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6.이름없음

아빠와 함께 2021. 11. 28. 08:15

광주강의20211126a 출애굽기 19장 17절(이름없음)-이 근호 목사

p.213 밑에서 6번째 줄부터 하겠습니다. 제목부터 봅시다. “언약과 주체의 발생”. ‘언약과 주체’에서 이 둘 사이에 ‘언약과 인간’이라 해도 되는데 왜 ‘주체’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언약의 안목에서 볼 때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과 주체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죄인으로 있어야 되거든요. 죄인으로 있는 것이 옳거든요, 언약적 입장에서.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죄인으로 있는 게 옳은데 인간들은 자기를 주체로 변장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류(類)가 되죠, 집단. 전체를 보편화시킬 때 인간류 또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는 무엇이 강렬하냐 하면 개별성, 개인성이 상당히 강렬해요. 신처럼 되겠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격화. ‘자아의 신격화’ 이것을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신이 되려면 신이 될 만한 내용들은 다 끌어 모아야 되겠죠, 신이 될 만한 것. 두 가지가 있으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힘이고 또 하나는 장소에요. 힘과 장소가 있으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개를 한번 합쳐보세요. 힘과 장소가 있다는 말에서 장소는 내 장소에요, 내 장소. 내 장소가 남한테 침범을 받지 않으려면 힘으로 중간을 둘러쳐야 되겠죠, 힘으로. 그래야 나는 이 장소 안에서, 뭐 다른 장소까지 욕심낼 필요 없지만 내가 있는 이 장소만큼은 내가 신으로 살고 싶다. 이게 바로 주체가 겨냥하는 것 또는 바라보는 것이고 이런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 또는 주체는 역시 개인이에요. 여기서도 개별성이죠. 언약의 주체는 이름을 갖고 있어요.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 또는 주의 이름. 언약에는 언약의 실시자가 따로 있다는 뜻에서 언약과 하나님의 이름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같이 있어요.

언약이 있는 곳에 주의 이름이 있고 주의 이름이 있으면 이 땅에서 주의 이름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이 땅에 언약을 줌으로써 ‘나 여기 있어’라고 주의 이름이 자기 존재성을 드러내요. 언약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제 어려운 것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언약의 주체에서 찾아올 때 주께서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는 어떤 이름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름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힘과 장소를 해놓고 거기다가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인단 말이죠. 이름은 개인적이에요. 이름 하나에 두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요. 한 사람당 이름이 하나씩입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하면 개인, 개체는 이미 독점하고 있어요. 우리 주님이 독점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쪽(인간 쪽) 전체 이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체 이름이 없는 것으로 하는 거예요. 이름이 없는 것으로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름이 인간에게 찾아올 때 동물로 와요. 동물의 특징은 이름이 없습니다. 동물의 특징은 이름이 없어요.

동물은 선악과를 안 따먹잖아요. 그러니 동물은 신이 될 필요가 없죠. 신격화 될 필요 없잖아요, 동물은. 인간에 아담에 그냥 붙어사는 거예요, 동물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힘, 자기만의 장소가 필요치 않습니다. 끌어 모아봐야 동물은 자기 이름 댈 곳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이름이 있는 곳, 인간이죠, 아담에게 빌붙어 있는 거예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올 때 동물로 찾아와요, 동물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월절의 양. 동물로 찾아오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지 말아야할 동물을 줘요. 거기서부터 거룩함과 부정한 것이 시작이 돼요.

창세기 7장에 노아 홍수가 일어나죠. 홍수 날 때 방주를 만드는데 그냥 들어가지 않고 두 부류로 분류시켜서 방주에 들어갑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 방주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만들 때 거룩과 더러운 것을 분류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필연적인 하나의 요건이 돼요. 언약을 구성하는 요건이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은 방주 안에 있는 동물을 보고 알죠. 홍수가 나버리면 다 죽어버리잖아요. 그럼 분류 자체가 의미 없어요. 소나 돼지나 정결한 것, 부정한 것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면 누가 거룩했지? 누가 더럽지? 가 분간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방주라는 그러한 창조, 피조세계의 맛보기를 본을 따로 떠가지고 그 안에서 왜 노아언약이 주어졌고 왜 홍수가 주어졌는가, 왜 심판해야 됐냐하는 이유를 그 안에 같이 실어 담는 겁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

왜 심판을 했느냐. 더럽기 때문에 심판한다면 애초부터 언약이 필요 없어요. 그 자리에서 다 죽이면 되니까. 그렇잖아요. 방주가 뭐 필요합니까? 아담 후손은 다 더럽고 인간 죽으면 인간 곁에 있던, 인간이 이름을 줬던 짐승도 인간과 같은 운명이라 해서 다 몰살시키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언약을 줬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더럽지만 다는 더럽지 않다는 것을 하늘에서 언약을 실어서 내가 새로 개시할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물 심판 받을 때 인간들은 홍수가 넘치는 것을 보고 잠시 잠깐이나마 물에 잠길 때까지는 물 심판을 경험했을 것 아닙니까. 경험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우리가 뭐가 잘못되어서 심판을 받지? 그런 생각이 들 거죠. 우리가 뭐가 잘못됐는데 심판받는가. 그것은 본인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런 원칙이 있어요. 모를 때는 처음으로. 모를 때는 처음으로 가면 돼요, 모를 때는 처음으로. 그럼 처음, 스타트, 시작은 어디 있는가. 언약 안에 들어있어요. 창조의 시작이 언약이라는 그러한 공간 안에 담겨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실시자가 이름을 가진 분이에요. 그 분이 주의 이름이라고 말해도 되고요. 이 내용대로 하면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분이 언약을 실시하고 처음 상태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겁니다.

왜 심판 받아야 되는가. 거룩이 돋보이기 위해서. 거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마술사가 마술 주머니, 상자 안에서 손을 움직이다가 다른 건 놔두고 비둘기 하나가 쏙 올라오잖아요. 비둘기를 돋보이기 위해서 마술 상자가 필요하듯이 방주라는 것,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거룩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거룩이 거룩 되게, 거룩의 취지를 자신의 온 피조세계에다가 전파하는 거예요.

그럼 거룩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분류가 되어야 됩니다. 무엇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세계에 들어오지 못할지. 아, 이게 더럽기 때문에 못 들어오는구나. 더럽기 때문에 못 오는 거예요.

여기서 귀찮겠지만 성경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69편 27-28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상당히 적극적이에요. 전도를 하는 게 아니고 쉽게 세 자로 이야기하면 ‘오지 마’. 오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지 마! 훠이, 오지 마!

뭔가 적극적으로 전하는 게 아니고 강력한 수비 태세를 누가 취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비유로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뒤에 한번 봅시다. 28절에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생명책이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 책이 되는 겁니다. 생명책의 취지를 높이기 위해서 악인과 함께 생명책에 기록시켜놓고 기록된 그것이 생명책의 완성이 아니라 서서히 생명책은 그 기록된 시점으로 이제는 진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누가 생명책에서 탈락인가를 생명책을 중심으로 하면서 제거해나가는 거예요. 뭐라고, 세 자로? 오지 마. 들어오지 마. 오지 마. 여기 오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상당히 적극적이에요.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항상 의인 곁에 두면서 어떤 이유를 달아서 강제로 어떤 빌미와 핑계를 다 대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죄인을 ‘들어오지 마! 오지 마!’ 하는 식으로 후쳐내고 쫓아내는 기능이 생명책 자체 내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할 때 이걸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잊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강의 완전히 다 무너져요.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주의 이름이 하시죠. 이름 있는 분이 일할 수 있는 자격자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하죠.

그러면 우리는 ‘오지 마!’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름이 없죠. 이름이 없으니까 ‘오지 마’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에게 갈 때에 우리의 이름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겠다는 조건 하에 이름 없는 동물을 우리 앞에다가 딱 제시하는 거예요, 동물을.

shofar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팔이에요. 숫양 뿔을 잘라서 나팔을 만든 게 소팔(쇼파르)입니다. 이 소팔이 뭐냐 하면 여리고성 돌 때 양각나팔을 불었잖아요. 이것은 공동체를 한 곳에 집합시키는 하나님의 소리에요. 그런데 그때 무엇을 악기로 분다고요? 동물의 뿔로서 양의 뿔로서 그걸 부는 겁니다, 양의 뿔로서.

그 시작이 바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제사 드릴 때 그 옆 수풀에 숫양이 있었잖아요. 그 양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이름 없는 양이 이름 있는 우리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난 이름 있는 너희하고 상대 안 해. 이름 없는, 내 쪽에서 언약대로 죽여준 그 양과 나는 대화할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약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크게 쓸게요. 색다르게 녹색으로 써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거든 죽음 안에서 만나라’ 이 뜻이에요. 하나님을 만나거든 죽음 안에서 만나라, 죽음 안에서.

이것은 또 다른 색으로 써볼게요, 녹색 잘 안 보인다 하니까. ‘잠은 직전까지 하던 일을 다 놓을 때 놔 버릴 때’ 이걸 잠들었다 하는 겁니다. 잔다고 해서 잠 오는 게 아니잖아요. 자면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는 그것도 아직까지 잠 아니에요.

잠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딱 잠드는 그 순간, 잠들기 직전까지 했던 것을 순간적으로 다 놔버립니다. 그러면 진짜 깊은 잠에 들 때 자기가 자기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하거나 명령하거나 가할 수 있습니까? 없죠. 이게 바로 주님께서 맛보기로, 시식코너 알죠, 맛보기로 매일같이 집어넣어준 잠입니다. 죽음입니다.

이게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요. 시편에 보게 되면 나와요. 시편 73편 20절이요.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죠. 꿈이 무시되니까 그 간격만큼은 누가 누구를 무시해요? 본인의 시간을 본인이 무시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계속해서 연속성, 인간이 자기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다. 하나다. 나는 끊어짐이 없다. 이게 계속 되어줘야 내가 뭔가 나는 나라고 남한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이런 이야기하면 참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어렵지만 광주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실력들이 있기 때문에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한번 길게 쓸게요. ‘나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조건 하에 언약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지 존재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아예 오지 마! 저리 가! 사람이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자기 구원을 인식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은 곧 신격화입니다. 다시 한 번 쓸게요. 자기 신격화의 조건은 힘과 장소의 결합이에요. 내가 있는 그 장소가 천국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는 힘만 둘러차면 나는 영원히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영원히 신이 되는 방법이 뭐 있겠어요? 천국 가면 완전히 천사와 같은 신인데요. 뭐 신바람 났죠.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어떤 사람이 이런 가사를 썼어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갔는데 매직, 매직, 몽키 매직이에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갔죠. 나무는 뭡니까? 지 나와바리, 장소잖아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까부는 거예요. 아주 요술을 부리죠. 몽키 매직. 아, 노래 막 부르고 싶은데. 원숭이 나무에 올라가~ 이박사가 부르는 노래 아닙니까? 이렇게 촐싹거리고 깐족거리는 거나 교회 교인들이 깐족거리는 거나 똑같이 원숭이죠. 이름도 없는 짐승이 하는 짓이에요. 나무 하나 주니까 나무 좋다고 거기 교회 가서 노는 거예요. 갑자기 이박사가 고마워지네. 진짜 박사인가.

나의 존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조건 하에 언약으로 들어옵니다, 나의 존재를. 만약에 너라는 존재를 우기면, 나는 천국가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것을 유지한다면 주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오지 마! 저리 가! 오지 마! 훠이 훠이. 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죽음의 징후들을 밤마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꿈에 집어넣은 주의 기능을 무시하고 마치 꿈 안 꾼 것처럼 마치 죽음이 나한테는 삽입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꿈처럼 죽음처럼 삽입될 때 그 인간은 이제는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고 그 죽음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나를 죽게 하신 분이, 죽음이 나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일반 인간들은 다 꿈을 꾸고 잠자기 때문에 잘 때는 손을 놓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에게는 그게 그냥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앞장 선, 언약이 들어있는 죽음이 우리 인생에 삽입되어 들어올 때에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의 평범해 보이는 모든 일상이 무엇으로 전환되느냐 하면 언약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주님의 장소로 이게 전환돼요. 이게 내 장소가 아니고 내 힘이 아니고 주의 힘이 들어와요. 만약에 내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주의 부활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힘이 들어와 버리면 그 장소는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나의 구원의 자리가 아니고 그게 내 자리가 아니고 이게 주의 자리이고 하나님 나라에요. 내 나라가 아니에요, 그게. 내가 기대했던 내 나라가 아니란 말이죠. 기대했던 내 나라, 내 천국은 어젯밤 10시 52분에 죽었어요. 잠들 때 죽었어요. 우리는 기껏 그것밖에 안됩니다. 그냥 꿈같아요. 시편 73편 20절 말씀처럼 그런 겁니다.

시편 78편 39절 보겠습니다. 이것은 마음 같으면 다 같이 읽어보자 하겠는데 누가 대표로 한번 읽어보세요.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이라. 바람은 이름을 붙이면 안 되죠, 멈출 수가 없는데. 이름을 딱 붙이는 것을 고정화라 하는데, 고정화될 수 없는 대상은 이름 자체가 사치입니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있죠.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너는 나에게 와서 하나의 몸짓이 되었다. 또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에. 보통 이름은 부모가 불러주잖아요. 부모가 지어주잖아요. 하지만 의식하는 것은 지음 받은 본인이 본인 이름을 지키려고 해요, 본인 이름을. 자기는 바람이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주님께서 이걸 해체시켜버립니다. 너는 이름붙일 자격도 못돼. 이름도 너한테는 과분하다는 거예요. 바람 주제에 이름을 왜 붙여, 바람 주제에. 어디 갔나? 없어졌네. 이게 바람이거든요, 바람. 바람 같은 남편을 한번 만나봐야 돼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요. 잘 있나? 아는? 자라. 해놓고 그 다음날 다른 데 소리도 없이 갈 때 바람 같은 남편이라 하죠. 그럴 때 옆집 아줌마가 댁의 남편 이름은 뭡니까? 우리 남편 이름은 바람이어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다시 말해서 이름 붙일 가치도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p.213에 ‘언약과 주체의 발생’이라 할 때 뭔가 수상하죠. 언약 안에 유일한 주체가 들어있는데 그 바깥에 따로 인간이 주체노릇 한다는 것은 악마가 주님을 흉내내가지고 인간들을 전부다 악마가 “예수 당신만 신이야? 얘들도 전부 신으로 다 만들어줄게.” 하고 악마가 인간을 신으로 다 만든 거예요.

신으로 만들었다는 증거가 뭐냐? 이것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내 명예와 내 체면과 가치가 유지될 내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내 이름을 위해서. 싸인하고 내 시그니처,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이름이 있다는 말은 ‘나는 바람이 아니어야 해요. 나는 영원히 고정되어야 돼요, 이름과 더불어서. 나는 이름의 내용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영원하여라.’ 그거 주장한다고 이름이 있는 겁니다. 오지 마!

이름이 있으니까 그때부터는 이름의 가치, 의미의 경쟁마당에 들어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악마의 어떤 농락에 빠졌는데 나는 누구와 상대하느냐. 바로 남과 상대해요. 이게 모든 파멸의 원인입니다. 인생이 비극적인 이유가 남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남이 있기 때문에. 비교대상인 남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바로 남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인간의 욕망은. ‘나 저 사람 되고 싶어.’ 하는 순간 인간은 결핍을 느껴요.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가 영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같은 고등학교 나왔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살고 왜 난 못 살아. 이렇게 남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여기서 지옥입니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다.’ 이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이야기했어요. 남은 지옥이다. 문제는 그 지옥이, 그 남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남이 내 안에 들어있어서 나를 지옥으로 변화시킨다. 저 남만 없으면 나는 천국인데 남이라는 저 의식 때문에 나는 날마다 편안할 길이 없는 거예요. 고통이에요. 남처럼 되고자 자유를 내가 마음껏 발휘하면 할수록 그 자유가 지옥으로 변하는 동력, 에너지를 공급한다.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과 나의 자율성이 나로 하여금 더욱더 지옥 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그걸 보고 주위에 유명한 뤽 게드라는 목사요 철학자가 있었는데, 사르트르가 자기의 후배나 제자쯤 될 거예요. 그 사람이 사르트르를 보고 한 마디 했어요. “왜 네 인생에는 은총이 없느냐?” 그걸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 네 인생에는 이것이 없느냐. ‘선물’이 없느냐.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선물을 받았다’가 아니에요. 내가 나 된 것은 내 자체가 선물이에요, 내 자체가. 지금 눈이 좀 안 좋죠? 주의 선물입니다. 내 자체가 선물이에요, 내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남과 나, 이 고리, 이러한 형성 이 자체를 주님께서는 인정 안 해요. 왜냐하면 이 선물의 원천은 아버지께서 아들 자체를 선물로 주는 거기에서만 선물이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선물 받을 자격도 없고 선물을 요청할 권한도 없고 선물을 기대할 아무런 근거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바람인데 뭐 바람에게 무슨 선물이 있습니까?

그래서 강의를 다시 하게 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동물을 앞장세워서 동물하고 하나님하고 언약을 세웠습니다.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동물을 앞장세워놓고 그 동물에서 동물 기능을 갖고 있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거기서 발생하도록 언약이 훅- 바람을, 언약 자체를 주의 이름께서 고무풍선에 바람 불듯이 훅 불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공기를 훅 집어넣어서 풍선이 볼록하게 되었다면 그 풍선 안에 들어있는 모든 바람과 공기는 누구 거예요? 그건 누구 겁니까? 그 자체가 주님의 선물이죠. 그 자체가 언약의 선물인 거예요.

그 선물 안에 주께서 창조했던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거룩한 것은 챙기고 더러운 것은 오지 마! 밀어내는, 밀어냄으로써 거룩을 돋보이게 하는 그 창조의 계획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 소리는 애초부터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나에게 나라는 것을 붙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과 주체의 발생’에서 언약에서 나온 주체와 악마가 배후에서 작동해서 나온 주체라는 영역과 대판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집니다. 뭐 코로나 변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아프리카에서 코로나 변이 생겼죠. 2년 간 고생했으니까 사랑의 하나님 살아계시니까 이제는 숨 좀 쉬게 해주겠지, 했는데 더 센 변이가 와버리면 다시 봉쇄. 언제까지? 기약도 없이. 인간에게 제일 절망적인 것은 희망이 없다는 거죠. 만약에 변이된 코로나가 한 3년 되고 5년 간 감옥생활 한 뒤에 이제 숨 좀 쉬겠지, 했는데 새로운 변이. 이젠 7년. 이렇게 나오면 내가 사적으로 갖고 있던 모든 계획은 다 무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계획이라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바람 부는 대로 바람 불면 되지. 도대체 그 계획 세운 거 하려면 칠백 년, 천 년 살아야 돼요? 기껏 짧은 인생 살면서 어쩜 그런 계획들이 많은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계획이 그냥 말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바람을 훅 불어서 실제적인 자기 백성, 언약의 백성을 실제로 이 땅에 출현시켰습니다.

이제 두 번째 중요한 것, 출애굽기 19장 17절 보겠습니다. 상당히 짧은 거고 보기에 굉장히 간단해보이죠.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그렇게 되어있죠. 이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받기 위해서 산 기슭에 선 겁니다. 율법을 받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내 손에 달리지 않는 운명적인 것, 필연적인 것이라고 되는 거예요. 율법을 준다는데 안 받을 위인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만약에 율법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에게는 오직 죽음밖에 없어요. 저주밖에 없습니다. 무슨 수로 율법을 지킵니까? 못 지키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수풀에 갇혀있는 숫양을 이삭대신 바치라 할 때 우리가 숫양의 마음, 숫양의 입장이라 봅시다, 숫양 입장. 숫양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친구들 다 도망갔는데 자기 혼자 수풀에 걸렸어요. 2년 코로나 겪었으니까 3년째는 자유를 얻겠지 했는데 갇혀 있다가 갑자기 여기서 아브라함이라는 어떤 인간이 등장해서 자기를 잡아가지고 자기 아들을 죽여야 될 그 제단에 자기 자신을 여기다 놓고 그냥 토막내버립니다. 그냥 죽여 버렸어요. 이게 율법을 강제로 수납해야 될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방주 만들 때 노아는 신났죠. 야, 이거 방주 뭐 널널하게 여덟 식구 더 들어가겠다, 동물하고. 신나고 재밌고 안심 놓고 그렇게 했는데 방주 만드는 것도 언약이지만 율법을 받는 것도 언약이에요. 그 언약이 바로 모세언약이라는 겁니다.

율법의 기능은 파괴입니다, 파괴. 파괴시키고 파멸시키는 거예요. 파괴시키고 파멸시키는 그 하늘의 무기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넙죽 받든 우리가 억지로 받든 무조건 치고 들어오는데 안 받을 재주가 없어요.

율법의 기능이 파멸, 파괴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게 되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건 옥경이한테 묻고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어요. 신분 조회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내 신분 조회는 나를 쳐다보는 타인이 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본인이 원해서 일방적으로 나한테 외형적인 그러한 과거의 내력을 조사하고 탈탈 털지만 내가 누군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어요.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거 수상합니다. 알아서 뭐 하는데? 키가 어떻게 되십니까, 몸무게는 어떻게 되십니까? 그럼 설교시간에 또 뭐 걸어다니는 해골 이야기하려고?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아이고, 미안해서, 오목사님......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나. 그런데 오목사님 한 사람 뿐만 아니고 여러 사람이 된다는 것에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곳곳에 많아요. 대전에도 있고 있어요. 대전에는 앉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까 얘기 다시 합시다. 지금 모든 인생이 괴로운 것은 남을 의식해서 나를 구축해야 된다는 거예요. 따로 구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사람 따라서 타인에 따라서 내가 옷차림부터 다 신경 써야 되는 이것 때문에 인간은 지옥 같은 겁니다. 그러지 말고 이왕 지옥 갈 거 내가 안 찾아가도 지옥인데 찾아와서 아예 너 자신을 없애주마. 어찌 고맙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예 없애줄게.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어요.

율법이 나를 점령한 거예요. 저벅 저벅 저벅 군화발로 들어오듯이 나를 점령한 겁니다, 율법이. 나를 접수한 거예요. 그게 언약의 특징입니다. 방주가 누구를 접수했어요? 노아 식구 여덟 명을 접수하듯이 언약의 특징은 그냥 침략꾼이에요. 침노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침노해서 점령을 해버리면, 난 뭐 나중에 예수 믿고 천당 가야지 하는 그런 계획조차도 짓밟아버려요. 그건 너라는 게 있을 경우에 나오는 상상력이고 그 상상력에 내가 기분 맞출 그런 여력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그런 기분이 아니야, 지금.

그냥 침략해서 그냥 접수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구원 받아야 시편 78편 39절의 말씀이 내 안에 실현되는 겁니다. 나는 바람이구나. 나는 굳이 내 이름을 위해서 어떻게 조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의 형편이에요.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의 형편인데 여기에 대해서 세상 주체는 어떻게 만드는가. 악마가 배후에서 작용하는 세상의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무한한 현출(現出), 어렵죠, 무한한 현상들의 계열. 짜맞추기 하는 거예요.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역사가 필요하거든요. 무한한 일어났던 기억들, 내 생각들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들을 무한하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무한을 집어넣었는데 그래봤자 나온 결과는 유한이에요. 출생에서 죽음까지 유한입니다. 인간의 주체는 유한이에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계 밖에 뭐가 있는지를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주체를 우깁니다. 우긴다는 말이 맞아요. 자기 바깥에 뭐가 기다리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기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요한복음 5장 26-28절 이야기했죠. 다시 설명드릴까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잖아요,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그러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도 동질성을 유지하죠,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었던 주님을 부활시켰잖아요. 그러면 주체의 동질성은 모든 인간은 배제되고 오직 주체가 주체값을 하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당사자 그분뿐이에요. 그분뿐이에요. 그분이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계열, 주의 이름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죠.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은 네 이름은 포기해라 이 말이죠. 네가 인정받는 조건하에서는 주님께서 천국에 못 들어오게 해요. 주의 이름이 하는 작업에 흡수, 통합되어야 되는 겁니다. 흡수, 통합되어야 돼요.

여러분, 이 기업 이름을 압니까? 한솔기업. 광주에서 공사하다 무너진 기업이 한솔기업이잖아요. 그 한솔기업은 건물 부수는 전문이거든요. 그럼 5층 건물을 봅시다. 5층 건물은 처음에 부서지지 않을 때는 1층, 2층, 3층, 4층 다 구분되어 있고 5층 내에도 방마다 다 구분되어 있고 과장실, 사장실 다 구분되어있죠. 그 구분된 구분요. 각자 주체가 있잖아요.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한솔기업이 들어가서, 그것도 너무 성급하게 무너뜨려서, 물 뿌려가지고 그냥 기둥부터해서 다 무너지게 만들어버리니까 그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쓰레기 더미 안에 구분을 어디서 찾아요? 못 찾죠.

인간들의 구분은 바람 같은 거예요. 일시적인 겁니다. 이게 무한하지 않아요. 오래 안 갑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해요. 맛있게 음식 먹으니까 먹어라, 다. 먹으면 다 똥 되는데. 한솔기업입니다, 한솔기업. 먹으면 다 똥 되는데 뭐. 그렇다고 똥을 먹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일단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구분해야죠.

주님께서 이 세상에 부정한 것들, 더러운 것들, 천국 오지 못하는 것들, 생명책에 탈락될 사람들을 계속 생산하는 이유가 짝이 있어줘야 주님의 주체에서 나오는 자기 백성을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율법은 그냥 과격한 선물 같은 거예요. 그냥 주시는데 다 죽여 버리죠. 그러면 죽일 것 같으면 폭탄이나 주지, 율법을 왜 주느냐. 율법에 보면 조건이 있어요.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못 지키는 자는 저주 받는다’라는 것을 주셨거든요. 그럼 여기서 이 저주를 안 받고 복 받기 위해서 인간들이 자기 주체의 능력을 발휘하겠죠.

자, 인간은 장소를 원하고 장소는 내 선한 능력, 나에게 복이 되는 힘이 있을 때 내 장소가 확보된다는 식으로 지키겠죠. 지켜봤자 뭐에요? 저주에서 저주 아닙니까? 그렇게 해줘야 복이라는 것을 못 따낸다는 말은 ‘나 자체가 처음부터 이게 문제가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하나의 기능이 율법 기능입니다. 모세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것은 로마서 3장에 보면 그들로 하여금 입을 틀어막게 하기위해서이다. 말 하지 마. 글도 쓰지 마. 글 쓰세요. 난 아무 글도 못 쓰겠다. 아무 글 쓸 자격도 없다는 글을 쓰세요. 설교 하세요. 입 다물고 아무 소리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설교 하세요. 난 설교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숙성되어야 돼요. 그 때가 오기까지. 이스라엘은 망할 때까지 숙성되어야 됩니다. 숙성될 때까지 우리는 10분만 쉬면서 또 숙성됩시다.

 

광주강의20211126b 출애굽기 19장 17절(이름없음)-이 근호 목사

이름 없는 숫양, 짐승을 잡아서 그 속에 하나님의 언약, 죽음을 집어넣듯이 똑같은 그런 역할을 이스라엘에게 집어넣습니다. 강제로 율법을 줘요, 강제로. 그러니까 아까 출애굽기 19장 17절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할 때 그들이 무엇을 선물로 받는지 그들은 짐작도 못했죠. 수고했다고 뭐 감사장이나 표창장 줄줄 알았죠. 너희들은 이제 죽었어. 이거란 말이죠.

법을 받아와요. 모세가 법을 받아온다고요, 겁도 없이. 겁도 없고 자시고 간에 강제로 법을 받아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근원적인 생존의 위협에 처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것은 일단 본인이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냥 강제로 밀어붙여버리면 도대체 너에게 ‘살아있다’가 너의 어디를 봐서 그게 성립되느냐? 네가 그럴 위인이 되느냐? 를 근원적으로 보게 하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보게 되면 인간들의 존재는 자기를 필연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존재는 우연이 됩니다. 아니, 내가 살아있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정말 살아 있는 거 맞아요? 왜 살려줘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이방민족은 살기 위해서, 자기 살아있음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서 신을 믿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걸 우상이라 하는데 언약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우상입니다. 언약이 없는 신이 우상이에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자기 죽음에 대해서 악착같이 사력을 다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지켜내야 되겠죠.

지난 주일 낮에 제목이 이었습니다. 간격. 간격을 성경 구절과 연계시키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되어있죠. 죽도록 ‘충성’에다가 gap을 집어넣으면 죽도록 gap을 주목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한테 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충성이라는 것이 어디에 충성이냐 하면 바로 이 gap에, 언약에 충성하거든요. 십자가와 부활, 거기에 주목하는, 그거 보고 지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충성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인간이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은 그게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연속성이지, 생명이 자기 목숨의 연결이었지, 중간에 끊어져서 새롭게 주어지는 부활의 주님의 생명은 아니었죠. 마귀가 이야기하는 네 목숨줄이지, 주님만이 알고 있는 생명은 아니었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생성되었던 생명은 아니었죠.

그래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근원적인 생존의 위협을 주시는 것은 언약적 핵심의 내용인 율법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죠. 인간의 모든 생각과 사고방식과 행동에 대해서 일일이 전부다 그 바탕 자체를 그냥 다 해체시켜버리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 법은 파괴다’, 다 파괴시켜버리는 거예요. 한솔기업이라니까요. 떡이 되게 만들어버려요. 쓰레기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p.213 봅시다. 교재 이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한 시간 가까이 한 이것을 ‘주님이 나의 존재보다 앞선다’ 이렇게 축약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보다 앞선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 잘 아시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모든 만물은 다 누구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있다 했잖아요. 여기 있는 나를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주를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주님이 나의 존재보다 앞선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제 이해하려고 하죠. 그럼 주님이 언약을 동원해가지고 이해하는 나를 없애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앞에 뭐를 붙이세요. ‘신기한 우연의 산물’. 이걸 아까 두 자로 이야기하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 내가 왜 있지? 신기하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p.213 “언약과 주체의 발생” 그 다음에 보면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왜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느냐 하면 주님이 우선이고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에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는 방해되는 인간은 불도저처럼 방해물을 전부다 철거하면서 한솔기업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하나님이 주님이 먼저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실제적으로 하는 거예요, 쳐내면서 하는 거예요.

고속도로 뚫을 때 뭐 이 집안은 안동 권씨 집 대대의 소나무가 있고...... 필요 없어요, 전부 다. 어이, 이명박. 밀어붙여! 새벽4시에 일어나서 불도저로 경부고속도로 다 밀어붙이는 거예요. 깔끔하게 다. 뭐 이거는 성씨 집안의 소유권이... 소유권 다 필요 없어! 그냥 밀어붙여, 다. 다 밀어붙여! 이건 이백 년 된 명당... 명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덤 다 옮기던지 하고 다 알아서 하고 다음날 되면 다 없앨 거야. 깔끔하게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말씀=종말의 징후라고 보는 겁니다. 말씀이 왔다는 말은, 쳐들어왔다는 말은 나는 이제 필연적인 나를 챙기면 안 되는구나. 나는 그런 필연에서 우연적 존재로 전환되는 겁니다. 바람이죠. 우연적 존재로. 그리고 이게 여러분 편해요. 따지고 보면 가만 계산 튕겨보면 이게 편해요. 왜냐하면 살려고 한다면 살 이유가 있어야 되거든요. 살려면 율법대로 살아야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율법의 내용도 모르면서 율법대로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율법을 누가 출제했습니까? 내가 출제 안 했죠. 출제자의 의도를 모르면 일방적으로 지켰다 해도 그건 지킨 게 아니에요. 괜히 남들이 나서지 마세요. 성도는 주님과 상관하지, 남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에요. 구원해도 주님이 구원하고 버려도 주님이 버리지, 남들이 나서서 ‘너는 버렸다. 너는 구원되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부수고 다시 세운다고 생각하면 쉽죠.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이 율법이 들어왔을 때 종말의 징후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 그것을 잠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설명 드리는 것은 종말이 왔을 때 어떤 징후가 있는가. 불안이 오고 그다음에 파괴가 되죠. 불안이 ①, 파괴 ②. 불안이 오고 파괴가 되는 겁니다.

불안은 왜 오느냐 하면 진실을 소유(소지)하기 때문에 불안이 오는 겁니다. 진실을 소지하기 때문에. 난 복음을 알았어. 그때부터 마음이 편한 게 아니고 그때부터 이 복음을 유지해야 된다. 나보다 나에게 더 우선되는 게 없잖아요. 천상천하에 내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진실 그러니까 말씀, 복음을 내가 소유하죠. 남이 소유해서 내가 구원 못 받고 내가 멀쩡하게, 내 터는 내 테두리는 멀쩡하게 있어야 돼요. 그 프레임은 있어야 되고 여기에 말씀을 수입하죠. 그러면 이게 아까 힘이 되고 내가 있는 이 장소는 신격화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진실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진실이 우리에게 너무 과해요. 감당이 안돼요. 과잉이에요. 과잉 때문에 늘 불안해하는 겁니다, 정서적으로.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높이뛰기 선수가 자꾸 신기록을 세우니까 점점 더 높이는 거예요. 점점 더 높여요.

모든 스포츠나 그런데 보면 인공지능이요, 인공지능이 왔을 때 재미없다고 하는데 재미없는 게 아닙니다. 인공지능이 있음으로써 바둑 둘 때 초반에 30~40수는 인공지능대로 가요.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장로님 잘 아실 거예요, 딩하오, 커제 이런 선수들이 바둑 둘 때 인공지능을 얼마나 공부하는지요. 유사해요. 실제는 2점 놓고 인공지능한테 이긴다니까요. 수억 판을 다 외운 인공지능을 인간이 2점 놓고 이긴다니까요. 기가 차죠.

라이벌이 생긴 것은 목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내가 라이벌 때문에 기죽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나가요. 그래서 인간의 불운은 높은 목표점, 도달점이 생기면서 인간은 여기서 결여,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는데 전혀 그럴 마음 없어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그냥 원룸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아니, 그런 거 싫어요. 100평짜리 아파트에 고급차를 타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내 레벨은 높아졌으니까요.

그만큼 갭이 있겠죠. 갭이 있죠. 그 갭이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행동 잘못하게 되면 내가 구축해온 것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면 내가 처음부터 다시 이걸 어떻게 쌓을까 그게 아득한 거예요.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것도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에 완전 다 무너져버려요. 이 코로나 바이러스만 아니면 벌써 1년 전에 끝날 문제에요.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인도에서 생겼잖아요. 거기서 또 퍼졌잖아요. 2년 됐다고 신나가지고 애들 학교 전부 다 가고 수련회 다하고 가야산 예약 다해놨는데 변이 3차.

불안한데다가 거기에 대한 시원한 해결점은 뭐냐. 아예 파괴를 해버리는 거예요. 여기에 법이 법대로 실행해요.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모든 불안을 일거에 없애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 존재에서 우리를 하루하루 사는 일회용 하루살이 같은 우연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스라엘에게는 뭐가 남는가. 이스라엘에게는 이게 남아요. ‘세상이 꼭! 멸망해야 될 이유’가 그다음부터는 관심사로 확 다가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종말론적 안목이라 해요. 종말론적 안목. 세상은 왜 멸망하는가. 이걸 손쉽게 이야기하면 물귀신 작전. 너 죽고 나 죽자.

아까 세상의 주체란 무한한 현출이라 했죠. 현출이란 나타난다, 현상, 출발, 출현된다 그런 뜻이에요. 무한한 현상들의 계열이라 했죠. 인간들의 주체는요. 그 주체에 대해서 제가 노래 가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가사가 어디 나오는 가사인지 여러분 들어보면 알아요. 콜 오드 발레바브 페니마 (Kol ‘od balevav penimah), 히브리어인데 제목은 <하티크바(התקווה, HaTiq'vah)>. 우리말로 번역하면 ‘희망’이란 뜻이고 가사내용은

이 마음은 유대인의 영혼 여전히 갈망하는 한 저 멀리 동방의 끝이 보이는가 시온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한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으리 이천 년간 이어져온 그 오랜 희망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려는 그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의 그 땅에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려는 그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의 그 땅에

이게 무슨 노래겠어요? 이스라엘의 국가(國歌)입니다. 가락은 서유석이 이미 불렀어요. 비야 비야 비야 오지 말아라~ 7080노래로 서유석이 불렀던 ‘비야비야’ 가사에다가 옛날 유대인 가락을 붙여서.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리라는 그 희망, 그것은 동방의 끝이 보이는가 이천 년간 이어온 그 오랜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의 그 땅에 영원한 우리 유대인의 영혼이 머물 수 있는 장소, 힘. 장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1897년도에 작곡해서 1948년도에 정식으로 국가로 성립된 노래에요.

국가 자체가 주체에요. 주체가 되려면 희망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되고 희망이 있다는 말은 이게 필연적이어야 돼요. 우연적이 되면 안 되고 필연적일 때 우리 유대민족의 동질성은 하나의 신격화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가사 내용에다가 시온과 예루살렘 그런 것 놔두고 ‘이 마음은 유대인의 영혼’에서 유대인 대신 ‘성도’의 영혼이라 하고 ‘저 멀리 북한이 보이는가’ 이러면 교회 선교단체에서 가사 그대로 옮겨도 별 차이를 못 느끼겠죠.

주체는 법과 대립이 돼요.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걸 실수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주체와 대립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율법을 줬잖아요. 그것만 율법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율법을 줘요.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주니 반 애들이 전부다 아이큐 155가 되가지고 분명히 2시간짜리 숙제를 내줬는데 15분만에 다 풀었어, 전부다. 그러면 선생님이 권위도 있고 한데 그냥 가겠어요? 숙제 또 주죠. 그들이 갭을 느낄 때까지. ‘아, 우리는 여전히 학생이구나.’ 그걸 알 때까지 ‘우리가 선생님 될 수 없구나.’ 알 때까지 계속 어려운 문제를 집어넣는 거예요. 옛날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소위 일류 고등학교에서는 모의고사를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제를 가져와서 시험쳐가지고 수학 평균 25점 나오도록 일부러 만들었어요. 수학으로 해야지, 다른 건 전부다 애들이 공부를 잘하니 다 맞아가지고 수학으로 모의고사 점수를 낮춰서 변별력을 유지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율법을 계속 주시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우리는 구원받아야겠다는 집요함이 있거든요. 집요함, 자기 존재에 대한 끈질김. 이건 타고난 거니까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율법을 주고 그 율법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킵니다. 적용시키는 방법은 그들의 삶, 생존이죠, 생존의 위협이 되게 한다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게 바로 광야입니다. 이게 광야에요. 광야는 율법 때문에 준 거예요. 율법 때문에.

본인들이 아직도 본인한테 아까 그 가사내용처럼 희망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뭐 어쩌라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신약 성경에서 임마누엘은 예수님 빼놓고 임마누엘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라는 그 구원받은 다수의 백성은 어디안에 있는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 안에 있어요. 거기에 함축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일을 할 때마다 그 껍질이 하나씩 풀리면서 거기서 자신의 자식들이 나오는 겁니다.

이 땅에는 천국백성이 없습니다. 천국백성은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되고요. 죄에서 건짐을 받아야 천국백성 돼요. 그래서 천국백성 되려면 이스라엘처럼 끝까지 주님께서 율법을 계속해서 가중처벌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구원이 안 되는구나, 이게.’ 율법에 분명히 복이라는 게 있거든요. 율법 지키면 복을 받잖아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많이 이야기했습니까? 율법에 복이 있다, 영생이 있다고 한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그 레벨에 접근할 수 없는 갭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모델은 어디서 찾아야 되는가. 선지자. 주의 성령을 받은 선지자. 성신을 받은 선지자인데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다 고난과 죽임을 그 시대에 당하는 거예요. 왜 선지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냐 하면 선지자는 미래에 있는 예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에서 인간들이 눈에 보고 들은 것 가지고 인간이 과거에 형성한 지식 있잖아요. 그 지식과 너무나 대비가 돼요.

주의 영은 그냥 영이 아니고 고난 받은 영입니다. 그것도 미래의 주님이 고난 받아요. 미래에 고난 받는데 현재에 있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는 사람들이 메시아가 고난 받는 줄 알겠습니까? 모르죠.

심지어 같은 시대에 있는 베드로도 몰랐는데요. 주님이 고난 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하잖아요. 고난 받는데 안 넘어지게 하는 게 넘어지게 하는 거예요. 안 넘어지게 하는 게, 지켜주는 게 넘어지게 하는 거라고요. 베드로야, 네가 거기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왜 내 일에 끼어드느냐. 보탬 되면 내 존재를 인정해줄까 싶어서 하잖아요.

내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그건 언약 나라에 들어갈 조건이 못 돼요. 언약 나라는 나를 인정 안 해주는 조건하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나 자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나는 아예 이름도 없어요. 나는 그냥 바람이어요. 그냥 한낮 있다가 없어지는 바람 같은 존재에요. 꿈같은 존재에요. 무슨 손을 써요. 손 쓸 수 없는데요.

시편 94편 9절에 보면 이건 꽤나 유명한 말씀이에요. 특히 안 믿는 사람들한테 써먹어도 괜찮아요. 안 믿는 사람들, 예수님 복음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해도 괜찮습니다.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아까 인간의 주체는 소유하는 거죠, 소유. 나한테 귀 있다. 나한테 눈 있다. 소유하는 데에 급급했지, 누가 귀를 만들었는데 어떤 취지에 의해 귀를 만들었는가는 처음을 모르니까 창조의 시작을 모르니까 이 귀를 하나님이 만들었겠지 해놓고는 하나님이 왜 만들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듣지 못하게 만들었고 보지 못하도록 눈을 만든 거예요. 귀가 있으나마나 눈이 있으나마나라는 뜻이 아니고 반대로 나가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반대로.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만큼 현재 우리 주체를 배후에서 돕고 있고 우리 주님의 원수가 네 배후에 도사리고 있음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이걸 말로 하지만 그 당시 선지자들은 그걸 삶으로 보여줬어요. 항상 반대로 나갔습니다. 반대로 나가니까 그거 뭐 밉상 받아 죽는 것은 당연한 거죠.

아까 했던 것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이 멸망할 이유를 찾아라. 우리가 할 일입니다. 집에서 라면 끓이면서 아, 이거 라면 참 잘 만들었네. 아, 이래서 멸망하는구나. 라면이 이렇게 맛있으니까 라면한테 훅 빠져가지고 천국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이 라면 맛에 천 년 만 년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라면 만든 이유이고 멸망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오랜만에 치과에 갔는데 치과 선생님이 칭찬하면서 ‘아이고, 연세 많으신데도 이빨 관리 잘 하셨네요.’ 하면 세상 멸망하는 이유를 또 거기서 찾는 거예요.

이래서 세상 떠나지 말고 여기서 푹 눌러 앉으세요. 눌러 앉으면 당신은 우연적 존재가 아니고 필연적 존재가 되면서 나의 동질성은 보장되면서 그 동질성이 보장되니까 고형화 되죠, 고형화. 형태가 콘크리트화, 고형화 되면 너 누구야? 하면 실체가 있으니까 내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갑자기 없어야 될 이름이 갖다 붙는 거예요. 나야 나. 나야 나.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야 나. 남하고 차이나는 나야 나. 주체가 형성된 거예요, 주체가.

그런데 주님께서 코로나 확 불어버리면 그 주체가 어떻게 돼요? 그 주체가 갑자기 불안해지죠. 이스라엘 백성 역사가 그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불안과 파괴, 불안과 파괴. 이것이 반복해서 진행되는 겁니다. 좀 더 자세하게, 이건 어렵지만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불안은 왜 생기는가. 불안은 바로 초(超)자아, 나의 목표 이상형, 이렇게 되면 신처럼 되고자 하는 그것 때문에 결핍, 결여가 생겨서 불안한 거예요. 아, 내가 좀 더 기도 오래 해야 되는데. 말씀 좀 더 봐야 되는데. 불안불안하다는 것은 초자아가 있는 거죠.

이걸 복음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간단하죠.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말은 감사와 고맙소가 날라가버리는 거죠. 감사와 고맙소가 날라가버려요. 내 것은 누가 지킨다? 내 것은 내가 지키죠. 내가 지키는데 내가 못 지키니까 불안하잖아요. 불안한 순간 뭐가 날라갔어요? 감사와 고맙소를 찾을 길이 없네. 찾을 길이 없어요. 자기 것 지킨다고 온 신경을 다 써가지고.

이걸 어디서 찾을 거예요? 찾는 방법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선물, present. 늘 주시는 매일같이 주시는 우연적 선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는 율법이 참 고귀한 선물이에요. 참 고귀한 선물이죠. 장은아가 생각나네. 이건 무심코 막 나오네. 고귀한 선물. 웬 떡이냐 이 말입니다. 거울 보면서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게 웬 떡이냐 웬 선물이냐 이 말이죠.

정 이름 붙이려거든 이 선물, 김 선물, 박 선물, 최 선물, 임 선물이라고 붙이세요. 그거 붙여도 소용 없어요. 왜냐하면 이왕 줄 거 좀 젊은, 머리 안 샌 거 좀 주지, 이 아픈 거 가지고 선물 주면 안 된다 이래가지고 또또 초자아가 또 생각이 나가지고 또 뭐 입이 툭 튀어나와가지고 불만을 품고 감사와 고마움은 다 날라가버리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실은, 진리는 우리의 소유용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소유하지,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면 안돼요.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좋은 건 혼자 차지하고 싶은 거예요. 분명히 ‘가지 마, 오지 마’는 누가 이야기해야 돼요? 그것은 주체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우리가 하면 안 되죠. 우리 존재는 우연하기 때문에. 우연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은 멸망 중에 무너지는 중에 있습니다. 한솔기업처럼 천사가 와서 무너지죠. 멸망할 이유를 찾으라는 말은 세상이 멀쩡하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멀쩡하지 않으면 그 세상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개별자인 나도 정상이 아니에요. 미쳤어. 나도 멀쩡하지 않아요. 이것도 선물이에요. 내가 이렇게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도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면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멀쩡하지 않다’ 이래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또 수단을 줘요. 그것이 기존의 율법을 계속 갱신해나가는 겁니다. 모세 율법 있죠. 그 율법을 새로운 역사적 환경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예를 들면 광야 속에 집어넣어가지고 네가 생각하기에 율법은 이 정도일거라는 그런 오해를 무산시킵니다. 그 오해를 주께서는 벗어나게 하죠.

정말 율법을 통해서 내가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체가 오해에요. 왜냐하면 끝까지 우리 생존은 위협이 되어야 되니까. 생존, 생계 자체가 위협이 되어야 되니까. 신명기 8장을 봅시다. 이 언약이 어디까지 우리에게 침투하는지. 우리는 중간에 마중을 나가려 해요.

초등학교 말고 제가 국민학교 다녔거든요. 국민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그때는 가정방문을 했어요. 가정환경 조사한다고 너네 집 티비 있나 없나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가보고 가정방문을 하기 위해서 갔거든요. 가면 애들은 신나요. 왜냐하면 학급에서 힘 있는 자는 선생님뿐이에요. 선생님은 힘이 있어요. 그 힘 있는 자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는 승자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예요, 승자로.

그러니까 선생님이 아이를 귀엽게 여기는 것은 아이를 다 버려놓는 거예요. 오해케 하는 거예요, 선생님하고 나하고는 한 패 먹었다고. 나한테 까불지 마. 우리 선생님이 지켜준다. 이럴 수가 있거든요. 힘과 선생님이 있는 장소가 내 장소이기 때문에. 그걸 자기의 신격화에 이용하는 거예요, 인간은. 아까 다 들었죠?

그런데 누가 난처해하느냐 하면 학부모들이 가정방문을 굉장히 힘들어해요. 아주 힘들어하거든요, 가정방문을. 그것도 직장방문이 아니고 가정방문이니까 냄새날 수도 있고 옷가지가 흐트러질 수도 있고 그리고 과부 혼자 사는데 어떤 남자 들어올 수도 있고. 그러니까 엄마가 뭘 하느냐 하면 완전히 미식축구에서 스크램 짜는 거 있죠. 아이고, 우리 애 학교에 못 가봐서 미안합니다. 하얀 봉투가 있어요. 봉투에다가 돈 좀 준비해가지고 쌤 오면 쌤 수입이 그때는 그걸로 됐으니까 봉투 딱 준비해놓고 옛날은 주택이잖아요, 주택에 오면 초반부터 스크램 짜가지고 문밖에서 못 들어오게 만들어요. 그때는 정원이 있으니까 정원에 화초가 다 말라죽었다는 게 들키면 안 되니까 스크램 짭니다. 그런데 좀 나이 든 50대 넘은 선생님들은 눈치를 때려가지고 안 가봐도 이 집 사는 형편 다 아는데 20대 막 졸업한 신출내기 교사들은 상식도 없고 예의도 없고 그냥 밀고 들어가요.

율법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율법 지켜드릴 테니까 들어오지 마세요. 그래도 천사는 이거 뭐 안면몰수하고 율법가지고 더 들어와. 계속 들어와 버려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계와 자존심까지 완전히 다 부숴버려요. 깊숙이 들어와 버려요, 깊숙이. 기어이 안방 차지해야 물러가는지 이거 뭐 압수수색영장도 없이 막 들어와요.

신명기 8장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런 환경을 맞이해요. 여기 8장 2절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자, 광야의 길은 의도적이죠. 적극적이죠. 광야의 길을 걷게 할 때 목적이 있어요. 이는 너를 낮추게 한다. 그럼 광야의 길을 안 갔으면 그들은 어떤 체험을 못하느냐 하면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됐어.’ 그 체험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광야에 안 가고 말씀, 율법 잘 지키면 될 거 아니냐? 이렇게 나오겠죠. 문제는요. 율법이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겁니다. 율법이 제자리를, 안방자리까지. 그럼 율법의 제자리란 억울하게 죽는 자리거든요. 이 율법 안에 유월절 어린 양 있죠. 이름 없는 양이 죽잖아요. 예수님도 이 땅에 와서 이름 없는 존재로 취급받아서 진짜 무명용사도 아닌데 무명용사처럼 취급받아서 죽었잖아요.

주님께서는 그 이름을 다시 살리신 거예요. 주님을 살린 게 아니고 그 이름. 이름 없이 죽었다는 그 의미를 살리는 거예요. 전부다 자기 이름 살린다고 우쭐대는 그 세계 속에 이름 없이 죽으신 그 이름 없음을 살려가지고 그것만이 유일한 이름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살린 이름이란 말이죠. 율법이 제자리 찾아가는 거예요.

율법 지켜드릴 테니까 오지 마세요. 아니야! 율법이 찾아가야 되겠어. 율법이 찾아가면서 무대 세트장이 바뀌죠. 멀쩡했던 좋은 길이 비도 오지 않는 광야 길로. 불뱀이 범람하는 광야 길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러한 생존의 위협과 불뱀의 위협과 물 없음과 양식 없음을 너희들 입장에서 딱 너희에게 합당한, 이것조차도 너희에게 선물이다. 너희들이 원하는 선물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광야가 몇 년입니까? 광야가 40년이잖아요. 광야 1년차가 있고 2년차가 있을 거죠. 1년차, 2년차, 3년차, 4년차, 그 정도 봐주는 게 아니라 40년을 다 채워요. 기어이 다 죽일 때까지. 홍해 건너온 사람 중 갈렙, 여호수아 두 사람은 예외라 하고 나머지 60만 중에서 두 명 산 것은 산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다 죽인 거예요. 모세마저 다 죽인 거예요.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로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그다음에 뭡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있죠.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나 사람이 돈이 있어야 되고 떡이 있어야 되고 먹을 게 있어야 사는데 그걸 가지고 생명이라고 이야기해요. 생명은 곡식 등의 생물체에 들어있는 에너지가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 목숨이 유지된다고 하는 이것이 우리가 아는 생물학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은 외부에서, 만나에서 오지, 네 떡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만나도 먹잖아요? 만나가 떡의 일종입니까? 떡의 일종으로 보지 않아요. 만나를 떡에서 빼달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왜? 그래야 선물이 선물되고 그래야 감사가 예상한 감사와 고마움이 아니라 진짜 예측 못한 데서 오는 감사가 되기 때문에. 또 살려주시네요. 뭐로? 말씀으로요. 복음으로.

인간의 너와 나의 모든 문제는요. 복음만 들어버리면 이건 문젯거리도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감사하면서 느끼게 될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걸요. 거기다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신명기 8장 17절,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이것은 애굽에 들어올 때부터 상식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노인정 가보세요. 전부다 이런 이야기한다고요. 나 어릴 때 자식 넷 낳아서 잘 키웠다고 전부다 내 손과 내 힘으로 도시락 바리바리 싸가지고 고생했다. 이건 상식적인 레파토리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9장 4절에 나와요. 4절에 나오고 6절에 나오고 7절에도 나오는데 9장 4절부터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자, 너무 빨리 진도 나가면 안 되니까 차근차근 봅시다. 여러분 다 들었으니까 기억하실 거예요. 1번, 사람은 떡으로 산다. 2번, 떡이 됐으니까 그다음에 내 힘과 내 능으로 이만큼 이루었다. 3번째, 그게 결국 나의 의로움으로 누적이 되었다. 내 존재의 정당함. 나의 동질성의 정당함. 나는 살아 마땅함. 전부 이걸로 정리됐잖아요. 이걸로 정리되니까 뭐라고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4절에,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야아...... ‘오지 마’ 결정을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너와 함께 동행하시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오지 마’이지, 네 이름으로 ‘오지 마’는 안 된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그럼 주의 이름으로 ‘오지 마. 가.’ 그것도 중요하지만 ‘너는 들어와.’ 할 때 그건 누구의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죠. 그럼 주의 이름에 누구는 배제됩니까? 나의 생존과 나의 힘과 능력과 나의 의로움은 일체 섞여서는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섞이면 안 되는 쪽으로 주의 이름이 우리 주님이 지금도 일하시는 거예요. 나의 의로움과 정당성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그게 바로 5절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쫓아내고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되면 ‘고맙소. 감사합니다’가 나오는 거예요. 주여, 이게 웬 선물이십니까? 선물을 신약에서는 은사라 해요. 진짜 그 때는 아까 떡이라 했죠. 그 떡이에요. ‘이게 웬 만나이십니까? 웬 떡입니까? 왜 주의 능력과 주님의 솜씨와 힘이 저한테 그냥 주시는... 너무 고마워서...’ ‘그럼 가져갈까?’ ‘아니요. 너무 고마워서 하는 이야기에요. 매일 주시니까.’ 그것은 너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럼 성도가 할 것은 뭡니까? 의로움의 반대말은 뭡니까? ‘나는 죄인 맞습니다.’ 를 통해서 감사와 고마움을 계속하면 되잖아요. 이미 건너와서 구원받은 입장에서 할 일은 뭡니까? 이제는 살아있으면서 하나하나가 왜 나는 망해야 되고 왜 세상은 망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찾으면 됩니다. 봐, 이것도 얻었잖아요. 이것도 망하는 이유죠. 망하는 이유. 주변에 만나는 가족들부터 모든 사람이 나에게 망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제공자가 돼요. 가만있어도 망하는 이유가 술술 들어와요.

9장 6절 봅시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무엇이 곧은 백성이다?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경추 두 번째 번호 있는 데가 굳어버리면 목이 잘 안 굽어진대요. 우리는 교만이 타고났어요.

7절에 보면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계속해서 화를 낸다는 겁니다. 이 대목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요. 소박하게 그냥 살고자 했을 뿐이에요. 일하고 월급 받고 노동하고 그것뿐이에요. 우리는 뭐 신이 되겠다고 안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주님한테는 격노케 하는 일이 돼요.

왜냐하면 본인이 살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는데 네가 지금 살고 있잖아. 어젯밤 2시로 죽었어야 돼, 너. 잠잘 때 그걸로 꼴까닥 갔어야 돼. 아침에 또 눈떴잖아. 물론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 된다는 보장은 없어요. 가는 잠에 갈 수가 있습니다, 가는 잠에. 가는 잠에 갈 수도 있지만 뭐 세상에 이 사정도 모르고 후손들은 뒤늦게 효도한답시고 주께서 죽이는데 거기다가 산소 호흡기 꽂아가지고 사람이 일찍부터 지옥생활하고 있는데... 지 효도하는 게, 자기 의로움이 우선이 되어가지고 부모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모르고 효도한답시고 효도도 안 하던 말썽꾸러기 맏이가 들어가서 이거 빼면 안 된다고. 빼면 왜 안 되는가. 빼면 귀신이 와가지고 네가 뺐지? 네가 뺐지? 하면 곤란하다고. 전부다 자기 이익과 관련돼서 그러거든요.

격노케 한다는 것. 이 사정을 우리는 모릅니다. 결국 모른다는 말은 주께서 어떤 상황에 처해지게 해줘야 주님께서 분노하는 일들만 우리가 해온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맙습니다. 분노는 분노대로 해놓고 구원은 구원대로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 예수 믿고 바르게 살고 이런 거 없어요. 그게 바로 분노케 하는 거예요.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런 작업을 주님께서 무엇으로 실시했습니까? 율법을 줬죠. 율법을 줌으로써 율법은 스스로 자기 완성을 알아서 가게 되어있어요. 말씀은 스스로 움직여요. 우리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씀이 먼저이고 말씀이 움직이니까 우리가 꾸역꾸역 뭘 하는 겁니다. 무슨 일? 죄짓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 어찌 고맙지 않습니까?

이미 합격했는데 일부러 악행을 저지르면 안 되지만 우리가 모르는 죄 있잖아요. 이거는 죄 아니야. 라는 것도 죄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게 뭐냐 하면 거룩이에요. 이게 거룩한 백성입니다. 네가 훌륭한 게 아니고 네 안에 율법이 살아 있는 겁니다. 율법이 살아있어요.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과 대립된다고 했습니까? 복습입니다. 무엇과 대립되죠? 모르기 전에 제가 빨리 대답하겠습니다. 주체와 대립되죠. 주체,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바로 죄가 발생되는 이유가 되죠. 죄가 발생되는 이유. 나는 남을 의식하죠. 주님은 뒷전이고 남들한테 욕 얻어먹을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율법과 대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한꺼번에 쳐버리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니 구원은 없는 거예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는데 무슨 구원이 있어요? 죄인밖에 없는데. 그 고백을 한다는 것은 이미 율법의 완성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서슴없이 그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 고백이.

아예 이참에 남아공 말고 홍콩 말고 또 다른 데서 변이 일으켜가지고 어차피 나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은 멸망의 대상이잖아요. 멸망의 대상이니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게 바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신약 성도끼리의 인사입니다. 이제 기도할 타임이 됐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를 안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불안을 유발하고 구원받았다고 우쭐대는 것이 구원 놓치면 어쩌나 하는 초조감 때문에 정작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될 이 감사와 고마움은 놓치지 않았습니까. 다시 우리의 분수와 우리의 역할과 기능이 주안에서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저희들이 감사하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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