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멸망의 가증한 것(막13;14-23)이근호090614

아빠와 함께 2013. 7. 23. 06:33

 

본문 : 마가복음 13장14-23절
제목 : 멸망의 가증한 것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이근호 09-06-14 13:39 
멸망의 가증한 것

2009년 6월 14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3:14-23

(막 13:14, 개정)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막 13:15, 개정)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막 13:16, 개정)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막 13:17, 개정)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막 13:18, 개정)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막 13:19, 개정)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 13:20, 개정)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막 13:21, 개정)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막 13:22, 개정)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막 13:23, 개정)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예수님께서는 세상 곳곳에 배치를 멋있게 하십니다. 군데군데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치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종말이 벌어지는 것을 기쁘게 모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예수님 자신이 계획하신 계획서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 세상을 분주하게 사는 인간들은 이런 안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날마다 우왕좌왕합니다. 그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같은 인간들의 주장들 뿐입니다. 하지만 동네 개들이 아무리 많이 움집해도 개소리 밖에 안들리듯이 종말의 안목이 없는 인간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개같은 인간의 시선이나 안목만 집결될 뿐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세상 안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봤을 때, 인간은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없었던 적이 있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없었던 나를 있게 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 작업 때문입니다. 더나아가서 하나님은 ‘천국에 없는 인간’을 미리 ‘없는 존재’로 간주하십니다.

달리 말해서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 작업을 마무리 하시고 “거룩하시다”고 했는데 이 하나님의 거룩이 묻혀있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있어도 없는 겁니다.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안개’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밤안개’입니다. 낮이 되면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의 틀과 원칙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창세기 1장부터가 아니라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즉 “나는 있고 나는 나고, 나는 단지 보다 신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따름이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을 ‘있는 존재’로 보겠다고 우깁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모든 것은 그 사람에게 적이 되고 원수가 됩니다. 즉 사람들의 심성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마음이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누구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입니다. 바로 이것에만 궁극적으로 예민해져 있습니다. 이러니 인간에게 종말의식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멸망의 가증한 곳’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자신의 '있음‘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즉 신과 인간이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 쟁탈전을 벌리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종말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접근 못해야 자신은 '영원히 있는 존재’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신의 창조 원리를 전개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5의 말씀, 즉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의 구조로 밀어붙이게 됩니다. 어두움이 있어야지만 새 날, 다음의 날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자신의 ‘있음’에만 신경 쓰기 때문에 현 자신이 있는 곳이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인정못하겠다고 나오게 됩니다. 어두움은 곧 새 날을 위해서 망해야 되고 없어져야 합니다. 이 어두운 세계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헛짓이고 어두움 세계를 위한 자아에 대해서 투자하는 것도 헛짓입니다.

이 어두운 세계에 말둑을 막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왕좌항할 뿐입니다. 자신의 소유분을 건져낼 여유도 없습니다. 이처럼 종말 현상이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다 뭉개버리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의식이 없는 자들이 신의 말씀을 어떻게 도용하고 이용하게 됩니까?

사람들의 죄악된 본성은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내가 복수하노라’는 식으로 토해놓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성경 말씀에 종말이나 심판의 내용이 나오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살 궁리를 하게 됩니다. 이 방식이 바로 자신들이 납득이 되는 종말 프로그램을 짜게 됩니다. 즉 ‘이러이러한 식대로 하시면 마지막 때도 살아남습니다’라는 비법을 익히기에 매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지식이나 이해에도 인간이 자력으로 심판에서 빠져나갈 묘책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늘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를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와 그 시는 너희의 알바 아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의 징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짜 성전의 등장입니다. 성전이란 하늘과 땅이 통하는 하늘의 문 같은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곳이 하나님의 복과 구원이 제공되는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곳은 악마의 아지트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고정된 성전이 아니라 ‘움직이는 성전’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헤롯의 대성전을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다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사형당해야 했습니다. 성전을 가짜라고 하신 겁니다. 가짜는 ‘가짜 있음’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틀어막아져 있게 됩니다. 진짜 마지막 때의 징후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나타납니다.

즉 무엇이 하늘과 땅이 통하는 지점이냐 하는 겁니다. 참으로 통하는 지점이 성립되면 다른 모든 공간은 당연히 소멸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세상 보기입니다.  ‘그 날’이라는 시간적 요소는 ‘그 곳’이라는 장소적 요소와 연관이 있습니다. 특수 공간이 앞으로의 역사를 결정짓습니다.

그런데 ‘그 ‘최후의 날’이 ‘누구를 위한’ 최후의 날이며 ‘누구 좋아라’는 최후의 날입니까? 자기 살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내세우는 ‘최후의 날’을 말하는 자를 멸망시키는 날이 그 날이라고 한다면 믿어지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최후의 날’을 언급하시지면서 인간들을 배제시키십니까? 그것은 어두움에서 새 날을 넘기는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는 없고 예수님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용서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죄용서 받기 위해 복음을 이용하고서는 곧장 자기만의 고유 영역을 따로 장만해서 그 속으로 칩거합니다. 숨어버립니다. 그래놓고서 죄 용서받았으니 걱정없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여전히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악마적 안목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방식은 오로지 ‘없음’에서 ‘있음’입니다. 즉 죄용서가 아니라 아예 구원된 인간들은 더 이상 ‘나의 것’이라는 것은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전환되게 하십니다. 더 이상 나만의 것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즉 성도 안에서 항상 ‘종말’입니다. 자신을 없도록 치는 ‘종말 현상’이 일어나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멸망의 가증한 곳과 성전은 같은 장소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요한계시록 11:7-8에 보면,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성도를 늘 처벌하고 용서하시는 그 장소, 십자가 능력이 벌어지는 그 성전이 바로 종말을 보이는 유일한 곳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를 늘 죽이시고 늘 살려서 아예 우리 자신의 것이 없고 예수님의 것임이 늘 확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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