것은 이미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천지의 주재로 알기에(히 8: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만남을 통해 동질의 것이 서로 붙고 이질적인 것이 떨어지는 현상이 들쑥날쑥 요동치며 주님의 세계를 표현하게 된다.
이 세상이 아무리 지혜로 열심히 파고 파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발견되게 하실 때, 주께서 보내시고 주님이 미리 마중 나오는 붙여주심에서 영원한 저주와 영원한 축복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작동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맹세뿐이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수11:20)
하나님 맹세의 판 위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통해 언약만 드러나고 인생들은 죽음에 감춰지면서 야곱 언약이 열두 개의 색깔로 나뉘고 확대되며 피의 공로를 드러낼 율법의 취지를 다채롭게 비춘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열둘이 색깔을 발하며 주님의 의를 생산할 죄를 드리우고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다시 무채색으로 바랜 동질의 한 집단으로 뭉치는 언약의 최종 작업에 끌려 들어간다.
쌀쌀한 날씨로 호수 대부분이 얼었는데 일부 얼지 않은 한쪽 귀퉁이에서 오리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먹이를 잡고 있다. 그중 한두 마리가 물을 벗어나 얼음 위를 걸어 다니며 투명한 얼음 아래로 보이는 고기를 부리로 잡으려다 살얼음에 부딪혀 실패한다. 분명 오리는 두 다리를 짚은 땅이 있고 생존에 필요한 풍부한 먹잇감이 보이지만 닿을 수 없기에 풍요 속에 놓여 있어도 배를 주린다.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는가에 정신이 빼앗겨 믿음에 휘둘리는 모습이 ‘나 있음’의 있는 땅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말씀이 울려 퍼지는데 들을 수 없고 하늘에서 풍성히 만나가 내리는데 나의 의미로 막혀있어 깨닫지도 못하기에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감사 불가이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겠다’라는 여호수아의 말씀을 실천이라도 하듯 얼음 아래 물고기만 바라보며 열심히 진짜 생명의 반대쪽으로 계속 걷고 있는 오리들을 붙잡아 출렁이는 물속에 던져주고 싶다.
‘아무리 차지하는 땅이 넓다 한들 내가 있고 내 욕망이 여전히 있는 그 땅이 결국 주님이 없는 땅이라면 그래도 좋으냐?’라는 질문이 쑤시고 들어오고 실제로 정말 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을 살기에 복음만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서 이렇게 구차하게 말씀 붙들고 사는 게 바로 ‘너’라는 악마의 참소에 들켜버린 불신의 죄를 보며 기뻐해야 이론적으로는 맞는데
답답이 오리의 어리석은 모습에 동화되어 주의 뜻대로 자기 할 일 잘하는 오리에게 은근한 화를 발하는 수상한 웬수가 노출된다. 광신도를 넘어서는 낯선 존재들이 이미 다른 차원에 있기에 내뱉어지는 말씀으로 깨져봐야 ‘아, 오리가 아니라 내가 문제구나’라고 세상 진리를 거부하는 거짓말을 실토할런가.
단단한 자아의 유리막이 주께서 들어 던지신 돌멩이에 산산이 조각나고, 듣고 있는 줄 착각했을 뿐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귀머거리였고 이제야 나의 진멸 소식을 들었다는 오늘 이 순간만 사는 유령같은 사람들의 말이 오갈 때 잠시 평안에 젖어 정신줄을 놓는다. 너무 소중해서 평생을 고이고이 철벽으로 감싸두었던 나를 아무것도 아닌 흐름으로 파동으로 바꿔서 주님의 성과만 나타내도록 쓰시려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약속의 땅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에 어찌하여 덩실덩실 춤추며 기쁨으로 감사하지 못하는지 책망받는 것이 즐겁다.
날개 위에 탑승하는 것을 미리 알 새도 없이 훅 들어왔기에 일어난 사건에 밀려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나의 것에 애도하는 모습을 주께서 멸시하시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예전에 첫째 아이가 기저귀를 떼려고 배변훈련을 할 때, 힘겹게 성공한 자기 똥을 엄마가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리니 눈물을 흘리며 서운해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후로는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똥아 잘가~’라는 미친 짓도 서슴없이 했었는데 그게 미친 짓이 아니라 내가 직시할 나의 현실일 줄이야.
생각지도 않은 곳에 내가 있었고, 주님의 생각에 붙잡혀 있어서 그곳에 나의 것은 없었고 그래서 내가 없었다. 내가 느낄 수 없는 고마움이 안에서 흘러나올 때 입을 봉하는 한마디는 ‘주여, 누구십니까’이다. 질문이나 대답을 할 자격이 없음을 확정 짓는 마지막 유언이다. 어디서든 나는 주님을 생각할 수 없는 위인이고 그렇기에 어디서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듣는 것이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는 증후인 것을 눈치챘다면 이제는 육체를 떠나는 그 날까지 말씀으로 밟아주시는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한 자신조차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을 인도해서 광야를 통과하면서, 이스라엘은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유감없이 표출했고 그들에게는 언약이 있었기에 광야라는 공간에 인간은 없었고 엎드러진 시체를 살려내시는 생명의 만나만 있었던 증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모세가 배제되면서 언약은 조금도 인간에게 구애받지 않음을 분명히 하시고 여호수아가 모세 언약을 넘겨받아 언약궤를 모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이끌린다. 하늘에서 땅으로 태어나셔서 있는 줄 알았는데 원래 이 세상에는 없었던 땅임을 보여주시고 있음의 땅 자체이신 예수님이 다시 위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여정이 담긴 언약궤가 율법과 예언으로 드러나고 바뀌는 노선을 따라 이동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에 근접할 때까지도 여전히 자신은 여호와 편이고 가나안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원수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었고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대면하고서야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편인 것을 알고 죽은 자처럼 엎드릴 때, 주님은 인간의 가치를 담아 스스로 움직이는 신발을 벗겨버리시고 여호수아를 율법의 판 위에 무가치의 상태로 옮기셔서 하나님만 친히 싸우시는 전쟁의 무기로 이용하신다.
개개인은 흩어진 먼지같고 안개같은 결국 없음의 상태이지 하나라고 규정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 하나는 집단 단위체로의 하나만 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정신을 바탕으로 여호수아의 통솔 아래, 너의 죄가 나의 죄가 되고 너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통합체로 움직여야 했다. 아간이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며 전리품을 몰래 챙겨 자신의 장막에 숨긴 것이 발각되었을 때 집단에서 삐져나온 개인적 죄가 결국 전체의 속성 중 하나를 증거 함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의 뜻을 범한 아간을 향해 율법대로 돌을 든 온 백성이 아간의 죄가 자신들 안에도 있음을 인정하며 자기를 치는 마음으로 돌을 던져야 했다.
인간 쪽에서 부지런히 하늘로 올려보내는 공로도, 헌신도, 그 어떤 열심도, ‘내가 원하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개별성으로 복귀되면서 자신의 공로에 대한 삯을 기대하는 우상적 속성에서 누가 제외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애꿎은 변명이 의미 없다. 내 안에 그런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때와 그 역할을 허락지 않으신 것이지 반드시 죽을 죄만 만들어내는 것이 ‘나’고 그 ‘나’가 결국 우상이다.
언약궤가 들어가는 약속의 땅은 인간들이 땅을 차지하는 곳이 아니라 빼앗김을 당하기 위해 치러지는 여호와의 전쟁만이 있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땅 뺏기 작업을 통해 자신들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바쳐져야 할 자이고 진멸되어야 하는 결과만 낳는 자신들을 돌아보며 할례 언약과 모세 언약에 담긴 우선적 조건으로 하나님의 저주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감 잡아야 했고,
제사에서 발생 되는 죽음에 집중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살리심으로 하루를 산다는 만나의 긍휼 안에 머물러야 했다. 약속의 땅은 풍성한 어떤 곳이 아니라 광야의 연장이었기에 만나의 취지를 놓친다면 그곳에 원주민과 운명을 같이해야 하고 남은 것은 저주의 죽음뿐이었다.
땅에서 시작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율법의 정통성을 지키고 혈통을 고수하는 합리적인 계보를 따라 죽음으로 들어가는 무덤과 땅에 속하지 않은 차원에서 시작되어 계시로 말미암아 숨겨진 아브라함의 믿음의 노선을 통해 죽음으로 들어가는 무덤이 온 세상을 대표해서 이스라엘을 통해 만들어졌다. 두 개의 무덤만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제는 잘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어떤 무덤으로 들어가 잘 죽을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교만을 버리지 못한 목이 곧은 이스라엘이 빼앗기는 복이 참 이스라엘로 옮겨가는 언약의 변천 과정에서 등장하는 외부적 요소는 같은 지평의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자신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바닥까지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야 근본도 없는 이방 여인이 메시아 족보에 합류되는 하나님의 비밀을 상상도 할 수 없고 율법이 없는 개같은 이방인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수혜자가 되는 멜기세덱의 족보에 접붙임을 받는 것을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9)
모세가 들어가지 못하는 약속의 땅을 산 위에서 바라보며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절대 조건인 언약궤가 차질없이 움직이는 주님의 땅을 내다보며 얼마나 기뻐했을까. 광야의 여정에서 죄를 가리는 물을 주께서 수시로 퍼내시며 물기 쫙 빠진 채로 첫째 아담의 죄의 극단을 보여주시고, 이제는 나보다 귀한 분, 그분의 의를 위해서라면 나의 죽음도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귀한 분을 알게 된 것이 여호와께서 인생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영광임을 모세는 알았다. 아브라함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할례 언약의 증상이 속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감지하며 예수님 때에 완성될 주님의 나라를 미리 보고 기뻐했던 기쁨이 또한 그러하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에 고기를 피 채 먹는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법을, 피의 근원을 드러낸 자도 피의 근원이 드러난 자도 둘 다 죽어야 한다는 법을(창세기 9:4, 레 17:10~11, 레 20:18 "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정하신 분이 아버지의 보내심대로 거룩한 피를 몸에 담아 언약궤의 실체가 되어 저주의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구원이 필요한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한 시도 살 수 없을 젖먹이가 구원자라는 말씀에, 고기를 피 채 먹는 자는 반드시 백성 중에 끊어진다는 율법을 알고도,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 머무를 자가 있을까. 그러나 피가 교체되지 않고서는 차이는 생기지 않는다.
율법을 알아도 지킬 수 없는 율법으로 끊어짐을 당하는 저주의 모습과 율법을 모르기에 처음부터 저주 속에 있었던 모습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일반이 된다. 하늘의 요소가 미리 개입된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자신이 거짓으로 합류되어있음을 확인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은 자신의 피가 드러난 채로 주님의 옷 가에 손을 댔을 때 자신의 더러움으로 접촉된 예수님이 피해를 받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을 부르시어 주님이 먼저 여인의 근원을 드러낸 쪽으로 자리를 바꿔주시며(눅 8:48) 생명과 함께 죽을 수 있는 복된 자리로 초청해 주셨다.
기생 라합과 누가복음 2장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 그리고 성경 안에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과 성경이 안으로 통째로 삽입된 오늘날 성도, 이 모두가 말씀을 알고 인식하며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방향으로 천사의 지시대로 움직였고 이 땅에서 구원자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 오직 하나님뿐인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예수님이 구원자이시고 장차 이 땅에 오실 심판주임을 증거 한다.
하나님 저주의 심판을 통과한 유일한 피이고 생명의 형상이신 주께서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고 십자가로 초대하실 때 그곳이 내가 죄인으로 주님께 소유된 영원한 처소이다. 새로운 땅에서 창조된 운반체가 주의 말씀만 담아 시체를 넘고 넘어서 언약완성의 복음만 넘기고 넘기며 주 안에 다시 숨겨지는 과정 자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사랑이다.
자신을 단속하고 관리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도대체 어디에 담겨있기에 말도 안 되는 곳으로 흘러가고 무엇이 담겨있기에 기이한 증거가 흘러나오는지 자기의 정체를 자기도 모르기에 성도는 무너져가면서 그리스도의 실재하시는 증거가 펼쳐지도록 주님의 몸을 분배받은 하나님의 분깃이다.
댓글-이근호
“광신도를 넘어서는 낯선 존재”-열광을 넘어서는 차분함-
“나의 것에 애도하는 모습을 주께서 멸시하시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나를 주시하는 다른 시선의 현존-
시체들만 양산한 하나님의 만나 공급 작전, 도대체 뭘 살려냈는가? 갈렙과 여호수아, 달랑 두 사람 살려내기 위해 수천 톤의 만나가 하늘에서 정기적으로 그토록 쏟아졌는가?
오늘날에 내리시는 햇빛과 공기와 비의 제공이 누구를 겨냥한 주심인가? 주시고서는 작살내신다. 받을 때 공짜 아니었다.
두 개의 죽음 구멍, 즉 최후의 심사대는 딱 두 길뿐인데 사람들은 나이 들면 피곤을 느낀다. 마치 인생 다 살은 것처럼. 진짜 운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히 9: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십자가 위에서 내 인생을 내려다보는 안목이 이래서 중요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