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9.표적계시

아빠와 함께 2022. 4. 2. 08:11

광주강의20220331a 다니엘5장 11절(표적 계시)-이 근호 목사

p.217 중간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8장 21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 대목을 딱 보시면 여러분들이 이것부터 생각하셔야 돼요. 확정, 결정된 것. 확정, 결정된 것이라는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일단 기뻐해야 돼요.

확정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 세계거든요. 미지의 환상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미지의 꿈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현실에 충실하거든요. 아침에 밥을 먹었다. 분명히 밥을 먹었잖아요. 나는 지금 시계를 차고 옷을 입었다. 분명하죠. 거기서 인간은 멈추는 게 아니고 어떤 기대감이 있잖아요, 기대.

자, 밥 먹었다. 오늘 할 일을 해야지. 오늘 안 끝났어요. 오늘 이런 일을 할 거야, 라고 되어 있죠. 그게 환상이 되는 겁니다. 시작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계획을 잡는 순간 환상에다 이 현실을 (끌어당겨) 가져가는 거예요. 환상이라는 것은 현실이 아니에요. 확정된 것, 결정된 것이 여기 환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까 창세기 8장 21절 이 자체가 이미 확정되고 결정된 거예요. 그러나 8장 21절의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은 확정된 현실이죠, 이 현실을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과 맞추려고 시도를 하는 순간 이 성경은 환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현실 됨을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하나님께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내 고집대로 세상이 되어졌으면 좋겠어요. 인간의 생각이에요. 그러나 여기 8장 21절은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로 이미 확정이 났고 결정이 난 거예요. 인간이 양보해야 돼요. 주님보고 양보하라 소리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양보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대하는 순간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 현실과 내 꿈이 양보해버리면 나는 살 이유가 없어지니까. 내가 살 이유가 없어져버리면 내가 꿈꿨던 환상이 다치게 됩니다. 내 꿈이 다치게 돼요. 다치면 아파요.

그래서 내가 안 다치고 내 뜻대로 환상이 실재 현실화되는 데에 이 성경말씀, 창세기 8장 21절도 마찬가지고 모든 성경말씀을 여기에 억지로 합치,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하나님,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헌금을 좀 드릴까요? 내가 전도를 해드릴까요? 왜 그런 짓합니까? 왜 그런 짓하죠? 자기의 환상이 안 다치고 싶은 거예요.

환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 현실에 충성한 나에 충실함에서 환상이 나오는데 이 꿈이 깨져버리면 내 자신이 아파요. 그것도 그냥 아픈 게 아니고 많이 아파. 내가 많이 아파요. 내가 많이 아프면 내가 아픈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도 다 부질없는 것이 돼요. 다 쓸데없는 것. 내가 아픈데 주의 뜻만 이루어버리면 하나님은 좋지만 나는 안 좋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훼손시키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 중에서 훼손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훼손시키면 안돼요. 인간이 훼손시키면 훼손되기 때문에 훼손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훼손시키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훼손하면 훼손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훼손해도 하나님의 것 중에서 훼손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나오죠.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갔죠.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직접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만 고생이다. 너만 지금 부질없는 짓을 한다.” 그 말은 인간이 이 땅에 삶 자체가 다 부질없다는 것을, 확정된 말씀에 의해서 통보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아주 고집에 고집을 부립니다. 한국어 담임, 이거 잘 돼야 될 텐데. 자기가 하는 그 기능과 일이 본인에게 만족스럽게 잘 돼야 될 텐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환상은 바로 나로부터 나왔죠. 나에게서 환상이 나오죠. 그럼 나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외부 또는 외부 환경에서 주어졌습니다.

이 외부 환경은 나를 위함입니까, 아니면 확정되고 결정된 주님을 위한 겁니까? 외부 환경은 주님을 위한 거죠. 그래서 여기서 날마다 해석 오류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세상을 잘못 읽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고집스럽게 잘못 읽고 있어요, 고집스럽게.

잘못 읽으면 (그다음에) 제대로 읽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고집스럽게 잘못 읽고 싶어요. 왜? 내가 안 다치기 위해서. 내가 다쳐버리면 하나님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그것이 바로 환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것은 다 아시니까 지우겠습니다. 아시니까 성경구절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답변을 잘 하셔야 됩니다. 제가 성경구절을 하나 말씀드리고 그걸 가지고 질문을 드릴게요. 마태복음 28장 5절에 ‘무서워 말라’는 말이 나와요.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러 온 여자에게 천사가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했죠. 너희는 무서워 말라. 그러니까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먼저, 무서워하는 걸 보고 무서워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왜 천사가 무서워 말라고 했을까요?

조금 전에 제가 쭉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그들은 이 환경에 대해서 인간이기 때문에 해석을 잘못하고 있죠. 그래서 천사가 하는 말이 “무서워 말라” 6절에 나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이죠.

그러니까 현재 이 상황, 환경이 예수님이 부활한 환경이에요. 부활이 된 환경이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그 환경이 예수님을 찾는 사람에게 어떠한 변화를 유발해야 되느냐 하면 인생에 대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 환경이므로, 그다음에, 확정된 거예요. 결정 난 겁니다. 기분 좋지 않습니까? 기분 정말 좋죠.

여성들 세 명이 있다 합시다. 이 정치적 환경이 어떠냐 하면 예수님을 처형한 권력이 작동하는 정치적 상황이죠. 그런데 처형되어 마땅한 그 죄수의 시체를 이 여인 세 명이 찾으러 간 거예요. 여러분, 이 두 가지 입장을 다 봐야 돼요. 두 가지 입장을 다 알아야 됩니다.

여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누구한테 들키면 안 될 일이죠. 새벽에 몰래 가서 예수님을 몰래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행동 자체가 해석 오류에요. 여자는 몰랐죠. 예수님의 시신 찾으러 갔죠. 그런데 여기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와서 말을 건넵니다. 말을 건넬 때 6절에 보면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냥 살아난 정도가 아니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의 말씀대로.

그렇다면 여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공포의 대상이 안 되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처형했던 모든 현실적 권력이 이 여인에게 이제 다시는 공포의 또는 두려움의 환경이 안 되어야 돼요. 그럼 여성에게 그동안 이 정치적 환경, 예수님을 처형한 이 정치적 환경은 이게 바로 환상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개꿈 꾼 거예요, 개꿈. 꿈 속에서는 분명히 무섭죠. 꿈에는 온갖 무서운 게 다 있어요. 그런데 꿈을 깨보면 이마에 땀방울 맺힌 걸 닦으면서 어휴, 이렇게 한숨 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휴, 다행이다. 진짜 그런 줄 알았지. 그렇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안심 그리고 기쁨, 염려, 걱정 그런 것과 더불어서 자신의 잘못된 현실감에 대한 스스로의 비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죠.

아, 이런 차원에서 바로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쫄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자기가 자기 발 저린다고, 내가 구성한 환상의 무게에 자기가 발을 찍힌 거예요. 공포와 더불어서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그리고 난 뒤에 마태복음 28장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또 등장하셔요. 또 뭐라고 하십니까?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뭐에요? “두려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께서 그냥 조용히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계속 어떤 일을 하시면서 살아계신 거예요.

지금까지 했던 것을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지금 p.217에 나오는 창세기 8장 21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고 다른 요소 때문에 땅을 저주하겠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게. 나는 너하고 상대 안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인간하고 상대 안한다. 인간은 이미 버린 존재에요. 자꾸 환상하고 꿈을 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딱 듣는 순간 우리는 무엇에 기뻐해야 되느냐 하면 새삼스럽게 우리가 애쓰거나 노력할 필요도 없이 걱정, 염려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말씀대로 확정 난 것이고 결정이 난 거예요. 그 결정 난 것 중에 제가 마태복음 28장으로 확 옮겼잖아요. 28장에 보니까 뭐가 결정 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지금 살아서 죽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것도 그냥 살아있다, 바이바이가 아니라 살아계셔서 활동하시는 그 결과물 속에 우리가 새로운 환경으로 지금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무서워 말라 했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무서워 말라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가 꿈꾸는 환상 때문에 자기가 지레 짐작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환상에 의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 환상은 바로 정치적 상황으로서 모든 인간들이 거기에 동조하거나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는 우리 안 무서워하기로 약속해요~! 안 무서워하기로. 지금 안 무서운 상태에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해석 오류는 어디서부터 해석 오류가 생기느냐 하면 환상 때문에 해석 오류가 생긴다, 그렇게 이야기했고 이 환상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나 중심의 현실관 때문에 환상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나 중심의 현실인 환상이 왔을 때 여기에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마중을 나오죠, 택한 백성에게. 마중 나오는 그 방식 전체가 공포스럽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러한 속성이 이 안에서 작용하고 있으니까 두려워 말라고 하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고 한다면, 나 중심의 현실관에서 인간들이 환상을 끄집어낼 때 기대나 희망으로 환상을 만들어냈잖아요. 이제 두려워 말라는 주의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부셔버립니다. 그걸 제가 아까 강의 전에 예상 밖의 일이라 했습니다. 인간에게 예상 밖의 일을 가지고 두려워 말라는 것과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별로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상당히 많이 어려워요. 인간들이 말씀을 보잖아요. 아까 마태복음 28장 5, 6, 10절도 그렇고 창세기 8장 21절도 그렇지만 인간이 이 말씀을 볼 때 혼자 보는 게 아니고 이 나 중심의 현실관에서 비롯된 환상을 대동하고 이걸 끌고 말씀을 드디어 찾아옵니다, 말씀대로. 물론 해석 오류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안 믿는 거죠.

인간은 성경말씀을 문자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말씀이 인간에게 마중 나갈 때는 문자로 하는 게 아니고,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문자를 영으로 해석하게 해요. 그럼 문자에서 영으로 바꾸어서 해석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문자로 아는 우리를,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임으로써 나의 모든 환상과 나 중심, 기대, 희망 다 죽임으로써 죽이는 그 힘이 바로 영의 힘이 되는 거예요. 이 영은 말씀의 완성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영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언약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십자가라 할 때 십자가에 대해서 인간들이 하는 행세, 인간들이 했던 결정, 확정된 것은 저 자는 죽여 없애야 된다는 거죠. 주님께서는 콜. 가져와. 내가 죽어줄게. 그러면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다 털어냈어요, 이제는.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은 두려워하기 때문에. 뭐가 두렵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중심을 다치게 하죠. 아프죠. 이게 파괴되니까 아픈 거예요.

환상, 기대, 자기 중심, 이런 문자 모든 것이 해석 오류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주어집니다. 이게 어려워서 제가 주저하게 되는데요. 할 수 없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다음 둘 중 어느 것이 멸망의 전조냐, 징조냐? 둘 중에 하나니까요. 1번-별이 떨어진다. 별이 파괴된다. 별이 파괴되면 인류도 멸망한다. 별이 떨어지는 것, 파괴되는 것이 인류의 멸망의 징조입니까, 아니면 2번-내가 파괴되는 것. 어느 것이 인류 멸망의 징조요, 전조가 돼요?

네. 내가 파괴되는 거예요. 별이 떨어지는 것을 징조로 봐버리면 우리는 아직까지 내가 파괴되는 지점까지는 오지 않았어요. 그 정도까지는. 그래서 주님께서 해와 달을 건드리면서 궁극적으로 목표로 해서 건드리는 게 있어요. 그것은 나 자신을 노리고 인간 자신을 노리고 주께서 성경말씀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기다려라. 내가 너 파먹으러 갈게. 너를 파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살하면 안돼요. 주께서 파먹도록 해야 돼요. 그야말로 신화처럼 우리는 그냥 산에 묶어놓고 독수리가 와서 내 심장을 파먹도록. 주님이 만든 이 부활의 환경은 나를 ‘꼼짝 마라’ 하고 나를 묶어놓고 나의 심장과 폐와 또 뭐 내장, 내 눈까지 내 뇌까지 파먹히도록 해주시는 그러한 환경에 우리를 박아놓고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기뻐하라.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과연 그런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성경 좀 찾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했죠. 그 위 3절에 보세요. “시험하는 자가” 시험하는 자라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창세기 8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사람하고 상대 안 합니다. 사람의 배후 조종자 악마와 상대하는 거예요. 그 악마가 하는 말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혁명하는 사람이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어요. ‘무기를 든 자만이 빵을 얻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1800년대 중반에 블랑키라는 프랑스 혁명가가 있었는데 파리코뮨(Paris Commune, 1871년)이라고, 노동자가 계급을 타파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켰어요. 프랑스혁명(1789-1794년) 이후에 일어난 큰 혁명이 파리혁명이거든요. 19세기 노동자 혁명이에요.

블랑키라는 사람이 33년 동안 교도소 수감되고 맨날 데모만 하다가 잡힌 사람인데 이 사람이 말하길 가장 진실 된 것은 빵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가장 진실 된 것은 빵. 우리 한국 같으면 밥이 되겠죠. 다른 말로 하면 돈. 빵이 없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진실 된 것은 없어요.

그럼 제가 아까 처음부터 강의한 것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이 뭘 하느냐. 나에게 있어서 가장 진실 된 것. 이건 어떤 반론도 제기될 수 없는 가장 진실 된 것을 찾는 거예요. 그게 본인한테는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확실한 거니까. 나한테는 빵이 필요하다. 자, 그다음부터는 빵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하든지 뭘 하죠. 그럼 그게 뭐가 되겠어요?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 논리를 인간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빵이 필요하다. 그래서 빵을 얻고 싶다. 빵을 얻고 싶은 이게 왜 환상이냐? 인간의 철학과 과학을 아무리 동원해도 이게 환상인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정신분석 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환상은 분명한데 꼭 필요한 환상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신병 걸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가? 다 이루었다, 이런 사람 있잖아요. 그거는 정신병자라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가장 확실한 것, 인간들이 보기에 가장 확실한 것은 빵이 필요하다. 그런데 마태복음 4장에 주님의 확정된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누구 소리입니까? 사람의 소리가 아니요, 악마의 소리에요. 악마의 소리. 마귀의 소리인 거예요.

악마가 그 뒤에 시험할 때 보면 4장 6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 성경말씀을 악마는 문자적으로 해석한 거예요. 실제로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준다. 이게 문자적 해석인 거예요.

문자적 해석은 뭐냐. 살아있는 내가 나의 환상을 어떻게 달성하면서 행복하게 즐겁게 살아 있느냐, 그게 문자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말했지만 영은 그런 나를 바위에 묶어놓고 주님께서 와가지고 그런 환상을 꿈꾸며 미쳐있는 우리의 모든 내장을 독수리가 와서 다 뜯어먹도록 하는 거예요. 먹히도록 되어버리면... 밧데리로 가는 전자제품에 밧데리 빼버리면 밧데리실 안이 텅텅 비죠. 내 속에 있는 나의 모든 것을 텅텅 비게 만드는 거예요. 껍데기만 남기는 거예요. 이게 영적 해석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냐 하면 엄마가 아이 목욕시킬 때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서 하잖아요. 만약 욕조가 2층에 있고 2층에 창문이 있다면 따뜻한 물 받아놓고 ‘아기야, 목욕시켜 줄게’ 해놓고 발가벗은 애기를 2층 창문에 집어던져버리고 옷을 욕조에 담가서 목욕시키는 것, 이거 엽기적인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애야, 목욕 잘 하고 있지?’ 이건 영화화해도 괜찮아요. 공포영화, 호러물이에요, 호러물. 공포영화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악마 너 나와, 호출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만약에 옷은 놔두고 애를 집어넣으면 엄마는 그다음부터 걱정과 염려가 됩니다. 애가 또 물이 식어버리면 감기 들지 않을까. 감기 들면 코로나 걸리겠지. 코로나 걸리면 걸렸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이래가지고 계속해서 논리구조로... 이거 다하면 또 숙제 시켜야지. 자꾸 환상과 환상을 계속해서 유발하는 그 바탕을 처치 안하고 그걸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환상이 공포와 두려움과 걱정을 유발시키는 바탕을 벌벌 떨면서 쥐고 있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자, p.217 창세기 8장 21절 다시 봅시다. 다시 읽지는 않겠습니다. 읽는 것도 지루해요. 여기 8장 21절에 보면 이미 결정 났어요. 결정 났는데 내가 사람 때문에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저주가 없다, 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저주하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여분 없이 몽땅 다 태우는 거예요. 몽땅 다 태우고 빠져나올 사람은 빼돌리고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빠져나올 사람은 나중에 주님에 의해서 육은 놔두고 독수리 보내서 홀라당 내장 다 파먹어서 내 쪽에 있는 것을 주님 자기 쪽으로 전부다 옮겨놓는 거죠.

여러분들이 드라마 보면 직장생활 하다가 잘린다든지 퇴직한다든지 할 때 문구점에서 파는 나무상자 들고 이렇게 가죠. 가는 거 봤죠.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거? 그거 진짜 해보고 싶어. 책상에서 소지품 꺼내서 들고 가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아담에 속한 것을 그리스도로 옮겨놓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전부다 들고 가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이렇게 하시면서 그냥 들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네가 갖고 있었던 옛날 너의 바탕은 기존의 잘못된 해석에 의해서 환상에 불과한데 그걸 실재라고 느꼈던 거기에 전부다 맡겨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하고 있는 이 논문 자체가 다니엘 논문이니까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 3장 8절을 보면 거기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다니엘 3장은 다니엘 이야기가 아니고 다니엘의 세 친구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때 다니엘은 어디 출장 갔는지 안 보이고 다니엘 세 친구가 걸렸어요. 거기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참소’한다는 거예요, 참소.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고자질했다 또는 나쁜 의미로 고발하는 거예요. 좀 제거해줬으면 좋겠다. 요새 뉴스에 온통 거의 80-90%가 참소아닙니까. 옷값이 얼마냐, 브로치 값이 얼마고 진짜냐. 전부다 참소와 참소의 충돌. 그게 정치판 아닙니까.

다니엘 세 친구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들에게 진실로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권력이에요. 정치적 권력이죠. 이게 인간들로서는 그 출신이니까...... 그래서 그들이 왕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상을 만들어서 나팔소리가 들릴 때 전부다 금 신상에 절하게 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그들이 유다 사람 다니엘 세 친구를 딱 주목하니까 절을 안했다 이 말이죠.

일종의 올무를 놓는 거예요. 이게 표적 계시에요, 표적 계시. 하나님의 이미 확정되고 결정된 그 뜻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에게 모든 환경이 집중되도록 집약되도록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다니엘이 이해가 확 됩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 왕 앞에서 손가락이 나왔죠. 손가락이 나와서 글을 쓰죠. 글을 쓰는데 인간들의 문자적 이해로서는 그 글을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표적 계시이기 때문에. 그래놓고 12절에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해석은 택한 백성만을 겨냥하게 만들어요. 이것이 계시의 주체가 되는데요. 택한 백성, 계시의 백성에게 말씀이 그들만 해석되도록 제대로 해석되도록 그렇게 만들어서 그들 주변에 비로소 저주가 현실화되게 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강의하면서 환상이 있고 실재가 있다 했죠, 진짜 현실.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저주로 바꾸고 실재를 복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고 다시 다니엘 3장 8절을 봅시다. 계속 다니엘 5장과 3장을 왔다갔다 합니다. 다니엘 3장 8절을 보게 되면 참소를 했습니다.

참소를 하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을 아껴서 의도적으로 한번 더 기회를 줘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주는 특혜를 줘요. 내 앞에서 한번 해봐라. 저 사람들이 너희들을 미워해서 하는 걸 내가 다 아니까 너희들은 너무 아까운 사람이니까 한번만 여기서 그들이 너희들을 고자질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게 해 달라. 자, 여기서 내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을 불 테니까 한번 절해라. 아니, 절하는 게 뭐 어렵노? 절하면 내가 용서해줄게.

그런데 그들이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주여,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특히 그 세 사람의 이름이 누가 지어준 이름이냐? 느부갓네살 자기들이 이름을 지었어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내 부하다, 내 종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왕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니엘 3장 같은 경우에는 저주가 먼저 찾아왔죠. 다니엘 세 친구한테 찾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다음부터는 아시잖아요. 21절에 세 명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집어넣죠. 22절이 재밌잖아요.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붙든 사람을 태워 죽인 거예요. 소방수가 소방 장비 갖춰도 소용없어요, 얼마나 뜨겁던지.

죽고 난 뒤에 29절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29절에서 다니엘 세 친구가 불에서 멀쩡하게 나오니까 왕이 감탄해서 이런 조치를 내리는데 이 결과를 우리가 모른다 친다면 느부갓네살 이쪽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 길이 없었죠. 그런데 29절에 보니까 다니엘 세 친구의 하나님을 만약에 우습게 보면 거기서 저주가 생기는 거예요.

지금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 백성 성도에게 하는 활동이 이거에요. 표적해서 계시를 주는 거예요, 표적해서. 그래서 성도는 할 일이 많아요. 할 일이 많습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하지만 아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의 확정된 것은 결코 인간이 훼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훼손해봐야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 이 사실을 아는 거예요.

성도가 살아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악마 너 나와. 악마 너 나와.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놓고 거기서 공포와 벌벌 떪과 절망에 빠뜨리고 허무에 빠지도록 조장한 악마, 너 나와. 그게 성도가 해야 될 일이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도에게 표적해서 계시를 주는 겁니다.

그 계시가 뭐냐 하면 예상 밖의 일이에요. 성도 본인도 예상 밖의 일입니다. 네가 뭐 했지? 나 뭐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예상 밖의 일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활용하기 위함이에요. 네가 살아있다, 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계시 받은 주체가 되는 거예요.

자, 다시 다니엘 6장에 보게 되면 다리오 왕 때에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총독 등이 법을 만들고요. 법을 만들어서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거예요.

왜 이런 사람들이 왜 이런 법을 만들었습니까? 4절에 이유가 나와요. 또 뭡니까? 또 참소하는 거예요. 총리와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참소와 같은 뜻)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어떤 틈, 아무 허물이 없으므로 여기에 그들이 화가 난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니엘을 훼손하고 훼방하는 것은 곧 누구에 대한 훼손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셨습니까? 주님께 하나님께 훼손이 되도록 관계를 그렇게 설정하고 만든 거예요. 이것이 환경입니다. 이게 계시의 환경이에요.

우리가 주인공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공이에요.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그냥 놀아날 뿐이에요. 이제 우리 성도가 할 일이 명확해졌죠? 우리를 낚시의 미끼로 삼는 거예요. 악마가 걸려들라고.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슬아슬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뭘 선언했습니까?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이 말은 인간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성령이 없고 신앙이 없다면 매사가 두렵고 무서운 일들만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예상 밖의 일이 자꾸 벌어지는 거예요. 내 환상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다니엘 6장에서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드디어 사자 굴에 집어넣었죠. 사자 굴에 집어넣어놓고 다리오 왕이 잠을 못 잤어요. 잘 있는가 싶어서. 그래서 아침 일찍 가보니까 다니엘이 멀쩡하거든요. 그다음에 다리오 왕이 한 명(命)이 24절에 나옵니다.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그 처자 알죠. 윤석열 같으면 김건희. 처자. “처자와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이것이 저주에요. 이게 징조입니다. 인류 멸망의 징조에요. 이게 저주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 끝나면서 두 번째 시간까지 이어지는 그런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그다음에 무엇이 생긴다? 오늘 첫째 강의 주제, 무엇이 생깁니까? 비로소 저주가 생기고 심판이 생기고 멸망이 생깁니다. 사랑이 지나가면.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 몰라요. 10분 쉬겠습니다.

 

광주강의20220331b 다니엘5장 11절(표적 계시)-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한 게 뭐냐 하면 어떻게 계시가 주체화될 수 있는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어떻게 인격화될 수 있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굉장히 간단하죠.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이 존재하는 주변은 저주로 변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고요한 게 아니고 계시에 대해서 참소하게 되어있어요.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다 살고자 하는데 특정 사람은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그들의 허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멸망의 징조가 되는 거죠. 계시와 연락을 취하고 있는 사람의 등장, 이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멸망의 징조가 되는 겁니다.

아까 한 것 한번 더 적어보면 되죠. 1번-별이 파괴된다, 이게 인류의 멸망이냐. 아니면 2번-내가 파괴된다, 이게 인류의 멸망이냐.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가 파괴됨으로써 인류는 멸망하는 거예요. 여기 나라고 할 때 제일 먼저 주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죠. 그 뒤를 따라가야 될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파괴되면서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기쁨과 감사가 나오죠. 그래서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내가 너를 무섭게 하더라도 무서워 말고 두렵게 하더라도 두려워 말라. 코로나 걸리는 거 너무 무서워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모든 인간들은 코로나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으로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러한 주님의 계시가 주님의 사랑이니까. 그래서 아까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그 주변에 없던 저주가 발생되는 겁니다.

어제 한 수요 설교의 일부를 잠깐 말씀드리겠어요. 로마서 4장에 의하면 사라의 태가 죽었어요. 남편 아브라함은 안 죽었어요. 아직 생식 능력이 있습니다. 사라의 태는 죽었어요. 태가 죽었으니까 인간적인 육은 이제 끝났어요. 사라의 태가 죽었다는 말은 여자로서 이미 죽은 거예요. 자식이 없으니까 무(無)가 되니까 여자에게 더 나올 게 없으니까 여자는 이미 죽은 존재이기에 더 생산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죽었음이 분명히 결정지어졌고 확정지어진 거예요. 죽음이 결정되어야 거기서 부활의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죽을 뻔하고 막 눈 감고 죽을 때 실눈 뜨면서 죽습니다, 이것은 확정된 게 아니에요. 은근히 죽은 척하면 살려줄 거라고 어떤 자기의 환상을 또 만들어내요, 환상을.

첫째 시간에 했지만 또 다시 해봅시다. 환상은 나의 확정적이고 나의 실재적인 것이 나의 나다움을 분명하게 하는, 이것은 반론이 제기되지 않을 만큼 너무나 명확한 거기서부터 뭔가 시도를 할 때 목적과 기대를 가질 때 그게 환상이 되어버리죠. 이유가 뭔가? 진짜 바깥에 있는 모든 환경은 말씀대로 되어가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 가는데 우리는 그딴 거 난 됐고 난 모르겠고 내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게 바로 완전 개꿈 아닙니까. 망상 아닙니까.

내가 뭔데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돼요, 내 뜻대로? 기숙사가 돼야 될 건데. 기숙사 들어가야 되는데, 캐나다에. 주일 낮 설교 때 했잖아요. 유리판 위의 물방울이라고. 서울, 대전 찍고 부산 백날 돌아다녀봐야 판 위의 물방울이에요. 여기가나 저기가나 물방울의 이동, 번짐이에요.

태가 죽었으니까 여자가 죽은 거예요. 모든 남자한테는 여자가 죽은 겁니다. 그런데 죽은 여자를 분명히 했어요. 이제는 없는 겁니다. 나이도 많고 태가 죽은 것을 분명히 하고 그다음에 이삭이라는 자식이 여기서 태어나죠. 그럼 이 새로 태어난 이삭으로 하여금 여자가 생깁니다. 그 여자가 생기는 자식과의 관계를 여자의 후손이라 해요.

그래서 확실하게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계시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 모든 것이 뱀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여자의 반대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의 반대가 뱀이 되는 이유는 안 죽고 뭔가 산 상태에서 있는 이대로 살아서 뭔가 좋은 낯을 보겠다는 모든 것은 뱀의 범주에 포획이 되어버려요. 확실한 죽음 요소가 없이 산 채로 또 살려는 것은 전부다 뱀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사기 집단이에요. 뱀의 단체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 죽여주세요! 이렇게 손 들고 오는 사람 없죠? 살아있는 내가 나의 환상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떻게 달성하느냐, 그것 때문에 교회 오잖아요. 아, 머리가 되게 아픈데 기도하니까 머리가 깨끗해지더라. 지금 무슨 요소를 놓친 거예요? 죽을 뻔했지, 죽은 게 아니잖아요. 만약에 완전히 죽었는데 머리 아프다면 그 사람 부활한 사람이에요. 그렇죠?

여자의 후손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구약에다 미리 던져버려요. 구약에 계시를 미리 던지면 그게 다니엘이고 그게 모세고 그게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이 되고.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하였다. 이것은 시간의 경과가 소용없어요. 계시니까요. 하나님의 계시, 말씀은 시간의 경과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 현장에서 주께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사는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p.218 봅시다. 위에서 8번째 줄에 ‘억울한 피’ 나오죠. 그리고 밑에서 5번째 줄에 ‘억울한 피’ 나오죠. 아까 다니엘에서 사랑이 지나가면 저주가 피어나듯이 느부갓네살이나 그 밑에 부하들, 신하들이 다니엘 세 친구와 다니엘에게 한결같이 참소하고 고소하죠. 그러면 여기서 억울함이 발생되는 거예요, 억울함.

억울함이 뭐냐 하면 첫째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것은 어떤 경우라도 훼손되지 않습니다. 훼손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느부갓네살 신하들이 다니엘 세 친구와 다니엘을 공격할 때는 무엇을 노립니까?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 여호와와 같이 관련된 사람이라도 그의 가치와 그의 고상함, 완전함에 대해 훼손이 된다고 우기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악마의 뜻은 모든 것이 미-확정적이다, 이게 악마의 뜻이에요. 모든 것이 미-확정적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으면 그것은 미흡함이 있을 거라는 틈새를 노리고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거기서 틈 또는 차이, 차이성을 통해서 인간은 언어의 의미를 획득하고 이 의미를 통해서 자아성을 구축합니다. 차이성을 통해서 자아성을 구축하는 거예요.

하나 예를 들게 되면 독일에 있는 외손녀는 어린애라서 일부러 TV를 안 보여줘요. TV를 안 보여주기 때문에 은연중에 우리는 TV를 봐서는 안 된다는 자아성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가지고 할아버지는 맨날 TV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침에 TV봐. 뉴스 봐야죠. 뭐 드라마 보는 줄 압니까. 그럼 뭘 느낍니까? 차이성을 느끼는 거예요. 차이성을 느껴서 그다음부터는 TV를 봐도 되는가? 아이들이 조심하다가 이젠 TV 다 봐요, 같이. TV를 보는 나로 전환되죠. TV를 안 봐야 나다운데 TV봐도 괜찮은 나로 새롭게 자아가 정립되는 겁니다. 그럼 TV는 나쁘다는 의미에서 봐도 되는 괜찮은 의미로 의미 수정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의미의 관계망을 인간들은 현실로 보는 거예요. 이 배후에 누가 이런 짓합니까? 악마가 이런 짓하는 거예요. 주님은 훼손될 게 없어요. 흠도 티도 없어요. 흠도 티도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발목을 잡고 신처럼 되어야 되는데 잡을 게 없다고요. 이미 확정되었으니까요. 인간은 인간대로 확정되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확정되면... 인간들이 뭔가 잡고 하나님 자리까지 올라가야 인간의 선악과 따먹은 꿈은 실현된다 이 말이죠, 계속해서.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실현되어진 사람이 있잖아요, 계시의 주체자. 거기에 대해서 공격하는 거예요. 참소하는 거예요. 그러면 훼손될 게 없는데 너 죽으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공격이 들어왔으니까 그들은 억울한 피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가 당하는 경우고요. 이미 구약에서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동일한 억울함을 당했던 겁니다.

그것을 구약 성경의 예를 통해서 제가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선 성도가 하나님의 계시와 연락이 된 상태, 하나님의 계시의 사람이 되어버리면 연대가 깨어집니다. 인간 대 인간의 연대가 여기서 깨져버려요. 인간들의 수건돌리기에서 빠져나와버립니다. 너네끼리 많이 해라. 너네끼리 많이 해. 너희들끼리 많이 주고받고 해.

그런 것 마셔본 적도 없지만 회사 회식할 때 폭탄주해서 주거니 받거니 하잖아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저한테 ‘선생님도 한잔 하시죠.’ 하면 저는 거기서 ‘나 집에 갑니다.’하고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깨집니까? 인간들의 밴드, 연대가 다 깨져버려요. 그럼 뒤에서 막 욕하겠죠. 억울한 피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연대가 깨져서 빠져나오면 성도가 사랑의 대상이잖아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잖아요.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저주의 상대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억울한 피를 말씀드리기 전에 인간들의 이러한 판단, 인간들의 선택은 어떤 악마가 준 논리구조를 갖고 있던가. 여러분 아시다시피 선악체제가 있잖아요, 선악체제. 그 선악체제를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A, B, C, D 네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A 나는 하나님을 믿을 의향이 있다.
B 나는 하나님을 믿을 의향이 없다.
C 나는 하나님을 안 믿는다.
D 나는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

A, B는 의향이죠.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의지가 됩니다. C와 D에서 믿기로 했다 혹은 안 믿기로 했다, 는 실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A와 C 혹은 B와 D를 이렇게 연관시켜 봅니다. 하나님을 믿을 의향이 있다(A).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안 믿는다(C).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잖아요. 마음은 믿고 싶지만 뭐 별로... 나는 안 믿기로 결심했어, 이런 경우. 혹은 나는 하나님을 안 믿고 싶었는데(B)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기로 했어(D).

인간이 할 수 있는 경우는 이 네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따라서 인간의 의지와 실천, 이 네 가지 경우를 가지고 이러한 도표, 그림을 하나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에 있는데 나에서 방향이 뻗어나갈 때 (수직적으로) A와 B의 방향을 서로 반대로 해야 돼요. 하나님을 믿을 의향, 의지입니다.

인간은 실천하기 전에 반드시 의지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 지금껏 어떤 누구도 그게 아니라고 할 사람이 없어요, 전부다. 인간이 악마에 속한 이상은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나’가 주인공이에요. 악마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잘 생각하세요. 악마는 우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니까요. 선악을 아는데 이제는 네가 주인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주인공이에요. ‘악마는 주인공입니다’ 이런 인간은 없어요. 내가 주인공이에요. 악마도 나의 종이야,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인간이 뭘 할 의지가 있다(A)/ 의지가 없다(B), 이렇게 되겠죠. 아까 하나님이라 했지만 여기 하나님 자리에 뭘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에요. 난 악마를 인정할 의향이 있다. 반대말이 뭡니까? 난 악마를 인정하기 싫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는 소실되거나 소멸되면 안돼요. 하나님이 있든 없든 악마가 있든 없든 그딴 거 중요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이게 인간의 시작점이고 악마는 그 뒤에서 미소를 짓고 있죠.

아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있음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있음이고 그의 살았음은 죽었음을 보여주는 살았음이에요. 죽었다는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라는 남들 보기에 숨 쉬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라를 미끼로 던져서 문자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영으로 공격하고 저주할 수 있는 미끼를 던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다음에 실천을 봅시다. 이것을 그대로 가져와요. 나(주인공) 중심에서부터 (수평적으로 간격을 두고 위로 향하는 화살표) 내가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D)가 되고 나는 안 믿는다(C)면 반대 방향이죠, 방향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렇게 그 사이의 면적(그림에서 빗금 친 영역)에 해당됩니다. 모든 활동은 이것입니다. 이 면적(A나D'C)이 인간의 선택에 의한 의지와 그리고 그 실천력, 이걸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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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우리가 질문 던지는 것은 왜 인간들은 이걸 하기로 했다 혹은 난 이건 안 하기로 했다, 그렇게 의지를 갖는 그 의지의 동기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이 그림에 나와 있습니다. 영원토록 내가 나에게서 나에게 주인공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천국 간다면 천국의 주인공이 예수님일까요, 자기일까요? 자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교사들이 학교 가서 아동들 다룰 때 이야기해보면 100% 나옵니다. 오늘 학교 왜 왔어요? 물어보면 주님의 계시로 왔다는 애는 없습니다. 내가 학교 안 갈라 했는데(B) 난 안가기로 결정했는데 안 그러면 내가 엄마한테 얻어맞는 수가 있으니까 손해는 내가 보죠. 따라서 이 결정(D')을 한 거예요.

아무리 자기가 결정 안한다 할지라도 이 면적이 압력으로 작용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늘 두려움과 후한과 후회와 아쉬움...... 아 그때 그렇게 안하는 건데. 그렇게 행동 안하는 건데, 라는 말도 나오고 그때 그렇게 생각 안하는 건데. 이걸 사랑으로 바꾸겠습니다. 내가 그때 당신한테 헤어진다고 해놓고 다시 당신을 사귈 게 아니고 좋아한다 해놓고 사귈 건데, 이런 거요. 의지와 실천, 실천과 의지가 항상 인간의 선택 안에 그 내용으로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인간들이 자기가 주인공이거든요. 출발점이 여기서 나에요. 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이 그대로 작동되죠. 이 원리원칙이 작동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 원리를 하나님께서 빼겠습니까, 집어넣겠습니까? 성경에서 이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필히 나와야 억울한 피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 노릇했다 하는 그 사실이 있어줘야 언약의 백성이 당하는 그 억울함이 나오는 겁니다.

성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p.218에 억울한 피가 있어야 땅이 저주받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창세기 8장 21절을 보게 되면 내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는 말은 저주가 이제는 없다, 가 아니라 제대로 된 억울한 피, 최종적인 억울한 피가 다시 말해서 계시에 가장 합치되는, 모든 계시가 다 집약되는 그분이 등장하게 되면 그 순간 이 세상은 저주입니다.

사랑이 완성되었으니까. 사랑이 지나가면 남는 것은 저주밖에 없어요. 목이 메이고 가슴이 아파도 나는 당신을 몰라요. 사랑이 지나가면. ‘주여, 주의 종노릇을 하고 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나는 너 모른다.’ 사랑이 지나가버리면 모르죠. 그러면 너는 왜 나를 안다고 했을까? 제가 알고 싶어서 한번 시도해봤고 또 귀신 쫓아내고 복음을 전해야 실천에 옮겨봐야 주께서 나를 납득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에게 온 부자청년 같은 경우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율법을 지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무엇을 공격했습니까? 부자청년의 네 주인공 됨을 공격했죠. 근심하면서 돌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받은 계시가 없으면 자기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주님을 속이려고 애는 쓰지만 주님은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천사도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천사도 유월절 넘어가고 딱 지켜봐요. 저거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 십자가 믿습니다, 하는 것도 다 망 본다고요. 믿는 척을 하는지 내가 십자가 믿을 의지가 있는데 아니면 안 믿고 싶은데 십자가 믿습니다, 이런 결심을 하는지.

이 나 자리가 없어져야 되죠. 그러면 이 도표가 한꺼번에 전부다 무너져야 됩니다. 나 자리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창세기 30장부터 해서 31장인데 야곱이 다시 아버지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과정입니다. 하란에서 브엘세바로. 하란은 터키 북쪽이에요. 지금도 터키이고 그 옆에 이란과 이라크가 있는데 터키 북쪽 하란에서부터 이스라엘 남쪽 브엘세바로 내려가는 과정.

하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란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을 꾸게 하고 라반에게도 꿈을 꾸게 합니다. 꿈, 하나님의 계시는 바깥 요소입니다. 바깥 요소는 예상 못한 거예요. 예상 못한 겁니다, 바깥 요소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주께서 여러분들을 다루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예상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되면 주님이 주인공으로 나를 일방적으로 다루시는구나 하고 아시면 돼요. 그렇게 예상대로 안 될 때 성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두려워하지 말라, 그다음에 무서워하지 말라.

이 말은 인간이 평소에 자꾸 환상을 꿈꾸니까 내가 만든 계획이 실제로 현실화되어야 될 텐데 하고 자꾸 거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저게 만약에 실패로 끝나면 난 어떻게 하지, 하는 거예요. 뭔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길 때에 그냥 곱게 하는 게 아니고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의지를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결과의 주인공이 역시 나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바로 주인이라는 이미 확정된 것을 다시 한번 또 확실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 일시적으로서는 그 사람은 자기의 욕망이 만족되었기 때문에 기분 좋죠. 하지만 새롭게 생겨나는 모든 새로운 일에 대해서는 또다시 욕망을 가동시켜야 돼요. 또 욕망을 품고 또 욕망대로 되어야 돼요.

하나 예를 들면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 10회 연속으로 출전했으면 좋겠다고 그 팬들은 굉장히 자기 환상을 가지고 꿈은 이루어진다, 하면서 응원하잖아요. 그래서 본선에 올라갔죠. 갑자기 본선에 올라가자...... 그러니까 산이 있는데 어떤 욕망이 달성되면 욕망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아시아에서 1등으로 들어가야지. 그래서 이란을 2:0으로 이겼잖아요. 그러면서도 손흥민이 연속적으로 몇 골을 더 넣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있었던 아랍에미리트와 경기해서 1:0으로 졌죠. 1등 아니고 2등 되었어요.

그러니 뭔가 꿈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 꿈이 있어줘야 살맛이 나요. 달성되게 되면 인간에게 갑자기 허무가 확 찾아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60억 정도 있어보세요. 갑자기 허무해지죠. 다들 그런 경험 안 해봤구나.

구원이, 구원 받고 싶어. 받고 싶어. 드디어 십자가 믿어서 구원했어. 이것은 허무가 찾아와요. 그런데 주님의 일인 구원은 반드시 예상 밖의 일이에요. 예상 밖의 일. 아, 이거 한번 경험해봐야 되는데... 여러분들 진짜 산에 있는 소나무에다 묶어놓고 독수리 찾아와서 간, 쓸개 다 파내져야 돼요, 전부다. 완전히. 심지어 그 미친 엄마처럼 옷 벗겨놓고 옷 빨고 있고 아이는 갖다버리고 하는 뭐 그런 현상. 얼마나 소중한 내 아이인데. 그 소중한 것이 바깥에 버려지고 그 소중한 것을 위장했던 그것은 주께서 사용하시고요. 자기 것으로 채우시고요. 그런 거거든요.

사라가 자기 몸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얼마나 이뻤어요. 이쁜데 애를 못 낳아, 이쁜데. 죽은 여자에요. 그런데 예상 밖에... 얼마나 예상을 못했으면 애가 생긴다고 했을 때 식구들이 웃었겠어요. 아이고 참, 장난을 쳐도 좀 대충 치시죠, 이런 식으로. 그런데 애가 생겼잖아요. 그걸로 끝났습니까? 애를 모리아 산에서 죽여 버려라. 두 부부는 이젠 예상 밖의 길을 갑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길 외에 다 깨라. 말씀 외에 나의 모든 것은 다 깨는 거예요. 길 외에 다 깨는 거예요.

창세기 30장 25절에 요셉을 놓고 난 뒤에는 라헬이 자기 친정집을 떠나길 원합니다. 다시 시가집인 남편의 고향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빈털터리에요. 무려 14년 동안 노동하고 임금은 없었고요. 그다음 나머지 6년 동안 라반이 품삯을 10번이나 고쳤어요, 10번이나.

자, 이 이야기할 때 아까 제가 처음 물은 것 기억하세요. 별이 파괴되고 떨어지는 것이 종말의 징조가 아니라 언약 백성에게 난데없이 고난과 아픔이 올 때 그게 인류의 멸망의 징조입니다.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이 라반이.

29절에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나중에 나옵니다만 일단 30장에서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의 품삯을 정할 때 월급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삼촌에게 줄 것 주고 나머지는 내 것 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32절에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라” 그리고 난 뒤에 33절에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그리고 난 뒤에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36절에 보면 야곱과 라반의 두 양 사이에 사흘 동안 딱 길을 떼게 만들어요. 그리고 신풍나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해서 살찌고 건강한 양이 새끼 놓을 때에 껍질 벗긴 무늬 앞에 세워서 임신케 해가지고 전부다 얼룩지고 점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건강한 것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약한 양이죠. 약한 것만 남아있는 겁니다.

31장에 보면 라반 쪽의 사람들, 라반의 아들과 그 종들이 야곱이 아버지 소유를 다 빼앗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했어요. 그럴 때 31장에서 야곱이 두 아내를 부릅니다. 불러서 옛날에 아버지가 자기를 속여서 당신 둘하고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건 과거사니까 하지 않고 지금 두 아내와 더불어서 아버지에 대해서 정을 떼게 만들어요. 그리고 31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13절에 네가 네 출생지로 가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두 아내를 설득했어요. 그러니까 14절에서 라헬과 레아가, 아버지하고 우리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15절에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아버지하고 우리하고 따로 떼어냈습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다음에 나오는 19절에요.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이 드라빔이 나오는데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드라빔. 이 드라빔은 누구의 신이냐 하면 라반의 신이에요. 라반의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드라빔의 기능이 있어요, 기능. 이 기능은 현재 나의 주인공 됨, 나의 소유성을 보장해주는 기능이에요.

그렇다면 둘째 딸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친 것은 이런 신들을 옛날에는 다 갖고 있었어요. 드라빔은 원형이 있고요. 복제물을 만들어서 자식들이 멀리 여행할 때 이 여행을 무사히 안정적으로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원할 수 있는 일종의 부적 같은 것으로 그 당시에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급하다 보니까 딸이 원판 되는 드라빔 우상을 그냥 훔쳐온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라반이라는 삼촌이 자기 드라빔 없어진 것을 뭐로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이걸 저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이 있죠. 여호와 하나님은 참 신이죠. 우상이 아니잖아요. 참 하나님이 주어진 계시의 주체자는 사랑이 지나가면 그 주위에 저주가 발생되는 거예요.

라반 삼촌의 실제 모습,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자식보다 내가 우선이에요. 자식이 재산 좀 가지는 것보다 자식하고 연 떨어지는 것보다 내가 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 거예요. 나는 나를 지키는 자니까. 나는 나를 사수하고 보호하는 자니까요.

여기에 무슨 하나님 믿는 의지가 있겠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실천한들 주님에 대한 의지가 나와 나 사이의 틈을 떼어놓겠습니까? 떼어놓지 않죠. 이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자기로부터 자기를 떼어낼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에요. 그걸 라반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저주에 바들바들 떨면서 뭐 딸이 가는 거 신경 안 써요. 내 하나님 내놓으라는 거예요. 내 하나님 내놔라. 사흘 동안 헥헥거리며 찾아왔는데 찾아온 이유가 내 소유성을 실제적으로 지켜줄, 내 꿈을 지켜줄, 내 인생 전부를 지켜준 그 신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 드라빔을 뭐로 바꾸면 이해되겠습니까? 하나님, 삼위일체, 예수로 바꾸면 딱 떨어지죠.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생활 어떻게 하는지. 내 예수를 왜 욕하느냐고 내 하나님 왜 욕하냐고. 믿음 좋아 보이는데 이상하게 아까 첫째 시간에 한 원리에 위반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은 훼손될 게 아무것도 없다’를 소위 하나님 믿는 사람이 그걸 인정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욕한다 해도 욕 얻어먹을 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확정되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빨은 빠지면 흔들리지만 주님은 이빨 뿐 아니라 흔들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까 마태복음 28장에서 했죠. 천사가 와서 여자가 예수님 시체 찾는 거 보고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게 뭐였습니까? 무서워 말라. 그분이 여기 계시지 않고, 그다음 말은 인간들 같으면 저기에 있어, 이런 건데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났다.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포착할 수는 없지만 주께서는 무슨 사건이든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위치에 계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주인공이지 내가 주인공 아니니까. 우리의 주인공 노릇은 오늘로 그만~ 오늘로 그만입니다. 말로만 그만하지 말고 진짜 무서워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죠.

그래서 창세기 31장에 드라빔 소동이 벌어진 거예요. 그동안 라반 삼촌이 10번씩이나 삯을 계약적으로 계속 변경시키면서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 그것은 야곱의 입장에서 삼촌이 자기를 도적질한 걸로 보는 거예요. 그때 야곱은 본인이 자기를 주인공으로 여긴 거예요, 주인공으로.

그런데 아까 31장 11절에서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다음에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벧엘의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이 계시한 곳으로 여기서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하란에 갔다가 라반 삼촌 집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야곱이 계시의 주체자로 바뀐 거예요. 계시가 주인공이 되고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자아가 된 겁니다, 돌아오면서.

40절 보겠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왔습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계약 위반했습니다.”

42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계시죠. 언약입니다.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보냈을 겁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일 때는 자기가 주인공이었어요. 자기가 주인공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이 택한 백성이니까 어떻게 고쳐야 되지 않습니까? 고치는 방법이 뭐에요? 외삼촌 집에 가서 살게 하고 거기서 야곱이 내가 주인공이 아님으로 고침을 받고 다시 벧엘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여정입니다. 주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찾아오실 때 나는 내 주인공이라고 우겼는데 주님께서 사랑이 지나가면 주위에 저주가 일어나야 되고 그것을 통해서 더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됩니다.

24절 보겠습니다. 심지어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인간 대 인간의 연대가 더는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찢어버립니다. 인간 대 인간의 연대는 찢어버려요. 여기 야곱을 통해서 아버지와 딸 사이가 찢어져버리죠.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와야 됩니다.

인간 대 인간의 연대는 꿈과 권력의 공동체가 되고 그 속에서는 환상이 마치 실재인 것처럼 인간은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십 사년 플러스 육년간이나 남의 종노릇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이 모든 품삯을 하나님이 개입해서 야곱의 것으로 줬잖아요. 더는 야곱의 것이 더 이상 야곱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이 됩니까? 이게 바로 주님이 나에게 계시 주셨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이 야곱이 받았던 품삯은 누구 것이라고 우겼던 겁니까? 라반의 것을 주께서는 빼앗아서 야곱에게 준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보여주는 억울한 피였던 겁니다. 억울한 피였어요. 처음에 야곱이 억울하다고 하죠. 억울하다고 하고 가만 보니까 그 억울함이 야곱은 본인의 억울함으로 그치면 안돼요.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억울한 피와 관련되어야 돼요. 그게 바로 벧엘의 하나님의 억울함.

그것이 32장에 나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진짜 억울한 분을 만나게 하시죠, 얍복 강가에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만나고 난 뒤에 33장에서 자기가 속여먹었던, 아버지 재산을 몽땅 차지했던, 비정상적이죠, 그 형이 올 때 형 앞에 그가 일곱 번 굽히고 절하죠. 33장 3절.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을 형한테 바치죠.

그렇게 하니까 형이, 동생이 고생해서 얻은 것을 받으니까 형이 또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형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하죠. 그러니까 야곱이 “제가 형한테 은혜를 입었사오니 청컨대 내 손에서 예물을 받으시고 내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이게 지금 오버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형이 있어서 내가 이스라엘 된 거예요. 예상 밖의 내가 된 거예요. 내가 예상한 꿈의 내가 아니라 내 모든 욕구를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욕망에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내가 주님의 요구사항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니까 그까짓 거 절하는 게 뭐가 대수입니까. 나 같아도 절하겠다. 그래서 그들 둘 사이가 화목케 되었어요.

33장 15절에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대전 강의 두 번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죠. 어떤 사람이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니까 막 저주를 퍼부으면서 ‘저거 죽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그때는 몰랐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위암 4기가 돼서 정신없어 돌아다니더라. 그때부터 미운 감정이 싹 가시고 아이고 불쌍한 인간. 곧 죽을 거... 너 나 욕해도 돼. 곧 죽으니까.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주위에 저주받을 불신자를 그렇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사랑이 지나가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찾아오셔서 더 이상 우리가 주인공 안 되게 해주신 이걸로 인하여 우리에게서 어떤 무서움과 두려움이 날라가버리고 그저 주님의 껍데기로서 주님 안에 계시의 사람으로서 마음껏 활용되는 것을 두고두고 감사하고 은혜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강의 중 나오는 도표 그림입니다)
그림 설명:
【의지로는 뭐라도 할 것 같지만 막상 실천에는 주저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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