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5.생명됨

아빠와 함께 2021. 10. 24. 08:41

광주강의20211022a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

p.212 위에서 6번째 줄 보겠습니다. “땅의 백성들이 추구했던 정치적 권력은, 평소에 짐승이 작업 해 놓은 업적이다. 즉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는 땅의 백성들이 요구하는 메시아. 주님이 스스로 나타나는 메시아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고 땅의 백성들이 원하는 메시아. 그런데 땅의 백성들은 지금 배후에 짐승의 지배를 받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짐승이 원하는 메시아. 그 메시아를 땅의 백성들이 원했고 정작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고. 여기서 그 관계가 순조롭게 만날 수 없죠.

그래서 p.212 밑에서 10번째 줄 보면,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 점을 파악해야 돼요. ‘천국가려는 자를 막는 자. 어떻게?’ 어떻게 막느냐? 막는 방법은 간단해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다, 간단하죠.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이들의 말이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누가 이기느냐, 이 땅에서. 이 땅에서는 천국가려는 자를 막는 자가 이깁니다. 예수님도 졌어요. 예수님도 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제거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제거당해요. 그러면 모든 돌아가는 상황은 아무 일도 없죠. What happened?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 없는 거예요.

복음을 증거 하나 안하나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아무 일 없으니까 인간들은 역사에서 그냥 그대로 역사로, 역사에서 했던 일을 수행하면서 이 땅에서 밥 먹고 살면 그만인 거죠. 아무 일도 없으니까. 역사 자체가 변화될 조짐이 없어요. 아주 고요하고 잠잠합니다.

우리는, 중간에 무슨 일 있었어? 없었어. 그 당시 사람들은 수군수군 거렸죠.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메시아가 왔다고 했던데? 그 사람은 죽었어. 죽고 난 뒤에 끝났어. 뭐 부활됐다는 가짜 뉴스는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짜 뉴스고 우리는 다시 엠마오로 가든지 예루살렘으로 떠나자. 그래서 제자들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거기서 누굴 만났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죠.

역사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오기 전에 무슨 큰 대격변과 이변의 역사가 땅에 일어난다고 했는데 아무 조짐도 징조도 징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은 하나의 이벤트, 해프닝으로 끝났죠. 그냥 해프닝이죠. 역사 자체가 변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는 겁니다. 모든 주도권은 역사한테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럼 묵시란 것,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다 구라이고 거짓말이냐. 여기에 무슨 약간의 일이 하나 첨가가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 관한 겁니다, 예수님의 몸. 몸이 부활의 몸으로 잠시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지고 이랬어요. 이 부활의 몸이 등장했다는 것은 바로 역사 위에 묵시세계가 따로 완성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이 부활로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찾아왔는데요. 누가복음 24장 13절,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촌에 가는 겁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몸이 등장해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몸이죠. 같이 있어도 못 알아봤는데 묵시세계에서 알려주니까 ‘아, 예수님이구나.’ 하고 저녁 먹을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겁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6차선 도로에 헝겊으로 된 인형이 굴러다닌다고 생각합시다. 그 인형 하나가 도로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차에 치일 때 그 인형을 보고 막 가슴 아프고 찢어지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죠. 인형은 헝겊쪼가리 뭉쳐놓은 거잖아요. 봉제된 것 아닙니까, 그렇죠? 누가 인형이에요? 예수님이 인형입니까, 우리가 인형입니까?

예수님의 소식이 이렇게 성경 누가복음, 마태복음에 있어도 지금 예수님을 헝겊쪼가리처럼, 인형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말은 그 예수님의 몸과 내 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내 몸이 급선무이고 내 몸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헝겊 쪼가리라면... 어떻게 돼요? 우리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몸이잖아요. 부활의 몸이 있고 또 우리 몸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몸을 더 중요시 여기겠어요? 당연히 예수님 부활의 몸이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몸은 역사에서 역사로 계속 아무 조짐이 없으니까 지금 자기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묵시의 몸으로 나타났을 때 약간 억지스럽지만 그림을 그려보면, 역사층이 있고 그 위에 묵시층이 있잖아요. 묵시층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면 역사 위 묵시와의 경계선에 묵시가 만들어내는, 초(超)역사가 만들어내는 안감이 깔려요. 안감 알죠? 옷에, 겉옷 말고 안쪽에 안 비치도록 붙어있는 안감 또는 내재면(內在面). 바깥에 속하지만 역사 안쪽에 딱 달라붙어있는 내재면. 이것은 역사하고는 다른, 묵시가 자아내는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역사성(歷史性).

그러면 이 묵시라는 것은 순간 나타나면서 그 접촉지점이 역사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역사성을 드러내면 역사 따로 있고 역사성 따로 있겠죠.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겁니다. 몸을 중심으로 하니까 역사는 하나의 (계)층을 이루는 거예요. 층이라 하는 것은 단층에서 암벽 절단면이 있을 때 차곡차곡 층이 있잖아요. 각자 고유의 층이 있는데 이 층은 고정적이죠, 고정적. 인간들은 고정적인 층을 이뤄요. 자기들 아는 사람들끼리 단단하게 뭉쳐지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성은 층이 아니고 계열이 되는 겁니다. 계열은 고정적이 아니고 우발적이 되겠죠. 예를 들면 요셉의 꿈 같은 것. 자,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묵시성을 갖고 있습니다. 묵시성이 있지만 요셉의 몸을 가지고 애굽의 역사 안에 요셉이 설쳤잖아요. 그럼 누가 봐도 요셉이 설치는 것으로 보이지, 요셉의 꿈이 요셉을 데리고 다닌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하죠.

애굽의 역사에 하나님 보시기에, 묵시세계에서 볼 때, 꿈의 세계에서 볼 때, 예언의 세계에서 볼 때, 언약의 세계에서 볼 때 애굽의 역사(아래)와 묵시층(위) 사이 경계선에 안감이 생기는 겁니다. 이 안감을 역사성이라 합니다. 애굽의 역사는 하나의 층을 이루지만 역사성은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 거예요, 계열.

요셉의 꿈이 나타났다는 것은 요셉의 꿈 이전에 야곱 언약이라고 합니다. 야곱 언약의 그 묵시적 요소가 요셉에게 꿈으로 나타났죠. 애굽의 역사, 인간의 몸의 역사가 층이라면 역사성은 하나의 계열로서 나란히 가고 있는 거예요. 계열로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열. 우발적이죠.

다 아시다시피 야곱 언약의 경우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밤중에 꿈을 꾸죠. 28장 12절에 보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야곱이 28장 12절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사닥다리, 사다리가 등장합니다.

누가 거기서 와르르 쏟아집니까, 야곱한테? 천사가 쏟아지죠. 천사가 한둘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인데, 야곱 몸은 하나인데 천사가 야곱에게 막 쏟아지는 거예요. 오르락 내리락 바빠요. 그리고 창세기 32장에 유명한 ‘마하나임’이라는 게 나오죠. 창세기 32장에 보면 마하나임이 나오잖아요. 32장 2절에,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많은 천사가 한 몸에 집중한다고요, 야곱의 한 몸에. 천사가 야곱에게도 나타나고 에서에게도 나타나고 그러지 않잖아요. 사다리가 누구에게만 집중된 사다리입니까? 야곱에게만 집중된 사다리에요.

귀신들린 청년 이야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청년이 있죠. 청년에게 귀신이 얼마 들어갔어요? 한두 귀신이 들어갔습니까? 얼마나 많은지 숫자가 군대귀신, 이천이 되는지 이만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엄청나게 들어왔죠. 그들이 청년의 몸을 떠나서 돼지한테 들어가니까 그 동네 돼지 한 마리당 하나씩 들어갔는지, 귀신이 둘씩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귀신들이 떼쓰리로 와라락 들어갔잖아요. 그러니까 청년의 몸은 하나인데 몸에서 나왔던 귀신들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숫자는 엄청난 거예요.

묵시의 세계가 어떤 특정 몸을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 천사를 만났을 때 야곱은 역사적으로 자기를 생각했어요. (계)층으로, 역사층으로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한테는 누가 있습니까? 야곱이 있고 야곱의 부인 둘이 있고 애들 11명 있고 뭐 그렇게 있죠, 자녀 11명. 그 자체가 단단하게 뭉쳐서 한 가정을 이뤘잖아요. 이게 고정적이에요. 이런 가정을,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지켜주리라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천사는? 천사는 왜 야곱을 겨냥했는지 그게 나타나지 않죠.

유명한 창세기 32장에서 드디어 얍복 강가에 24절에 보면 천사가 야곱을 만나죠. 야곱을 죽여버립니다. 자, 그렇다면 원래 천사의 일은 묵시세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죠. 묵시세계 입장에서 역사라는 것은 없죠. 없어요. 왜냐하면 묵시세계가 펼치는 역사성은 있는데 역사라는 것은 없어야 돼요. ‘없다’보다도 ‘없어야’ 됩니다. 없어야 되는데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지워야 되겠죠. 천사의 기능은 심판이에요. 이 세상 마지막에 추수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사들은 마지막 추수꾼입니다.

지금 인간의 몸들이 생각해서 만들어낸 역사는 자기들이 실제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1차 대전 시작이죠. 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제로? 실제로 있죠. 폴란드 유대인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폴란드 사람들도 많이 죽고. 실제로 있잖아요. 있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몸이 천 조각으로 만든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그냥 죽어야 마땅한 인형이기 때문에 그래요.

야곱은 자기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천사가 왜 그리 바쁘게 나한테 집중하는지 이유를 몰랐던 겁니다. 천사가 와서 나를 도와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시 오게 되면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뭐 이렇게 생각했지...... 천사의 기능이 마하나임이거든요. 마하나임의 뜻이 뭐냐.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군대가 할 일은 뭐예요? 전쟁하는 거예요. 적이 있는 거예요. 적을 쳐부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묵시적 입장에서 적은 이 역사가 적이 되는 거예요. 없어야 되는데 인간들이 하나의 드라마를 꾸며놓은 거예요, 배후에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악마라는 묵시적 존재가 했다는 걸 모르고 자신들의 몸이 그렇게 역사를 만들어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내 몸이 뭔가 살 권한이 있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하루하루 살면 이걸 생명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생명.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에 의하면 이 층, 계열 말고 층은 생명을 얻을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그들이 계열에 속하지 않는 한. 그냥 층에 있는 한.

우리나라에서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 사이에 ‘경’자, ‘신’자를 따서 경신대기근이라는 큰 일이 있었어요. 한민족 오천 년 역사에 제일 큰 재난이 왔었습니다. 그 때 지구의 평균 온도가 0.6도 내려가서 냉해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걸 소빙하라고 하는데 1670년과 1671년 사이에 그 때 우박 내렸고 지진 일어났고 가뭄 일어나가지고 2년 동안 기근이 굉장히 심했어요, 조선시대 현종 왕 시대인데. 이거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에요.

역사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 하면 생명이라는 것, 살아야겠다는 것을 추구한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어디에 딱 붙어 있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붙어있는 게 역사에요. 무조건 나는 살아야 돼.

그러나 성경을 언약적으로 보게 되면 생명은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듯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생명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몸이 생명이에요. 거기서 살과 피가 나오니까. 생명의 피가 나오니까. 예수님의 몸이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몸이 생명이면 다른 인형은 생명이 없어야 돼요. ‘없다’ 정도가 아니라 ‘없어야’ 되는 겁니다.

생명도 아닌 게 생명 얻겠다는 것에 대해서 유일하게 생명으로 확정된, 완료된 분이 자기 몸 빼놓고 나머지는 천사를 보내서 다 없애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 작업이에요. 뭐 섭섭하십니까, 기분 좀 나빠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했거든요. 야곱은 죽어야 될 몸이고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생명을 가진 자는 이미 생명이기 때문에 소유성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더 이상 뭐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가지겠다는 것은 목숨과 생명을 부지하려고 가지거든요.

그런데 이미 예수님 자체,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 같으면 그 생명과 언약적으로 같은 계열에 속해있는 성도는 이미 그 자체가 생명에 속해졌어요. 예수님의 몸이 교회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이에요. 사지이고 지체에요.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더 이상 뭘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사는 것은 이 지상에 이 역사세계에 역사 속으로 역사성을 가지고 묵시와 역사 사이에 있는 안감으로써 움직이는 거예요. 마치 요셉이 꿈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여 나가는 거예요. 움직여나가게 되면 역사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꿈에 의해 움직이는 요셉과 그리고 요셉 말고 여타의 사람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거죠.

아, 인간이라는 것은 생명이 아니구나. 6차선 도로에서 차에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는 그냥 헝겊쪼가리로 대충 인간 모습을 한 그냥 인형 같은 인간 모양을 한 헝겊쪼가리 또는 흙조각에 지나지 않아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여기 p.212 8번째 줄에,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 인자라는 묵시의 몸, 이 몸은 기존의 몸 따로 있고 인자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인자의 몸은 완전히 이 땅의 역사적 몸을 다 심판해버리고 없애버리죠.

그렇게 되려면 야곱과 야곱의 자손들, 야곱의 후손들은 층이라는 고정성, 내 가정이라는 고정성이 깨어져서 계열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야곱의 두 아내부터 해서 열두 아들까지 그들은 이제 야곱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 언약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돼요. 그것 때문에 꿈에 의해 움직이는 요셉이 아버지, 엄마와 열한 형제들을 계속 살려주잖아요. 너희들만큼은 역사 속에 살지 말고 역사성 속에 살아야 된다.

보이지 않는 나라, 묵시가 역사에 같이 섞여버리면 그것은 역사성으로 나타나죠. 하나의 고정된 층이 아니라 계열로 흘러가게 되는 거예요. 언약적 흐름과 동반해서 계열로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언약 속에 있는 인물들은 천사 같은 존재로 달라져야 돼요, 천사 같은 존재.

아까 천사가 하는 일이 뭐라 했습니까? 마하나임이 하는 일이 군대죠. 이스라엘 일은 뭡니까? 싸우는 군대역할이죠. 천사에 의해 다루어지게 되면 그 당시 언약의 백성, 성도들도 천사의 일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 땅을 심판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 일을 해야 됐어요. 그래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등장했을 때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등장하죠. ‘네 일 할래, 천사의 일 할래?’ 이렇게 묻는 거예요. ‘천사의 일 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사람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는 일이 흔히 역사 속에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한테 시킨 일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기도할 때 누가 도와줬어요? 천사가 도와주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니까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라는 말은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묵시적 몸만 생명이에요.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아서 묵시적 몸이 되어야 우리는 생명, 그 몸에 붙어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열두 제자 전부다 도망쳤죠. 다 도망쳤잖아요. 한 사람은 또 배신하고.

그래서 예수님 일은 뭐냐 하면 인간을 천사 같은 묵시적 존재로 바꾸는 거예요. 성도를 천사로 바꾼다 하면 또 오해할 사람 있으니까 그냥 천사 같은 묵시적 존재로 바꾸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지만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천사 같은 존재로 바꾸는 거예요.

그렇게 바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지상에 역사 속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곧 성도라면,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지체니까, 악마의 몸이란 이 세상 성도 빼놓고 모두 다에요. 성도 빼고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악마 몸의 지체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악마의 몸은 역사를 추구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묵시를 추구하는 겁니다. 야곱에게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와르르 쏟아진 것처럼. 야곱 몸은 하나인데 천사가 많이 왔다는 말은 야곱이 앞으로 번식할 자손들, 하늘의 별같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제2의, 제3의, 제4의, 제5의 천사 역할들을 다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하나하나가 딱딱 떨어내면 전부다 하나하나가 천사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그러한 단체가 되고 그걸 이스라엘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었던 시대에 개인적인 소망이나 여망은 용납이 안 되죠. 하나님께 허락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어있으면서도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살았잖아요. 이미 다 이루었다가 되고 이미 하늘에 앉혔잖아요, 에베소서 2장 5절-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죽은 자를 살려서 하늘에 앉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음이 아니니까 생명인 거예요. 이미 죽음의 권세는 더 이상 성도한테는 영향을 못 입히니까. 죽을까? 하는 게 없어요. 이미 살아버렸어요.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움직이니까요. 이미 완료되었으니까.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보면 666나오죠, 숫자 666. 이 666 숫자가 둘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사람의 수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수, 곧 짐승의 수에요. 사람=짐승, 짐승=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666에 속한 자들이 악마로부터 표를 받은 자라 하는 거예요, 표를 받은 자.

요한계시록 한번 볼까요? 666 한번 풀어봅시다, 이참에. 그렇게 기다렸던 666, 말썽꾸러기 666. 이것 때문에 마트 겁나서 못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여기 18절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짐승의 수가 사람의 수잖아요. 짐승의 수가 사람의 수에요. 숫자가 단수적인, 하나밖에 없는 악마를 표현하는 동시에 다수의 인간을 표시하는 숫자가 666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악마한테 매여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16절에 보면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절,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자, 매매라는 것은 경제활동을 말하죠, 경제활동. 경제활동을 왜 합니까? 죽어가는 내 육신이 매매를 해야 생명을 얻잖아요.

그러니까 악마에 종속된, 예속된 인간들은 생명이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어서 계속해서 누구한테 굴복하고 복종하든지 간에 우선 살고 봐야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살고 봐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땅의 권세에 복종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땅의 권세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내 말 안 들으면 ▭다’ 죽는다, 이거거든요.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조퇴하기만 해봐라.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이게 권력 세계입니다.

나라의, 국가의 권력이 바뀌면 권력은 그 산골짝에 있는 할머니나 외딴 데 사는 사람들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어느 편이냐를 강요해요, 어느 편이냐를. 상 받았던 유명한 영화, <폴란드>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폴란드 어느 유대촌에 독일군이 왔을 때 ‘너희들 우리 독일 편이야, 아니면 폴란드 지하 저항단체 편이야?’ 묻고요. 그들 나가고 난 뒤에는 저항단체가 와가지고 ‘너 어느 편이야?’라고 물어요.

꼭 우리나라 지리산 빨치산 같아. 저 순천, 벌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지역들 있잖아요. 지들끼리 싸우고 가만 놔두면 되는데 꼭 찾아와요. 너 어느 편이냐? 쌀 내놔라. 반찬 내놔라. 한번 확 휘저은 다음에 너 어느 편이야? 네 아들 어느 편에 섰어? 우리 빨치산이야, 아니면 국군 편이야? 이렇게 따지듯이.

권력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너 어느 편이야? 그런데 그 자체가 이미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있는 거예요. 하수인이 되었으니까 이걸 가지고 사람의 수니 곧 666이다. 여기에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다 하는데 이 원형은 바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미 표를 주시고 인을 쳤어요.

아까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잠자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왔잖아요. 이게 언약사람들에게 천사를 집중적으로 보내는 거예요. 야곱 세 명, 네 명이 아니라 딱 야곱에게 다 보내서 이름을 야곱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야곱을 이용한 거예요. 야곱을 이용하고 천사들이 와락 달려들면 야곱에게서 열두 아들이 나오겠죠. 열두 아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럴 때 작용하는 것, 주님께서 이미 묵시적 존재로 딱 집어놓은 사람에게 하는 이것을 선택이라 하는 거예요, 선택(選擇). 선택이라는 말이 너무 식상하면 선별(選別). 선별한 거예요. 선별했다 이 말이에요. 선택하고 선별한 거예요.

요한복음 6장 70절-71절, 이것은 다 같이 한번 찾아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주님께서 선택, 선별을 먼저 하셔요.

그 앞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해서 (요한복음 6장 65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됐고요. 아버지가 택하신 자를 예수님이 찾아가서 ‘너,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널 택했어,’ 라고 고지하고 딱 선택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선별했다, 선택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밥이라는 뜻이에요.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한테 선별당했다는 말은 선별당하지 않은 인간은 그냥 중립이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 빼놓고는 악마가 이미 그 인간들을 선택한 거예요. 그래서 악마도 베드로를 어떻게 해보려고 자꾸 삼키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기도를 해주니까 악마가 베드로는 넘어뜨리지 못하게 한 거예요.

가만 들어보니까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따로 더 센 두 세력이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갖고 노는 거예요. 지금 형편이 이런 형편입니다, 지금. 주님의 통치 방법은 선택하는 거예요. 선별하는 것이고.

이제 어려운데요. 선택을 할 때, 선택하신 분이 악마가 인간을 선택하는 것과 차별화가 돼요. 악마가 인간을 딱 선택했을 때는 무조건 복종시키기 위해서 다루기 위해서 선택했지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선별할 때는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는 요소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는 자라는 요소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까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그 중 하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자로 되어 있죠.

이슬람교나 소위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님의 주권사상은 악마가 선택하는 거예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 전부다 하나님이 예정하사 구원해서 선택했다는 거예요. 뭐가 빠졌습니까? 정작 우리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 속에는 선택당한 자에게 도리어 버림받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선택하는 거예요. 선택하는 자가 선택받은 자한테 버림받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이 예정한 택한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잘 되려고 하는 것, 그 예수님은 본인이 선택했잖아요. 그것은 악마가 만들어낸 예수에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내가 예수님이 선택한 그 요소와 연결되려면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에게 버림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선택과 동일한 선택이라면 우리가 선택한 모든 것에서 누가 희생되어야 됩니까? 내 선택에 의해서 내가 희생되는 요소가 있어줘야 이게 주님의 선택이에요.

그 선택이 주님의 인치심입니다. 성령의 인치심. 성령이 찾아와버리면 주님처럼 우리가 버림받는 그 코스를 가게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누가 누구한테 버림받을까요? 선택한 나한테 내가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선택한 나한테 내가 버림받아야 돼요, 내가. 우리는 믿을 때 잘 되려고 믿죠. 버림 안 받으려고 믿잖아요. 이게 주님의 선택의 원칙과 위배되는 겁니다. 맨날 뭐 다 잘 될 거야.

생명은 예수님이 생명인데 어디 있느냐. 버림받는 데서 생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는 데서. 누구한테? 모든 인간이 악마에 속해가지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어떤 수를 다 하거든요. 예수 믿으라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라 하면 하나님 믿고 삼위일체라 하면 삼위일체 믿고 예정론이면 예정론 믿고 십자가 믿으라 하면 십자가 다 믿잖아요. 그런 인간에게 버림받는 그 쪽에 생명이 있어요.

인간은 뭔가 선택하고 결정할 때, 내 선택과 내 결정이 주님의 선택과 주님의 결정하고 딱 이렇게 손가락까지 마주쳐야 되거든요. 다빈치가 <천지창조>할 때 그림을 잘못 그렸어요. 하나님께서 KFC 치킨집 할아버지처럼 나타났을 때 이거 뭐 E.T.도 아니고 아담도 손가락 내민다고요. 아담이 손가락 내밀면 안돼요. 손가락 부러뜨려버려야 돼요. 지는 손가락 내밀 잽이 못됩니다. 손가락 치우고 내가 너를 집었다, 이 말이죠. 내가 선택한 자에게 내가 버림받기 위해서 선택한 거예요. 주님의 선택이 모든 구원의 선택의 원형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어요.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줬잖아요. 꿈을 줬는데 요셉이 그냥 애굽으로 갔습니까? 자기가, 아버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갔습니까? 누가 내몰았잖아요. 그 가정에서, 가정이라는 층에서 몰아냈잖아요. 몰아내니까 요셉에게는 이 고정된 자기 가정이라는 층이 날아간 거예요. 버림받은 거예요. 층에서 버림받으니까 이게 계열이 된 겁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뒤에 예수님의 층, 예수님의 고정된 가족이 왔죠. 동생들하고 엄마가 왔잖아요. 동생들하고 엄마가 왔는데 듣는 엄마, 듣는 동생 기분 되게 나쁘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그들은 나 예수, 형님을 보러 왔지만 그들의 선택에 나는 호응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하는 모든 시도는 죽어가는 나 자신을 어떻게든 수완과 방법을 통해서 살려보겠다 하는 그 짓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인 몸은 버려야 되는데 역사적인 몸을 어떻게 어떻게 해가지고 천국까지 이걸 탁 올려 보내려고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왔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선택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피해버리죠.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문장으로 하게 되면 ‘목사님, 묵시세계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할 때 묵시세계를 알려면 역사의 현실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가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몸부림치는지, 뭘 위한 몸부림이고 무슨 목적으로 몸부림치는지를 똑똑히 생생하게 자기를 봐야 돼요. 몸부림치면서 내놓는 믿음, 소망, 사랑, 선택, 예정, 모든 신학, 교리 전부다 이것은 나를 어떻게 한번 살려볼까, 하는 악마의 표를 받은 666의 일원이에요. 팔에 완장을 차야 돼요. 완장 알죠? 666. 아니면 가슴팍에다 붙이든지.

이 세상은 오징어게임입니다. 모든 드라마는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연장하느냐, 전부 그게 주제에요. 하나 예를 들면 어떤 결혼 안한 아가씨가 자기의 남자 이상형을 스스로 한번 뽑아보죠. 누구나 다 그렇게 하니까 뽑아보는데 남자가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성격 되고 키 되고 돈 되고 건강하고 나한테 반하고. 뭐 빠진 거 없죠? 다시 할게요. 성격 좋고 키 되고, 후손을 생각해서, 돈 많고 그 집안에 병든 유전병 있으면 안 돼요, 골치 아파요, 건강하고 그다음에 나한테 반했나? 오직 나에게만 관심 두고 집중하는 것. (인물?) 요새는 인물 안 봐요. 돈 되고 키 되면 다 넘어가요. 키가 인물을 대표하니까. 키만 크면 인물 못 되도 괜찮아요. 건강미 있으니까.

거기에 비해서 자기는 어떠냐. 성질 더럽고 먹으면 살로 가고 돈 생기면 다 써버리고 자기는 불면증 걸려있고 자기는 자기한테 반해있고. 이게 현실입니다. 이게 묵시세계를 생각하기 전에 이게 현실이에요. 자기는 성질 더럽게 있으면서 묵시세계에 기도하기를, 성격되고 키 되고 돈 되고 건강하고 나한테 반했고 나만 생각하고 그거 찾고 있는 거예요. 왜?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결정하니까, 내 인생은.

여기에 내가 그 남자에게 버림받는다는 요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누가 그렇게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요소를 빼는데 있어서는 악마가 그것만 노리고 있습니다. 버림받는 그것만 빼면 내가 용납 다 해줄게. 내가 다 들어줄게.

이런 남자 만나서 잘 되겠다는 말은 계열이 아니고 층, 하나의 지층이 되죠. 단단한 암석층, 단층들 있잖아요. 그 하나하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이거 단단하게 해가지고 그냥 세월 보내다가 늙으면 요양병원에 가서 죽으면 괜찮다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것. 이 내 것이 단단할수록 생명을 많이 체험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내 생명은 단단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 이것을 층이라고 했는데 너무 어려우면 이걸 쉽게 하겠습니다. 자기 고유성. 자아성이라고 볼 수 있죠. 10분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광주강의20211022b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

주님께서 천사한테 일 시키듯이 언약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만든 이유는 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주님의 움직임을 이 역사 속에서 생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바빠버리면 뭐가 생략되느냐 하면 자꾸 주님의 움직임을 놓치고 잊어버려요.

성도는 나의 움직임=주님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서 나의 움직임을 생략시켜버리고 중간에 삭제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매개(媒介, intermediation)라 합니다. 매개라는 것은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끔 하는 게 매개에요. 보게끔 하고 또는 보도록, 믿도록 또는 못 믿도록 하는 그것이 중간의 매개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묵시세계를 매개로 할 때 몸으로 매개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하나님을 자꾸 보이라 하는데 예수님은 답답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본 것이다. 나를 봐라. 내 몸을 보라 이 말이죠.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게 세례요한의 주장이지, 아무리 예수님을 이렇게 봐도 이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들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성령받기 전까지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차에 치여 죽든 뭘 하든 그냥 인간은 자기 몸이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활동과 움직임을, 그 몸을 생략해버린다는 거예요, 일상에서. 생략해버려요.

감자농사 짓고 닭 키우는 사람이 예수님 생각합니까? 아니죠. ‘내가 공들여 키운 닭값을 제대로 받아야 될 텐데’ 이거 생각한다고요. 시장에 가서 닭값을 왜 받아야 되는데? 물으면 닭값을 잘 받아야 내가 살지, 이렇게 하거든요. 당신 벌써 안 살았어? 그러면 아니, 나 곧 죽어가. 나 살아야 되겠어. 그게 바로 666이에요, 그게. 표 받은 거예요. 마귀로부터 선택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이마에 인을 박았다는 것과 똑같은 짓을 누가 하고 있어요? 악마가 예수님께 선택받지 않은 찌꺼기 나부랭이에 전부 인을 다 찍어놓은 거예요. “너 살고 싶지? 살고 싶지?” “살고 싶습니다!” “시키는 대로 해.” “옛썰!” 전부다. 살고 싶다는 자기의 욕망에 내가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살고 싶은 나를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게 요셉의 형들이에요. 그래서 요셉을 애굽의 노예 상인들한테 팔아먹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돼버리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뭐가 빠진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자기가 선택한 제자들에게 버림받았잖아요. 선택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 자기 선택으로 말미암아 선택하신 분, 그 당사자가 버림받았습니다. 버림을 받아요.

사는 게 아니고 그 선택된 자로 인하여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어버리고 말아요. 그렇게 악마가 우리보고 죽으면 안 된다고 말리는 그 자리에 주께서는 가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이 육신은 어디까지 내려갑니까? 육신이 죽음까지 내려가죠.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지점이 있는 게 아니고 죽음은 소실점이 돼요. 죽음은 하나의 빈 허공이에요, 허공. 그 허공을 사람들은 역사로 메꾸죠, 역사로. 나 죽거들랑 너희들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 된다. 난 죽어 없어지니까. 아버지, 어디로 가십니까? 몰라, 나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데... 죽음 자체가 구멍이 뚫린 빈 공간이에요, 죽음 자체가. 미지의 세계, 모르는 일이거든요, 죽음은.

왜 죽음을 모르느냐 하면 죽음 직전까지 죽음 5초 전까지 자기로 꽉 차 있는 삶, 내가 살아야겠다는 자기 자신을 살리는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아는 게 나 사는 방식밖에는 몰라요. 그런데 갑자기든 서서히든 뭐가 닥쳐왔습니까? 죽음, 내가 없어지는 죽음이 왔죠. 내가 없어지는 것은 내가 이해하겠는데 나를 없애는 그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요. 그 죽음의 세계가 뭐로 구성되어 있는지.

소실점, 텅 빈 지점입니다. 인간은 결국 깜깜한 블랙홀 같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냥 불나방처럼 불을 보고 달려드는 맹목적 인간인 것처럼 달려드는데 달려들 때 그 방향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암.’ 여기에 ‘암’을 붙여야 돼요. ‘암, 살아야 돼.’ 해놓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그 인간은 주님의 묵시의 몸을 만질 수가 없습니다. 만지지마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만지지마라 했어요. 몸을 만질 수가 없다는 것,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짜 몸을 만지지 못하잖아요. 주님의 몸을 만질 수 없다는 말은 관계가 끊어져있다는 거죠.

그러면 만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만지는 손은 내 손이잖아요. 그럼 여기 내 몸, 이것을 현전(現前, presence)이라 하는데, 내 몸이 여기에 있죠. 내 몸이 있는데 손을 내밀어 주님을 못 만지잖아요. 그럼 주님의 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입니까, 내 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입니까? 내 몸은 하나님께서 버려야 될 몸이에요. 쓰레기에요. 쓰레기가 진짜 몸을 못 만진다는 말은 결국 이 몸은 주님 앞에서 소실되어야 될, 소멸되어야 될 몸이죠. 그러니까 내가 거울 보면 비취고 내가 만지면 만져지는 이 몸은 결국 현전의 반대말, 부재(不在, absence), 존재하지 않는 몸이 돼요, 내 몸은.

성만찬할 때 ‘이는 내 몸이요’ 하잖아죠. ‘이는 내 몸이요’ 했는데 왜 계속해서 그걸 먹고 있어요? 먹어봤자 나중에 똥 되는데 아무 것도 의미 없는데 또 먹고 또 성만찬하잖아요. 내 몸은 주의 몸과 동일시되지 못하는 것이 먹고 마실 때마다 확인되는 거죠.

어떤 애가 젖을 안 먹는 거예요. 거식증, 식사를 거부하는 증세를 보이는 아이가 있다 합시다. 젖을 먹어야 되는데 안 먹어요. 왜 갑자기 젖을 안 먹지? 하다가 엄마가 요렇게 사랑해주니까 그때부터 안심 놓고 젖을 먹는 거예요. 그 애는 젖을 갈망한 게 아니었어요. 엄마의 사랑을 갈망한 겁니다.

인간은 밥을 갈망한 게 아니고 ‘내 몸을 하나님께서 안 죽여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지켜주면 좋겠다.’ 이걸 갈망하는 거예요. 갈망하는데 갈망하려면 예수님 몸이 하나님께 부활한 몸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몸이 예수님 몸이죠. 그러면 내 몸은 만지지 못하니까 동일시가 돼요, 안돼요? 동일시가 안 되죠. 동일시 안 되니까 억지로 동일시되려고 믿음, 소망, 사랑 총동원해도 항상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어떤 애를 써도.

예수 한 50년 믿고 교회 뭐 믿고 목사, 장로, 전도사, 집사 다 했는데 결국은 나중에 끝에 가서는 자포자기. 많이 했다, 나도 진짜. 하나님, 저보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는 봉사 많이 했습니다. 내 딴에 하나님 잘 믿으려고 신학, 십자가, 언약 다 믿고 성경공부 다 따라다녔는데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더 멀어지고 또 한 발짝 다가서면 또 멀어지고. 만질 수가 없네, 만질 수가. 가면 또 두 발짝 멀어지고. 백지영 한번 불러야겠네. 백지영이 여기서 노래 한번 불러야 돼요.

왜 주님께서는 우리 손가락을 주님 몸에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의 오신 이 몸이 죄의 육신의 몸이잖아요. 육신의 몸은 주님 안에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쓰레기로 탈락시키고 소멸시켜야 될 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은 감각이란 말이죠. 인간은 감각을 끌어 모아서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조장하거든요. 난 예수님 얼굴 봤다든지, 예수님 손을 만졌다든지, 꿈속에서 예수님을 봤다. 그 꿈속에서 예수님을 본 것, 그게 자기 감각이죠. 여러분, 예수님을 꿈에 본 게 확실합니까, 안 그러면 성만찬 때 포도즙과 성만찬 떡을 먹는 게 감각적으로 더 확실합니까? 둘 다 뭐 아무 의미 없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본인이 예수님을 진짜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 버림받는 것을 당연시해줘야 돼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떤 아버지와 아들 둘이 나와요. 하나는 충실하게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에게 효성을 지극히 했는지 아니면 아버지 등에 들어붙어 사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떠나지 않는 아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재산을 미리 빼돌려가지고 허랑방탕 다 날린 아들이 나오잖아요. 동생은 집 나갔고 형은 집을 안 나가고 있었잖아요.

나중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두 형제가 서로 만났을 때 형이 동생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아버지 마음을 왜 그렇게 상하게 했냐?” 막 나무라겠죠. 그때 동생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형은 가출해봤어? 형은 버림받음이 뭔 줄 알아?” 그럼 아버지가 형하고 동생, 이 둘을 링 중간에 세워놓고 “결승전! 동생 승!” 형 손은 팔 빠지도록 팍 내리고, “가라. 지옥으로.”하고, 동생 손을 확 올립니다. 동생 손을 들어버리죠. “네가 챔피언!” 왜냐하면 주님의 버림받음에 동참한 것으로 간주해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야곱이 분명히 사다리에 천사가 왔을 때 지는 땡잡았다고 여겼던 겁니다. 천사가 막 내려올 때 천사 손에 1등짜리 복권을 막 갖고 오는 줄 알았어요. <오징어게임>이라는 그 영화감독에게 물었어요. 왜 상금이 하필 456억입니까? 우리나라 복권 최고 상금이 400억이라는 거예요. 거기다가 부르기 쉽다고 5,6 붙여서 456억이라고 했대요. 천사가 내려올 때는 인생 복권 타는 것처럼 땡잡은 줄 알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다, 복 준다, 복 받는다는 그 야곱이 내려온 천사에 의해서 살해당해야 돼요. 인간의 역사적 몸이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반드시 역사적 몸을 경유해야 돼요. 묵시를 알기 전에 역사부터 먼저 알아야 돼요. 이 역사 속에 살면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코스를 밟았거든요.

예수님께서 현실 속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현실 속에 들어왔다 할 때 자, 이걸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있죠. 이스라엘의 원조가 야곱입니다. 야곱에게 두 아내, 라헬이 있고 레아가 있잖아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야곱이 인간의 몸, 신약에서는 육이죠,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양심, 최선의 노력은 다 해요.

특히 야곱이 라헬을 사랑할 때 이것은 지고지순한 사랑. ‘당신 같은 사람은 또 없습니다’에요. 이런 사랑 또 없습니다. 내 심장? 당신에게 떼어주겠다. 이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라헬을 사랑했거든요. 사랑한 이유는 야곱의 본성대로... 말할 거 뭐 있어요? 말할 필요 없죠. 이쁘니까. 이뻤던 거예요. 전국 콘테스트 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언니보다는 나았잖아요, 언니보다는. 언니는 요새 같으면 안경 썼어요, 두꺼운 안경.

그런데 인간들의 이 사랑, 이 사랑에 왜 그리 방해가 많은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무려 7년을 거의 무료봉사하듯이 일했어요. 7시간 아닙니다. 7개월 아니에요. 7년이에요. 군대생활 같으면 상사됐습니다. 상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사됐어요, 군대생활 같으면요. 진짜 이 정도했으면 자칫하면 박군 되겠다. 박군 그런 건 몰라도 되고요. 완전히 말뚝 박았죠, 거기에. 뭐 때문에?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한 자기 할 도리는 다 하겠다는 이것이 인간적으로서는 최상의 예의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희생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다 한 겁니다.

그런데 제발 내 인생에 태클 걸지 말라 하는데 여기서 첫날밤에 레아가 들어와가지고 7년+7년 총합해서 21년인가, 하여튼 14년을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진짜 이 악물고 일했습니다. 그런 야곱, 얼마나 순결합니까, 그 야곱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립니다. 야곱 죽을 때 14년, 21년 다 죽였어요. 아무짝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아요. 지고지순한 사랑도 안 받아요. 순결한 사랑도 안 받습니다.

그렇다면 라헬, 레아, 열두 아들 전부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이들도 야곱 따라서 다 바뀌어야 됩니다. 야곱이 바뀔 때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바뀌었죠. 여기 천사가 개입했잖아요. 천사가 개입함으로써 이 이스라엘이라는 몸은 천사가 해야 될 일이 그대로 확장된 겁니다. 자기 고유의 일은 없는 거예요.

자기 고유는 하나의 지층이 된다니까요. 딱딱한 암석이 돼요, 암석. 고정된 암석이 돼요. 암석도 나름대로 역사가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뼈대 있는 집안. 어디 천박한 것이 우리 집에 시집와가지고. 우리 집안 보통 집안 아니야. 어디 고졸 출신이 우리 며느리로 들어와가지고, 하는 거 있어요. <너를 닮은 사람> 드라마, 고현정 나오는.

이게 층이에요. 층과 같은 말로 결정체. 다이아몬드같이 딱딱해져요, 갈수록. 일종의 변비죠. 아주 딱딱해져요. 아, 이거 깨지겠습니까, 안 깨지겠습니까? 안 깨집니다. 죽여 버려야 돼요, 이건.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씨도 안 들어가요. 씨도 안 들어가죠.

여기서 계열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딱딱한 그 층에는 자신의 나름대로의 역사가 흘러요. 오늘 강의가 역사 아닙니까? 역사라 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희생과 노력과 정열과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14년을 고생한 그게 다 들어가 있어요. 그거 아까워서 못 버립니다. 그런데 그 아까운 걸 주께서 아예 죽여 버린다고요.

그래서 십자가의 영이 오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우리는 죽고 천사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지금 천사하고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야곱이 그냥 순순히 천사를 맞이했습니까, 싸웠습니까? 싸웠잖아요. 싸웠는데 결국 천사가 졌다 하지만 사실은 졌으면 야곱이 야곱으로 계속 자기 역사가 이어질 건데 야곱이 자기 역사를 못 잇는 거 보니까 결국은 천사가 이기고 야곱은 목숨 빼앗기고 죽은 거죠. 그래서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에요.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전에는 자기 역사이기 때문에 내 것, 나의 역사의 추가, 추가, 플러스, 추가해서 예수 믿기도 여기에다 객차 하나 붙이듯이 붙여놓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몽땅 다 날아가요, 이게. 몽땅 다 날아간다고요.

천사의 특징은 시작점이 역사가 아닙니다. 묵시로 시작하는 게 천사잖아요. 그러니 성도도 전에는 땅의 역사로부터 시작했던 인간이 성도가 되어버리면 하늘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서 성도되는 방법은 인간에게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올 수가 없죠. 그냥 예수 믿어봐야 자기 역사는 멀쩡하고 그 뒤에 객차 하나 덧붙이는 것으로 나 예수 믿었다, 그걸로 끝이기 때문에 이게 앞뒤가 연결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역사는 그냥 역사로 해서 망하는 겁니다. 우르르 다 망하고 묵시는 여기에 새로운 계열을 만들어서 안감으로 역사성을 이루는 거예요. 역사성의 내막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음의 연속이 되죠. 버림받을 수 있는 사람을 계속 생산해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그 역사성 안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갔던 그 과정 자체가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의 열두 지파가 다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디서 바뀌는가. 바로 유월절에서 바뀌어져야 돼요. 유월절 그날 밤. 밤이에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 만난 것이 낮이었어요, 밤이었어요? 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이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 해요. 밤의 의미는 ‘다 죽었다’ 이 말이에요. 다 공동묘지에요, 전부다. 고요하죠. 다 죽었죠. 나이트클럽 빼놓고. 거기는 쌩쌩히 살아있지만 다 죽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걸 ‘어둡다’고 해요. 어두우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 14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인간 같은 인간에서 천사 같은 인간으로 깨어나라. 천사 같은 인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생명을 얻을 필요 없이 이미 생명 된 것이에요, 생명된 것.

아까 요셉이야기 했잖아요. 요셉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요셉 안에 꿈이 움직이는 거예요, 어두운 애굽 나라에 꿈이 움직이는 거예요. 성도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생명이 움직이는 거예요. 생명이 움직이니까 멀쩡했던 아무 일 없던 이 역사가 천사 같은 자에 대해서 학대와 핍박을 하겠죠. 여기서 버림받음이 성사되는 겁니다.

유월절 밤에 일어난 일, 핵심이 뭐냐. 그 핵심을 파란 걸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이건 지난 수요일에 했는데요. 유월절 밤의 핵심은 ‘너는 너로부터 떠나라.’ 역사적 너로부터 네가 떠나라, 역사적 너로부터. 왜냐하면 죽음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역사가 진행될 필요가 없고 그리고 지나온 모든 것은 그 소실점으로 전부다 빠져 들어가니까. 거기서 다시 나를 끄집어낼 건덕지가 없어요. 국물도 없어, 다 빠져버렸으니까.

죽고 난 뒤에 나머지 옷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건 세일할 때 산 건데... 필요 없어요. 백화점에서 산 건데... 다 필요 없어요. 다 태워버리죠. 몸 태우죠. 옷 태우죠. 안 타는 가락지는 알아서 챙기고 타던 차는 명의 변경해서 타고 다니고, 그건 또 비싸니까. 그렇지 않고 집에 있는 가구, 하여튼 고인의 냄새나는 것은 그 냄새를 싹 지우죠. 그런데 만약에 죽은 줄 알았는데 한 24시간 뒤에 살아나게 되면 얼마나 미안스럽겠어요.

어째든 간에 너는 너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여기에 죽음 사건을 우리 속에 개입합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에게 밤중에 단독적으로 천사가 오는 것과 같죠. 야곱에게 온 천사가 열두 지파로 갈라졌고 열두 지파가 또 열둘로 갈라질 때 이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갈라질 때마다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 바로 선택이 작용하는 거예요. 언약이 작용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즉 묵시가 역사를 때린다는 그 절차를 계속 삽입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매일같이 삽입시켜요. ‘죽어라’가 아니라 ‘이미 생명이 살았잖아’ 그걸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네가 살았잖아. 살았는데 뭘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그런 것은 하지 말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미 살아있는 생명을 가졌을 때 그 직장에서 현장에서 ‘왜 세상은 666이냐’는 거예요. 짐승에 속한 자들이 이렇게 우글거리느냐를 봐야 돼요.

그렇게 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성도를 통해서 성령이 인도하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일이 생략되지 아니한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정작 살아계신 분은 누구냐. 역사는 흐른다가 아니라 묵시가 역사성을 가지고 흐르죠. 묵시가 마지막 때까지 흐르는 거예요.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요셉이 애굽 나라에서 설쳐대는 것처럼 요셉 같은 성도가 이 땅에서 제대로 이 땅의 의미를 제공하면서 설쳐대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내가 잘했다고 하면 안 되고 꿈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까 요셉 본인도 되어가는 일에 의아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요셉은 꿈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신약적으로 하면 이미 우리는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다음 일이 뭐가 준비됐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신경 안 써도 생명 얻었는데요, 뭐.

예수님의 일하심 자체가 생명이에요. 그걸 내 생각으로 가로막을 자격이 우리한테 없는 겁니다. ‘비켜라, 이놈아.’ 하는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우리 육은 죽고 천사의 몸으로 또는 예수님의 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시 무덤에서 외출한 심정. 외출. 잠시 조퇴한 거예요. 잠시 무덤에서, 여기 부사 하나 집어넣으면 ‘빼꼼히’, 무덤에서 관 열고 빼꼼히 나오는 거예요. 무덤에 관이 있다면 관 문을 열고 빼꼼히 이렇게 웃는 얼굴로... 세상이 뭐지? 어? 손흥민이 또 한골 넣었네. 뭘 즐겨도 괜찮아요. 이 집 뷔페 맛이 괜찮네. 뭘 즐겨도 괜찮아요. 아이고, 저 사람을 남편이라고 부르는구나. 어? 아이가 셋인데. 아, 저 애가 큰 애 아들이고 딸 둘이 있네. 어떻게? 빼꼼히.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빼꼼히. 어? 늙은 사람이 있는데... 아, 시어머니구나. 시어머니 있구나. 이쪽에는 또 친정어머니 있는데 친정어머니는 요양병원 가있네. 기저귀 갈아 넣으라 하네, 이런 거. 빼꼼히. 아이 둘은 젖 달라고 하는데 쟤가 나보고 젖 달라고 하네.

잠시 무덤에서 외출한 심정이죠.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인 맞은 자에게는 이 세상 어떤 악마의 권세도 손대지 못하게 막아줘요. 왜냐하면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생명 아닌 것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빼꼼히 하니까 불신자들이, 악마들이 ‘관 닫아라!’ 이렇게 하거든요. 이걸 핍박이라 하는 거예요. 이걸 고난이라 해요. 저거 잘라버려. 직장에서 잘라버려. 이걸 핍박과 고난이라 하는 거예요. 뭐 잘려봤자... 잘리면 빼꼼히 웃다가 찡그린 얼굴 되는 거예요. 이게 생명이에요. 이게 생명이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고유성은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나의 고유성, 나의 층, 단단한 수정같이 다이아몬드같이 암석같이 단단한 나는 천조각으로 만든 인형처럼 생각해서 이미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유월절이라는 것은 양을 보는 거예요,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양 죽을 때 너도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너의 고유성은 내가 묻거나 따지거나 신경 쓰지도 않는 거예요. 양이 죽음으로써 양 죽음이 내 죽음을 대신해서 피를 발라놨다 이 말이죠. 피가 발린 거예요. 그러면 양의 죽음 안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이미 죽은 가족이 되어버려요, 죽은 가족. 전부다 좀비처럼 이미 죽은 가족이 되고 말아요.

아까 그랬잖아요. 인간이 죽으면 모른다고 했죠. 그런데 유월절을 통해서 아는 것은 죽음 다음에 본 내용이 뭐냐. 역사적으로 봐서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된지 몰라요. 인간은 살아있을 때 방식만 고집하고 그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몰라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자가 애굽에 있는 맏이들을 다 죽이잖아요. 애굽 사람들 다 죽이잖아요, 맏이들을. 아, 이 동네가 이게 역사적 동네가 아니고 묵시의 동네구나. 죽이는 동네구나. 생명이 아닌 것은 다 죽이는 동네. 우리는 거기에 19xx년도에 태어났습니다. 주민등록 보면 나오죠? 죽음의 동네에서 태어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십자가의 의미를 최후의 만찬이라 흔히 부르는 그 식사시간에 제자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분해해버려요. 떡을 주면서 그 떡과 자기 몸을 일치시키고 그 포도주와 자기의 피를 일치시켜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자들아, 내 몸과 동일시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내 언약 속에 못 들어온다. 나처럼 묵시적 존재의 몸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안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째든 간에 자기 택한 백성을 더도 덜도 말고 예수님 몸만 같아라. 핍박 받는 몸, 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버림받은 몸. 그 몸만 같아라, 에요. 그게 바로 212페이지에 나옵니다. p.212 밑에서 8번째 줄에,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

인자라는 몸의 전 역사로 소급하니까 묵시에 의한 역사성이라 보면 되죠, 역사성이 소급하여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 “땅의 세계는 ‘색출의 현장’이 되고 영적 전쟁” 천사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죠. 마하나임이 하나님의 군대라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거예요. 천사의 기능과 역할을 이스라엘, 성도가 인수인계 받은 겁니다. 묵시적 존재가 되었으니까.

“영적 전쟁의 주력들은 각기 자기 사람들을 호출해내면서” 짐승의 표와 어린양의 표가 서로 식별되죠. 식별된다. 판명되면서 이 판명이 명석으로 이어져요. ‘아, 저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았구나. 666이구나. 그럼 나는 아니다.’ 이것이 살아가면서 명석,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죠. 우리는 이 기능을 받은 거예요. 이것은 역사가 아니고 역사성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역사가 없어요. 묵시가 우리에게 허락한 역사성이죠, 역사성.

역사성인데 역사라는 말은 그럼 왜 하느냐. 역사 속에 포함된 안감이기 때문에. 역사에 포함된 내재면. 묵시세계와 역사의 경계면인 내재면 또는 안감이기 때문에 역사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어요.

요셉이 실제로 국무총리 되었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역사성이지만 세상 보기에는 역사잖아요.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왔죠. 사람들이 보기에는 역사지만 우리 보기에는 역사성이죠.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죽은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죽은 걸로 봤어요. 하지만 스데반 집사 본인은 뭡니까? 죽기 전에도 자기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묵시적 존재에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가서 순교당하잖아요. 그러면 사도 바울 자기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죽는 것은 원래부터 십자가 못 박혔기 때문에 그 못 박힌 것이, 성도로 판명 난 것이 보다 명확하게 되는 그러한 순간이 왔을 뿐이에요, 죽는 순간이. 이미 판명 난 것이, 결론 난 것이 명석, 명확하게 될 뿐이라니까요. 또렷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p.212 제일 밑에 봅시다. “구약의 종말 예언과 사람들의 시간 인식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이유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안목에서는 종말 자체가 철저하게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에서 종말이 나온다는 것은 역사에서 나오는 종말 개념이 또 따로 있어요. 지층에서 나오는 종말 개념.

아까 후딱 설명했는데 다시 한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으니까 역사로 딱 다지잖아요. 그러면 지층이 되겠죠. 단단한 층이 되겠죠. 남들은 또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잖아요. 전부다 역사 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은 역사가 층층이 자기 층, 자기 층,... 지층의 지질대를 이루는 거예요. 너는 나한테 간섭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이렇게 가는 겁니다.

가는데 역사가 지층으로 가면서 나중에 점선으로 미래를 표시해서 마지막 때가 되면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했을 때, 이 점선으로 사이에 뭐가 없어졌습니까? 주님한테는 있는데 인간한테는 없는 게 뭐에요? 내가 나한테 버림받은 것이 없죠.

지난 수요설교가 뭡니까? 이 더러운 세상에서 나 혼자 벗어나서 구원받는 게 구원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나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나로부터. 그게 나라호. (누리호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라는 호. ‘나’라는 이 우주선. 이거 궤도에 못 올리고 그냥 떨어진 거예요. 아이고, 적합하게 또 일이 벌어졌네. 나라는 호, 이 우주선은 궤도에 올리지를 못했어요. 천국에 못 올라가요. 그냥 희망사항이에요. 돈 2조나 퍼들여가면서 했는데.

뭐 달에 올라가면 뭐합니까? 달에 올라간 인간이 맨 역사적 인간인데. 천국을 가야지, 달에 가는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달에 가서 늙어 죽을려고 하는 거예요? 달에 가서 늙어 죽으나 목성에 가서 늙어 죽으나 지구에서 늙어 죽으나 삼풍백화점 아래에서 깔려 죽으나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아까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있으면 자기 주위에 바로 가족들, 남편, 손자, 아들, 모두 못 벗어나요. 벗어나지를 못해요. 여기다가 아까 지고지순한 사랑, 온 사랑을 다 가족에게 해주는 거예요, 가족에게. 가족은 나의 행복. 내가 몸 바칠 곳은 내 가족밖에 없다.

이게 바로 나와 나의 동일시에요. 나와 나를 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내 몸과 나를 일치시키는데 일치가 안 돼요. 이게 결핍이 생기거든요. 내 몸이 나하고 일치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몸은 다른 분이 다루기 때문에 일치가 안 돼요. 마음 같으면 머리 새로 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안 나요. 동영상 보면 훤한데 안 난다고요.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살아있으려면 나는 항상 내가 이 땅에서 주님처럼 버림받는 모습으로 보여져야 돼요.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지층에서 나온 종말 있죠, 종말. 이 종말은 버림받음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종말을 종교적 감수성으로 보는 거예요. 이건 아무 의미 없어요.

책 편집하시면서 앞에 있는 그 시 보셨죠? 종교적 감수성으로 나대는데 사람들은 나보고 신앙 좋다고 말들을 한다. 종교적 감수성, 이게 신앙 좋은 겁니까? 실제로 누가 버림받았는데요? 내가 왜 나를 요리하고 레시피에 집어넣고 하는 겁니까? 내가 왜 코팅하고 난리에요? 난 아무것도 아닌데 난 버림받아야 되는데 왜 나한테 그렇게 정성을 쏟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는 거예요?

천국의 언약적 계열이 와요, 언약적 계열. 야곱에게 있었던 경험, 이삭에게 있었던 경험,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경험들 있잖아요. 그 경험들이 한 계열을 이뤄요. 탕자 계열, 불의한 청지기 계열. 세리와 창기의 계열. 지난 강남강의 때 했잖아요, 세리와 창기의 계열.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계열. 더 이상 망할 자리가 없는 사람들. 그런 계열.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오게 되면 이미 어린 양의 경험에 따르는 새로운 진짜 완료된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우리는 생명의 결정체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한번 해보세요. 부끄러워서 못합니까? 앞으로 이거 해놓고 버림받아야 돼요. 함부로 이거 하면 안돼요. 버림받아야 돼요, 세상으로부터.

생명의 결정체. 추가될 필요 없어요. 착한 일 할 이유가 없어요. 착한 일할 당사자가 죽어버렸는데. 착한 일 할 게 없어요. 천사가 착합니까? 천사는 착하다 하지 않죠. 착하고 나쁜 것은 선악체제에서 나온 것이고 천사는 착한 게 아니에요. 그냥 주의 일을 할 뿐이죠. 천사가 천사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일을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였어요. 자꾸 사도 바울 보지 말고 ‘예수님’을 크게 쓰고 ‘사도’는 아주 작게 써야 돼요. 예수님의 끄트머리, 예수님이 함께 들어있는 인형. 속에 예수님이 들어계신 분.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움직일 때마다 주와 함께 움직이는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은 절대로 이 땅에서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내 일에, 내 구원에 신경써버리면 누가 가리워집니까? 생명이 생명도 아닌 것에 가리워지고 감추어지니까 생명이 가만히 있겠어요? 뒤통수 쳐버리죠. “주여, 제가 뭐 잘못되었습니까?” 이렇게 주님께 대들면 “너는 ‘잘했다, 잘못했다’라고 이야기할 잽도 아니야. 너는 그럴 필요조차 없는데 왜 자꾸 잘했다, 못했다를 네가 왜 그걸... 따지냐, 지금?!” 따질 필요도 없는 걸 왜 따져요.

그래서 여기 보면 종말은 인간이 기다리는 게 아니고 인자(人子)의 몸과 관련된다. (p.213 3번째 줄, “이는 종말이 십자가 지신 인자의 몸과 관련지어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몸과 관련지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자의 몸에 의해서 종말과 관련지어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야기해봅시다. 인간들의 역사, 유대 역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종말론과 예수님 자신의 오심, 다 이루어진 생명 자체의 종말론 사이에 결국 누가 옳은, 바른 종말론이냐. 어느 계열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계열이냐. 그 투쟁현장에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들을 거기다가 투입시키는 겁니다. 야곱에게 찾아온 하나의 천사처럼. 우리도 미끄럼틀 한번 탈까요? 우리 몸에 성령이 그냥 미끄럼틀 타고 내려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래서 우리 있는 어떤 몸이든 어떤 형편이든 간에 그냥 주님한테 양도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하나의 계열이 돼요. 층이 아니고 계열. 그래서 여기 p.213 위에서 5번째 줄에,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 사이에 계시적 연결은, 시간적인 계기로 가능하지 않다.” 시간적 계기는 역사죠. 역사로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역사로 가능하지 않죠. 과거의 기억과 관련이 없어요. 오늘 이 시간이 새로운 시간. 항상 주께서 새롭게 일하고 계시고 주님이 지금도 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주께서는 확인시켜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음을 우리 자신의 일만 생각하다보니 잊어버리고 놓쳐버렸습니다. 이제는 딱딱한 내 것 고집하지 말고 이제는 열심히 천사처럼 주께서 선택한 대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나타낼 수 있는 이미 생명됨 그 자체인 것을 우리가 감사하면서 이 땅에서 자유롭게 우리 일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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