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믿음의 실체

아빠와 함께 2022. 3. 7. 21:54

며칠 전부터 건물 앞에 쓰레기들이 쌓여가고 있다. 처음에는 한두 개의 쓰레기만 있던 것이 이제는 수북한 더미가 되었다. 쓰레기차가 와도 쓰레기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짜 봉투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쓰레기차는 종량제봉투에 담긴 쓰레기만 가져가고 일반 비닐에 담긴 쓰레기를 가져가지 않는다. ‘종량제봉투에 담아서 버리지 않으면 수거하지 않습니다’라는 딱지를 붙여도 소용이 없다. 이 봉투나 그 봉투나 다 비닐봉투이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부에서 거짓을 조작하는 쓰레기들이 쌓여가는데 밖으로 밀쳐내 주는 생명이 없기에 자신의 더러움을 들키지 못한다. 성령께서 안에서 죄를 밀쳐내고 끄집어내시는 것은 ‘나’라는 죄 덩어리를 깨끗하게 청소해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지경인지를 자각하도록 보게 하시고 구제 불가, 회생 불가인 자신에게 손 떼게 만드시는 것이다. 죄인인 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예수 안이라는 공간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하다면 아마 집 앞에 쓰레기들이 경고 문구를 읽고 스스로 종량제봉투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문구를 읽는 것은 쓰레기의 몫이 아니듯 계시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반드시 이방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버리며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신 계명이 백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반드시 진노가 내려져야 하는 증거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그들이 잊지 않도록 언약궤 곁에 율법서를 두고 노래로 만들어서 후대까지 말씀이 분명한 증거가 되게 조치하셨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조치를 하시고 그 예상을 빗나가는 결과를 만들어내시며 언약에 인간의 때가 전혀 타지 않도록 순수하고 거룩한 한 분이신, 여호와 이름의 주인공을 은밀한 곳에 감추고 보호하셨다.

주님이 나를 멸시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모든 순간에 나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을 쉬지 않고 한다. 내가 책임지려고 본능적으로 끌어모은 성경 말씀은 결국 진리가 아니라 지식이었고 나로 인한 천국은 천국이 아닌 것을 알고도 나는 끝까지 온전한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십자가 앞에서 이미 시체라고 믿으면서도 정작 예상치 못한 죄를 보게 될 때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휩싸인다. 나는 기생이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지목해서 기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내 머리는 나만 손댈 수 있고 내가 깎아야 한다는 자존심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 한계를 벗어나 선악의 구분 없이 자유로이 죄를 방출하는 십자가의 증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은 결코 완전한 선악적 대립구조를 자체적으로 형성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었고 인간은 완전한 선을 행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완전한 악에도 이르지 못하니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뜻에 부응하여 죄인을 자처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만 가득히 적혀있고 하나님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책이 성경이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절대선의 기준이 오셔서 말 하셨기에 인간은 이미 벌써 하나님과 아들을 보았고 하나님과 동등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저항한 증거가 되는 십자가가 너무도 선명히 빛나고 있다. 성경 안에서 현실로 쏟아져 나온 계시의 폭설 속에서 벌써 시작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누가 피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예수님 죽은 시대에 나는 없었고 설령 그때 있었더라도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설득하고 납득시킬 의도가 조금도 생기지 않는 것은, 나부터가 하나님께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 자리에 있던 자였고,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을 입에도 담을 수 없도록 여전히 언약 밖에 있고 말씀도 모르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육체로 쉬지 않고 발견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한 번도 성령으로 시작한 적이 없는 자임을 계속 통보받는 마당에 ‘내가 한때는 당신과 같은 육이었는데 이제는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니 당신도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리가 없다. 서로 간에 납득도 필요 없고 상호 인정도 필요 없고 그저 성령께서 시작한 것은 차질 없이 영의 일을 진행하시고 육체로 시작한 것은 끝까지 육체의 일을 보이며 망하는 것이 마땅함을 확인하는 일만 있다.

삼손은 자신의 몸에 담긴 하나님의 비밀이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자기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밀의 암호는 삼손이 모든 힘을 잃고 비참하게 망가진 순간에 잠시 드러났다. 하나님이 주신 힘은 삼손이 잘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용도였고,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될 비밀이 삼손의 죽음을 통해 비치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주께서 생명의 새언약을 성도에게 담아주시는 이유는 옛 부대가 반드시 터져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주님 부활의 효과만 더욱 퍼져나가면서 새 부대이신 주님에게 다시 응집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맺은 약속이 완성되면서 벌써 세상에 충만해진 감사가 터진 자아의 틈에서 흘러나올 때 부디 어쭙잖은 나의 감사로 오염시키지 않게 하시길 바랄 뿐이다. 기껏해야 골라서 감사하는 짓밖에 못 하는 자아가 어디를 둘러봐도 감사 아닌 것이 없는 충만을 감당할 수 없기에 찢어져서 생긴 자아의 구멍을 통과해서 주께 다시 되돌아가는 감사를 잠시 맛보는 것만으로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뭔가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수도꼭지를 잠근 것처럼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감사도 사랑도 기쁨도 아무 느낌도 없는 단수된 상황보다 더 후덜덜한 진짜 단절을 맛보며 그럼에도 말이라는 것이 입에서 쏟아져 나올 때 목구멍이 열린 무덤인 것을, 무당이 주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본인을 통해 본인이 본다. 아예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차이라도 지지 않을 텐데 있던 무언가가 없어지니 감당 안 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럴 리가 없어. 일시적인 기분 탓이다. 무시하자. 그리고 다시 시도해보자’ 점점 나에게 초집중이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가 점검되는 현상에 저항할 힘이 없기에 나를 위한 시도를 멈추지 못한다. 억지 사랑의 마음을 감사의 마음을 쥐어짜며 말을 해보지만, 주님이 공급하시는 그것과 같지 않은 위조품이기에 결국 냉정하고 예리한 판단만 만들어지고 복음은 없다.

주님이 바닥으로 우리를 데려가실 때 머리 되시는 주인이 의도하신 대로 시선을 돌린다. 꼴도 보기 싫은 나를 보도록 조치하시며 그렇게 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게 하실 때, 내 머리가 아니었기에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내 맘대로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껏 내가 보이지 않아서 오롯이 주님의 감사와 기쁨과 사랑이 관통될 수 있던 것이 나의 신앙심으로 내가 도 닦아서 무아상태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제 절로 기도가 나온다. ‘부디 아무도 만나지 않게 하시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게 하시길’ 내뱉는 모든 말들이 상대에게 더러운 오물을 난사하듯 피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시키면 하는 것 또한 지금껏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알기는 했는데 진짜 그런 줄을 믿지 않았음을 들킨다.

빼앗아 가실 거면 주시질 말지. 배신은 자신들이 해놓고도 오히려 본인들이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욥은 참다 못 해 하나님께 발악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주를 버렸지만, 정작 그들은 버려진 적이 없었고 가롯유다는 혹시라는 마지막 의로움을 움켜쥐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책임지는 순수한 마감을 시도했으나 결국 자신의 입이 아닌 주님의 입으로 저주를 들어야 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주님께서 택하시고 버리심에 인간이 전혀 개입된 적이 없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차이 짐이 발생하도록 성령께서는 부지런히 불연속의 사건을 만드신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나’라는 주체가 소외된 상태를 진정으로 감사하고 절로 노래가 나오기까지 주께서 친히 죄가 관영한 물속으로 밀어 넣고 집어넣으며 사랑스럽게 속삭이신다. “너는 좀 죽어줘~나만 살게” 죽음같은 잃어버림의 고통 속에서 감사가 나오는 순간은 주께서 머리를 움직여 시선을 돌려주셨을 때이다. 한 번도 정상인 적이 없는 죄인을 숨겨주시고 가려주시는 주님의 사랑만 있었고 나는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의 십자가가 보이는 쪽으로.

이미 할례를 해놓으시고 그것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드러내게 하시며 약속의 땅에서 파내시어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셨듯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진노가 여전함을 성도를 통해 계속 표출하신다. 자신이 세상 임금 아래 붙잡혀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자로 발견되고 주의 분노하시고 징계하심을 미리 겪고 아무리 봐도 예수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껍데기가 분명한데 선물처럼 안에 박힌 그리스도의 형상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수거하시는 길에 얼떨결에 딸려간다.

인간의 현실을 무시하듯 시간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꿈을 담고 쳐들어온 성령의 정복에 굴복당한 자들은 텅 빈 자신의 육체가 죄의 보편성 안에 갇혀있기에 안팎으로 죄만 가득 채워져 있음을 느끼게 되고 그렇기에 주님과 온전히 대립하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과 끝까지 싸우고 죽이고자 하는 죄의 힘에 눌려서 한계 밖의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어서 머무르고 차오르는 의도나 목적도 덩달아 안개처럼 희미해진다.

이런 형편에도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느냐’는 진리를 내가 앞장서서 지식으로 바꿔서 마치 자신이 죄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죄의 압력에 힘겨워지는 증상이 수시로 올라오는 것은, 어느새 절대 악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고 나의 의로움을 조작해주는 악마의 거짓 속삭임에 말려들어 나를 지키려는 방어체제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조차 죽었다 깨나도 실패자가 되기 싫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고, 주께서 자신의 기업으로 제비뽑아 예수님이 다 이루신 승리의 판 위에 옮겨놓으셨기에 주의 공로만 부각 되도록 유혈사태의 현장을 반복적으로 조성하시는 성령의 일이었다.

율법서에 먼저 피를 뿌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만났을 때 일어날 피 사건을 미리 보이시고 택한 백성에게도 피를 뿌려 모두가 그 피의 공범임을 일깨우시며 죄에 대해 죽은 자이기에 죄를 묻지 않으시고 기억지 않으시며 오직 주님의 대신하심만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복음이 세상에 뿌려진다. 옛 마음을 도려내고 후벼파셔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만드신 심장을 도장처럼 박아주실 때 나는 나를 나라고 주장하지 못하기에 유일한 나가 되시는 한 분의 사랑만 빈자리에 남아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모든 것은 죄가 하는 행위임을 드러나게 하루 더, 하루 더, 일상을 허락하시며 ‘내가 뭘 했다고 그래~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왜 나한테 그래~’를 연발하고 주의 공적만을 가리키며 아우성치는 모습이 믿음으로 행하는 모습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댓글-이근호

유일한 행운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났다면 행운은 없고 불운밖에 없다. 모든 행운은 주님에게만 쏠려 있다. 주님에게 있는 행운을 빼셔서 내 행운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에게 이 불운한 내 인생을 도로 빼앗길 것인가? 달라고 하실 때 줘버리자. 아낌없이 드리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깨어지지 아니하면 쏟아지는 법도 없다. 늘 헐겁게 살자. 깨어지고 쏟아지기 쉽도록! 자기 단속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송민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련한 양  (0) 2022.05.12
텅 빈 형식  (0) 2022.04.23
없는 땅  (0) 2022.01.26
주님의 복음전파  (0) 2022.01.07
처음사랑  (0) 2021.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