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2022겨울-2강 언약적 약함

아빠와 함께 2022. 1. 14. 08:37

2강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크레파스 밑 부분을 담당한다면 언약은 개인적으로만 주어지는 언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만 달랑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집단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그 이유는 개인적인 악은 어떤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주느냐면 집단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발하면서 튀어 나올 때다. 그 예가 아간이다. 나는 여호와께 바치는 것이 아까워 외투와 금을 챙긴다. 집단에서 나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할 때 악이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항상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나중에 땅 분배 이후 내 땅 네 땅이라는 싸움이 일어나면 안 된다. 집단적으로 부여 받았다. 사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나 천국 간다하면 안되고 우리가 간다고 해야 한다. 이 나라에 한 사람밖에 없어도 우리란 표현을 써야 한다. 예수님은 홀로 오셨지만 우리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우리가 된다.

집단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계속 악으로 규정하는가? 개별성을 악으로 규정한다. 개별적이 되면 자연을 볼 때 카운트 한다. 수를 헤아린다. 수를 헤아림에서 수학이 나온다. 수학은 하나 둘 셋, 개별적으로 헤아림에서 수학이 시작된다. 헤아림 속에서 헤아리는 당사자에게 모든 의미가 응집되도록 헤아린다. 형제들에게 호빵 다섯 개를 줄 때 엄마가 사이좋게 잘 먹어라 한다. 이것이 엄마의 실수다. 인간은 개별성이기 때문에 사이좋게 할 줄 모른다. 예, 어머니 해 놓고 형제들끼리 카운트한다. 형이기 때문에 세 개, 동생이기에 두 개라고 하면 동생이 발끈한다. 우리나라 헌법에 그런 것이 없다. n 분의 1이다. 두 개씩 먹고 하나를 나누자고 한다. 찐빵 갖고 유산 나누는 연습을 한다.

여기에 형이 복잡한 계산을 들이댄다. 지난번 집 청소할 때 네 노동력과 나의 노동력을 비교하면 내가 2.5배 많았다. 내가 많이 일했으니 많이 먹어야 하고 너는 적게 일했으니 적게 먹으라는 것이다. 합리적이기에 동생이 쑥 들어간다. 그러면서 다시 따진다.

아버지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형에게 많이 주라고 유언을 했을 때 많이 주라는 것이 추상적이라 동생들이 따지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의미를 구축할 때 숫자로 세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기는 없고 몸만 있다. 그런데 자아성은 밖에 나가 수를 세면서 만들어진다. 내 것, 내 것, 네 것으로 센다. 찐빵 두 개 먹을 때 동생의 자아는 찐빵 두 개의 나가 된다. 이것을 무산 시키는 것이 레위지파다.

레위지파는 양을 대신 죽음으로, 양과 소를 대신 잡음으로 이러한 개별성을 완전히 무산시킨다. 인간과 인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되는 구원은 없다. 개별적 구원은 없다.

만약 개별적 구원이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두 사람이 있을 때 내가 아는 예수와 네가 아는 예수가 다르면 둘 다 천국이 다른 천국이다. 이런 천국은 없고 받아주지도 않는다.

포도원 비유는 천국비유다. 혼인잔치도 천국비유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도 천국비유다. 천국비유의 특징은 하나의 가치를 배분하는 것이다. 오후 다섯 시, 세시에 온 사람 모두 동일한 품삯을 받는다. 주인의 뜻을 배분받는다. 주인의 의향이 분배받은 그들 속에 동일하게 자리 잡게 하기 위함이다. 네 안에 네 아닌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개별적 노동해서 얻은 것이 네 안에 안 들어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공로는 없애버린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가 사이좋게 한날에 죽었다. 약속한 헌금을 반밖에 내지 않아서 죽었다. 차라리 헌금을 안 했으면 부부는 살았을 것이다. 지금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하면서 개별성을 담았다. 내 것을 낸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나의 것을 안 받으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주님의 돈이 없기 때문에 자기 돈을 내겠다는 것이다. 인심 쓰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것이 없으니 자신도 신자 흉내 내려고 자기 것을 낸다. 주님은 자기 것을 내는 자를 죽임으로 너희들이 내든 내지 않던 다 주의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다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을 유지할 때 천국 백성과 왕의 관계가 유지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갖고 교회 헌금과 관련지어 헌금 많게 하려고 설교할 순 없다. 안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돈 내라는 것은 강도다. 너희들은 내나 안내나 죽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헌금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것을 내가 갖고 있고 네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끼리 주고받고 해 봐야 다 주의 것이다. 혹시 돈 갖고 있는 것이 번거로운가? ‘내 돈 갖고 갈사람 없습니까?’ 광고해 보세요.

크리파스 안에서는 개별성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악을 끄집어낸다. 열 족속, 토착민들의 악이 관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악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토착민들은 자기 땅에 살기 때문이다. 악을 먼저 알고 들어가야 살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아무리 봐도 악이 보이지 않는다. 애굽에서 살듯이 그냥 살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악인가?

이럴 경우 악을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원자핵이 있다. 플러스 전자가 있고, 주변에 마이너스 전자가 있다. 전자는 고유의 궤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옆에 하나 더 있으면 겹친다. 전자의 힘이 하나 있을 때에는 촘촘하지 않는데 여러 전자가 있으면 촘촘해 진다. 밴딩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놓고 그 신들을 섬긴다면 너희들조차 멸망하신다고 하신다. 고유의 띠가 나와야 한다. 선 스펙트럼처럼 빠질 것은 빠지고 들어갈 것은 들어가야 하는데, 이방인과 겹쳐 버리면 밴딩 현상이 되어 얼싸 안아 버린다. 결혼, 종교문화가 겹치면 순결을 잃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망하지 않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죄악을 끄집어낸다. 죄악을 끄집어내어 주어야 레위지파가 담당하는 제사의 의미가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어야 죄가 어떻게 죄가 사라졌는지를 알게 된다. ‘왜 제가 천국 갑니까?’와 같은 말이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왜 저에게 죄가 없다고 합니까? 저보고 왜 의인이라고 합니까?’ 따지고 싶은 것이다. 이런 별종도 더물지만.

주님의 뜻은 우리를 의인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분, 기여하신 분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너는 이방민족을 선호하는 너의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 죄와 더불어서 같이 투입되는 주님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언약의 구현이다.

언약 구현의 예
이스라엘, 곧 전자가 광자를 만난다. 광자는 빛의 입자다. 광자를 하나님으로 보고 전자를 인간으로 보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만나면 왜 이방민족이 이 땅에 살아서는 안 되는가가 나온다. 전자가 튀어 나온다.

파이만 다이아 그램.

두 번째 방향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만나서 하나님이 튀어 나온다. 둘이 합세해서 사사가 핍박받는다. 선지자가 핍박받는다.

이방민족과 하나님과 만나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을 팅겨 나가게 한다. 바벨로 포로로 잡혀가게 한다.

이스라엘, 이방민족, 하나님 세 가지 조합이 이스라엘의 역사, 공간이다. 공간에서 일이 벌어지면 시간이 발생된다. 이 시간이 이스라엘의 역사다.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와서 이방인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신다.

출렁이다 우연한 입자의 등장으로 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장이다. 138억 년 전에 빅뱅, 지구는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요동치는 이유는 옆 동네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리학 이야기는 개별자와 관련되어 있다. 카운트 한다. 수학적으로 계산한다. 자연의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한다. 찐빵 더 먹고 싶은 동생의 입장이다. 자신도 두 개 반 먹고 싶은데 형이 훅 들어와서 네가 나보다 덜 일했잖아라고 하면 카운트 적으로 맞게 된다. 이것이 이성적이다. 판단. 판단의 모든 의미는 판단하는 나에게 모든 의미가 쏠린다. 이것이 악마의 모습이다.

천국은 달란트 비유나 혼인잔치 비유에서 각자 개별자로 있는 자는 다 와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곳에 개별은 죽이고 전체로 참석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신랑은 한명, 신부는 열 명이다. 이것이 천국이다.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훈련하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카운트 한 겁니다. 넣을까 뺄까 한 것이다.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그냥 갖고 있으면 죽는 일 없다. ‘감사합니다’하고 살면 아무 일 없다. 죽고 싶거든 헌금하라.

언약은 이스라엘도 이방민족도 꼬이게 되어 있다. 광자가 진행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의미와 이방인의 의미가 같이 등장한다. 이 때 이스라엘은 오해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오해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을 집어넣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면 이스라엘 집단이 하나의 개별자로 움직인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이방민족을 쫓아내지 못한다.

지도를 보면

중부전선이다. 느보산에서 모세가 죽는다. 죽은 후 언약궤 위치가 길갈에서 실로, 마지막엔 세겜으로 간다. 여호수아 마지막에 언약궤가 세겜에 있다. 언약궤가 있는 곳이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결합해야 언약궤의 취지가 드러난다. 왜 성도를 죽이지 않고 세상을 살게 하느냐? 세상 사람과 접촉되어야 십자가가 얼마나 감사한지가 계속해서 드러난다.

물 퍼내기. 계속해서 물을 퍼내니 바닥에 예수님이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가가 나온다. 내가 죄지었다는 것도 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나온다. 내가 바로 하나님을 죽였다는 죄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하신다. 가룟유다의 죄까지도 주께서 용서하신다. 언약이 드러나기 위해 가룟유다와 예수님이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요소가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된다.

왜 자꾸 죄 지었는데 나보고 의인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의라는 조건하에 네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방민족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육과 만나 십자가가 의가 되게 한다.

느보산에서 모세는 죽는다. 모세가 죽는 이유도 본인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다. 모세가 평생  나쁜 짓 한 적 없다. 그런데 한번 성질냈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질을 하나님이 유도하셨다. 물이 자동적으로 나오면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모세 입장에서 반석 안에 물이 있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은 모세가 아는 바이다. 두 번 치면 안 된다는 것이 없었다. 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 할 때 일단 결혼했다 치고 자식을 낳았다 치고 그러면 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어떤 자식이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식이 나올 것을 아시고 때를 맞추어 협력하여 이런 적들을 붙여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겐 공간적으로 자기 터전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있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나의 뒷모습을 보고 결정한다. 이미 일을 다 끝낸 뒤에, 끝난 상태에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러니 우리 계획과 차질 나게 찾아오신다.

모세는 예상도 못했다. 모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세를 떨어내고 모세 언약이 들어가게 한다.

여호수아 5:1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여호수아 5:13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얍복 강가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와 같았고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과 같다. 내가 살 땅에 나의 백성을 집어 넣어라는 명령을 받는다. 신발을 벗음으로 내가 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땅에 들어가는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 옆에 서서 지팡이로 연속적 기적이 있어주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기적이 놀라운 자연현상으로 생각했지만 점차 기적이 내 속에 있는 천국의 요소가 아닌 악, 내가 손댈 수 없는 악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내가 외부적으로 도움 얻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다. 그래야 감사가 된다. 도와 줘서 감사가 아니라 빼앗겨도 감사다. 예수님의 모습으로 닮아간다. 빼앗겨도 감사가 된다. 내가 이런 죄가 있었구나를 드러낸다.

그래서 모세가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은 요르단 땅이다. 싯딤 길갈 여리고 벧엘 아이성으로 간다. 중간에 치고 들어간다. 인천상륙작전이다.
첫 번째는 중부, 남부, 북부전선으로 진행한다. 북부는 메롬 중심의 전쟁이다.

남부전선 여호수아 10장에 나온다. 여기에 이방과의 전쟁에서 언약적 취지가 드러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도 죄가 있고 이방인도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궤를 동행함으로 이스라엘이 거룩이 되고 의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똑 같은 의롭지 않고 목이 곧은 백성인데 악한 민족을 만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이 땅에 살게 하는 취지가 드러나게 하신다.

선 스펙트럼, 땅이 없는 레위 지파에 땅을 주라는 것은 없음이 있음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유일하게 통하는 요소다. 없음의 자리가 유일한 통로다. 땅이 있다고 해서 힘으로 유지하려면 이방민족과 동일하다.

이스라엘에게 맡기지 않고 여호수아 5장에 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등장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대리 전쟁에 나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5:15절에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 선 곳이 거룩하니라고 한다. 거룩이 너와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전쟁은 너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라 하니 우린 팽팽 놀고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갈렙이 중요하다. 갈렙이 약속의 땅을 정탐할 때 빈 땅이 아니라 아낙 자손,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땅을 언약으로 이길 수 있는 땅으로 봤다. 기가 죽지 않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더 확실성을 갖게 되었다. 저 정도 적이 있어 줘야 하나님답다는 것이다. 시시하다면 자신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여리고성 칠 때와 아이성 칠 때 이스라엘의 태도가 다르다. 작은 아이성 전쟁이 그러했다. 그래서 패했다. 이스라엘 내에 있는 건방짐과 교만함과 자만심을 계속 끄집어낸다. 자만과 교만으로 뭉쳐 있는 너희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라고 해서 이방민족을 붙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다루시고 이방민족은 본인이 본인을 다룬다. 이것만 차이다. 인간으로는 둘 다 아담의 자손이기에 둘도 동일하다. 달리기, 주식투자하면 누가 이기고 돈을 벌겠는가? 인간적 차이는 없다.

민수기에서 요단강 동편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땅이다. 르우벤, 갓, 므나셋 반지파가 차지한 땅이다. 이들이 이 땅을 차지한 이유는 그 만큼 믿음이 없어서다. 이들은 이 땅이 너무 좋아 보였다.

초등학교 때 소풍갈 때 좋은 지점을 선점해서 놀았는데 나중에 끝나고 보니 더 좋은 자리가 있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닌데 이 땅이 좋아 이곳을 달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말은 이들 속에 죄가 혹같이 튀어 나올 만큼 풍부하다는 것이다. 지금 누구를 나무랄 입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혈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너희를 통해 언약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에게 땅을 차지하게 한다.

이방 민족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었다. 분배해주고 차츰 알아서 정복하라고 하면서, 정복되지 않았는데 지도에 기업을 분배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국경선을 점령국들이 일방적으로 그었다.

신앙적인 의무로 남겨준다. 여호수아는 죽어야 한다. 여호수아가 죽어야 모세언약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살아 있고 언약이 살아 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사사시대가 된다.
사사들의 특징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나타난다. 레위지파도 배고파 다 흩어져버렸다. 불연속성이 다 깨져버렸다. 밥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방민족과 화친하지 말라고 했는데 화친하여 밴딩이 되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누가 누군지 모르게 되었다.

사사기 6:24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사사기 6:25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바알의 단, 우상이 나오지요. 약속의 땅에서 우상과 어떻게 전쟁해서 이기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와해되듯이 무너지고 그 때 여호수아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우상을 처리하고 승리하는 원리 원칙을 여호수아가 언약궤를 진행하면서 다 이야기 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의 방식을 설명한 후 다시 여호수아로 돌아가 언약궤가 어떻게 약속의 땅에 의미 있게 들어갔는지는 8시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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