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강-렘37장1-5(말씀 거부의 결과)1109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7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13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7:1-5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 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에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옛날에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뭘 믿으라는 것인가요? 나는 이렇게 느낀다, 나는 이렇게 착실하다, 나는 이렇게 죄를 지었다, 그런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담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경에 역사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나 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주도권, 내가 살고자 하는 것, 그러면 콱 죽어버릴까, 이런 식의 자기사적인 신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구더기처럼 꼬물거려도 상관없이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쫙쫙 진척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KTX가 달릴 때 철길 아래 있는 자갈의 속사정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기차는 달리지요.
그것이 바로 신앙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개인적인 소소한 문제가 신앙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안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백설 공주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어릴 때 백설 공주라는 동화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꿈을 꿉니까? ‘백설 공주 참 불쌍해, 계모가 못됐다, 공주는 언제나 왕궁에 들어갈 수 있을까?’ 저는 백설 공주 볼 때 마다 늘 어떤 여 정치인이 생각이 나요. 언제나 청와대로 들어갈까?
‘백설 공주에게 이웃 나라 왕자가 깨어났는데 그 독이 든 사과를 먹여서 공주를 잠들게 한 그 계모, 그렇게 나쁠 수가 있는가?’ 그 백설 공주 동화를 보는 어린아이는 그 속에서 꿈을 키우고 그 속에서 자기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기 개인적인 살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린애 인거예요. 그런데 요양병원이나 노인정 같은 곳에 가면 주로 누워 지낸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보다는 약간 젊은 사람들 모인 곳에 가면 주로 치는 것들, 탁탁 치는 소리(화투)가 들리지만 더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 가 보면 다 죽 죽 누워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서 백설 공주를 이야기하면 그 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죽는 마당에 왕자가 찾아오면 뭘 하나!’ 할 거예요. 어린애들, 세상을 너무 좁게 보는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이제는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은 이제 사는 것도 지겨워요.
시간 보내는 것이 이렇게 지옥이고 고역일줄 몰랐지요. 이제 동물원 원숭이들처럼 하루 웬 종일 누워서 버티는 분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잘 죽느냐가 그들의 문제겠지요. 그래서 전도서 7장에 보면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거기에 네 모습이 있다.’고 하지요. 우리는 어릴 때를 지났지만 여전히 그 백설 공주의 꿈을 안 버리고 있기에 세상을 너무 자기중심으로, 자기개인의 문제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그 개인의 문제를 주로 찾으면서 거기에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하나님이여,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저런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아직 왕자가 찾아와서 뽀뽀를 안 해주니 어떻게 합니까? 날 쫒아낸 저 못된 계모를 좀 혼내주시고…….’ 그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자기육적인 사고방식이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솔로몬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칭찬받은 기도인데 세상에, 칭찬받은 기도는 제쳐두고 못된 기도만 좋아하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칭찬받은 기도가 어떤 기도냐, 세상부귀영화가 자기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기에게 못되게 한 세상 원수가 칵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세 번째,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와, 이것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못 들으신 분들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 부귀영화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곧 넉넉한 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나를 괴롭히는 원수가 보란 듯이 저주받기를 기도하지 않았고 ……, 그런 기도를 하려들면 십자가마을이 잘 해당되겠지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고 세 번째 오래 살고자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뭐냐, 하늘의뜻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의 그 면면을 솔로몬이 그 당시의 중보자가 되어서 보여주는 겁니다.
다만 기도한 것이 뭐냐 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는 겁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일단 이 세 가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세 가지, 내가 오래 사는 것, 내 개인적인 원수가 저주받아서 일찌감치 죽어나자빠지는 것,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목사들이 심방 가서 기도할 때 왜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개인적인 복을 빌어주느냐 그 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빼고, 이 세 가지를 빼는 복을 빌어줘야지요. 그것은 세속적인 방식에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 보기 전에 단박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셨다.’ 인간의 네 사정 내 사정 깡그리 불도우자로 밀어버리고 ‘나는 역사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끈다다.’ 하시고 일방적으로 역사를, 사건을 만들어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나의 소박한 꿈은 그 앞에서 포기해야지요. 그렇다면 본문의 그 하나님의 일을 함축해서 단출하게 하면 뭐냐, 이 땅에 죽음사건의 연속성을 응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땅에서 죽음 사건을 유발해서 그 죽음사건의 연발, 연발, 연발, 연속적으로 이루어나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상에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죽인다는 겁니다.
‘죽인다.’ 할 때 인간은 자기본성을 가만두지 않고 폭발하지요. ‘하나님은 죽여도 우리는 악착같이 살테니 우리 솜씨를 한 번 보세요.’라고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가 드디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요시아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라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역시 죽음의 흔적,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의 아들이 고니야로 되어 있는데 다름 이름이 여호야긴입니다. 여호야긴이라는 왕은 바벨론 누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해서 3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어요. 그리고 난 뒤에 삼촌 시드기야가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왕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바벨론에서 일방적으로 세웠어요. 이런 일련의 조치가 뭐냐, 유다의 왕위는 스스로 선택권도 없고 느부갓네살 앞에서는 죽은 자가 되어서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바짝 독이 오른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 왕을 배반하고 애굽에 붙으니까 느부갓네살왕이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기원전 588년이라고 대충 계산이 나옵니다. 그때에 시드기야가 다급해서 누굴 부르느냐,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불러서 뭐라고 하느냐, 3절에 보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오인한 거예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오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사건으로, 인간은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데 이 시드기야라는 왕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으로 오인해서 ‘ 가 원하는 기도를 일방적으로 담아서 네가 대신 기도해 달라. 내 뜻이 하나님 앞에 관철되도록 해 달라.’ 요청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완전히 무시하고 사적인 자기불안, 초조, 위협이 해소될 수 있는 방안을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개인 보디가드입니까? 자기 집의 똥개 같은 존재에요?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정리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을 만들어놓고 이 시점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에게 죽임당하고 멸망당하게 하는 조치를 하시는가? 여기에 굉장히 깊고 어려운 논리가 있습니다만 쉽게 하기 위해서 단출하게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을 믿고자 할 때 막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막을 때, 인간들이 믿지 못하게 막을 때 그 때 막고 난 뒤에 생겨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에요. 제가 너무 단출했습니까? 사람들은 믿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다 어디서 출발하느냐하면 ‘내가 여기 있습니다.’부터 출발하거든요. 나는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나는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것을 누가 저지하고 가로막느냐, 거부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거부하는 거예요.
열심히 믿고자, 구원받고자, 천국 가고자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소용없다고 극구 말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마귀를 통해서 사단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믿지도 않았는데 믿음이 어디서 생기느냐,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조차도 우리 쪽에서 시작한 믿음, 소망,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 내가 원래 원하던 것 말고 따로 제공되는 거예요.
이것이 성경을 풀이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가운데 제일 어려운 거예요. 제일 어려워요. 아무리 설명해도, 댓글이 42개가 달리도록 설명해도 이것을 못 알아들어요. 이것을 못 알아듣는 다고요. 제발 믿지 말라는데도 굳이 믿겠다니 지옥 갈 사람이고 악령 들린 사람이지요. 믿지 말라고 하는데도! 이런 질문을 해요. ‘내가 어떻게 악령이 들렸습니까?’ 할 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됩니까? ‘왜 저를 포함해서 우리교회나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다 전부 악령 들린 자입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 줘야 돼요. ‘왜 십자가마을은 자기네는 성령 받았다고 하고 나는 악령을 받았다고 하느냐?’고 하면 안 되고 ‘왜 모든 인간은 이단입니까?’ 하고 질문을 해야 돼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우리는 성령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손 양원목사도 지옥가고 한 경직 목사도 지옥가고 악령을 받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예레미야, 이사야도 마찬가지고 왜 모세도 악령 받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그럴 때 누구만 등장하는가? 엘리야와 모세가 자기 열심 가지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여, 언제 별세하십니까? 언제 피 흘리십니까?’
자기는 지금 천국 가 있으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는 이야기를 궁금해 합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라, 아브라함은 천국에 이미 가 있으면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왜 그토록 기다린 거예요? 예수님의 피 아니면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면 생명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영생은 내가 따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자체가 생명이고 예수님의 피 자체가 영생이에요.
그 피를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유는 그 피를 만들어내는데 우리가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그 결과로서 피가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 과정, 그 스토리, 그 원대한 역사적 계기를 알게 된 자가 자기 지혜로 알게 된 자가 아니고 성령 받아서 비로소 알게 된 자입니다. ‘아,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낸 것은 어느 인간도 예수를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예수를 보내셨구나. 이사야 53장 1절의 말씀이 맞기는 맞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이사야 6장의 말씀이 맞지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분이 오신 거예요. 십자가에 달릴 때 다 도망친 거예요. 그저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동정했던 아줌마 세 사람이 있었을 뿐인데 그것도 인간적으로 동정한 거지요. 성경에서는 성령 받은 사람만 안다고 합니다. 자꾸 그런 멘트로 가야 될 이유가 그 누구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이야기 할게요. 어렵게 갈 수밖에 없네요. 안나라는 여 선지자가 과부된 지 85년 되었지요. 그 사람이 과부되고 95년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 아기예수를 만났습니다. 한 번 봅시다. 우리 생각에는 85년 동안을 허비한 것이 되잖아요. 만나게 하려거든 진즉에 만나주지 과부 된지 85년이나 지나갔으면 그 긴 세월 허송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안나가 딱 만나보니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그 시간개념 자체가 주님 만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는 사실을 주님 만나고 나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만나는 그 순간에 역사에서 묵시로 가 버리기 때문에 내가 85년 동안을 허비했다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다만 준비된 거예요. 18년 동안 귀신들려서 꼬부라져도 예수님한테 고침 받고 나니까 그 18년의 세월이 조금도 아까운 세월이 아니에요.
거지 나사로가 거지로 구원받아도 그 거지라는 참혹한, 참담한 더러운 팔자가 절대로 저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은 도저히 인간의 육적인 인식으로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의 육적인 것에서 주워 모아서 이것이 신일 것이다, 이것이 천국일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울 것이다, 이것이 다 전부 주님의 참혹한 십자가 앞에서 걸림돌이 되어서 돌아설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이런 메시아를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안 믿겠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못 믿겠습니다.’라는 말이 막 튀어 나오는 거예요. 그걸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면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고 세 번 이나 한 그 본심 속에 그것이 다 들어 있어요.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님의 권능을 행하고 예수님을 팔아먹은 그 가룟유다의 심정과 그 심리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가 가룟유다하고 똑같은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사적인 문제에 들어갑니다. 백설 공주 알 때 꿈을 꾸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가고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하고 개인문제로 하다가 막상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 이사야, 아브라함, 모세, 모든 인간이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주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이라고 부를수 없으며 참 인간은 마지막 아담,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유일한 인간이며 유일한 아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예수님이 흘린 피 속에 자기의 피가 같이 녹아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여, 매일같이 저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느낄 때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계획은 유다를 망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도 전혀 여호와를 모독하는, 요즘으로 친다면 불교신자나 이슬람교쯤 되는, 완전히 여호와를 모독하는 악마의 제국, 짐승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박살나도록 조치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사람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고 모든 인간은 죄’라고 하니까 왜 믿는 사람을 자꾸 공격하느냐,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공격이 아니고 최고의 사랑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유다에게 최고의 사랑과 축복을 주는 거예요. 사람 힘으로 누가 자기를 스스로 멸망토록 기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남들 다 멸망해도 나는 멸망 안해야 된다는 것이 각각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본성이지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해서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도록 조치합니다. ‘죽어 마땅하구나.’라는 그 기쁨을 성령이 아니고서야 주님이 도와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경계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아주 기괴한 사람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을 찾아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 같으면 ‘주님 뭐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소리가 나올 수가 없지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지만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 말씀 하나 마나입니다. 해당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 누구도 그런 것이 없지요. 마치 이와 같은 거예요.
병원에서 내가 의사가 환자 두 명에게 각각 다른 옷을 줍니다. 한 사람에게는 평상복을 주고 한 사람에게는 환자복을 줍니다. 그리고 관찰합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를. 평상복을 입은 사람은 ‘아, 이제 내가 정상이구나. 내가 이제 완쾌되어서 나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은 ‘아이고, 평생 이 병원신세 지다가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가보다.’ 절망하겠지요.
그러나 의사 입장에서 보면 둘 다 말기암환자입니다. 죽기 전에 하나는 평상복 입고 죽고 한 사람은 환자복 입고 죽을 뿐이지 뭘 입으나 똑 같은 거예요. 둘 다 말기 암 환자입니다. 주님께서 바벨론 느부갓네살이나 시드기야나 예레미야나 다 죽어 마땅한데 예레미야는 그것을 알잖아요. 이 계시, 우리가 멸망해야 내 스스로 죄인이라 할 수 없고 내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우리가 넘을 수 없고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죽음이라는 것으로서 죽음의 세계에 강제로 집어넣어서 거기서 끄집어내는,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을 감히 우리를 통해서 실시하는 그 영광스러움을 알아차린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코스인 것을, 쓴 약 먹어야 병이 낫듯이.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것, 자기의 자존심이나 개인적인 위신, 그것을 왕창 박살내는 쓴 약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나중에 당할 그 지옥에서 당할 심판과 저주와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맛보는 이 혜택,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이 혜택이 성령을 통해서 제공되니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야, 우리는 죽어 마땅하군요. 그렇다면 지금껏 살아온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불쌍히 여기서 사는 인생만 남아 있고 그것이 영원토록 이어지겠군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시드기야가 오해한 겁니다. 예레미야는 답답하지요. ‘하나님의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왜 자기인생이 멸망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나중에 시드기야가 애굽군대를 초청하니까 애굽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그 때 바벨론 왕이 애굽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잠시 물러가요.
물러가니까 그 기회를 타서 예레미야를 잡어서 옥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이 매국노! 나라 팔아먹는 인간!’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와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천국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너희들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이 매국노! 사람을 죽이는 자고 미혹하는 자.’라고 했지요. 심지어 제사장은 말하기를 ‘한사람을 죽여서 민족을 살린다.’ 해서 그 죽여야 되는 한 인물로 내세운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석하기를 ‘주의 뜻대로 한 사람이 대속물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사는 하나님의 빈틈없는 영적 계획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 영적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직도 어린애처럼 자기 살 궁리만 하면서 자기만 챙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눈을 높여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안에 예수님이 진리이고 생명이고 부활인 것을 증거 하는 증거자로 사용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