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성경이해에 꼭 필요한 말씀1(파수꾼)-(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31. 12:05

 

파수꾼(겔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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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2-10-03 21:37 
파수꾼

2012년 10월 3일                         본문 말씀: 에스겔 3:16-19

(겔 3:16, 개역)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3:17, 개역)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 3:18, 개역)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 3:19, 개역)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세상 사회란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구성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이겨내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비록 사람들의 뜻대로 안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런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으로 활약하여 기어이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겁니다.

즉 세상에 맞추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세상 역사를 의지로서 만들어내려고도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 속에는 한 개인은 독자적인 삶을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주변의 관심사에 참여해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해줄 때, 비로소 본인이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독불장군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은 인간 세계가 가져다 주는 효과입니다. 이런 효과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에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살 기분이 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과의 대화나 관계에서는 공통적 인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질적인 것은 배제해야 하고 혹시 딴 생각을 잠시 품더라도 곧장 타협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개입해버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악인에게 말해라!” ‘악인’이라는 규정으로 인간들의 공통적 인식 속에 들어가면 필시 인간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성을 삽입하려 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의 우호적인 내용이 삽입해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적하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죄값을 필히 찾겠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이 무심코 꽁초를 길에 버리듯이 죄짓고는 거기에 대한 대가는 전혀 생각하지는 일반적인 성향을 그냥 방치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창세기 4:10에 보면,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죄 이후에 본격적으로 인간 사회의 개시가 됩니다. 자식이 자식을 놓고 번창하면서 사람들의 세계는 오로지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서 존속하고 유지하고 운영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세상을 움직이는 원칙을 심겨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인의 죽음’입니다. 땅은 ‘의인의 죽음’의 대변자로 행세하게 되고 인간 사회는 이런 땅의 성격을 벗어나서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의인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통하는 노선과 그렇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미움받는 노선을 지정된 채 인간 세상을 진행됩니다.

땅은 이 두 계열을 관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숨겨놓은 질서’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란 실은 이 ‘숨겨진 원칙'을 보좌하는 역할입니다. 숨겨진 원칙의 외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파수꾼이란 하늘과 땅의 경계선상에 서서 땅의 편이 아니라 하늘의 편에 서서 그 원칙을 알릴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명자에게 주어진 질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값’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가 과연 죄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 지옥에 가 있는 부자 사이에 대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물방울들이 아쉬우니 천국에 가 있는 거짓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 끝에 물방울을 찍어 지옥에 있는 자기에게 혀에 닿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물방울이라면 살아 있을 동안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 짓는 것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참으로 자신이 지옥 갈 죄인이라는 점을 미리 안 사람만이 값싼 물방울조차 결코 값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 원하시는 바는 인간 세상 전체를 질퍽한 죄의 세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세상을 보는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안목과 같은 안목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질서에 무지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에게 무서운 죄값을 찾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레위기 5:1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익히 알 수 없는 비밀을 만드시고, 그것을 세상을 알려주시고자 특별한 사람을 호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기존의 세계를 완전히 악한 세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요구받게 됩니다. 이러한 안목이란 인간이 저지른 모든 것이 죄값없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뽑힌 사람은 그 죄값에 같이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이 기존 세상의 질서를 옹호해서 세상에 부정적인 안목을 심어주기를 주저한다면 그 사람은 죄로 받을 그 저주의 값을 친히 담당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을 증거해야 할 것은 단순히 기능적으로 맡은 일을 감당하는 자가 아니라 죄값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자되는 에스겔의 모습은 장차 예수님의 실존을 미리 보여준다는 점을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인간 세상은 하나님이 심어놓은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내막은 성령님이 아니면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르고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이 나옵니다. 이 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나무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창조 속에 그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죄가 물들려지면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원칙이란 바로 그 죄로 인해 피흘리게 되는 의인되시는 분에 쏠리게 됩니다.

천국이란 이 원칙에 눈 뜬 사람에게는 주어집니다. 반면에 세상이 온통 죄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세상의 원리, 원칙을 인정하지 않기에 지옥에서 온전한 죄값을 다 받아내어져야 합니다. 즉 이 세상은 예수님을 피흘리게 되는 죄값이 충분히 치러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두 속성은 공의와 자비를 보여주기 위한 우주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란 결코 인간의 구원 중심이 아님을 밝혀집니다. 오직 예수님 중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값을 예수님이 가져가신 십자가에만 주목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0-04 16:33 
9강-에스겔3장 16-19(파수꾼)1210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장 16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16-19

“칠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하나님과 인자되는 에스겔과의 대화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대화내용에 우리가 건방지게 끼어들 수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끼어들어서 ‘하나님, 이런 식의 거래는 안 됩니다.’ 한다든지 ‘이것은 전혀 하나님답지가 않습니다. 자비가 넘치고 용서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께서 하는 말씀이 이것은 협박도 아니고 공갈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나옵니까? 이게 진정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인 인식을 갖고 있어요. 그 인식에 하나님께서 도전을 하시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어야 단합이 되는데 공통점이라 하는 것은 서로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거예요.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고, 그것이 좋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폭력성향을 지닌, ‘깨우치지 아니하면 죽으리라.’ 하는 난데없이 이질적인 요소를 집어넣어버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자라는 에스겔을 집어넣으면 에스겔은 두 가지를 시험받습니다.

 

“에스겔, 네가 인간이지?” “인간입니다.” “저 사람들도 인간인가?” “인간입니다.” “그러면 네가 사람들과 좋게 지내고 싶지?” “좋게 지내고 싶습니다.” “원수 되는 것은?” “원수 되기는 싫습니다.” 저 사람도 사람이고 인자인 너도 사람이니까 사람은 사람끼리 친하고 싶은 이것이 본성인데 과연 그 본성에서 인자된 에스겔이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 하나, 두 번째는 “인자야!” “예” “네가 내 지시대로 따르겠는가?” “따라야지요.” “내 지시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익히 알고 있는 상식선이 아니고 독특한 것인데 네가 그 지시도 따르겠는가?” “따르지요.” “만약 사람들이 너를 싫어해도?” “그래도 해야지요.” “심지어 사람들이 너를 배척한다 해도?” “그래도 하는 겁니다.”

 

여기서 두 가지, 하나는 뭐냐, 네가 나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겠는가 하는 문제, 두 번째는 에스겔 네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배척당하고 배신당한다 할찌라도 네가 그런 인생을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라고 용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묻는 거예요. 사람에게 미움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를 수 있느냐의 그 두 가지 문제를 인자에게 언급하는 겁니다. 왜 에스겔은 이렇게 보통사람이어서는 안 되는 겁니까? 왜 특출해야 돼요, 이질적이어야 하는 겁니까?

 

본문에 나오는 용어를 한 번 보세요. 하나님계시고 인자된 에스겔이 있고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악인이 등장해요, 악인.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자가 잔소리 안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자 빼놓고 모조리 다 악인이라고 하나님이 규정했다는 것에 대해서 네가 흔쾌히 동의하고 ‘이 악인들아.’ 하고 나설 수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사람 볼 때 악인으로 봤다면……,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하거든요, 유다가 멸망하고 그리고 심지어 예루살렘을 치는 바벨론도 악인이에요, 악인을 통해서 악인을 치는데 하나님께서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악인으로 본다 그 말이지요.

 

에스겔 네가 그런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살 용의가 되어 있느냐를 묻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를 도와주고 너와 같이 있으면서 서로 의좋게 지내던 친구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인이라면 너도 하나님 따라서 덩달아 ‘너는 악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용의가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만약에 친한 친구보고 너는 악인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에스겔을 향해서 난 너하고 안 놀아, 이렇게 나와 버린다면 에스겔 본인이 갖고 싶은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생존의 가능성이 있느냐, 에스겔이 사느냐 죽느냐의 그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만약에 악인이 깨우치면 그 피 값을 에스겔 너한테서는 안 찾지만 만약에 네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 악인이 그냥 악인으로 죽어버리면, 네가 외치지 않고 경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인이 그냥 죽는다면 그 피 값을 너에게서 찾아서 나는 너도 죽이겠다.’ 그 말이거든요. 오늘 본문을 제가 쉽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떤 죄수가 있는데 간수가 있다 합시다. 그 간수에게 교도소장이 말합니다. “어이, 간수!” “예 썰!” “저 죄수 탈옥시키면 그 값을 네가 치르게 되는데 그래도 좋은가?” 이런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얼마 전에 동대구경찰서에서 배식구 통해서 탈옥해서 청도로 도망갔잖아요. 그러면 이래야 돼요. 죄수를 지키고 있던 그 경찰관을 집어넣어버려야 됩니다. 집어넣으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내가 간수였을 때는 못 느꼈는데 직접 사로잡혀 보니까 죄 값이 이렇게 무섭고 죄 값이 이렇게 나의 자유를 박탈하고 견디기 힘들구나. 진짜 배식구를 통해서 탈출할 만 하구나. 이렇게 힘든 것을 가지고.’ 하고 느끼는 거예요.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쉬워요. 그런데 그 죄인이 하나님 앞에 치러야 될 그 죄 값을 알고 죄인을 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그것이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더 쉽게 하면 십자가의 아픔도 모르고 네가 십자가를 운운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예수님 달렸던 그 십자가 죄 값이 얼마나 지독한지에 대해서는 네가 관심도 없고 ‘나는 그것 몰라도 돼.’ 이런 식으로 하면서 십자가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사람이 죄짓게 되면 재미있잖아요.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제일 재미있는 것이 뭐냐, 죄짓는 겁니다. 엄마가 그냥 사과주면 먹든 말든 싫어요. 그런데 먹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먹으면 그 사과가 그렇게 달구나, 그렇게 달아요.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고 잠언서에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재미라 하는 것은 몰래 하는 재미가 독특한 거거든요. 하지 말라, 하는 것은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보다 그 말이지요.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더 탐나고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더 간음하고 싶고, 그게 뭔가 궁금하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면 더 따먹고 싶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되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는데 동원된 그 아픔에 같이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보는 안목을 하나님이 보는 안목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구원이 된 자라야 천국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면서 살수 있다는 겁니다. 천국 가서 지옥 내려다 본 사람이 있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누구하고 대화하느냐, 지옥에 있는 부자하고 대화해요. 아마 070 몇 번인지 전화가 가설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천국 가 있는 거지 나사로를 잠시 저에게 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냥 빈손으로는 말고 저한테 물 한 방울 찍어서 저에게 보내주시면 그 물 한 방울로 저는 참 시원하겠습니다.’ 그만큼 지옥은 가물었다는 뜻이거든요. 지옥이 그렇게 뜨거운 거예요. 그 부자가 지옥에 오기 전까지는 물이 그렇게 귀한 줄 몰랐겠지요. 흔하디흔한 물 한 방울이 지옥에 가니까 천국이 주는 선물인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그가 평소에 마셨던 그 물이 천국에서 온 물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악인이 있든 선인이 있든 상관없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잖아요. 사람들은 그것이 공짜로 오는 것으로 생각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죄 값으로 그것이 온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고 기본으로, 신이 있기에 자기가 만든 것을 기본으로 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이것이 재미있다 이 말이지요. 재미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그 대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겁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죄의 대가가 없는 것이냐 하는 문제지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인간인 이상 죄를 지을 수 있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다 갋아서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대인적인 면모를 갖추겠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죄를 너무 많이 짓다 보니 죄를 지어도 해는 떠오르고 죄를 지어도 달은 뜨고 죄 지어도 세상이 나에게 별 어려움도 안주고 그러니까 죄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아무 대가 치르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에스겔이 담당해야 할 그 죄 값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흘려버린 그 모든 죄 값에 대해서 담당을 해야 되는데 그 담당하는 것이 뭐냐 하면, 저 사람 대신 네가 죽어야 된다는 그것을 제시하는 겁니다.

 

지금 에스겔은 별로 죄지은 것 없잖아요. 죄 지은 것도 별로 없는 인간이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죄라고 지적 안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그 사람이 지은 죄 값을 인자되는 에스겔 본인이 담당한다는 이것은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하나님의 숨겨진 어떤 세상 움직이는 법칙과 질서, 그런 것들이에요. 하나님이 숨겨놓은 그 법칙과 질서 속에는 인간들이 무심코 내 버리는 침이나 콧물이나 담배꽁초나 인간이 무심코 흘려버린 죄들이 하나님차원에서 하나님이 알아서 정화시키는 내용이 초점과 주제가 되어서 그런 세상 죄를 씻어주고 죄를 심판하는 내용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쉽게 해서 “에스겔아, 너 나하고 이야기하자.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는 세상 움직이는 원동력 같은 것인데 바깥에 있는 악인들은 이 내용을 모르고 있다. 따라서 나 하나님은 세상 움직이는 원인과 질서와 법칙 같은 이것을 인자되는 네 입을 통해서 바깥으로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를 모르고 함부로 죄를 심심풀이 땅콩 먹듯이 지었구나.’ 라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만 ‘뭐, 인간이 되어서 죄 좀 짓는 것이 뭐라고. 죄 안 지으면 그것이 신이지 인간인가?’라고 뻔뻔하게 나오면 그 사람에게 죄 값을 치르겠다.”라고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도 본문에 나옵니다만 파수꾼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쪽을 지키느냐 하면 세상 쪽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질서 쪽을 사수하는 파수꾼입니다. 세상과 하늘나라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이 파수꾼이 어느 쪽을 지키기 위함인가, 세상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에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역이 악인이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세상이라 하는 것은 뭐가 되느냐하면, 세상이란 그냥 악인천지다, 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거예요. 전체가 악인이다, 하는 것을 기본으로 다짐을 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더 상세하게 나가 봅시다. 지금 제가 언급한 것이 뭐냐 하면 세상에서는 어떤 숨겨놓은 법칙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법칙이 어떤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악인으로 간주하고 세상 질서를 돌아가게 만드는가, 그것이 궁금한 거거든요. 레위기 5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라도 되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질서가 있는데 이 숨겨놓은 질서라는 것은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만 아시는 겁니다.

 

첫 번째, 모든 비밀은 하나님만 아신다.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누설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누설되는 하나님이 숨겨놓은 법칙과 질서를 공개할 때 그 공개하는 사람이 특정인물로 지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 세 번째 하니까 걱정됩니다. 첫 번째 와 두 번째를 다 잊어버리기에. 첫 번째는 하나님이 숨겨놓은 질서가 있다는 것, 두 번째는 그것을 세상에 누설키로 마음먹었다는 것. 세 번째, 그 특정사람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전달할 때 그 사람은 무엇과 바꿔야 하느냐하면,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왜 목숨을 내놓아야 될까요? 그것은 이미 익히 세상은 이러나저러나 저주받아야 될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아, 네가 나한테 지시를 안 받으면 안 받는다고 해서 조용한 것이 아니고, ‘그래 난 아무 일도 없어.’ 그런 것이 아니고, 인자야, 에스겔아! 내가 너를 택했다는 것은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내가 숨겨놓은 비밀에 의하면 인간들은 전부다 멸망당하게 되어 있다.” 하는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다만 에스겔을 뽑아 세웠다는 것은 너도 그중에 한 사람이지만 내 지시에 따르면, 천기의 누설, 하나님의 비밀을 누설하는 통로로 사용되면 그것은 네가 구원되는 방식이 되고 방법이 된다는 겁니다.

 

너도 죽어야 되는데 내가 너를 하나님의 비밀이 담겼다는 이유 때문에 살리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뭔가 작심하시고 세상 손대기에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시는지 그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 나오지요.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죄짓고 나서 땅의 역할이 무엇인가, 땅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인간 세상이 개시됩니다. 인간세상이 퍼지는 방법은 자식을 낳는 거예요.

 

아들 낳고 딸 낳고 해서 인간세상이 확장이 됩니다. 확장이 될 때 하나님께서 뭘 심어놓았는가, 우리 인간들 쪽에서는 ‘야, 우리 인간이다. 우리끼리 머리 맞대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세. (그러세) 부어라, 마셔라, 축배!’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숨겨놓은 질서를 깔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심어놓은 것이 뭐냐 하면 아벨이라는 존재를 특이한 존재로서 심어놓았어요. 아벨이라는 이 동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가 받아지는 사람입니다. 이 아벨은 가인보다 인격이 훌륭해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걸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아벨의 사적인 능력이나 소질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에다가 특수한 칩, 특수한 정보를 심어놓은 거예요. 아벨이 드린 제사가 제사의 모델, 원형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벨이 드린 제사를 이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하나의 동력으로, 원자력 발전소의 터빈처럼 하나님께서 활용하겠다고 생각하시고 그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줘 버린 거예요.

 

이렇게 받아줘 버리면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가 가인 노선은 떨어져 나가 버리고 아벨 노선은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노선이 되고 마는 겁니다. 창세기 4장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일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놓치기 쉬운데 26절에 보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어요.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나오지요.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니라.”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주의 이름이 나와요. 창세기 4장 마지막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노선, 하나님께서 세상을 진행시킬 때 그냥 방치하신 것이 아니고 뭔가 거기에 심어놓았다 했지요. 그 심어놓은 것, 뭔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접근이 안 되는 요소를 심어놓은 거예요.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써 이미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여지는 이미 남겨 놓았습니다, 아벨 계통을 통해서. 그런데 그 아벨과 가인사이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죽일 때 어떻게 죽이느냐, 죄가 가인을 덮치니까 덮쳐진 상태에서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가인이 자기 마음대로 거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꽈당, 하고 박치기를 시키는 겁니다. 하나는 박치기로 인해서 죽어버리고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는 왜 박았나, 그렇게 묻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물은 것, 땅의 역할은 뭐냐, 땅의 역할은 그 두 주인공이 꽈당, 하고 충돌을 일으키고 그래서 뭐만 받으면 되느냐, 피만 받으면 돼요.

 

그 피가 생명 값이고 동시에 죄를 지었다는 증거물로서 죄 값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린 그 죄 값은 소실되거나 사라지지 아니하는 거예요. 땅은 하나님의 꽉 찬 질서와 원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가줘야 됩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 쓸모없이 내버릴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가지고 둘을 박치기 시켜서 피를 내서 그 죄 값을 치리는 것으로 가인 쪽을 저주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간단해져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의인을 보내서 죽게 만들어서 그 죽은 죄 값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다 받아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고 그 죄 값을 완벽하게 다 받아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지옥을 만들어서 충분하게 다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억울한 피를 흘린 자에게는 천국에 들어가서 그 억울하게 죽은 그 모든 기본이 되는 분, 중심이 되는 분, 예수 그리스도가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그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으로서 세상을 지옥과 천국으로 재편성하고 재 정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는 하늘나라에 꼭 필요해요. 죄가 왜 필요한가, 죄가 있어줘야 피를 흘리게 되어 있고 그 피가 흘려져야 지옥에서 죄 값을 충분히 받아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줘야 무엇이, 무슨 인격, 무슨 가치가 사느냐 하면 이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선악과나무를 심어놓은 그 고유의 가치가 빛이 나요.

 

에덴동산에 심어놓았던 그 생명나무와 선악과,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갖고 있던 공의와 사랑, 사랑과 공의의 본성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다 보여주는 것이 돼요. 그 두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은 있어야 되고 그 세상 가운데 인간은 태어나야 했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했고 따먹어서 가인이라는 인간이 등장해야 되고 아벨이라는 인간도 등장해야 되고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써 가인으로 하여금 그 아벨을 죽이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그 피 값을 제대로, 하나님이 제대로 사랑해 줬다는 그 사랑의 값을 지옥에서 충분히 받아낼 수 있도록 천국과 지옥을 배치해 놓은 겁니다.

 

간단히 해서 이 말을 한마디로 하면, 모든 것은 사람 구원중심, 사람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사건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겁니다. 십자가 죽으신 그 분이 주가 되는 식으로, 주가 될 수 있도록 세상은 모든 것이 재정립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질서였고 법칙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 오늘 본문 중에 보게 되면, ‘인자야, 내가 너를 세웠다.’ 그 이야기고 그 다음에 ‘네가 악인에게 가서 이야기해라. 네가 죽으리라.’라고 하라는 그 말은, 여기 계신 집사님이 에스겔이고 내가 악인이라 합시다.

 

“네가 네 죄로 죽으리라.” 할 때 내가 “동의합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러면 인간은 빠져버리고 남는 것은 뭐냐, 죄만 남지요.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에서 “집사님, 참 훌륭합니다.” “그래요, 나도 애쓴다고는 썼는데.” 이렇게 서로 장점과 장점, 긍정과 긍정, 인정과 배려, 이런 식으로 호응이 되고 단결이 되고 단합이 되고 “당신 나 사랑해?” “나도 당신 사랑해.” 이렇게 되는데 에스겔은 뭐냐 하면, 사랑과 사랑 인정과 인정 호응과 호응으로 엮이는 것이 아니고 죄 이야기를 하고 제가 죄인이 맞습니다, 하고 질퍽한 죄의 바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에스겔을 불러서 지시한 취지입니다.

 

온 천지를 죄의 바닥으로 만드는 거예요. ‘죄 있지?’ 질문 자체가 그래요. ‘너 죄 얼마나 지었어? 너 죄 있는 거야.’ 모든 질문 자체와 초점이 ‘너는 얼마나 수고했어? 너는 얼마나 착한데? 얼마나 힘들었어? 네가 얼마나 예쁜지 몰라.’ 이런 식의 예쁨의 덩어리가 아니고 귀염과 착함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나뭇가지를 흔들면……, 요새 대추나무 흔들면 대추 많이 떨어지대요, 대추나무 흔들면 대추가 두두둑 떨어지듯이 있는 대로 다 내놓으라는 식이죠. “죄 있잖아.” 하고 흔들면 “맞습니다.” 하고 죄가 마구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바닥에 뭐가 떨어지겠습니까? 온 천지에 죄가 가득 찰 때 비로소 그것이 주께서 숨겨놓은 세상 움직이는 동력이라 그 말입니다. 현재 경제가 살기 위해서 움직이는 동력은 에너지입니다. 석유에너지, 원자에너지, 풍력, 태양열발전소, 에너지가 없으면 사람이 못사는 거예요. 우리 인간세계는 에너지, 생존에 무엇이 필요한가가 중요한 문제에요. 교회 지을래, 발전소 지을래, 이것은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발전소를 지어야지 교회를 왜 지어요. 어느 것이 생존에 유리한가, 일단 발전소 짓고 난 뒤에 남은 돈 가지고 교회 짓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존이 문제가 아니고 진리가 문제에요. 생존 같으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효과가 있고 유익이 될까, 이것을 따지는데 지금 에스겔이나 하나님입장에서는 무엇이 진리냐,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냐를 묻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은 피 흘리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와 거기에 근거하면 이 세상은 온 천지가 죄에 질퍽해야 돼요. 바로 그 숨겨진 질서를 네가 동의하면 너는 바로 하나님이 보는 시선과 같은 시선으로 간주되어서 용서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이 뭐 그렇게 죄만 있을까, 자꾸 한쪽만 보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죄도 있지만 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 달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금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느 쪽에 서면 내가 구원이 되느냐, 자기 사적인 구원에 신경이 가 있고 복 받는데 관심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세상은 끝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 초반부에 보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깊은 마음을 아시는데 그 성령의 아시는 마음이 뭐냐, 세 글자로 ‘십자가’ 십자가에요, 십자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8-12) 십자가를 증거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구원이란 개념, 천국개념, 여러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중심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재편성되는 겁니다. 물론 천국에 가는 사람만 해당되고 지옥은 유황불로 되어 있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해당도 안 되지만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예루살렘을 거기에 모시게 되어 있어요.

 

이제 제 이야기를 다 들었다 칩시다. 과연 그 말이 진짜 진실인지, 현실적으로 합당한 것인지, 이 말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결정할 때 결정 기준은 무엇으로 삼아야 됩니까? 다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그냥 안 죽어도 되실 분인데 하늘의 천군천사가 와서 거뜬하게 십자가에 박힌 못 다 빼버리고 나중에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죽게 했습니까? 그것은 자기 아들을 내어줘놓고 내어준 아들을 다시 높이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71편 20절에 나오는데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천국 가는 사람의 모습, 절차를 미리 알려준 거예요. 죽으시고 살아나지 아니하면 주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되는가, 죄가 질퍽하기에 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으셔야 되고 왜 살아나야 하는가, 천국이 마련되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살아나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우리 생존에 유익되는 것이 아니고 생존보다 무엇이 진리냐, 그 진리가 자유케 하는 겁니다. 나의 생존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에 우리가 동의를 해 줘야 돼요. 악인이라 할 때 ‘세상 몽땅 죄고 나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동의하면 살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에스겔처럼 전할 때도 ‘세상은 몽땅 죄밖에 없고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라고 전하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전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 편에 서서 이 세상에 파수꾼으로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보는 관점이 내 좋은 쪽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해주시고 나 살기 위한 관점으로 보지 말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나온 그 진리, 진리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동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음을, 주님만 자랑할 수 있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