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백신
성경에서 땅을 이해하려면 노아 홍수부터 이야기가 제대로 되어야 된다. 노아홍수는 땅 주인이 와서 다 나가라는 것과 똑 같다. 이 땅은 내 것이니 다 나가라. 이 땅을 더럽히는 것을 눈 뜨고 못 보겠다고 하면서 다 나가라 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다 죽었다. 땅은 인간이 살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그 땅에 관여하니 홍수로 말미암아 땅 위에 사람들이 다 죽었다.
땅은 살 수 없는 곳.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땅에서 홍수 나서 다 죽었다면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합니까? 주의 뜻은 살지 말라. 살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수아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땅의 주인들이 있는데,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을 모르는 자, 율법을 안 지키는 자들은 살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땅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아는 자로 하여금 율법을 모르는 자를 다 추방하고, 몰살, 학살하라, 어린아이, 여인, 가축까지 다 진멸하라.
집에 쥐가 귀엽다고 살려주느냐? 진멸한다. 쥐는 좀 죽어줘라고 해서 죽인다. 이 땅은 율법이 율법대로 실현되는 곳이기 때문에 율법 모르는 너희들은 죽어 달라는 것이다. 죽이는 전사가 이스라엘이다.
여호수아 1: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이 싸움을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싸움을 부추긴다. 죽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이 전쟁이 유효하냐? 가능하냐? 신약시대에는 오지 마. 천국 오지 마. 이것이 신약이다. 살지마 가 아니라 불로 멸망당할 땅에서 살아. 천국에는 오지마. 저리가. 이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명기8:3을 보면 만나를 주었는가? 말씀을 주었는가? 말씀을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 사람이 말씀으로 산다. 말씀으로 살지 않는 자는 죽이고 말씀으로 사는 자가 그 땅을 차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다.
여호수아 1: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율법을 지키는 방법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먼저 율법 앞에 죽임을 당하면 된다. 율법이 승리하고 나는 율법 앞에서 패배한다. 그러면 내가 거북이처럼 움직이면 거북이 등 껍데기에 율법이 움직인다. 이것이 탱크 아닌가? 말씀 앞에서 난 못 지켜. 십계명 못 지켜. 십계명 걸어 놓은 것은 어떤 주일학교도 못 지킨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목사부터 어린아이까지 아무도 못 지킨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내가 먼저 율법 앞에서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백신이다. 백신은 죽은 코로나 균을 집어넣어 코로나 균이 들어왔을 때 ‘내 친구 여기 있네’ 해서 다시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이 백신이다.
어찌되었든 무슨 백신이든 율법에 의해서 먼저 죽은 나를 내가 율법 지켰다고 할 수 없게 만드는 율법의 위력으로 세상에 나간다.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다. 십자가에 죽게 된 성도는 십자가를 운반하는 탱크 운전병이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청년이 율법을 어릴 때부터 지켰다고 한다. 이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못 지켰다고 하면 영생을 얻는데, 혈우병 걸린 여인이나, 문둥병자, 자진해서 문둥병 걸려도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율법을 못 지킨 사람은 율법만 쳐다본다.
실효성 있는 율법이 실제적인가? 아니면 홍콩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이 실효적인가? 북한에 성도가 있다면 김정은 정치를 무서워할까요, 무서워하지 않을까요? 김정은 보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더 무서워하면서 행복하게 살 겁니다.
주 예수 계신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잖아요. 무슨 신앙의 자유를 찾아오는가? 한국에 무슨 신앙의 자유가 있는가? 여자가 결혼을 하던 남자가 장가를 가든, 시집, 친정 탓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본인의 마음이 낮아지지 않아서다. 환경이 우리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주제넘게 자신을 너무 부풀게 이해했기 때문에 환경과 맞지 않는다.
여호수아 1장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하신다. 율법을 지킨 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지키기 때문에 이방민족이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한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궤가 가는 길이다. 율법의 완성이 가는 길이다. 시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공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공간으로 다스리는 세계가 점점 가까이 온다.
언약 안에 율법이 들어 있다. 언약이 이동한다. 언약이 이동할 때는 이스라엘의 진행경로를 통해서 언약이 이동하게 되면 언약의 적이 발생한다.
적이 있고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진행하게 되면 없든 적이 발생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차원이다.
여호수아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이 내용이 어렵다. 여리고 성의 기생라합이 무슨 뜻인가? 기생라합은 구원받는 자의 원래 모델이다.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기생 라합과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이 살고 있다. 그런데 언약이 시행이 되면 적이 만들어진다. 언약으로 포위하니 갇혀 산다. 갇혀 있으니 구출이 발생한다.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공격해 오지 않았다면 구출이, 구원이 있을 리 없다. 구출, 구원은 곁에 이스라엘이 공격해 왔을 때 가능하다.
막대자석이 그냥 있으면 엔 에스극을 모른다. 엔 극이 왔을 때 반발하면 엔극이 되고 당기면 에스극임을 안다.
혈육대로 평범하게 사는데 복음이, 율법이 들이닥침. 우리가 갇혀 있었다.
여호수아 2: 9-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홍해를 건너오고 요단강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면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켰음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을 듣고 여리고 사람들의 간담이 녹았다.
저지할 어떤 세력이 없었다. 홍해, 요단강이 물이 많을 때 건너왔다. 이길 수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하루에 한 바퀴씩 언약궤를 맨 제사장이 앞장서고 나팔을 불며 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저지할 자연도 인간도 없다. 언약궤 진행 방향,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여리고 성에 왔을 때 여리고 사람들은 공포에 싸여 있었다.
두 정탐꾼이 왔을 때 기생라합에게는 그들이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이다. 두 정탐꾼이 구원자라 했을 때, 예수님은 구원자로 시작했지만 구원대상이 되었고, 구원 대상이 되었기에 구원자가 되셨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오셔서 보호를 받으시고 구원대상이 되셨기에 구원을 받으셨다. 구원대상이 되지 않으면 구원자가 구원할 어떤 소스가 마련되지 않는다. 자신이 친히 구원대상이 되는 것을 경유했기에 구원자는 우리의 어떤 형편도 개의지 않고 구원하실 수 있다. 이럴 경우에 구원못하지요 라는 말을 주님 앞에서 함부로 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을 것을 모든 것을 다 겪으셨기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 조건이 난감해서 구원 못 받는 경우는 예수님에게 있을 수 없다. 두 정탐꾼이 기생 라합에게 왔을 때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일원이기에 이스라엘로 받아들였다.
두 정탐꾼이 기생 라합에게 신세를 진다. 그러면 절차가 만들어진다. 정탐꾼이 여리고 성 안에서 갇혀있는 형국이다. 여리고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일원이 여리고성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 기생 라합이 구원되기 전에 정탐꾼부터 구원되어야 된다. 정탐꾼이 어떻게 구원되는가? 여기에 도와주는 기생라합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쪽에만 있는가, 아니면 기생라합에게도 작용하셨을까요? 기생라합에게도 작용하셨다. 기생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려주는 절차가 구원절차다. 숨겨주고 창에서 줄로 내려 왔다. 기생 라합이 구원자가 구원받는 자 정탐꾼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도움 받음. 그러면 구원의 절차는 그들이 빠져나간 이 창에 잘 보이도록 붉은 줄을 내려놓으면 너를 내가 와서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여리고성이 있다. 밖에 이스라엘이 포위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는 유명했다. 요단강을 건넜다. 언약궤의 요소가 들어 왔다. 여리고 성은 기생라합이 없다고 치면 정탐꾼들은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러면 여리고성은 실효적 권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기생라합이 실효적 권세에서 차이나게 정탐꾼을 숨겨주었다. 여기에 출구를 만들었다. 그 출구가 기생 라합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된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 앞에 포위되어 불로써 심판 받아야 된다. 출구가 없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사히 탈출하는 그 구멍이 바로 천국 가는 좁은 문이 된다. 그야 말로 좁은 문이다. 좁은 문으로 빠져나가심.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예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구원은 누가 오셔야 되고 빠져 나가셔야 된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왜 정탐꾼을 도와주었을까요?
여호수아 2:10-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이 기생라합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여리고성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왜 기생라합이 정탐꾼을 살려 주었는가?
그것은 정탐꾼과 밖에 있는 이스라엘과 동일한 하나님이 관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도와준다면 홍해를 건너온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접촉할 기회를 기생 라합은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기에 정탐꾼을 살려줌. 이것이 율법정신이다.
율법을 지키는 정신은 현재 자기가 속해 있는 위치와 여호와의 위치가 분명하게 차이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에 기생라합은 정탐꾼을 숨기는 순간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이럴 때 기생라합이 묻는다.
하나님께서 구원 작업을 하실 때 율법이냐 아니면 평소에 갖고 있는 너의 힘이냐는 계속해서 대조시키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경찰이 와서 들이닥치면서 정탐꾼 봤는데 어디로 갔느냐고 할 때 기생라합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짐이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이 거짓말임을 받아들여야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야 내가 사는 현상이 망상이고 허상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내가 속한 이 땅에서 멸망당해야 하는 안목을 유지한다면 내가 이 땅에서 진실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말이 된다. 내가 내 세계를 내가 붙들고 있겠다는 거짓된 모습밖에 안 된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거짓말이 여러분 속에 있는지 수사해 보라. 수사반장이 되어 진실만을 외치는지 거짓말을 찾아다니는지? 나 어찌 거짓말만 좋아하지. 성경이라는 거짓말.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겠다는 것이 무엇인가? 차이남이다. 같은 여리고성에 살면서 기존 여리고성 사람과 차이가 난다. 이스라엘과 여리고성이 차이가 나는만큼. 차이의 발생, 거룩의 발생, 이것이 구원자의 원형, 롤모델이다. 양심대로 살아서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심은 나를 생존케 하는 힘이기에 위험한 것이고 옳지 않다.
여호수아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유월절 정신의 재현이다.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갇혀있다. 여기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온다. 여기서 차이남을 일으킨다. 히브리인들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 사람들은 피를 바를 이유가 없었다. 애굽을 포위한 천사가 공격할 때 천사는 피만 쳐다본다. 피가 절대기준이다. 이 기준에 어떤 다른 기준을 첨가하거나 빼면 안 된다. 절대 기준만 달랑 남아야 한다. 다른 기준을 필요치 않다.
기준 더하기 양심하면 안 된다. 기존 세계에 눌러 앉겠다는 것이다. 절대 기준만 유지해야 한다. 절대 기준만 유지하면 주님께서 그 기준에 준해서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새로운, 피에 동참한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것이 차이남이다. 히브리인들이 피를 발랐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피를 발랐을 때 힘이 세졌는가? 스스로 탈출했는가? 뽀빠이처럼 시금치 먹고 힘이 나서 탈출 했는가? 그냥 피만 발랐다. 기생 라합이 대모를 했는가, 시위를 했는가? 그냥 붉은 줄만 창에 내렸다. 피를 보고 천사가 건너가듯이 창에 내려진 붉은 줄을 보고 구원했다. 우리의 유월절 사건을 여리고 안에 재현 시킨 이 놀라운 사건을 보았다. 기생 라합의 가족만을 구원하라. 이 방법이 오고 오는 세대에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주의 할 것은 피 발랐다고 잘난 체하지 말고, 창에 붉은 줄 있다고 동네방네 우리 집에 붉은 줄 있다 하지 마시고 그냥 주님이 와서 데려 가도록 우리가 설치지 말라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유난떨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말고. 절대 기준만 자랑하고 그냥 사세요. 주식을 하든지 땅 투기를 하든지, 그냥 절대 기준만 유지하세요.
기생라합에게는 본인의 의가 없다. 여리고 성은 멸망당하는데, 멸망당할 사람 중 한 사람인데 무슨 자랑할 것이 있는가? 창틀에 붉은 줄만 내려달 뿐이다. 여러분의 모습과 흡사함을 보지요. 우리 살아가는 모습과 똑 같지요. 피만 내세우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는 것. 살면서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 딱 한 가지 피만 생각하면 된다.
주님께서 피만 보시고 구원하신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의 반복이다.
여호수아 3: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 3:16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4,5월 달에 요단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25킬로 상단에서 물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아래쪽은 물이 빠져버린다. 여기에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열두 지파의 대표들이 함께 동참을 한다. 이 말은 요단강을 건너가야 약속의 땅이 된다. 약속의 땅에서 분배를 받는데 이것이 누구를 통과해서 분배를 받는가?
제사장 안에 요단간이 흐른다고 보면 된다. 비가 제일 많이 올 때의 요단강.
이것은 홍해의 재현이다. 그전에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실패했다. 홍해를 건너 왔는데 왜 실패했는가? 홍해 건너 올 때 하나님께 하나님과 함께 건너오지 않고 하나님이 다 만들어준 곳을 건너왔다. 자기 뜻을 유지하면서도 홍해를 건너 올수 있었다. 길 있네. 건너가자. 어렵지 않았다. 고마워 모세. 모세는 지팡이를 물에 대고 있었고.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 때는 열두 지파가 참여한다. 약속의 땅과 자신들 사이에서 제사장이 빠지면 안 됨을 안다. 제사장은 언약궤를 모신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열두 지파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분배받을 수 없다.
요단강은 헤엄 쳐 건널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을 통과했다는 의미가 없는 한 이렇게 들어가 봤자 소용없다.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서 의미까지 달성할 수 없다. 약속의 땅이 목적이 아니라 누구 없이는 이 땅을 얻을 수 없음을 장착해야 약속의 의미를 이들이 알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비가 많이 올 때 맨 땅으로 만들어 제사장으로 하여금 건너가게 했다.
여호수아 3:12-14
제사장은 요단강을 멈추게 했고 제사장 안에 열두 지파가 몽땅 다 들어 있다고 보시면 된다. 물을 건너갈 수 없는데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죽음의 바다도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하나 저래하나 땅 차지하며 되지가 아니다. 내 안에 누가 계셔야 천국에 갈 수 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천국 갈 수 있지 주님 빼고 도와 주세요라는 식으로는 천국에 갈수 없다.
그래서 성경 쓰기 한다든지 종교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철야기도라든지, 간증집회를 좋지 않게 보는 이유가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떼를 쓰고, 애쓰고, 순수하게 하고, 솔직하게 하고, 부족합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효과를 주는 줄 생각한다. 기존교회에서 목사가 나올 때 할렐루야 하면서 나오지요. 믿습니까 하면서 나온다. 생뚱맞게 믿습니까? 아멘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찬송합시다. 이거 미친것도 아니고.
이것은 이미 인간들의 소원은 어떤 미친 짓을 해도 천당만 보내 주세요라는 것이다. 하라는 대로 다할테니. 천국에 가기 전에 천국이 우리 마음을 쑤시고 들어와야 된다.
백신.
먼저 우리가 율법에 죽어야 된다. 우리가 죽어야 율법이 율법대로 살지 나도 살고 율법도 사는 것은 없다. 집안싸움 좋겠다. 율법은 예수님을 가르친다. 우리는 부자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 이게 무슨 꼬라진가? 주님은 십자가 피의 절대적 기준을 말하는데 교회 부흥되게 하옵소서. 백신을 맞아도 소용없어. 벌써 돌파했어요.
요단강 건널 때에 열두 지파가 함께 한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할 때. 언약궤, 하나님이 가라할 때만 가야하고 그렇지 않을 땐 가면 안 된다.
잠언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여호와께서 걸음을 인도하시지 자신이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한다. 너 왜 안 해. 주께서 나에게 계시를 주지 않아서 안하겠다는 것이다. 길은 내가 죽을 때만 나오는 길이다. 내가 죽었다고 치고 ‘주님 내가 뭘 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길이 나온다.
혼처 자리가 세군데 나왔다. 직접은 성형외과 의사고 하나는 법원 판사고, 하나는 삼성 주식 많은 사람일 때 세 사람 중에 골라라 하면. 잠언서 20:24절을 동원시키지 말고 내가 어떤 남자라도 내가 죽겠나이다라고 하면 주께서 인도하셔서 판사랑 결혼하게 하셔서 죽을 만큼 고생하게 하신다.
말씀을 적용할 때는 백신을 염두에 두고 피가 묻어 있는 언약궤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가 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석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6강 무기 (0) | 2022.01.14 |
---|---|
5강 언약적 변천과정 (0) | 2022.01.14 |
3강 우상을 다루는 법 (0) | 2022.01.14 |
2022겨울-2강 언약적 약함 (0) | 2022.01.14 |
2022겨울수련회 1강 갈렙과 레위지파 (0) | 2022.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