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성경을 읽은 것 맞나?
아!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네
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멈출 수 없는 자아확장의 발버둥을 예수님 증거로 전환시키시는 성령님.
성령의 작업장! 할렐루야!
바퀴 사이에서 (겔 10:1-8)
음성 동영상 | |
|
이근호
|
13-01-30 21:41 |
바퀴 사이에서
2013년 1월 30일 본문 말씀: 에스겔 10:1-8
(겔 10:1, 개정)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
(겔 10:2, 개정)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겔 10:3, 개정)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고 구름은 안뜰에 가득하며』
(겔 10:4, 개정)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겔 10:5, 개정)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겔 10:6, 개정)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가져 가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겔 10:7, 개정) 『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겔 10:8, 개정)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
이미 사람들이 세워진 성전이 엄연히 있습니다. 다윗이 제안했고 솔로몬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친히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사하고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응답해주리라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성전말고 달리 하나님께서 성전적 기능을 벌리시면서 등장하시는 겁니까? 이는 필시 둘 중의 하나는 가짜임에 틀림없습니다. 시편 36:9에 보면,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명의 원천은 따로 존재하며 그것은 위에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없는 장소는 생명의 원천에 의해서 파괴되고 불지름을 당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아예 그런 성전을 허락하지는 말아야 되지 않을까요? 허락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성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불질러버리시면 그동안 인간들이 공들였던 것이 무모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 기능은 모두다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룹들에 둘러싸인 채로 하나님의 보좌는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바퀴들이 굴러가고 있는데 이 바퀴는 그 어느 곳이든지 방해받지 않고 가리지 않고 쳐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안쪽 바퀴 있는 곳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 손은 인간들이 만든 성전과 귀속된 도성인 예루살렘을 불태울 불같은 것이 나옵니다. 거룩한 불이지요.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것을 모조리 태울 수 있는 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성전이 이 지상에 등장하는 방식을 보고 있는 겁니다. 참된 성전의 강림은 가짜 성전을 불태우는 방식과 병행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인간이 만든 성전을 만들지 않게 하시면 더 나을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성전의 기능은, 뭔가 가짜를 가짜로 드러나게 하면서 그것을 맹렬한 진노로 제거하고 삭제하고 부정하는 작업으로서만 기능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원칙에 담긴 내용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인간들의 작업으로 인하여 자꾸만 자신의 솜씨와 자신의 능력으로 인하여 자아성의 규모가 확장됩니다. 즉 예배당을 짓겠다고 사람들이 헌금을 하게 되면 그 헌금으로 인하여 그 예배당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의 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생존사투를 위하여 헌신한 업적으로 얼싸안기 마련입니다. 이러니 자연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우회로 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고 신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지향점은 ‘땅에서 하늘까지’입니다. 바벨탑 습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해보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습성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여지없이 노출되었는데,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먹으라고 보자기에 싸서 준 것에 대해서, 자신은 율법에 위배된다고 세 번씩이나 못먹겠다고 버팁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니 평소의 베드로의 구원관이 여과없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제 발 뿐만 아니라 온 전신을 다 씻어주세요”라고 나옵니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자기 죄와 그 용서에 관한 관리란 부분 부분으로 처리해도 된다고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발만 씻어도 전신을 씻은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또다시 다음과 같이 오해하게 됩니다.
“아, 부분 부분을 처리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한꺼번에 처리해서 죄 씻어주는구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구원관은 인간들이 평소에 갖고 있는 구원관을 들추어내어 그것을 예수님의 심판성을 심판하시는 방식을 채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더 이상 성도로 하여금 자신을 섬길 그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오른눈에 범죄하면 오른눈만 빼버리면 나머지 눈으로 천국갈 수 있다고 여기는 그 구원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공격하고 계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5:29-30에 나오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 너머의 세계는 이런 말씀이 안고 있는 그 한계성 너머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자기 관리로 인하여 구원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관 자체가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으신 구원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구원관을 파괴하는 그 현장으로 자신의 구원관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창’, 혹은 ‘창문’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문은 벽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에 벽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창문을 만들어두므로서 창문을 열면 바깥 공기가 내부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실내가 실외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창, 혹은 창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창문은 벽 역할을 하여 실내를 가두어두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예 성전을 안 만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만들게 해서 그 만들어진 성전을 삭제하고 없애므로서,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 자체를 계시로 통해는 현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일종의 어두운 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은 모든 게 깜깜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밝은 대낮이 되면 안 보이던 물체들이 다 보입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마치 우리가 없는 것처럼 일하시지만 실은 우리 자신은 날마다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서 그것을 늘 삭제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감행하십니다.
인간들은 자아성 확장을 쉬지않고 실시하게 됩니다.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을 늘 심판하고 부정하는 그 와중에서 성도는 오로지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현장이 되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자신이 벌이는 자기 자랑을 무너뜨리고 삭제하시면서 주님을 증거하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