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2022겨울수련회 1강 갈렙과 레위지파

아빠와 함께 2022. 1. 14. 08:36

1강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회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안에서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성도임을, 그 과정을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수아를 보면
땅 분배 이전에 땅 뺏기가 먼저다. 여기에 창조능력이 개입 되어야 땅 분배가 된다. 창조능력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는 능력이다. 현재 있는 것을 없애고 없음에서 있게 한다.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창조능력이 들어간다. 그냥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결합해서 있게 한다. 전에는 내가 있다가 되는데, 이제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음에 대한 주인공인 주님이 계시다가 된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계신 땅이다. 주의 땅이다. 주의 땅이 될 때 천국이 된다.

여호수아에서는 땅에는 인간들이 있다. 인간들이 있으면 천국이 될 수 없다. 인간들을 없앤다. 이 없애는 이동경로를 따라 주의 땅, 천국이 된다.

땅의 인간들을 없게 만들고 없는 곳에 하나님이 동행하면 하나님이 계신 땅이 되어 천국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창조의 능력으로.

이것을 표현할 때 1. 알기 쉬운 표시는 언약궤 이동경로다.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는 장소. 언약궤의 이동에 따라서 그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땅이 된다. 민 14:39-45, 신 1:41-46 너희들이 살기 전에 언약궤가 먼저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약궤에서만 만난다. 언약궤 있는 곳이 성막이다. 성막 있는 곳이 성전이 된다. 성전이 불탄다는 것은 나는 너와 같이 있기 싫다는 것이다.

성전이 있다가 없어진다는 말은 이 땅에서 주께서 잠시 있다가 다른 땅 갈 거야라는 표시이다.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 나중에는 상자로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몸,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언약궤가 오신다. 잠시 삼십삼 년 사시다가 너와 안 논다 하시고 가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 다시 오신다. 성령이 오셔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신약적으로 설명하면 급작스럽다. 구약 때는 땅을 갖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친절하시다. 이차대전 독일군들이 작전 모형 판을 갖고 탱크를 이동하고 잠수함을 이동한다. 그 모형판이 구약이다. 구약은 모형이다. 모형 판에서 언약궤를 들이민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들이민다. 하나님의 이름이 상자와 관련되어 있다. 상자란 물체다. 인간이 다루는 물체다. 인간이 함부로 다루다간 웃사 처럼 죽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창조주이신데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언약궤 상자를 함부로 대한다. 언약궤를 갖고 움직인다. 대적은 칼과 활과 말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다. 저들과 붙어 싸워라 하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신약에는 십자가로 이기라는 말이 없다. 십자가로 이긴 것을 확인하라. 십자가가 무기가 아니다.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무기를 갖는 시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십자가란 다 이긴 후 무엇으로 이겼지?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식이 아니다. 진짠 복음을 아는 사람이 귀신들려 목이 팩팩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살다 죽어라 하는 것이 승리다. 얼마나 편한가? 퇴마사, 신부가 성경책 등을 갖고 퇴마하려고 한다.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한다. 귀신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기죽지 않는다.

언어학을 백날 해도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헬라어, 히브리어 백날해도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기호학에 포함되어 있고 몸짓과 손짓으로. 몸짓 손짓으로 표현한 기호 그 이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기호이다.

문자는 나타나는 표상이고 그 뒤에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기호학에서 말한다. 언어학에서는 이것이 없다. 기호학에서는 이중분절을 말한다. 표현하는 것과 내용이 완전히 다른 분야다. 딴 세상이다. 이렇게 기호학에서는 이야기한다.

원어 이런 것에 속아 넘어 가지 마세요.

언약궤는 기호다. 사물이다. 내용은 나타나는 표상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 하면 인간 상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약궤를 주셨다. 표상을 주셨다.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의 숨어있는 의미를 모르기에 언약궤를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기호로 여기고 거기에 빠진다. 인간들의 기호는 인간이 고대하는 바를 얻기 위해 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주님은 있는 것을 없게 하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 언약궤를 주어도 언약궤를 모른다. 십자가를 주어도 모른다.

십자가로 네가 제거 되어야 한다. 그냥 죽어도 괜찮다. 십자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죽는 욕망 외에 다른 것이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이제는 여기서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십자가 주신 기쁨이다.

민 14:39-44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에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않았더라
신 1:41-46
정탐을 한 후 못 올라가겠다고 하여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데 땅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서 크게 패배했다. 통곡한다. 통곡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주인공 언약궤가 올라가지 않겠다는데.

땅 있으니 ‘땅 주겠지’라는 라는 것은 화천대유한테 이야기 하라. 살 땅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주할 만한 땅이어야 한다. 그래서 언약궤 취지를 잘 들어내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
알기 어려운 방법은 갈렙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이다.
갈렙은 민수기 26:65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고아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모두 제거되어야 된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지분을 갖게 된다. 민 26:62
레위인의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모든 남자가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

레위지파가 빠져 나오면서 열두지파가 된다.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그런데 레위 지파 숫자는 난지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 여기에는 홍해를 건너온 사람은 한 사람도 해당되지 않는다. 일 개월 이상 된 사람은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갈렙과 여호수아밖에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약속을 대변하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땅은 집단적 단위를 표시한다.

갈렙은 개인이고, 여호수아는 집단이다. 갈렙 개인이 어떻게 기업을 차지하는 기적을 보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갈렙을 따라 우르르 갈렙처럼 땅을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 레위지파는 왜 땅을 분배받지 못하는가? 왜 갈렙과 레위지파와 같이 취급하는가? 땅이 없는 레위지파와 갈렙이 동일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땅을 차지하면, 땅에는 창조능력이 있다.

뷔페가 있다. 사자, 상어, 기린이 먹으려고 한다. 상 위에 먹을 것이 있다. 상어에게 먼저 먹어보라고 한다. 상어가 지나가면 물고기만 비게 된다. 빠진 것을 통해 이것은 상어가 먹었다라고 판정된다. 선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물리학에서 수소가 빠지면 광자가 나오고 그 빈자리가, 빠진 부분에 누가 들어가는가? 레위지파가 들어간다. 레위 지파가 48곳에 들어간다. 빠진 부분에 넣는다. 너희들은 빠진 부분을 기억 못하면 이 땅에 살 자격이 없다.

레위지파가 땅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자기 고유의 땅은 없다. 그러나 각 지파 속에 띠처럼 집어넣는다. 열두 지파 우린 땅이 없어야 마땅한데 레위지파의 은혜로 땅을 얻게 되었음을 안다.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다. 기업이 없는데 기업을 주신다. 없음에서 있음이 된다. 이 땅은 너희들이 차지할 자격이 없음을 레위지파가 땅을 가짐으로 표현해 준다.

레위지파와 동급이 되는 갈렙은 어떤가? 갈렙은 정탐할 때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있다고 한다. 언약궤가 자기자리 찾겠다는데, 우리가 되고 안 되고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능히 거뜬히 들어간다고 믿은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뿐이다. 이 이야기의 근본적 문제는 현재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 없다. 다 사라진다.

오히려 우리가 왜 천국에 가지. 이상하게 생각해야 된다. 우리 모습이 천국에 갈 사람인가?

이 띠, 레위지파, 십일조를 주어야 하는데 주지 않는다. 레위 지파가 띠 속에 살지 못하고 돌아다닌다. 킬로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를 찾는. 배고프니 빠진다. 불연속성이 되어야 하는데 연속성이 된다. 통합된 이스라엘로 생각한다. 통합된 이스라엘은 가짜다. 통합된 교회는 가짜다. 이빨이 숭숭 빠져야 된다. 십자가 마을도 이빨 다 빠져야 한다.

주님 나라 좋아요 하다가 십자가 마을 좋아요, 우리교회 좋아요가 되면 이스라엘 범죄와 동일하다. 있을 수 없다.

땅 뺏기는 천지창조의 능력이 제공되어야지 힘으로 뺏는 것이 아니다. 값나는 땅을 얻는 교회처럼 하는 것은 화천대유다. 예배당 터 넓히는 것은 부동산 계산하는 것이다. 교육관 짓고 주차장 넓혀 구원되는 교회가 없다. 사람이 공을 들이면 정신이 거기에 다 빼앗긴다.

선 스펙트럼, 빠진 부분에 레위지파가 들어간다. 나중에 레위지파가 빠지면 선지자를 보내고, 이방 룻을 보내어 그 자리를 매꾼다. 그 때는 땅이 토한다. 땅이 토한다는 것은 진정 이스라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생소한 것이 나올 때, 토할 때, 이방 여인이 토해진다. 이방 여인 룻이다. 룻이 다윗의 증조모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왕은 이 땅을 차지한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없음에서 왕이 나온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 우리의 왕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왕은 본디오 빌라도다. 나는 너를 풀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권세가 있다고 한다. 주님은 이 있음에 주목한다. 빌라도가 죽일 권세가 있다고 할 때 주님은 있음을 공격한다. 내 아버지가 허락지 않으면 너는 권세가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너의 소유, 있음으로 살지만, 나는 없음으로 산다. 없음이 있음을 이긴다.

갈렙을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갈렙은 40세이다. 여호수아 때는 85세(수 14:10)다. 아낙 자손의 땅을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약속이다. 갈렙의 땅의 중요성은 여호수아 끝나고 사사기에 갈렙이 이스라엘을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갈렙의 가족이 첫 번째 사사가 된다. 사사기 1:20 헤브론을 갈렙에게,

삿 3:9절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1:13 갈렙의 딸 악사의 남편이 된다. 옷니엘이 갈렙의 정통성을 잇는다.

일이 터지면 사사에게 부탁한다. 사사가 없으면 지분을 지킬 수 없다. 사사의 등장방식은 지분이 없는 레위지파가 실제로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언약적 내용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중에 레위지파도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공간의 이동.
언약궤가 공간을 이동한다. 공간을 갈렙을 통해 이동한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자리에 있기에 전체를 책임진다. 여호수아가 승리하면 여호수아로부터 지분을 부여받게 된다.

언약궤와 갈렙이 도드라진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갈렙은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행할 때 비로소 공간이 주어진다. 땅이 주어진다.

그러면 시간은 어떻게 흘러갑니까? 언제 이 땅은 모두 이스라엘 차지가 되는가?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언제 생기는가? 속도가 공간 쪽으로 치우칠 때 비로소 시간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차원이 다르시다. 예를 들면 여기에 면적이 있다면 여기에 손가락으로 짚으면 일차원에 사는 사람은 선만 보인다. 한 사람의 손이라는 것은 더 높은 차원에 가야 알 수 있다. 차원이 낮은 곳에서 가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차원에 있으면 시간이 걸릴 것이 없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동행하시니 하나님께서 시간의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안에 시작과 끝을 다 갖고 계신데 인간에게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경험하신다. 이미 죽었고 하늘에서는 살아있다고 할 때 시간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으나 그리스도 안의 차원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없다. 시간은 땅이라는 공간 때문에 느끼고 겪게 된다. 몇 년 살았고, 오래 살았다는 것과 영생은 아무 상관이 없다.

태어나자말자 죽어도 그리스도 몸으로 들어가면 영생이다. 천사가 무슨 나이가 있는가? 천사에게 나이를 묻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 시간이 있는 이 세상은 임시적 연극무대로 보면 된다. 연극이 끝난 후에는 꿈같다.

주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주기위해서 이 땅에 살게 하셨다. 인간에서 성도로. 성도는 시간이 없다. 성령 안이라고 한다. 십자가 안, 예수 안이라고 한다. 성령 안이 되면 어디서 봐도 십자가다. 인간일 경우에는 십자가가 지나갔고 부활이라고 한다.

전부다 십자가인데, 어디에도 십자가인데 그렇게 보지 못한다. 무슨 십자가를 건너뛰는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봤다. 흥밋거리고 봤다. ‘어떤 인간인지 보자.’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본다. 성도는 내 자신이 예수님께 구경거리가 된다. ‘오늘도 얼마다 개판으로 살았는지 한번 보자.’ ‘오늘도 시간이라는 스케줄에 쫓기는지 보자.’ 스케줄이 뭐가 필요한가?

십자가로 하니 장고에 나오는 공동묘지 같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스데반 집사가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스데반 집사에겐 돌이 돌로 보이지 않고 귤로 보인다. ‘귤 맞고 죽어라.’ 이미 죽은 인간이 이미 산 인간에게 죽어라고 돌을 던진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고자질 한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용서해 주세요. 저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인해 어떤 차원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 공간도 의미 없다. 분배도 의미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아니라 인간이 성도되는 것이다. 땅 분배는 어떤 인물로 변환되어서 들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천국이라는 공간에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으로 달라져서 들어가야 한다. 언약궤의 취지를 아는 자. 레위 지파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는 자. 죽음을 다루는 지파가 땅 갖지 못하고 맨날 제사 드리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 취지를 이해하는 자, 그것이 엔진이다. 날마다 생명이 나오는 엔진부위가 레위지파다. 레위지파의 취지를 아는 자가 성도다. 그것을 아는 경우에만 그 땅을 유지할 수 있다.

여호수아 주변을 조심스럽게 보는 이유가 있다.
신 8:19절“ 또 두렵건데 내가 마음에 이르기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 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 이니라

사람들은 땅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언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약을 이용해 땅을 얻은 후 언약을 버릴 것이다. 광야를 통해 땅의 중요성을 알았다. 생존이 중요한 것을 알았다. 광야를 통해 언약이 나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이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시는 언약 성취가 나의 꿈의 성취보다 우선됨을 알아야 한다. 광야에서 .
.
고생했는데 쫓겨났다. 그냥 고생만 했다.

세상 철학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한다. 고생해도 낙이 안 오면 누가 책임지나. 죽도록 고생한다. 카자흐스타에 가서 선교한다고 죽도록 고생한다. 학교 세우고 병원세우고, 고아원 세운다. 죽도록 고생했는데, 그들은 백날 해봤자 고생한 나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들은 죽도록 고생할수록 고생한 내가 더 소중해진다. 고생한 것이 아까워 자기를 버릴 수 없다.

여호수아가 집단의 단위다. 감사한 것은 여호수아가 고생을 해도 혼자 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고생하게 한다. 어느 누가 더 고생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한다. 요단강 건널 때 언약궤를 제사장이 앞장서 건넌다. 언약궤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당한다.

왕자표 크래파스. 모두 한통에 다 들어간다. 밑바닥엔 제사장, 레위지파가 받치고 있다. 레위 지파를 통해서 언약이 발생되면 그 조건 하에서 너희들은 살아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유지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내가 생존할 조건과 대비된다.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먹고 사는가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조건은 날아갔다.

여호수아가 인도한다. 여호수아는 모세 언약에 중첩되어있다. 여호수아는 하나의 기호다. 진짜 실내용은 모세언약이다. 모세 언약이 주인공이다.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 모세를 죽이게 한 언약은 모세를 죽임으로 모세 언약이 인간에게 구애받지 않음을 모세를 통해 드러냈다. 모세보다 언약이 중요함을 크레파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신명기 9:5절
내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크리파스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목이 곧은 백성을 왜 집어넣는가?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는 레위지파가 없다. 이스라엘에는 레위지파, 언약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려 함이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쫓아낼 수 있는 악함과 죄성이 뿜어져 나온다.

우리는 자꾸 의로워지려고 한다. 내 생계보장을 받을 권한이 생긴다고 한다. 이만큼 복음 알고 착한데 나 죽일 겁니까? 죽일거다. 복음 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복음이 내 천당 보내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드러나기 위해 ‘나 착한데 지옥 보낼 겁니까라.’는 것을 죄가 되도록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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