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1223a 창세기 9장 13절(말씀의 완성)-이 근호 목사
p.214부터 할 차례입니다. p.213 밑에서 6번째 줄에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다고 되어 있죠, ‘본론 언약과 주체의 발생’ 바로 밑에.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씀이 없다면 인간은 죽는 이유도 몰랐는데 말씀이 딱 들어오니까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럼 개인적으로 봐서는 죽는다니까 상당히 허무하게 느껴지지만 이거 하나 생각하면 그렇게 허무하지 않을 거예요. ‘죽음은 완성이다’ 알기 쉽게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은 성공이다’.
죽음이 성공인 이유는 죽음이 주님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기 성취이죠. 처음부터 흙인 것이 흙 됐다, 그러니 이게 성공이잖아요. 죽음, 종말 하니까 상당히 부정적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완성이나 성공은 아주 긍정적이죠.
그래서 죽음은 성공이기 때문에 ‘나의 삶은 아직 아님’이 되는 겁니다. 나의 삶은 미완료,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결핍된 것, 모자라는 것. 저도 마찬가지이고 안 죽고 이렇게 여러분이 살아서 만나잖아요. 그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이고, 이 모자라는 것.’ 이게 적합해요. 아이고, 모자라는 것들. 죽음은 완성인데 완성이 미달됐으니까 모자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죽음이 완성인 이유가 뭐냐?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지만 종말은 전체를 말하거든요. 종말은 끝을 이야기하는데 두 개를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종말이라 하면 자꾸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종말은 마지막 순간과 시작한 순간, 이 두 개가 다 합쳐져야 종말이 성공이라는 의미가 발생됩니다. 시작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
그렇게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나타납니다. 이 공식만 알면 오늘 강의는 의외로 쉽습니다. 처음에는 없거든요, 부재(不在). 부재에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결핍, 결핍에서 과제. 이게 공식이에요, 부재→ 결핍→ 과제.
우리는 처음에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그다음부터 살아가면서 아까 삶은 모자람이죠, 모자람. 아까 한 것 다시 이야기해줄까요? 아이고, 이 모자란 것. 더 심하게 해서, 이 머저리. 살아있는 모든 것은 머저리이고 모자람이에요. 부재, 그다음에 모자람이 결핍이죠. 거기서 결핍은 과제를 받게 되죠. 과제, 숙제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이 밤 근무해서 어떻게 살아가냐, 이게 아니고 이것은 주님이 주신 과제가 되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든, 어디서 살든. 과제라는 말이 세상적 용어라면 성경적 용어로 이것은 사명이죠, 사명. 존재의 이유, 우리가 있어야 될 이유는 주께서 주신 과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과제는 바로 결핍을 채워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결핍이 무엇 때문에 생기느냐? 살아있기 때문에 결핍이 생기잖아요, 미완료이니까. 그러니까 미완료는 방향성을 지녀야 되는데 그 방향, 죽음의 완성으로 가는 그 과제로 이끌어가면서 처음에 있던 부재, 이 부재라는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시작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종말의 완성을 다 갖추게 되는 거예요.
부재라는 것은 우리가 없었는데 뭐가 있었습니까? 누군가 시작한 순간은 있었죠. 일본말로 요이 땅, 하는 것은 있었어요. 요이 땅, 하면서 우리가 부재에서 없는 데서 있게 된 거예요. 있으면서 어디로 달려가는가? 완성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그 완성이 뭐냐 하면 죽음이니까 바로 마지막 순간. 이것을 전세계 규모적으로 이야기하면 종말이죠. 그래서 말씀 안에 종말이 들어있는 거예요, 말씀 안에 종말이.
자, 이렇게 설명 들으니까 사적인 고민과 걱정 같은 것은 쏙 빠지죠? 왜 사적인 고민이 있느냐 하면 현재 살아있는 것을 미완료로 보지 않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그 시작점을 부재, 없음으로 해야 되는데 계속 있다 보니까 내가 계속 있어야 이게 완성인 줄 알고...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게 완성인데 그게 아니고 내가 계속 있어야 이게 뭐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시작한 순간을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마라’ 했잖아요, 따먹지 마라. 그런데 악마는 시작한 순간을 창세기 2장으로 보지 않고 창세기 3장으로 보는 겁니다. ‘너,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었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따먹었으니까 우리는 부재가 아니고 악마는 우리를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주님은 “선악과 따먹으면 너 죽어. 선악과 따먹지 마란 말이야.”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데 악마는 “따먹었으니까 이제는 괜찮게 되어라.”라고 우리에게 윽박지르는 겁니다. 이 차이에서 알 수 없는 수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부끄럽습니까? 부끄러운 이유가 뭐죠? 부끄러운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부끄러워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그것 때문에 부끄러운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타인의 시선을 안 보기 위해서 자기는 숨어버리죠. 낙원의 수풀 속에 숨죠.
숨는데 내가 생각하지 않은 타인으로 등장한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히 따라오는 타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우리는 여기서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안다 치고 이제부터 제가 이 수치의 원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치의 원인에 대해서 왜 말씀드리느냐 하면 이게 바로 종말의 현상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부끄럽다는 것은 종말의 현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올 때 우리는 수치를 느낀다. 따라서 이것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수치스럽다는 그것을 통해서 느낌이 여기서 발산되는 거예요. 양심상 뭘 동원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다.
이것에 대해 제가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을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으로 이걸 하고 싶은데요. ‘소외’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소외란 본래 나인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된 것’ 이걸 소외라고 합니다. 본래 내 것이라고 철석같이 알았는데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 될 때 이걸 소외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볼게요. 소외, 이것이 비극입니까? 이것이 불쾌합니까? 마르크스라는 공산당이 이 이야기를 해서 굉장히 유명한 말이 되었어요, 소외.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성과에서 배제 당했다. 그것을 소외라 하는 거예요.
일은 자기가 해놓고 남들이 자기 노동한 대가를 가져갔으니까 강탈해갔으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자본가가 자본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생산을 하는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끼어드는 노동자들은 그 생산에서 나오는 돈의 가치에서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못 가져가고 내 건데 타인에게 빼앗겨버린 거예요. 그 빼앗긴 것이 축적된 자를 자본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본가가 자본을 가지고 생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분의 자본이 발생된다는 희망으로 그들은 경제활동에 뛰어든다. 그래서 그렇게 축적된 자본으로 인하여 자본가들은 더욱더 자본가로서 많은 양의 자본을 증강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잡고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반대로 점점 더 노동자들의 생활은 핍절해진다. 점점 더 가진 것이 없어진다. 이게 유럽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뒤집어놓은 마르크스의 주장이고 그다음에 레닌, 엥겔스, 스탈린 이런 사람들이 이 논리를 이야기해서 지금의 김일성까지 온 이론입니다, 이 이론이.
그런데 이 사람들이 소외라 할 때 무엇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의 노동력에서 만들어지는 생산을 시장에 내다팔면 뭐가 생기죠? 돈. 이 돈에서 노동자가 소외된다, 달랑 이것만 나가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이런 주장을 하면서 인간의 인간됨은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되고 의식주가 보장되려면 돈이 기본이니까 인간의 의식주가 보장되는 돈에서 소외되면 이것이 인간세계의 소외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주장을 했던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여기에 매료되기 시작한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점잖은 인격을 가져도 자기 것 빼앗기면 가만있지 않잖아요. 내 것 누가 가져갔어? 고생은 직사게 내가 했는데 고생도 안한 너희들이 왜 가져가? 봉기하자. 궐기해서 일어나자. 계급투쟁을 해야 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이론 가지고는 안 되고 계급투쟁을 해서 뒤엎어버려야 된다, 그런 식으로 동조를 했죠. 물론 그렇게 했던 마르크스는 영국사회에서 완전히 찍혀버렸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본래 내 것, 나인 것’이라 하는데 성경적 언약으로 보면 본래 자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래 ‘나’가 없어요. 나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부재, 아무것도 없음에서부터 몸이 나왔기 때문에 나라는 것도 나가 없음부터 합류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몸이 없다는 뜻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어떠한 환경도 처음에 인간은 부여받은 적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하와가 ‘너’라고 지칭할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 있던 모든 것은 시작한 순간 이 안에 완성이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럼 끝났어요. 첫째 날 만들고 둘째 날을 만들고 셋째 날을 만들고, 어떻습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여섯 번째 날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요! 하고 손들고 나설 수가 없어요. 만드신 분이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면 좋은 거지, 거기에 대해서 아니요, 하고 나설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오,라고 나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창조세계 따로 있고 나를 위한 창조세계를 내가 계획할 때나 아니오,가 성립돼요.
아까 한 것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죽음은 완성이라 했죠. 완성, 완료 또는 성공. 그러면 죽음이 완성이 되려면 인간은 하나의 퍼즐조각에 지나지 않아요. 죽음은 완성이기 때문에. 이 죽음이 완성이라는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십자가 아세요? 십자가가 하나님의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죽음. 이게 죽음이라고요. 죽음인데 죽으면서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하고 나 사이에 모든 계약은 이제 죽음으로써 완료가 된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비극입니까? 굉장히 불쾌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원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르크스가 생각도 못한 소외가 있어요, 언어적 소외. 언어적 소외라는 겁니다. 물질적 소외 이전에 언어. 인간의 한계는 자기가 말한 그 세계가 인간의 자기 세계의 한계에요. 인간이 말한다는 것.
그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아담과 하와가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럼 그 말씀이 말씀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악과 따먹은 우리 인간들은 필히 죽어야 되죠. 이게 슬픈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입니까? 내가 없는 상태에서는 따로이 나의 성공을 노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부재, 내가 없는 상태에서 몸은 있지만 이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잖아요. 몸은 있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죠. “아담아” 부를 때는 아담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의 주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책에 ‘오OO’ 있으면 이름이 있는 한 그 책 주인은 오OO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아담을 불러준다는 것은 아담 이름 안에 하나님의 자기 이름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 곁을 떠나면 안돼요. 떠나면 자기만 손해죠. 자기 손해라는 말도 안 되지만 하여튼 떠나버리면 주께서 떠날 것을 미리 아시고 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네가 떠나봤자 죽음이 너를 낚아챌 거야, 라고 주께서 이미 큰 그물로 인간을 덮어놓은 거예요.
죽음이 없이는 창조가 완성되지 않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생각해놓은 겁니다.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창조세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생각이에요. 우리하고 사전에 상의하거나 의논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으니까 여러분이 죽는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비극적으로 생각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아니되요.
인간은 언어적 소외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고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그 안에 스스로 갇혀있는 꼴이에요. 갇혀있습니다. 언어적 소외를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이방민족, 이방인들이 이 소외를 보여주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출발이 뭡니까? 이스라엘은 부재하죠. 이스라엘 나라가 없었어요. 없고 이스라엘보다 먼저 계신 분이 언어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언어, 말씀이라는 언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언약이 계속 성공적으로 나가니까 그 성공적인 증상 중 하나로 툭, 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생겨버린 거예요.
그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언어,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한 거예요. 말씀이 말씀대로 되게 되면 이스라엘은 늘 완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말씀을 위반하게 되면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언약이 빠져버리면 말씀이 빠져버리면 그 안에 주의 말씀이 없어버리면 소외된 자기 언어의 세계가 여기에 채워지겠죠. 이것은 이방민족 나라하고 차이가 없잖아요.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요. 말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들춰 보이느냐 그 기능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 기능에 대해서 제가 아까 공식했죠. 부재에서 어디로 갑니까? 결핍, 그다음에 과제.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떠맡은 기능이고 역할이에요. 부재→ 결핍→ 과제.
이게 오늘날 성도가 떠맡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 역할을 떠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완성.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 자체는 완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그건 인간나라가 아니고요, 하나님 나라에요.
미리 말씀드릴까요? 소속이 밝혀지는 때가 종말이에요. 소속이 다 드러날 때가 종말입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건 빨간 걸로. ‘종말이란 소속이 다 드러나는 시점’ 이게 종말이에요. 너 어느 소속이야? 소속이 최종 밝혀지는 그때가 종말의 때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소속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선지자이니까 예수님 소속이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 소속된 자와 지옥에 소속된 자가 소속됨을 결정짓는 기준과 표준이 드디어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이 다른 데 속했다는 것을 확연하게 다 확정 짓는 그 작업을 하신 거예요. 주님은 종말을 내다보면서 말씀 따라 오셨기 때문에 구분 짓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종말을 구분 짓죠.
그런데 여러분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답변해보세요, 둘 중에 어느 것인지. 인간이 하는 일은 1번, 해결책을 원한다. 2번, 선택지를 가진다. 1번과 2번 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1번이겠어요, 2번이겠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할 때 그걸 해결 났다고 봅니까, 새로운 선택지가 발견됐다고 보는 겁니까? 새로운 선택지에요.
나는 저 여자 만나고 다른 여자랑 사귀어서 결혼할거야, 하다가 그 여자 떠나고 나면 한때 나의 선택지였어, 하잖아요. 선택한 사람 중에 하나야, 이렇게 된다고요. 아들이 둘이다. 딸을 보고 싶다. 드디어 딸 낳았다. 일단 자기는 딸을 원해서 딸 낳는 해결점을 원했죠. 그런데 딸 놓고 난 뒤에는 그걸로 성이 안차. 새로운 하나의 선택이었지. 여기서 또 아들 둘인데 딸 하나면 좀 뭐하니까 딸 하나 더 낳아? 그때 가면 또 마음이 흔들리면서, 안 흔들린 적이 사실은 없었어요, 새삼스럽게 흔들리면서 내가 옛날에 결심했던 것은 하나의 선택이었어. 새로운 선택지를 가졌다는 말은 여기서 뭔가 또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있음에서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자기한테 과제를 주는 거예요. 있음→ 결핍→ 과제. 아까 공식과 뭐가 다릅니까? 처음에 부재, 없음인데 악마가 인간에게 없음을 잘라내 버렸거든요. 이제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야지, 뭐.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출발점이 있음이에요, 출발점이.
그러니까 항상 이것(있음→결핍→과제)은 미완성이에요. 끝까지 미완성입니다. 만족함이 없어요. 만족함이 없을 때 인간은 타인이 오면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혹시 저 사람이 내가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약점을 캐낼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불안감 같은 것. 거기다가 완전하다고 여겼던 것이 미흡함으로 드러났을 때 수치감을 느끼는 거예요.
코미디에 그런 게 있어요. <코빅>이라는 코미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안영미라는 개그우먼이 남편 없을 때 자꾸 바람을 피워서 자기 집에다가 남자를 데려오는 거예요. 남자를 데려왔는데 남편이 출장 갔다 해놓고는 갑자기 사정이 바뀌어가지고 집에 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옷장에다가 자기랑 바람 피우는 남자를 딱 집어넣었거든요. 그러니까 들어온 남편이 수상한 눈치로 두리번거리다가 옷장을 확 열고 ‘거봐,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잖아. 옷을 나란히 정렬하라는데 나란히 정렬 안 했잖아.’ 그 밑에 보니까 남자가 속옷 바람으로 웅크리고 있는데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거봐. 내가 옷 정리 제대로 못한다 했지?’ 밑에 있는 남자는 눈에 뵈지도 않아. 이게 코미디입니다. 왜? 자기 언어세계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봐. 아들 둘인데 내가 딸 낳았잖아, 거봐. 그러니까 이것은 감사할 일이지.’ 여기서 뭐가 잘못된 거예요? 뭐가 완성이라 했습니까? 내가 죽는 게 완성이에요. 내가 죽는 게 완성인데 그걸 모르고 살아서 결핍을 메꾸면 자기가 완성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제 슬슬 교회 문제 등장하겠죠. 그래서 이 있는 인간들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 나와서 설교를 듣는다던지 이렇게 하죠. 이렇게 해서 자기 있음에 대한 완성, 없어지는 게 완성이 아니고 나는 있는데 있는 그 채로 완성이 되기를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언어를 통한 소외를 메꾸기 위해서 성경말씀대로 지키고 실천하고 온갖 걸 다하는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as if’ 마치 그런 것처럼. 이걸 준(準)-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 딱 맞게 자기가 자기를 구원받은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성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적 소외 속에 있는 내가 성도로서 모자람이 없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처럼 또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앙인들이 하는 것처럼 성경대로 다 따라하는 거예요. 스데반이 순교했다고 하면 지도 순교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마지막 주님 만날 때 흰 옷 입는다고 흰 옷 따로 만들어놓고 하여튼 그럴 때 성경 그대로 사도 바울이면 사도 바울 그대로 했을 때 그걸 ‘as if, 마치 ~인 것처럼’ 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실에 도달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죠. 안 됩니다. 주님 자신만이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대체할 인물은 주께서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얼추 주님 따라오는 제2의 제3의 주님이 필요치 않아요, 주님한테는. 예수님만이 모든 말씀을 이루라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사전에 끝난 이야기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게 성도에요.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을, 얼굴 찌푸리고 비극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죽는 것조차도 주님의 완성의 퍼즐로 참여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밤에 잔업 하다가 쓰러져 죽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기는 거예요. 그것도 사흘 동안 계속 하다가 쓰러져 코피 흘리고 죽어버리는 것도 웬 은혜냐 하면서 그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면 내가 순교한다는 것은 순교가 아니에요. 마치 순교인 것처럼, 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걸 발로 차버리죠. 어디서 이 가짜가... 치워버려요.
그래서 주의 뜻은 결국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종교 선배들처럼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이 거룩하라 하는대로 거룩하고 뭐 성도 되고 하는 모든 노력을 책망하는 일로 성령이 오는 거예요. 책망할 때 뭐라고 하겠어요? “똑바로 안 해? 더 열심히 안 해?” 이렇게 책망하는 게 아니고 “이거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다 했는데 왜 그래? 너 왜 그래? 다 끝났어!”
그게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너 지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이런 식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의, 네가 생각하는 심판, 네가 생각하는 죄, 그거 다 구라야, 구라! 김구라야, 그거 전부다 거짓말이야. 네가 스스로 스타 되려고 하는 거야. 네가 승리하려고 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죽는다 하는 것을 순교로 봐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의 죽음은 탈(脫)-소유에요. 나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 탈-소유. 내 소유권에서 벗어나버리는 거예요.
그럼 벗어나려면 내가 죽었다 치고 나를 다시 만들면 이 다시 만들어진 나의 또 다른 영역은 내 소유가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나는 죽었다고 바라보는 또 다른 자를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서 우리가 탈-소유를 바라보게 하도록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전부를 옮겨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의 반복, 그걸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아, 내가 쓰레기구나. 내가 쓰레기구나. 아까 제가 뭐 안 좋은 소리했는데...... 이 머저리야. 이 바보야. 왜 바보짓을 해? 왜 자꾸 마귀한테 속아서 바보짓을 하냐 이 말이죠. 다 끝난 일인데.
그래서 성령께서 을 하셔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끝난 상태에서 우리 몸에 남아있는 본성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본성이 얼마나 헛짓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우리 육신이 발휘하고 있는 아까 언어적 소외, 물질적 소외, 그리고 또 하나의 소외를 말씀드리겠어요, 내 몸의 소외. 아, 오늘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 먹고 마시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돈으로부터의 소외. 이것은 정치적 소외죠, 경제적 소외. 두 번째는 언어적 소외. 세 번째는 제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나의 몸으로부터 소외. 소외가 너무 어렵거든 그냥 배제라 하세요, 배제.
몸에 통증이 오거나 암, 아픈 것, 이게 바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내 몸뚱아리에요. 내 몸이 나로부터의 소외에요. 왜 내 몸은 늘 아름답고 건강하지 않은가. 왜 튼튼하지 않은가. 나는 마치 버림받은 몸 같아, 그런 느낌 있잖아요. 이걸 어려운 말로, 참 어려운 말인데 ‘탈구형 몸’이라 해요.
뭔가 뼈가 하나 툭 튀어나온 것처럼 내 몸이 원래 내가 상상한 멋있는 몸에서 삐져나온 거예요. 제자리에 정렬되지 않고 정립되지 않고 삐져나왔어요. 삐져나오면 누가 누구를 미워하겠어요? 내가 나의 현 몸에 대해서 미워할 거야! 하고 미워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왜 백내장인가. 왜 나는 항상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몸이 안 따라주고 그러냐 이 말이죠.
그래서 탈구형 몸, 내 몸에서 소외된 몸의 특징은 항상 피로감을 느껴요. 항상 피로해요. 직장 다니다가 육십 좀 넘어가지고 이제는 퇴직하고 말씀만 따라다니고 말씀 모임만 참석하겠다 하는데 그때부터는 이제 몸이 안 따라주네, 피로감을 느껴가지고. 말씀 듣겠다고 왔는데 오느라 모든 정력 다 낭비해가지고 말씀 들을 때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내가 너무 싫어. 너무 싫어요.
도대체 있음 자체가 말썽쟁이에요. 내 몸이 여기 있다고 느껴지는 게 말썽꾸러기에요, 말썽꾸러기.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거울이 있다는 것은 거울에 몸이 있는 게 아니고요. 몸은 하나밖에 없는데 거울에 반사된 거잖아요. 그냥 반사된 거예요. 반사된 것이니까 결국은 싫든 좋든 인간은 몸뚱아리 하나 갖고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되는 거예요. 몸 따로 자아 따로 있는데 자아가 몸을 리어카에 실어서 끌고 가듯이 계속 끌고 가야 되는 거예요, 평생동안 우리 육신의 몸은.
물론 복음이 왔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즐겁죠. 내가 저런 고생을 해도 마땅해. 난 나밖에 모르니까 저런 고생 해야지. 남 보듯이 볼 수 있는 그 여유로움, 그 넉넉함, 그것이 이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그런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구원 받고 난 뒤에 몸이 튼튼하고 30대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 몸을 주시는가. 이게 종말의 현상이거든요. 종말의 현상이 아니고 우리 몸이 예수 믿고 튼튼해져버리면 주님의 완성은 신경도 안 쓰고 그런 데에 관심도 없고 나 하나 잘 챙겼으면 됐지 뭐. 자기에게 찬미하게 돼요.
그러면 소속이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소속이. 주님의 완성에 소속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따로 옛날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악마한테 사주 받은 그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 따로 나만이 따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에서 내게 소속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자기 백성이 그렇게 되는 것을 가만히 방치하지 않죠. 소속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소속을. 너는 너한테 소속이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소속이 나한테 안 되어버리면 소외라는 것이 아예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소외란 원래 내 것이었는데 남이 가져가니까 내 돈을 남이 가져가고 나의 몸이 피곤하니까 내 원대로 뜻대로 안 되니까 짜증나고 소외감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원래부터 내 것이 없다면 소외감을 못 느낄뿐더러 감사해야죠.
주님이 자기완성을 축하파티 하겠다고 쓰레기 같은 우리를 가지고 거봐, 쓰레기잖아. 사물이잖아. 물체잖아. 물체에서 감사 나오잖아, 봐라. 주님 아니면 누가 그런 솜씨를 하겠어요? 마귀가 하겠어요? 본인이 쓰레기인 걸 알면 알수록 더욱더 감사가 나오니까 마귀는 많이 약이 오르죠, 많이. 약이 많이 오르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문장으로 옮겨보겠습니다.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는, 빠져나온 것을 증거하는 방법은? 상당히 궁금하잖아요. 이것은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는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것’ 이겁니다. 나의 죽음은 주의 일에 완성을 위한 하나의 조각이고 일부입니다.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하고는 좀 다르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해가지고 아이스크림 선전하는 그거 아니고,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흙이 흙 되는 것이 이게 나의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럼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나의 일 자체가 날아가 버리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입니다.
그런데 빠져나올 때 빠져나온 이 일이 우리는 나의 일이고 싶은 욕망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또 있어요. 빠져나온 이것이 나이고 싶어.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쓰레기 같은 몸을 에라이, 죽을 때까지 돌려버리는 거예요. 끊임없이 돌려버리는 거예요. 빠져나온 내 모습을 가지고 내가 기뻐한다면 이것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지, 주님 일의 완성차원에서 기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께서 일부러 만든 어떤 상황, situation속에 놓이게 됩니다. 갑자기 뭐 잘 가는데 산에 올라가다가 엎어져가지고 광대뼈가 푹 들어간다든지, 난데없이 다리에 힘이 빠져가지고, 이런 식으로. 그냥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뭐 여론조사에 자기가 지지하는 대통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확 폭락한다든지,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성질나게 만드는 일들을...... 성질이 안 나야 되는데, 내 몸은 나는 이렇게 주의 일이고 싶지만 그건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경제적 상황, 아까 경제적 상황을 뭐라고 했습니까? 경제적 소외죠, 소외 상황 이런 것들이, 그리고 내 일은 아니지만 내 자식, 자녀 일이라든지 내 남편, 아내의 일이 나를 힘들게 하죠, 가만 있어도.
그럼 아까 했던 잠시 잠깐의 감사와 고마움은 일순간에, 어디 갔지?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그냥 찰밥해서 먹으면 되는데. 찰밥해서 먹으면 되거든요. ‘주께서 은혜 주셔서 찰밥 먹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되는데 괜히 뭐 엉뚱한 손님이 들어와서 ‘이것도 찰밥인가?’ 이러면 갑자기 성질 확 나거든요.
그걸 오늘 배운대로 하면 타인의 등장은 우리에게 수치를 유발하는 거예요, 수치를. ‘아이고 뭐 집사님 찰밥 맛있긴 맛있는데 내가 아는 다른 집사님 거보다 맛없다.’ 곱게 먹으면 될 걸 그저 그걸 긁어가지고...... 긁는데 그걸 누가 긁게 했습니까? 누굽니까? 주님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면서 ‘내 일은 내 일이 아니다’ 버릇처럼 이래야 하는데 그러고 가만 있으면 되는데 ‘너 이리 와. 오늘 함 보자.’ 한바탕 또 싸우고 이렇게 되면 도대체가 지금 나는 나에게 소외 안 되려고 내가 생각한 표준적 나의 모습에서 육신이 안 벗어나려고 은연중에 잠복적인 그러한 원칙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방법은 그 작용조차도 의도적으로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께서 마침 옆집 어떤 아줌마가 오게 하셔가지고 우리끼리 먹으려는 찰밥을 시비 걸게 주께서 아주 발걸음도 사뿐사뿐 해서 딩동 눌러가지고 ‘빈 그릇 가져왔습니다’ 하다가 아다리가 맞아서 수치와 모욕감, 가만 있으면 안 되죠, 터트려야 되죠, 반발 이거 다 누가 하셨습니까? 주께서 하셨으니까 오로지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정답대로 주께만 감사할 뿐이죠. 감사하는데 돌아서면 그게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어서 이런 순환구조에서 벗어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이 말이죠. 본인의 소원이에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떠나지 않는 것도 너희를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는 그 일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것도 흔쾌히 감수하겠다는 것이죠.
10분 동안 쉬시면서 어떤 수치와 모욕감을 또 느껴야 될지, 주께서 벌이실지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광주강의20211223b 창세기 9장 13절(말씀의 완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p.214에 보면 위에서 11번째 문장을 한번 써보겠어요. “말씀이 옛 인간을 (그다음에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써보겠습니다)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또 중요한 말) 토해내면 된다.”
여기 인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간은 말씀이 스스로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제공된, 주님에게 필요한 환경의 일부죠. 주님의 작업장이 되는 겁니다. 왜 재료라고 하지 않느냐. 재료라고 해버리면 작업장 따로 있고 재료 따로 있고 그렇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 안이 그냥 재료가 아니라 재료라 여기는 공간 안에 주님이 아예 들어와 버리거든요.
그러면 말씀의 출발점이 새로운 인간은 못 만나요. 새로운 인간은 말씀이 생산해야 생기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이란 없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말씀 안에 있겠죠. 그래서 말씀이 한번 들어오고 멈추는 게 아니고 계속 들어오는 이유는 옛 인간이 계속 유지되어줘서 거기서 계속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토해내야 되니까요.
토해낼 때 이 인간이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속성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인간은. 숫자가 많이 나온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성도에게서 예수님의 속성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이제 궁금한 게 예수님의 속성이 뭐냐. 옛 인간의 속성은 뭐냐. 이 생각이 맞다면 옛 인간과 새 인간은 반대가 되겠죠, 제 주장이 맞다면. 어떤 점에서 반대인지 그것을 제가 분명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옛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봅니다. 피해자 코스프레. 피해자로 자처해요. 왜냐하면 이 환경이 수치스러우니까 수치스러운 것을 메꾸려 하니까 당연히 힘들잖아요. 고생되잖아요. 고생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꾸 피해자라고 자처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인간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탈구형 육신을 보여줍니다, 탈구형 육신. 예를 들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태어날 때 어디서 태어납니까? 구유에서 태어나죠. 아기 예수 태어날 때 구유에서 태어났는데 그 분이 왕으로 오셨잖아요.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이미 그 분이 왕이에요. 그래서 동방박사가 왕에게 드릴 예물을 드린 겁니다. 동방박사가 발견한 그 별은 왕의 별이에요. 왕의 별이 동방박사들을 왕에게 친히 데리고 간 겁니다.
그런데 왕이 왕궁에서 태어나야 되는데 어디서 태어납니까? 구유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되지만 ‘왕궁을 피했다’ 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죠. 헤롯은 이 왕을 배척했으니까. 요한복음 1장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보세요. 이게 탈구 아닙니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백성이라는 말은 왕이 있다는 말이고 왕의 특성은 지난 설교할 때 언급했듯이 폭력적이다. 모든 것을 심판하는 겁니다. 왕은 백성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게 왕 제도에요. 전체주의라 하죠. 그냥 일방적으로 백성은 왕이 키웁니다. 키우는 대신 백성은 그 소속이 전적으로 왕의 소속이 되어야 돼요.
그러니 오늘날 민주주의 분위기 속에 사는 사람한테는 왕이라는 의미가 확 다가오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각자 자기의 자아, 자기의 주체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킬 사람이 없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사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속이 되어버리면 왕의 그 말씀 또는 왕의 소속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자유와 연관되어서 이런 문장이 성립되죠. ‘나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대한 자유는 우리가 선고받은 거예요. 선고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유에 우리가 갇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목표를 달성해도 그것은 또 하나의 미흡한 선택지가 되죠. 다음에 또 선택해야 돼요, 나의 자유를.
그래서 부재에서 결핍을 느끼게 되어있고 결핍은 결국 우리의 과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옛 사람이고 주님이 새로운 인간을 토해놓는 새 사람의 출발 지점이 이 지점이에요. 항상 옛 인간이 되어야 돼요. 말씀이 우리의 옛 인간에서부터 출발되어야 되는 겁니다.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되겠죠. 율법이 오게 되면 옛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타이밍이 안 좋아서 그렇고 어떻고 저떻고... 얼마나 변명과 핑계거리가 많습니까?
내가 나쁜 짓 안 할라했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육십이 넘고 칠십이 되면 그런 현상이 자꾸 일어납니다. ‘자식이 떡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자가 어디 있느냐’라고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걸 옛 사람에 집어넣으면 나이 팔십 넘은 노인네한테 오랜만에 자식이 와서 국 끓여달라고 하니까 뱀탕을 끓인 거예요. 뱀을 집어넣고... 아이고, 내가 미쳤지. 이게 자기의 몸이 자기의 멀쩡한 이성을, 이성이 멀쩡하지도 않아요, 점점 파괴되어가지고... 몸이 자기 이성과 판단력을 농락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나이 많은 교사들 좀 나가라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나중에 선생님이라고 하지도 않아요, 할머니라 해요. 한두 번 잘할 때는 선생님이지, 못할 때는 할머니 되어버려요. 학부형들이 담임 바꿔달라고 교장 선생님한테 이야기할 정도로 본인도 정신이 없어요. 일요일에 막 출근하고. 월요일 안 됐는데 일요일에 출근해가지고 왜 나 혼자 왔지? 이러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것은 아까 했습니다. 내 몸이 나에게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기어이 또 무슨 고집이 있어가지고 그 망가진, 말 듣지도 않는 육신을 살린다고 주사 꽂고 백신 1차, 2차, 3차, 4차, 5차,... 앞으로 훈장처럼 7차 맞아버려요, 살아보려고.
여기서 한번 봅시다. ‘삼킨다’는 단어 나오죠. 피동적입니다. ‘토해낸다’ 피동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말씀이 시작했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끝내버렸어요. 왜냐하면 옛 인간의 어떤 요소도 새로운 인간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해내지 못하면서도 as if, 마치 된 것처럼 여기죠. 된 것처럼 여길 때 그 시작점이 뭐냐? 자기를 피해자로 여기고 피해자 망상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천하에 고난 받는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성경에 보게 되면 방금 이 원리 가지고 성경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한번 보세요. 이게 다 드러납니다. 특히 이 코스프레를 누가 잘 하느냐 하면 제자들이 잘해요. 자기들이 예수님 옆에서 뭐 큰일 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제자들이 그러한 변변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제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토해내는 방법이 뭐냐? 그 방법은 제가 아까 언급했어요. 예수님 스스로 자기의 몸을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죄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 일을 진행시킵니다. 그러다보니까 옛 사람이 자기를 피해자로 여기는 것과 주님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그들로부터 피해를 받는 진짜 피해자가 된,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가는 거예요, 나란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해석 안 될 수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연민하고 연민하면서 연민한 자기 자신을 보고 자기가 반해버리고.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구제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구제하고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이거 누가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했잖아요. 신이시여, 나를 어여삐 여겨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정의감까지 넘쳐가지고 또 뭐 간음한 여인 또 돌로 치겠다고 돌 들고 오고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스데반 집사가 들고 있던 무기는 뭐였습니까? 공중 속의 동굴.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지롱? 공중에 허공에 동굴이 있을 줄은 몰랐죠. 시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산성이시요’ 있잖아요. 자기 백성을 주께서는 빼내주시는 겁니다. 공중, 허공 속에 있는 동굴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거예요.
허공이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없는데 스데반 집사는 죽음으로써 여기 쑥 들어가는 겁니다. 쑥 들어가는 이 동굴 이름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이거 완전 미친 수준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죽였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들 사는 세계에서 추방시킨 거예요. 그래서 동굴 안에서 바깥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씩씩거리면서 짱돌 들고 있는 모습이 그 출입구에서 다 보이는 거예요. 문제는 그 짱돌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자식이나 가족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전율이 일어나죠.
불신자 남편, 불신자 아내가 언어적 소외에 의해서 말 폭력으로써 나를 죽이려고 할 때 그 때 자기를 예수 믿는다고 미워하고 복음 전한다고 싫어하는 그 자식이나 부모나 남편, 아내보고 이 성도가 어떤 느낌이 들까요? ‘고마워요.’ 이게 무기입니다. 나를 당신네들 세계에서 추방시켜줘서 고맙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는 조용히 빠졌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순교할 때는 이거 뭐 난리도 아니야. 광고에다가 기념관까지 만들어가지고 본받자. 이게 본받아버리면 as if가 돼요. 순교가 아닌데도 주님한테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저 사람 받아줘야 된다고. 안 받아주면 예수님도 돌로 칠 판이라. 이런 훌륭한 사람 안 받아주면 미워할 거야, 하고 막 달려드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p.214 밑에서 8번째 줄에, “호명이 일어나면” 그다음 표현에 무슨 장(場)이 있죠, “박탈의 장”. 인간은 늘 선택한다 했죠. 선택지를 찾죠. 모든 행동에 목적, 노림수가 있다고요. 새로운 선택, 새롭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선택을 노리고 있는데 ‘박탈의 장’ 그 윗줄에 보면 ‘비 본래적 선택행위’가 나와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을 피해가버립니다.
인간은, 옛 사람은 늘 선택해요. 옛 사람이 선택한 그 선택지를 하나님께서는 박탈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 뜻대로 마옵시고”를 모든 자기 백성에게 그걸 현실화시켜버리죠.
주님께서는 내가 선택한 것을 일체 들어주지 않습니다. 박탈당해야 돼요. 왜? as if, 마치 ~인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장할 때 그냥 위장하지 않죠. 성경말씀 보고 실천에 옮긴다고 위장하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하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이걸 딱 보고 실천에 옮길 것처럼 이제 나섭니다. ‘나를 부인하게 해주시되 나를 부인하게 된, 그 부인된 나를 부인하게 하옵소서.’ 라고 우리가 선택을 해요. 인간 쪽에서 선택을 한다고요. 이거 주께서 들어주겠습니까, 안 들어주겠습니까? 이거 안 들어줍니다. 들어주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 말한 것은 무효가 될까요, 무효가 안 될까요? 무효가 또 안 됩니다. 이걸 또 가져와요. 자기를 부인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가져옵니다. 기도하게 되면 여기서 교체현상이 일어나요. 제가 십자가를 이렇게(†) 그리잖아요. 교체현상을 제대로 표현하면 십자가를 이렇게(†) 그리지 말고 이렇게(⍖) 그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거꾸로 된 십자가.
인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한테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받을 때는 십자가를 거꾸로 쥐고(⍖), 지금 주님 멀미날 참이야, 자기를 부인하게 해주시고 자기 보기에는 아주 성경적인 걸 들고 왔으면 이 거꾸로 된 십자가(⍖)를 똑바로 된 십자가(†)로 바꿔요. 휘리릭 반대로 돌려버리죠. 돌려버립니다.
그럼 자기를 부인하게 해달라 할 때, 인간은 여기서 예측하고 예상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난 뒤에 내가 기대했던 그 내 모습은 아마 이럴 것이라고 예상했잖아요. 예상한 것을 십자가에서 함께 거꾸로 돌려버리면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예상할 자격도 없구나.’ 이게 바로 자기부인이에요. 참 쉽죠잉? 참 쉽죠.
인간은 말씀을 보고 자기가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반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후회가 동반되니까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타인의 등장에 무엇을 느낍니까? 수치를 느끼죠, 수치. 수치는 모욕감을 동반하면서 분노합니다. 그래서 그 수치를 메꾸기 위해서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뭔가 추가적으로 자기 행동에 변화를 주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반성이라 해요, 반성. 반성하는 것. 자기 자신을 다시 보는 거예요. 내 자리가 어긋났으면 다시 내 자리로 데려오는 것을 반성이라 합니다. 반성할 때 무엇이 내 자리이며 무엇이 내 자리가 아닌지를 미리 자기가 예측하고 예상하게 되어있어요. 예측, 예상하는데 이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본인이 예상하고 본인이 예측하는 거예요.
그걸 그대로 가져온다고요, 주님이. 주님께서는 받아요. 받을 때 이걸 거꾸로 받아가지고(⍖) 휘리릭 하고 이걸 뒤집어버립니다(†). 뒤집어버리면 새 사람 되죠. 삼켜서 토해내니까, 새 사람을. 삼켜서 토해내니까 거기서 나오는 수치와 모욕감, 결핍,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박탈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요. 내가 박탈되었음을.
왜냐하면 새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미 옛 사람이 사라진 그 위에 새 사람입니다. 그럼 새 사람의 원형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박탈의 장을 만들었다 이 말이죠. 빈 자리를 만든 거예요. 그 빈 자리는 아까 공중의 동굴처럼 이건 스데반 집사가 예상 못한 거예요, 그냥.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도 본인이 몰라요, 맞아죽어서 들어갔지. 그게 박탈의 장이에요.
박탈의 장은 뭐냐? 내가, 이 자리는 내 자리이고 이 자리에 있으면서 ‘나는 있다’ 하는 그 자리가 없어지는 게 박탈이에요. 누구한테 빼앗긴 거예요. 주님한테 빼앗기고 없는 자리에요. 그 없는 자리가 올 때 여기서 범사에 감사와 찬송과 그리고 기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 하지만 이게 자기부인이에요, 자기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결론은 한 가지에요. 성경에 나오는 자기부인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한 것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 것을 할당시키고 분배한 거예요, 분배. 분배한 거예요. 화투는 주님 화투에요. 화투는 주님 화투이고 에이, 너는 장땡 먹어라, 하고 나눠주는 거예요. 예측도 못했죠.
고민하는 내가 박탈당해야 마땅함을 고민하면서 그걸 몰랐던 거예요. 고민은 어디서 했는가? 수치감에서. 내가 나를 보기에 마음에 안 들어서 생기는 거예요. 걱정도 그렇고 고민도 그렇고. 오븐에 빵을 굽다가 빵을 보니까 빵이 도대체 시커멓게 타서 못 먹는다. 순간 뭘 느끼겠습니까? 자기에 대한 원망과 수치감을 느끼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예상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으로 하여금 충분히 선택하게 해요. 매일같이 선택하게 해놓고,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다 선택하게 해놓고 그것을 비 선택적 행위의 그림에다가 그걸 집어넣어버립니다.
스데반 집사에 대해서 죽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이 짱돌가지고 스데반 집사를 더 죽일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이미 죽은 사람은 안 죽잖아요. 이게 인간들이 기껏 예수님이나 성도한테 했다는 전부에요. 그들은 그 죽음에 더 이상 따라올 수가 없어요. 죽이기 위해서 자기 죽음도 불사하고 죽기까지 따라오는 그런 경우는 없어요.
그러니 이 죽음이라는 것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내가 자살하는 것 말고 내가 예상 못한 주님의 죽음에 내가 합류하게 됐다는 이 사실이 도저히 우리 아이디어에서는 꺼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죽을 때 임마누엘,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지, 인간은 아무도 못합니다.
그 못하는 것을 내(주님)가 했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주는 것, 그게 바로 “박탈의 장, 곧 주체의 공터를 발생시키는 사건” 그렇게 되어 있어요, p.214 밑에서 7번째 줄에. 그런데 왜 이것을 사건이라 하느냐? 되풀이 안되는 게 사건입니다. 사건은 되풀이가 안돼요.
자, p.215 봅시다. 여러분한테 물어볼게요. p.215 위에서 2번째 줄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15:3)” 할 때 이게 출애굽기에 나오잖아요. 출애굽기에 나올 때 그때 출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봤습니까? 어떻습니까, 만나봤습니까? 안 만나봤죠.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찬송은 그렇게 하지만 눈으로 목격하고 봤습니까? 인간들이 자기들 인간들끼리 눈에 보면서 우쌰우쌰하고 같이 광야로 가는 그건 피부에 와 닿고 눈에 보이는데 그중에 하나님이 섞여가지고 ‘나도 좀 믿어줘’ 이런 게 있었습니까?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있음은 어디를 바라봤어요? 없는 존재를 바라본 거예요, 없는 존재를.
사람이 있는 것을 믿는 건 믿음이라 하지 않고 그걸 신앙이라 하지 않고 그걸 신념이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신념이기 때문에 자기 밖을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신앙이라 해도 그것은 신념이 돼요. 전에 안양강의에서 했는데 아무리 해도 인간은 신념 밖을 못나갑니다. 그러면 내가 믿는 것도 나의 신념이에요. 다시 할게요. 신념이라는 것은 나에게 이득이 오는 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이득이 오는 게 신념이에요.
신앙은 죽음 너머에서 오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죽음 너머에서. 그럼 죽음 너머이니까 내가 여기 있는 한 죽음 너머를 못 보잖아요.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볼 수 없는 분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선물로서의 신앙입니다. 죽음 너머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나한테 적용이 되지, 나의 행함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함을 약 올리기 위해서 작은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네가 산더러 옮기라 할 때 조그만한 신앙이 있더라도 옮겼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못한다는 뜻이에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 속으로 통과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여기에 부자 사람이 아니고요, 그냥 부자라 했어요. 강조점이 그냥 부자입니다. 돈 많은 것을 자기가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천국 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부자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부자라고, 부자 됨, 많은 돈을 가짐이 곧 나라고 여기는 사람은 천국 못 간다 이 말입니다. 말을 두 번한다고 더 이해되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부자청년 보고 뭐하라 했습니까? 모든 걸 팔라 했죠. 왜 부자청년이 모든 걸 팔고 주님을 안 따라갔겠어요? 본인은 가난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다 팔아버리면 내가 아닌 나가 된단 말이죠. 인간은 내가 아닌 내가 될 수가 없고 그런 방법을 몰라요.
심지어 이 부자가 망해서 가난하게 되어도 무엇을 생각하겠어요? 내가 여전히 부자 될 자격이 있고 부자 될 권리가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돼요. 비록 개뿔도 돈 한 푼 없어도 부자가 딱이야. 부자가 나한테 딱이야, 라는 생각을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이 그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부자 될 때가 나답고 가난할 때는 나답지 않다고 본인이 결핍을 느끼거든요. 모든 인간들이 그래요.
그래서 부자가 천국 못 간다는 것은 현재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부자를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잘 알아들었죠. “그럼 아무도 구원 못 받겠습니다.” 그 말을 알아서 한 게 아니고 화가 나서 했죠, 제자들은. 불안해서 이야기했단 말입니다, 결핍을 느껴서.
주님께서는 그게 옛 사람이니까 새 사람 만들기 위해서 덮치기 위해서 그걸 이용한 거예요. “그래, 말 잘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할 수 없는 그곳으로 내가 너를 데리고 가겠다.” 이 말이에요. 그럼 너희들이 할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면 뭐를 다 끄집어내야 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끄집어내야 돼요, 제자들이. 언제까지? 예수님을 배신할 때까지 다 끄집어내야 돼요.
그러면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알았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죠. 배신하고 난 뒤에 다시 주님이 찾아올 때 비로소 베드로는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사랑이 지나가면>.
‘그대는 나를 보아도 나는 모르겠습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사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대는 나를 보아도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모르면 모른다는 말을 안 해요. 누구세요? 하고 그냥 가면 되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후회스럽다 이 말입니다. ‘내가 안다고 하기에는 내 과오가 너무 커서 차마 내 입으로 전에 당신과 함께 살았다는 말을 차마 부끄러워서 못하겠습니다.’ 라는 노래가 그 가사 내용이에요. 지금 음악 평론까지......
그게 바로 사랑이 생겼다는 뜻 아니겠어요? 내가 주를 위해서 이걸 했습니다, 저걸 했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 나 때문에 주님의 몸이 탈구되었다는 것. 주님이 하신 모든 그 고생 고생이 우리가 얼마나 주님 오신 것과 반대쪽을 향하고 있음을 그걸 너무나 아시기 때문에 반대로 가신 거예요. 우리가 아는 십자가가 아니고 거꾸로 진 십자가죠.
주님의 고생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피조물로부터 폭격 당하신 몸. 피조물에 둘러싸여서, 자기 백성이든 아니든 관계없어요, 피조물에 둘러싸여서 모든 모욕과 저주와 비난과 조롱을 홀로 폭격 당하신 몸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살해사건은 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p.215 2번째 줄에 여호와는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는 용사죠. 용사라 하는 것은 1번째 줄에 보면 전술적 군사 개념이라 했습니다. 전술적 군사 개념이에요. 그래서 3번째 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든 그 현장은, 주님이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모든 현장은, 주님이 하신 공로, 예수님이 하신 것이 선물로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그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 그 현장은 무슨 현장이냐? 전쟁터입니다. 전쟁터에요. 여호와의 이름이 군사적 용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용사이기 때문에 용사가 있다는 말은 용사가 용사답게 거기서 설치신다는 말은 뭡니까? 그곳이 전쟁중이라는 말이죠.
예수님,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뾰로롱 고맙다고 도망칠 게 아니고 우리는 전쟁을 해야 돼요. 내 것이 박탈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전사,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p.215를 계속 읽어보겠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다음에 뭡니까? “하나님의 군대”. 본인 부대 소속이 어딥니까? 집사님은 취사병입니까? 뭔가 보직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군대 보직이. 집사님, 병참이에요? 뭡니까? 뭐 수송담당이에요? 그럼 전투부대는 누가 하는데? 전부다 겁내서 뒤로 다 슬슬 빠져버리고 앞장서서 전투는 누가 할 건데요?
어디서부터 무엇을 향한 싸움. 정답은 주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에요, 주의 이름을.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주의 이름은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고요. 공중 속의 동굴이 보일 리가 있습니까? 허공 속의 동굴인데 없잖아요. 없는 것을 지키는 전사 또는 군인,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런데 p.215 위에서 7번째 줄에 보면 아주 중요한 게 나와요. “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되면서 역시 ‘무(無)’에서 적이 호출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을 벌일 때 우리를 군인으로 부를 때 비로소 그때 적이 등장하는 것이지, 내가 나서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것은 돈키호테에요. 지가 망상에 빠져서 사는 거예요, 망상에.
이 점을 돕기 위해서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에 강의에서 했는데요. 참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1.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이게 어릴 때부터 익숙해졌습니다. 이게 전부에요. 우리는 2. 사람 대 하나님의 관계가 익숙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 보이거든요. 안 보이는 것은 뒷전이고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나와 하나님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두 조각난 이 싸움은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설 싸움인데 그 당시에 남쪽 북쪽 나라 할 것 없이 왕들은 자기 자존심과 왕으로서의 가오 있잖아요, 체면을 위하여 백성들한테 돈 주고 용병 사가지고 선지자한테 말도 안하고요. 자기 위신 채운다고 어쩔 수 없이 남북을 합해가지고 아람나라와 싸우다가 미가야 선지자한테 걸려가지고 당신 죽는다는 소리까지 들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사고방식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요. 북쪽의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잡으려고 오십 명과 그 오십 명 대장을 보냈잖아요. 왜 그 오십 명을 보냈습니까? 엘리야를 뭐로 봤습니까? 엘리야는 우리가 있는 것처럼 자기 혼자 있는 줄 알았죠. 엘리야를 건드린 것은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갑자기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가지고 오십 명과 그 대장, 51명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했습니다.
엘리야는 박탈의 장이에요, 엘리야가 있는 곳이. 그래서 구약에서 해석하기 어렵고 신기한 것이 특정 지점에 가면 막 성신이 임해가지고 방언을 하고 이래요. 선지자의 말을 하고. 사울도 그랬거든요, 특정 지점. 그 지점을 나오면 성신의 말, 예언을 안 하는데 그 지점에서는 한다고요. 왜냐하면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지역과 일반 지역을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모형판을 만든 거예요.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엘리야는 제단에다 물을 막 세 통씩 붓잖아요. 그러니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질 그 제물에 물이 흥건해서 축축히 젖었어요. 이건 뭐 라이터 틀어도 이제 불 붙일 여지가 전혀 없는 거예요. 어드밴티지를 받는 게 아니고 아예 본인이 알아서 핸디캡을 줘버려요, 본인이 알아서. 자, 안되지? 너희들 봐도 이건 불가능하지? 그걸 똑똑히 보여줍니다.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 전쟁을 하는 거예요.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들고 있어야 될 무기,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럼 목사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오른손에 들고 있습니까, 왼손에 들고 있습니까? 오른손으로 비벼도 되고 왼손으로 비벼도 되고 아무 손이나 됩니까? 그 무기가 뭡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선택지를 한다고. 내 하고 싶은대로 막 산다고요. 그게 무기에요.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하는 일대로 하면 되죠, 평소에 하는 일대로. 별다른 일 없어요.
누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누가 감사하느냐 하면 예상 한 게 아니고 여러분 자신들이 놀라야 돼요. 주께서 살아있다는 사실에.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주께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매일같이 순간순간 그것을 발견해야 되죠.
그렇다면 여호와 이름의 적은 누구입니까?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답변 나와야죠. 여러분의 적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죠, 나 자신. 그게 구약이 아니고 신약입니다. 신약에는 우리를 닦달내고 그래서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써 성령께서 찾아오셨다는 자체가 아군 되기 때문에 적이라는 것도 주의 이름이 하는 현장에서 진짜 적을 뽑아내는데 그 적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에 새삼스럽게 적이라는 것을 규정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왜? 전부 쓰레기이니까. 어떤 사람이 복음 안다 하니까 시비조로 우리 만나서 누가 옳은지 한번 해볼까 하잖아요. 목사님, 그거 갈까요, 말까요? 갈까요, 말까요 하지 말고 가세요. I'm 쓰레기, You're 쓰레기. 쓰레기들이 모여서 쓰레기임을 드러내면 되잖아요. 쓰레기가 쓰레기 짓하는데 그게 어렵습니까?
시래기국에 소고기 넣으면 안 되잖아요. 시래기에는 시래기만 들어가면 되잖아요. 주께서 시래기국 끓여놨는데, 제가 먼저 갈께요! 느낌 아니까~ 해가지고 본인이 쓰레기 모이는 자리에 쓰레기로 들어가면 되잖아요. 자꾸 자기가 성도 티를 내려고 하니까 진짜 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적이 되어버린단 말이죠. 쓰레기니까 쓰레기답게 굴면 되잖아요. 그 전쟁이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참 쉽죠잉? 나 혼자 쉬운가 모르겠는데......
p.215 밑에서 3번째 줄에, ‘비 그침’이라는 말이 나오죠, 비 그침. 지금은 비 그치는 것이 그럴 때도 있다, 비 올 때도 있고 그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던 백 일이나 쏟아졌던 그 홍수에서 비 그침이라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비가 그치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5월, 6월, 7월 세 달 동안 장마 내려보세요. 비가 그치는 게 신기하죠.
그걸 가지고 ‘자애로운 특별한 혜택’이라 합니다. 그게 창세기 8장에 나옵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써는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을 하나님의 긍휼과 자애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마음만 먹으면 주께서 옛날처럼 비로써 홍수로 다 죽일 수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브레이크 걸어서 멈추는 것은 주께서 은혜를 계속 주시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해서.
그래서 여기 p.216를 보게 되면 그 무지개가 어디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지상에? 무지개가 생기고 난 뒤에 지상에 주목한 곳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 때 그냥 브레이크를 막 건 게 아니고 가치 있는 희생제물다운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심판의 브레이크를 자진해서 stop을 시킨 거예요. 나중에 피의 가치가 다 끝나면 다시 심판은 그냥 지속될 겁니다. 더 혹독하게 줄 거예요. 지금은 브레이크 시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있는 한.
그래서 마태복음 마지막에 세상 끝날까지만 네가 복음을 전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니까요. 새 사람을 생산하시는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성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피로써 심판을 유보시킨 겁니다, 피로써.
그럼 피는 어디서 생긴 것인가? 피는 구분 짓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생기는 피가 있잖아요. 이것은 소용없습니다. 인간 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생긴 피만 유효합니다. 효과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제사라 하고 그 제사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새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제물로서 끼어들 때 흘려지는 피에요.
그러니까 인간을 위해서 흘린 그 짐승의 피와 하나님의 피를 철저하게 구분합니다. 인간의 피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는 생명 되시는 분에게 흘러나온 피이기 때문에 이 피는 곧 생명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내에서는 하나님의 생명되는 피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피째 먹지 말라 또는 짐승의 피나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게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기초로 들어갑니다. 기초로 딱 들어가요.
원형적인 하나님의 피가 있다면 굽이 갈라지는 것, 이런 것도 주님께서 피로 인하여 발생되는 모든 결과가 둘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굽이 갈라진 건 먹을 수 있어요. 안 갈라진 건 먹으면 안돼요. 되새김하는 것,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되새김, 뭔가 전과 후가 차이난다는 사실을 주님의 피에 담겨있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음을 음식으로 구분해놓고 어느 것이 생명의 피로 구분 짓는 쪽이냐, 하고 음식을 두 패로 나눠버렸어요.
그걸 먹을 때 거룩한 쪽의 것을 먹는다면 먹는 그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피의 혜택을 입었다는 그 거룩 속성을 그대로 유지해줘야 되죠. 구약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서는 as if, 제사 지켰다고 구원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이 말씀을 지킨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때 종말에는 완성이죠. 예수님 홀로 다 완성했습니다. 그건 as if가 아니에요. 마치 ~인 것처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에요.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계속해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순환구조에다가 집어넣어서 우리가 예상하는 감사와 고마움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고마움이 나오게 만드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계가 어딘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는 그것조차도 감사케 하옵소서. 우리가 뭔가 될 것 같은 그 모든 것이 그저 옛 사람의 예상에 불과한 것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뭐든지 이미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세상을 주님의 안목으로 시선으로 다시 감사함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성령의 안목을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