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4.이스라엘의 이질성

아빠와 함께 2021. 9. 26. 18:02

광주강의20210924a 민수기 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성)-이 근호 목사

211페이지 중간부터 ‘짐승’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짐승. 원래 창세기 1장에서 짐승은 인간들과 더불어 6일째 만들어졌고 인간하고 별로 관계없다고 여겼는데 창세기 2장에서 지혜로운 짐승 중 하나인 뱀이 인간의 운명에 결정타를 날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과 짐승은 사이가 안 좋아지겠죠.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망가짐 속에 짐승의 관여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여기 지금 우리가 하는 게 다니엘이잖아요. 다니엘에서는 ‘바다에서 온 짐승’에 대해서 또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라는 의미는 ‘실체(實體, substance)’가 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실재(實在, reality)’다. 또 다른 말로는 ‘실제(實際, actuality)’로 있다. 진짜로 있다. 없는 게 아니고 진짜로 있다. 이 ‘실체, 실재, 실제’, 왜 이런 단어를 쓰는가.

‘실체(實體, substance)’는 누구한테 쓰느냐 하면 이 세상을 사는 인간들에게, 인간이 실체가 있다, 팔, 다리가 있다, 실체. 눈에 보이는 것 있죠, 물질 덩어리, 이것을 실체라고 합니다.

‘실재(實在, reality)’는 인간들이 모여 살며 거기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들을 묶어주는 뭔가가 있는 거예요, 묶어주는 것. 정(情) 또는 사랑 그리고 슬픔. 자, 슬프면 눈물 나죠. 눈물은 물방울이라는 실체가 있죠. 실체가 있는데 슬픔은 어디 있죠? 눈물은 있는데 슬픔은 어디 있죠? 그것은 실재한다고 하는 거예요.

‘실제(實際, actuality)’로 있다는 것은 여러분 다 알다시피 진짜 눈에 보이는 식으로 만지면 만져지는 식으로 거기에 있다. 이게 실제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설명할 때 실체, 실재, 실제,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받아들여야 됩니다.

짐승도 마찬가지죠. 짐승에는 실체가 있고 그러니까 욥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여호와 앞에 섰을 때 누가 옵니까? 그때 마귀도 여호와의 회의장면에 그대로 참석하죠. 여호수아서에도 마찬가지로 여호수아가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사탄이 있죠. 미가야 선지자 때도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악마의 실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실체는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실제 세계에는 없고 실재 세계, 여기에 있어요. ‘실재’를 2번이라 하고 ‘실제’를 3번이라 하면 2번 세계에, 실재 세계에, 영어로 하면 reality가 되는데 실재 세계에 악마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 본 사람은 ‘1번-실체’는 인정한다, ‘2번-실재’는 그냥 무시하고, ‘3번-실제’를 굉장히 믿습니다, 3번을. 예를 들어서 ‘돈이 있어야 산다’고 할 때 이 ‘산다’가 실재에요. 2번이에요. 그런데 돈은 1번과 3번입니다. 돈은 1번과 3번이죠.

집안에 형님들이 “통닭 사 온나. 내가 집에 가서 돈 줄게.” 그래서 통닭 맛있게 먹고 난 뒤에 집에 갔는데 돈 주던가요, 안 주던가요? 돈 안 주죠. 실제로 통닭 먹고 맛있었는데 ‘맛있다’하는 것은 실재거든요, 있었는데 이 3번, 실제 돈은 안 줘요. 아이고, 뭐 형제 간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잊어버리죠. 그 전에 내가 많이 샀잖아, 이런 식으로 잊어버리죠.

그래서 이렇게 구분하는 세 가지를 한꺼번에 이야기합시다.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것이 ‘있다’가 돼요. ‘있다’가 되니까 ‘있다’의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없다’가 되죠.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1번(실체), 2번(실재), 3번(실제)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없다’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요. ‘없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겁니다.

인간이 ‘있다’만 생각하다가 인간이 없을 때가 있어요. 언제 없어지느냐 하면......, 여러분 잘 아시겠죠? 인간이 없어질 때가 언제죠? 집사님, 인간이 없어질 때가 어떤 때죠? 죽을 때. 죽을 때 인간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성경에서는 인간이 죽어도 3번(실제)은 없는데 2번(실재) 있고 그리고 죽고 난 뒤에 해와 같이 빛나니까 1번(실체)이 있는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거든요. 모세는 1400년 전에, 엘리야는 80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인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 산에 올라가니까 죽었다고 알았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어떻게 되었어요? 뭐와 같이 빛난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요. 도대체 어떤 화장품을 써야 그 정도 빛납니까? 해같이 빛나요, 해같이.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실체로 보고 예수님이 실제로 있다고 봤는데 막상 예수님의 실재, 2번, 이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몰랐던 거예요.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못 봤느냐 하면 자기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신앙인은 있다+없음, ‘없음’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생긴 거예요, 세상이 보기에 죽고 나니까 본인이 없잖아요. 있다+없음까지 볼 줄 아는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장로님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신앙이 있다는 것이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죠? 최고죠? 장로님한테 묻습니다. 어떻습니까? ‘있다’만 알던 인생, 70,80 인생보다 ‘없다’까지 아울러서 이것을 파악하니까 어때요? 이게 인생성공 아닙니까? 인간승리 아니에요? 그런 생각 좀 들죠?

그럼 이것이 인간승리라면, 우리 인생이 성공한 거라면 이 ‘있다’의 세계가 망해도 거기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과는 족히 비교도 안 되니까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평생을 눈치 보며 살아왔잖아요, 평생을. 집 안에 형님 눈치 봤죠. 아래 동생에 또 자식한테 눈치 보죠. 이웃 사람 눈치 보죠. 의사나 또는 의료계에 있다면 환자들 눈치 보죠.

평생을 눈치 보고 살아왔잖아요. 눈치 보면 볼수록 그 눈치 본 것에 대해서 그 사람들에게 내가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헛짓들을 해왔습니까? 부질없는 짓들을 한 거예요. 나한테 눈치 주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온 근심과 걱정이 뭐냐? 남들의 요구에 맞춰주느라 생긴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한방으로 정리해버려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가 아니다’로 나를 설명해야 돼요. 나는 ~가 아니다. 나는 아니다. 그렇게 설명해야 됩니다.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인간 아니다’가 되려면 항상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그것이 우리의 있음의 바탕이 되어야 돼요.

그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있음+없음인데 ‘없음’을 ‘있음’ 밑에 집어넣읍시다. 그러면 ‘없음’이 하나의 기초가 되어가지고 그 위에 ‘있음’으로 건물을 세우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마태복음 7장 끝에 나옵니다, 산상수훈 끝에.

둘다 삼층집이다 이 말이에요. 둘다 튼튼해 보이죠. 그런데 진짜 그 집이 무너질 집인지 안 무너질 집인지는 겉멋 든, 겉에 드러난 1층, 2층, 3층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것, 없어 보이는 것, 그 기초가 모래 위에 집은 집이냐 아니면 돌 위에 지은 집이냐, 그것으로 판정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초는 무시하고 그럴싸해보이게 남들에게 맞추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려고 기초가 안 된데다가 무리하게 1층, 2층, 3층, 4층,... 계속해서 타인을 모방하면서 흉내 내는 인생을 그런 식으로 얼마나 살아왔습니까. 피곤하지도 않아요? 남 비위 맞춘다고 피곤하지도 않습니까?

남 눈치 보는 게 그렇게 피곤해요. 그런데 그걸 남 탓하지 마세요. 바로 우리 자신이 없음으로 자꾸 돌아가야 되는데 이게 안 돌아가니까 지나가는 개나 소, 귀신들이 다 집적거리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물론 배후에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만.

한번 정리해봅시다. 모든 걱정, 근심은 어디서 오는가. ‘모든 근심은 내가 보인다는 데서 온다.’ 내가 안 보이면 근심도 없는데 자꾸 내가 보여요. 내가 보인다는 말은 안 보이는 주님은 있으나 마나하다는 그런 식이거든요, 내가 보이니까. ‘내가 신경 많이 쓰인다’는 말은 ‘주님은 전혀 신경 안 쓰인다’ 그런 뜻이에요, 내가 보이니까. 보이니까 공격을 대비해서 지키기에 들어가죠. 방어에 들어가는 거예요, 방어에.

이강인이라는 축구 선수 알아요? 이강인. 나이는 어린데 잘 하는 선수 있어요. 이강인이라는 선수가 만약에 어제부로 죽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강인이 뛰는 프로 축구 못 볼 거예요. 그런데 이강인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얼마 전엔가 한 골 넣었거든요, 그러니까 이강인이 또 축구할 때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중계방송 보겠어요, 안 보겠어요? 보겠죠. 그러면 열한 선수 있는데 누구에게 주목하겠습니까? 자기가 응원하는 이강인과 한 몸 되어가지고 자기를 방어하는 거예요. 자기를 방어하는 거예요.

만약 오늘 오전에 문재인이 죽었다면 또는 윤석열이 죽었다면, 또 한쪽 편만 든다고 하니까, 홍준표 죽었다면 그동안 홍준표, 홍준표 하던 사람들 어떻게 됩니까? 홍준표 죽으면 게임 끝나죠. 그러니까 홍준표나 윤석열이나 이재명이나 그런 사람을 응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응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보이고 이 보이는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 하다보면 자꾸 놓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놓치는 것 중 하나가 예수님에 대해서요, 예수님은 대선후보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왕이라고 해요, 왕. 대통령은 백성들이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왕은 왕이 백성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왕이 마음에 안 들잖아요? ‘저 놈 죽여라’ 하면 그냥 죽는 거예요. 이게 왕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대선후보입니까 아니면 왕이에요?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 왕이거든요. 왕이 있는데 왜 백성이 걱정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선후보로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아, 우리 예수님, 정치 잘 해야 될 텐데. 쓸데없이...... 예수님은 정치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냥 왕이라니까요, 왕!

인간은 국민이고 싶은 거예요, 국민. 국민의 특징은 대통령을 선택할 수 있는 표를 갖고 있다는 것. 국민이 주권을 갖고 있고 그 주권에 의해서 대통령이 4년 동안 행정하도록 선택할 권한이 있다는 게 국민이잖아요. 주님은 이 국민을 없애버리고 백성으로 바꾸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 현대사회를 너무 오래 살다보니 왕을 잊어버렸어요, 왕. 왕이 없으니까 뭐가 도드라지듯 특출나게 주장되느냐 하면 나의 주장이 등장하는 거예요, 나의 주장이. 나의 주장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대선 후보이기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면 당신에게 표 찍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 집안 잘 되게 해주면 내가 교회 가 줄게’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오래하면 뭐 합니까? 성경에서 제일 기본 되는 것, 본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데요. 본인은 국민이 아닙니다. 내 인생을 선택할 결정권이 국민에게는 있는데 백성에게는 이미 그것이 없어요.

빈자리를 좀(please) 만드세요. 여기 ‘좀’이라는 말은 please라고 되어 있지만 쪼옴~~~ 내 안에 내 중심 안을 비워 놓으세요. 내 안에 나로 꽉 채우지 마시고요. 비워 놔야 돼요. 빈 자리가 있어줘야 이게 국민이 아니고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왕이신 예수님은 왜 우리를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이미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왕이 있어요. 이 왕이 누구냐 하면 바로 짐승이고 우리는 짐승의 백성입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왕 노릇한다. 죄라는 것은 실재로 봐서는 죄이지만 실체로 봐서는 이게 악마거든요. 1번, 2번, 3번 했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걱정거리와 근심이 있다는 것은 내가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내가 나한테 의식이 돼서 그래요. 내가 실체적으로 혼자 있는 거예요. 실체적으로 혼자 있는 겁니다. 집 안에 네 식구가 있는데 세 명이 나갔다. 그럼 몇 명 남았습니까? 두 명 되어야죠. 하나는 왕 되신 주님과 그리고 백성 된 나. 관계가 견지, 유지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4명 있다가 3명 빠지니까 나 혼자 있다는 거예요. 이번 추석 때 나 혼자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추석 때 혼자 있었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었죠.

이미 악마가 우리를 백성으로 다룹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의식을 줘요, 의식. ‘안다’고 할 때 정확하게는 인식인데 ‘인식’이라는 말이 더 어려우니까 ‘의식’을 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계속 검사하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이런 거예요. 악마가 우리에게 의식을 줘버리면 이걸 ‘안다’고 해요, 안다. 선악을 안다, 이렇게 되거든요. 악마가 인간에게 의식을 줄 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의식을 준 겁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의식을 주는데 그것을 선악의 체계, 구조로 줬어요. 악마가 우리에게 의식을 준 거예요. 의식을 줘가지고 뭘 한다고 했습니까? 관찰을 하게 되죠. 두리번 살피죠. 이번 추석에 누가 몇 명 왔다갔다 하느냐 또는 이번 아들 장가 보내는데 손님 누가 얼마 냈나, 이런 거요. 우리 장례식 하는데 누가 부조 얼마 냈고 관찰하잖아요. 이번 가을에 벌초하는데 우리 형제 가운데 누가 벌초했나, 이런 거. 관찰하는 거예요, 모든 게. 관찰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아니까 보는 거예요.

관찰하니까 여기서 현실이 발생하는 겁니다. 누구의 현실입니까? 내가 관찰해서 만든 현실이잖아요, 내가 관찰해서 만든 현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유동성자금, 경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유동성자금, 움직이는 자금. 이것은 미국의 은행 준비위원회에서 어떻게 이자율을 하느냐에 따라 유동성자금이 빠지고 들어오고 한다고요. 채권, 주식 다 포함되겠죠.

‘중국의 2대 부동산기업이 파산함으로 말미암아 유동성자금도 불안하다’고 뉴스의 아나운서가 멘트를 했을 때, 이 유동성자금과 중국의 대기업이 파산한 것과의 관련성을 우리가 모른다고 한다면 뉴스가 하는 말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중국기업이 파산하는데 왜 미국에서 기업에 주는 이자율을 더 높이려고 하느냐, 높이는 논리를 모르게 된다면, 지금 우리 배운대로, 어떤 사람이 전공분야가 아니라서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 속에 유동성자금이라는 이 단어, 어휘가 그 현실 속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으면 그 사람은 경제 분야에서 무식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무식한 인간. 무식하게 되면 사기를 당해요, 결국은.

예를 들겠습니다. 열여섯 살 때 집에서 가출했습니다. 가출한 이유가, 엄마는 “내가 뼈 빠지게 돈 벌어 줄 테니까 학원 다니고 그래서 대학가라. 퇴학 당했지만 검정고시 쳐서 대학 들어가라.” 할 때 열여섯 살 먹은 애가 하는 말이 “엄마는 엄마 편한대로 살고 나는 나 편한대로 살겠다. 난 공부하기 싫어. 학원 가기 싫어. 나는 중국집에서 배달하고 이렇게 살래. 이게 편해.”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입니다.

그걸 한번 집어넣어보세요. 인간에게는 뭘 줬다? 의식을 줬다. 의식을 주면 관찰을 하죠. 관찰할 때는 뭐로 합니까? 선악으로 하죠. 그 가출한 애한테 선은 뭡니까? 지 몸 편한 거예요. 자기 행복이에요. 지 편한 거죠. 학원 가서 하기 싫은 공부하는 것보다도 그냥 배달해서 월급 받아가지고 나이트클럽가고 이런 게 더 편한 거예요. 이게 선이고 악은 엄마 잔소리가 악이 되겠죠. 며칠 전에, 게임한다고 자기 할머니 죽인 사람 있잖아요, 십대가. 의식해서 그 다음에 어디 재밌는 거 없는가, 관찰하겠죠. 가출해가지고. 똑같은 애들 만나서 관찰하면 현실이 발생되죠.

그 애의 현실 안에 유동성자금, 미국 준비은행, 그런 단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럼 이건 무식한 게 되죠. 지금 뉴스에 나온다고요. 뉴스는 실체요, 실제요, 현실 그 자체에요, 9시 뉴스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얘는 그건 몰라도 난 행복할 수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경제흐름이 섞여가지고 한국경제가 무너지게 되면 얘가 다니는 중국집이 문 닫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지는 어디 가서 돈 법니까? 본인은 사기를 안 당했는데 결국은 뒷북치다가 중국집 주인이, 이거 전부다 지어낸 이야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야, 이거 인수하라고 할 때 중국집 주인은 아는 거예요. 주식 좀 하고 경제 좀 알다 보니까 아, 이 동네 공장이 확 빠지고, 공장 빠지면 중국집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고 부동산 안 되는 거 알죠. 그런데 그거 숨기고 애한테 ‘너희 엄마한테 돈 받아서 인수해라. 네가 너한테 권리금 안 받고 넘겨줄게.’ 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죠. 왜? 유동성자금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중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현실 속에 그런 게 없죠.

쉽게 말해서 무식한 거죠. 무식은 반드시 사회에서 그 사람을 그냥 둔다, 안 둔다? 무식한 사람에게 반드시 사기 치게 되어 있어요. 이 사회가 그런 사회입니다. 걔는요, 혼자 편한 게 행복이라 여겪죠, 혼자 편한 게. 세상이 죄의 왕 노릇 속에 같이 돌아갑니다.

또 하나 예를 들까요? 요새도 그런 방송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로또 생중계하는 방송 있었잖아요, 옛날에. SBS에서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때 그거 어떻게 뽑죠? 동그란 통 안에 36번, 18번, 25번, 7번,... 있죠. 저는 로또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바람 불어서 로또가 내 얼굴을 치지도 않았어요. 2번, 5번, 46번 있을 거 아닙니까. 자, 이 번호 볼을 넣어서 돌리죠. 돌릴 때 5번, 7번 바깥에 따로 있습니까? 같이 섞이죠. 섞입니다.

그런데 7번, 28번 개개인이 알고 있는 현실과 지식과 무식함의 정도는 같습니까, 달라요? 다 다르죠. 네가 경제학 박사가 되든 철학 박사가 되든 안 그러면 네가 농사 짓든 고기 잡든 관계없이 세상은 한데 섞여 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섞일 때 섞이는 이 세상은 누가 관찰한 겁니까? 이건 바로 악마가 관찰한 세상, 악마가 만든 세상이에요, 악마가.

그래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좀 벌면 지가 재주 있어서 번 게 아니고 지식이 많아서 번 게 아니고 복불복이에요. 운빨이 되어서 그래요. 자기가 돈 버는 타이밍이 와서 돈 벌었을 뿐이에요. 아무런 실력은 없습니다. 이게 구약의 전도서에 나옵니다. 타이밍을 주님이 갖고 있지, 인간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울 때 있고 웃을 때 있고 춤출 때 있고 슬퍼할 때 있고 인간은 그 타이밍에 놀아나는 존재에요.

지금까지 제가 얘기한 그걸 한꺼번에 뭐라고 한다? 죄의 백성. 우리는 죄의 백성. 그것을 뭐로 바꿉니까? 의의 백성으로 바꾸는 거예요. 누가? 주님이.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어요? 인간은 어떤 편에 서든 백성이 안 되는 경우는 있기, 없기? 어떤 경우도 백성이 안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악마가 너는 이제 백성 아니야. 너는 자유자야.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하는 거야. 네 운명은 네가 개척하는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가훈, 교훈부터 훌륭한 인간이 되어라. 하는데 참 이게 초등학교 교훈도요. 진선미, 착하고 선하고 뭐 이런 구색 맞추기 하지 말고 노골적으로 딱 이야기하면 돈 버는 게 인간이다. 그렇게 하면 교육청에서 문제 될 거예요. 하여튼 돈 주면 교육청에서 입 닫고... 매사가 돈이에요.

아까 실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한 자로? 실체가 돈. 세상 움직이는 것은 돈입니다. 만약에 제가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할 때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용납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어떤 순간이냐? 나한테 10억 주는 사람이 10억 주고 담배 피울 때. 그래, 담배 피워, 피워, 피워. 돈만 준다면 피워, 피워. 괜찮아. 내가 참지 뭐. 10억 정도는 줘야 돼요. 10만원 같으면 나는 그렇게 안 합니다. 100만원 같으면 고민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세상에다가 주님께서, 너는 죄의 종이다. 죄의 백성이다. 악마의 종이다, 라는 흔적을 계속 남겼던 거예요, 돈 가지고. 광야에서 예수님 시험할 때 악마가 제일 먼저 제시한 게 뭐에요? 떡이잖아요. 그 당시가 농경시대이기 때문에 떡은 곧 돈입니다, 돈. 그다음에 인기, 세상권력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악마의 카드에요. 악마가 쓰는 조커 카드에요, 에이스 카드라고요. 악마의 무기에요. 꼼짝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분이에요. ‘주님은 모든 실패를 겪었던 분’. 주님은 실체요, 주님은 실재를 알고 주님은 실제로 오신 분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서 뭘 했습니까? 모든 실패를 겪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과 히브리서 5장에 나오는 거예요.

내가 너희 아픔을 안다. 왜? 내가 겪었으니까. 내가 너희 억울함도 안다. 왜? 내가 겪었으니까. 내가 너희의 서러움과 눈물을 안다. 왜? 내가 겪었으니까. 네가 겪는 세상에 나도 다녀갔기 때문에. 나는 능히 너희들을 구원하는 그 비법을 하늘에서가 아니라 직접 땅에 온 하나님으로서 그걸 다 익히 알고 있어요.

이제 우리가 알 것은 주께서 구원하시는 그 비법이라는 것, 그 방식. 궁금해요? 이것을 설명하는데 굉장히 좀 난해합니다마는 어째든 주님께서 이 방법을 아시니까 인간은 죄의 백성, 죄의 종에 있어서 왕의 위세를 당해낼 수가 없어요. 악마는 왕인데요.

악마는 의식을 주었다. 의식에서 선악체계를 주었고 그다음에 인간은 관찰을 해서 나름대로 자기만의 현실관을 가지고 결국은 죽죠. 이게 7번이고 8번이고 35번이고 이런데 전체를 몰라요, 인간은.

그런데 주님은 인간에게 무의식을 줘요. 무의식은 욕망이거든요. 욕망은 내가 나를 선택할 수가 없어요. 이게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에다 무엇을 심느냐 하면 생명을 줘요. 생명을 줘버립니다. 생명을 줘버리면 내가 관찰하는 게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관찰해서 엘리야와 모세처럼 하나님 나라를 지금 현실화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현실화시키는 작업을 해요. 생명을 줘버려요, 생명을.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겪었다? 예수님은 한두 명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실패를 다 겪었다. 이것을 생명에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생명이란 어디서 오는가. 바로 나의 실패에서 오는 거예요, 나의 실패. 선악 의식을 갖고 있는 나의 실패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왕이죠. 자기 택한 백성에게만 해당됩니다. 왕은 택하고 선택하고 뽑아낼 권한이 있어요.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의식을, 자기의 요구를, 주님의 뜻, 아버지의 뜻을, 율법 완성을 생명에 심어놓는데 우리의 껍데기는 악마로부터 받은 선악의 껍데기잖아요. 선악관점에서 우리를 실패로 만드는 거예요, 실패로. 실패로 해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율법이 와서 율법대로 못 사니까 우리는 실패한 자에요. 율법대로 못 살면 실패한 자입니다, 율법대로 못 살면.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5장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거기’라는 것은 옥(獄)이거든요, 감옥.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결단코.

그러니까 우리는 잘난 체해도 율법 앞에서 실패자죠. 실패자는 자기 목적이 없어야 돼요. 자기한테 기대 걸 게 없어야 돼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이런 실패한 경험까지 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이건 과거가 완전히 다 삭제되는 거죠. delete. 내 뜻대로 마옵시고.

자,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예수님에게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없다고 여기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가룟유다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내가 죽을게. 가룟유다가 사탄이죠. 가룟유다 보고 사탄이라 불렀다고요. 가룟유다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사탄이라고 불렀잖아요. 베드로보고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항상 주님께서는 그 실재를 보고 이야기한다고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다음에 나온 말이 무슨 말이죠? 아버지의 뜻이죠. 우리도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무엇이 전제로 깔려야 돼요? ‘나는 성공해서는 안 됩니다’가 깔려 있어야 돼요. ‘나는, 내 뜻이, 내 의도와 내 기대와 목적이 성공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흔쾌히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돼요. 내 뜻을 접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 이거 진짜 너무 중요해서 크게 써야 돼요.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나를 남한테 내세울 게 없는 존재로 인정하겠나이다. 나는 미미한 존재. 미미 아시죠? 애들 갖고 노는 인형, 미미.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 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미미한 존재, 있으나 마나한 존재기 때문에. 이걸 전제로 해야 그다음에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말만 그냥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내 쪽에서 남에게 나의 정당함을 내세울 게 있다, 없다? 내세울 게 없게 한 것을 홀가분하고 감사히 여기는 겁니다. 이걸 아까 이야기한대로 두 자로 한다면 백성. 네 자로 하면 백성다움. 일곱 자로 하면 주님의 백성다움. 왕의 백성다움. 이게 백성이에요. 왕이 계신데 내가 왕도 아닌데 내가 주제넘게 나서서 내 인생에 관여할 필요 없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살기를 율법으로 요구받았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서 실패했느냐 하면 나 자체를 주인공으로 여겨서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그렇게 오산을 한 겁니다. 오산을 한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그걸 중점적으로 할 거예요. 그래야 오늘 나오는 이 짐승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식으로 악마의 백성에서 끄집어내느냐 하는 거예요. 그 방식이 뭐냐. 그 방식이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나는 이렇습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자기 방어가 우습죠. 자기 방어가 우스운 거예요.

한 가지 실례를 들면 이렇습니다. 퇴락한 한국, 옛날 한국에 어떤 다방이 하나 있다. 그 다방에 섬에 들어온 지 한 40년 지난 늙은 마담이 있다 합시다. 가만 이야기 들어보니 ‘낭만을 위해서’ 비슷하게 나오는 것 같죠. 그 마담이 평소대로 손님을 맞이한다고 입술 화장을 짙게 했다 합시다.

그럴 때 그 섬에 온 어떤 손님이 “아줌마, 화장을 좀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패션 일에 관여하는데 화장을 이렇게 하고 다른 색깔, 톤으로 하면 좋겠는데.” 이야기하면 그 늙은 나이 60대 된 마담이 뭐라고 합니까? “내비 둬. 내비 둬. 나 이래 살래. 지금 이 나이에 화장 바꾸고......” 패턴대로 습관대로 화장은 하는데 그게 내가 나를 인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가. 내비 둬. 그냥 이래 살래. 이 나이에 뭐 화장 바꾼다고 쌍화탕 시키던 사람이 커피 시키겠어요?

우리의 선악체제에 의해서 자기를 잘난 존재로 자꾸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가 좀 어려운데요. ‘나는 선하다’가 되어버리면 결국 ‘내가 사는 삶은 선하다’가 돼요. 나의 사는 삶은 아까 제가 한 용어로 그 사람이 보는 현실관이에요. 중국집 배달만 하는 현실관. 중국집 배달해서 월급 타는 그게 자기 세계의 전부에요.

유동성자금 그런 거 몰라도 돼. 경제, 과학 이런 거 몰라도 돼. 중국에서 뭐하든 아무 관계 없어. 그냥 짜장면 배달 잘 하고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고 잠은 직원들 자는 방에서 같이 자면 되고. 그게 자기 현실이에요. 이게 아까 로또 번호의 8번이 되고 9번이 되고 42번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나라도 내가 나를 이런 식으로 인정하고 싶다는 거예요. 평생을 일궈온 세상이 이 세상밖에 없는데 이거 좀 안 건드릴 수 없나, 뭐 이런 식으로.

방금 이 이야기를 제가 쉽게 했는데요. 이제 어렵게 하겠습니다. 이걸 어렵게 해줘야 두 번째 강의가 돼요. 이해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밀어붙여요. 자기 조감. 조감(鳥瞰)이라 하는 것은 새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풍경을 조감이라 해요. 조감도라고 하잖아요, 전체를 위에서 보는 것. 자기 조감=자기 이미지를 갖는 것. 그러니까 자기가 만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게 세상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 세상 속에서 나라는 인상, 나의 시그니쳐 있잖아요, 그걸 좋게 보이고 싶은 거예요.

사람이 자기 세계를 다듬는 것은 내가 남한테 흉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름 나는 괜찮은 존재인 것을 조립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애들이 레고랜드 하잖아요. 아버지는 건축가고 엄마는 건축 설계사이고 하지만 애는 아버지가 건축가라도 자기 레고랜드 그게 더 중요한 거예요. 그거 함부로 밟고 지나가면 난리 납니다. 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나의 세계거든요. 이게 소꿉놀이지만 나의 세계라고요. 자기 이미지를 갖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착오입니다. 왜 착오냐 하면 나는 나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스크린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 하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영화관에서 영화 보듯 하는 게 아니고 너와 나를 다 포함하는 전체 세상 자체가 영화의 스크린이에요, 스크린.

스크린 중에 본인의 이미지가 거기서 약간 지금 꿈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한 80년 동안 꿈틀거리다가 90년 되면 죽어버려요. 소멸해버려요. 세상 전체가 하나의 영화막이에요, 영화막. 스크린이라 했는데 어려운 용어로 이걸 지각장(perceptual field)라 해요. 내가 알고 있는, 지각하고 있는 장의 일부에요. 내가 아는 뭘 꽃다발처럼 끌어 모은 게 아니고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전체의 지각장 중에 내가 협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악마가 펼친 짐승의 세계에요. 왜냐하면 악마는 인간을 가지고 자기를 지키기 위한 현실의 지각장을 실제로 펼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죄의 왕 노릇이에요. 악마 본인은 2번, 실재이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보이는 것은 뭐냐. 1번, 실체와 3번, 실제, 이건 보이는 거예요. 인간은 여기서 나름대로 각자 자기 현실이 따로 있고 아파트가 따로 있고 자기 집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체를 합쳐보면 악마가 만든 지각장이에요, 지각장. 현실세계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이걸 주님께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바다라 하는 것은 땅의 사람들에게 그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부재의 세계로 남아있던 거예요. 바다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다고 생각한 데에서 태고 적 실체가 올라온 거예요. ‘태고 적’이라는 말은 p.211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구약 성경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형성된 채 육지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 적’의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태고 적 힘들이 밀려오면서 그 태고 적 힘에 의해서 땅에서 생기는 것이 국가라는 실체에요. 실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땅의 국가가 아니고 여러 국가가 연달아 이어지지만 그걸 대표하는 이름은 바벨론. 219개의 모든 나라가 바벨론에서...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목한 금 신상에서 따로이 현실을 마련한 짐승은 없습니다. 모든 짐승은 그 짐승에서 분화된 거예요. 복제판입니다. 복제물들이에요. 지각장.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다 가짜였다는 것. 이것은 10분 쉬고 왜 그런지 이야기하겠습니다.

 

광주강의20210924b 민수기 25장 3절(이스라엘의 이질성)-이 근호 목사

빈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새로운 창조가 아무것도 발생되지 않습니다. 후벼파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후벼파는 겁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멀쩡할 것 같으면 주께서 그런 작업을 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교회 다니고 세례 받으면 그걸로 끝날 거예요.

‘그냥 교회 다니고 세례 받으세요. 그래가지고 성만찬하게 되면 나중에 천당 갑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파스 붙이듯이 덧붙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훈장 같이. 북한의 장군들 훈장 달아서 옷 늘어지는 것 봤죠?

훈장 달아서 옷 늘어지면 뭐합니까? 목이 잘리는데. 아래쪽에 늘어지면 뭐해요, 목 잘리면 끝나죠. 마찬가지죠.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녀서 뭐하고 직분 맡아도 내게 뭐가 문제냐를 모르고 있으면 그것은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빈 자리로 만들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새로운 창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빈 자리를 채워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 빈 자리 만들기에서 우리보고 ‘빈 자리 만들어라. 자기를 비워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오셔서 주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죄 부분을 끄집어내줘야 돼요. 우리의 빈 자리 만드는 작업까지 주님의 일이에요, 우리의 일이 아니고. 그게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세례 받고 학습 받고 덧붙이는 게 아니고 성령은 반대로 우리의 중앙 부분을 빈 자리로, 싱크홀로 만들죠. 블랙홀로 만들어요. 텅텅 비게 만들어요. 허무죠, 허무. 허무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허무하게 만드는 작업을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두 번째 시간에 말씀 드릴게요.

두 번째 시간에서는 구약에서의 짐승, 물론 다니엘도 구약이지만 다니엘 이전에 구약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짐승 또는 악마는 어떤 일을 했는가. 주님이 어떤 일을 했는가만 알지 마시고 악마가 어떤 일을 했는가를 보셔야 돼요.

그럼 악마가 어떤 일을 할 때 구약에서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를 이스라엘 쪽에서 쓰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가 썼지만. 이 바알세불이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죠. 마태복음 12장 24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바알세불, 바알의 집주인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25절에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얘기하기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아주 정확하게 봤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너는 너의 세계를 따로 건설하려 하는구나. 따로 만들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그 우두머리는 예수 너이고. 이렇게 본 겁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다. 메시아다, 그런 인상이 아니었고 정반대였어요. 우리가 주의를 해야 될, 우리가 경계해야 될, 우리가 기어이 목숨을 제거해도 상관없는, 죽여 버려도 상관없는 작자가 예수다.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옷을 지켜 준 사울이라는 청년의 의식이었습니다. 의식, 이데올로기, 이념이죠.

그 사울이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고 사도 바울이 되죠. 사도가 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핍박한 가운데 사도가 생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는 인간의 선택이 결코 아니올시다. 사도만 그럴까요? 우리가 성도로 선택받은 것은 결국 성도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선택해서는 결코 천국 갈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정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의 실력이나 우리의 결정이나 우리의 학식에, 믿음에 우리가 일체 기대를 걸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선택을 모독하는 거예요.

이 바알세불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신약이거든요. 구약에서는 바알 또는 바알브올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민수기 25장이니까 두 번째 시간에는 그 중심으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릴 게 많아요.

민수기 25장 1절-3절,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다음에 무슨 용어입니까?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되어있죠.

참 이 대목을 보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다 말은 안하는데 전부다 민수기 이 대목, 그 전에 민수기 22장, 23장, 24장을 쭉 보면서 25장까지 보면서 사람들이 말은 안하는데요. 끄집어내진 않는데 찝찝함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채택해가지고 자기가 고용해서 저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뇌물을 줬잖아요. 뇌물을 줬는데 여기에 하나님 여호와가 개입을 해버리니까 심지어 타고 다니는 당나귀한테도 개입해서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저주를 금지하고 오히려 저주해야 될 타이밍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발람 선지자를 스카우트한 발락, 모압 왕은 그냥 돈만 날린 거예요. 그래서 돈 더 줄게, 해도 ‘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그 말 외에는 못한다.’ 라고 한다면 이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입장에서 아군입니까, 적군입니까? 분명히 지금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매개자가 되었으니까 아군 편에 선 것으로 보이죠. 민수기 24장 끝에 보세요. 축복을 해도 발람 선지자가 아주 노래를 지어서 축복을 했거든요.

시간이 좀 가더라도 성경 볼게요. 24장 15절,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16절, 같은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내 말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이 말이죠.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멸하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자기들끼리만 있는 게 아니고 왕이 있다. 홀은 지팡이거든요. 왕이 그들 가운데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에요. 왕이 있다.

왕이 있으면 그 왕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백성은 무너집니까, 안 무너집니까? 무너지지 않죠. 이 말은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곧 왕을 건드리는 거예요. 왕이 그 백성을 책임지는 겁니다. 왕은 자기 칼의 무게를 견뎌내야 돼요. 그만큼 왕은 책임이 막중한 거예요. 그 말은 백성에게 책임이 있다, 없다? 백성한테는 책임이 없어요.

책임감을 느끼는 백성은 그 왕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럼 왕에 의해서 밀어냄을 당하죠.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 밀어내는 작업을 한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오지 마세요!” 하고 밀어내는 거예요. “천국 오면 안돼요. 너는 천국 오기로 작정 안 되었으니까 가세요.” 계속 밀어내요. “주님 믿고 싶어요. 주님 사랑합니다.” “됐습니다. 됐어요. 나 사랑 안 해줘도 돼요. 저리 가세요.” 계속 밀어내는 겁니다.

여기 18절,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 왕이 되는 데에 재료가 되고 밑거름이 된다 이 말이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절,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모든 이방민족은 이제 기다려라. 이스라엘 왕이 너희들을 저주해버릴 것이다.

또 20절에,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아말렉의 운명의 모습이, 전체 이방민족의 운명을 아말렉이 대변해준다 이 말입니다. 이방민족은 어떻게 될까 뭐 따질 것 없어. 아말렉이 어떻게 망하는가를 보면 안다. 그들은 최고였지만 최말단으로 빠지죠. 이게 바로 악마에 속한 세계에 그 마지막 모습을 미리 아말렉이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철저하게 이스라엘은 결국, 이스라엘이 누구하고 싸우기를 좋아한다, 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 되시는 분이 이스라엘 왕이신 분이 이방민족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작심해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싸우는 거니까 이스라엘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돼요. 이방민족이 멸망할 때까지 왕이 싸움을 멈추지 않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죠. 감정의 기복은 사치라고요, 감정의 기복. 이상하게 나 기분 나쁜 것 같아. 갱년기 같아. 이것은 지금 영적 전쟁에서는 아무 따질 필요도 없는 미미한 거예요. 목사님,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화목하지 않아요? 지금 전쟁 중입니다. 지금 전쟁 중이에요. 그거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전쟁 중이에요. 왕을 보세요, 왕을. 백성들끼리 싸우지 말고.

21절에 가인족속도 작살납니다. “또 가인 족속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너의 거처가 견고하니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그러나 가인이 쇠미하리니 나중에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로다 하고” 그리고 24절, “멸망하리로다” 그리고 25절,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이 발락이.

민수기 23장 보겠습니다. 23장 20절,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21절, 결정적이죠.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자, 이방민족은 멸망이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한테는 어떻게 해주느냐 하면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패역을 보지 아니하는 분으로 그들과 함께 동행한다. 창세기부터 민수기 22장까지, 23장까지 읽었던 사람한테는 자신이 이스라엘편이라도 된 양 기분이 막 업 됐죠. 우리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않는 이런 좋은 왕이 있으니 내가 그의 백성이라고 간주한다면 아, 이건 정말 내 인생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막 기분 좋아가지고 사이다 팍, 폭발하듯이 기분 좋을 거예요.

그리고 적들이 발람까지 매수를 해도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그 저주가 저주하는 족족 복으로 변한 거예요. 여러분 그런 경험 많잖아요. 죽어라, 죽어라, 죽으라고 주변 사람들이 막 그렇게 외치는데 천사가 통역자가 되어가지고는 뭐로 들리느냐 하면 잘 되라, 잘 되라, 잘 되라, 제발 플리즈. 제발 잘 되라. 는 식으로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렇게 해주니까 뭐 이건 그대로 민수기 23장의 실현 아닙니까?

민수기 24장 10절에서 발락이 정말 화가 났어요.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발람에게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 함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손뼉을 쳤겠습니까. 답답해가지고 말로 안 되고 뭔가 몸짓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11절,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려가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케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가 그대를 막아 존귀치 못하게 하셨도다” 13절에 보면 “가령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 임의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발람이 신앙인입니까, 신앙인 아닙니까? ①신앙인이다, ②신앙인이 아니다. 지금 민수기에서 24장까지 보면 정말 발람을 스카우트하고 싶어요. 발람을 당회장으로 모시고 싶어요. 진짜 교회 횡재한 거 같아, 이런 분 들어오시면. 이렇게 믿음 좋으면. 왜냐하면 발람 선지자가 대단한 게 아니고 여호와가 함께 있다는 그것 때문에 월급 몇 푼 안주고도 당회장으로 모실 수 있으니...... 아까 돈이 실체라고 했죠, 돈 몇 푼 안주고도 그런 목사 모시면 교인들 주머니에서 많이 나올 것도 없고 자기 집은 자기 집대로 융성하게 될 것이고 교회는 부흥될 것이고 땡잡았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민수기 25장 전까지 오게 되면 신바람 이박사에요. 전부다 룰루랄라 신났어요. 분명히 여기 23장 21절에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잖아요. 분명하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진노. 왜 진노하셨는가? 여기 누가 개입했는가? 호세아 9장 10절에 보니까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세아 9장 10절에 이렇게 너희들은 내가 맺은 열매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렇게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를 유도하게 한 당사자가 누구였다는 말입니까?

민수기 31장 16절에 보면,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누가 꾀었다고요? 발람. 그 믿음 좋아 보이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꾄 거예요. 발람이 고객한테 돈을 받았는데 서비스가 지가 생각해도 좀 불충실한 거예요. 저주하라고 돈 받았는데 축복을 했으니까 미안스럽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스라엘 망하는 방법 이야기해줄까?’ 이렇게 된 거예요.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분명히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잖아요.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죠. 그렇다면 그들이 우상숭배해도 봐줘야지요. 왜 다른 허물은 되고 바알 섬기는 것은 왜 안 됩니까? 뭐 죄의 종류가 다른 겁니까?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건데. 똑같은 죄인데. 다른 죄는 허물도 용서하고 패역도 용서하면서 왜 바알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곧이곧대로 저주를 해버리냐 이 말입니다.

그냥 간단하고 쉬운 문제가 아니겠죠. 그걸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을 기억해야 돼요. 지각장(스크린). 사람들은 자의식, 아까 의식이라 했는데 앞에 자(自)를 넣으면, 자기 의식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볼 때 자기가 관찰로 보는 거예요.

유동성자금이 불어나게 되면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에서 각국 은행에 주는 이자율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경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잖아요. 현실에서 일어나도 지가 보고 싶은 현실 속에서는 내일은 짜장면 몇 그릇 배달해야 되나, 그것만 보이지 유동성자금이 불안하고 세계 경제가 어떻고는 안 보이죠.

인간은 자기가 만든 현실을 주목하고 그래서 하루 일과 보내고 자기 방에 가 주무시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에게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인간은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요. 도대체 몇 년을 살고 얼마나 돌아다녀야 다 알겠습니까.

솔로몬이 모든 세상 지혜를 다 알아도 결국 솔로몬이 안 게 뭐냐. 내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했는데 그걸 모르겠어요. 아무리 공부해도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겠어요.

그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이 문제 있고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네가 몰랐기 때문이에요.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됩니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처럼 관찰해버리면 이 현실에다가 예수님의 강림과 재림을 집어넣어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이여, 우리 가정에 축복을. 이게 뭐에요? 누가 축복 받는지 안 받는지 누가 관찰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일방적으로 내 현실이 잘 되느냐 그걸 관찰하겠다는 거예요.

내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런 건 모르겠고. 그걸 가지고 ‘됐고~’라 해요. 됐고, 알고, 지금 난 그거 관심 없고! 내가 예수 믿고 내 가정, 내 인생이 잘 되느냐 나는 여기에 관심 있고. 이게 인간 사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관찰한다는 말은 내가 비워져야한다는 사실을 지금 놓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무엇에 주목을 해버리면 주목하는 나를 뺄 수가 없어요. 주목하고 있는 나를 내 자리에서 뺄 수가 없다고요.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손님 와서 곧 해산해야 되는데 지는 바둑 티비 보고 있었어요. 그거 보다가 아기 엄마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환자 남편한테 귀싸대기 맞았다는 거예요. 바둑 게임하게 되면 저쪽에서 5초 만에 한 수씩 두는데 나도 같이 덩달아 둬야 기에서 안 밀리거든요. 좀 끄고 나갈라하면 지금까지 30분 바둑 둔 게 아까워서 졌다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두고 있다가, 가만 있어 봐요. 좀 이따 갑니다. 하다가 귀싸대기 맞은 거예요.

이 현실 속에서 자기를 뺄 방법을 몰라요, 인간은. 나를 가위표할 방법을 몰라요. 자살을 해도 안돼요. 자살해도 안돼요. 언제 그런 이야기했죠. 자살은 가장 자기한테 성실했던 순간이라고. 남들에게 나를 과시하는 데에 평생을 정력과 모든 수고를 다하고 ‘나 이런 인간이에요’ 남에게 알리던 그 모든 마지막 남은 여력을 최고로 자기한테 집중해서 쏟는 순간이 번개탄 피우는 순간이에요. 자살하는 순간.

자살은 타인에 대한 복수. 나를 지켜본 너희들에게, 너희들한테 시달렸다는 것에 대한 비겁한 복수죠. 그래, 내가 죽을게. 죽을게. 이게 복수에요. 이놈의 중사, 이놈의 상사. 그래, 여자의 몸으로 군대 왔다. 이게 죄라면 죄구나. 내가 죽을게, 그러면. 그래서 해군 중사, 공군 중사 자살했죠. 자살할 때 그냥 자살 안했죠. 다 일기장 써가지고 어떤 상사가 건드렸는데 그냥 덮었다, 전부다 썼잖아요. 미국의 어떤 해병대는 여군 하나가 성폭행 당해가지고 그 수치심에 자살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800명이 전역했답니다. 처벌 안 받고 800명이 전역했어요. 군대를 그만 뒀어요. 일종의 처벌이긴 하지만.

제가 설교시간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했던 그 노래를 이동원이 불렀지만 가사는 고은이 지었거든요. 고은 시인은 지금 나이가 팔십 가까이 됐는데 미투 운동에 걸려가지고 후배 시인한테 욕 되게 얻어먹고 받은 상 다 잘리고 노벨 문학상 후보감도 다 잘리고 한 사람이에요. 영화배우 여러 명 죽었어요. 감독도 죽고. 복수에요, 자살은.

그런데 성경 로마서 12장 19절에서는 원수 갚는 것은 내게 맡겨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가 자살로 남한테 원수 갚지 마라. 왜냐하면 네 원수가 본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원수면서 어디 남 탓 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나는 당해도 싸, 이런 생각을 인간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내 원수는요, 나를 지키려는 자가 나의 원수에요. 주님은 나를 안 지키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누가 지키려고 해요? 주님은 나를 안 지키려고,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온갖 복음적 지식을 다 끌어 모아가지고 ‘예수 믿고 하면 부활 되죠?’ 그거 누구 좋으라고요? 누구 좋으라고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부활 믿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 좋으라고 믿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가 하는 짓 아닙니까? 그게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 해놓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내가 관찰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있고 내가 관찰한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구멍 난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고 패역을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허물과 패역을 유발시켜 놓고 그걸 구멍내버린 거예요. 구멍을 내버린 거예요. 그걸 누가 한다? 왕 되신 분이 직접 해요, 왕 되시는 분이.

결과적으로는 이미 온전한 이스라엘은 왕 되신 여호와한테 마련되어 있어요. 마련되어 있어가지고 역사적 이스라엘과 주께서 마음 속에 두신 이스라엘과의 차이, 그 차이를 뚜렷이 드러내는 겁니다, 그 차이를.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한 기억이 나는데요. 제가 오르골 이야기했죠. 성도는 본인 자신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주님이 생각한 구원과 내가 생각한 그 구원의 차이를, 택배 차 있잖아요, 1톤 화물차는 그냥 놀러 다니는 게 아니고 뒤에 뭔가 실어야 되죠. 싣는 게 화물차 아닙니까. 화물에 뭘 싣느냐 하면 차이를 싣는 거예요, 차이를. 주님이 생각한 나와 (내가 생각한) 나와의 차이를 싣고 다니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감긴 사람이에요,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 것을 비추려고 했지만 주님이 원하는 것은 너를 둘러친 성령이 보고 싶은 거예요. 너 화물차 택배에 뭐 실었냐? 그걸 보고 싶은 겁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내 주특기 내놓고, 이거 어때요?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한테 하는 행세하고 똑같이 주님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요, 우리 잘난 것, 의 찾으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주님은 죄 없음을 확인하려고 오신 거예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단 말이죠. 그걸 또 다른 사람들에게 써먹지 마세요. “아버지, 저 나무라지 마세요. 목사님 말 들어보면 죄 있는 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아버지나 나나 다 죄인인데 나한테 왜 간섭합니까?” 지금 그렇게 써먹을 게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죄인 됨은 주님께서 직접 파내는 거예요.

“아버지, 잔소리하지 마세요.” 가 아니라 진짜 성령 받았다면 “아버지, 잔소리 가지고 되겠습니까? 저를 밟아주시고 저를 개 취급해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지금 구멍 난, 진짜 주님이 손댄 사람이 된단 말이죠. 이걸 가지고 ‘파편화된 자아’라 해요. 자아는 조립이에요. 자아는 조립된 거예요. 그것도 어설프게 조립돼 가지고 결국은 건드리면 팍! 하고 산산조각 나요. 파편화된 자아 또는 파편화된 인간.

그래서 주님께서는 발람을 이용한 겁니다. 발람은 처음부터 매수된 사람이에요, 모압 왕 발락이. 죄송합니다만 여러분들이 발람 선지자라고 쳐봅시다. 돈은 받아 챙겼지. 제대로 하자를 보수해달라고 했는데, 저 집 좀 망가지라고 저주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근사하게 했으니까 받은 돈을 돌려줄 수는 없고 결국은 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중간에 자기가 받은 것은 뭡니까? 이스라엘은 손대지 마라, 이거였거든요.

그런데 발락이 와서 여호와 말고 스스로 하나님한테 무너지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여기서 발람이 사용한 게 있어요. 그야말로 아까 민수기 31장 16절의 말씀대로 발람이 악한 사람이에요. 여기만 나온 게 아니고 시편 106편 28절 봅시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에 왔습니다. 어떻게 패역도 허물도 보지 않는다 해놓고 주께서 끝까지 한번도 안 봐야지, 왜 이스라엘을 망가뜨려서...... 25장에 보면 24000명 죽였습니다. 우상 섬겨서 바알 제사에 참석해서 이만 사천 명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발람이 중간에 역할을 했는데 발람이 무엇을 이용했는가.

바로 ‘이스라엘의 이질성’.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 아까 그 ‘다르다’가 차이라고 했습니다, 차이. 그 차이성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스스로 못 느끼게 하려면, 차이성은 하나님이 남기고 싶고 기존의 차이성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짜 이스라엘은 파편화되어서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것을 발람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차이성을 모르는 사람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발람 선지자가 사용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꿈쩍도 하지 않는 요소가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을 발람 선지자는 알았어요. 그것은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성, 그것이 언약이죠. 약속의 차이성만큼은 하나님도 절대적으로 사수한다. 차이성이 깨지는 일은 없다. 차라리 이스라엘을 다시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이성만큼은 남긴다.

그걸 신약에 와서는 십자가만 드러낼 수 있다면 기존의 모든 교인들도 잘라낸다는 방식, 원리원칙을 여호와 하나님, 주님은 사용하신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악마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질성, 그 차이성은 뭐냐? 간단하죠. 차이 남을 알지 못하는 차이성이죠. 차이성을 알지 못하는 차이성.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한마디로 말하면 기존의 인간과의 차이성. ‘나는 목자다’가 아니라 너희는 목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자기(예수님)는 목자에요. 요한복음 10장 이야기입니다. 너희 목자는 네가 살려고 하지만 나, 목자는 차이나는 것. 인간은 모두 살려고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차이나는 목자상은 살려고 할까요, 죽으려고 할까요?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저쪽으로 다 보내버리고 예수님 홀로, 모든 인간에게 없는 요소가 예수님이죠. 그 차이성을 아버지의 뜻으로 부여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 본인이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아, 오늘 여러분들 너무 괴롭혀서 미안한데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괴롭힐 의사가 없었는데.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이 나다나엘보고 새로운 규정을 줘요. 네가 이스라엘이다. 그다음에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지금 죽이 맞죠. 뜻이 통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 속에서 인간에게 없는 차이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발견했다’도 되고 주께서 그것을 ‘제공했다’가 돼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했다’가 돼요. 그 해석을 차이 남으로 나다나엘이 받아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51절,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자,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은 어디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야곱이 벧엘에서 잠 잘 때 꿈에 나타났죠. 그렇죠? 꿈에서 나타났잖아요.

‘꿈이 현실이 된다.’ 꿈이 현실이에요. 기존의 현실은 현실이 아닙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꿈에만 보이나봐’ 왜냐하면 너는 꿈속에만 사니까. 김태원이 만든 노래, ‘꿈속에선 보이나 봐’하는 노래 있어요. 꿈에서만 보이나 봐 너는 꿈속에서 사니까. 그러니까 현실에 있는 인간은 주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꿈에만 보이니까.

꿈이 뭐냐 하면 언약이거든요. 약속이거든요. 십자가 안이란 말이죠. 성령 안이거든요. 성령 안에서만 주님이 사시는 겁니다. 주님은 그런데, 그 꿈이 꿈이냐? 꿈이 깨지지 않고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차이성이에요, 이게. 이게 이스라엘의 차이성이라고요.

나다나엘이 기도할 때 기도했겠죠. 그러나 나다나엘에 대해서 ‘간사함이 없다, 네가 뭐하는지 내가 봤다’는 것은 누구 해석입니까? 꿈속에서 계시는 분, 새로운 현실을 꾸려나갈 그 분이 일방적으로 나다나엘에게 해석을 해주는 거예요. 그 해석을 해주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 안의 세계가 네가 생각한 그 세계를 구멍내버리는 거예요. 움켜쥐고 무산시켜버리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뿌사버리다. 뿌셔뿌셔 있잖아요, 라면 튀긴 거. 그냥 뿌사버리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보고 바알세불이라 했죠. 너는 따로이 너의 세계를 구축하러 왔구나. 이 말을 예수님이 들을 만하죠. 왜? 차이성이니까요. 아무리 예수님 해석을 듣고 기적을 봐도 주님 쪽에서 성령으로 내 자아 속에 와서 나를 부숴버리는, 뿌셔뿌셔, 너는 현실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꿈이야. 그게 개꿈이야, 꿈도 개꿈 같죠, 하고 부숴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요. 아까 스크린이 지각장이라 했죠. 지각의 필드, 영역 안에서 인간은 보는 게 아니고 본인이 스크린의 일부이듯이 주님의 세계를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게 아니고 같이 뒤섞여서 로또번호처럼 주님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게 주님의 현실이고 주님의 지각장입니다.

여기서는 누구의 시선이냐? 주님의 시선, 이미 완료된 시선으로서 이미 우리를 차이 나게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내가 모르는 해석을 우리한테 해석하는 겁니다.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너를 인정한다. 그 해석 하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죽지 마라. 남들이 인정 안한다고 그거가지고 서러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인정해주면 되잖아, 내가. 내가 너를 내 사람으로 인정해주면 되잖아.

왜 자꾸 네가 이 예수한테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부질없는 애를 쓰느냐 이 말이죠. 나는 너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정을 해줘버렸는데. 왜냐하면 네 속에 구멍 났으니까. 뚫렸으니까. 네가 빵꾸 났으니까. 너는 걸레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왕, 악마한테 속아 넘어갔다는 그 흔적을 차이 남으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재명한테 속았고 또 윤석열한테 속았고 내가 또 홍준표한테 속았고 나는 이 땅에서 속았고 사기 당했고. 그것만이 내 인생.

그럼 난 이 땅에서 뭐가 돼요? 패배자가 되죠. 패배자가 되게 하신 주님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한테 인정받으면 되는데 자꾸 주님한테도 인정받고 사람한테도 인정받으려 하니까 이 차이 남이 없어져요.

지금 이 교재를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212페이지 위쪽까지 한 거예요. 그런데 글자 틀린 것 하나 고치고 가실게요. p.212 첫 번째 줄, “반복적인 묵시적 힘의 각질은” 각질 알죠, 발뒤꿈치. 각질은 지층화 되어서 계속 벗겨져요.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는(X)-> 표면화되어(O) 올라와” 각질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또 올라오고 해서 “십자가 사건과 만난다.”

일곱째 줄에, “즉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짐승과 친화적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멀쩡하기를 원하고 실패자 되기를 싫어하고 멀쩡한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는 바로 악마가 그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악마가.

아까 했던 이 이야기를 하나의 공식처럼 쓰게 되면 이렇습니다. ‘빈 자리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이만 사천 명이 죽었단 말이에요, 그 바알 제사, 우상 제사에서. 야, 이런 신도 있구나, 이런 멋진 신. 이렇게 우상을 섬겨서 이만 사천 명 죽을 때에 그 바알을 동원하는 것도 주께서 다 아시고, 진짜 이스라엘은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패역을 그냥 용서하시는 이스라엘로 전체적인 지각장을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실제적으로서는 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만 사천 명이 죽어나가는 그 작업이 필수적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발람이 동원되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겁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은 발람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은 이렇게 오해해요. 자기가 이스라엘을 관찰하려고 하는 겁니다. 역시 하나님은... 좋은 나라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멀쩡하다. 하고 자기 안에 아무런 실패의 체험과 실패의 경험이 없어요, 이 안에. 자기가 빈 자리가 없는 게 아니고 괜찮은 나로 꽉꽉 채워져 있어요.

사람이 뭔가 일에 몰두하고 거기에 어떤 기대를 해버리면 자기 안에 빈 자리가 없고 차이가 없어요. 그 목적에 대한 집착과 집념밖에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차지해야지. 이번 주식은 반드시 대박나야 돼. 우리 애는 반드시 잘 되어야 돼. 거기에 무슨 빈 자리가 있습니까? 자아성으로 꽉 차 있는데, 그때는요.

제가 강의하면서 잘못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람들을 쭉 보니까 ‘잘난 척하며 산다-> 죄인이다’ 사람들은 이것까지는 동의를 해요. 잘난 체, 자기 의로 살다가 복음 들었으니까 이제 죄인 되었구나, 여기까지는. 그다음에 나갈 게 뭐냐 하면 ‘->죽은 자’이다, 이것까지는 사람들이 안 나가요. 나가지를 않아.

죄인 되었다는 이것을 관찰해서 죄인 되었다는 이 좋은 것을 자기 안에 중심으로 가져와버려요. 가져오니까 자기는 성공했어. 실패자가 아니라 성공한 거예요. 이런 짓을 누가 잘 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천국 가는 비법을 캐내는데 거의 선수급입니다, 누가 글 쓴 것처럼. 거의 선수급이죠. 역사 속에서 구원받는 구원의 보화를 캐는 방법을 캐내자. 선지자들을 본받아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차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차이가. 가장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가 꽉꽉 채우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유명한 청년 나오죠? 무슨 청년입니까? 부자 청년. 부자 청년은 평생을 자기를 비우고,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우고, 할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마음의 할례까지 모든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도 부족합니까?’ 그랬어요. 아 참, 진짜 중요한 말했어요. 내가 아직도 부족합니까? (마태복음 19장 20절) 여기서 더 뭘 추가해야 내가 영생을 따내는 비법을 가지겠습니까? 아직도 내가 부족합니까? 아직도 내가 부족합니까, 아직도?

그럼 자기는 어디를 주목하고 있어요? 나를 주목하고 있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나’ 사이에 차이가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나’가 곧 ‘내가 원하는 나’가 되고 말았어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님이 생각하는 나’가 엉뚱해야 되거든요, 엉뚱.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그게 나였습니까?’ 오히려 반문할 정도로 낯설어야 돼요.

낯설어야 되는데...... 낯설 정도로 “평소에 내가 무슨 짓을 했지? 헛짓했네요.” “그래, 헛짓했어. 내가 너한테 앞으로 숙제 준다. 계속 헛짓해라.” 이게 숙제에요, 우리에게. 아직 할 헛짓도 많이 남았어. 죽을 때까지 헛짓해야 돼. 헛짓할 때 전에는 억지로 했는데 이제는 즐겁게 헛짓하는 거예요. 그 일이 우린 남아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로서 이미 이 땅에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죽었고 주님이 준비해놓은 나는 하늘나라에 생명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를 여러분들 뒤에 화물칸에다가 싣고 돌아다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된 것을 지금 생각하니까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되고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만이 드러난다는 하나님의 절묘한 장치요, 배치요, 하나의 과정인 것을, 절차인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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