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3강 우상을 다루는 법

아빠와 함께 2022. 1. 14. 10:29

3강  우상을 다루는 법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설명 못한다. 낙엽이 있다면 낙엽이 녹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할 때 어느 때에 녹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하는지를 알 수 없다. 아무리 잘라도 변화되는 부분을 도려내도 그 부분에서 또 잘라내야 한다. 수학에서 미분이라 한다. 무한대로 갖고 간다. 잘라내고 잘라내어, 무한대로 잘라내면 변화를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데,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우상문제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신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상은 무가치하다(이사야). 허망하다. 우상은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이 있고 신이 있는데 여기에 언약의 하나님이 개입해서 우상은 신이 아니다, 무가치 하다, 허무하다, 너랑 똑같다, 너 자신이 허망하다 고 하신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맞닥뜨리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급으로 생각한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인간이다. 동급이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본성에 맞다. 이것이 본성에 맞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오신 공간과 시간이 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이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하니 마치 자신들도 거주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아는 시간과 공간을 동일하다 생각했다. 자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의 특수성을 알려면, 우상의 자리에 가서 그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 보라. 우상과 너와 이방인이 같은 차원에 있다. 그러니 너희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왜 늙는가, 죽는가의 변화를 설명 못한다. 어디서, 왜 태어났는가? 천지창조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 차원에서 나와야 하는데 우상 차원에서 천지창조를 설명한다든지, 심판이 어떻다든지, 이 세상 종말을 언급하는 것을 잘못되었다. 이것은 허망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주님께서 주신 변화를 자신의 차원에서 설명하지 못한다. 여호수아에 나오는 전쟁에서 인간이 예상한 변화 말고 인간이 예상 못한 변화에 집중해서 신경 써야 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0:13절에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태양이 하늘에 멈추었다. 태양이 고장 난 것 같다. 자기 길 잘 가다 가지 않는다. 이 변화를 인간 차원에서, 우상 믿는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여호수아 5:10-12절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만나가 왜 그치는가? 만나는 유월절과 관련되어 있다. 1월 14일 유월절을 지켰다. 1월 14일  날짜를 두고 이방민족의 1월 14일과 이스라엘의 1월 14일이 다르다. 변화가 삽입된 1월 14일이다. 유월절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접근하면서 유월절날 초월적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 개입변화를 빠뜨리고 그냥 형식적으로 유월절을 지켰다. 이렇게 되면 유월절의 시간은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되는 1월 13일과 15일 사이의 평범한 14일이 된다. 율법에서 말하는 유월절이 통째로 날아갔다. 같은 차원에서 변화를 설명 못한다. 변화를 설명 못한다에서 약속의 땅에서 살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 못한다. 내가 이 약속의 땅에 살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 못한다.

어디에 살고 있어요? 목포에 살고 있어요? 본인이 목포에 살아야 되는 이유를 초월적으로 설명해 보라. 전라남도에 있는 도시다. 차이가 없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주님이 십자가 지신 개념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포와 십자가의 관계는? 설명이 안 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십니까? 목사와 십자가의 관계는? 신학교 나와서 자격증 주면 목사 된다. 이것은 일반 자격증 얻는 것과 같은 것이네. 만나가 그침으로 말미암아 만나를 내려주심을 초월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받아들여야 한다. 만나가 주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음은 이순신 장군 죽음과 동일하다. 당신 죽고 나도 죽겠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네가 살았다고 하신다. 일반인들에게 통하는 이야기인가? 시이소오하는 것인가?

여호수아 주석을 보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와서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옛날에 한때.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땅이 있잖아요. 시온니즘이라해서 땅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됐다고 한다.

우상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변화 설명을 못한다. 우상은 허망하다. 너희들이 여호와를 믿든, 예수를 믿든, 성령을 믿든 십자가의 변화를 설명 못하면 허망하다. 이것은 나 자신의 생존과 미래 계획을 내가 믿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의 실체다. 

이스라엘의 정체가 점점 더 드러난다.

사사기 6:25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세 번째 제목은 우상을 다루는 법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
무와 무가치.
바알 이름과 아세라 이름이 나온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름과 연결된 실체가 있다고 본다. 실체가 있기에 이름을 붙인다. 실체가 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이름은 허망한 이름이다. 기드온이 살고 있던 당시 사람들이 미디안 이방민족에게 점령을 당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이 포위했다. 미디안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다. 이스라엘 동네에 바알과 아세라가 만들어져 있다. 이 지배가 실제 상황이다. 홍콩을 실효적으로 홍콩이 지배하는가, 중국이 지배하는가? 중국이 지배한다. 실제상황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무가치 한 것, 실체 없는 것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천사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한다. 천사가 이것을 기드온에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서 신발을 벗어라 했다. 땅에서는 여호수아요 그 위에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다. 중첩된다. 땅의 일이 다른 차원에서 설명된다. 태양이 멈추는 것은 지상에서는 설명이 안 되지만 하늘에서는 설명이 된다. 땅에 있다고 땅의 사람이 아니라 땅에 있어도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백성임을 집어넣으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설명이 되는데 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에 미디안에게 지배를 당하는가? 무엇을 양보했는가? 어떤 점을 양보했는가? 변화를 설명해야 될 터인데 이스라엘은 본인의 생계, 생존, 가진 것만 있으면 다른 차원은 필요 없다. 이미 도움 받았기에 고맙습니다 한 후 자기 것을 챙긴다. 그러면 중복된 하늘의 차원이 떨어져 나간다.

한 달 수입이 이천 오백 만원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달 수입이 이천 오백 원 되는 사람이 있다. 둘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천 오백 원 받는 사람이 간절하겠느냐, 이천 오백만원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겠느냐?

어느 사람이 간절하겠느냐? 없는 사람이 더 간절하다. 넉넉히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간절하지 않다. 신명기 8장에 나온다. 네가 네 힘과 능으로 재산을 얻었다 할 때 필히 우상숭배를 한다. 본인 생각에 넉넉하기에 다른 차원이 더 이상 필요 없다. 하나님의 실체가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의 실체로 바뀐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차원을 떼어 내 버렸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실체다. 주변에 이방 나라의 실체와 동급이 된다. 잘 먹고 잘 사는데 하나님을 왜 믿느냐? 이방인과 동급이 된다. 동급이 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고 이유이기에 하나님이 도와주든 아세라, 바알이 도와주든 나만 도와주면 좋게 지낼 용의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장난삼아, 진실하게 미디안이 믿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으로 바꾸어 보라. 이름을 여호와, 예수이지만 실제로는 내 생계를 위한, 절박하거나 다급하지 않는 신, 바로 우상이다.

만나가 그친 시점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끊어진 것이 절박한가, 광야에서 끊어진 것이 절박한가? 광야가 절박하다. 광야에서는 만나 아니면 먹을 것이 없다. 그 때는 우리의 생존권을 만나를 주신 여호와가 쥐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변화,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소설을 쓴다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말을 건넨다 치면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다. 너 만나 먹으니 살 수 있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는 마음을 유지할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는 유지하겠다고 할 것이다.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인가? 우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

베드로처럼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약해 보이지 않고 권력의 실체라 믿어질 때, 예수님이 모든 권세보다 세다고 보여질 때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쥐불놀이하는 것처럼 다 튕겨나갔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홀로 돌아가셨다. 사도바울은 그 변화를 너희들이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사도바울의 편지다. 성령 받은 자만이 십자가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우상과의 관계에서 우상은 무가치하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없음이 된다. 왜냐하면 있음은 무가치에 합류된 상태다. 있음을 갖고 우상을 읽을 수 없다. 무가치 하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하다. 아무리 있음을 해 주어도, 이스라엘을 살려주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있음 자체가 무가치와 동급이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방민족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방민족을 이해하려면 이방을 떼고 민족으로 보면 된다. 그냥 민족이다. 민족의 속성은 부모가 일하는 이유는 네모다.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인가? 상속하기 위해서다.

자녀 있는 부모가 일하는 보람이 상속하는 것이다. 오늘도 찬바람 부는데 열심히 일한다. 상속하면 자식과 부모사이가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진다. 있음에서 못 벗어나기에 부처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도와주면 목적에 달성하기에 감사하고 충성하게 된다. 인간은 우상에서, 무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식이 일하는 이유는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일한다.

이 전체가 혈육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누구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네가 복이 있다고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혈육이 아니면 없음이 되어야 한다. 혈육이 없으면 없음이 된다. 없음의 자리에 천사가 나타난다.

여호수아를 어떻게 읽으렵니까? 이방민족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진다. 이들과 싸운다면 이방민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나님 쪽에서 내미는 카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없음이다. 없음이라는 말은 들쑥날쑥이다. 있음이 붙잡을 수 없는 들쑥날쑥이다. 일방적으로 들어갔다 나갔다하는 것이다. 이것을 붙잡을 수 없다. 이것을 사건이라 한다. 사건이다. 사건을 인간이 어떻게 붙드는가? 바람 같은데. 바람을 어떻게 붙드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이스라엘은 오케이, 압니다. 너를 도와주었다. 만나 주었다. 오케 압니다.’ 이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과 비교하면서 하나님과 우상이 어떻게 차이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방민족을 붙여 이방민족을 물러나지 않게 한다.

이방민족이 물러나지 않는다. 르우벤 갓 므나셋 반 지파는 목초지가 좋아 자기 맘대로 요단 동편을 차지했다. 자기 자손에게 좋은 것을 상속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상속하는 이유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게 밝혔다. 사람이 상속하는 이유는 DNA가 불멸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어도 DNA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계속 자식 번식을 해 나간다. 도킨스의 말도 사실 맞지 않다. 염기서열이다. 분자구조식이다. 원자가 되고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면적 부피가 없다. 그런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숫자 1이라 하는데 1도 맞지 않아 스핀을 말한다. 아무것도 실체가 없는데 이것들이 모여 DNA 구성에서 이것들이 모여 육이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육이 되었다. 육을 설명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육의 원형을 예수님이라 한다. 육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죄 있는 모습으로 있을 때 육이 된다. 난국에 빠졌다. 난국에 빠진 이유가 우리가 이방민족을 욕하면서 본인이 이방민족의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기에 이런 설명에 대해 난감하기 짝이 없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혈육에 대해서 대립관계에 있다.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그런데 겉멋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의 차이가 전혀 없다. 이스라엘이라 하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면 그 차이는 누가 만드는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차이를 만든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 다른 차원, 천사의 개입으로 우상이 우상답게 노출된다. 우상이 우상답게 등장해서 이스라엘은 이러해야 하고 이방민족으로 분류가 된다.

사사기 6: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은 우상을 정면으로 대면했는가, 비대면 했는가? 비대면 했다. 우상은 결코 실체 없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이다. 홍콩을 지배하는 중국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실제로 가졌다는 말이다. 중국에 있는 지하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센가? 주님이 센가? 배운 대로는 예수님이 세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가 세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 칼, 창, 말도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다. 생존 보탬을 위해 성경을 보는데 이런 말은 생존에 보탬이 안 된다. 그러니 하나님 저는 안 싸울래요 한다. 기드온이 그 꼴이다. 천사님이여 하기는 하는데 내가 안 싸우는 방법으로 밤에 할께요라고 한다. CCTV 없는 곳에서. 밤에 해도 곧 아침이 된다.

삿 6:27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삿 6:28                                                                                                                                             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삿 6: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기드온이 죽을 위기는 기드온 본인 때문인가, 천사 때문인가? 천사 때문이다. 천사가 와서 시킨대로 했는데 기드온을 잡아 버린다. 우상은 무가치하다. 그런데 천사는 없음이다. 무가치하게 있는 있음에 대해 없음에서 공격, 전쟁한다. 없는 쪽에서 있는 쪽을 공격한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해 냈어야 했다. 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이란 만나만 있고 땅은 없는 땅이어야 정상이다. 광야다. 만나만 있고 땅이 없는 땅. 그 때 그 시절, 처음 사랑, 처음 마음을 왜 유지를 못했는가를 따지고 계신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약속의 땅에 만나만 있으면 된다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뿐이다. 만나는 말씀이고 말씀대로 산 분은 예수님뿐이다. 나머지 모든 사람은 허망한 우상이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성도는 흔쾌히 동의한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게 알고 싶었든 나는 누구냐?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이 진짜고 모든 만물이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이니 나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무가치한 우상으로 드러날 때 성도는 아주 신이 난다.

주님 취직하게 해 주세요라는 것조차 이래서 안 된다. 굶는데 밥이라도 한 끼, 이것이 기도할 내용이 아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는데 장사되어 아버지 값 한다고 상속해 주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우상이었다는 사실.

무가치함을 숨길 수 없도록 노출시키신다. 없음의 차원에서 볼 때 있음이 허망한 이유는 있게 하는 원바탕에 대해서 우상은 아무런 설명을 해 내지 못한다. 왜 여기 있고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데 우상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으니까 있어보자는 식이다.

이제 여러분들이 복음을 들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지요. 나의 민낯, 나의 뒤통수, 내가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는 나는 누구냐? 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밝혀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 없이 죽었다. 누구누구 없으면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생긴 것이 이스라엘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이 있다면 내가 있다. 주님의 십자가 있다면 나는 죄인으로 관계되어 있다. 제대로 있음, 바탕에는 있음, 미래를 아는 있음, 무가치 하지 않다. 우상을 붙여준 이유는 인간이 왜 우상으로 변해 가는지, 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다. 

기드온이 위기에 빠졌다

사사기 6: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바알이 실제로 신이라면 아들에게 찾아온 신은 찾아왔잖아. 그런데 너희에게 바알이 찾아 왔느냐고 묻는다. 너희들은 바알들을 만들었지 바알이 너희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 왔어. 그러니 어느 신이 진짜 신인가? 기드온 아버지가 이렇게 설명한다.

사사기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운짐 달았다라는 표현이 좋아요. 움찔되면서 어쩔 줄 모른다. 조급증 갖고 그 땅 약속의 땅에 살아야 된다. 우상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지만 만들어진 신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없는데 찾아오신다. 이것이 사건이다. 사건이 먼저 있고 있음이 된다. 사건이 이스라엘을 만든다. 이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다. 유월절 사건이 차이남이다. 유월절 사건은 피 발라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남이다.

이 차이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한다.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를 계속 유발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보낸다. 어떤 차이가 나는가? 변화를 다른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한가? 내가 여기에 사는 삶의 변화를 주님 입장에서 설명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 생각하듯이 그렇게 설명하는가를 묻는다.

너는 어떻게 좋은 곳에 취직했는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이런 답은 이방인들이 다 한다. 십자가와 관계없는데요. 아이고 답답해라.

머리가 좋아서 공부 잘했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내 취미는 책 읽기에요. 그 바탕을 설명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만 붙이면 되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훌륭하고 하지 않음과 관계없이 그냥 영토가 다르다. 사는 동네가 다르다. 이쪽은 무조건 천국, 저쪽은 무조건 지옥이다. 인간과 인간의 경쟁은 의미 없다. 윤석렬 찍으나 이재명 찍으나 안철수 찍으나 의미 없다. 세상 중에서 내가 대선에 나간 것은 다 주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지요. 거룩하지 않다. 차이가 없다.

기드온이 운짐 달아서, 조마조마해서 하나님을 테스트 한다.

사사기 6:37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다른 차원에서 오심을 인정할테니 내 선에서, 있음에서, 나의 무가치선에서 이해되는 식으로 문제를 내가 출제 할테니 그 문제를 맞추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을 내가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땅은 마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심을 진짜임을 믿겠다고 한다.

전에 찾아온 것이 존재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존재성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찾아온 것이 너무 감질나게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자기 무너질 생각하지 않고 사건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 버리니 나는 그것이 환상인지 꿈인지 착각인지 주의 일을 어떻게 하는지 혼자 궁시렁 한다. 이게 우상성이다.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시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딱 되고 나니 기드온이 자기 무가치로 설명을 못한다.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성은 이스라엘 전부에게 퍼졌다고 봐야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사사 기드온이다. 기드온마저 하나님을 측정하고 시험하여 자신이 다루어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음을 도와 달라고 하니 이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를 낸다. 솜이니 과학적으로 따지니 물을 흡수하니, 양털을 바짝 마르고 땅은 젖도록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땅만 젖게 하셨다. 이 말은 이미 우상에서 너희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차이남, 사건, 하나님께서 변화를 주시되, 그 결과에 대한 공로자를 인간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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