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롬3장 21-24(율법외의 한의)130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장 21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인간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개인이 파산상태에 있는지 혹은 취업이 잘 되었는지 혹은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자식이 아픈지 죽든지 불구인지 멀쩡한지,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신경 쓰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만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식입니다. 그래놓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했던 그 일을 믿지 남이 하는 일은 안 믿거든요. 남이 하는 일은 자기 일보다 관심이 덜 하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자기 하는 일만 믿어요. 이 말은 자기 자신만 믿는 대상을 향하여 그 사람이 한 것 말고 본인이 한 것을 따로 진척시켜놓고서 하는 말이 “내가 하는 일을 믿어라” 하는 그 말은 네가 하는 모든 것이 다 헛방이라는 뜻입니다. 네가 하는 일을 네가 현실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현실이 아니다, 라는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고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궁금해서 매달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잘될는지 못될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니 말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만 챙기는, 자기만의 문제를 가지고 신을 찾는 그것을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라고, 그것이 바로 네가 만든 신이라고, 나는 그런 종교와 싸우겠다고, 그런 종교를 부정하고 정죄하고 저주하는 하나님이 진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구약에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실을 믿어라.” 실컷 내가 하는 일을 완전히 묵사발 만들어놓고 “네가 묵사발이 되었나?” “묵사발 되었습니다.” “그것을 잘된 일로 믿어라.”
이렇게 나오니 평소에 자기가 자신을 믿든 그 버릇으로 어떻게 하나님마저 포섭하려고 시도를 해봤는데 내가 믿던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망가지라고 하니까 자기가 망가져버린 상태에서 무슨 하나님을 포섭해서 불러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런 불평, 반발, 하나님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한 할 말이 참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말씀이 “너같이 똑같이 생각하는 나라가 망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에요. “너 같이 똑같이 생각하는 나라가 망했다. 하나님 잘 믿는다고 자부했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서 축복, 축복, 입만 떼면 축복, 연초에도 축복, 연말에도 축복, 축복과 축복만 기대하고 왔던 그들이 망했다. 그들이 망했는데 내가 망하라고 일부러 율법을 줬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막상 받은 이스라엘은 반대로 생각한 거예요. 안 망하라고 율법을 줬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저주 안받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로마서 3장 19절 20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의롭다 할 인간이 없다는 말은 “이제 네가 죄인인 줄 알렸다.” 그런 뜻이고 “네가 죄인인줄 안다면 내가 너에게 멸망하고 저주하고 지옥 보내도 너는 별 이의 없지?”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더 엄청난 말씀은 “그런 하나님을 네가 믿으라.” 그 말입니다. 사람들의 심보가 믿을 때는 자기가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믿어요. 계산기 튕겨서 ‘이것은 나에게 이익이겠다.’ 이렇게 나한테 잘되겠다 싶은 것만 골라서 믿어요. 그런데 나는 내가 망해도 싼 인간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도 우리는 그런 믿음이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생겨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망해가면 되지요. 문제가 굉장히 쉬운 거예요.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고 다 망해버리면 천국에 가 있는 엘리야, 엘리사, 모세, 아브라함, 야곱, 저쪽 사람들은 무슨 재주로 하늘나라 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저 사람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그래서 다 같이 못 믿는데, 인간은 자기만 믿을 수밖에 없는데, 인간이 자기만 믿을 수밖에 없는 그것은 믿음이라고 취급도 안 해주고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한 것을 믿으라.”하는데 그 믿음은 나한테서 나올 수가 없지요. 왜, 나한테 손해가 되니까. 미쳤다고 사람이 자기 손해나는 짓을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짓이지요.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 믿는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국에 하늘의 별처럼 가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저들은 무슨 수를 쓰고 어떤 뇌물을 바쳐서, 어떤 머리를 굴려서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 외의 한 의”라는 말이 나옵니다. “율법외의 한 의.”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것은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했거든요. 율법외의 한 의가 있다는 겁니다. 율법외의 한 의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일방적으로 주께서 실시하는 겁니다. 하여튼 하나님은 사전에 우리하고 의논하는 법이 없어요. 행여나 우리가 믿을까 싶어서 우리하고 의논을 하지 않아요. “아하, 그 아이디어는 제가 압니다.” 혹시 이런 소리 할까 싶어서 자꾸 비켜나가요. 율법 외의 한 의란 아이디어도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율법외의 한 의도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 우리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만 그것을 믿을까, 말까, 믿을까, 말까, 하고 재기 때문에 율법 외의 한 의라는 것은 우리 사전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 외의 한 의가 뭐냐?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여자 분이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했어요. 결혼을 하지 않는 아가씨보고 어떤 결혼한 여자가 신신당부를 합니다. 결혼 할 때 제발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혼해야 된다는 것을 서너 번씩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요. “결혼할 때 신중해야 됩니다. 덜렁 생각 없이 하면 안 됩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봐야 됩니다.” 그렇게 강조를 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혼 생활을 해보니 처녀 때 생각했던 결혼생활과 전혀 달랐다는 것인데 대놓고 결혼 한 것을 후회한다는 소리를 대놓고는 못하니 우회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저 아내와 결혼 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남자의 대답이 아주 명답이에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겠습니다.” 저 여자하고 결혼하느니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뜻이죠. 이 결혼 문제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서 언급을 하고 있어요. 로마서 7장에서 결혼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인간을 결혼방식으로 구원하는데 인간이 결혼 상대자를 뽑을 때는 자기가 상상한 범위 안에서 선택하고 찾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율법 아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율’자를 빼버립시다. 이렇게 합시다. 인간은 법아래 있습니다. 인간이 법아래 있기에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이 법으로 생각합니다. 법으로 생각하기에 ‘내가 이만큼 착하니까 상대도 나만큼 착해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배우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택한 여자여, 너는 항상 내가 선택한 그 범위 안에서만 놀아라. 그 바깥으로 튕겨나가 버리면 난 당신과 결혼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여자 쪽도 마찬가지거든요. 나는 이런 면면을 따져서 이런 남자하고 결혼하겠다는 이것을 어디서 끄집어냈느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법테두리 안에서 끄집어냈거든요. 이 법테두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착하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 정도 생각하니 참 착한 사람이 맞아. 나는 착한 사람이 맞기에 내가 착한 만큼이나 너도 착한 남자 맞았으면 좋겠다.’라고 자기의 착한 범위 내에서 남자를 찾게 되어 있어요. 이럴 경우에 나는 착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이럴 경우에 나는 악하다고 평가를 내리는데 그 착하다고 평가한 범위 내에서 내 남편감을 고르겠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그런 남편하고 결혼했는데 연애할 때는 그 착함의 범위 안에 들어오더니 결혼하고 나니 그 착함의 범위를 벗어나서 자기가 악하다고 분류한 범주로 막 침범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저 남자와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결혼뿐만이 아니에요. 절이나 갓 바위에 가보세요. 일반 모든 종교가 뭐냐, ‘나는 착하다. 복을 바라도 염치없이 바라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정도 정성과 진정성과 경건함과 착함을 드리고 그 대가로 이만한 행운과 축복을 올 한 해도 풍성히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양심상 나는 착하고, 여기서 이방인에게 양심은 율법이죠, 그러니까 법적으로 나는 항상 착한 쪽인데 어느 정도착하냐 하면 신에게 복을 따낼 때조차 해줄 만큼 해 줄 정도로 해 놓고 그 다음에 복을 원할 만큼 착하고 순수하고 양심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교가 없더라도 그런 생각을 다 하는 거예요. “얘야, 집안 잘 되기 위해서는 나쁜 짓 하지 말고 남한테 해코지 하지 마라. 파출소 끌려갈 짓 하지 않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하나님이 다 복 주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옛날 어른들이 종교와 관계없이 덕담할 때 다 이야기한 거예요. 그저 “남 괴롭히면 안 된다. 괴롭히면 너한테 화가 돌아온다. 그러면 우리만 손해된다. 그저 어딜 가도 착하게 살아야 나중에 누구를 통해서라도 복이 온다.” 여기에 대해서 누가 거부했습니까? 거부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법아래, 율법아래 있기에 법을 주신 하나님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법으로만 자신을 규정하고 그 규정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나서서 세상이 온통 법적인 차원이 된 거예요. 종교도 마찬가지에요. 절에 가서 법으로 따지던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교회로 몰려오네요. 200년 전에 교회가 생기니까 절에 가서 법 따지던 사람들이 교회로 다 몰려왔어요. 교회도 법으로 좋다고 다 받아들였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니 ‘성령을 받기 전에는 너희가 법적으로 부부생활을 했다. 율법적으로 아내를 맞이했고 율법적인 남편으로 살았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율법외의 한 의로 산다.’고 하지요. 율법 외의 한 의,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율법이라는 그 범주, 사람은 그것밖에 몰랐습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법아래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출발점이 이거예요. ‘나는 법적으로 착하다.’
‘나쁜 짓을 전혀 안했다는 말이 아니고 나쁜 짓 더러 했지만 착한 일 한 것이 다 많기 때문에 더하기 빼기 계산하면 항상 여분의 착함이 결론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착하다. 나는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하든지 누구를 대해도 착하게 대한다. 그래서 배우자를 원해도 나처럼 착한 사람을 원하고 내가 착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만 부부생활하기를 원한다.’ 그게 우리의 법적인 생각인데 하나님은 ‘율법 외에’, 그런 법 말고 다른 쪽을 선택 했어요. 우리는 율법에서 시작했기에 법이 전부인 줄 알고 법 잘 지키고 예수 믿는 법도 잘 지키면 그 법 잘 지켰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으로 절에 가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서 성경을 펴니까 성경이 다 법으로 보이는 겁니다. 법으로 보이니까 법으로 따지는 것만 이해가 되고 다른 것은 이해가 안돼요. 이번 수련회 할 때 고린도전서 6장의 대목을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10절에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강의에서 한 그대로 해 볼게요. “저는요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술 한 잔도 안 먹었어요. 누가 술 먹으라고 ‘목사님, 한 잔 해도 괜찮습니다.’ 해도 저는 안 먹었어요.”
그런데 여기 보니 ‘술 취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술 취한 자는 천국 못가고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럴 때 법적으로 제 마음이 얼마나 신나고 기쁘겠습니까? “술 취하면서 술 먹는 인간들 다 지옥가거라!” 왜, 나는 술을 안 먹었으니까. 저의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술을 먹기는 먹었지만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핑계도 그런 조잡한 핑계를 대고 있어요. 술은 취하는 맛에 먹습니다. 취하지도 않는 술을 무엇 때문에 마시겠습니까? 맹물이나 마시자. “오늘도 한 번 취해 봐? 그 때 그 기분이 그리워.” 그래서 한 잔 먹지요. “남편이 또 늦네. 에이, 포도주 마시고 술김에 남편 들어오면 분풀이 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했으니 망정이지 성경에 이런 대목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예요. 알코올중독이나 음주운전 같은 차원이 아니고 술 취한 자는 아예 천국을 못 간다고 해요. 정신이 번쩍 나지요. 제사 지내는 사람 끝났어요. 음복은 다 했지요. 그럴 때 갑자기 나 자신이 무슨 차원으로 달라지는가하면 성경말씀을 법적인 차원으로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성경말씀은 내 속에 숨어 있던 법적으로 정당하기에 천국 간다는, 사랑이 아니고, 법적인 그 습관과 느낌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운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 보는 순간 나는 술 안 먹었기에 천국가고 술 먹는 인간들은 지옥 간다고 하는 그 순간 내가 바로 이런 생각하는 자체, ‘술 안 먹었기에 의롭고 의롭기에 천국 간다.’는 이런 생각 자체가 저주받을 생각이라는 것을 고린도전서 6장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일깨워 준겁니다.
예수님의 피, 십자가, 그 짧은 순간에 다 날라 가버렸어요. 우리가 율법을 벗어났다가 장담했지만 우리의 심성에는 부글부글 끓는 것이 있어요. ‘나는 정당하다. 남은 지옥가도 나는 천국가기 합당한 존재다. 나는 무조건 착하고 무조건 정당하다. 나는 선하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이것을 가지고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어요.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거든요. 악마가 찾아와서 선악과 따 먹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까만 매직으로 써 있는 죽음을 지우는 방법이 뭐냐, 없애버리면 되지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써 놓았다면 잔디밭에 들어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팻말을 뽑아서 버리면 되지요. 그러면 더 이상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는 그 말이 없기에 거기 들어가도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마세요, 하니 선악과나무 자체를 내가 먹어서 없애버리면 더 이상 나한테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지적할 것도 없고 지적이 없으면 죄가 없고 죄가 없으면 죽음도 없으니까 그런 방법을 쓰라고 악마가 우리에게 요청한 거예요. 우리한테 지시한 그 자체를 없애버리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내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가 언제인가? 아내가 곤하게 잠들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답니다. 왜냐하면 잔소리가 정지될 때이니까. 죽여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뭐든지 나보고 “너 죽는다. 너 지옥 간다.” 하면 없애버리면 그만인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사건이 뭐냐, 예수님을 제거하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보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한다는 말이지요. 미쳤어요? 법적으로 나를 정당화시키고 싶은데 “네가 한 짓을 네가 인정하는가?” 이렇게 나오니까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의 뜻이 그겁니다. 믿고 싶어도 못 믿게, 그래서 안 믿게 만드는 겁니다. 안 믿게 만들면서 믿으라고 하니 그 믿으라는 것도 하나의 율법적 기능이 되어버렸어요. “거봐. 안 믿잖아.” 그런 뜻이에요. “천국 갈 기회를 줘도 네 쪽에서 거부했잖아.”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것이 왜 중요한가, 선악과를 따먹어버리면 선악과가 우리한테서 사라졌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선악과가 우리 속에 본격적으로 내장되어서 여기서 폭발해 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은 선을 안다는 그것이 죄가 되고 선을 알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는 “나는 선한 것이 뭔지를 알기에 나는 선한 존재다.”라고 우기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걸 몰랐어야 했어. 네가 몰랐으면 살았어. 네가 선이 뭔지를 알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죄가 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악이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한테 법이 들어온 거예요. 법이 들어와서 우리는 선을 어떻게 따지는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의 분류를 시키는 과정에서 ‘이것은 악이고 이것은 선이다. 가만 있자. 악이 적고 선이 많아. 빼고 남는 쪽을 보니 역시 나는 선한 쪽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그것이 날로 너로 하여금 저주와 죽음으로 이끌게 만든다는 겁니다. 차라리 악이었으면 좋겠는데 선을 알기 때문에 자꾸 우기는 심보가 작동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나는 아직도 이래도 착하다고 우기는 겁니다. 마치 부자가 지옥 가서 천국 간 나사로보고 손가락으로 물 찍어서 나에게 주게 하라는 식으로 여전히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딜레마, 예수 믿어서 착한 사람 되고 싶다는 그것도 죄가 되니까 예수 안 믿는 것도 죄, 예수 믿는 것도 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믿으라고 하지만 믿을만한 내용도 아니고 안 믿으면 안 믿었다고 저주해버리고. 믿을만한 것도 아니어서 안 믿었는데 믿음 없다고 따지고 믿고 싶어도 믿을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못 믿어지고.
그러니까 교회가 다들 지옥가고 있으면서 천국 가는 시늉을 내는데 그게 뭐냐, 법적으로 목사 말 듣고 봉사하는 식의 법적인 것으로, “여러분, 교회 까지 나오시니 참 훌륭하십니다. 게다가 예수 믿는 착한 일을 하니 얼마나 더 훌륭하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런 사기와 이런 거짓말로 완전히 도배를 해 놓은 거예요. 아무 착한 것도 없고 아무 선한 것도 없는데. “당신은 이러면 착하고 이러면 악합니다.” 그런 멘트를 날리는 것도 악합니다. 왜, 선악과 따먹은 짓을 하기에. 그 말을 못 알아들어야 하는데 그 말을 알아듣는 그 자체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벌써 뭔가 먹은 것이 있어서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알아듣는 거예요. 그것을 못 알아들어야 되는데.
여기서 우리 쪽에서 기대하는 해결점은 없습니다. 왜냐, 성경은 우리의 의사를 들어주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그냥 밀어붙이는 것뿐이에요. 우리 쪽에서 할 것은 없어요. 우리가 구원 못 받는다고 주께서 안타까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냥 자기 일을 실시해요. 어떻게? 율법 외에 한 의,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킬 뿐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정리해보면 우리가 율법 안에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때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 율법 외에 한 의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안에서, 그것만 설명한 거예요. 율법외의 한 의가 뭐냐,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뭐냐, 사랑이 뭔가를 논리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제가 들었던 이야기를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거예요. 아마존에 갔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마태복음 5장 29절을 언급한 적이 있어요. 자기가 처음 하나님을 알았을 때 이런 고백을 했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난 뒤에 성경을 봤는데 마태복음 5장 29절을 봤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대하고 난 뒤에 그분이 “하나님이여, 저의 오른 눈을 빼주시고 제 오른 팔을 잘라주세요. 왜, 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은 거예요. 오른 눈을 빼버리라고 할 때 “빼도 좋습니다.”가 바른 해석이에요. 오른 팔을 자르라고 할 때 “왼팔도 포함해서 다 잘라도 좋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너와 나 사이에는 너의 착함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느끼는구나. 그 느낌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를 살게 하는 분을 만난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 분을 만난 거예요. 그 분 앞에 서면 오늘 이 시점으로 내 인생 끝장내도 좋아요. 왜, 알 것 다 알아버렸으니까. 알 것을 다 알아버렸어요. 나를 만드신 분을 알아버렸으니 내가 더 이 세상에 있을 하등 이유가 없다니까요. 내가 이 세상 더 살아봐야 내 이익만 챙길 거니까. 그런 죄를 내가 세월 보내가면서 계속 지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믿을 때 오른팔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오른 눈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이용하는 거예요.
자기욕심에 집착을 해서 뭔가 나를 분발하게 해 달라는 이것은 용기입니다. 용기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용기마저 죄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쓰러져도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것은 용기고 “제가 여기서 그냥 못 일어나도 주님만 활동하고 계시면 그것을 충분하고 저는 만족합니다.” 이렇게 돼요. 내 대신 내 인생 살려주는 분을 만나면 그것이 사랑을 만난 거예요. 여러분, 결혼은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대만 있으면 나는 지금 죽어도 좋아, 이게 사랑이잖아요. 그 대 앞에 서면 내가 왜 그렇게 작아지는가, 점점 더 작아져야 돼요. 나는 있으나 마나 해야 돼요.
가끔 여자 분들이 그런 사랑을 남자한테 표현할 때가 있어요. 옛날에는 월급을 은행으로 넣지 않고 월급봉투로 줬잖아요. 25일 월급날 월급봉투 가져오게 되면 갑자기 아내가 바빠요. 앞치마를 두르면 “오늘 잡채 해 줄게.” 한다고요. 갑자기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도 좋다’는 그런 마음입니다. 사랑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제정신이 아니어야 돼요. 인간이 제정신이 들면 그것은 율법이 돼버려요. 내가 저 사람 만나서 얼마나 이익을 봤나, 손해를 봤나, 따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함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이야기를 하면서 참 어려운 말을 해 놓았어요. ‘너희는 이제 성령과 결혼했다. 전에는 율법과 결혼했지만.’ 이렇게 합니다. ‘전에는 율법과 결혼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 헤어지고 성령과 결혼했다.’라고 했을 때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의 어려운 것이 있어요. 하나는 율법과 결혼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 그 다음에 성령과 결혼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둘 다를 알아야 돼요. 율법 안다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율법과 결혼했다는 것이 뭐냐,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그 다음부터는 쫓기는 생활을 합니다. 수련회 때 네 글자로 이것을 도피행각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주체는 자꾸 도망을 쳐요. 어디로? 알 수 없는 불안과 밀려오는 공포한테서 끊임없이 도망치듯이 사람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따져보세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뭔가 쫓기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뭔가에 자꾸 쫓깁니다. 계속 쫓기기에 쫓기는 상태에서 하는 행동들이 어떤 것들이 나오는가하면 술과 마약과 담배, 그리고 과도한 취미나 오락들, 노래방 가는 것도 그렇고 경건하게 보이는 행동들 하기, 교회에 열심내고 봉사하기, 구역예배 모이기, 성경공부에 몰두하기, 이런 행동들을 분석해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쫓기는 불안심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코를 너무 파서 피가 나듯이 인간은 자꾸 불평불만을 하면서 계속해서 땅을 파요. 알 수 없는 데서부터 쫓기듯이 도망을 치고 있는 겁니다. 도망치면서 뭐라고 구시렁거리는가하면 “하나님이여, 그래도 내가 착한 것 맞지요? 착한 것 맞는데 내가 왜 불행합니까?” 다시 할게요. “내가 착한데 왜 불행합니까? 착하면 불행 안해야 되는데 착한데 왜 자꾸 불행이 밀려옵니까? 해결책도 없고 해답도 모르겠고 내가 미치겠습니다.” 웃다가 웃음이 그치면 다시 뭔가 쫓기듯이 인생이 스산해지고 음산해지지요. 대체 어디까지 도망을 쳐야 되고 술을 얼마나 퍼마셔야 되고 도박을 얼마나 해야 되고 승진이니 이직이니 또 어떤 몸부림을 더 쳐야 내가 이 불안과 공포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지, 얼마나 더 착해야. 인간이 이렇게 공포와 불안을 행하는 일 중에 하나가 놀랍게도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사랑은 율법 외에 한 의, 그 사랑인데 그 사랑 말고 인간이 자기 법을 잊기 위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사실은 도피행각에 불과한 거예요. 행함에 불과한 겁니다. 몸부림치는 겁니다, 뭔가 무서워서. 무서움에서 나오는 하나의 몸서리치는 하나의 동작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불안에서 쫓기지 말고 아예 불안이라는 블랙홀 안에 본인이 자진해서 풍덩 뛰어들면 어떻겠습니까? 풍덩! 불안이 나무를 갉아먹는 전기톱이라면 아예 그 속에 자기를 집어넣어버리면 갈기갈기 찢겨서 산산조각 나겠지요.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바로 이 방법입니다. 율법 외의 한 의에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어떻게 하는가? 주께서 강하게 끌어당겨서 평생 도망만 치면서 늘 불안해서 “착한데 왜 불행한가요? 하나님, 더 착해야 됩니까? 어느 정도 착해야 됩니까?” 지금도 기도원에 가 보세요. 착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이 추운 날 기도원에 기도하러 갔다가 엎어져서 여기 저기 부러져서 깁스 하고 있는 사람도 있어요. 기도원에 왜 갑니까? 착하면 착할수록 하나님의 복 받는다, 그것 때문에 가잖아요. 제 말은 착해지지 말라는 거예요. 착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착해지는 사람도 없어요. 기도해서 착해지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를 따라오는 그 불안과 공포에 마주서서 아예 날 잡아 먹으라고 그 안에 들어가 버리세요. 톱니바퀴 속에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혀 죽어버리세요. 날마다, 매일 같이. 그러면 내 쪽에서 저쪽에 다가서는 수는 없습니다. 왜, 자기 쪽에서 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것도 사랑이 아니고 가식이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도 사실은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비극과 불행에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사랑이기에 그것은 헛 사랑이고 되도 않는 소리에요. 그것은 다 까부는 것이고 자기가 꾸며내는 짓이에요. 하나님은 율법이라고 해서 모든 인간을 저주아래 두시고, 그 다음에 율법 외에 한 의, 로 구원하는데 율법과 율법 외에, 이 사이를 건너가는 다리는 우리 쪽에서는 없어요. 성령이라는 남편, 성령을 통해서 율법에서 율법 외에 한 의로, 사랑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건너가게 하시는데 그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율법 안에 있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냥 육체였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보고 그 육체가 나 인줄 알고 화들짝 놀란 거예요. 우리는 으레 그렇게 당해도 되는데, 그렇게 당하다가 나중에 찢겨서 죽어버리는데 마치 우리는 이 몸이 전부인줄 알고, 늙어가는 이 주름진 몸, 백 날 찍어 바르고 당겨봐야 도로 풀어지는 계속 늙어가는 이것이 전부인줄 알고 여기에 승부를 걸었어요. 우리는 죄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편안히 놓아주면 되는데 너무 우리는 여기에, 자기에게 아집과 집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폼을 내려고 한 거예요. 율법 외에 한 의는 우리를 날마다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운 그 사랑의 관계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몸은 아직 안 받았고 죽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서 받을 거예요, 육체는 아직 안 받았지만 그 속사람은 이미 영광된 몸을 뒤집어 쓴 부합된 속사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마음이 여기서 발생이 됩니다. 그 마음이 뭐냐, ‘나는 주님을 알았고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알았으면 더는 무엇도 필요치 않다.’는 그 마음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 90이 되어서 죽는 시점이 와도 역시 같은 소리, ‘나는 나를 만드신 분을 알았고 나를 구원하는 분을 알았으면, 그 분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그 마음. 이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비극이니 희극이니, 그것을 벗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기에 다른 사람은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지만, 그러면서 죽음에 쫓기지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내 지시도 받지 않고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계속 내 속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도 묻지도 다지지 않고 그냥 주님의 사랑을 받은 거예요. 우리를 위하여 누가 죽으신 거예요. 난 날 위해서도 안 죽을 정도로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한데 날 위해서 먼저 죽으신 분이 있고 그 죽으신 소식이 우리에게 도달되면 그 도달된 흔적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믿음은 “죽어도 살아요.” 하는 믿음, “죽어도 괜찮아요.”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을 알았으니 이 팔 잘리고 오른 눈 잘려도 저 괜찮아요, 하는 그 고백, 그 사랑이 우리의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여자의 팔자는 남편하기 나름이에요. 남편에 달렸어요. 주님께서는 그동안 우리가 율법으로 시달리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뻔히 아시고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를 주셔서 남편이 우리를 커버해주니 이것은 우리의 율법의 행동에 관계없이 22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고 그 다음에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는 이 말은 우리는 하나의 그릇이고 이 그릇에 예수님의 의가 그냥 꽉 차버린 거예요. 우리는 이제부터 뭘 해도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그쪽 방향으로 쓰이기에 어두운 불안과 공포로부터 이제는 안 쫓겨도 괜찮아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사기인가, 그냥 위로삼아 하는 이야기냐, 아니면 진짜냐 하는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에서 어떤 분이 죽었고 있을 수도 없는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남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함을 깨닫고 오직 나처럼 살 사람은 너희 중에 따로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알 수 없는 불안, 좋지 않은 경제사정, 하루하루 못 먹고 살면 그것이 비극이고 불행이라는 것, 불행에 쫓기고 비극에 쫓기고 죽음에 쫓기는 서글픈 인생, 가봤자 끝이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우리의 모습,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먹지 말아야 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는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나 이제 성령이 찾아오셔서 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다 해결해 주시니 이제는 주님이 구세주인 것을 알게 된 그 사랑과 기쁨 외에 더는 필요치 않은 자유로운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