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의미(유다왕의 최후-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30. 08:51

유다왕의 최후(렘 5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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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2-05-02 21:20 
유다왕의 최후

2012년 5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2:10-12

(렘 52:10, 개역)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목전에서 죽이고 또 립나에서 유다의 모든 방백을 죽이며』

(렘 52:11, 개역)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렘 52:12, 개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구년 오월 십일에 바벨론 왕의 어전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오늘 본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에 관한 모든 것들은 다 해체되고 사라집니다. 두 번 다시 회복시킬 그 어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게 됩니다. 인간적인 그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땅을 가지고 백성을 가지고 성전을 가질 때, 이런 요인들이 그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그들의 삶과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면은 같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결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요 나쁜 짓도 아닙니다. 이방나라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위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 점을 이스라엘 백성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안목으로서 그것이 한계입니다. 즉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살아야 될 가치와 의미가 당당하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멸망당한다든지, 지레 죽어야 된다든지 남의 나라에 처참하게 망가질 그런 존재는 당연히 아니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현실을 자기 생존 위주로 늘 재구성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성전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백성이나 땅이나 왕이나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셨다고 여기고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이방나라와의 ‘헤어짐’을 이해 못했습니다.

자기 나라와 이방나라와의 차이점을 하나님 안목에서 바라보지를 못하고 현재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을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느냐에 집착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동안 살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다 했습니다. 단지 ‘살아남아야 성공이다’는 이 일념 외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전에서 매일같이 죽어나가는 ‘흠없는 제물’의 죽음은 그들의 실생활과 동떨어질 의식에 불과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하므로서 하나님 자체를 모독하는 바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당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량이란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생존을 팽개치고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는데 주력한 위인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런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 ‘아무도 없게 하심’을 확실히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작업의 실체를 밝히 보이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다루어서 구원할 수 있는 그 어떤 건덕지를 남겨두지 않으므로서 구원이 인간 밖에서 진행됨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과 주변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것으로 구원의 성사하는 기본 자리를 장만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짓이 곧 ‘구원이 못되게 하는 악마의 술책’임을 폭로시키고 기존 인간의 아이디어와는 달리 예수님에게 주어진 방식을 가동시킵니다. 구원이란 곧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그 예수님의 귀환 과정이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가 없는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신다면 그 인간에게는 날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할 것들을 치워놓는 방식을 적용시킵니다. 예레미야를 끝내면서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 1장 다시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심판받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구원은 어떻게 성사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예레미야 1:8에 보면,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구원’을 언급하는 이유는 예레미야의 주변을 졸지에 지옥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즉 예레미야에게 일어나는 구원작업은 장차 예수님에 의해서 조성된 ‘죄많은 세상’으로의 폭로되는 현장을 미리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간대 인간으로 이 세상 살면서 정나누면 살 때, 사람들은 세상 사는 맛을 갖게 됩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도움받고 도와주므로서 ,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들고 방문하시면 졸지에 그렇게 친하게 지낸 주변인들과 갈라서도록 만들고 영원히 헤어져야 될 속성을 지닌 자들로 드러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구원은 예레미야의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미래가 그에게 침투하고 개입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컵 안에 담겨있는 쥬스물이요 예수님의 빨대라면 예레미야는 예수님의 빠는 힘에 의해서 빨대 속으로 본의 아니게 말려든 셈이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1:9-11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존의 세상 보기에 다른 면을 특별히 예레미야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살구나무를 본 그것이 매뉴이 되어서 기존의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존재로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과정’입니다.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귀환하는 그 숨겨진 비밀이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환상을 보게 된 모든 성도에게만 제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환상을 보게 합니다. 그것은 유다 나라를 북쪽 나라를 사용하여 끊는 가마로 싹쓸이해 버리겠다는 계시입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주변을 졸지에 저주와 하나니믜 분노의 대상으로 전환시켜버립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도에게 그 어떤 협박과 공갈을 하더라도 어차피 헤어질 자들입니다.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의 갈 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셨던 그 길입니다. 아버지에게 가는 길입니다. 반면에 성도가 아닌 자들의 갈 길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기쁘고 흥겹고 즐거운 일이 생기더라도 그런 과정들이 모아져서 지옥불로 쏟아지게 만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으로 절망하는 기쁨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5-04 09:21 
160강-렘52장10-12(유다왕의 최후)1205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2장 10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1페이지입니다.

 

렘52:10-12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목전에서 죽이고 또 립나에서 유다의 모든 방백을 죽이며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오늘 예레미야 끝까지 보는 날입니다. 52장 전체의 내용을 혹시 읽어보셨다면 전체 내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왕과 왕자가 죽습니다. 17절부터 보면 성전이 파괴당하고 성전에 있었던,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지냈던 성전 기구들을 다 빼앗기고 24절부터 보면 제사장이 립나에 가서 바벨론 왕에 의해서 다 쳐 죽임 당합니다. 결국 남아 있는 사람은 아주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들뿐이었다고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 왕은 약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왕궁에서 함께 살았다는 것으로 끝이납니다.

 

이것은 나라 모든 것의 해체지요. 나라가 있으려면 왕이 있어야 하고 영토가 있어야 되고 백성이 있어야 되고 특히 종교적인 나라에서는 성전이 있어야 하고 그 성전에서 근무하는 제사장, 신과 직통으로 통해서 신의 말씀을 듣고 가르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귀족들도 많이 죽어버립니다. 그전에 이미 사로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식으로 끝났을 때 우리는 이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극이냐, 하는 거예요. 비극이냐, 아니면 착각들을 했는가, 예례미야가, 이 성경전체가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 하는데 2년이나 3년 뒤에 교인이 다 떠나고 사모님은 아프고 애는 교통사고로 죽고 본인도 당뇨나 불치병이 걸려서 앓다가 죽었다, 사람들이 교회가 하나 있는데 사모죽고 목사죽고 자식죽고 다 죽어버리고 나중에 교회도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고 다 날라 갔다고 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교회를 세우는 하나의 작업이었다고 뽑아내고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교회가 사라졌는데 교회가 사라지게 만든 그것이 현재 교회 있다는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교회당 크게 짓고 예배당에 교인들이 모여 있을 때에 점점 더 진짜 교회는 사라져가고 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구약의 예레미야가 그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성전 있었고 제사장 있었고 왕 있었고 백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땅이 있었지요. 그런데 거기 있었던 백성들이 그냥 보통 백성들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해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숫자가 증가했던 그 백성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들고자 하는 그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과 제사장과 왕과 백성들, 하나님이 그들을 줄 때 그 안에 ‘너희들은 필히 망하고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요소가 들어 있는 채로 그들에게 줬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들은 몰랐던 겁니다. 성전을 만들게 할 때 그 성전 만들게 한 그 요소가운데서 ‘이 성전은 필히 멸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담긴 성전인데 그들은 그 요소를 생각하지 못하고 유지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겉만 본 거지요. 선악과를 볼 때 그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꼴 보기 싫었으면 먹지도 않았을 거예요. 먹음직해서 먹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 죽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아담과 하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에 담겨 있는 그 죽음이라는 요소를 바깥으로 번지도록 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따먹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것도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훼손하는 작업을 주께서는 허락을 하신 거예요. 똑같은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나라와 백성을 준 것은, 요새 말로 교회를 준 것은 교회가 망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라는 것이 네 손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나 교회라는 것은 네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기쁨으로 희열로 반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를 만들게 하고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누가 알겠습니까? 예레미야 전체를 보면서 그것을 안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예레미야 혼자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레미야를 건져준 사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시드기야의 내시가 있는데 그가 예레미야를 살려줄 때 그러한 것을 깨우쳤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예레미야를 끝내면서 여기서 다시 한 번 1장을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줄 때 분명히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성전은 깨어지고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들은 바벨론의 술잔으로 쓰일것임을 주께서는 아시면서 의도적으로 성전을 그동안 유지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레미야 끝에 와서야 알았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끝에 와서 심판받고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그 사실에 입각해서 예레미야 1장을 다시 봤을 때 우리가 놓친 것,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평소에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해 수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레미야에게 성전을 보이시고 멸망케 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면서 어떤 식으로 흔적을 제거하면서 떠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떠나실 때 그냥 조용히 와서 조용히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태어나셔서 사시고 이 땅을 떠나시게 되는데 떠나면서 이 세상의 진짜 본질과 실체를 여지없이 다 폭로시키면서 떠나시는 거예요. 주님이 한번 다녀간 것은 그 주변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지를 다 까발리면서 떠나시는 겁니다.

 

주님이 떠난다는 말은 도저히 하나님께서 함께 기거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고 떠나는 거예요.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가정방문한다면 떠나시면서 가져온 휘발유 붓고 성냥 그어버립니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그 집은 불에 타버려야 될 집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불 질러 버리지요. 그런데 우리 집은 ‘이제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으니 구원이 우리 집에 임했으리라.’ 삭개오가 했던 비슷한 얘기처럼 하지요. ‘야, 이제 주님께서 우리 집에 방문하셨으니 우리 집은 이제 복에 복을 감당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겠지요.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잖아요. 언약궤를 이렇게 모시게 되면 복도 따라온다고. 대 심방 가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면 복이 온다.’고 하고 천주교에서는 아예 가정마다 안방에 성전을 만들어 놓았지요. 마리아상 모셔서 거기에 묵주목걸이도 걸어놓고. 그런 것들이 바로 끝을 모르기에, 끝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의 종교적인 효과를 계속 붙들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 된 본성임을 들통 내는 겁니다. 예레미야 1장 8절에 보면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리라.” 예레미야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은 반드시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주변은 애굽으로 돌변합니다.

 

좋은 환경이라고 정주고 받으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웃들, 그리고 나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그 모든 것이 주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작업을 시작하는 그 순간, 그 순간들은 지옥으로 변하는 겁니다. 왜 지옥인가, 왜 정들었던 이웃이 악마입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구원 받아야 될 당사자가 구원을 안 받겠다고 하면서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발로 차고 횡포를 부리면서 ‘내가 예수 믿는가 봐라.’ 라고 대들 수밖에 없도록, 몸부림칠 수밖에 없을 만큼 익숙해졌던 그 세상, 주님은 우리 발길에 채여서 피 흘리고 우리의 반발과 배신으로 인해서 주님은 가슴아파하고 상처받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 집에서 울기도 하시지요. 믿는지 알았는데 믿기는커녕 죽은 오빠 살려내라고 두 자매가 횡포나 부리고요.

 

주께서 구원하실 때 그 조용했던 마을에 주님이 들이닥치면 그 다음부터는 들이닥침 받은 그 사람은 구원받지만 구원이 조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구원작업으로 인하여 그 주변은 악한 세상의 실체가, 감추었던 그 실체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계기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10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만국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를 구원하는 과정속에서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그 말씀으로 인하여 주변은 다 파괴되고 파멸된다는 겁니다.

 

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아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예레미야가 평소 시력이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두 눈 있으니 눈앞에 펼쳐진 풍광도 보고 산책길에 주변 경치 다 보곤 했을 겁니다. 산천초목 다 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평소에 보아온 그것을 보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아야 네가 무엇이 보이느냐.’ 할 때 ‘보라고 하지 않으셔도 내가 지금 잘 보고 있거든요.’라는 그 답변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평소에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보이는 그것이 네 눈에 보이느냐.’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살구나무였습니다.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영 생뚱맞게 갑자기 살구나무가 등장합니다. 이 살구나무는 그 전에 늘 보던 살구나무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앞마당에 살구 먹기 위해서 심어놓은 그런 나무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준 살구나무,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를 보여줬다는 것은 환상 아닌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네가 봤던 그 살구나무환상이 갖고 있던 그 의미에 준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평소에 네가 익숙하게 잘 안다고 여겼던 주변의 환경들을 새삼스럽게 다시 해석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가까운 친구들, 친척들, 친밀했던 주변의 삶의 조건들, 오다가다 다정하게 인사했던 시장 통에서 만나던 아주머니 아저씨들, 예레미야가 들락거렸던 성전과 왕궁의 잘 아는 목사 장로들, 이제는 살구나무가 하나님의 눈에 의해서 예레미야에게 보인 이상 그것들은 이제는 다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해야 됩니다.

 

그 정반대의 의미가 뭐냐,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찾아와서 나는 너희들 곁에서 떠나야 하고 헤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헤어질 사람에게 오늘 협박 받으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습니까? 좀 우습지요. 화가 나지 않고 좀 우스운 거예요. 여자 분들은 그런 경험 잘 못해보는데 남자들은 일생에 한 번은 경험합니다. 내일 제대하는데 누가 제대할 사람에게 상관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내일 아침 열시에 예비군복 입고 제대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굴욕적인 말은 그냥 웃고 말지요. ‘국방부 시계는 나에게는 끝이 났다. 땡 하고 끝난 거야. 내일 아침이 되면 그냥 가는 거야. 고향 앞으로 가는 거야. 나에게 그동안 못했던 것 이야기 해, 이야기 해.’ 라고 그냥 웃어넘기는 거예요.

 

평소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변화를 웃음으로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과 함께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 속에 여전히 내장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세상 해석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해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세상 사람을 같은 동료로 취급해서 그들이 보는 세상과 똑같은 해석으로 같이 한구덩이 속에서 헤엄치고 그들과 같이 어깨동무 하면서 그들이 먹는 것 같이 먹고 그들이 누리는 영광 같이 노리고 싶은 세속적인 생각을 하다 보니 주님이 주신 의미를 하나도 이해 못하고 있는 겁니다.

 

1장 13절에 두 번째 환상이 주어집니다. 아까 본 것처럼 또 묻습니다. 이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할 때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하지요. 끓는 가마솥이 기울어지면서 안의 내용물이 쏟아지면서 북쪽에서 남쪽을 다 싸그리 끓는 쇳물이 부어지지요. 끓는 쇳물이 주변의 모든 환경으로 타들어갈 때 그것은 마치 어떤 분의 분노의 마음상태를 아주 제대로 펄펄 끓는 가운데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도 네가 보고 있느냐?’ 살구나무 보고 있느냐, 끓는가마 보고 있느냐, 그 두 개의 사물은 서로 대비됩니다.

 

살구나무는 ‘내가 너를 특별히 보호해준다. 주변이 화산처럼 끓는 가마처럼 된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구원해줄게.’ 그런 뜻이거든요. 만약에 주님께서 너를 구원했다는 소식을 느낀다면 그때부터 주변의 모든 것은 다 유황불로 돌변해야 돼요. 우리가 선 이 공간이, 내가 딛고 선 이 땅바닥이나 쳐다보고 있는 저 하늘의 모든 것이 지옥의 천장이고 목욕탕 타일바닥으로 느껴져야 돼요. 그래야 구원이 죄 속에서의 구원, 죄 때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예레미야는 그 때부터는, 구원받았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구원받았으니 그 구원에 주어진 상황이 바로 예레미야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것과 더불어서 구원이 예레미야 속에 들어갔다가 그것이 말씀의 예언으로서 외부로 발산이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순서와 절차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따라서 예레미야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그 당시의 역사라는 이름의 무대장치, 바벨론이 있고 이스라엘이 있고, 성전이 있고 그 성전이 깨지는 그 당시의 무대장치로 인하여 장차 오실 예수님의 면면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냥 심판하시지 예레미야에게 앞당겨서 왜 미리 찾아왔느냐,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구원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예레미야의 미래가 아니에요. 예레미야에게 찾아온 이 구원은 예레미야 본인이 구원받는다는 개인의 미래상이 당겨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미래, 예수님의 미래에 예레미야가 빨려 들어간 거예요. 주스에 빨대심어서 빨면 그 빨대에 딸려서 주스가 딸려 올라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빨대라면 예레미야는 그 빨대에 빨려 들어온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빨려 들어가면서 그 빨대가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시고 장차 어떻게 죽고 부활하시고, 그 모든 예수님의 면면을 예레미야는 그 빨대 속을 통과하면서 보여주는 입장이에요. 그 이야기는 뭐냐,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구원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들로서 아버지께 어떤 식으로 다시 돌아가느냐의 그 절차 과정이 바로 구원의 과정입니다. 인간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이 우선이에요. 아들로서 이 땅에서 사시면서 아버지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느냐, 그 절차가 구원에 있는 방정식이고 공식이에요. 예수님이 보여줬던 구원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 기준 외에 다른 기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구원받는 과정에서 늘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나의 종교적인 효과, 내가 이런 기도를 하면 미래에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 짜놓은, 내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내가 알고 있고 이해가 되는 미래상, 절차를 깡그리 주님께서는 낱낱이 부숴가면서 주의 미래가 우리 안에 침투해서 빨대로 뽑아내는 식으로 구원하기에 우리는 ‘이것은 제 생각이 아니고 주님이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제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제가 주께 다가간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끌어주시니 가는 겁니다.’라는 고백이 매일같이 쏟아지는 거예요.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나의 미래를 나의 식으로 구축하고 형성하려고 하는 그 미래가 아니고 주께서 당겨주는 미래고 그것이 정답인데 그 정답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내가 따로 매일같이 구성한 나의 목표와 목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을 주께서 계속해서 허락해 주시는 겁니다. 아, 이것이 복잡하지요. 우리는 세상이 나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양보가 없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자기위주의 세상이 돌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우리 성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도하고 아닌 사람의 차이가 뭐냐, 성도는 자기목적, 자기미래, 자기비전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예레미야전체처럼 이것이 늘 깨어지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내 행복과 편함과 안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품었다가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침투하게 되면 그러한 기대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헌금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겠다, 목사님이 시키는대로 대하면 반대급부로 우리 사업이 잘되고 우리 가정이 행복할거야, 라는 것들이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성전과 제사장이 잡혀가면서 우리에게 또 다시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도 그렇게 착각했느니라. 그 착각을 너희에게 되풀이 시키는 이유는 너희가 예레미야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산 위에서 독야청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가운데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외쳤습니까? 많이 외쳤고 많이 가슴 아팠어요. 다 옛날에 정들었던 사람들이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고 심지어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보고 ‘바벨론에 항복해라. 그것이 살길이다.’ 해도 그 사람들은 자기 미래가 따로 있기에, 예수님의 미래가 침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고집들 한다고 기어이 자기 목적과 계획을 포기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가는 이유는 자기 자식 잘되기 위해서 간다는 말이지요. 정답 다 나와 있거든요. 교회에서 진리를 듣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라는 여유 있는 단체가 내 가정과 자식에게 어떤 혜택을 줄 것인가, 다 자기이익을 위해서 교회 가는 거예요. 그것이 다 뭐냐, 예레미야 시대에 멸망해 버린 이스라엘과 성전과 제사장들과 왕들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전이 있지요,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 있지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있지요, 하나님이 주신 땅 있지요, 하나님이 주신 백성 있지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 있지요, 이 모든 것은 우리 잘되기 위함이다, 라는 착각을 누군들 안하겠습니까? 그렇게들 착각을 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서 뭐냐, 주께서 그런 흔적을 줘놓고 빼앗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흔적을 스스로 회수해 가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너희들은 너밖에 모르는 인간들이었다.’ 하는 것을 까발리는 겁니다. 그런 사태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하신 거예요.

 

뭐 하라고? 두 번 다시 자기 꿈을 되찾거나 자기의 꿈이나 포부를 기준해서 다시 재건축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매순간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해야 될 것은 일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번에는 철야기도를 했기에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이다, 라는 그런 생각을 꿈도 꾸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다 헛것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니까 아예 우리는 기도도 헌금도 아무것도 않하잖아요.’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나름대로 우리 각자가 꿈과 포부를 갖도록 허락하신다고 했지요. 옛날에는 헌금함으로서 어떤 포부와 축복을 기대했는데 이제는 꼼수를 써서 헌금 안하고 기도 안함으로써 주께서 어떤 기적을 줄까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도 하나의 포부고 새로운 꼼수가 되는 거예요.

 

그냥 사시면 환상을 보게 하시는데 그 환상의 모든 집약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되풀이해서 ‘아, 주께서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었는데 나는 주님 죽었다는 생각은 못하고 내 욕심만 챙겼구나.’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말 잘 듣습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은 기쁨으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랑한다 해놓고는 억지로 일을 하게 되면 벌써 사랑이 식어진 거예요. 남녀관계도 그렇잖아요. 사랑하면 좋아서 ‘또 뭘 해드릴까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이미 구원,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 빨대가 꽂히면서 우리는 이미 구원 되어버렸어요. 이제 남은 것은 ‘주여, 뭘로 기쁘게 해드릴까요?’ 기쁨으로, 사랑으로 그렇게 반응을 나타내는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구원을 하시는데 그 전형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나한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미해서 적용시켜서 내가 생각한 목표를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꼼수를 매일 같이 써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요 이것이 죄인인줄 알았사오니 날마다 주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뭘 이야기했는지를, 그 환상을 매일같이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