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여호수아: 없는 땅-갈렙과 레위지파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안에서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성도임을 그 과정을 우리가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수아를 보게 되면 땅 분배 이야기가 나오는데 땅 분배 이전에 땅 뺏기가 먼저 있고요 땅이 있고 거기서 땅 분배가 되려면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창조 능력이 돼야 이게 분배가 돼요. 창조 능력이란 창세기 1장의 그 능력의 연속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 있는 것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있어?” “없습니다.” “없지? 그럼 내가 있게 해줄게.” 물론 없는 게 없습니다, 할 수 없지만 하여튼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에 창조 능력이 들어가는데 그냥 능력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합해서 있게 하는 겁니다.
결합해서 있게 하면 전에는 내가 있다가 됐는데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있음에 대한 그 주인공의 표현이 주님이 계시다, 이렇게 돼요. 주님이 계신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주님이 계신 주의 땅이 됩니다. 주의 땅이 될 때만 이게 천국이 돼요. 그래서 현재 여호수아는 그림이 있지만 이 지상의 땅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에요.
이 땅에서 인간들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인간들이 있음은 이게 천국이 될 수 없어요. 인간들을 뭐로 만든다 했습니까? 있는 것들을 뭐로 만들어요? 없이 하잖아요. 없이 하면서 그 이동경로를 따라서 이 땅이 뭐가 되느냐 하면 주의 땅, 천국이 되는 거예요. 땅의 인간들을 없게 만들고 없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게 되면 이 땅은 하나님이 계신 땅이 되면서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창조의 능력이죠.
이것을 표현할 때 여러 가지로 표현 되는데 처음에 첫 번째 알기 쉬운 표현은 언약궤,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는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떻게 꼬불꼬불 이동하느냐? 그 언약궤가 이동함에 따라서 그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땅이 된다고 표시해줘요. 알기 쉬운 표시는 첫째는, 언약궤의 이동경로.
언약궤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민수기 14장 39절에서 45절, 그리고 신명기 1장 41절에서 46절 여기 보면 이 땅은 너희들이 살기 이전에 언약궤가 거기에 들어있어야 된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움직인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서 상자로 만든 언약궤에요.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서만 만난다. 다른 데선 안 만나요. 이스라엘이라도. 언약궤 있는 곳이 성막이죠.
나중에 성막 있는 곳이 뭐가 됩니까? 성전이 되지요. 성전이 불타버린다는 말은 나는 너 하고 더 이상 같이 있기 싫다는 뜻입니다. 언약궤가 있다, 같은 말로 성전이 있다가 없어진다는 말은 이 땅에서 주께서 잠시 있다가 “나 이 땅에 안 살아. 다른 땅 갈 거야.”라고 떠나는 표시입니다.
언약궤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나중에는 상자로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몸, 인간의 죄 있는 모습으로 언약의 완성, 언약궤로 와버리죠. 와서 잠시 33년 사시다가 나, 너와 안 논다 해서 가니까 베드로가, “어어, 어디로 가십니까?” “기다려봐. 다시 올게.” 가시고 난 뒤에 성령이 오셔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그냥 신약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너무 급작스러우니까 구약 때 땅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아주 하나님께서 친절하십니다. 그 2차 대전 영화 보게 되면 독일 군들이 날카로운 제복 입고 작전모형 판에 작대기로 탱크 밀고 잠수함도 하고 그런 게 나옵니다. 나오면 뭐합니까? 나중에 연합군이 이기는 데요. 그 모형 판이 지금 구약입니다. 구약은 모형이니까요.
모형 판에서 언약궤를 들이밀지요. 밀 때 아직까지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 전이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상자와 관련돼있거든요. 상자라 하는 것은 물체입니다. 물체라 하는 것은 인간이 평소에 다루는 물건이거든요. 그러니까 상자를 함부로 다룰 수 있다고 겁도 없이 웃사처럼 그냥 덤벼들다가는 어떻게 됩니까? 웃사가 죽어버리죠.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창조자인데 예수님에게 함부로 그냥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상자, 높이도 얼만 안 돼요. 1미터 50인가 그런 높이의 언약궤 가지고 움직입니다. 저쪽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칼이 있고 활이 있고 말이 있는데 이쪽에는 뭐가 있습니까? 칼, 활, 말이 있는 게 아니고 뭐가 있어요? 언약궤가 있어요. 붙어 싸우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신약에는 십자가로 이기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십자가로 이겼다는 것을 확인하란 뜻이죠. 십자가가 무기가 아니고 십자가 졌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어떤 무기를 제공할 시점을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무기 줘봐야 이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란 다 이기고 난 뒤에 뭐로 이겼지? 십-자-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로 사탄아 물러가라, 해서 또 애꿎은 아이 모가지 뒤로 돌아가는데, 귀신 영화 보면 많잖아요. 십자가로 물러가라는.
그러면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이 귀신 들려서 모가지 팍팍 돌아가고 귀신 나타날 때는 그 현장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살다 죽어, 인간아.” 그게 승리에요. “귀신 들렸어?” “그냥 살다 죽어, 그러면.” 얼마나 편해요. 물론 영화 찍을 게 없고 영화가 안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거기 퇴마사 하는 신부나 목사 등장해서 성경책에다 그것도 라틴어 있잖아요. 상투스, 상투스 해서, 무슨 귀신이 라틴어에 기죽는 귀신 봤어요? 하나의 언어인데.
귀신은 원어나 헬라어, 히브리어에 기죽지 않습니다. 그건 옛날의 언어에요. 자꾸 곁길로 가서 미안합니다만 언어학은 백날 해봐야 진리가 안 나오게 돼있어요. 헬라어, 히브리어 백날 해봐도 소용없어요. 언어학이 어디에 포위돼 있느냐 하면 기호학에 포위돼 있어요. 기호학은 몸짓과 손짓도 포함돼있어요. 몸짓과 손짓을 통해서 표시되는 나타나는 기호, 기호 이상의 의미를 기호를 통해서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기호학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문자 에이, 비, 씨, 디, 한글 기억, 니은, 디귿 그것은 그냥 나타나는 표상이고 그 뒤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기호학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언어학에는 없는데 기호학에선 이중분절이라 하는데 표현하는 것과 실체가, 표현하는 것과 내용이 완전히 다른 분야다, 표현과 내용이 완전히 딴 세상이다. 이렇게 기호학에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말은 원어 이런 데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요.
언약궤 이건 기호지요. 하나의 사물이니까요. 나타나는 표상 없이는 내용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 하게 되면 인간이 상상해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과 달리 그냥 언약궤를 준 겁니다. 언약궤를 주면서 표상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런 숨어있는 의미를 모르게 때문에 언약궤를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기호로 여기고 넙죽 그것으로 도움 될까 싶어 거기에 빠지지요.
기호에 대해서 인간들이 고대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기호를 사용하지만 우리 주님은, 보세요. 아까 했잖아요. 벌써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있는 것, 있는 나를 의미를 얻기 위해서 기호를 사용하지만 있는 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한다고요? 없게 하잖아요. 없게 한다고요. 언약궤를 줘도 언약궤 의미 몰라요. 왜? 아는 네가 제거돼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줘도 십자가 모릅니다. 십자가 믿는 네가 제거돼야 되기 때문에. 십자가로 퇴마사, 마귀 물러갔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죽어. 죽어도 괜찮아.”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의미하는 사람은 죽는 욕망 외에 다른 욕망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제는 여기서 힘들게 살 필요 없다. 지금 떠나도 상관없어.” 이게 바로 십자가 주신 기쁨입니다. 초반이라 전혀 안 기뻐요? 그러면 누구 기쁜 사람 한 번 읽어보세요. 민수기 14장, 너무 기니까 읽지 마시고 44절만.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항상 언약궤.
그 다음에 여기 신명기 1장 41절에서 46절, 이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언약궤가 들어가야 되는데 그래서 정탐을 하니까 우리는 상대 안 되어 못 들어간다 하니까 모세가 언약궤 올라가는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올라가지 말라 했거든요. 올라가지 말라 해도 그저 땅이 있기 때문에 들어가야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완전히 패배를 했어요. 여기 44절에, 패배해서 그들이 엉엉 웁니다. 통곡했습니다.
통곡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너희들 통곡해봐야 하나님 안 듣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이 올라가야지 주인공이 아닌 너희들이 올라가서 뭐 하겠단 말이에요. 땅 없으니까 땅 주겠지. 그거는 화천대유한테나 이야기하란 말이죠. 아파트 없이 아파트 지어주겠다, 그거는 화천대유한테나 이야기하고 재개발업자한테 이야기하세요. 우리가 지금 광야에 살 땅 없다고 살 땅 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주할만한 땅이어야 해요.
그래서 언약궤의 취지를 잘 드러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알기 쉬운 방법 언약궤라 했는데 그럼 알기 어려운 방법 해보겠습니다. 알기 어려운 방법은 갈렙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거예요. 갈렙이란 사람은 민수기 26장 65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나머지는 줄줄이 다 제거돼야 되지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무엇과 비교되느냐 하면 이 사람들만이 약속의 땅에 지분을 갖게 된다는 뜻이에요. 다른 사람은 지분 없습니다. 홍해에서 건너온 사람들 중에서.
그러면 민수기 26장 62절에 보면 그거는 보셔야 돼요. 중요해서. 방금 민수기 26장 65절 이야기했잖아요. 그 앞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레위인의 일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모든 남자가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
자, 갈렙과 레위 지파인데 레위 지파가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와서 열두 지파가 되거든요. 레위 지파의 특징은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그런데 레위 지파를 숫자로 할 때 난지 몇 개월이라 했습니까? 1개월 됐지요. 그러면 레위 지파 1개월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홍해 건너왔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여기선 해당되지 않아요. 1개월 된 사람은 땅을 분배받지 못해요. 그런데 땅을 분배받은 사람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갈렙과 여호수아 밖에 없습니다.
그럼 왜 여호수아는 갈렙의 이동경로에 포함 안 되느냐? 여호수아는 모세의 약속을 대변하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땅은 뭐냐? 집단적, 어려운 말로 합시다. ‘집단적 단위’에요. 집단적 단위를 표시하는 겁니다. 갈렙은 개인이고요. 그러니까 집단은 잠시 멈추고 갈렙이 개인이 어떻게 땅을 차지하는지 그 기적적인 모습을 보라는 겁니다.
그 기적적인 모습을 보게 되면 나머지는 우르르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비록 땅을 분배받을 자격 없지만 여호수아가 책임지고 이들에게 땅을 분배하는 겁니다. 제비 뽑아서 분배하게 되면 우르르 갈렙처럼 땅을 얻을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당히 복잡하지요. 그리고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는 왜 땅을 분배받지 못하느냐? 왜 땅을 분배받지 못하는 레위 지파와 갈렙이 동격이냐? 같이 취급받는 이유가 뭐냐? 한쪽은 땅이 있고 한쪽은 땅이 없는데 어떻게 땅이 없는 것과 레위 지파, 갈렙과 동일하냐? 그것은 하나님의 땅을 차지하게 되면 땅 이 자체에 창조의 능력이 있다 했지요.
여러분들이 여기에 뷔페처럼 여러 가지 먹을 게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사자, 상어 예를 들어서 기린 이 세 마리의 짐승을 앞에 두고 어떤 먹이 띠, 먹을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선 상어에게 먹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상어가 먹을 것 가운데서 채소도 있고 과일도 있는데 여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도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상어가 왔다 가면 무슨 띠만 비어있겠어요? 물고기 있는 것만 빠질 거죠, 그렇지요?
먼저 상어에게 먹으라 하면. 상어가 채소 먹을 겁니까, 과일, 토마토 안 먹지요. 물고기만 먹지요. 물고기가 빠지지요. 빠진 걸 다른 사람들 보면 이거는 사자가 먹은 게 아니고 기린이 먹은 것이 아니고 이건 뭐냐? 빠진 걸 봐서 이거는 상어가 먹었다, 라고 판정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선 스펙트럼’이라 해요. 물리학에서 수소가 빠지면 광자가 나오고 그 빈자리가 선 스펙트럼이 빠진 부분으로 돼있어요. 빠진 부분을 보고 원소가 무슨 원소인지 파악을 하는 겁니다.
이 빠진 부분을 땅에서 누가 들어가느냐? 레위 지파가 들어가요. 레위 지파는 48개 성읍을 마치 지점처럼 온 지파에 다 빠진 부분을 넣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이 빠진 부분을 기억 못하면 너희는 이 땅에 살 자격 없다. 레위 지파가 땅을 가질 수 없다고 해놓고, 자기 고유의 땅은 없어요.
그런데 각 지파마다 이 띠처럼 누가 뜯어먹은 것처럼 띠를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땅이 없는 것처럼 되어야 마땅한데 레위 지파 은혜로 우리는 땅을 얻게 되었다, 라는 것은 이 빠진 부분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자기 땅이 없습니다. 기업이 없어요. 기업이 없는데 뭡니까? 주잖아요. 없음에서 뭐가 되죠? 있음이 되면서 그 원천은 이 땅을 너희가 차지할 수 없음을 레위 지파가 땅 가짐으로 표현해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 지파가 동급이 되는 갈렙은 여호수아와 정탐할 때 그들이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상자, 뭐가 있지요? 언약궤가 자기 자리 찾겠다는 데 우리가 되고, 안 되고 관여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이거는 우리 일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가 거주할 땅이기 때문에 능히 거뜬히 들어간다, 라고 믿은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다 사라지는 거예요.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야 돼요. 왜 우리가 천국을 가지? 말도 안 돼. 여러분 사는 모습을 보세요. 천국 갈 사람인지.
그래서 이 띠가 이렇게 되는데 나중에 이들에게 레위 지파에게 토지가 변변치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줘야 되거든요. 안 줍니다. 자기 먹을 것 바빠서. 안 주니까 어떻게 돼요? 레위 지파가 살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나오는 섞은 고기를 찾아 산등성이를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배고프니까 빠지지요. 빠지니까 불연속성이 돼야 될 이 띠가 어떻게 돼요? 연속성이 되지요. 연속성이 되니까 이거는 통합된 나라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통합된 이스라엘은 뭐냐? 그거는 가짜입니다. 통합된 교회, 통합된 이스라엘은 가짜에요. 이빨이 숭숭 빠져야 돼요. 우리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에요. 이빨 다 빠졌지요. 빠져서 주님 나라 좋아요, 하다가 갑자기 십자가마을 좋아요, 우리교회 좋아요 이렇게 돼버리면 이거는 바로 이스라엘이 범죄 한 것과 동일한 차원이에요. 있을 수가 없어요.
다시 처음부터 하게 되면, 땅 뺏기라 하는 것은 그냥 천지창조의 능력이 제공돼야 되지 힘 있다고 우르르 가서 쫓아내고 뺏고 이런 건 없습니다. 이 땅을 오늘날 교회 옆에 있는 요지 땅, 값나가는 땅 뺏는 식으로 여리고 성 함락작전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것은 화천대유입니다. 예배당 터 넓히고 부동산 계산하는 거예요. 교육관 짓고 주차장 넓혀서 구원된 교회 한 군데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공을 들이면 거기다 갑자기 정신을 다 빼앗기게 돼있습니다.
선 스펙트럼 빠진 부분에 들어간다는 것. 나중에 레위 지파가 빠졌을 때에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고 이방인 룻 같은 여자를 보내서 다시 이것을 메우죠. 그때는 땅을 파먹는 게 아니고 토합니다. 그러니까 토한다는 말은 진정 이스라엘이 뭐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빼거나 토하면서 여기에 생소한 것들이 나올 때 여기에 뭘 토하느냐? 이방 여인이 토해져요. 룻 같은 것.
모압 여인은 원래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지 못하는 데 그 룻을 통해서 뭐가 나오느냐? 룻이 다윗의 증조모거든요.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왕은 땅을 차지한 여기서 왕이 나오는 게 아니고 없음에서, 없음에서 왕이 나오는 겁니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 우리의 왕이에요. 이 땅에 존재하는 왕은 지난주에 설교했지만, 본디오 빌라도 말하는 폼새 보세요. 나는 너를 풀어줄 수도 있고 잡아맬 수도 있다. 자기한테 권세가 그 다음에 뭡니까? 권세가 뭐예요? 있음이죠.
그러니까 주님은 있음에 주목하는 거예요. 나한테 권세가 있는데 너를 풀어주거나 다시 잡아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다 할 때 있음을 끄집어낼 때 주님은 여기서 뭘 공격합니까? 있음을 공격하지요. 내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면 너는 권세가 없는 거예요. 너희들은 네가 가진 소유한 있음으로 살지만 나는 이 땅에 없는 없음으로 나는 여기에 등장한다. 난 아무것도 없다. 없음이 있음을 이기는 거예요.
갈렙을 계속 따라 보겠습니다. 갈렙이 홍해 나올 때 나이가 사십이었습니다. 여호수아에 나올 때 85세였어요. 85세 때 가장 정복하기 힘든 아낙 자손의 땅을 달라고 정식으로 여호수아에게 요청을 해요. 이거는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래서 약속을 하는데 이 갈렙의 땅의 중요성은 나중에 여호수아 끝나고 사사기에서 갈렙의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을 이어지는 중추적인 핵을 장식합니다.
갈렙의 가족이 첫 번째 사사가 돼요. 사시가 1장 20절에 보게 되면, “무리가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첫 번째 사사가 옷니엘인데 1장 12절에 보면,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여러분 악사, 알지요. 악사AXA 손해보험, 악사 운전자보험.
악사가 누구 딸이냐 하면 갈렙의 딸이에요. 드빌 거민을 쳐부수고 갈렙의 딸과 결혼한 사람이 옷니엘이에요. 그러니까 정통성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 갈렙이. 이스라엘 내부를 연속성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지파들이 사사에게 의존적이 되는 그런 시대에 돌입하게 되지요. 겉으로는 니 땅, 내 땅 간섭하지 말자 해놓고 실제로 일 터지면 사사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자기 선에서 사사가 없으면 자기 지분도 제대로 못 지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사사가 등장하는 방식이 바로 기업이 없는 지분이 없는, 지분이 적당하네. 지분이 없는 레위 지파가 실제로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그러한 언약적인 내용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레위 지파도 자기의 본연의 모습을 상실해버려요. 여기서 지금까지는 아주 쉬운 거고요 이제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방금 제가 공간의 이동이라 했지요. 공간을 언약궤가 이동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언약궤가 드러나는 방법도 있고 그 다음에 아까 갈렙을 통해서 나타나고요. 여호수아는 모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개인의 자격이 아닙니다. 전체 이스라엘을 책임지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승리하게 되면 여호수아로부터 지분을 부여받게 돼있어요. 딱 확연하게 윤곽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언약궤와 갈렙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고 갈렙은 사람이 되지요. 하나님과 사람이 동행했을 때 그때 비로소 뭐가 생기느냐? 공간이 주어지는 겁니다.
방금 공간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시간은 어떻게 흘러갑니까? 쉽게 말해서 언제 이 땅은 다 이스라엘 차지가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원래 시간이란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땐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은 언제 생기느냐? 속도가 공간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비로소 그때 등장하는 게 시간이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높은 차원에 있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기에 어떤 면적이 있다면 이걸 1차원이라 합시다. 다른 차원을 2차원이라 하면 손가락으로 짚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1차원에 사는 사람은 손가락과 접점 표시만 알게 되겠지요. 이게 한 사람의 손이라는 것은 어느 차원에 가야 돼요? 더 높은 차원에 가야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더 높은 차원에 있지 않은 사람은 여기 있는 손가락에서 가려면 그만큼 뭐가 걸린다?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 이 사람은 시간 걸릴 게 없지요. 한 사람인데요, 뭐. 지가 눌렀으니까. 눌렀는데 무슨 시간이 있습니까? 하나님한테는 시간이란 게 없어요. 시간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동행하다보니까 하나님도 시간의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기 때문에 그 안에 시작과 끝을 다 갖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해서 시간을 하나님도 경험하시는 거예요.
이거는 신약성경에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뿐만 아니고 이 땅에선 이미 죽었고 하늘에선 우리가 살아 있다 할 때 시간적으로 앞으로 몇 년 더 살까가 아니라 지금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으나 항상 그리스도라는 예수 안에서의 차원에서는 시간의 흐름은 없습니다. 시간이란 땅이라는 공간 때문에 시간이라는 것이 느끼게 되고 겪게 돼있어요. 몇 년 살았다, 나이가 얼마 되십니까, 팔십이십니까? 아이고, 오래 살았네요.
오래 산 것과 영생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일찍 태어나자마자 죽어도 영생이에요. 인간의 땅에서 그리스도 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영생이 되는 겁니다. 무슨 천사가 나이, “천사님이십니까, 올해로 몇 살 됐습니까? 생일 언제입니까?” “에이, 천사한테 그런 것 물어보는 게 아니야.” 천사한테 그런 것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천사한테 공손해야 되니까.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임시적은 연극무대라 보면 돼요. 연극이 끝난 후에는 한때 꿈같은 거지요. 연극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교체하려고 주님의 새로운 청조의 능력을 주기 위해서 다시 우릴 이 땅에서 살게 하셨구나,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차원이 뭐냐 하면 이걸 성도라 하거든요.
성도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을 성령 안이라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 예수 안. 성령 안이 되게 되면 십자가가 모든 위에서 보면 다 십자가인데 사람들은 성도가 아니고 인간일 경우에는 십자가는 지나갔고 이제부턴 부활이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전부 다 십자가인데. 어디에도 다 십자가에요. 무슨 십자가를 건너뛰어요, 십자가를 지나왔어요. 무슨 구경거리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뭐로 봤느냐 하면 구경거리로 봤어요. 흥밋거리로 봤어요. “좀 보자. 어떤 인간인지 보자.”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를 구경거리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고 오히려 내 자신이 예수님한테 구경거리가 되지요. 오늘도 얼마나 개판 같이 사는지 보자. 얼마나 시간이라든지 스케줄에 쫓기고 있는지 보자. 스케줄이 뭐 필요 있어, 아무 필요 없는데.
십자가, 전부 다 십자가에요. 완전히 십자가라 하니까 장고 영화에 나오는 공동묘지 같지요. 여기서 총 들고 막 총 쏠 거예요. 무법자를 향하여. 그래서 이걸 아는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데 누구냐 하면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 죽이려고 돌 들고 오니까 스데반 집사한테는 돌이 돌로 안 보이고 뭐로 보이느냐? 이걸로 보이지요. 귤로 보입니다. “에잇 귤 맞고 죽어라.”
그러니까 이미 죽은 인간이 이미 산 인간 보고 죽으라고 돌 던지는 거예요. 그래서 고자질하지요. 스데반 집사님이 예수님 보고. “예수님, 저들 아무것도 모르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좀 용서해주세요.” 저거들은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몰라.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옴으로써 어떤 이 세상의 차원에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 공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의미 없으면 공간도 의미 없고 분배도 의미가 없어요. 땅 가져봐다 나중에 다 빼앗기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고 인간이 뭐 되는 것이다? 성도 되는 것이다. 이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땅 분배는 어떤 인물로 변환되어 들어가느냐가 중요해요. 천국이란 공간에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지금 말고 다른 인간으로 달라져야 돼요.
그 다른 인간이 언약궤의 취지를 아는 인간, 다른 말로 하면 레위 지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죽음을 다루는 지파가 땅도 가지지 못하고 맨날 제사만 드려야 될 그런 일을 해야 될 그 중요함, 그 취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엔진이거든요. 날마다 생명이 나오는 그러한 엔진부위가 레위 지파란 말이죠. 레위 지파의 취지를 아는 사람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아는 경우에만 그 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어요. 신명기 8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안 들어가고 계속 주변을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7절부터 봅시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그렇게 돼있지요.
사람들은 땅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땅을 얻을 수 있는 게 뭐냐? 언약이다. 그러면 땅을 얻고 난 뒤에 땅을 버리겠어요, 아니면 언약을 버리겠습니까? 내가 노린 게 땅이고 내가 생계를 하고 생존을 하려면 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그들이 알았잖아요. 뭘 통해서? 광야를 통해서. 광야를 통해서 그들은 땅의 중요성, 땅이 중요하고 자기의 생존이 중요한 것 이걸 알면 안 돼요.
이걸 알면 안 되고 뭘 알아야 돼요? 언약이 뭐보다 더 세다? 나보다 더 세고 나보다 더 중요하다, 이걸 알아야 돼요. 언약 안에는 누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요.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시는 약속, 언약성취가 나의 꿈의 성취보다 더 우선되다, 이걸 아셔야 된다 말이죠. 광야에서. 고생을 했는데 쫓겨났다. 그 이유가 있어요. 그냥 고생만 했어요.
세상적인 그러한 철학 계통에서는 언젠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잖아요. 그런데 고생해도 낙이 안 올 경우엔 어쩌려고? 그 책임 누가 지려고요? 죽도록 고생하는 거예요, 죽도록. 죽도록 고생하고 저 우즈베키스탄 있지요. 카자흐스탄 지금 데모하는 데 거기 가서 선교한다고 죽도록 고생해요.
돈 없는데 한국에서 돈 끌어다 학교 세우고 병원 세우고 그들의 입맛 맞춘다고 고아원 했는데 죽도록 고생했는데 그들은 백날 해봤자 고생한 내가 고생한 나는 제거돼야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은, 그 사람은 죽도록 고생하면 할수록 고생한 내가 더욱더 소중해져버리는 거예요. 고생을 안 했으면 덜 소중할 텐데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 자기를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가면서 아까 여호수아가 집단의 단위라 했지요. 감사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고생해도 혼자 고생하지 않고 뭐로 고생합니까? 집단적으로 고생하게 만들었어요. 집단적으로 고생하게 되고 어느 누가 고생을 더했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도록 조치해버립니다. 요단 강 건너갈 때도 제사장을 앞장세우고. 제사장은 뭘 들고 있습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그러니까 언약궤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당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왕자표 그 뒤에 뭐가 나옵니까? 그렇지요, 예. 왕자표 크레파스. 크레파스가 어떤 것은 길고, 짧고. 키 작은 사람, 키 큰 사람 있고 뚱뚱한 사람 있더라도 전부 다 한 통에 들어갑니다. 한 통에 담겨있어요.
통에 들어있지 않은 밑바닥에 누가 있느냐?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 지파가 받쳐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일뿐이다. 이 레위 지파를 통해서 뭐가 살아나느냐? 언약이 계속해서 발생되면 그 조건 하에서만 너희들은 살아 있다. 이게 무슨 조건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유지되는 조건이에요. 이 조건은 무엇과 대비되느냐? 내가 생존할 조건과 이게 대비가 됩니다. 내가 이 땅에서 무엇 먹고 살면 됩니까? 그걸 생각하는 순간 무슨 조건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계속 살아 있음의 조건은 날아가 버렸어요.
왕자표 크레파스기 때문에 이걸 인도하는 자는 이게 여호수아가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무엇과 중첩돼있는가? 모세언약에 중첩돼있어요. 여호수아는 하나의 기호에요. 하나의 표현에 지나지 않고 진짜 실내용은 뭐가 실내용이냐? 모세언약이 주인공 돼요.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 모세를 죽이게 한 언약은 모세를 죽임으로서 언약은 인간에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냈습니다.
모세가 중요하느냐, 언약이 중요하느냐 할 때 언약이 더 중요합니다, 라는 이 취지를 크레파스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야 돼요. 이 땅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들어오고자 한 땅입니다. 신명기 9장을 보게 되면, 지금 여호수아를 들어가면 안 돼요. 지금 들어가면 이해 안 됩니다. 신명기 9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크레파스에 들어있는 크레파스가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우냐, 얼마나 싱싱하고 정상적이냐, 이걸 묻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그러니까 한 곳에 모아놓고 목은 곧은 백성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이 곧은 백성은 왜 집어넣느냐? 너희들이나 여기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이 민족이나 동일하게 뭐다?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그들에게는 뭐가 없는가? 레위 지파의 레일이 없는 거예요. 레위 지파의 이런 언약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가 있다? 레위 지파의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 차이뿐이에요,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되면,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게 뭐냐?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뭔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뭐가 나온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라도 이방인이라도 쫓아낼 수 있는 뭐가 나온다? 악함과 죄성이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그냥 노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과 우리의 일함은 늘 경쟁하거든요.
우리는 자꾸 의로워지려고 하는 거예요. 의로워져야 하나님 앞에 내 생계보장에 대해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만큼 복음 알고 이만큼 착한데 나 죽일 거죠?” 하니까 “죽인다, 왜?” 할 말 없지요. “아아 죽는구나. 복음 안다고 사는 게 아니고 죽는구나.” 그렇게 돼야지요.
복음이 나 천당 보내려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언약이 언약대로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날 지옥 보낼 겁니까, 하면 그게 바로 언약이 있기 때문에 드러난 죄가 되도록 주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