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강-막16장15-20(부활능력의연속)-mar091101전체녹취
20091101 우리교회 주일설교/마가복음 16장 14-20절/부활능력의 연속(이 근호목사)
마가복음 16장 14절에서 20절까지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6:14-20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줘도 믿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믿지 않는 것이 정상정인 태도라 할 수 있지요. 그러면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입니까? 믿는 것이 비정상이고 믿지 않는 것이 그만 비정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늘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있거든요.
믿더라도 ‘아무도 안 믿는데 나만 미친놈 될 필요가 있나’ 하면서 또 안 믿고 싶고, 믿더라도 ‘내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왜 믿어’ 라고 또 안 믿고 싶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끝으로 보면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믿는다는 것 자체가 표적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표적에 속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표적이라는 말이 기적이나 이적과 다릅니다. 표적이라 하는 것은 ‘현 세상 돌아가는 사태가 너희들 돌아가는 것과 다르다’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표적이라고 합니다. 나이 70넘은 할아버지가 운동을 해서 몸 짱이 되어서 배에 임금왕자를 새기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얼굴에 버짐이 퍼지고 주름이 지면 아무리 몸 짱이 되어도 ‘저 사람은 70대구나’ 라고 늙었다는 표적, 숨길 수 없는 표적이 나타나요.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 진리가 솟구쳐 나올 때 그게 우리 표면에서 표적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세상이 다르데이!’ 라는 증거, 그것을 표적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고 싶지 않을 때 그냥 믿지 마세요. 교회 나오기 싫으면 교회 나오지 마세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표적을 만들어 줄때만 표적 들고 교회를 나오세요. 주님께서 믿음 주실 때 이 믿음은 선물이라고 자랑스러워하면서 교회를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 믿으려고 했는데, 나는 믿고 싶지도 않았는데. 왜? 믿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려대고, 다른 사람들이 인간취급도 안 해줘서, 교회 가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나는 교회 안다니는 척 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나는 교회 가면 제사도 못 드리게 되는데, 라는 이런 모든 것들로 인해서 친척들과 거리가 생기고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껄끄럽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믿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주께서 믿게 해 주실 때 표적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신종플루의 표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안 아프고 싶어도 아파야 돼요. 본인은 안 아프고 싶어도 아파요. 열이 올라가면 몸이 아프고 ‘타미플루’처방 해야 됩니다. 일종의 바이러스가 있다는 표적이고 징조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에이, 구라치지 마라. 사기다.’ 우리도 사기이고 싶습니다. 왜?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주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능력이 하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 내부에서 표적이 올라와서 외치고 싶지 않을 수가 없고 외칠 수밖에 없어요. 신학을 하는 사람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이런데서 차이 납니다. 신학교 가면 신학 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가면 성경공부 하면서 신학 하는 사람들 많이 있어요. 그게 뭔지 궁금해서.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이야기하고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그 사람들은 뭘 로 받아 들이냐 하면 신학으로 받아들여요. 신학으로 죽 받아놓고 마지막에 떠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는데 우리가 할 게 없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는데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하고 떠나버립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헌금이라도 보태주고, 예배 참석도 해주고, 전도도 해주고 착한 일도 뭔가 해주면 하나님 일에 협조한 것이 되어서 나중에 죽을 때, 상이라도 받든지 아니면 죽을 때 좋은 인상 남겨서 천국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런 환경 같은 것이 성립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일에 저도 협조하겠습니다. 뭘 해야 됩니까’ 라고 생각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해보니까 결국 정리되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할 것이 없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어떤 인간도 예수님 부활하시는데 도움준적 없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 ‘잘났다, 하나님. 하나님 혼자서도 잘하네. 혼자서도 잘 하는데 내가 뭐 도와줄 필요 없지요? 그러면 이제 난 나 혼자서 삽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주변에 어려운 친척이 있어서 푼돈이라도 조금씩 도와줬는데 어느 날 졸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때부터는 ‘어이, 조카! 요새 좀 산다면서?’ ‘아이고 삼촌, 어떻게 하다 보니 갑자기 그렇게 되었습니다.’ ‘응, 그래? 그럼 이제부터 안 도와줘도 되지?’ 교회 와서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을 듣고 말씀을 들어 보니까 우리에게 오는 느낌이 이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이 인간이 안 도와줘도 하나님이 알아서 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부터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쿨하게 살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더구나 이 부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다 죽어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사람의 의사와 반대되어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하니까, ‘혼자서도 잘 살아나는구나. 그러면 우리 인간이 뭔가 도와줄 필요가 없네. 멋진 솜씨 보였다. 와! 그러면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 도와주기만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부활은 부활대로 하시고 우리는 각자 자기일 봅니다’ 하고 그것으로 빠이빠이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 모든 사상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인간의 행함으로 성사 된다’는 선입감, ‘하나님과 관계할 때는 뭔가 성의를 표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안 도와줘도 되네요’ 라고 도와주는 것을 빼는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렇게 되어 버리면, 교인들을 빼버리게 되니까 교인들을 빼버리면 헌금이 안 들어오고, 교인들이 모이지 않게 되고 교회 존립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도망가는 사람에게 달려가서 붙들면서 하는 말이 ‘아이고, 성도님,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네요’ 라고 하면서 붙드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를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고치러 왔거든요. 아람의 장군인 나아만이 왔을 때 엘리사가 만나지도 않았어요. 종 게하시를 통해서 요단강에 일곱 번을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하니까 그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을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그런데 엘리사를 만나지도 않고 요단강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그 전에 나아만은 엘리사가 고쳐준다는 말을 듣고 선물을 가득 싣고 온 거예요.
선물을 가득 들고 왔을 때 중간에 게하시가 팔짱 끼고 보니까, 엘리사가 만나보지도 않고 그냥 말만 전달했는데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와서 병 낫고 선물은 주지도 않고 그냥 가더라,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답답한 것은 누구냐 하면 게하시가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가는 사람 발목을 잡고 ‘선물은 주고 가셔야죠’ 라고 된 겁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행세입니다. ‘목사님, 성경 좀 압시다. 성경이 이러이러한데 이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하나님한테 줄 선물이 필요 없네. 그러면 그냥 갑니다.’ ‘아이고, 그러시면 안 되지요. 손님! 아침부터 재수인데 마수걸이는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자기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으로 천국가기 위해서 정상적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눈치 채면 정상적인 인간이 죽어서도 정상적으로 천국갈 수 있다, 이런 자기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부활이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창세기3장에 보면 옷을 입은 것이 수치스러워요.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벌거벗은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수치스럽다’ 하는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못하겠어요. ‘당신 돌았다’ 라고 할까봐서요. 그런데 창세기 3장은 저만 본 것이 아닙니다. 수천만, 수억만의 무수한 사람들이 창세기 3장을 봤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람이 옷을 입고 하체를 가리는 것은 이미 사람이 정상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만든 인간은 그런 인간이 아니고 옷을 입고 다닌 인간을 내가 만든 적이 없다’ 는 이야기입니다. 원피스, 투피스, 레깅스 입고 다니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든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주제 파악이 안 되는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면서도 자기를 정상이라고 봐요. ‘나는 정상이다. 나는 정상이다.’ 뭐가 정상인데요? 정말 정상인지 발가벗고 성경 보라는 말이지요. 처음 창세기 2장을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리는 겁니다. 부활은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리는데 그 와중에서 예수님을 인간들이 떠밀어서 죽였는데 그 죽은 것을 하나님이 살려 놓았다고요. 그러면 그 부활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그 인간이 아니다.’
세상사에서는 ‘인간도 아니다’ 할 때 인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경에서는 총체적으로 무시를 해요. 그래서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복음이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 오늘 본문대로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오늘 본문대로 하면,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지 않는 자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도 아닌 사람의 예를 든다면 전두환이나 노태우, 이건희, 정주영, 이런 사람들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의사, 판사들, 이런 사람들이지요. 왜? 정죄를 받기 때문에. 제가 아까 창세기 3장을 이야기하면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그것이 더 부끄럽다’ 했을 때, 이것이 이 땅에서는 소통이 안돼요.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면서 소통이 안돼요.
그럼 저는 이렇게 합니다. ‘그게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표적입니다. 표면에서 올라오는 어떤 증거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자는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정죄를 받아서 지옥으로 갑니다’ 라는 말을 제가 같이 해도 역시 못 알아듣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표적으로서만 믿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는 것을 표적으로 보지 않고 기적으로만 보는 수가 있어요. 믿는 것을 기적으로만 보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믿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는 기적을 주셔야 믿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믿는다는 기적은 자기에게 소유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되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는 자기 자신만큼은 정상적인 태도라고 그렇게 간증하는 것이 되어버려요.
방금 무진장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표적이 되어야 하는데, 안 믿고 싶은데 뭔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믿으면 구원된다고 하니까 자꾸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신념이라고 합니다. 신념은 네 글자로 ‘하면 된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해서 안 되는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네가 믿나? 나도 믿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상대방이 믿는다고 같이 따라서 믿을 것 같으면 그것은 인간이 기적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됩니다. 사람이 기적을 만들어 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져서 피 흘려서 구원받는 대신 잔소리를 해 대야 되지요.
‘얘, 너 이렇게 살아. 이렇게 살아.’ ‘나 못해요.’ ‘할 수 있어. 너는 신념이 있고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야.’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법이 없어요. 표적으로 올라오는 신앙 외에 ‘나는 믿을 수 있다’ 하면서 되풀이해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안되면 되게 하라’ 고 합니다.
군대에서 많이 듣던 말이지요. 저도 군대에서 ‘안 되면 되게 하라’ 하는 말을 수십 차례 들었습니다. 결국 돼요. 되는데 그 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판입니다. 된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게 뭐가 되는 겁니까? 그저 된다는 말을 붙이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군대에서 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언젠가는 제대날짜가 온다는 사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요. 군대 운전병들이 속도를 안내는 이유가 하나 밖에 없어요. 속도 내서 빨리 부대에 들어가 봐야 빠따만 맞기 때문에 그저 천천히 세월아내월아 ‘그래도 제대 날짜는 온다’ 그것밖에는 생각 안 해요.
그러니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 그거 자기가 할 수 있는데 글쎄,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담요에서 이 털어내듯이 툴툴 다 털어내 버립니다. 다 가라. 표적이 아니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신념체제를 갖추어서 ‘하면 된다. 믿으면 믿을 수 있다.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 그런 것 천번 만번 하는 사람들 천 두 번째에 떨어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어째서 그런가? 부활은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데 되돌리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겁니다. 아내가 바깥으로 돈 벌러 갈 때 남편이 집안에 있으면서 미안스러우니까, 자기 딴에는 빨래 감 늘어놓은 것 갭니다. 아내가 나가면서 빨래 감 개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걸 개면서 하나를 더 생각하는 거예요. 개놓는 정도가 아니라 서랍에 넣어주기까지 해야 수월하지 않겠는가.
일마치고 늦은 시간에 퇴근한 아내가 그걸 보고 서랍 확 뒤집어 버립니다. ‘내가 시킬 것만 시켰지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켰겠는가? 이 속옷은 두 번째 서랍에 들어갈 옷이 아닌데 왜 두 번째 서랍에 집어넣었대? 하여간에 일거리를 만들어요.’ 우리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나를 손질해서 ‘이것이 믿음이다’ 하고 손질하는 그것, 그것은 주님 속상하게 하는 겁니다.
주님이 손대서 그걸 다시 다 바꿔 나가야 돼요. 그것은 믿음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구원하려고 자기가 자기한테 손댄 거예요. 그것을 저는 ‘부활을 믿는 척 한다’ 합니다. 신앙이 있는 척, 십자가를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표적은 척이 아닙니다. 왜? 내부에서 올라오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짜 내부에서 올라오는 표적과 자기가 덧대기로 꾸미듯이 위장해서 하는 신앙과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담요에서 이 털 때 툴툴 털어내듯이 하는 거예요. 그 털어내는 작업으로서 소위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아이고, 요새 교회 다닌다면서? 너 미쳤나? 왜 이카노?’ 자신이 스스로 만든 믿음은 세상에 나가면 견디지 못하고 언젠가는 그게 탈색됩니다. 견디다, 견디다 탈색됩니다. 목사가 복음전하면 교회 될 줄 알고 십자가 복음 전하는 것, 언젠가는 탈색되어서 ‘에라, 씨 ….’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게하시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맞는데 돈은 주고 가야지요. 그래야 교회가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께서 부활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잔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직접,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너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 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너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 하는 것이 하늘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면 그 뜻을 어디에다 심는가? 우리 속에다가 심어 넣는 거예요. 뭐를? ‘네가 이런 죄가 있는데 대신하여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부활안에 부활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어요.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났다’ 는 거예요.
전에 언젠가 했는데, 우리교회 교인들뿐만 아니고 다른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니까 로마서 4장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다(십자가에 죽었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살아나셨다.’ 결국은 우리가 범죄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평가도 십자가지신 예수님 본인이 하셨고 ‘너는 이미 구원받았다, 안 받았다’ 그 결정도 부활하신 주님이 결정하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표적이 되고 능력이 되어서 우리 속에 삽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들어오고 난 뒤에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우리가 아예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 십자가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십자가 이후의 부활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구나, 라는 것도 역시 우리 안에 흥건하게 들어 있는 겁니다.
그리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미 용서 받았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지 않아요.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참, 이게 무슨 뜻인지 내가 이야기 해놓고도 정말 어렵다! 이미 용서 받았기에 절대로 주님은 우리의 것을 용서하지 않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애가 아플 때 엄마가 약을 먹입니다. 애가 약이 아주 쓰다는 것을 알고 앙탈을 부립니다. 고함치고 발악하면서 안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알아요. 약을 안 먹으면 애가 더 아프다는 것을. 그래서 애의 양팔을 붙들고 엄마가 프로 레슬러처럼 애를 제압해서 종이로 깔때기를 만들어서 약을 아예 입에 털어 넣어 버립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뭐냐 하면 우리 속에 깔때기를 대놓고, ‘나는 정상이다. 나는 잘났다. 천당도 내 힘으로 갈 수 있다. 믿을게요. 믿어요. 십자가 믿습니다’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여기에다가 주님의 십자가능력이 아예 쓴 독약이 되어서 우리 속에 털어 넣듯이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내 안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 인생, 내 행함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도행전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1절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여기 보면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한 마음이 되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합니다. ‘이 재물은 내 것입니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말이거든요. 이게 뭐냐면 깔때기에 털어 넣은 거예요. 그러면 그 깔때기에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털어 넣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고 인간의 정상적인 자기능력이 있다면 이래 될 겁니다. ‘아이고, 목사님이 저리 수고를 하시고 교회도 돈이 필요할 것인데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지? 이정도 하면 되겠구나’ 라고 헌금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털어 넣은 독약이 없을 때, 인간의 이성으로 할 때 그 정도 나와요.
그 정도 나온 사람이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두 사람은 부부인데 하루아침에 다 죽었어요. 땅 판 값을 드리는데 얼마를 숨기고 드렸더니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 마음속에 사단이 가득해서 네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의 것을 마치 제 것이라’ 했다는 겁니다. 사람이 헌금을 하면 자기가 무척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하나님도 나를 정상적으로 볼 것이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를 하나 헌금을 하나 우리를 정상으로 안봅니다. 하나님이 정상으로 보는 경우는 우리 속에 깔때기로 털어 넣는 예수 그리스도만 정상으로 봐요. 우리 속에, 우리 목구멍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을 봐요. 사람이 자기 힘으로 헌금을 해버리면 그 헌금은 아무리 자기 집에서 교회로 이동을 해도 그것은 내 것이 돼요. 내 것!
그렇다면 사도행전 4장 31절의 말씀, ‘모든 것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라는 이 부활의 표적과 안 맞는 표적이 되어 버려요. 표적이 안 맞습니다. 죽은 사람은 모든 것을 시키는 대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서 3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죽은 해골을 살려내면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구도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는 거예요. 부활의 능력이 왔을 때 이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볼 때에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깔때기에 주의 능력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17절을 봅시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초대교회사에 보면 자신들의 집단이 진짜 하나님께서 만든 집단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진짜 한 사람 한사람 독을 마신 집단이 있어요. 결과는 다 죽었습니다.
우리교회는 독을 마시는 정도의 노골적인 것은 하지 말고 그저 뱀이나, 뱀이다! 뱀이다!, 뱀이나 한 수 백 마리 풀어놓아서 뱀에게 물려도 뱀독이 퍼지지 않는다는 그 정도를 보여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미리 면역주사를 맞든지. 신종플루 면역주사 같은 것 맞지 말고 손을 얹은즉 신종플루가 떨어져 나갔다든지 그래야 되지요.
부활의 능력이 오지 아니하면 어떤 행위를 하면서 그 행위를 내가 벌린 행위, 자기행위라는 그것이 떨어지지가 않아요. ‘나는 얼마동안 봉사했다’ 는 둥, 자기와 자꾸 떨어지지를 않아요. ‘이 교회는 내 교회야, 이런 인식, 내가 와서 부흥시켰다’ 이런 것.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것을 다 행하는 거예요. 그것을 행함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하라고 했으니까 다 해야지요. ‘하라고 했으니 다 해야지’ 이게 뭐냐 하면 백날 해도 자기 행함과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떨어지게 하는가? 점점 더 자기 행함으로는 행할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런 상황과 사태를 자꾸 만나게 해서, 스스로로 하여금 ‘나도 하려고, 하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그 인간들 더러워서 나도 이젠 손 뗐다’ 하는 그런 고백이 서슴없이 나오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정 반대였죠. 그렇게 일을 많이 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복음을 전했지만 나도 복음에서 잘릴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니까 ‘내가 뭘 하는 것은 그것을 하고 안하고의 상관이 아니고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상이었다. 이것은 천사도 부러워할 일이다. 어떻게 내가 이 귀한 복음을 알아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것으로 나는 다 받았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로 정죄함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서 나오는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나와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주께서 용서 없이 다 때려 부숴 버리는 거예요. 내 속에서 ‘내가 헌금했습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이 교회 키웠습니다’ 하는 이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내 자식 내가 키웠습니다. 내가 박사된 것 내가 알아서 했습니다.’ 모든 것, 모든 것을 다 부숴버려요. 그래서 그 부서질 때 마다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그 말 그대로예요.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두자로 이야기했어요. 천재 같아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선물이라고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하니까, 십자가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령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선물이라는 용어는 퍼뜩 눈에 띄어가지고 그것을 받은 척 하고 있는 사람들, 참 많이 봤습니다. 참 많이 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이면 주님 주신 것을 내놔야 할 텐데 꼭 선물이라고 하면서 뒤따라 나오는 것이 있어요.
선물이면 주님 주신 것이 나와야 하는데 주님 주신 것이 아니고 자기가 행한 것이 뒤따라 딱 붙어 있으니까, ‘아하, 선물이 아니었구나. 자기 과시용이었구나.’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콤팩트라고 하나요, 그 선물을 주니까 그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가 그걸 받고는 ‘이제부터는 이 남자가 나만을 사랑하는구나’ 하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참 좋아했어요.
‘세상에, 이 선물이 돈이 얼마 되지 않아도 나를 위해서 준비했으니 특별히 나를 좋아하는구나. 드디어 이 남자가 나에게 넘어왔구나’ 하고 좋아했는데, 그 남자하고 같이 어느 회사에 들어갔는데 어떤 비서가 하는 말이 ‘저, 과장님! 이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데 보니까 자기가 받은 것과 같은 선물을 내 놓거든요.
그 여자가 자기가 받은 선물하고 비교해보니까 색깔도 모양도 똑같은 것이더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여자가 큰 낙담을 했겠지요. 선물이라는 것은 차별성이 있어야 되고 똑같이 주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여기 15절을 봅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주님께서 하는 모든 일은, 안되는데 너희 힘으로 안 된다는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 정죄 받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눈으로 목격해서, 잘 들어보세요, 눈으로 목격해서 ‘아, 저런 사람은 아무리 판사, 의사, 정치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저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하신 표적이 내부에서 안 올라오기 때문에 저주받는 사람이구나’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선만 있으면 선이 선인줄 몰라요. 악이 있어줘야 선의 의미를 알고 선이 있어야 악이 의미가 있듯이 주님께서 하신 이 부활이라는 것은 모든 일에 다 똑같아요.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 힘으로 받는 것은 선물이 아니지요. 그것은 자기 힘의 대가성이지요.
주께서는 선물로만 표적으로 인한 선물로만 구원하기 때문에 뱀이 와서 안 물린다든지 독을 마셨는데도 해를 받지 않고 병이 걸렸는데 손을 얹어서 낫는 이 모든 것이 그 때 그 때 마다 발생되는 하나님의 부활하신 살아있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어떤 능력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만약에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정죄함을 받지 않는 사람의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이 말이 어려운데 쉽게 합시다.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참 애매하게 할머니도 아닌 아줌마도 아닌 한 60대정도 되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산책을 해요. ‘국산 콩을 달라고 하는데 콩 파는 아줌마가 중국 콩을 내놔서 문제가 있었다’ 하는 내용입니다. 아, 심오하죠.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말했는데 듣는 내가 심오했어요.
뭐냐 하면 국산 콩을 달라고 했을 때 중국산 콩을 내놓는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에 묻는 내가 나쁘지요. 국산 콩을 달라고 할 때 국산 콩을 주면 아무 문제없지요.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국산 콩을 달라 할 때 중국 콩을 안주고 국산 콩을 줘버리면 그 사람은 국산 콩을 받는 그 순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 간다’ 하는 그것이 눈에 안 띄잖아요.
지금 그 사람이 국산 콩 달라고 해서 국산 콩 사버리면 옆집 사람이 지옥 간다는 그것이 문제꺼리로 안다가온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야 돼요. 국산 콩을 달라 할 때, 중국 콩을 내 주면서, ‘당신은 국산 콩을 주면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국산 콩 먹어도 지옥가지요. 왜? 예수 안 믿기 때문에.’ 이게 붙어 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밖에 생각 안하기 때문에 내가 국산 콩을 원해서 국산 콩을 얻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문제가 없다고 하는 그 순간에서도 부활하신 주께서는 어떻게 이해를 하느냐 하면, 국산 콩을 가졌더라도 지옥에서 천국 가는 그 문제는 아직까지 안 풀렸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나 국산 콩 달라’ 할 때 ‘국산 콩을 가져도 이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왜? 국산 콩 받은 것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그 문제까지는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문제 있음과 없음을 예수님의 부활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내가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국산 콩, 자꾸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니까 나한테 문제가 없으면 세상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보는 겁니다. 교회 부흥되면 아무 문제없고, 교회 헌금 잘나오면 문제없고, 교인 수 늘어나면 문제없고, 자꾸 ‘문제없어~, 문제없어~’ CF노래처럼 문제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불신자한테나 그렇게 하겠지만 신자한테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것이 이 일로 인해서 ‘나는 이미 주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그 은혜로 구원받았고 아직도 이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정죄함을 당한다’ 라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식으로 문제를 주님의 전체문제로 참여시키는 일들을 벌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마가복음을 보면서 ‘나도 독사에게 물려도 독이 안 퍼져야 구원을 받은 것일까?’ 하고 또 자기생각, 독이 없으면 문제없고.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 열 명을 예수님이 다 낫게 해줬어요. 그 열 명중에 아홉 명이 문둥병이 없어져 버리니까 ‘문제없어~, 문제없어~’ 라는 식으로 했어요.
‘문둥병을 고치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낫게 해 줬어. 문제없어~, 문제없어~’ 그런데 그 열 명중에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문제 있는 것으로 본 거예요. 문제 있는 것으로 보고 예수님께 와서 ‘예수여, 저 죄인입니다. 그 전까지는 내 문둥병 낫는 것이 내 문제없음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내가 병 고쳐야 되겠다는 이것 자체도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고 나쁜 인간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짜 정상적인 인간은 예수님이 보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게 진짜 문제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 죄 많은 나의 문둥병을 낫게 했는가? 바로 십자가의 대신 죽으심, 십자가의 은혜를 알 때, 피의 효과를 알 때, 그게 진짜로 죽어서 구원되는 진짜 천국 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한 거예요.
그래서 아홉 명은 문둥병 나은 것으로 그냥 가버렸고 한명은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한테 왔습니다. 어제 제가 소록도에 다녀왔는데 거기 갔을 때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것을 느꼈습니다. 진짜 누가 문둥병환자인지?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멀쩡한 손을 품에 넣어보라고 해서 넣어보니까, 그 멀쩡한 손이 빼보니까 문둥병이 되었어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계시의 표적에 걸리면 진짜 자기 모습이 엑스레이 찍히듯이 찍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문둥병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안목, 그 안목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속에 차오를 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발생하는 발생의 역사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독을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병 고칠 수도 있을 때, 그 어떤 것도 내 속에서 주님께서 하셨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내 능력이 아닌 것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표적만 증거 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런 일이 나타나야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믿고 주 앞에 참여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하는 이 복음이 복음답게 깨끗하게 전파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끝내면서 다시 1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마가복음 1장 시작할 때부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만 끝날 때까지 일이 쉬지 않고 일어나요. 복음이 뭐냐, 복음이 뭐냐, 복음이 뭐냐 이 말이지요. 복음은 1장에 보면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복음은 없지요.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가 뭡니까?
‘아, 내가 옷을 입고 있는 이것이 도리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처음 인간은 벌거벗고 살았는데 이미 우리는 문제되는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우리 하체를 가리고 있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습니까? 그렇다면 그 인간은 비정상이에요. 바로 그러한 비정상인 요소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한 이미 우리가 용서 받았기에 주께서 우리를 평생토록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평생토록 용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리고 부수고 강탈하고 빼앗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깔때기 속으로 들어온 예수님의 십자가 대신 죽으심, 죽었다가 살린 그 구원의 능력, 예수님 당사자가 살아나신 그 부활의 능력, 되살아남의 능력이 여러분의 모든 죄와 저주에서 여러분을 부활시킬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가복음을 끝내면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은혜를 감사합니다. 믿고 싶어서 믿었다면 우리는 결국 탈락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아니 주님께서 그렇게 탈락시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셨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늘 평생토록 주님한테 얻어맞는 기쁨, 말씀의 쓴맛을 느껴야 되는 그러한 행복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축복과 이런 부활의 능력을 이제부터 복음으로만 자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